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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임 수 만 문학박사 학위논문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7. 3. 7. 10:28
문학박사학위논문


유치환 시의 낭만적 특성 연구
--낭만적 아이러니를 중심으로--



2004년 8월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국문학 전공
임 수 만
국문초록

본고에서는 청마 유치환의 문학에 나타나는 모순적 양상의 내적 관련성을 추적하기 위해, ‘낭만적 아이러니’라는 개념을 방법론적 틀로 삼았다. 낭만적 아이러니는 그 자체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는 것으로 평가되어 왔으며, 실제로 파괴와 창조의 무한한 연속에 의해, 예술가들에게 실재의 충만함에 참여할 수 있게 하고 인식을 확대하게 하는 긍정적 기능을 하기도 하는 반면, 자의식적 소용돌이에 빠져 부정적이고 니힐리스틱한 경향들이 전경화될 수도 있는 것이다.
청마가 이러한 낭만적 아이러니에 기운 이유는 우선, 인간을 모순적 존재로 보는 그의 인간관, 다음으로 그가 살아간 시대 자체가 이율배반적인 아이러니적 시대였다는 점, 끝으로 그의 문학관, 즉 본질 추구의 문학적 태도 자체가 아이러니적 발화 양식을 요청하였다는 점에 있다.
Ⅱ장에서는 청마 시의 아이러니적 구조와 그 핵심 요소를 검토했고 또한 그러한 구조를 가능케 한 시인의 시적 인식과 열망의 근원을 탐구해보았다. 구체적으로 Ⅱ장 1절에서는 청마 시의 기본적 모티프가 되고 있는 ‘바라봄’의 양상을 통해, 아이러니적 관찰자로서의 시인의 분열상을 고찰하였다. 또한, 바라보고 재현하는 행위 속에서 부닥치게 되는 아이러니적 사태 또한 청마 시에서 ‘예술이자 인생’인 양가적 존재로서의 작품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설명해 보았다. Ⅱ장 2절에서는 우선 전통적 ‘정한’의 아이러니적 구조를 분석했으며, Ⅱ-2-1항에서는 청마가 낭만적 아이러니에 기운 근원적 이유를 탐색하기 위해 청마 시에 나타난 ‘유년’의 이미지에 주목해 보았다. 청마의 유년시절의 이미지에 나타난 ‘분리’, ‘죽음’의 이미지가 ‘낭만적 영혼들의 전형적 경험’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그러한 ‘균열’이 어린 청마의 영혼을 사로잡아 그의 시창작에서 지속적으로 분출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상상력에 의한 통합과 아이러니적 ‘거리’의 인식이라는 양극단의 결합을 추구하던 낭만주의의 모순적 면모를 여기서 확인할 수 있었으며, 이와 같이 ‘낭만적 아이러니’의 구조에서 발생되는 특수한 ‘에스프리’가 청마 시를 추동시킨 근본적인 힘이었음을 규명하였다. Ⅱ-2-2항에서는 ‘존재론적 모순’에 대한 시인의 인식이 대표적으로 형상화된 「기빨」을 분석하면서 인간의 모순성에 대한 청마의 인식이 그의 전 시기를 아우르는 것이었고, 이러한 인간관에서 아이러니적 시선이 배태되었음을 밝혀보았다.
Ⅲ장 1절에서는 ‘자학’적 시편들과 ‘사회비판시’를 중점적으로 고찰하였다. 우선 1항에서 자기 자신의 아이러니에 스스로 희생자임을 깨닫게 된 낭만적 아이러니스트로서의 청마의 면모가 ‘자학’적 시편들에 잘 드러나 있다고 보았다. 다음으로 2항 ‘사회비판시’에서는 청마의 사회시가 이분법적 구도에 토대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아이러니적 시선에 의해 역동화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는 그의 전쟁시를 비롯한 사회시가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시적 성취를 이룬 바탕이기도 하였다. Ⅲ장 2절에서는 청마의 초월지향적 시편을 중점적으로 고찰하였다. 양가성에 대한 아이러니적 관조를 통해, 그 거리와 간극에 대한 인식이 클수록 초월적 열망과 그 열락은 강렬해 진다는 점에서 청마의 ‘자연시’와 ‘연시’는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Ⅲ-2-1항에서는 우선, 청마의 ‘자연시편’을 ‘바람’, ‘길’ 등의 이미지와 ‘여행’ 모티프 분석을 통해 고찰해보았다. 이들은 내적 분열과 방황, 그것을 무화시키고자 하는 열망을 동시에 표현하는 양가적 이미지들이다. 이는 신화적 ‘재생’이미지와 통하는 것이며 해방(재생)을 위한 억압(죽음)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자학’적 구조와 관련됨을 드러냈다. Ⅲ-2-2항에서는 그의 ‘연시’를 고찰해 보았다. 상상적 열망과 아이러니적 각성의 긴장된 대립과 겹침 속에서 ‘환몽’이 나타난다. 이별의 해소, ‘거리’ 무화의 순간은 환몽으로 올 뿐이지만 그만큼 서정적 긴장도가 높은 작품들이 산출된다.
Ⅳ장에서는 청마 문학의 문학사적 의미를 묻기 위해 ‘연속과 단절’의 관점에서 통시적이고 공시적인 비교 작업을 했다. 우선(4-1-1), ‘유기적 시론’을 중심으로 우리 시문학에서의 낭만적 전통에 대한 검토를 통해 청마문학이 생성된 문학사적 기반을 개관했고, 청마 나름의 특성을 검출하기 위해서는 ‘상상력과 아이러니라는 양극단의 결합을 추구’하던 쉴레겔의 ‘낭만적 아이러니’ 개념이 필요함을 말하였다. (4-1-2)에서는 초기낭만주의의 비판적 면모를 지속적으로 견지하면서도 동시에 민족적 정서(‘정한’)의 맥락을 심화시켰다는 점에서 그 나름의 문학사적 지위를 갖는 것으로 보았다. 4-2-1항에서는 30년대 문단 상황을 ‘주체의 분열과 초극’의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끝으로(4-2-2), 식민지 시대의 시문학파나 문장파, 그리고 생명파, 청록파 등에서 해방 후의 ‘문협파’에 이르는 ‘순수시’의 계보에서 청마가 차지하는 문학사적 의미에 관해서 살펴보았다. ‘낭만적 아이러니’의 비판적 부정정신을 시금석으로 문장파, 청록파로 이어지는 보수적인 순수시의 진영과 청마의 문학이 갖는 일정한 ‘거리’를 확인할 수 있다. 한 연구자의 지적처럼 서구 낭만주의의 가장 근원적인 충동의 하나가 ‘형이상학적 전율’이었고, “한국의 낭만주의가 결하고 있는 것은 이 전율, 사물의 핵심에까지 꿰뚫어 보고야 말겠다는 형이상학적 충동이었다”라고 한다면, 청마의 문학은 그 누구보다 이에 가까이 간 것으로 판단되었다.




주요어 : 낭만적 아이러니, 거리, 바라봄, 자학, 부정, 초월
















































목 차

<국문초록>
Ⅰ. 서론 1
1. 연구사 검토와 문제제기 6
2. 연구방법론 17
Ⅱ. 아이러니의 구조와 내적 근거 31
1. 아이러니스트의 관조와 ‘거리’ 31
2. 균열과 모순의 세계인식 52
1) 回歸와 유년의 의미--분리와 균열 56
2) ‘旗빨’의 의미--존재론적 모순 68
Ⅲ. 아이러니의 否定性과 그 指向 76
1. 부정으로서의 아이러니 83
1) 자기부정--비극적 자기학대의 정서 83
2) 타자부정--사회비판시 94
2. 거리의 止揚과 초월 105
1) 자연시와 신화적 재생 107
2) 환몽과 에로스의 연시 116
Ⅳ. 문학사적 맥락에서 본 유치환의 아이러니 123
1. 우리문학의 낭만주의와 청마 문학의 특성 124
1) 시문학에서의 낭만적 이데올로기의 맥락 125
2) 청마의 낭만적 아이러니--20년대 낭만주의와의 비교 131
2. ‘생명파’와 청마 시의 문학사적 의미 139
1) 30년대 문단의 지형도--주체의 분열과 초극 문제 139
2) ‘순수시’ 계보에서의 청마 시의 의미 147
Ⅴ. 결론 150
<참고 문헌> 156
167
유치환 시의 낭만적 특성 연구
--낭만적 아이러니를 중심으로--


Ⅰ. 서론

청마 유치환(1908-1967)은 청소년기의 상당한 습작기를 거쳐 1923년 청마는 형 동랑이 주도한 ‘토성회’에 참여하며, 1925년에는 ꡔ토성ꡕ이라는 동인지를 낸다. ‘토성회’의 회원 대부분은 통영의 친구들로서 박명국, 김성주, 최두춘, 장허, 유치환 외 7,8명이었다(문덕수, ꡔ청마유치환평전ꡕ, 시문학사, 2004, p.74). 참고로 청마가 참여했던 문학 동인 및 동인지를 일별해 보면 다음과 같다. ‘토성회’(23년에 참여, 25년에 ꡔ토성ꡕ발간, *통영), ‘통영 참새 모임회’(ꡔ참새ꡕ2권 1호, *통영, 1927), ꡔ소제부 제1시집ꡕ(*통영, 1930.9), ꡔ생리ꡕ1집(*통영, 1937.7), ꡔ생리ꡕ2집(1937.10), ꡔ등불ꡕ(*진주, 1946.8), ꡔ낙타ꡕ(1949), ꡔ시와 시론ꡕ(*대구, 1952), ꡔ청맥ꡕ(*경주, 1955), ꡔ윤좌ꡕ(*부산, 1965) 등이다. 청마의 동인지 활동은 따로 검토할 필요가 있을 만큼 지속적이고 인상적이다.
그의 나이 24 세이던 1931년 시 「靜寂」(문예월간2호, 1931.12)을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한다. 이후 불의의 사고로 운명하기까지 10여권의 시집을 발간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시를 썼고, 미당 서정주와 더불어 ‘생명파’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詩史에 기록되어 있다.
‘생명파’ 또는 ‘인생파’라 불리는 그들 신세대 시인들의 문학에 대한 절대적 열정은, 삶과 시에 대한 일원론적 태도, 반계몽적이고 낭만적인 주체적 자세로 나타났고, 문학에 있어서 어떠한 외적인 규범도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들 신세대를 대표하는 평자인 김동리는 「신세대의 정신」에서 “개성과 생명의 究竟추구! 이것이 이 땅 문단 <신세대>의 문학정신” 김동리, 「신세대의 정신」, ꡔ문장ꡕ2권 5호, 1940.5, p.83
이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이와 같이 1930년대 중반을 전후하여 한국 현대시사에는 새로운 문학적 경향이 대두하고 있었다. 1930년대 초기까지의 시문학파나 모더니즘 운동과는 달리, 이들 시인들은 자연과 인생의 究竟的 탐구에 본질을 둔 창작을 하였으며, 이는 국내외적인 불안사조에 맞서 주체적인 반성을 통하여 새로운 문학적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1930년대의 ‘신세대 논쟁’은 “민족주의도 계급주의도 새로 등장한 파시즘 앞에 전면적으로 노출되었던”(김윤식, ꡔ미당의 어법과 김동리의 문법ꡕ, 서울대학교출판부, 2002, p.99) 시대적 위기 상황 속에서의 한국 문학인들의 고민과 방향 모색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지평의 소멸, 계몽주의적 방향성이 상실되고, 역사성이나 사회성을 수용할 수 없었던 시대적 상황의 변화는 생명파 등장의 커다란 배경이 되고 있었던 셈이었고,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가 문학의 중요한 주제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한 문학사적 요청에 부응했던 것이 ‘생명파’ 시인들이었으며 청마 유치환이 시사의 전면에 등장했던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이들의 문학적 활동은 종래까지 한국 현대시가 모색했던 사회(생활), 자연, 문명 등으로 三大別되는 주제에 생명(인생)의 문제를 추가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물론 이전의 시들이 인생 문제를 전혀 도외시했던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인간을 생명의 본질, 본능의 조건 그 자체로 인식코자 했던 것은 이 유파의 공헌이라고 보아야 한다.” 오세영, 「생명파와 그 시세계」, ꡔ20세기 한국시 연구ꡕ, 새문사, 1989, pp.206-208
생명파 시인들은 ① 모더니즘의 문명 의식, ② 계급주의에 나타난 사회성, ③ 순수 서정시의 언어 기교와 감각성 등과 같은 종래의 제경향 오세영, 위의 책, pp.214-5
과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문학적 탐색을 해나갔던 것이다.
특히, 청마는 시적 기교와는 거리가 먼 자세로 시를 대했다. ‘나는 시인이 아니다’라고 그가 반복적으로 말했던 일 또한 그러한 문학적 태도에 기인한 바 크다. 하지만 이것이 시를 소홀히 대한 것으로 해석될 수는 없다. 청마는 「詩에의 懷疑」(ꡔ대구매일신문, 1955)에서 “가시적인 것, 가변적인 것을 넘어서” “핵심되어 있는 不動的인 것, 불변적인 것을 포착하여다가 시로 구체화하여야 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청마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영원이라든지 무한에 대한 갈망의 문제, 즉 본질적인 것”이었으며, 그러한 문제의식은 그 목적지점에 이르기 위한 무한한 道程을 예견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詩精神이란 말을 많이 쓴다. 이 시정신이란 다름이 아니라 인간의 점유하는 그 시간의 위치와 날으는 화살의 그 不動의 본질과 사이의 唯一無二 絶對(短) 距離를 말함에 불외한 것이다. 이 절대 거리를 통하여 본질을 포착함이 詩인 것이며, 이것만으로써 시의 존재하는 가치가 있는 것이다.(유치환, 「시에의 회의」 일부분)

청마에게 시정신이란 <인간과 본질(영원,무한) 사이의 절대(短)거리를 통해 본질을 포착>하는 것이다. 청마는 여기서 ‘절대 거리’에 ‘短’이란 글자를 붙여서 ‘절대(短)거리’라고 표현해 놓고 있는데 이는, 거리를 최소화하고 無化하는 것이 자신의 문학적 행위가 목표하는 것임을 밝히면서도 동시에 소멸되지 않는 ‘거리(간극)’에 대한 자의식을 견지하고 있는 것 즉, 낭만적 아이러니 낭만적 아이러니는, 모순과 모순의 복합체로 대상(문학,인생,세계)을 바라보는 세계관으로 정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오세영, ꡔ문학연구방법론ꡕ, 시와시학사, 1993, p.210, p.323참조). 하지만 M.H. Abrams가 그러하듯이, 예술적 환상의 구축과 파괴라는 창작기법의 측면에서 이를 정의하기도 한다(이명섭편, ꡔ세계문학비평용어사전ꡕ, 을유문화사, 1987, p.321). 본고에서는 세계관이자 구조원리로서 이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의 비극적 인식의 표현이다. 거기에서는 무한한 아이러니의 연속이 이어지며, 끊임없는 역기저 슐레겔, 폴드만, 비숍 등의 글을 참조하면 parabasis(*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역기저’라고 번역하고 있다)는 ‘확신과 자기모순 사이의 긴장’, ‘하나의 담화의 개입, 중단, 분열’ 등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Ⅰ-2 연구방법론 참조.
, 즉 정립과 반정립의 무한한 교환체계가 작동한다. 폴드만은 ‘정립과 반정립’이라는 동시적 현존으로부터 아이러니가 필연적으로 발생함을 밝힌 바 있다(자기모순의 아이러니). “자아(the I), 언어는 A를 정립하고 동시에 -A를 반정립한다” 폴드만, "The Concept of Irony", Aesthetic Ideology, Univ. of Minnesota Press, 1996, pp.171-3
질문과 대답, 열정과 회의, 창조와 파괴, 나아가기와 되돌아오기의 끊임없는 순환 속에서, 시인은 자기발견이 가능하기를 희망한다.

시를 쓰고 지우고, 지우고 또 쓰는 동안에 절로 내 몸과 마음이 어질어지고 깨끗이 가지게 됨이 없었던들 어찌 나는 오늘까지 이를 받들어 왔아오리까. (ꡔ청마시초ꡕ의 ‘序’)

청마는 자신의 첫 시집 서문에 위와 같이 ‘淨化’라는 것으로 자신의 문학적 행위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자신을 완수하고 동시에 자기 자신을 벗어던질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 “자기 도취인 동시에 자기 비판인 것”으로 자신의 창작을 소개했던 지드의 입장과 먼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필립 르죈, ꡔ자서전의 규약ꡕ, 문학과 지성사, 1998, p.253 참조. 또한 ①청마가 지드 전집을 읽었다는 사실(청마가 지드 전집을 읽고 있었다는 것은 이영도와의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1952년 7월 23일자 편지에서는 지이드의 ꡔ지상의 양식ꡕ이, 8월 3일자 편지에서는 ꡔ콩고기행ꡕ, 8월 24일에는 ꡔ좁은문ꡕ, 9월 1일 편지에는 지이드 전집 4권에서의 ‘나태’에 대한 상념이 언급, 인용되고 있다.), ②지드처럼 청마도 지속적으로 일기와 편지 형식의 글쓰기를 했다는 점, ③문학 작품뿐 아니라 그러한 내밀한 글쓰기 또한 두 작가에게 있어서 ‘정화’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는 점, ④“그 글들이 언젠가는 출간될 것임을 생각했을 뿐 아니라, 그 작품들이 (*자기 작품의--인용자) 총체적인 체계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을 알고 있었던 것”(르죈, 같은 책, pp.256-7) 등에서 지드와 청마는 공통된 영역을 가지며, 따라서 지드의 문학적 면모들은 일정 부분 청마 문학을 관찰하는데, 유용한 빛을 던져주고 있는 듯하다. 르죈은 지드의 작품이 갖는 힘이자 동시에 약점을 그의 ‘자전적 공간’을 구성하는 의식에서 찾고 있다. “‘자전적 공간’은 18세기말 이래로 많은 작가들이 실험했던 현실이었다. 자신을 투기하고 고백하기, 꿈을 꾸고 스스로를 정화하기, 그리고 허구의 이야기들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기……루소 이후 작가들은, 얼마나 의식적이었는가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바로 그런 것들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자아가 좀더 자유롭게 드러날 수 있는 일기나 고백록, 에세이 역시 쓰기도 했다.”(르죈, 같은 책, p.279)
이렇듯 역기저의 교환 메카니즘은 긍정과 부정의 끊임없는 交叉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이러한 구조들 속에서 반성적이고 자의식적인 아이러니가 현대적 예술가들에게 자리잡는다. 조성훈, 「아이러니의 제한경제」, 중앙대석사, 1998, p.36참조. 또한 위의 인용문에서 청마가 했던 화살의 비유와 관련된 다음의 글도 참조할 것. “무질은 이 징후적이고 순간적인 포착이 지닌 의미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렇게 변화하는 현상들 속에서 정지를 발견하려는 것은 분수 줄기에 못 하나를 박는 것처럼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마치 아무일도 없던 것처럼 보이는 일 안에는 어떤 것이 있기 마련이다.>”(안병률, 「로베르트 무질 <특성없는사람>연구-에세이적 형식을 중심으로」, 연세대석사, 98, p.45) “무질의 에세이즘은 이처럼 지식화된 사회에서 예술이 추구해야 할 가능성을 탐구한다.”(안병률, 같은 논문, p.53)
이것은 또한 청마 문학의 핵심적 구조일 것이다. 이상과 현실의 날카로운 인식, 對極的 거리감이 자아내는 비극적 황홀감 등은 모두 아이러니적 발화 혹은 사유방식과 깊이 관련된 것으로 판단되며, 청마의 시적 성취와 그 한계는 이러한 구조에 淵源하는 것이다.
시보다 인생을 중시하는 청마의 시적 태도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러기에 시인이여/ 오늘 아픈 인생과는 아예 무관한 너는/ 예술과 더불어 곰곰이 영원하라”. 유치환, 「시인에게」 일부분, ꡔ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ꡕ, 동서문화사, 1960
그가 서정주 등과 더불어 ‘생명파’로 분류되는 것 ‘생명파’ 혹은 ‘인생파’라는 용어 문제와 관련해서는 지금까지 두 가지 의견이 제기되어 왔다. 첫째는 서정주의 글에서 ‘생명파’와 ‘인생파’라는 말이 처음 나타난다는 견해인데, 김윤식의 「청마론의 행방」(ꡔ심상ꡕ, 75.1, pp.14-15)에서는 서정주의 「조선의 현대시」(ꡔ문예ꡕ, 1949.2)와 조지훈의 시사요약(「한국현대시사의 관점」, ꡔ조지훈전집ꡕ3, 일지사, 1973) 등이 거론되었다. 둘째는 생명파란 용어가 김동리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는 견해이다. 오세영은 ꡔ20세기한국시연구ꡕ(새문사, 1989, pp.206-208 참조)에서 김동리의 평론 「신세대의 정신」(ꡔ문장ꡕ, 1940.5)에 주목하고, 당대의 평론으로서 동시기의 시단을 분류하는 항목으로 “생명파적, 윤리적 경향”이라는 항목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김동리의 글이 ‘생명파’라는 용어의 첫 사용처라고 지적한다. 또한 유파명의 통일을 위해서 오세영은, 미당 스스로 ꡔ조선명시선ꡕ(온문사, 1949)의 해설문(「현대조선시약사」)에서 그 목차에는 인생파라는 용어를, 본문에서는 생명파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혼란을 일으켰지만, ꡔ한국의 현대시ꡕ(일지사, 1973, p.22)에서는 ꡔ일본현대시사ꡕ에 등장한 ‘인생파’와 혼동할 우려가 있다 하여 ‘생명파’라는 호칭으로 불러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신세대 논쟁’과의 관련성 속에서 생명파 출현의 문학사적 위상을 고려하고 있는 본고의 관점에서는 김동리의 평론에 등장한 ‘생명파’라는 용어가 문학사적 의미에 부합되는 용어의 출처로 강조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도 ‘삶[生]’이라는 보다 큰 가치를 추구하는 시작 태도에서 비롯되었으며, 미당과 비교되는 부분도 바로 그 곳, ‘시보다 인생’이라는 청마만의 문학적 고집에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청마 유치환의 시는 그가 미당과 더불어 ‘생명파’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지목되어 왔으면서도, 비교적 높게 평가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생명파의 대표적인 두 시인인 미당과 청마에 대한 연구는 그 양과 질 면에서 미당에게 쏠려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엄밀한 수치는 아니지만 동일한 기준에 의해 목록을 정리한 결과, 미당은 1000편이 넘고, 청마는 500편이 안되었다(중복 수록된 것을 추려내면 이 수치는 많이 줄어들 것이다). 또한 미당의 경우에도 그렇기는 하지만 청마의 경우에는 더욱 더 짧은 회고담, 인상기 등이 많았고, 논의의 밀도면에서도 미당론에 못미치는 것으로 판단한다. 비록 청마가 일찍 타계한 영향도 있겠지만, 그가 남긴 작품의 양이나 질이 미당에 못지 않은 것이라 전제한다면(이를 규명하고자 하는 것이 본고의 목표다), 이러한 연구물에서의 차이는 편향적인 것임에 분명하다.
이에 대해 김현은 “해방 이후에 그와 대척되는 자리에 서 있었던 서정주가 시단에 압도적인 영향을 발휘하고 있었으며, 한자가 섞인 고풍의 어투를 심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한글세대의 수가 늘어났다는 사실에 기인하고 있다.” 김현, 「<기빨>의 시학」, ꡔ유치환:한국현대시문학대계15ꡕ, 지식산업사, 87, 박철희 편, ꡔ유치환ꡕ, 서강대출판부, 1999, p.220에서 인용.
라고 그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다. 한자어의 남용은 청마의 관념적 시세계에 접근하기 어렵게 하는 중요한 요인의 하나라는 것이며, 여기에는 표현 문자의 선택(한글/한자)을 둘러싸고 당대의 문학 場 내에서 벌어졌던 투쟁의 한 양상이 암시되어 있다. 또한 만약 우리가 문학 장 내에서의 투쟁을 염두에 둔다면, 청마 시의 아이러니적 측면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라는 대립적 해석과 평가의 체계는 그러한 투쟁과정 속에서 부정적인 것으로 기울어져 왔음을 발견할 수 있다. 1954-5년경의 서정주의 ‘한글시론’과 청마의 한자에 대한 고집은 미묘한 갈등 양상 속에 있었다. 문덕수의 다음 글을 참조할 것. “청마와 미당과의 우정은 시에 대한 견해의 차이만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서로 존경하는 사이였다.....<생경하거나 관용화된 한자어를 뽑아 버리고 그 자리를 우리말로 채우는 데서 시의 첫 착수를 삼아야 하는 한글시의 표현도>에도 마음을 써 달라는 것이었다.(*서정주 외 ꡔ시창작법ꡕ(선문사, 1955), pp.128-135) 그러나 생경하고 관용화된 한자어는, 그 후에도 청마는 의도적으로 사용했고, 그것으로서 도리어 다른 시인과의 차별화를 시도했다고도 볼 수 있다. 청마는 이러한 미당의 주문을 거절했다기보다는 거의 무관심했던 것으로 보인다.(*유치환, 「한글 업자와 야합하는 우민정치」, ꡔ부산일보ꡕ, 1965.11.30)....<그리고 한자를 남의 글이라 하나, 천만에! 이미 우리의 기나긴 전통 속에 생활화, 정신화한 우리 글인 것이다>라는 말에서도, 미당의 어드바이스에 대한 거부의 간접적 의사 표시로 볼 수 있다”(문덕수, ꡔ청마유치환평전ꡕ, 시문학사, 2004, p.182). 이런 지적은 민감하고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청마의 형인 유치진의 글, 「‘글’을 배운 문맹 한자폐지에 대한 우견」(월요시평), ꡔ동아일보ꡕ, 1949.9.19 또한 청마의 논리와 같다. ‘한자/한글’ 논쟁은 상당기간 지속되었고, 결국 그것은 청마에게는 이로울 것이 없었다.
거기에는 청마 자신이 ‘나의 시는 시가 아니다’는 非詩論과 ‘자학’적인 부정적 면모를 거리낌없이 표출해 온 데에도 그 원인의 일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말한 문맥을 무시하고 그것을 표면적으로 받아들였을 경우 그의 시는 시가 아닌 것이 되고(그리고 난해한 한자를 많이 쓴, 수필인지 시인지 모를 장르적 불분명성 등등), 사회적 울분과 자학의 직접적인 표출 정도로 평가될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 자신의 말처럼 그의 시가 “생명의 목마른 절규 같은 데서 자연 발생한 심히 조잡한 문학 이전의 어떤 소재같은 것에 불과”(「‘청마시초’ 무렵」, ꡔ나는 고독하지 않다ꡕ)하다 하더라도, 청마의 문학적 개성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것도, 그리고 우리가 그의 시에 주목하는 이유도 바로 그 “생명의 목마른 절규”의 문학적 궤적에 있을 것이다. 필자는 김윤식의 ‘문협파’에 대한 다음과 같은 발언에 공감한다. “자기 모순을 양식으로 하여 몸부림 친 곳에 김동리 문학의 위대성과 한계가 공존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 김윤식, ꡔ미당의 어법과 김동리의 문법ꡕ, 서울대학교출판부, 2002, p.59

따라서 그가 자신의 첫시집 ꡔ청마시초ꡕ의 序에서, 자신의 시를 운위하는 것보다 마음의 틈을 타 가만히 읽어주기만을 바랬던 것은, 독자들의 성급한 해석과 논리화를 경계한 것이었겠지만, 말해진 것뿐만 아니라 침묵 속에 은폐되어진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두를 작품 속에 담고자 했다는 고백으로 읽히기도 한다. ‘논리’를 넘어서서 인간적 실존의 문제에 착목하길 바라는 청마의 希願은 연구자들의 접근을 조심스럽고 어렵게 한 가장 큰 이유였던 것이며, 본고에서 이에 접근하기 위해, ‘삶과 예술의 일치’라는 이루어지기 힘든 이상을 추구했던 낭만주의 문학관에 의지하고자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1. 연구사 검토와 문제제기

청마 유치환에 대한 기존의 연구를 일별해 볼 때 특징적인 것은 그 해석과 평가에 있어서의 극심한 대립양상이다. 즉, 청마와 그의 문학을 大家的인 것으로 평가하는 입장들 김동리, 「ꡔ유치환시선ꡕ에 부침」(유치환, ꡔ유치환시선ꡕ, 정음사, 1958), 김종길, 「비정의 철학」(ꡔ세대ꡕ17호, 1964.10), 김용직, 「절대의지의 미학」(ꡔ현대시ꡕ, 1993.11), 오세영, ꡔ유치환ꡕ(건국대출판부, 2000) 등.
이 있는 반면, 그것이 가진 모순 양상에 착목하여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려는 입장들 김춘수, 「유치환론」(ꡔ문예ꡕ16호, 1953.6), 김윤식, 「허무의지와 수사학」(ꡔ현대시학ꡕ, 1970.10), 정효구, 「이념과 실존의 거리」(ꡔ한국문학ꡕ, 1985.7) 오탁번, 「청마 시의 의의와 효과」(ꡔ한국현대시사의 대위적 구조ꡕ, 고대민족문화연구소, 1988) 등.
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김종길과 김윤식의 경우를 대립의 한 예로 들 수 있겠다. 김종길은 「風格과 修辭」(ꡔ심상ꡕ, 1977.4)에서 김윤식이 “청마시에 대한 심한 편견”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것은 “비논리적일 뿐만 아니라 거의 비도덕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편견에 찬 것”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하고 있다. 이러한 설전이, 이후 생산적인 대화에 이른 것으로는 보이지 않으며, 이는 그만큼 청마시에 대한 견해의 차이가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긍정과 부정의 논리적 혼재는 한 연구자의 입장 내에서도 자주 관찰되는 바이기도 하다. 김영석, 「유치환론」(경희대 석사논문, 1974), 이숭원, 「유치환 시의 이원성과 고독」(ꡔ20세기 한국시인론ꡕ, 국학자료원, 1997)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는데, 이들 연구는 청마 시에 대한 자신들의 문학적 통찰을, 결론 부분에서의 역사주의적 시각으로 다시 비판함으로써 일종의 논리적 착종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이는 물론 청마 시 자체의 양가적ambivalent 의미구조에 기인하는 면도 있다. 보러Bohrer와 같은 낭만주의 연구자들은 ‘문학적 불안’을 이렇듯 역사 이론적으로 해석하는 시각에 대해 극단적으로 회의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보러의 입장을 무비판적으로 따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심미적 가치만을 절대화하고자 하는 그의 문학관 역시 일정한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시각은 기존의 역사주의적, 도덕적 가치 척도에 의한 대부분의 청마론을 반성케 하는 것으로 수용될 필요도 있다. 파스Paz 또한 “낭만주의자들과 상징주의자들처럼, 20세기의 시인들은 진보와 역사가 표방하는 직선적 시간 앞에 에로티시즘의 찰나적 시간, 아날로지의 순환적 시간 혹은 아이로니칼한 의식의 텅빈 시간을 대립시켰다.”(파스, ꡔ흙의 자식들ꡕ, 솔, 1999, p.141)라고 말하면서 다양한 문학적 관점의 지형도를 제시한 바 있다. 청마의 문학 또한 이러한 관점들의 경쟁 속에서 평가를 달리 받아 온 것이며, 본고의 논의 또한 그 긴장관계 속에 놓여 있다.

청마의 문학을 대상으로 하여 주로 거론돼 온 ‘의지/정서’의 모순관계도 해석자들이 첨예하게 대립각을 이루고 있는 쟁점 중 하나였다. 즉, 청마 시에 있어서의 ‘의지’의 측면을 강조하는 경우와 김현, 「유치환 혹은 지사의 기품」(ꡔ한국문학사ꡕ, 민음사, 1973)이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듯이, ‘유교적 지사’의 기질에 주목하는 연구서들은 대부분 청마의 ‘의지’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 애상적 ‘정서’의 측면을 강조하는 경우 조동민, 「청마연구서설」(국어국문학회편, ꡔ현대시연구ꡕ, 정음사, 1981)에서처럼, ‘의지’ 일변도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애련’의 측면에 무게를 두고자 하는 연구들도 청마론의 한 경향을 이룬다.
, 아니면 그 둘의 모순 관계를 강조하는 경우 김춘수(1953)와 김윤식(1970)이 대표적이다. 앞의 서지 참조.
, 그리고 그 모순의 이중성을 구조적․유기적으로 해명하고자 하는 경우 문덕수는 「청마 유치환론」(ꡔ현대문학ꡕ, 1957.11-1958.5)에서 동서양의 철학적 사유를 빌려와 청마의 ‘생의 의지’와 ‘허무의지’를 각각 설명하고 있지만 그 의지의 양측면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남겨두었다. 반면 이어령의 ꡔ공간의 기호학ꡕ(민음사, 2000)은 위상학적(topological) 방법론에 근거하여 청마시의 거시적인 공간적 지형을 드러내었고 미시적 작품 분석에서도 섬세한 해석적 통찰을 보여주었다. 여기에서 청마시의 모순에 대한 해명은 수직, 수평, 경계, 그리고 경계횡단이라는 공간적 의미 분석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방법론적 틀을 고수했던 결과 문학사적 의미를 묻는 작업에는 소홀했던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등의 다양한 입장들로 기존연구를 정리해 볼 수 있다.
한편, 연구자들 사이에서의 ‘인간주의/반인간주의’와 같은 또 다른 대립상을 지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청마의 시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청마 시 자체의 모순 양상 뿐 아니라, ‘인간주의’라는 용어 자체의 개념의 혼란 또한 이러한 해석적 혼동의 한 원인이 되는 듯하다. 다시 말하자면, 일상적 삶을 거부하고 절대의 세계를 추구하는 시적 태도를 인간주의로 볼 것이냐 반인간주의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 용어의 개념 규정, 그리고 그에 대한 해석에서부터 다양한 입장들이 제시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주의의 개념에 대해서는 오세영, 「한국 현대 문학과 휴머니즘」(ꡔ한국 근대문학론과 근대시ꡕ, 민음사, 1996), 김용직, 「절대의지의 미학-유치환론」(ꡔ한국현대시사(2)ꡕ, 한국문연, 1996) 등을 참조할 수 있다. 위의 두 글은 우연하게도 모두 Corliss Lamont의 ꡔThe Philosophy of Humanismꡕ에서의 휴머니즘 개념을 기준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데서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개념 규정 10가지는 생략함). 김용직은 위의 책에 제시된 개념을 근거로 “유치환의 정신성향은 명백하게 인간주의에 그치지 않는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지만(김용직, 위의 책, p.326), 오세영은 “불교적 인간 인식은 휴머니즘에 토대하고 있”다는 Corliss Lamont의 말을 인용하면서(오세영, 위의 책, p.19), 불교에 대해 호감을 표시하고 있는 청마의 문학적 입장을 휴머니즘적인 것으로 해석한다.(오세영, ꡔ유치환ꡕ, p.122참조). 참고로 김동리의 <제3휴머니즘론> 또한 협의의 ‘휴머니즘’ 개념 규정에서 벗어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김동리 스스로 줄기차게 외친 휴머니즘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어령이 시 「히말라야 이르기를」(ꡔ동아일보ꡕ, 1947.1.28)을 논하며 “반인간주의에 가까운 청마의 준엄성”을 언급했던 것은 이 작품에서의 “드디어 이끌 수 없던 인류일랑 버리고”라는 시구절에 근거한 것이며, 김준오의 ‘반인간주의’론 또한 그 근거가 청마의 시에 놓여 있었다. 이어령, ꡔ공간의 기호학ꡕ, 민음사, 2000, p.121, 김준오, 「청마시의 반인간주의」, ꡔ가면의 해석학ꡕ, 이우출판사, 1985 참조. 이어령은 이 작품의 반인간주의<에 가까운> 측면을 지적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공간의 메타언어’가 시적 의미나 감정을 표현해 내는 것을 보이는 예 중의 하나로 제시되어 있을 뿐, 청마의 시를 ‘반인간주의’로 규정지으려 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김준오는 청마 시에 대한 많은 통찰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신에 대한 언급이 전경화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의 청마의 시에 대해 ‘반인간주의’로 규정짓고 그러한 시각만으로 청마 시를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상당한 무리와 오독이 발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청마에게는 그러한 면뿐만 아니라 ‘인간주의’로 해석될 면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들을 어떤 신의 도움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극복해야 한다는 유치환의 ‘의지’적 측면을 오세영은 니체의 ‘초인’개념에 기대어 ‘허무의 의지’로 정립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휴머니스트로서의 그의 입장”이 강조된다. 오세영(ꡔ유치환ꡕ, pp.99-157), 김영석(「유치환론」, 1974), 김현(「유치환 혹은 지사의 기품」, 1973, 「깃빨의 시학」, 1987) 또한 청마의 사회비판시를 검토하면서 ‘예언자적 지성’을 언급하고 휴매니스트로서의 청마의 면모를 강조한다.

본고의 문제의식은, 위에서 개관한 바와 같은 가치평가적 문제나, 의지/정서의 모순, 인간주의/반인간주의와 같은 양자택일적 해석의 관점으로는 청마의 일면만을 들어 보이는 방법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데서 출발한다. 김현, 김영석 등은 청마의 예언자적 지성을 들어 그 휴매니스트적 측면을 강조했고, 김준오의 ‘반인간주의’는 또 다른 측면의 강조로 볼 수 있다. 물론 그들이 다룬 대상이 초기시와 후기시라는 차이는 있으나 그러한 모순관계의 구조적이고 유기적인 설명에 양자의 방식이 일정한 한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 여기에서의 논점이다.
그러한 양 측면이 분명 청마의 작품에 모순적으로 존재한다면, 그 모순관계의 구조적 분석과 유기적인 설명에 집중해 보는 일이 필요할 듯하다.
필자는 청마 시에 내재된 모순과 자의식의 분열, 그리고 그에 연관된 연구자들의 해석․평가의 대립 등등이 모두 ‘낭만적 아이러니’라는 총체적 긴장의 틀 내에서 고찰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세계가 그 본질상 역설적이라는 것 그리고 일종의 이중의식적 태도만이 그 모순적 전체를 감지할 수 있다는 사실의 승인”으로 슐레겔의 아이러니를 정의한 르네 웰렉의 입장은 René Wellek, A History of Modern CriticismⅡ:The Romantic Age, Yale Univ. Press, 1955, p.14
아이러니스트로서의 청마의 면모를 감지하게 하며, “똑같은 발화가 대립적인 실제적 효과를 지닐 수 있다”는 린다 허천Linda Hutcheon의 발언은 Linda Hutcheon, Irony's Edge, Routledge, 1994, p.52
, 해석자들 사이에서의 분열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지적한 것이다. 아이러닉한 의미는 단지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발생하는” 어떤 것이다. 즉, 그것은 텍스트, 콘텍스트, 그리고 아이러니스트와 해석자의 상호작용의 역동적인 공간 속에서 발생한다. Linda Hutcheon, 위의 책, p.58

이러한 관점에서 본고와 유사한 방법론적 접근(낭만적*아이러니)을 보인 연구물들을 중심으로 그들이 밝혀낸 바와 놓치고 있는 바를 발표 시기순으로 일별해 보고자 한다.
먼저 문덕수는, 청마의 시에서 “유한자가 유한을 극복하려는 무한에의 낭만주의적 몸부림”을 읽어낸다. 문덕수, 「청마 유치환론」, ꡔ현대문학ꡕ, 1958.1(연재3회분), p.218 참조. 문덕수의 ‘유치환론’은 1957.11부터 1958.5까지 ꡔ현대문학ꡕ에 연재되었다. 1회 제목은 「생명의 의지-유치환론1」이며 연재2회부터 「청마 유치환론」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었다.
그는 ꡔ백조ꡕ를 중심으로 한 1920년대의 낭만주의 문학을 자각적 사조로서의 근대적 낭만주의가 아니라 ‘낭만적 문학’이라고 규정하면서, 그 원인의 하나로 ‘낭만적 자아’ 또는 ‘낭만적 인간’의 자각적 사색과 형성이 없다는 데서 찾고(그가 세 번째 이유로 들고 있는 ‘주관주의’ 문제 또한 이와 관련될 것이다), 20년대 한국의 낭만적 문학이 추구한 인간이란 실체없는 ‘낭만적 허깨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문덕수, 위의 글, pp.238-239
또한 두 번째 이유로, 20년대 낭만적 문학에서의 ‘범신론적 자연관’ 내지 ‘자연유기체설’에 대한 이해의 결핍을 지적한다. 그는 이어서 “한국의 낭만주의 문학은 유치환, 서정주에 와서 비로소 근대적 의미의 낭만주의 문학이 완성되는 셈”이라고 주장하고, 청마의 범신론적 자연관을 ‘주관적 낭만주의’, 그의 생명의지를 ‘의지적 낭만주의’라고 정의한다. 문덕수, 앞의 글, pp.238-239
좀더 정밀한 논의가 아쉽지만, 문덕수의 이 글은 청마와 미당을 낭만주의의 시각에서 정리하고 있는 초기의 논문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김춘수의 ꡔ한국현대시형태론ꡕ(1959.10)에서의 다음과 같은 언급 또한 문덕수의 관점과 유사하다. “서정주, 유치환과 같은 시인들이 서구 낭만주의의 핵심에 접근해 갔던 것이다. ꡔ폐허ꡕ ꡔ백조ꡕ에 있어서는 정신의 한 분위기뿐이던 것이 이제 한 정신으로서 나타나게 되었다.....시집 ꡔ청마시초ꡕ는 전기 ꡔ화사집ꡕ과 아울러 4270년대의 한국시의 서정의 깊이를 비쳐 준 이면경이다. 서정의 깊이로서 거기 비친 것은 겨우 도달할 곳에 도달한 한국의 낭만주의다.”, 김춘수, ꡔ김춘수전집ꡕ2, 문장, 1986, pp.71-72.

다음으로 김윤식의 글은, 청마의 모순 양상에 대한 비판적 검토 속에서 ‘아이러니’적 양상을 날카롭게 검출해 내고 있는 대표적 연구로 지적될 수 있겠다. 김윤식, 「허무의지와 수사학-유치환론」, ꡔ현대시학ꡕ, 1970.10.(ꡔ유치환전집2ꡕ, pp.353-378에 수록.)
비록 아이러니라는 용어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는 않지만 청마의 ‘자학’적 양상에 대한 비판은 헤겔이 낭만적 아이러니를 비판했던 시각 헤겔은 ꡔ헤겔미학Ⅰꡕ(나남출판, 1996)의 <서장>에서 낭만주의 작가들과 그들의 ‘낭만적 아이러니’를 비판하고 있는데 그 논거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추상적인 자아의 절대성에 그 근원을 두는 이 매우 공허한 형식....만약 모든 것을 자신에게서 설정하고 해체하는 자아가 예술가라면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어떤 내용도 절대적이거나 즉자대자적이지 못하고 그 자신이 만들어 내기도 하고 없앨 수도 있는 가상이므로, 그런 경우에는 예술가 자신의 형식주의에만 가치가 부여되므로 거기에는 진지함이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된다.”(pp.114-5) “모든 객관적인 것이나 절대적으로 타당하다고 여겨지던 것이 무가치하게 되어버린다는 점”(p.116), “비현실적이고 공허한 것...이 무력함에 따르는 불만스런 상태가 야기하는 것은 병적인 아름다운 영혼성과 동경일 뿐”(p.117) “확고하고 중대한 목적에 머물지 못하고 이를 포기하고 파괴하는 조악하고, 쓸모 없는 주체들이다. 아이러니가 좋아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유약한 성격이 지닌 아이러니이다.”(p.118)
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헤겔의 시각이 갖는 한계를 동일하게 갖는 것으로 판단된다. 헤겔의 시각이 갖는 문제점에 대해 최문규는 다음의 두 가지를 지적하고 있다. ①“아이러니를 현실 도피 내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개인 심리로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자아와 현실의 이상적인 조화를 내세우는 관점은 역으로 객관적인 것의 옹호, 즉 기존의 사악한 질서를 대변하는 이데올로기로 전도될 수 있는 위험을 지니고 있다.” ②“헤겔은 낭만주의를 의미와 본질을 결핍한 채 유희만을 추구하는 ‘자아의 형식주의’라고 명명한 바 있는데, 이러한 ‘자아의 형식주의’가 과연 무비판적이고 현실 도피적인가라는 점” 최문규는 후자에 대해 설명하면서 바흐친의 시각을 빌려와 아이러니가 갖는 대화적이고 전복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최문규, 「독일 낭만주의와 ‘아이러니’ 개념」, ꡔ뷔히너와 현대문학ꡕ, 1995(최문규, ꡔ문학이론과 현실인식ꡕ, 문학동네, 2000, pp.84-88으로부터 인용함).


“아이러니로서의 낭만적 문학작품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갈등, 부조화, 분열 등을 넘어 다른 정지된 상태에 대한 ‘목적성’과 결합시키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것은 조화 및 통일성에 대한 동경이 강할수록 동시에 그것의 부정도 마찬가지로 강하게 작용하는 것이 아이러니의 근본 속성이기 때문이다...(중략)...결국 삶과 예술의 일치라는 유토피아적 표상이 증대되는 순간 양자간의 괴리는 더욱 깊어지며, 이것이 아이러니의 중요한 특성인 것이다.” 최문규, 「독일 낭만주의와 ‘아이러니’ 개념」, ꡔ문학이론과 현실인식ꡕ, p.100.


“삶과 예술의 일치”을 부르짖었던 청마문학에서 왜 “아이러니”가 중심된 문제틀이 될 수밖에 없었던가 하는 이유를 생각게 하는 글이다. ‘조화에 대한 동경이 강할수록 동시에 그 부정도 강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적인 언어구조가 청마 문학의 틀을 이루는 것이 사실이라고 할 때, 김윤식의 글은 청마 시의 모순(낭만적 아이러니)을 명확하게 드러내었지만, 그에 대해 목적론적 역사의식만을 절대적 잣대로 하여 재단하고 있는 것이어서, 많은 통찰과 더불어 맹목을 노정하고 있다. 여기서 통찰이라 함은 기존의 追隨的 찬사에 의해 가려졌던, 낭만적인 것에 대한 민감하고 예리한 비판에 의해 드러난 것들, 예를 들어 ‘자학’이나 ‘영혼의 향수’, 자기모순으로서의 戀歌에 대한 언급 등을 가리키는 것이며, 맹목이라 함은 그러한 모순에 대한 부정적 시선에 기인하는 논리적 비약과 오독 예를 든다면, 김윤식은 「허무의지와 수사학-유치환론」(ꡔ현대시학ꡕ, 1970.10, 이하 인용은 ꡔ유치환전집2ꡕ, 정음사, 1984에서 함)에서 다음과 같은 논리로 청마를 비판하고 있다. ①“왜 청마가 신명을 던져 저항하는 길을 택하지 않았는가....그는 무엇보다도 자기의 생명은 물론, ‘생명에 속한 것’, 생명 전체를 무엇보다 우선하여 열애했기 때문이다. 생명 자체로 볼 때 원수의 생명이나 원수에 아첨하는 생명도 자기의 생명과 꼭 마찬가지로 열애하기 때문이다.”(p.358)-->여기서 논리적 비약이 일어난다. 시 구절에 직접적으로 드러난 부분 즉 “나의 원수와/ 원수에게 아첨하는 자에겐/ 가장 옳은 증오를 예비하였나니”(시 「일월」)를 외면하고, 그들의 생명을 ‘자기의 생명과 꼭 마찬가지로 열애’하였다고 왜곡한 것. 이러한 해석적 시선은 「首」에 대해서도 행해진다. “일제라는 원수와 나는 동류 의식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다는 체험에 도달한 것”(p.366)이라는 지적에서의 ‘동류의식’이라는 어휘 또한 형식논리적 등위 개념을 전제로 한 가치평가의 착종이다. ② “애련에 빠지지 않겠다는 결의 앞에 어떻게 원수라든가 아첨배에 증오를 예비할 수 있는가. 증오라든가 애련이란 것이 동질적 개념이 아니었던가.”(p.359) 또한, 등위적 개념일 뿐인 것을 동질적 개념이라 전제하고, 역사에 신명을 바치지 못한 자기변명이며 자기합리화라 비판한 것. ‘열애’, ‘애련’, ‘증오’는 모두 감정적 층위의 용어들이다. 김윤식은 묻고 있다. 애련(감정)에 빠지지 않겠다고 하면서 어떻게 증오(감정)를 예비할 수 있는가 하고. 하지만 그것은 사랑(감정)하지 않으며 미움(감정)을 예비하는 것이 당혹스러울 리 없는 것을, ‘감정에 빠지지 않으면서 감정을 예비하는 것’이라는 형식적 층위로 환치하여 그것이 당혹스러운 일이라고 주장하는 형국인 것이다. 물론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상황을 염두에 둘 때라야 이와 같은 주장이 설득력을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자기변명’, ‘자기 합리화’라는 판단으로 나아가는 데는 다시 한 번 논리적 비약이 개입된다. 위의 예들에서 보이듯, 김윤식은 형식논리적 시각으로 청마를 재단하고 있다.
, 그리고 청마의 시를 식민지의 역사컴플렉스로 보려는 논리의 결과 이르게 된, “해방 후의 시에 대해서는 별다른 성과를 평가하기 어려울 것 같다”라는 성급한 결론 등을 가리킨다.
김영석은 「유치환론」에서, 청마의 ‘매저키즘’이 전통적 정한의 세계에 이어질 수 있음을 설명하는 가운데, 아이러니적 구조를 암시하고 있으며, 또한 모태회귀적 지향을 설명하면서 청마를 낭만적 이상주의자로 표현하고 있다. 김영석, 「유치환론」, 경희대 석사논문, 1974. 11
본고의 관심사와 상당부분 일치하는 시각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불교와 도교의 공과 무의 본질세계로 결국 청마가 용해되었다는 그의 견해에 대해서는 유보적일 수밖에 없다. 청마의 모순은 결코 해소되지 않는 것이었으며, 단지 순간 순간 그 초월을 꿈꾸고 있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불교와 도교의 空과 無의 본질세계로 청마가 용해되어 들어갔다는 김영석의 설명은, 분명 청마 시의 한 측면과 관련된 설명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화해의 유토피아’를 찾으려는 강력한 해석경향” 보러, ꡔ절대적 현존ꡕ, 문학동네, 1998, p.5
에 기울면서 ‘아이러니적’ 측면에 대해서는 눈감게 한다는 점에서 제한적 의미만을 갖는 것으로 이해된다. 예술과 삶을 융합하고자 했던 청마 문학에 대한 고찰에서 상상력과 아이러니의 모순과 수렴 양상에 대한 고찰은 불가피한 것으로 판단된다. 본고의 논의를 진행하면서 규명하겠지만, ‘모순의 保有와 止揚’이라는 낭만적 아이러니의 시각은 실제 작품의 내용과도 더 적절히 부합되는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김영석이 청마의 시작태도를 ‘매너리즘’으로 결론 내리는 것 또한 그 구조적 직관에는 동의하지만, 그가 내린 부정적 결론은 그 자신이 분석해 보인 통찰들을 무화시키는 것이 아닌지 의문스럽다. 김종길은 “일가를 이룬 시인이란 아무리 급격한 변모를 치른다고 하더라도 그의 시적 음성이나 전체적인 주제에는 일관성이나 통일성이 있게 마련”이라는 말로, 청마의 시에 변화와 진전이 없었다는 비판에 답하고 있기도 하다. 김종길, 「풍격과 수사」, ꡔ심상ꡕ, 1977.4

김준오의 「청마시의 반인간주의」 또한 ‘맹목과 통찰’을 보여주는 연구물이다. 김준오, 「청마시의 반인간주의」, ꡔ가면의 해석학ꡕ, 이우출판사, 1985
우선 그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청마 문학에서의 ‘허무+의지’라는 모순적(아이러니적) 구조가 가능한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① 청마의 의식을 괴롭힌 죽음은 그의 경우 생명과 철저히 대립되면서도 변증법적 귀일점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대신 생명과 죽음은 상호유발적 관계에 놓인다. 다시 말하면 그의 강렬한 생명의지는 그만큼 죽음의 허무의식에서 비롯되고 또한 죽음의 가열한 허무의식은 그만큼 생명에의 강한 애착을 갖게 하는 모티브가 된다. 이것은 죽음의 이중성 즉 죽음이 청마에게 생명의지와 허무의식을 동시에 갖도록 한 모순성이다. 김준오, 앞의 책, p.184


② 그러나 문명화되지 않은 원시적 인간의 자유를 갈망하는 청마의 낭만주의적 욕구 속에는 선을 위한 악의 긍정처럼 이 정신적 해방에 등가되는 통제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이 통제가 다름아닌 자기 완성의 길이며, 금욕적 수행의 고통이 된다. 김준오, 위의 책, p.222


위에 인용한 김준오의 글(①,②)은 모두 낭만적 아이러니에 대한 설명에 다름 아니다. 즉, 죽음과 삶이 서로의 존재 근거가 되고 있다는 것 “죽음 그것에서처럼 삶의 강렬한 의미, 소위 비극적 인식의 확인과정이 달리 있을 수 없기에” 김윤식, ꡔ한국근대문학사상비판ꡕ, 일지사, 1978, p.147
(①)과 해방을 위한 통제의 원리(②) 등이 그러하다. 하지만 김준오는 낭만주의에서의 자기창조와 자기절제(파괴)의 변증법적 구조를 간과함으로써, 절제의 측면은 고전적인 것으로만 생각한다. 그것은 그가 인간주의/반인간주의, 낭만주의/고전주의와 같은 상대적 개념에 집착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생명의 본연에 대한 갈망으로 낭만주의자였지만 통제 속의 해방이라는 원리에 의하여 누구보다도 고전주의자였다” 김준오, 위의 책, p.224
라고 말하는 것은 그로서는 자연스러운 결론이겠지만, 청마 문학에 낭만/고전과 같은 단순하고 관념적인 논리 최문규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확고한 경계 긋기가 얼마나 불안정한 도식성에 의존해 있는 것인지를, 고전주의 미학(쉴러)과 낭만주의 미학(슐레겔)의 연관성을 들어, 밝혀내고 있다. 즉, 슐레겔의 ‘선험적 포에지’라는 개념(“선험적 포에지는 풍자로서 이상과 현실의 절대적인 차이로 시작하며, 비가로서 그 양자의 사이에서 부유하며, 마침내 목가로서 그 양자의 절대적인 동일성으로 끝난다.” 슐레겔, 아테나움 단편 238번)이 쉴러의 ꡔ소박문학과 성찰문학에 관하여ꡕ에서 이상과 현실의 관계로 풍자, 비가, 목가를 논했던 것에 의존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한편, 또 다른 논의가 될 수 있겠지만, 슐레겔이 제시한 ‘선험적 포에지’의 세 하부 장르로서의 ‘풍자, 비가, 목가’ 또한 청마 문학에서 ‘사회비판시, 인생시, 자연시’ 등의 형태로 구현된 것으로 볼 수 있어서 주목되며, 철학과 시의 결합, 인식과 상상력의 결합이 ‘선험적 포에지’의 특징이라는 지적도 음미해볼 대목이다. 최문규, 「초기낭만주의에서의 포에지 개념 연구」, ꡔ독일언어문학ꡕ 제17집, 2002.6, pp.282-3 참조.
를 강요할 경우, 거기에 무리가 따르는 것 또한 당연하다. 그가 청마의 ‘신’에 초점을 맞추어, 초기시에서 후기시로의 변화를 인간주의에서 반인간주의로, 낭만주의에서 고전주의로 제시하며, 미성숙에서 성숙으로의 변화로 평가할 때 김준오, 앞의 책, pp.192-4.
, 그 도식성은 잘 드러난다. 그는 청마 시를 해석하면서, 이러한 도식에 맞지 않는 부분을 ‘아이러니’와 ‘역설’로 해석하지만 “청마는 많은 연가를 남겼다. 그에게 있어 여성은...<영혼의 어떤 갈구의 응답인 존재>다....청마의 반인간주의는 아이러니칼하게 인간의 존귀함을, 생명의 가치를 강조하는 태도가 된다.”(김준오, 위의 책, pp.207-8) 여기에서 김준오는 ‘아이러니’로 자신의 모순을 해결하고 있다. 이는 “자연의 냉혹 비정이 역설적으로 자연애로 승화된 계기가 되었다는 것”에서 보이듯, ‘역설’로 논리적 모순을 해결하려 했던 것과 유사하다. 청마의 연시와 자연애는 김준오의 반인간주의론과 모순되며, 이를 감당하기 위해 방편적으로 아이러니와 역설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 그것은 자신의 논리적 결함을 메우는 방편적인 것으로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이광호는 김준오의 ꡔ시론ꡕ(1982)을 검토하면서, ‘나와 세계’, ‘나와 나 자신’과의 “동일성의 시학으로 현대시 일반을 설명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빚어내는 無理와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물론 수정과 개작의 결과 “차이와 균열의 시학”에 대한 암시를 찾을 수 있음도 지적되어 있다. 하지만 필자는 김준오가 이러한 이론적 모순 지점을 더욱 깊이있게 밀고 나갔어야 했다는 아쉬움을 갖고 있다. 이광호, ꡔ미적 근대성과 한국문학사ꡕ, 민음사, 2001.12, pp.105-117 참조.
김준오는 자신의 (청마 시의 아이러니적 구조에 대한) 통찰을 견지하지 못하고 기존의 이항대립적 설명틀(인간주의/반인간주의, 낭만/고전, 민주/귀족 “허무 속에 몰입하려는 청마의 반인간주의는 이제 또 필연적으로 귀족주의적 윤리로 구체화된다. 이 윤리는 다시 ‘단독자’와 ‘통제 속의 해방’이라는 시적 자아의 이미지를 창조한다. 이것은 그의 허무가 ‘민주적 허무’가 아니라 ‘귀족주의적 허무’라는 명제에서 출발한다.”(pp.214-5) 김준오가 ‘민주적 허무’라는 어색한 표현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인간/반인간, 낭만/고전과 같은 이항대립에 집착한 결과로 보인다.
등)에 의존함으로써, 작품의 실제 현상에 맹목하고 만다. “신과 인간, 생과 사, 선과 악 등을 엄격히 구분하는 이원적 사고”라는 청마의 닫혀진 사고를 그가 결론에서 지적할 때 김준오, 위의 책, p.224
, 자신이 이미 언급했던 청마문학의 모순들이 이루는 ‘상호유발적인’ 측면은 다시 은폐되고 만다. 이숭원의 글, 「유치환 시의 이원성과 고독」(ꡔ20세기 한국시인론ꡕ, 국학자료원, 97) 또한 이러한 ‘폭로와 은폐’의 구조로 읽힌다. 그가 “땅에 깊이 묻어버리는 것은 이미 노래가 아니다.”라고 청마를 비판할 때, 그는 청마 자신이 사실 자신의 노래를 깊이 묻겠다는 ‘노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러한 태도는 결국 이숭원 스스로 밝혀 냈던 많은 통찰들을 무화시키는 결과로 되돌아온다. 은폐와 폭로의 아이러니적 구조에서 연구자 또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어령의 ꡔ공간의 기호학ꡕ(2000)은 엄밀한 방법론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청마의 방대한 양의 작품들 하나하나의 기호학적 구조를 분석․해석함으로써, 기존의 연구를 넘어서는 많은 통찰을 보여준다. 이어령, ꡔ공간의 기호학ꡕ, 민음사, 2000
특히, 실체가 아닌 ‘관계론’적 차원의 접근은 기존의 내용중심적이고 인상비평적인 논의의 틀을 뛰어넘게 한 방법론적 성취로 평가할 수 있으며, 본고의 논의에서도 많은 부분 참조하였다. 특히, 내/외 공간의 이항 대립체계의 관련성이나, 경계 공간의 양의적이고 해체적인 의미에 대한 분석은 본고의 방법론과 일치하는 바 크다고 생각한다. 이어령의 논의는 청마 시의 복합적이고 다의적인 시적 의미가 구조적 차원에서 마련된 것임을 밝혀낸 위상학적(topological) 방법론에 의한 뛰어난 청마 연구서이다. 하지만 그러한 방법론적 입장에 따르는 한계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청마의 시정신, 그 문학의 의미에 대해 묻고 답하는 일에 연구자의 관심이 드러나 있지 않다는 점이다. 비록 기존의 불명료한 개념들을 다시 사용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작업을 시도해 보는 것이 청마론에서는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물론 이때에도 이어령의 작업에서 밝혀진 분석적 통찰은 그 토대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본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1차 텍스트를 정리해 본다.
유치환의 시집으로는 (*제1시집 시인 스스로 자신의 시집에 제1시집부터 제11시집까지의 순서를 잡아 놓은 바 있다.
)ꡔ청마시초ꡕ(청색지사, 1939), (*제2시집)ꡔ생명의 書ꡕ(행문사, 1947), (*제3시집)ꡔ울릉도ꡕ(행문사, 1948), (*제4시집)ꡔ청령일기ꡕ(행문사, 1949), (*제6시집)ꡔ보병과 더부러ꡕ(문예사, 1951), (*제7시집)ꡔ예루살렘의 닭ꡕ(산호장, 1953), (*제5시집과 제8시집의 합본)ꡔ청마시집ꡕ(문성당, 1954), (*제9시집)ꡔ제9시집ꡕ(한국출판사, 1957), (*제10시집)ꡔ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ꡕ(동서문화사, 1960), (*제11시집)ꡔ미루나무와 남풍ꡕ(평화사, 1964) 등 11권(실제 발간된 숫자는 10권)이다. 이들 시집에 실린 작품들의 창작 시기는 대체로 시집 발간 순서에 따른다고 보이나 ꡔ청마시집ꡕ(1954)만은 예외적이다. ꡔ청마시집ꡕ은 시인 스스로 계획했던 두 권의 시집(ꡔ기도가ꡕ와 ꡔ행복은 이렇게 오더니라ꡕ)을 합쳐 묶은 것이다. ꡔ기도가ꡕ는 “ꡔ청령일기ꡕ이후 동란 발발까지 기간의 작품들”이고(즉, 49-50년의 작품이고), 그 4장은 북만주시절의 것으로 ꡔ생명의 서ꡕ와 같은 시기의 작품들이다(즉, 40-45년경의 작품이다). 유치환, ꡔ청마시집ꡕ의 ‘부기’, 전집3, pp.329-330
따라서 이와 같은 실제 창작 시기별로 작품을 나열하고자 한 ꡔ전집ꡕ(정음사, 1984)에서의 시 인용은 그 페이지의 수로 전후 관계를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본고에서는 연구의 편의를 위해 전집을 이용했는데, “권수, 페이지”의 형식으로 전거를 밝히기로 하고 필요한 경우 원전을 직접 인용하기로 하겠다. 시인 스스로 ‘시집’으로 발간한 것들이지만, 그 장르가 명확한 것은 아니다. 제7시집 ꡔ예루살렘의 닭ꡕ(1953)은 부제로 ‘청마수상록’이라 붙였고, 그 장르적 속성 또한 불명료하여 시, 단장, 수상 등의 형식이 혼재되어 있다. ꡔ청마시집ꡕ(1954)으로 발간된 제8시집 ꡔ행복은 이렇게 오더니라ꡕ에도 시 뿐만 아니라 시로 보기 어려운 「短杖」, 「봄풀」, 「운명에 대하여」 등 장르적 논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작품들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ꡔ제9시집ꡕ(1957)에도 ‘시와 단장’이라 하여 부제가 붙어 있듯이, 전반부에는 ‘시’를 후반부에는 ‘단장’을 수록하여 순수한 시집으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며, 제10시집인 ꡔ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ꡕ(1960)에도 9시집과 같은 ‘단장’ 형식이 실려 있다. 본고에서는 청마의 대표적 시 작품을 중심으로 분석에 임하겠지만, 이러한 불분명한 유형의 작품들 또한 배제하지 않으려 한다. 이는 시인 스스로 시집으로 묶은 바의 의도가 그러한 장르적 경계를 문제시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며, 소위 ‘문협파’로 불리는 청마 그룹의 문학사적 의미에 접근하고자 하면서 그 장르적 변별성에 구애되어서는 연구의 출발조차 힘들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의 글들을 참고하라. “사력을 다하기, 그 다른 표현이 ‘구경적 생의 형식’이다....장르적 변별성이란 당초부터 배제되어 있었음이 판명되는데, 문학보다 훨씬 큰 단위인 ‘인간’이 전제된 까닭이다....필사적 몸부림의 형식”(김윤식, ꡔ미당의 어법과 김동리의 문법ꡕ, 서울대 출판부, 2002.9, p.26). “현대시는 미리 결정되어 있거나 형성 완료된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개체적인 창조물들을 널리 받아 안는 개념에 불과하다....하나의 역동적인 개념이라는 전제”(이광호, ꡔ미적 근대성과 한국문학사ꡕ, 민음사, 2001.12, p.90) 등은 본고의 논의를 위해 수용할 필요가 있다.

청마는 또한 그의 생전에 다수의 산문집과 시선집 등을 발간하고 있는데, 이 또한 본고에서 함께 고찰하고자 한다. 그의 산문집으로는 ꡔ동방의 느티ꡕ(신구문화사, 1959)와 자작시 해설서인 ꡔ구름에 그린다ꡕ(신흥출판사, 1959), 그리고 東西賢人들의 ‘인생단장’을 편집한 ꡔ사랑과 모랄의 진리ꡕ(구미서관, 1962)와 수필집 ꡔ나는 고독하지 않다ꡕ(평화사, 1963) 등이 있다. 시선집으로는 ꡔ유치환시선ꡕ(정음사, 1958), ꡔ(청마애정시집)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ꡕ(평화사, 1965)가 있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ꡔ동방의 느티ꡕ(1959)는 ꡔ예루살렘의 닭ꡕ(1953) 이후의 시집에서 수상만을 가려 뽑아 엮은 책이고, ꡔ나는 고독하지 않다ꡕ(1963)에는 1955년 경부터의 수필이 다수 실려 있는데, 그 사이 청마에게 닥친 혼란과 궁핍함 때문에 따로이 책으로 묶어내지 못한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ꡔ유치환시선ꡕ(1958)은 ꡔ제9시집ꡕ(1957)까지의 작품에서 시인 자신이 가려 뽑은 시선집이다. 끝으로 본고에서는 청마의 편지가 수록된 이영도, 최계락 선편의 ꡔ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ꡕ(중앙출판공사, 1967)와 반희정 편저의 ꡔ청마와 사색의 그림자들ꡕ(현암사, 1970) 또한 중요한 텍스트로 보았고, 전집 출판 이후 새롭게 발굴된 작품을 수록한 박철석 편저, ꡔ새발굴 청마 유치환의 시와 산문ꡕ(열음사, 1997)과 ꡔ시문학ꡕ 기획특집(2002.9-2003.5)에서 발굴된 청마의 시와 산문, 그리고 필자가 ꡔ조선일보ꡕ와 ꡔ동아일보ꡕ 등에서 찾아낸 몇몇 작품을 1차 텍스트로 하였다. 필자가 발견한 청마의 작품은 그 목록을 <참고문헌>에 기록하였다.


2. 연구방법론

청마 유치환은 ‘문학과 삶의 일치’를 지속적으로 추구했던, 우리 현대 시사에서 보기 드문 독특한 개성을 소유한 문제적 시인이다. 본고에서는 그의 문학에서의 모순 양상의 내적 관련성을 추적하고자 ‘낭만적 아이러니’라는 개념을 중요한 방법론적 틀로 삼았다. 인간을 모순적 존재로 보는 그의 인간관(「기빨」, 「박쥐」 등) 그가 살다간 이율배반적인 시대, 그 속에서 본질을 추구했던 그의 문학적 태도 등이 아이러니적 발화 양식을 요청하였다는 점에 착목한 것이다.
‘낭만주의’는 문예 운동이면서 동시에 도덕이고 정치학이기도 했다. “그것은 생각하고, 느끼고, 사랑하고, 투쟁하고, 편력하는 방식이었다. 한마디로 낭만주의는 삶의 방식이자 죽음의 방식이었다. 프리드리히 폰 쉴레겔은, 낭만주의는 문학 장르들과 미적인 취향들의 해체와 혼합을 의도할 뿐만 아니라, 서로 모순되면서도 수렴되는 상상력과 아이러니의 작용을 통해 삶과 시의 융합을 모색한다고 단언했다.” Paz, Octavio, (김은중 역), 「아날로지와 아이러니」, ꡔ흙의 자식들 외--낭만주의에서 전위주의까지ꡕ, 솔, 1999, p.78
“예술과 삶, 태초(至初無先)와 직선적 시간 개념의 근대 역사, 상상력과 아이러니라는 양극단의 결합을 추구하던 낭만주의” Paz, Octavio, 위의 책, p.79
는, 시 창작과 그에 대한 반성,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다시 詩化하는 청마 시의 면모를 觀見케 하는 중요한 관점이 된다. 이러한 시각에서 비로소 예술과 삶을 일치시키고자 했던 그의 모순된 면모가 갖는 의미가 온전히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좁은 의미의 낭만주의는 18세기말에서 비롯된 역사적 낭만주의라 하여, 19세기 중엽 사실주의 등장 이전까지의 유럽 대륙을 휩쓸던 한 시기의 예술사조를 지칭한다. 하지만 그러한 관점에서는 다른 시공간에서의 ‘낭만주의’, 즉 우리 현대 문학에서의 ‘낭만주의’를 운위하기 어려워진다는 점에서 한정된 시기와 공간의 좁은 개념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본고에서는 18세기말 이후 현재에 이르는 특정한 문화적 태도나 현상을 가리키는 말로 ‘낭만주의’를 이해하고 사용할 것이다. 이러한 넓은 의미의 낭만주의에 대한 관점은 서구예술사의 전개를 낭만주의와 고전주의라는 두 극 사이에서 왕복하는 진자운동으로 이해한 허버트 리드의 생각이나 드만de Man, 파스Paz 등의 견해를 참조할 수 있다. 특히, 파스의 책(ꡔ흙의 자식들ꡕ)은, “독일과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들로부터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들을 거쳐 20세기 초반의 범세계적인 전위주의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원리가 그들을 고무시켰음을 보이려는 것” 파스, 앞의 책, p.22
을 목표로 하고 있어, 본고의 입장에 시사하는 바 크다.
구체적으로 ① 파스가 근대의 변증법적 부정원리를 비판할 때, 그것은 청마와 그에 대한 기존의 비판적 시선 모두를 넘어설 또 다른 시각의 필요성을 요구하는 것으로 읽힌다. 즉, “근대에 있어서 변증법은 역설적으로 부정을 대립물 사이의 통일을 위한 다리로써 사용하는 위험한 방법을 통해 대립의 해소를 시도했다. 대립성을 희석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조함으로써 적대감을 극복하려는 것이었다....해결과 동시에 또 다른 모순을 낳을 수밖에....결국 분열에 의해서 분열을 치유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파스, 위의 책, pp.45-6
라는 파스의 지적은 청마의 문학이 처한 곤경을 되돌아 보게 한다.
② 또한 그가 시와 근대성 사이의 갈등, 전기 낭만주의자들로부터 오늘날에까지 계속 이어져 내려오는 갈등을 말할 때 파스, 위의 책 참조. “근대문학은 근대성에 대한 열렬한 부정이다”(p.51)/ “바타이유는 위반은 에로티시즘의 조건이며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이 새로운 성도덕은 만일 성에 대한 금지들이 폐지되거나 완화되면 에로티시즘의 위반도 사라지거나 약화되리라고 믿었다.”(p.53)
, 그것은 근대문학이 처한 아이러니적 상황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역사적 근대’와 ‘미적 근대성’의 대립상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논자들이 지적한 바 있는 것이지만, 이는 여전히 청마 문학의 낭만적 특성을 가늠하고, 그들 세대(30년대 신세대) 문인들을 조감하는 커다란 틀이 된다.
③ 나아가 파스는 낭만주의자들의 위대한 발명의 하나로 아이러니를 들고 있어서 주목된다. “쉴레겔에 의하면, 아이러니는 모순적 존재인 인간에 대한 애정과 그러한 모순에 대한 인식인데, 이는 독일 낭만주의의 역설을 훌륭히 정의한다. 그것은 가장 과감한 첫 번째 시적 혁명으로서, 맨 처음으로 꿈의 무의식적 영역, 잠재 의식, 에로티시즘을 탐구하였고, 동시에 과거에 대한 향수로부터 최초로 미학과 정치학을 만들어냈다.” 파스, 앞의 책, pp.59-60.
이는 조화와 통일을 추구하는 것만으로 낭만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에 뚜렷이 선을 긋는 것으로, 청마에게 있어서의 모순이나 꿈, 그리고 향수를 해석할 근거로서의 아이러니적 시각이 결코 낯선 것만이 아님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④ 또한 그는 시와 정치의 모순적 연관성을 밝히고 있어서 소위 ‘문협파’로 불리는 청마 주변의 인물들에게 닥친 모순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암시를 주기도 한다. “시인들이 혁명에 대해서 환멸을 느낀 이유는 혁명에 매혹되었던 이유와 동일하다. 혁명과 시는 현재의 불평등한 역사의 시간을 부수고 다른 시간을 세우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시의 시간과 혁명의 시간과는 다르다. 혁명의 시간은 비판 이성에 의하여 기록되는 시간, 즉 유토피아의 미래이다. 반면에, 시의 시간은 시간 이전의 시간이며 어린아이의 눈에 보이는 날짜 없는 원형적 시간이다.” 파스, 위의 책, p.63
즉, 파스에 의하면 혁명 사상과 시 사상이 ‘열정적 사랑’이라는 점에서 교차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관점에서 문협파의 열정과 환멸 등의 모순적 양상을 재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⑤ 끝으로 파스는 근대시의 이중적 요소로서 우주적 아날로지의 비전과 아이러니적 비전을 들고 있다. 그에 의하면 “근대시는 아날로지 안에서 발생하는 불협화음에 대한 인식이다.” 파스, 위의 책, pp.76-77 참조.


워즈워스, 콜리지, 횔덜린, 장-파울, 노발리스, 위고, 네르발 등 모든 근대시의 창시자들에게 시는 날짜 없는(비역사적인) 시간의 언어다. 시는 태초의 언어이며 사회를 세우는 언어이다. 그러나 또한 아이러니의 언어이기도 하며, 죽음의 의식인 역사 의식으로서 아날로지를 깨뜨리는 분열의 언어이기도 하다. 파스, 위의 책, p.77


아날로지...모든 존재와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상응에 대한 믿음...만일 아날로지가 우주를 시로 바꾼다면, 조화롭게 용해되는 대립물로 이루어진 텍스트로서의 시는 소우주가 된다....시는 이성이 아니라 리듬으로 이루어진 또 다른 정합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응이 깨어지는 순간이 있으며, 그러한 불협화음을 시에서는 아이러니라 부르며 삶에서는 죽음이라고 부른다. 파스, 위의 책, p.76.


파스의 위와 같은 언급들은 본고에서 청마를 바라보는 관점과 일치한다. 청마에게서의 모순, 즉 相應과 距離에 대한 인식의 공존은 소위 근대시의 ‘낭만적’ 전통 속에서 비로소 제대로 읽혀질 수 있을 것이다.
낭만적 낭만적 아이러니에서 ‘낭만적’은 무엇인가?......(*1)그것은 주관주의의 폭발이며, 문학과 예술, 그리고 철학에서의 자의식의 폭발이다; (*2)그것은 예술의 초월적 본성을 믿는다; 그리고 예술가들의 반신적인quasi-divine 천재성과 창조성을 믿는다; (*3)그것은 우주를 무한한 것으로서, 변화와 생성, 그리고 유기적 성장이라는 역동적이고 창조적으로 혼란스런 과정으로 본다; 그것은 “무질서와, 변전, 신비와 파편화를 그러한 창조적 혼돈의 요소들--그로부터 더 나은 세상이 형성될 수 있는--로서 감내했고 진정으로 환영했던” 하나의 “열린 이데올로기”를 발전시켰다. Bishop, Lloyd, Romantic Irony in French Literature, Vanderbilt Univ. Press, 1989, pp.15-6
아이러니 아이러니에 대한 논의는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다. 우선, 낭만주의 이전의 아이러니를 검토해 보자면, ‘에이로니아’(eironeia)라는 말은 맨처음 플라톤의 대화편에 등장한다. 플라톤은 이 저서에서 소크라테스의 대화술에 걸려 자신의 무지가 폭로된 사람들이 그의 대화술을 비꼬는 뜻으로, 즉 위장과 은폐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후 Cicero와 Quintilian과 같은 로마의 수사가들은 부정적인 의미로서보다는 긍정적인 의미(상대방의 약점을 찌르고 비난하기보다는 고상한 깨우침을 주려는 의도의 아이러니)로 전용해서 사용하긴 했지만 그리스 이후 18세기에 이르는 동안 아이러니는 수사적 의미에 머물러 있었다. 르네상스와 18세기 합리주의 시대를 거치는 동안 아이러니는 보다 새로운 조명을 받기도 했지만, 현대문학과 철학에서 통용되는 뜻으로서의 아이러니의 개념이 성립된 것은 19세기 낭만주의자들에 이르러서이다. 이때 비로소 고전적인 수사적 의미를 넘어서서 세계 및 인간의 근원적인 존재 조건을 인식하는 방법으로까지 확산되었던 것이다. 슐레겔, 졸거와 같은 낭만주의자들은, 개인과 세계, 의지와 운명, 우연과 필연 등에 나타나는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비극적 정서를 발산하는 것으로 아이러니를 인식하는데, 이것이 ‘낭만적 아이러니’이다. 청마문학의 모순적 양상이나 비극적 정서를 고찰하기에는 바로 이러한 ‘낭만적 아이러니’의 개념이 적합한 것으로 판단한다. 낭만적 아이러니 이전의 아이러니가 수사적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 이후의 아이러니의 개념은 매우 다양한 의미로 각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 내포된 고전적 의미로서의 원천, 즉 아이러니의 본질이 상반되는 의미의 이중성에 있다는 점은 지속되고 있다. 철학분야에서 키에르케고르나 사르트르가, 문학분야에서는 프라이와 리챠즈가 이 개념을 중요하게 사용하고 있다. 20세기 영미시론의 토대를 마련한 리챠즈의 아이러니 개념은 ‘대립하는 두 충동(또는 정신적 가치)의 조화’라고 정의될 수 있다. 이러한 개념에 따라 리챠즈는 모든 훌륭한 시는 구조적으로 아이러니를 내포한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내포하는 시’라 명명하고 있다. 이 외에 뫼케나 부스의 아이러니에 대한 설명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以上 오세영, ꡔ문학연구방법론ꡕ, 시와시학사, 1993, pp.312-315에서 발췌). 하지만 최근의 아이러니에 대한 이론서의 번역이나 ‘낭만적 아이러니’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는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어서 논의의 진전을 이루어내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한편, 아이러니에는 수없이 많은 종류가 있지만, 문학에 있어서 그것은 대체로 네 가지 관점에서 분류될 수 있다. “첫째는 수사학, 둘째는 시의 구조, 셋째 픽션 혹은 극의 플롯, 넷째는 문학과 인생에 대한 일반적 태도 등이다. 이와같은 기준에 의해서 문학의 아이러니는 ①말의 아이러니(verbal irony) ②신비평 그룹의 용어로서 구조적 아이러니(irony as poetic structure), ③극적 아이러니(dramatic irony), ④낭만적 아이러니(romantic irony) 등으로 분류된다.”(오세영, 위의 책, pp.322-2). ①말의 아이러니 또는 언어적 아이러니로 불리는 수사적 비유로서의 아이러니는 ‘표현된 것’과 ‘의미된 것’ 사이의 상충에서 오는 시적 긴장, 즉 이면에 숨겨진 참뜻과 대조되는 발언을 가리키는 것으로 흔히 ‘반어(법)’으로 번역되는 것을 가리킨다. ②신비평 그룹의 아이러니는 리쟈즈의 개념이 대표적인데, 앞서 개괄했듯 그는 아이러니를 대립 혹은 모순되는 두 충동(혹은 정신적 가치)의 조화라고 정의하고, 모든 훌륭한 시는 구조적으로 아이러니를 내포한다고 말한다. ③극적 아이러니는 주인공이 추구하는 것과 정반대로 전도되는 사건이나 상황 혹은 플롯의 발전을 가리킨다. 작가와 관객은 알고 있는 것을 주인공은 모르고 있는 것, 그러한 무지와 인지 사이에서 발생하는 아이러니로, ‘소포클레스적 아이러니’나 ‘비극적 아이러니’, ‘운명의 아이러니’ 등 다양한 용어들을 파생시킨다. ④낭만적 아이러니에 대해서는 본고 全般에서 다루고 있지만 간략히 요약하자면, 이것은 우주, 자연, 인생을 모순과 갈등으로 차 있는 것으로 본 낭만주의자들에서 유래한 일종의 세계관, 인식과 태도로서의 아이러니를 가리킨다. “개인과 세계, 의지와 운명, 우연과 필연 등에 나타나는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비극적 정서를 발산하는 것으로 아이러니를 인식”(조성훈, 「아이러니의 제한경제」, 중앙대석사, 1998, p.3)하는 것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삶과 문학을 논한다.
에 관한 논의는 주로 독일의 비평가이자 미학자인 프리드리히 폰 슐레겔이 행한 낭만주의의 이론적 성찰에 의존하고 있다. 슐레겔에게 있어서, 인간에 의해 경험된 것으로서의 우주는 “이성적 질서로 환원될 수 없는 하나의 무한infinitude(청마에게는 ‘광대무변’과 같은 용어로 사용된 것)이며, 카오스이고, 모순과 불일치의 복합체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제한된limited 지성은 그 절대absolute의 질서를 그려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질서를 엿볼 수 있을 뿐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현실화하기 위해 애쓰는 순간 또는 다른 이들에게 표현하려고 하는 순간 우리는 모순과 역설에 놓이고 만다”. Immerwahr, 「슐레겔의 아이러니에서의 주관성과 객관성」, 비숍, 앞의 책, pp.1-2에서 재인용

티크, 졸거 “칼 졸거는 진정한 아이러니를 세계의 운명에 대한 관찰과 관조로부터 시작된다는 개념을 제시한다.” 조성훈, 위의 논문, p.3
, 그리고 아담 뮐러에게서처럼, 슐레겔에게 있어서도 아이러니는 단순히 문체적이거나 수사적인 장치가 아니었고, 심리학적이고 철학적인 함의를 지닌 우주 일반의 전망, 비전의 양식mode of vision이었다. 조성훈, 위의 논문, p.3
또한 그 양가적ambivalent 태도(소외-동일시; 혐오감-공감)는, 인간 정신을 근본적으로 불안정하고 모순된 것, 그리고 예언할 수 없는 것으로 보는 견해에서 유래하며, 작가들의 느낌feeling의 양가성(“유쾌는 때때로 슬프다. 그리고 우울은 그 자신의 입술에 미소를 짓는다”), 앎knowledge의 양가성(“완전하게 진실한 것과 완전히 거짓인 것...(?)”), 도덕적morals 양가성(“진흙과 하늘의 이 혼합”), 언어language의 양가성과 불완전성(“자신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할 때 말은 얼마나 절망적이며 단어들은 보잘것없고 차가운 것인가”)에 토대하고 있다. 비숍, 위의 책, pp.1-2, p.15 참조.

ꡔ철학적 단장ꡕ에서 슐레겔은 아이러니를 “영속적인 역기저(permanent parabasis)”라고 부르는데, 여기에서 역기저(parabasis)라는 용어는 작품 전체를 형성하는 구조적 원칙으로 설명되고 있다. 폴드만에 따르면 역기저는 “하나의 담화의 중단, 개입, 분열이다.”, 폴드만, "The Concept of Irony", Aesthetic Ideology, Univ. of Minnesota Press, 1996, p.178
다시 말하자면, 예술적 환상과 그 환상에 대한 명백한 인식 사이의, 그리고 특히, 확신과 자기-모순 사이의 변증법적 조심스러운 긴장으로 그것은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비숍, 앞의 책, pp.5-7 “어떠한 문장도, 어떠한 책도, 그 자체로 모순적이 아닌 것은 불완전하다.” 이와 같이 광범한 의미에서, 역기저(parabasis)는 진행중인 작품(작업)의 한계에 대한 표명된 인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낭만적 아이러니는 기술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여러 다양한 구조적 원칙들의 혼합인, 복합적 현상이다. 그것은 단순한 국부적 장치(예를 들어 어의역용antiphrasis과 같은)가 아니라, 구조적 원리이다: 자의식적인, 신뢰할 수 없는, 또는 불가지론의 서술자; 주제넘게 참견하는 작가; 복합 시점; 양가적으로 칭송되고 조소되는 주인공의 위축; 불연속적이고 독립적인 분리된 순간들의 연속으로의 시간의 분열; 열린 결말을 위한 종결의 회피; 메타픽션이 종종 픽션을 추월하는 텍스트의 자기-반영성; 모순어법, 역설, 역기저, 병렬, 몽타쥬, 또는 분위기, 주제, 문체적 인상의 갑작스런 변화와 같은 단속적인 효과들에 자주 의지하기. 그리고 그것이 자주 그러한 것처럼 전체 텍스트에 침범할 때, 그것은 철학적 또는 윤리적 입장(예들들어 전통적 가치들과 관련된 양가성), 존재론적(역설이 인간의 본성에 내재하며 “사물의 본성”에 내재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인식론적인(“우리가 진정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회의주의적 입장의 표현이 된다. 비숍, 위의 책, p.17 참조. 한편, 파스Paz는 낭만주의의 이러한 이중성을 ‘아이러니’와 ‘苦(虛, 無)’로 정리하고 있기도 하다. “낭만주의의 이중성은 음악처럼 두 종류의 음계(혹은 旋法)를 가진다. 하나는 아이러니라고 부르는 것인데, 객관의 질서 안에 주관의 부정을 편입시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苦라고 부르는 것인데, 존재의 충만함 속에 한 방울의 無로 떨어지는 것이다. 아이러니가 보여주는 것은 현실이란 드러남[現]과 숨음[實]의 이중적인 방식으로 주어지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없고, 이성의 원리인 자기 동일성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苦의 실존은 빔[虛]이며, 삶은 곧 죽음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천국이 바로 사막임을 보여줌으로써 종교를 붕괴시킨다.”(pp.64-5) “신의 죽음은 우연성과 비이성의 문을 열었다. 신의 죽음에 대한 응답은 두 가지다. 하나는 아이러니, 유머, 지적인 역설이며, 다른 하나는 苦, 시적인 역설, 이미지다. 두 가지 태도는 모든 낭만주의자들에게서 나타난다. 그로테스크한 것, 무시무시한 것, 기이한 것, 불규칙적인 것, 대조의 미학, 웃음과 울음의 결합, 산문과 시의 결합, 회의와 신앙 절대주의의 결합, 갑작스러운 변화, 도약 등,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선호는 결국 낭만주의 시인들을 이카로스, 사탄, 광대로 변화시키는데, 이것은 苦와 아이러니라는 부조리에 대한 그들의 응답이다.”(pp.65-6) 파스, 앞의 책에서 인용.


아이러니스트의 건강한 회의주의, 즉 그가 자신에게 부과한 임무에 대하여 전적인 예술가적 정의justice를 행하기의 불가능성과 자신의 한계들에 대한 매서운 인식은, 그의 ‘낭만적’ 열정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비록 완전치 않고 완결되지도 않은 방식이지만 그는 비옥하고 풍부한, 그리고 ‘창조적인’ 삶의 혼돈을 표현하기를 즐긴다. 철학적 아이러니는, 자신의 정신에 대한 스스로의 이론과 허구들에 대한 열정적 헌신 자체를 비판함에 의해서(이것은 슐레겔이 자기-파괴(self-destruction)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인데), 사상가와 예술가(특히 예술가-사상가)가 무한히 변화무쌍한 실재의 풍부함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한다. 게다가 예술가는 자신의 창조물에 대한 우월성과 자유로움 속에서 신적인 창조성을 만끽하며, 유희적으로 가지고 놀려고 한다. 그는 마찬가지로 또 다른 이유에서 그 창조물을 가지고 노는데: 그는 환영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인식을 스스로 잘 알고 있으면서 그 환영을 깨려는 의무감과 함께 그렇게 하는 강렬한 즐거움을 느낀다(이것은 자기-파괴의 또 다른 양상이다). 그리고 창조의 바로 그 순간에, 그가 유희적으로 파괴했던 것을 재-창조할 수 있다는 확신을 느낀다. 슐레겔은 진실하고 숭고한 예술에서의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의 중요성에 대한 칸트와 쉴러의 이념들에 영향을 받았다. 슐레겔이 말하기를, 시인의 변덕(순간적 충동)은 그 자신 위에 어떠한 법도 용납하지 않는다. 비숍, 앞의 책, p.4


위의 인용문에서 보이듯, 아이러니스트의 회의주의는 ‘건강한’ 측면을 갖고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예술가에게 “무한히 변화무쌍한 실재의 풍부함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그것이 야기하는 자의식의 소용돌이를 예측할 수 있다. 뫼케는 바로 이와 같은 것을 관찰했었다. “어떤 사람이 한번 자기-의식적이게 되면 그는 거의 다음 발을 내딛을 수조차 없다. 그리고 자의식적인 것에 대해 의식하게 되고 자의식적인 것에 대해 의식하는 것에 대해 의식하게 된다.” 뫼케, ꡔ아이러니의 범위ꡕ, p.201. 비숍, 위의 책, p.5에서 재인용. “알베르 베겡이 쓴 바와 같이(ꡔ낭만적 영혼과 꿈ꡕ, p.33), 낭만적 아이러니스트는 자신을 자신에 대한 관객으로 만들며 그 관객의 관객으로 만든다. 그리고 어빙 배빗이 주석했던 것처럼(ꡔ루소와 낭만주의ꡕ, p.241), 그 자신의 무관심함에서조차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는(이것은 무한으로 계속되는데) 낭만적 아이러니스트에게는 무언가가 있다.”(비숍, 위의 책, p.5)

이렇듯 낭만적 아이러니는 그 자체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갖고 있는 듯이 보인다. 즉, 그것은 예술가들에게 실재의 충만함에 참여할 수 있게 하고 자신의 인식을 확대하게 하는 면을 갖고 있다. 그 자신이 창조한 형식과 신화들을 유희적으로 폐기하고de-creating(‘나는 시인이 아니며 내 시는 시가 아니다’라는 청마의 반복되는 발언들) 다시 전혀 새로운 형식과 신화를 재-창조re-creating하면서 그는 끝없이 확장하는 의식의 과정에 융화된다. ꡔ리체움ꡕ에서 슐레겔은 낭만적 아이러니가 “저자를 그 자신 위로 고양시킨다”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자기-아이러니self-irony의 자기-파괴가 자기-증대self-enhancement로 이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이러니한 작품은, 그것이 그 자신의 한계를 지적한다는 바로 그 사실에 의해서, 신(무한)the Infinite의 기호와 상징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낭만적 아이러니에는, 베다 알레만Beda Allemann이 지적했듯이, 다른 어두운 면이 있다; 만약 그와 같은 아이러니가 초월성으로 인도하지 않는다면, 어떤 부정적이고 니힐리스틱한 경향들이 전경화될 수 있는 것이다. 헤겔과 후기 키에르케고르는 그 속에서 이러한 ‘절대적 부정성의 원리’를 보았다. 낭만적 아이러니는 너무 냉소적으로 모든 것을 아이러니화해서, 작가의 상상적 세계에는 아이러니스트 자신에 대한 권태로운 자의식과 니힐리즘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20세기에 이러한 비난은 배빗, 프리슬리, 그리고 슐레겔적 아이러니의 무책임한 <방종license>에 대해 이야기한 블라디미르 잔켈레비치에 의해 더욱 웅변적으로 재연되었다.” 비숍, 앞의 책, p.9.

청마 시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 청마론의 부진 현상 등등은 이와 같은 아이러니의 어두운 면과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더구나 청마는 자신의 시의 주조적 분위기에 쓰라림bitterness 또는 우울한melancholy 색조를 띠게 했다. 청마의 낭만적 아이러니는 인간본성의 해결할 수 없는 이중의식ambivalence과 모순contradiction 그리고 역설paradox에 대한, 그리고 인간적 가치들의 영역에서의 상대주의relativism와 인식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문제에서의 과격한 불가지론agnosticism에 대한 인식과 예술가적 표현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신의 곤경을 의식하고 있는 의식이다. 낭만주의 시기의 프랑스 작가들의 경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비숍은 계속해서 왜 프랑스 작가들이 낭만적 아이러니에 의존했는가를 8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비숍, 위의 책, pp.9-10 참조), 이 또한 청마가 낭만적 아이러니에 기울게 된 이유들을 정리하는 데 참조가 된다.

린다 허천에 의하면 “아이러니는 일종의 의사소통적 과정이며 그것은, 의미(말해진 것, 말해지지 않은 것)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사람들(아이러니스트, 해석자들, 목표물) 사이에서도 작동한다는 의미에서, 관계적 전략” Hutcheon, Linda, Irony's Edge, Routledge, 1994, p.58
이다. 허천은 여러 세기에 걸친 아이러니에 대한 논평들에서 설명된 그것의 기능들을 도식화한 바 있는데(다음의 도표 참조), 이는 청마와 그의 문학, 그리고 그에 대한 해석자들의 관계에 있어서의 ‘분열(split)’ “아이러니 모두에서 핵심적 구조는 분열(split)이다.” 조성훈, 앞의 논문, p.7
양상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포함, ‘우호적 공동체’-----------<집합성>------------배제, 엘리트적 ‘內집단’
교정적 풍자-------------------<공격>------------------파괴적, 공격적
초월적 전복적--------------<반대․대립>---------------모욕적, 무례한
非독단적, 脫신비화-------<일시적․임시의>--------회피적,위선적,이중적
자기-歎願, 애원----------<자기-방어적>-------------오만한, 수동의
새로운 전망의 제공------<거리․분리>---냉담한, 무관심한, 비헌신적
유머러스한 유희적 놀림---<놀이의>----무책임한, 사소한, 환원,감소
풍부한 복합성 애매성(+)--<복잡성>--오도하는 부정확한 애매성(-)
강조하는, 정확한------<강화․증대>------장식적인, 부수적인
<표: “아이러니의 기능들”> ◀----------------------maximal affective charge------------------------▶
inclusionary "amiable communities"-----exclusionary elitist "in-groups" corrective satiric------------------------------destructive sggressive
transgressive subversive-----------------------insulting offensive
non-dogmatic demystifying----------evasive hypocritical duplicitous
self-deprecating ingratiating---------------arrogant defensive
offering a new perspective------------indifferent non-committal
humorous playful teasing---------irresponsible trivializing reductive
complex rich ambiguous(+)--misleading imprecise ambiguous(-)
emphatic precise-------------------decorative subsidiary
◀------------minimal affective charge-----------▶
Linda Hutcheon, Irony's Edge, Routledge, 1994, p47. “The functions of irony”


위의 도표에서 제시되어 있듯, 허천은 그것들을 경사진 층위의 형식으로 조직화한다. 어조와 암시된 자극에 있어서 온건한 것에서부터 비평적 열도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중간층으로 그리고 더욱 논쟁적인 영역에로 이르는 형식인 것이다. 즉 도표에서 위로 올라가는 움직임은 최소한의 감정적 대립으로부터 최대한의 것으로의 움직임을 나타낸다. 논의의 명확성을 위해, 비평적 열도가 뚜렷해지기 시작하는 중간층부터 청마와 관련하여 검토해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생략된 세 항목에 대한 허천의 설명을 발췌․부연 설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① 역할은, 비판적 경계에서 비교적 작기는 하지만, 이미 다양한 평가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여기에서 ‘강화’라는 말은, 아이러니의 친숙한 의도적 사용 또는 해석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들에게 이것은 긍정적 기능을 갖는다: 그것은 ‘강조’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 생각되며 종종 의사소통, 특히 태도attitude의 의사소통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와 똑같은 기능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말하자면, 그러한 강화하는 아이러니는 단순히 ‘장식적’이고, ‘부수적’인 것, 비-본질적인 것이다. 따라서 아마도 가장 문제가 덜 한 형식에서조차 아이러니는 그 기능에 대한 해석들에서 뿐 아니라 평가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다음, ②과 관련해, 어떤 비평가의 눈에 아이러니는 모든 예술의 ‘복합성’ 또는 ‘풍부함’의 전형이다. 즉 모든 미적 담화의 근거가 되는, 조절되고 긍정적으로 가치부여된 ‘애매성’의 형식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해석에의 요청’과 그 기쁨을 발하는(Culler1974:211) 반성적 양식으로 아이러니를 보는 관점을 포함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능 주변으로 부정적 함의가 모이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불필요한 복잡성 그리고 ‘애매성’(이때 이것은 풍요하게 하는 것이기보다는 오도하는 것이 된다)이 오해, 혼동, 또는 ‘부정확성’ 그리고 의사소통의 명확성 결여 등을 야기할 수 있다는 관념에 주목할 경우가 그러하다. 그리고 그와 같은 것이 진정,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missed’ 아이러니를 가졌다고 느끼거나 느끼게 된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것이다. 끝으로, ③아이러니의 기능은 좋게 보았을 때 그것은 ‘유머’와 위트와 잘 어울릴 듯하며 따라서 ‘놀이’라는 평가할 만한 성격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와 같은 긍정적 가치를 주장하는 비평가조차 종종 금새, 더욱 부정적인 어떤 것을 암시한다: 아이러니는 유연하고 정교하지만 그것은 또한 피상적이다(쟝켈레비치1964:35). 거기서 조금만 나아가면, 아이러니를 ‘무책임’하고, 공허하며, 어리석은 것으로 보는 것에 이른다. “소수자의 시대 또는 가치의 전환 속에서, 아이러니는 아주 자주, 즐기려는 권리를 전횡하면서도 그 권리 뒤에 어떠한 정확한 실재(precise positives)도 제공하지 않는, 도시적인 여흥의 어조가 된다. 그것은, 피상적으로 세련되고 문명화된, 하지만 진정 그렇게 되기에는 너무 도덕적으로 무책임한, 단순한 우월성의 제스쳐로 타락할 수 있다.”(Dyson1965:1). 이러한 친숙한 도덕적 참조틀이 없이도 아이러니는 예술의 본질적인 진정성을 ‘사소화하는 것’으로서 보일 수 있다. 이러한 입장position은 유럽 낭만주의에서 야기되었고, 19세기 말의 모럴리즘에서 양육되었으며, 20세기 모더니즘의 어떤 양상 속에서 비로소 꽃피게 되었다. 예술(그리고 비평)에서 ‘중요한 것significant’은 종종, 엄숙한 것은 말할 것 없고, 너무 진지하게 보여진다. T.E.흄은 자신의 1936년 에세이, 「낭만주의와 고전주의」에서, 바로 그와 같은 엄숙성에 대결할 수단으로서 위트와 아이러니의 고전적 관념을 복귀시키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의 영향은 일반적으로 미국 신비평뿐만 아니라 엘리어트와 리챠즈에 의한 아이러니에 대한 재평가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 허천, 앞의 책, pp.48-9.

는 청마 시에서의 ‘바라봄’과 관련된 아이러니적 기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이러니가 떼어놓는 비유라는 것, 목격하기의 비유라는 것 허천, 위의 책, pp.49-50
에서 그 기능에 대한 두 가지 반응이 가능해 진다. 즉, ‘거리’는 무관심성 또는 거만함과 우월성 등과 경멸적으로 결합되기도 하며, 새로운 전망에로 이르는 수단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은 작품보다 ‘우월함’을 확보하는 전략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는 ‘은폐’와 ‘폭로’의 전략과 이어지기도 한다. 즉, 작가는 자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점을 드러내면서, 즉 자신의 완벽함을 은폐시키면서 노출시키는 것이다. 한편 “아이러니를 통해 가능케 된 새로운 전망이라는 거리화 기능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도 있다. 즉 명백한 판단, 특히 그러한 판단이 적절하거나 소망스럽지 않은 시기에 있어서 그러한 것의 전횡을 거절하는 것으로 아이러니를 보는 것이 그것이다.” 허천, 앞의 책, p.50
청마의 전쟁 서정시가 보여주듯이 이데올로기적 대립의 시절 속에서 청마의 문학이 두드러져 보일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아이러니의 ‘거리화’ 기능이 가능케 한 탈이데올로기적 성격에 관련될 것이다.
적 기능은 청마의 ‘자학’적 시편들의 양가적 의미(자학/의지)를 고려케 한다. 즉 아이러니의 ‘자기-비하self-deprecating’적 용법은 자신보다 못난 모습으로 나타나는 에이론eiron의 ‘자기-탄원적’ 측면을 갖지만, 때때로 이것은 그 자신을 깨뜨릴 수 없는 것invulnerable이 되게 하려는 정교한 시도로 해석되었다. 청마의 「바위」에 나타난 응축적 상상력이나 ‘자학’과 ‘의지’의 모순은 이러한 시각에서 재조명될 수 있다(본고 Ⅲ-1-1에서의 ‘자기부정’ 논의 참조).
기능 또한 에이론의 형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이번에 그것은 냉소적이고 위선적인 것으로 보여진다. 의도론적 이론들은 또한 이에 대해 윤리적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이러한 잠정성은 권위적 선언에 대한 ‘탈권위적undogmatic’인 대안으로 해석되기도 하며, “진정한true” 예술의 본질이 되기도 한다. 허천, 위의 책, pp.51-2
이러한 입장들은 “우리가 확신할 수 없을 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아이러니를 기능화하는 것이며 그와 같은 잠정적 입장이 가치있는 것으로 보일 때, 그것은 종종 ‘탈신비화 demystifying’로 불린다. 하지만 그것이 전혀 특별하게 가치화되지 않을 때, 위선, 이중성, 또는 애매한 표현이라는, 그것의 감정적으로 짐지워진 용어들이 출현하곤 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허천, 위와 같음.
시나 시인에 대한 청마의 모호한 태도 잠시 청마론에서 논란이 되어 온 부분을 이러한 아이러니적 구도 속에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시인이 아닙니다”라는 청마의 발언은 ‘말의 아이러니(verval irony)’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말의 아이러니가 하나의 기표로써 기의를 두 개로 분열시키는 것이라면, 위의 발언은 해석자들 사이에서 “나는 시인이 아닙니다”라는 하나의 해석과 “나는 (관습적으로 칭하는) 직업적 시인이 아닙니다”라는 또 다른 해석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아이러니스트로서의 청마는 이러한 발언을 통해 수신자들의 상반된 반응을 예상했겠지만, 정작 그가 목표한 바는 시를 쓰면서 살아가는 것의 의미에 대한 물음 자체이다. 클리언스 브룩스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의 문학작품 속의 하나의 요소가 필연적으로 그것이 가지고 있는 문맥의 <압력>의 결과로서 겪게되는 의미의 변용(왜곡)이 일어날 때 우리는 아이러니라고 부를 수 있다”(조성훈, 앞의 논문, p.14). 아이러니스트로서의 청마는 그러한 맥락 속의 발언을 통해 ‘시인’이라는 관습적 체계와 신념의 틀을 대상화하고 반성적 위치로 불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또한 문학사적으로 청마가 놓인 맥락을 소위 문협파의 그것에 놓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생의 구경적(절대성) 탐구, 그 형식의 발견이라는 명제는 주체가 전인생을 걸고 대결할 때만 가능한 것이며, 이 발상법은 운명이라는 명제와 등가”라고 한다면, 여기에서 “작가, 곧 구도자”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것이며, 이럴 경우 직업적 작가란 개념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김윤식, ꡔ한국근대문학사상비판ꡕ, 일지사, 1978, p.199) 하지만 시인 이형기는 「상식적 문학론(3)--<인생이라는 추상>의 함정」(ꡔ현대문학ꡕ, 1962.9)에서 청마의 이러한 입장에 대해 “시인에 대한 모욕”(p.197)으로 받아들이고, 그 “인식의 착도”(p.198)를 비판한다. 이 글에서 이형기는 자신의 예술지상론만 반복해 내세우고 있을 뿐, 청마의 반성적 문제제기 자체는 정당하게 다루고 있지 않다. 전후세대에 의한 60년대 순수문학론의 재생산 과정에서 ‘언어의 자율성’, ‘형식의 문제’(‘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 등은 새로운 차원으로 순수문학론을 전개시켰던 것이고, 이 지점에서 문협파(특히 청마)와 60년대의 신세대 순수문학파가 갈라지고 있는 것이다(임영봉, ꡔ한국 현대문학 비평사론ꡕ, 역락, 2000, pp.118-125 참조.) 이형기의 이러한 비판에 대한 청마의 답변이 「문학과 인간」(ꡔ현대문학ꡕ, 1962.12)이라는 산문이다. “무도하게 인간이 짓밟힐 때 그 짓밟히는 자가 이민족이요, 짓밟는 자가 설령 내 조국이라 할지라도 인간을 옹호하기에 동댕이친 펜대 대신 총을 들고 제 조국까지 감연히 항거하고 일어서는 용기와 지성을 가진 위인이기를 바라고 싶을 뿐이다”(유치환, 「문학과 인간」, ꡔ현대문학ꡕ, 1962.12, 박철석, ꡔ새발굴 청마 유치환의 시와 산문ꡕ, 열음사, 97.11, p.412에서 인용.) 이형기는 후에, 즉 문단 권력이 4.19세대로 넘어가던 시기에 다시금 유치환론을 쓰지만 여기에서도 자신의 입장을 재확인하고 있을 뿐이다. 이형기, 「유치환론--ꡔ미루나무와 남풍ꡕ을 중심으로」(ꡔ문학춘추ꡕ, 1965.2)참조. 흥미로운 것은 63-65년경 우리 문단에 불어닥친 ‘순수참여논쟁’ 과정에서 이형기가 “현실적인 효용과는 무관한 부분에 작용하는 것이 이른바 문학”이라는 논리를 들어 김동리, 서정주 등을 옹호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정주에 대한 비판은 64년 6월에서 11월에 걸쳐 김종길에 의해 거세게 이루어진다(‘영매론’). 미당과 청마의 옹호자들이 갈리는 장면의 하나라고 생각되어 기록해 둔다.
나 그의 단장 형식들이 갖는 파편적이고 잠정적 양상들은 이러한 아이러니의 기능과 관련되어 고찰될 수 있을 것이다.
④ 아이러니의 기능은 작품 내적인 모순과 해석․평가에서의 대립상과 직접 관련된다. 마음과 표현의 지배적인 습관에 대항하고 정치적 억압을 안팎으로 해체하는 것으로 작동하기도 하는 아이러니의 이러한 기능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內’에 위치한 사람들에게는 도전적이고 위협적인 독설로 보일 것이고, 그러한 지배력을 해체하려고 작업하는 소외된 사람들에게 그것은 ‘전복적’이고 ‘초월적’인 것으로 새롭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이것은 안과 밖의 대립적 구조가 갖는 논쟁적 측면일 뿐이며, 그 아이러니적 구조가 갖는 복잡한 양상(부정을 통해서만 긍정을 구성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폴드만의 「아이러니의 개념」)에 대해서는 이하의 작품 분석에서, 구체적으로 검토될 것이다.
이라는 말로 표시된 아이러니의 “호전성”은 아이러니스트가 자신의 내부에 ‘심층’을 지니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어떤 이론가들에게는, 그러한 부도덕과 어리석음을 교정할 확실한 전망firm perspective을 갖는 것, 즉 도덕적 일탈을 바로잡을 “진정한 기준real standards”을 갖는 것은 분명히 아이러니스트나 해석자를 위해서 긍정적인 것이다. 허천, 앞의 책, p.53
오늘날 이와 같은 입장stand에 대해 점차 의문시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권위와 진리라는 그와 같은 위치를 가정하는 것은 그 자체가 어리석고, 그렇지 않다면 부도덕한 일일 것이라고 주장하지만(가령, 미국 신비평에 의한 아이러니의 “중성화neutralizing”는 아이러니의 풍자적 기능으로부터 거리를 갖게 하여 그 단어의 용법으로부터 도덕적 함의를 제거한다), 허천은 “아이러니의 어떤 풍자적, 교정적 기능의 지속적인 현존 뿐만 아니라 아이러니에 대한 어떤 감정적 강세의 지속적인 현존에 대해 주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청마의 사회비판시들 또한 아이러니의 교정적 기능과 관련되어 논의될 수 있을 것이며, 그러할 때, 그 심층과의 아이러니적 관련 양상 또한 고찰될 수 있을 것이다.(Ⅲ-1-2장에서의 「假寓記」분석 참조)
⑥ 끝으로 은 아이러니의 사회적 기능을 가리키는 것으로, 아이러닉한 거리두기에는 우월감/열등감이라는 이원론이 함축되어 있다고 몇몇 이론가는 보고 있다. 아이러니가 “배제적 익명성 속에서 여행하며 그 고양된 위치에서 연민을 갖고 일상적 평범한 말을 내려다 보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 의해 이해되는 것은 아니라는 키에르케고르의 유명한, 그리고 많이 인용되는 진술을 보라. 아이러니가 지적 태도로 불려진 이유는 이 때문이며, 아이러니스트의 입장에서 그것은 귀족적이며 반-사회적인 것이기조차 하다. 하지만 배제하기도 하고 포함하기도 하는 아이러니는 또한 아이러니스트와 해석자 사이의 “우호적 공동체”(웨인 부스)를 창조하기도 하며, 따라서 협력, 나아가 공모의 즐거움을 환기한다. 허천, 위의 책, pp.54-5에서 발췌
청마 시에 대한 승인과 비승인은, 이러한 아이러니에 대한 인식여부와 더불어 그 가치평가와 관련된 수용여하에 따른 결과로 이해될 수 있다.
예술과 삶을 일치시키고자 하면서 예술 행위의 의미에 대해, 그리고 세계와 자신의 모순에 대해 반성적 시선 “세계와의 관계 또는 불일치에 대한 인식과 태도로서의 아이러니는 보다 심오한 철학적 성찰을 가능하게 하며, 자아에 대한 반성의 미학을 촉구하기도 한다.” 조성훈, 「아이러니의 제한경제」, 중앙대학교 석사논문, 1998, p.4
을 종생토록 견지했던 청마의 문학 행위가 갖는 의미를 공정하고 정당하게 평가하고자 한다면 그 明暗을 동시에 바라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청마 문학작품들의 구조와 의미를 해명하고 밝히는 데 있어서, 위에서 개괄한 낭만적 아이러니의 다양한 특성들이 유효한 방법론적 관점들을 제공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Ⅱ. 아이러니의 구조와 내적 근거

1. 아이러니스트의 관조와 ‘거리’

김춘수는 유치환의 10週忌를 맞이하여 「靑馬의 反語」 김춘수, 「청마의 반어」, ꡔ부산일보ꡕ, 1977. 2. 13
라는 짧지만 흥미로운 글을 쓴 바 있다. “세심한 배려와 무관심이라고 하는 反語的 균형”을 이루었다고 청마의 인간적 면모를 그려 보이고 나서 “선생의 이성관계가 겉으로는 수줍음에 몸을 숨기듯이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매우 연연하시다”라는 말로 그 겉과 속이 다름을 드러낸다. 이어 청마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에 대해서도 “이 경우의 반어는 선생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다. 그렇게 세심하신 선생께서도 어찌 아셨으랴!”라는 말로 이 글을 끝맺고 있다.
본론의 서두에서 김춘수의 이 글을 거론한 이유는, 이것이 청마를 아이러니스트로 지목한 몇 안되는 글이고 청마와 오랜 기간 깊은 문학적․인간적 인연을 맺은 한 문인의 고백인 때문이기도 하지만 청마와 김춘수의 관계는 단순히 고향 선후배와 같은 인간적인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불룸이 말한 ‘영향의 불안’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는 稿를 달리하여 접근해 보려 한다. 청마에 대한 그의 글에서 보이는 지속적인 ‘은폐와 폭로’의 시도들은 그가 청마에게서 배운 아이러니스트로서의 시선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다음의 글 또한 이러한 측면을 지적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1947년 봄에 청마는 김춘수와 함께 김동리를 찾아간 일이 있었다. <그저 심심하고 깝깝해서 나들이를 나선 셈이다>라고 김춘수는 말했지만, 실은 아직도 문단의 신인에 불과한 김춘수를 소개하고 알리기 위해 상경한 것이리라. 김동리는 그 때 소공동에 있는 ꡔ경향신문ꡕ의 문화부장이었다....그렇게 해서 그 뒤 ꡔ경향신문ꡕ 문화란에 1주일 간격으로 김춘수의 시 「푸서리」와 「언덕에서」가 발표되었다”(문덕수, ꡔ청마유치환평전ꡕ, p.160) 또한 청마는 김춘수의 첫시집 ꡔ구름과 장미ꡕ(1948)에 서문을 쓴 바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김춘수의 첫시집 ꡔ구름과 장미ꡕ(행문사)....행문사라는 출판사도 청마의 ꡔ생명의 서ꡕ의 출판사와 같은 것으로 보아, 청마가 주선한 것으로 볼 수 있다....김춘수의 시에 「청마의 헬멧」이 있다...이 시를 통해서 청마와 김춘수와의 숙명적 관계의 깊이를 알 수 있다.” (문덕수, 위의 책, p.146) 김춘수가 방향전환을 뚜렷이 하는 것은 청마 사후에 간행된 ꡔ타령조․기타ꡕ(1969)에서 였다는 점을 기록해 둔다.
, 본고에서 살피고자 하는 ‘아이러니’와 ‘거리’, 안과 밖, 은폐와 폭로, 그리고 ‘(타자)부정’ 등을 강하게 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뫼케는 ‘어떤 일을 말하면서 그 반대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아이러니에 대한 고전 수사학적 정의를 기초로 그것을 극적인 아이러니의 개념으로까지 확대시키고, 아이러니가 갖는 보편적인 속성으로 여섯 가지 특징을 들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거리’이다. D.C. Muecke, Irony, Methuen & Co. LTD, 1970, pp.24-48. 오세영, ꡔ문학연구방법론ꡕ, 시와시학사, 1993, pp.319-320에서 재인용. 뫼케가 들고 있는 여섯 가지 아이러니의 특징으로는 ①순박함 혹은 모르면서 자신에 참, ②실제와 그것이 현상으로 나타난 것 사이의 모순 ③희극적인 요소(일종의 웃음 혹은 고통), ④거리의 요소, ⑤극적요소, ⑥심미적 요소 등이 있다.
린다 허천은 이것의 기능을 좀더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아이러니의 ‘거리화 기능 distancing function’과 관련하여 허천은, 그것이 무관심성과 우월성에 연결되기도 하고 새로운 전망에 이르는 수단이 되기도 하며, 또한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고 소개한다. 린다 허천, 앞의 책, pp.49-50

청마의 문학과 그의 인간적 면모에는 위와 같은 아이러니의 ‘거리화 기능’이 깊이 각인되어 있다. 청마 스스로 자신의 무관심, 무표정의 의미에 대해 말해 놓은 바를 우선 참조할 수 있다.

“나의 내면의 표정은 무표정한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나는 오히려 내 둘레의 모든 것들에 찬찬히 주의가 가고 똑똑히 살펴짐을 느낍니다.” 이영도 최계락 선편, ꡔ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ꡕ, 중앙출판공사, 1967, p.335. 이 책은 청마 사후 출간된 유치환의 서한집이다.


무표정한 ‘바라봄’이 자신의 ‘내면의 표정’임을 말하고 있는 위의 글을, 아이러니가 “떼어놓는 비유”이며, “목격하기의 비유”라는 허천의 지적 린다 허천, 위의 책, p.49
과 함께 생각해 볼 때, ‘바라본다’라는 것이 아이러니스트로서의 청마의 특징적인 면모임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청마의 시어 가운데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라보다’라는 동사이다. ‘바라봄’과 관련된 대표적 작품들로는 「점풍시」, 「점경에서」, 「눈추리를 찢고 보리라」, 「출생기」, 「낙엽」, 「A와 A'」, 「춘신」, 「형벌」, 「별」, 「북두」, 「문을 바르며」, 「내가 보힌다!」, 「원경」, 「폐병」, 「술집에서」, 「산하」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나’와 ‘또 하나 나’의 시선을 동시에 보여주는 「낙엽」, 실험적인 碑文 형식을 써서 ‘밖’의 시선을 전경화한 「폐병」, 분열된 자아의 모습을 직접 드러낸 「A와 A'」 등은 주목을 요한다.
또한 ‘바라봄’은 청마의 초기에서 후기까지의 지속적이고 본질적인 방법론이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그의 초기시 「点風矢」(ꡔ소제부 제1시집ꡕ 1930년 9월 3일, 형 동랑을 중심으로 동심, 추상아, 장춘식과 함께 ꡔ소제부 제1시집ꡕ 회람지를 발간. 여기에 유치환은 시 「오월의 마음」, 「축복」, 「산」, 「바다」, 「두꺼비에게」, 「봄을 맞이하는 동구나무」 등 26편을 발표한다. 형 유치진의 이름으로 발간되었지만, 청마가 문학적 생애를 통해서 주동하여 낸 최초의 동인지라고 한다.(문덕수, ꡔ청마유치환평전ꡕ, p.85 참조. 작품은 박철석 편저 ꡔ새발굴 청마 유치환의 시와 산문ꡕ(1997)에 수록.)
, 1930)에서부터 청마는 “늘 멀고도 아득한 것을 바라랴는/ 사람의 눈--나의 두 눈알이여”라고 표방했을 뿐만 아니라 말년에 이르러서까지 “나는 언제부터 내 둘레의 모든 것을 언제나 마지막 눈으로 곰곰이 보고 느끼는 것입니다.”(ꡔ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ꡕ, p.337, 이영도에게 보낸 1960년 6월 4일자 편지)라고 쓰고 있다.

낙엽이 지니 훠언해진 건너편 등성이에
뜻하지 않은 집이 한채 있고
저녁답이 되어 내가 마당에나 나서량이면
그쪽에도 애기를 안은 사나이가 서서
외로운 양으로 이편을 바라보고 있다
(「낙엽」 전문, 제4시집ꡔ청령일기ꡕ, 행문사, 1949.5 수록)

위의 시에서 시적 화자인 ‘나’는 마당에 서서 건너편 등성이 쪽을 바라보고 있다. 거기에는 그 동안 보이지 않던 집 한 채가 모습을 드러내었고, 그 곳에서 ‘아기를 안은 한 사나이’가 이쪽을 건너다보고 있는 것을 시적 화자 또한 마주 바라보고 있다. 그 동안 나뭇잎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았고, 서로 ‘고립’되어 있던 두 공간이 통하게 되었다는 것은 죽음과 같은 고립의 끝에서(“낙엽이 지니”) 만나게 된 비일상적인(“훠언해진”) 공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시 「낙엽」은 낭만적 몽상에 적합한 시공간을 포착한 작품이기도 하다. “모든 낭만주의자들이 해질 무렵, 낙엽의 계절, 달빛에 젖은 정경들을 사랑했다. 많은 화가들과 시인들이 고독한 산책을 즐겼다.” 알베르 베겡, ꡔ낭만적 영혼과 꿈ꡕ, 문학동네, 2001, p.456
그 공간에서 ‘나’는 ‘아기를 안은 한 사나이’를 보며, 그 또한 “이편을 바라보고 있다.”
각각 다섯 어절씩, 모두 5행으로 된 청마는 ꡔ청령일기ꡕ(1949)에서 5행시를 실험한 바가 있는데, 이 작품은 그 중 하나이다.
이 시편에서 가운데 행은 시간(‘저녁답’)과 공간(‘마당’)을 표시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 전후의 1,2행과 4,5행은 의미상 대칭을 이루고 있다. 즉 1,2행에서는 ‘내’가 바라본 건너편의 풍경을 말하고, 4,5행에서는 그쪽에서도 이편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선이 교차되는 대칭적 구조의 중심을 이루는 3행(“저녁답이 되어 내가 마당에나 나서량이면”)의 ‘저녁답’과 ‘마당’은 일종의 경계적 시공간을 이룬다. 이어령이 분석한 바 있듯이, ‘저녁답’이라는 말은 낮과 밤의 시간적 경계이며, ‘마당’은 안과 밖의 공간적 경계이다. 이어령, ꡔ공간의 기호학ꡕ, pp.285-287
그러한 시공간 속에서 이쪽과 그쪽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역할을 한다. 최문규는 ‘성찰’이 ‘자아’와 어떤 관계를 형성하는가 하는 문제를 묻고 그것이 ‘분열’의 이미지와 통함을 밝히고 있다. “‘무한한 일련의 거울들’, 즉 ‘무한한 성찰’ 속에서의 주체는 자기 자신에 대한 궁극적인 확신을 결핍하고 있는 주체이기도 하다. 이 점은 낭만주의 작품의 인물들이 미메시스적 은유인 ‘호수’나 ‘거울’에서 자기 동일성보다는 분열의 이미지를 찾는 맥락과도 연결될 수 있다. 즉 그러한 은유는 바로 자기 확신과 자기 동일성의 상실을 명명하는 기호 자체로 작용하고 있다.”(최문규, 「독일 낭만주의와 ‘아이러니’ 개념」, ꡔ문학이론과 현실인식ꡕ, 문학동네, 2000, pp.92-3) 이러한 시각에 의하면, 「낙엽」에서 ‘보는’ 주체는 이중화되며, 그것은 절대적인 자아의 존재를 회의하는 장면으로 읽힐 수 있다.
즉 내다보는 것이 들여다보는 것과 겹쳐지며, 여기에서 시적 화자인 ‘나’에게도 아이를 안고 있는 사나이의 모습이 투영된다. ‘아이를 안은 사나이’ 또한 안(아이)과 밖(사나이)의 공간이 양의적으로 결합된 경계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서, 안과 밖의 교환과 결합은 이 작품의 중심 구조를 이루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의 애상적 분위기는, ‘저녁답’에 ‘마당’에 나서서 건너편 산등성이를 바라보는 ‘아이를 안은 사나이’라는 경계적 시공간에서의, ‘안과 밖’의 시선의 중첩 구조와 관련되어 있으며, 이는 분열된 시적 자아가 그 분열상을 바라보면서 자신과의 진정한 만남을 희구하는 이중적 태도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인은 슬픔 속에서 자기 자신과 위안의 시선을 나눈다. 아이러니적 관찰자로서의 시인이 내적으로 분열된 모습을 보인다는 것 청마는 1930년 9월 3일, 고향의 문우들과 함께 통영에서 프린트판 회람지 ꡔ소제부 제1시집ꡕ을 발행했으며 이 무렵부터 비로소 의식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문덕수, ꡔ청마유치환평전ꡕ, p.85). 이러한 청마의 초기시에서부터 우리는 시적 자아의 ‘분열’상을 목격하게 되는데 ꡔ소제부 제1시집ꡕ(1930)에 수록된 「流星이다」에서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참조할 수 있다. “결국 엇자면 좃탄 말인가// 이놈아 웨 밋치지 안느냐--/ 나의게 말하엿다// 밋처라! 밋처라!/ 밋처라! 밋처라!// 귀가 차워서 만즈니/ 내가 울고 잇다// 내가 운다! 내가 운다!/ 악마 갓흔 잔인한 우슴을 어둠을 향하야 찡그렷다”
은 다음 작품에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어느 날 거리엘 나갔다 비를 만나 지나치던 한 처마 아래 들어 섰으려니 내 곁에도 역시 나와 한가지로 멀구러미 하늘을 쳐다보고 비를 긋고 섰는 사나이가 있어, 그의 모습을 보아하니 문득 그 별이 생각났다
밤마다 뜨락에 내려 우러러 보노라면 만천의 별들 가운데서도 가장 나의 별 가차이 나도 모를, 항상 그늘 많은 그 별 하나-- 영원히 건늘 수 없는 심연에 나누여져 말없이 서로 바라다보고 지낼 수밖에 없는 가까웁고도 먼 먼 그 별, 그리고 나의 별! ( 「별」 전문, ꡔ예루살렘의 닭ꡕ, 1953 수록)

앞서 살핀 시 「낙엽」과 위의 시 「별」은 동일한 대칭적 구조와 분열상을 보여준다. 단지 여기에서는 “아기를 안고 있는 젊은 아빠”가 ‘하늘의 별을 쳐다보는’ 것으로 환치되면서 그 ‘거리’가 확장․중첩되어 있다. 나와 별의 거리, ‘나의 별’과 “항상 그늘 많은 그 별”과의 거리가 그것이다. 그들 사이에는 “영원히 건늘 수 없는 심연”(죽음과 같은 간극)이 놓여 있어서, “말없이 서로 바라다보고 지낼 수밖에 없”다. 「낙엽」에서 젊은 아빠 품에 안겨 있던 ‘아기’는 「별」에서는 하늘의 ‘별’로 올라가 있다. 청마는 불행하게도 두 아이를 일찍 잃게 되는데, 기록에 의하면, 첫째 일향은 만주에서(1935-1940) 사망했고, 차남 문성은 부산에서(1940-1948) 사망했다. 그의 작품에서의 ‘아이를 안은 사나이’라는 형상이 자주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시인의 개인적 상처와 무관치 않을 듯하다. 한편, 그의 두 아들에 대한 사연 또한 명확치 않은 점이 많다. 청마의 둘째 아들인 유문성이 부산에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ꡔ한국작가전기연구(하)ꡕ에는 유문성에 대하여 <실은 양자로 데려온 것인데 현재는 행방을 모른다>고 적혀 있다.”(문덕수, ꡔ청마유치환평전ꡕ, p.37)라고 하며, 첫째 아들 일향과 관련해서도 “필자가 들은 바로는 ‘일향’의 생모 이란은 청마가 만주로 떠날 때 부산 모여관에서 아이(일향)를 건네주고는 한없이 울었다는 것이다. 그후 청마가 그를 다시 만났다는 기록은 아무 데도 없다.”(박철석, ꡔ유치환ꡕ, p.193)라는 기록이 있다. 청마의 1935년도 작품인 「유원지에 와서」의 “정조를 잃고...”나 「춘소」(ꡔ동아일보ꡕ, 1935.4.14), 「병」(ꡔ조광ꡕ11호, 1936.9), 「차라리 너는 낭만하다」(ꡔ조선문학ꡕ, 1937.6.1), 「사모」(ꡔ생명의 서ꡕ, 1947.6 수록) 등이 ‘일향의 모’와 관련된 작품이 아닐까 추측될 뿐이다. 이러한 기구한 탄생과 죽음은 두 아이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넘어 죄책감마저 느끼게 하지 않았을까? “암담한 나의 정신의 행색을 더욱 깊게 한 것은 소생 중에 하나 슬픈 별에서 태어난 것을 이 곳으로 데려와 잃은 일입니다”(유치환, ꡔ구름에 그린다ꡕ, p.44). 청마의 시에서 ‘아이’들의 이미지가 나타난 것이 많은데, 특히, ‘죽음’의 이미지가 강렬하여 이 두 아들과 관련될 것으로 생각되는 작품에는 「기도」(ꡔ조선문학ꡕ, 1937.1), 「아상」(ꡔ여성ꡕ, 1940.8), 「동월」(ꡔ생명의 서ꡕ, 1947.6 수록), 「6년후」(ꡔ생명의 서ꡕ, 1947.6 수록), 「사향」(ꡔ영문ꡕ8호, 1949.11) 등이 있다. 청마의 적지 않은 수의 동시와 동화와 함께 주목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거리는 영원히 건널 수 없는 것이지만 젊은 아버지는 “밤마다 뜨락에 내려” 하늘을 우러른다. 그래서 “가까웁고도 먼” ‘별’이다. 「낙엽」과 「별」은 그 각각이 이곳과 저곳(안과 밖)의 구조로 되어 있지만, 두 작품 상호 간에도, 「낙엽」은 ‘안’, 「별」은 ‘바깥’의 관계를 맺기도 한다. ‘죽은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라는 말은, 「낙엽」과 「별」의 관련성을 환기시키기도 한다.
거기에는 ‘삶과 죽음’의 구조가 내재되어 있다.
청마의 시에서 ‘바라봄’의 양상은 위의 작품들에서처럼 애상적이기도 하지만 「형벌」에서 처럼 날카로운 응시일 수도 있다. 즉 “그 무엔지를 매섭게 추궁하여 뚫어지게 나를 쏘아보는 그의 두 눈”은 바로 나의 눈이었던 것이며, “실상인즉 그와 나는 오래전 하루 한시도 떠날 새 없이 기거를 같이하여 한몸같이 살았”던 “또 하나의 나”의 시선이었기 때문이다(「刑罰」). 「형벌」에서 보이는 청마의 시적 자아의 분열상은 다음에서처럼 작품 속에 직접적으로 언표되어 있기도 한다.

A는 시방 어느 먼 골짜기를 지나가는 낯설은 황혼이 서린 차창에 호올로 기대어 A' 생각에 잠기어 있다
A'는 집을 나간 A를 생각하며 시방 밖에서 몰아온다 땅거미 끼인 마루에 앉아 저녁 등을 준비한다 안으로 향하여 셋째를 부른다
나는 이렇게 둘, 영원히 일치하지 않는 A와 A' 언제나 서로 지켜 슬프게 살고 있다. (「A와 A'」 전문, ꡔ예루살렘의 닭ꡕ, 산호장, 1953.4 수록)

「A와 A'」에서 집을 나간 A(안-->밖)와 밖에서 돌아와 안을 향하여 셋째를 부르는 A'(밖-->안)가 이루는 구조는 「낙엽」에서 살펴보았던 안과 밖의 상호주관적 세계, 즉 내다보고 들여다보는 시선의 교차와 결합에 연결된다. 이 작품에서도 분열과 대칭구조를 매개하는 경계 영역이 제시되어 있다. 이어령에 따르면, 이 작품에는 경계영역을 나타내는 세 개의 불빛이 있는데, “첫째는 <황혼>이라는 빛의 경계이다. 황혼은 밤과 낮의 경계 속에서 탄생되는 빛이다. 빛/어둠의 대립이 황혼 속에서는 서로 혼합된다. 둘째는 <차창>이라는 창의 경계이다. A가 A'를 생각하는 위치가 바로 이 <차창>이라는 바깥과 안의 경계이다. 세째는 <마루>이다. 마루 역시 방안과 바깥 사이의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황혼, 차창, 마루의 경계가 집을 나간 나와 집으로 돌아온 나를 동시에 수용하는 공간과 시간으로 존재한다.” 이어령, 앞의 책, p.426
“영원히 일치하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서로 지켜 슬프게 살고 있”는 A와 A'는 분열된 자아의 모습(“나는 이렇게 둘”)이며, 시인의 분신들이다. 그것은 떠나고자 하는 마음과 되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의 모순적 결합이라는 점에서 다음에 살펴보게 될 ‘향수’의 구조와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청마 문학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자로서 쓸쓸함에 대한 응시, 반성적 성찰, 존재의 본질에 대한 관조 “칼 졸거는 진정한 아이러니를 세계의 운명에 대한 관찰과 관조로부터 시작된다는 개념을 제시한다.” 조성훈, 앞의 논문, p.3 또한 ‘관조’는 초월과 합일에 이르는 길로 제시되기도 한다. “관조란 자기초월, 다시 말해서 초월적인 자아의 점유를 수단으로 만유와 합일되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김진수, 「낭만주의 에술론에 있어서 에로스의 개념」, 한국미학예술학회편, ꡔ예술과 자연ꡕ, 미술문화, 1997, p.134
,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 등등은 모두 바라보는 행위로 시작되고 귀결된다. 그것은 자기 밖의 대상을 바라볼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도 있다. 안과 밖의 대립과 교환, 중첩 등이 청마의 시에서 ‘바라봄(거리distance)’의 양상으로 구현되고 있으며, 여기에서 애증의 모순적 시선이나 ‘향수’에서의 떠남과 되돌아옴의 양가성이 파생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안과 밖, 경계 그리고 ‘거리’의 의미가 여기서 문제가 된다.
한편, 시적 자아가 외부의 대상을 향하거나 그것을 재현하고자 할 때에도 아이러니적 사태가 발생한다.

슐레겔은 역동적 우주를 정태적인 재현의 언어로 표현하려는, 즉 (예술가의 궁극적 목표인) 무한을 유한한 언어 속에 표현하려는 시도 속에 내포된 환원불가능한 모순을 인식하고 있었다: “예술(art)은 모든 측면에 구속되어 있음에 반해, 자연(nature)은 어느 곳에서나 방대하고, 제한되어 있지 않으며, 고갈되지 않는다”(「미의 한계에 대하여」). 실재에 대한 이론적이거나 예술적인 어떠한 재현이건 결코 완전할 수 없으며 유사치에 가까울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성적 체계이면서 동시에 매개하고 근접할 수 있게 하는 도구인 언어 그 자체는, 비체계적인 카오스와 무한히 풍요로운 우주를 포착할 수 없다. 사무엘 베케트에 앞서서 슐레겔은 이미, “전적인 의사소통(total communication)의 불가능성과 필요성necessity”을 모두 인식하고 있는 작가의 역설적 상황을 강조한다.(리체움108). 비숍, 앞의 책, p.3에서 재인용


대상에 향한다는 것, 겨냥 지점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그 지점으로부터 멀어질 때 가능해진다. 대상을 향하지만, 대상과 재현간에는 간극과 균열이 존재한다는 것, 이 대상과의 불일치에 대한 인식에서 아이러니적 사태가 발생한다. 조성훈, 앞의 논문, p.11 “유사성이라는 재현의 목적은 반대적인 것, 차이를 조건으로 가능해지는 것이다. 하나의 목적이나 의도는 이와 같이 그 반대적인 것에 의존해 있다.”
“전적인 의사소통total communication의 불가능성과 필요성necessity을 모두 인식하고 있는 작가의 역설적 상황”은 낭만적 아이러니스트의 “아이러닉한 상황”에 다름 아니며, 더글라스 뫼케는, 그러한 상황에 대한 인식을 작품화하는 것만이 진정한 예술가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말한다.

예술가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아이러닉한 상황에 있다: 잘 쓰기 위해서 그는 창조적이면서도 비판적이어야 하고, 주관적이면서 객관적이고, 열정적이자 실재적이며, 감정적이자 합리적이고, 무의식적 영감을 받으면서도 의식적인 예술가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세계에 대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으면서도 여전히 허구이다; 그는 진실 또는 실재에 대한 완벽한 설명을 제시할 의무를 느끼지만 이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있다. 모순으로 가득차 있고, 생성의 연속적 단계에 있으며, 이해불가능할 정도로 방대한 실재이기에, 진실된 설명조차 그것이 완결되자마자 그 그릇됨이 입증될 것이다. 진정한 예술가에게 가능한 유일한 가능성은 자신의 작품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이며 그와 동시에 자신의 아이러닉한 상황에 대한 인식을 작품 자체에 편입하는 것이고 그렇게 무언가를 창조하는 것이다. 비숍, 앞의 책, p.3에서 재인용


우리가 청마의 문학에서 예술이자 인생인both art and life 양가적 존재를 느끼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이와 같이 “자신의 아이러닉한 상황에 대한 인식을 작품 자체에 편입하는 것”이라는 전략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 다시 한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청마의 초기 시에서부터 지속적으로 이와 같은 재현의 아이러니적 상황에 대한 인식과 그러한 상황 자체를 시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① 내가 畵家라면
저 푸른 蒼空을 어떠케 그리리

한 点의 구름도 업고
山머리도 市街도 眼界에 업는
볼수록--넉을 魅了하는
저 갓업시 새파란 蒼空을!

彩管의 群靑을 뽀바
왼통 畵布에 塗抹하야
그 퍼어런 板쪽을 蒼空이라 내걸면
사람들은 다들 웃으리니

그러니 그건 그림도 아니겟고
또한 이 詩는 詩로도 못되엿다
(시 「창공」, ꡔ生理ꡕ ꡔ생리ꡕ는 1937년 청마가 통영 협성학교 교사 시절에 편집하고 발행한 동인지이다. 청마와 그의 아우 유치상, 그리고 최상규, 김기섭, 박영포, 최두춘 등이 동인이었으며, 3집부터 염주용이 참가했다. ꡔ생리ꡕ 동인들의 문학적 경향을 ‘아나키즘’으로 설명한 이미경의 「<생명파> 연구」(경북대박사논문, 2000)를 참고할 것. 이미경은 서정주 등의 ꡔ시인부락ꡕ과 더불어 유치환 중심의 ꡔ생리ꡕ지가 ‘생명파’의 두 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설득력있게 논증하고 있다.
1집, 1937.7.1)

② 푸른 그늘 가지에 앉아, 한 마리 소조(小鳥)는 몇 마디의 낱내로서 능히 신의 그지없는 은총을 황홀히 풀이하여 들리건만, 허구많은 노래와 사설을 되푸리하고도 나는 인간의 사연을 오히려 못다 적노니
( 「小鳥」, ꡔ예루살렘의 닭ꡕ 수록)

①의 시에서는 화가와 시인의 재현 양식이 갖는 한계를 말하고 있다. “예술(art)은 모든 측면에 구속되어 있음에 반해, 자연(nature)은 어느 곳에서나 방대하고, 제한되어 있지 않으며, 고갈되지 않는다” 슐레겔, 「미의 한계에 대하여」, 비숍, 앞의 책, p.3에서 재인용.
라는 슐레겔의 말은 예술적 재현 양식의 한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청마가 자신의 시를 ‘시가 아닌 것’으로 말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위의 시 「창공」에 표현된 바에 주목하자면, 그러한 발언은 청마 자신이 재현의 필요성과 불가능성(시가 아닌 것을 알지만 그래도 시를 쓸 수밖에 없는)을 동시에 인식을 하고 있었던 데에 그 주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②의 작품 「小鳥」에서 우리는 또한, 수없이 다양한 “인간의 사연”을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이 청마의 시에 대한 일차적 관심사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그가 끊임없이 추구했고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운명과 같은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었지만, 시인은 ‘소조’와 ‘나’의 대비를 통해서 그 한계와 불가능성 또한 간명하지만 뚜렷하게 표현하고 있다. 시인은 “현실을 참답게 또는 완전히 묘사해야 한다는 의무를 느끼면서도 현실이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광대하고 모순에 차 있으며, 끊임없이 생성의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 진실된 묘사를 한다고 해도 그것은....허구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있다” M.C. Muecke, Irony, Methuen, 1976, p.20. 조성훈, 앞의 책, p.29에서 재인용.
하지만 시인은 재현의 ‘한계’를 시 속에 ‘표현’함으로써 그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고 해석해 볼 수도 있다. 위의 작품 자체가 그 증거이다. 이것이 자신의 한계를 폭로함으로써 그 한계 너머로 자신의 위치를 옮기는 아이러니트의 주된 전략의 하나인 것이다. 여기에 은폐와 폭로의 전략이 작용한다. 즉 자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점을 드러내면서 자신의 완벽함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아이러니스트의 ‘은폐와 폭로’의 전략에 대해서는 조성훈, 「아이러니의 제한경제」, 중앙대 석사논문, 1998, pp.27-29 참조. 이렇듯 자신을 폭로하면서 감춘다는 것은 청마의 인간적․문학적 면모 중 하나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청마의 편지(여기서는 이영도, 최계락 편, ꡔ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ꡕ에 수록된 편지를 말한다)는 공개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쓰여졌으며(“부디 없애 버려서는 안됩니다. 이것이야말로 당신과 나의 목숨을 닳인 귀하고도 애틋한 것입니다.”(p.66), “먼 후일 우리의 이 글들이 세상에 나가는 기회가 있다면은”(p.287), “우리의 편지를 정리해 곱게 책을 냅시다요. 진정 우리가 얼마나 사랑하고 목숨해 왔음을 세상에 증명할 때가 왔습니다....사랑이라는 것을 부끄러운 죄나처럼 가슴 속에만 숨기려 하는 당신이 요즘 들어 「애정서한집」을 내는 데에 동의하는 것을 보아 한편 어쩌면 당신이 죽으려는 것이나 아닌지 생각이 미치니 모골이 송연해집니다.”(p.365)), 그의 사후 그 일부가 출간되었다.(“고인 생존시부터 이 서간집이 출간과 또 그 때는 그 정리를 내(*편집자인 최계락을 가리킴)가 도우기로 이미 약속되어 있었는 바...”(p.368)). 여기에는 들키지 않았다는 것을 통쾌해 하는, 그러나 이것이 노출되지 않았다는 것을 아쉬워하는(조성훈, 위의 논문, p.29) 아이러니적 전략이 작용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청마의 편지는 그의 문학 뿐 아니라, 자전적 면모를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요즘 내가 발표하는 작품에 대해서는 월평 같은 데에 아무도 논의해 주지 않는 것을 보니 아마 작품이 돼 먹지를 않은 모양인 것 같습니다.”(pp.309-310)와 같은 구절에는 자신이 문단적으로 소외되어가는 것에 대한 자의식이 잘 드러나 있고, “새해엔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해인사로 들어가겠습니다. 거기 가서 불도에 귀의하여 더욱 슬프게 당신 그리움을 맑히며 여명하기로 이미 내 안에 작정된 것입니다.”(p.356. 1966년12월31일의 편지이며 ꡔ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ꡕ에 실린 마지막 편지임.)에서는 작고하기 전의 심정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일화를 볼 때, 정운(丁芸) 이영도와의 편지는(5천여통 중에서 일부만 책에 수록됨) 시인의 청장년기의 삶과 그 속마음을 살펴볼 수 있게 하는 자료적 가치가 있는 것이다. 참고로 그가 교통사고로 작고한 것은 1967년 2월 13일이며, 서한집이 발간된 것은 1967년 7월이다. 그의 죽음이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라 ‘자살’일 수 있음을 암시한 한 문인의 글이 주목되는 것은 위와 같은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청마의 맏사위이자 문학평론가인 김성욱은 「청마의 죽음과 그 주변」(ꡔ현대문학ꡕ, 67.5)에서, 청마가 작고하기 직전의 이상한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만일 자신(*청마)이 죽어 부의금이 들어오면 부인 옷을 살 수 있으리라는 말, 사진관에서 부부사진을 찍자고 서둘더라는 말, 자신의 시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를 자수를 놓아 빨리 병풍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는 말, 급서하기 10일 전쯤 김성욱에게 전화하여 “평소의 이분의 성품으로서는 여간 의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오케이> <올라잇>하는 투의 영어낱말을 섞는 것”이었다는 말 등이다. 물론 김성욱은 이러한 에피소드로 청마의 “죽음 세계를 짐작하려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적어도 청마의 죽음 직전의 면모를 가늠케 하고 있다. 청마의 죽음이 미심쩍은 것은 또한 문덕수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도 암시된 것이 아닐까? “청마가 버스에 치이는 순간이나 병원에서의 운명 현장을 목격한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있었겠지만 그런 사람을 찾지 못했다.) 청마를 싣고 병원으로 간 차량의 운전사는 누구였을까. 병원에서 피투성이가 된 청마의 모습을 보고 진단하고 치료한 의사와 간호사는 누구였을까. 이런 중요한 사실은 모두 미지의 어둠 속에 묻혀 영원한 비밀이 되었다....여기서 허만하는 <봉생신경외과 앞 대로>라고 했으나, 박철석은 <좌천동 대로변(미성극장 앞)>이라고 말했다. 호적부에는 <수정동 미성극장 앞 노상>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 기록이 정확한 것 같다.”(문덕수, ꡔ청마유치환평전ꡕ, p.295-298) 청마의 삶 자체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지만, 그의 죽음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재현의 불가능성을 알면서도 그것을 추구하는 예술가에게는 그와 같은 곤경을 돌파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작가 자신이 자신의 작품에 거리를 갖고 그에 비판적이라는 것 또한 여기서 지적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작가는 자신의 아이러닉한 상황을 작품 속에 투입하면서도 거리를 지키고 있다. 시 「내가 보힌다!」는 시적 자아의 분열과 자기 응시, 그리고 그 균열 극복의 願望을 아이러니적 긴장체계 속에서 극화하고 있다

어째 이렇게 아무도 없는 거냐?
내가 옴이 너무 일렀느냐?
너무 늦어 다른 이들은
왔다 죄다 가버린 뒷전이냐?

나를 초청한 시간이여,
너마저 피신하고 부재한 광장에
나만 혼자 불청객의 꼴로
이렇게 초라히 나타나 있다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 거냐?
어디메 물러갈 길은 있느냐?
이렇게 허백(虛白) 속에 포착해 두고
나의 소작(所作)을 지켜보는 너는 누구냐?
그리하여 그것으로 다시 나를 책임 물으려는 거냐?

아아 내가 내게 보히누나!
눈부신 백금속빛 각광 속에 한 마리 부나빈 양
나 혼자만이누나!
내가 보히누나!
(「내가 보힌다!」 전문, ꡔ제9시집--시와 단장ꡕ, 한국출판사, 57.12 수록)

위의 시에서 “나의 소작(所作)을 지켜보는 너”는 바로 시적 화자 자신이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상황, 어디에도 물러날 길이 없는 막다른 곳, “허백(虛白) 속”에서 마주치게 된 ‘또 다른 나의 시선’인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곧바로 “아아 내가 내게 보히누나!/ 눈부신 백금속빛 각광 속에 한 마리 부나빈 양/ 나 혼자만이누나!/ 내가 보히누나!”라고 말한다. 이 시 의 시적 긴장은 허무 속에서 마주치게 된 자기 존재와의 만남에 기인하며, 시를 쓰는 현실 속의 자신을 시 속에 편입시키는 아이러니적 전략에 근거한다. “눈부신 백금속빛 각광”으로 묘사된 허무의 심연 속에서 비로소 마주치게 된 ‘또 하나의 나’와의 재회는, 그 분열 상의 확인일 뿐만 아니라 분열 극복의 순간에 대한 시인의 열망의 투영이기도 하다. 김영석이 날카롭게 분석했듯이, “‘백금 속빛’이란 모든 은폐성을 벗겨버린 존재의 눈부신 개시에 다름 아니”라고 한다면, 김영석, 앞의 논문, p.34 참조. 또한 ‘백금속빛’은 ‘우주가 나의 집’이라는 인식을 보이고 있는 시 「안주의 집」에서도 존재의 충만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있는 것 모두 적적히/ 백금빛 희열의 소리없는 합창을 드리나니//...//나는 뉘 모를 한 톨 즐거운 씨앗이려라”
현실의 시인과 작품 속의 시적 화자 그리고 백금속빛 각광 속에서 만나게 된 ‘또 다른 나’가 이루는 동심원은 존재의 顯現이 이루어지는 場을 이루고 있다. 이렇듯 “자신의 포에틱한 서술 자체를 다시금 포에지의 서술 대상으로 취하는 방식은 포에지의 자기투영 방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를 슐레겔은 ‘포에지의 포에지’로 명명한 바 있다. 그것은 또다시 ‘추상적’, ‘비판적’, ‘윤리적’ 포에지라고 불리기도 한다.(최문규, 「초기낭만주의에서의 포에지 개념 연구」, ꡔ독일언어문학ꡕ 제17집, 2002.6, pp.285-6 참조.) 이러한 지적들은 청마의 자기반영적 시편들, 그리고 자신의 시와 삶을 비판적으로 형상화하는 작품들 모두와 관련되어 있다. “저 가엾은 애걸과 발악의 비명들이 소리소리 울려 들리는 데도 거룩하게도 너는 시랍시고 문학이랍시고 이 따위를 태연히 앉아 쓴다는 말인가”(「그래서 너는 시를 쓴다?」, ꡔ문예ꡕ, 1963.12, ꡔ미루나무와 남풍ꡕ1964 수록)

이러한 아이러니적 전략에 적합한 표현 형식은 무엇인가? 청마는 몇 가지 시형식을 실험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물론 청마의 모든 시적 실험이 아이러니적 전략에 따른 것은 아니다. 그가 실험하기도 했던 동시는 아날로지와 상응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형식이다. 동요로 작곡되기도 했던 「메아리」 등이 대표적인 예가 될 듯하다. 청마가 발표한 동시로는 「메아리」(ꡔ새벗ꡕ, 1952.10), 「가자 산으로 가자」(ꡔ새벗ꡕ, 1953.8), 「아기와 예수 크리스트」(ꡔ새벗ꡕ, 1953.12), 「별바라기 꽃」(ꡔ새벗ꡕ, 1955.10), 「잠 깨는 봄」(ꡔ학원ꡕ, 1953.4) 등이 있다.
, 예를 들어 「폐병」(한국문학, 1966년 추․동호)에서 碑文을 그대로 표기한 듯한 기법이나 「布告」(ꡔ행복은 이렇게 오더니라ꡕ, 1954)에서 ‘포고문’ 형식을 시 속에 삽입한 것 등은, 기존의 시형식들에서는 낯선 것들로, 시 속에서 일종의 ‘밖’의 시선으로 작용하고 있다.

① 그것은 한여름밤 무더운 꿈 같은
속절 없는 허구이던가?
아니면 한바탕
화려히 쓸고 간 역병이던가?

그 날 북새판의 극채색
그 열광한 환호와 박수의 물결 속
충성에의 흥분도
당당한 진군도
아비규환 처절한 돌격도
메아리조차 감쪽같이 간 곳 없이
목발에 눈마저 멀고 돌아와 너는
--그나마 귀는 듣는지?
한갓 허구였다고
엄청난 허구였다고 생각하는가?

차라리 그 엄청난 허구 속에 끝내 말려
저 네거리 복판 어마스리 치솟은
無名勇士之忠魂碑

그 도맷금의 영광에 한몫 끼기나 했던들

그러나 그
화려한 영광에서도 가까스로 빠져 나와
이같이 이그러진 폐품으로 나타난 너야
형벌처럼 인류의 머리 위에 짓눌러 앉아
인류를 부정하는 저 검은 사신
그 주박(呪縛)에서 풀려 나지 못하는
수수께끼 같은 인간 자신의 모순과 죄악의
볼모로서 보내진 사자
짐짓 그 처참한 사자는 아닌가?
(「폐병」 전문, ꡔ한국문학ꡕ 1966년 추동호)


포 고
--미증유의 풍수해로 인하여 식량부족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으니 전국민은 국가민족을 위하여 소아를 버리고 일치단결하여 국난극복에 매진하여야 할지니 개인의 이익과 안일에만 급급하지 말고 민족정의로서 식량소비 절약을 하기와 같이 실천할 것을 여기 포고함
이 포고에 위반하는 자는 엄벌로써 처단함
단기 4285년 11월 일
내무부장관 X X X
국방부장관 X X X
재무부장관 X X X
법무부장관 X X X
농림부장관 X X X
사회부장관 X X X
보건부장관 X X X

1. 쌀로써 술을 못해 먹는다
2. 음식점에서 쌀밥을 팔지 못한다
3. 여관에서는 점심밥을 주지 못한다
4. 엿 떡을 만들어 못 판다
5. 쌀로서 과자는 만들지 못한다
6. 한 사람에게 한 잔 이상 술을 못 판다


불길하고 음산한 회오리바람만이 쓸어 부는
빈 거리거리는 휘휘히 어둡기만 어둡기만 한데
담벼락에 길바닥에 흰 종이쪽만 헷것처럼 나붓거리고
어디서 뱃가죽을 움켜 안고 터져나는 哄笑의
너털대는 飽滿과 愚弄의 저 소리소리! (「포고」전문, 1954)

①의 시 「폐병」에서는 우선, 비문을 그대로 표기한 듯한 기법이 주목된다. 청마의 시에서 이러한 형태시적 기법이 사용된 것은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하지만, 그의 ‘밖’의 시선이 일관되게 작용한 것으로 보면 자연스런 현상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다음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나(“그 도맷금의 영광에 한몫 끼기나 했던들”), 현실적 背理(“화려한 영광”/“이그러진 폐품”)는 ‘비문’을 둘러싼 아이러니적 의미 맥락을 만들어 낸다. 인간 세상이 소외시킨 것들이 되돌아와서 그 “모순과 죄악”을 증거하듯이, 인류를 부정하고 비판하는 밖의 시선은 “네거리 복판 어마스리 치솟은” 그 비문 옆에 나타난 ‘폐병’의 시선,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청마의 시선이기도 하다. ‘거리’와 ‘바라보기’ 등등과 관련된 ‘밖’의 시선, 반성과 관조의 시선은 청마에게는 익숙한 것이며 오래도록 연마된 것이기도 하다.
②의 「포고」에서는 ‘포고문’의 내용이 그대로 옮겨져 있고 그 옆에 시인의 냉소적 언급이 나란히 놓여 있다(“포만과 우롱의 저 소리소리!”). 세로쓰기를 하고 있는 시집(ꡔ청마시집ꡕ, pp.184-5)에서는 오른쪽에 포고문, 왼쪽에 시인의 말이 배치되어 있다.
우선 박스 안의 포고문의 내용은 “풍수해로 인하여” 식량이 부족하니 “국가민족을 위하여” “개인의 이익과 안일에만 급급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술과 쌀밥을 제한하고 엿, 떡 등을 금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포고문의 내용이 풍자적 맥락 속에서 읽힐 수 있다는 것은 그 옆의 시인의 발언과의 대조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 역사적 상황 속에 그것을 놓아 볼 때도 그러하다. 1952년에는 정치파동 1952년 5월 26일 47명의 현역 국회의원들이 탄 통근버스를 헌병대의 견인차가 끌고간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이 시작되고, 1952년 6월 야당계 의원 123명이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하자,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의원들을 국제공산당 운운으로 체포하고, ‘민의’라 하여 백골단, 땃벌떼를 동원하여 공포 정치를 펴고, 경찰이 국회를 포위하여 소위 발췌개헌이라는 것을 억지로 통과시켰다. 1952년 8월 제2대 대통령선거 결과 이승만이 당선된다.
이 일어났고 그를 전후한 중석불(重石弗)사건 중석불(重石弗) 사건의 경우 당시 쌀과 함께 주요 외화 획득원이었던 텅스텐을 수출하여 번 수출대금 470만 달러는 기계류, 선박, 화물자동차 등 산업부흥자재를 수입하는 데만 사용하기로 되어있었는데 정부는 이 중석불을 특정상사인 삼호를 중심으로 배정하였고 이를 1952년 2월부터 양곡 도입에 사용케 하였다. 중석불 불하 대상 기업들은 정치권과 연결되어 있었고 정부가 배정한 달러로 곡물을 수입하여 엄청난 폭리를 취하였다. 수입가의 5배로 국내시판을 한 덕분에 돈을 번 기업인은 정치인에게 일정액의 정치자금을 지불한 것으로 되어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을 재선시키기 위하여 대통령선거제도를 간접선거에서 직접선거로 헌법을 수정하면서 발생한 부산정치파동 직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으로 농민과 도시 영세민들의 삶은 더욱 어려웠다. 정권의 유지를 위해 일부 모리배들의 폭리를 방조하면서, 한편으로 국민들의 삶을 핍박하던 당대의 이러한 현실과 대조할 때, <포고문>의 위선적 의미가 더욱 뚜렷해지는 것이다. 청마의 풍자는, 그와 같은 포고문의 ‘말’을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고 그와 더불어 ‘어둡고 어둡기만 한’, “불길하고 음산한 회오리바람만이 쓸어 부는/ 빈 거리”의 ‘현실’을 동시에 그려내면서, 이 작품의 냉소적 맥락을 확정한다. 청마의 ‘냉소’는 현실의 다양한 영역에 관계하는데, 종교 또한 그 주요한 대상 중 하나이다. 예를 들어 「비오 Ⅻ世」에서의 “인 노미네 딸국, 빠뜨리스 엩 딸국, 필리이엩 딸국, 딸국......”이나, 「염소는 장미순을 먹고」에서, 아름다운 장미순을 먹고 더러운 똥을 누는 염소에 종교를 비유한 것 등이다. 그리고 시 「할렐루야」에서의 “마침내 절통한 억울이/ 이 허허로운 홍소로 통함을 아느냐”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그의 <냉소>는 <분노>의 한 표출 양상임을 알 수 있다.

위의 두 작품에서는 모두 ‘밖’의 시선이 중요하게 작동하고 있으며, 아이러니의 풍자적 기능, 즉 허천이 <공격적assailing>이라고 말한 아이러니의 호전적 기능이 사용되고 있다. 거기에는 시인이 지향하는 일련의 가치들이 ‘심층’에 놓여 있어서, 그에 근거해 부도덕과 어리석음이 조롱받고 질타당한다. 청마가 보여주고 있는 이러한 문학적 표현의 형식과 기능은 일련의 문학적 실험 속에서 출현한 것이다.

슐레겔은 아이러닉한 작품이 “교묘하게 질서지워진 혼란”일 거라고 말했다. 즉 모순의 매혹적인 대칭이며, “열정과 아이러니의 놀랍도록 영속적인 교체이며 그것은 전체의 극히 작은 부분에서도 살고 있다”고(ꡔ시에 대한 대화ꡕ86쪽). 그것은 서로 다른 감정과 양식들을 엄격하게 분리하는 고전적 장르들을 거절하며 대신 자신을 “아라베스크”로서 표현한다. 본질적으로 다른 모티프들을 휘어지고 미로와 같은 구조 속에 충동적으로 섞으면서, 하지만 사실은 충동과 목적성의 균형, 즉 명백한 혼돈과 은폐된 질서를 제공하면서, 그리고 무한한 풍부함과 무한한 조화라는 우주의 본질적인 두 가지 양상을 반영하면서. 한스 아이히너는(ꡔ프리드리히 슐레겔ꡕ69쪽) 슐레겔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카오스와 에로스, 환상적 형식과 감상적 내용, 표면상의 혼돈과 은폐된 질서, 무한한 조화 속의 무한한 다양성들은 이상적인 예술작품을 위한 공식이며 신성의 현시로서의 우주를 위한 공식이다.” 비숍, 앞의 책, p.8


위 인용문에서 보이듯, 슐레겔은 아이러닉한 작품이 “고전적 장르들을 거절하며 대신 자신을 <아라베스크arabesque>로서 표현한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모든 장르를 포괄하는, 실현할 수 없는 형식” 비숍, 위의 책, pp.8-9
일 수도 있지만, 슐레겔 자신은 ꡔ루친데ꡕ에서 그러한 ‘매혹적인 혼란’을 실험한 바 있다. 이러한 철학적 아이러니의 표현에 적합한 또 다른 형식은 ‘단장’ 또는 아포리즘이다.
1950년대 이후 청마는 단장(아포리즘) 형식을 즐겨 사용했다. “이미 초기 낭만주의나 니체의 글쓰기에서 실현된 바 있듯이 단편적 구성은 현대적 주체의 균열된 내면을 형상화하는 미학적 가능성을 실험”한 바 있었다. 안병률, 「로베르트 무질 ꡔ특성없는사람ꡕ연구-에세이적 형식을 중심으로」, 연세대석사, 98
이와 마찬가지로 청마에게 있어서 ‘단장’ 형식은, 이미 앞에서 살폈듯이 그 스스로가 균열된 주체였다는 점에서, 자신의 모순된 면모, 무한히 확대되어가는 아이러니적 사유의 소용돌이 등을 담아낼 수 있는 양식으로 전면에 나서게 된다. 보러에 따르면, 아포리즘의 단편 형식은 일종의 ‘화학적 정신’과 비교될 수도 있다. 그것이 질서에 대항하는 창조적인 파괴, 혁신, 자발성의 충동 등을 담지하기 때문이다. 또한 보러는 ‘낭만적 아이러니’의 핵심적인 내용으로 예술적 생산보다는 예술적 성찰을 우선시하는 행위를 지적하면서, 바로 ‘아포리즘’ 형식의 자기성찰이 낭만적 아이러니가 지향하는 그러한 ‘무한한 것의 조망’을 표현한다고 주장한다. 보러, ꡔ절대적 현존ꡕ, 문학동네, 1998, pp.23-26.
그것은 사색과 직관의 결과물인 최후의 논평만을 제시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 은폐된 논리와 의미를 유추해내야 하는 부담을 갖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입장에서 보았을 때 해석학적으로 여운을 남기는 하나의 질문 형식이기도 하다. 오한진, ꡔ독일 에세이론ꡕ, 한울림, 1998
허천은 아이러니의 <잠정적provisional> 기능에 대해 “진리라는 하나의 범주적이거나 엄격한 입장을 가정하려는 경향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기능할 수 있으며 또한 그러한 잠정적인 입장이 가치있는 것으로 보일 때, 그것은 종종 ‘탈신비화’로 불리기도 한다” 린다 허천, 앞의 책, p.52
라고 설명한다.
청마에게 있어서 이러한 단장 형식은 실제적인 시작품 생산과 밀접한 상호관계에 있는 것이기도 했다. 기존 발표시에서의 이미지나 시적 테마가 단장 형식으로 재구성되기도 하며, 새로운 시창작에 영향을 주고 있기도 한 것이다.

①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노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 비정의 함묵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바위」 전문, ꡔ생명의 서ꡕ, 1947 수록)

② 눈부시기 쥬라르민 조각
가멸(可滅)하기
한 모닥 마그네지움

누구도 무관한 백주 도시 위에
한 점 머흘은 저건
구름이 아니다

바로 아까
나의 이마에서 날아 나간
은빛 나방이

은총은 기다리지 않는 것
한 시인의 예지가
화안히 우주를 광명하는 이 수유

다시 어느 겨를
어디메 모룽이 바위로 쪼그렸을
순수 사변이여
(「구름의 노래」, 전문, ꡔ미루나무와 남풍ꡕ, 1964 수록)

③ 바위--
얼굴은 안으로, 내면을 밖으로 하고 있는 것!
(「단장54」 전문, ꡔ제9시집ꡕ,1957 수록)

①은 청마의 초기 작품인 「바위」이다. 여기에서 ‘바위’는 ‘함묵’,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는 것,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노에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표층적으로는 현세적 생명에 대한 거부라고 볼 수 있지만, 그러한 부정이 가정법(“내 죽으면...”) 속에 놓임으로써 강한 긍정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김용직은 「절대의지의 미학--유치환론」, ꡔ현대시ꡕ, 93.11(인용은 ꡔ한국현대시사(2)ꡕ, 한국문연, 96에서 함)에서, ‘가정법’의 부재와 현존, 부정과 긍정 등을 분석하면서 아이러니적 구조를 언급한 바 있다. “유치환은 그가 특히 강조하고 싶은 의미 내용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는 즐겨 반어를 사용했다.”(p.319), “얼핏보면 이것은 현세에서 누리는 생명현상의 전면적 거부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에 있어서 이 시(*「바위」)를 통해서 유치환이 기도한 것은 보다 궁극적인 생의 차원이다. 이런 사실을 극명하게 알기 위해서는 이 작품의 어법이 주목되어야 한다. 허두의 첫줄부터 이 작품은 가정법으로 끝났다. 가정법은 현재 화자가 그것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임을 말하는 어법인 동시에 현실적으로 그의 처지를 절실하게 극복하고자 원할 때 사용되는 말법이기도 하다.”(p.322) 가정법(“내 죽으면...”) 속의 부정(「바위」)은 강한 긍정(「생명의 서」)으로 통할 수 있음을 위의 인용문은 밝혀 주고 있다. 그것은 부재와 현존의 관계가 이루는 아이러니적 구조이다.
우리는 또한 아이러니의 <자기방어self-protective> 기능을 살피면서(연구방법론의 도표 참조), 청마의 ‘자학’적 시편들이 양가적 의미(자학/의지)를 가질 수 있음을, 즉, 아이러니의 자기비하적 용법이 “그 자신을 깨뜨릴 수 없는 것invulnerable이 되게 하려는 정교한 시도”로 해석될 수 있음을 말한 바 있다. 린다 허천, 앞의 책, p.50
김영석은 「바위」의 의미를 “<생명의 소실>이 아니라 직관의 치열성이 획득한 가장 눈부신 <생명의 개현>으로 파악”하면서, 그것을 ‘자벌기구(Self-Punishment Mechanism)의 시학’으로 설명한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자학’적 기제, 즉 ‘안으로’ 응축하여 원시생명을 추구하고자 하는 청마의 시도를 아이러니적 전략으로 재해석하고 있다(이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Ⅲ-1-1의 ‘자학’을 분석하고 있는 부분 참조.) 청마에게 있어서 생명에의 희구가 이와 같이 반어적인 응축적 상상력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음에 주목해 본다면 우리는 또한 거기에서 안과 밖, 은폐와 폭로의 관련성 또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②는 청마의 후기작품의 하나로, 여기에서는 하늘의 구름(?)과 지상의 바위가 대조되어 있다. 시인의 예지는 하늘의 ‘구름과 같은 것’으로 화하여(“나의 이마에서 날아 나간/ 은빛 나방이”) 우주를 화안히 밝히지만 그것은 ‘수유(須臾)’에 그치는 것이어서 어느 사이 지상의 어느 모룽이 ‘바위’로 되돌아 간다. 시인의 ‘순수사변’은 눈부시지만 그것은 또한 ‘가멸(可滅)’한 것이다. ‘마그네시움(Mg)’은 비료로 사용되는 물질인데, 시인은 이를 ‘가멸한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듯하며, ‘쥬라르민[듀랄루민]’은 알루미늄 합금으로서 가볍고 강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용되고 있다.
시인은 그러한 모순적 사유를 ‘바위’ 속에 간직하고 있다. 그것이 ‘바위’ 속에 있는 한 언제든 또 다시 하늘로 띄워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딱딱한 바위의 표면 밑에 내재하는 시인의 꿈을 살펴 볼 수 있다.
③의 「단장54」에서 청마는 ‘바위’를 “얼굴은 안으로, 내면을 밖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한다. 여기에서 얼굴/내면, 안/밖의 대립체계가 맺는 관련성은 문자 그대로 본다면 이해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얼굴은 안으로, 내면은 밖으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앞서 살핀 시 「바위」, 그리고 「구름의 노래」 등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짐작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은폐와 폭로의 구조, 안과 밖이 맺는 특이한 구조를 가리키는 것이며, 바위 속으로 들어가는 시인의 형상(‘응축적 상상력’)과 하늘로 그 숨겨진 열망과 꿈을 발산하는(‘확산적’) 상상력의 교합이다.
바슐라르는 ‘열과 불의 변증법’에 대해 ‘안과 밖’, 그리고 ‘은폐와 폭로’의 구조 속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바슐라르, ꡔ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ꡕ, 문학동네, 2002, p.67-68 참조.
“불은 외면화하고, 폭발하고, 스스로를 드러낸다. 열은 내면화하고, 집중되고, 스스로를 숨긴다.” “열은 어떤 심층차원의 표징, 어떤 심층차원에 대한 감각이다.” 이와 같은 바슐라르의 말은 위의 논의와 관련하여 재음미될 필요가 있다. 그의 격렬한 사회비판시들의 표층적 의미뿐만 아니라, 내적 열망의 현시로서의 ‘백금속빛 각광 속의 부나비’(「내가 보힌다」)나 “나의 이마에서 날아 나간/ 은빛 나방이”(「구름의 노래」) 등의 ‘불’의 형상들은 시인의 내면에 은폐된 열망(“혼돈된 열의 세계” 바슐라르, 위의 책, p.72
)과 ‘폭로와 은폐’의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응축과 확산’의 상상력은 청마의 「단장」에서 ‘씨앗과 우주’의 상상력으로 반복적으로 제시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주와 씨앗’의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는 단장으로는 ꡔ제9시집ꡕ(1957)에 실린 단장 중, 1번(“우리를 에워 있는 광대무변한 정신!”), 9번(“한 톨 하루살이 씨앗을 놓고 그 가늘은 속에 더욱 천지의 기미와 더불어 개화할 생명의 감춰 있음을 생각해 보았는가?”), 71번(“벌레가 과일 속으로 몸을 파묻고 들어가듯 그렇게 내가 장차 들어갈 대지여”) 등이며, 여기에서는 우주적 정신 속에 시인의 생명이 안겨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한 인연 맺음 속에서 응축과 확산의 시적 상상력이 작용하고 있다.
, 시 「드디어 알리라」, 「안주의 집」, 「경이는 이렇게 나의 신변에 있었도다」 등에서의 중요한 모티프가 되고 있다. 즉, “아아 오늘도 나의 안주의 집은/ 표묘(漂渺)하여 천지가 무애(無礙)한데/ 나는 뉘 모를 한 톨 즐거운 씨앗이려라”(「안주의 집」)에서 보이는 ‘씨앗과 우주’의 관계는 내가 안주할 집으로서의 우주를 묘사한 것이며, “억조 성좌로 찬란히 구천을 장식한 밤은/ 그대로 나의 큰악한 분묘!”(「드디어 알리라」)에서 보이는 것 또한 ‘우주가 바로 나의 집’이라는 인식, “인간의 수수(須叟)한 영위에/ 우주의 무궁함이 이렇듯 맑게 인연되어 있었나니”(「경이는 이렇게 나의 신변에 있었도다」)에서 보이는 인간적 공간과 우주적 공간의 상응과 연결 등. 이런 예들에서 보듯, 씨앗(‘응축’)은 우주(‘확산’)에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시와 단장 등의 형식 속에서 변주되어 나타나고 있다.
청마의 ‘단장’은, 그것이 비록 완결된 형식을 취하고 있지는 않지만, 위에서 살폈듯이 시인의 직관이나 사유의 편린들이 생동하는 공간, 시인 자신의 창작적 과정을 드러내면서, 그 결과물을 聚合하고, 나아가 새로운 출발이 이루어지는 지점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
단편적 사실들에서 시인의 직관이 순간적으로 포착한 내용들이 그의 단장들에 뒤섞여 있고, 시와 단장의 경계 또한 불분명하기는 하지만 청마는 ꡔ제9시집--시와 단장ꡕ(1957) ‘후기’에서 자신의 시와 단장의 경계를 스스로 더욱 모호하게 하고 있기도 하다. “여기에 함께 수록한 단장이라는 것들도 기실은 나의 생활에서 그때 그때 얻는 심히 평범한 사고와 직관의 편편들을 주워 나로서는 서정적 철학을 노린 아포-리즘이긴 하지마는 내 시가 시 아니듯이 이것들을 그대로 시라 불러 주어도 무방한 것이다.” 같은 글에서 자신의 시를 “시이전의 토로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청마에게는 ‘장르’ 구분에 개의치 않는, 나아가 의도적으로 무시하려는 태도가 있다.
청마의 단장 형식은 ‘징후적 글쓰기’와 관련되기도 한다. 징후적 글쓰기란 짧은 형식의 산문에 일이 되어가는 상황을 징후적으로 기술하고 그에 대한 처방을 내리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글쓰기를 일컫는다. 안병률, 앞의 논문, p.42 참조.
현실이 지닌 수많은 위기적 측면들은 각각 하나의 징후들로 파악되며 아주 사소한 경험적 현실에서조차 시인은 그 징후적 의미를 순간적으로 포착한다. “무질은 전통적 서술이 지녔던 ‘원근법적인 축약’에 반대하며 무한히 얽힌 표층으로 확장되는 서술의 가능성을 모색한다......사건이 지닌 성격에 대한 집중적인 성찰.....이러한 서술의 성찰성을 통해....추상 체계 속에서 점점 습관화되는 현대적 주체의 내면적 상황을 비판적으로 주시...인간의 양가적 상황들을 활성화시킨다.”(안병률, 위의 논문, p.ⅻ)

청마의 단장 형식의 글쓰기와 더불어 그의 수필, 그리고 그가 신문에 썼던 칼럼들도 이러한 비판적 성찰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르적 구분에 개의치 않고 청마는, 사건이 지닌 성격에 대한 집중적인 성찰, 이러한 서술의 성찰성을 통해 추상 체계 속에서 점점 습관화되는 현대적 주체의 내면적 상황을 비판적으로 주시한다.

① 밥 달라는 어린 것을 밟아 죽인 사나이가 있었다
굶주림으로 인해 자식을 죽이고 죽는 어버이--
인간의 생명은 자주(自主)이요 존엄함을 들어 그를 지탄하지 말라. 그것은 ‘인도(人道)’라는 미명을 위한 인도의 허구!
그 존엄한 생명을 그 속에다 남겨서 짐승보다도 더럽게 천대받아야 될 그 빈곤이 목전에 얼마나 창궐함은 도외치지하면서--
(단장 「인도의 허구」 전문, ꡔ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ꡕ, 1960 수록)

② 철저히 무위 유타할 줄을 아는 나태인은 진실로 지복한지고! 이렇게 따지고 보면, 항상 더 깊고 먼 본질과 진리에의 접근을 경원하고, 인간 생활에 있어 인간의 본연을 애꿎게도 꺾어 형태만을 구차스리 갖추기에만 급급하는 공자 일문의 가르치는 이 소인(小人)은 한거불선(閑居不善)이란 윤리는, 하층 계급의 쉴 새 없는 노역의 밑받침에서 투안(偸安)하는 상전 계급에 부화(附和)하기에 꾸민 것이라 비방받아도 도리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수필 「한거불선」, ꡔ(수필집)나는 고독하지 않다ꡕ, 1963)

①의 단장에서 청마는 인간의 도리라는 미명하에 벌어지는 비인간적 행위의 위선과 허구적 논리를 폭로한다. 굶주림 때문에 자식을 죽이고 자살한 한 사나이를 지탄하는 사회적 반응을 보면서 시인이 주시한 것은 그들이 내세운 ‘인간 생명의 존엄함’이라는 명분이었다. 현실 속에서 짐승보다도 더럽게 살아야 하는 빈곤이 창궐하는 현상 앞에서 과연 그 ‘人道’라는 명분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사건의 본질에는 눈감고 그 사나이의 비정만을 지탄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게 지탄하는 행동이야말로 위선적인 것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②의 수필에서는 ‘小人閑居爲不善’이라는 유교적 언술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인간의 본능적 쾌락이자 명상으로 인도하기도 하는 ‘至福’의 하나인 ‘나태’를 불선한 것으로 배격하는 것에 대해 분노하며 시인은 인간의 본연한 성향으로서 그것을 옹호한다. 시인은 무위유타(無爲遊惰)는 군자, 성현만이 누릴 것이 아니요 모든 인간의 본연의 요구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기독교와 유교가 인간적 유열의 하나인 ‘나태’를 제도적으로 억압해 왔음을 폭로한다.
①과 ②의 작품에서 청마가 이용하고 있는 것은 바로 허천이 말한 아이러니의 <대립적oppositional> 기능이다. 즉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내’에 위치한 사람들에게는 위협적인 독설로 보이겠지만 그것을 해체하고자 하는 소외된 사람들에게는 전복적이고 초월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질”, “마음과 표현의 지배적인 습관에 대항”하는 아이러니의 전략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핀 바와 같이, 청마는 새로운 시적 형태를 실험하기도 했고 청마는 ‘5행시’를 실험하기도 했다. 제4시집 ꡔ청령일기ꡕ(1949)의 마지막 장 ‘무위집’에 실린 작품들은 모두 5행시인데, 구체적인 검토는 생략한다. 앞에서 분석했던 「낙엽」은 제일 마지막에 실린 것으로 그 중 뛰어난 작품인 듯하다. 또한 청마는 제3시집 ꡔ울릉도ꡕ(1948)에서 ‘1행시’를 실험한 바도 있는데(예를 들어 “모두가 모두 홰에 오른 날”, 「曇日」), 이러한 실험시들은 모두 ‘단장’ 형식으로 수렴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단장(아포리즘) 형식 단장 형식은 경계 횡단적 장르로 볼 수도 있다. 이는 여행이나 길과 같은 움직임, 또한 시선의 움직임과 관련하여 언급될 수도 있을 듯하다. ‘바람’, ‘길’, ‘여행’, ‘방랑’, ‘시선’ 등의 동적 이미지들의 내적 관련성은 주목을 요하며, 이에 대해서는 Ⅲ-2장에서 고찰함. 다만, 이러한 모티프들이 “고독과 무한함의 인상을 증대시키는 낭만적 산책자”(베겡, 앞의 책, p.216)의 영상에 결합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 둔다.
을 통해 시적 창작과정 자체를 드러내기도 했으며, 수필이나 논설 등을 통해 사회적인 허구를 폭로하는 데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다. 본고에서는 이들 모두의 비판적인 인식적 태도의 근저에 아이러니스트로서의 청마의 관조, 즉 ‘밖’의 시선, 안과 밖, 은폐와 폭로의 구조가 놓여 있음을 고찰하였고, 이러한 양가적 구조에 대한 시인의 인식이 초기부터 후기까지 일관적이었음을 살폈다. 이는 또한 무질Musil이 전통적 서술이 지녔던 ‘원근법적 축약’에 반대하여 무한히 얽힌 표층으로 확장되는 서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인간의 양가적 상황들을 활성화시키고자 했던 것 안병률, 앞의 논문, p.ⅻ
을 상기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근원적 질문형식으로서의 아이러니적 旋回로 이어져 있다.


2. 균열과 모순의 세계인식

앞의 Ⅱ-1절에서 우리는 청마의 아이러니스트로서의 면모와 그의 시에 나타난 <분열과 그에 대한 응시>라는 현상을 ‘거리’, ‘바라보다’ 등의 어휘를 중심으로 분석해 보았다. 이와 같이 “모순과 불일치, 부조리와 역설 등과 같은 사태와 현상을 아이러닉한 것으로 인식하고 거기에 일정한 태도와 정서를 가지게 되는 데는 다른 어떤 동기가 있기 때문” 조성훈, 앞의 논문, p.4
이다. 물론 이는 아이러니스트뿐만 아니라 작품을 해석․평가하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해석자들’은 ‘아이러니스트들’이 하는 만큼 의미화mean하고, 종종 그들에 대립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허천, 앞의 책, pp.11-12
하지만 본고에서는 청마의 문학을 가능케 한, 그리고 그것을 아이러니스틱한 것으로 추동시킨 본질적인 힘은 무엇인가? 라는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김동리는 「ꡔ유치환시선ꡕ에 부침」(1958.12)에서 청마에 대해 “우리나라의 모든 훌륭한 시인 가운데서도 인생시(人生詩)와 자연시(自然詩)와 애국시(愛國詩)를 완전히 동일한 바탕(목청)으로써 각각 성립시킨 사람은 그 하나뿐이다”라고 고평하는 가운데 청마시의 ‘넓이’를 말하고, 이어서 “그의 ‘에스프리’의 특질인 동양적인 ‘무’ 내지 ‘자연’”이 그 시의 ‘깊이’와 ‘넓이’를 가능케 했던 ‘원동력’이라고 진단한 바 있다. 청마 시의 넓이와 깊이를 추동한 힘이 무엇이든, 그에 대해 많은 연구자들이 주목한 바 있다. 예를 들어, 이숭원의 ‘힘’에 대한 언급(“새로움이나 색다름을 추구하지 않고서도 시인으로서의 긴장감을 견지하고 그토록 많은 양의 시를 쓸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이 문제의 해명에 청마론의 핵심이 놓인다고 필자는 생각한다.”이숭원, 「청마시 연구의 반성과 전망」, ꡔ현대시2집ꡕ, 문학세계사, 1985, p.239), 김영석의 ‘원형상’에 대한 언급(“청마의 상상력과 직관이 표출해 내고 있는 세계는 변화의 에너지를 장악하고 있는(그러므로 그 자체는 변하지 않는)생명과 세계의 원형상이 아닌가하는 물음이다.”김영석, 앞의 논문, p.10) 등등은 청마 문학의 핵심, 즉 청마 시를 추동한 본질적인 힘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 것으로 이해되며, 이는 현상 너머의 본질을 포착하고자 한 청마의 문학관에 비추어 볼 때(유치환, 「시에의 회의」, 박철석 편저, ꡔ새발굴 청마 유치환의 시와 산문ꡕ, 열음사, 97.11, p.416)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관점 중에서도 김동리의 「ꡔ유치환시선ꡕ에 부침」은 짧은 지면 속에 청마의 넓이와 깊이, 그리고 그를 추동한 힘을 직관적으로 통찰하고 있는 뛰어난 청마론으로 판단된다.
김동리 자신의 문학적 관심사이기도 했던 바로 그 “동양적인 ‘무’ 내지 ‘자연’”에 대한 논의는 청마를 바라보는 유력한 하나의 틀을 제공하는데, 이러한 시각은 이미 그의 「청산과의 거리--소월론」(1952)에서 마련되어 있었다. 소월을 논하던 시각이 청마에게도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김동리의 이 글이 우리 문학의 본질적인 한 면을 가리키고는 있지만 그것이 직관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좀더 논리적으로 그 관점을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청마에 대한 짧은 글이 몇 편 더 있기는 하지만, 김동리가 이후 청마론을 더 이상 깊이있게 전개해 나가지는 않았기에, 김동리의 ‘소월론’으로 되돌아가 우회적으로 그의 ‘청마론’의 근거를 규명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김동리는 「ꡔ유치환시선ꡕ에 부침」의 말미에 “‘동양적인 무’ 내지 ‘자연’은 어찌하여 스타일면의 ‘생경’ ‘소박’ ‘무기교의 기교’ 등과 더불어 ‘하아모니와 생채를 띌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와 그것이 “어찌하여 그의 시의 ‘넓이’를 지탱하는 데 공헌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를 추후에 “달리 논급하기로” 했지만, 그 문제를 청마와 관련하여 직접적으로 깊이 있게 논급한 글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 김동리의 시각이 청마문학의 본질을 통찰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우리가 ‘소월론’으로 우회하고자 하는 것은 ‘청마론’을 위해 불가피한 일일 것으로 판단한다.

김동리는 위의 글에서 “<산유화의 기적적 완벽성>은 그가 몽매간에도 잊지 못하던 그 <임>과 자기와의 거리를 이제는 더 추궁할 수 없으리만큼 막다른 지점에서 발견했을 경우다.” 김동리, 「청산과의 거리」, ꡔ김동리전집7-문학과 인간ꡕ, 민음사, 1997, p.41
라고 말한다. 즉 자신과 청산과의 궁극적인 ‘거리’의 발견, 아무 것으로도 영원히 메울 수 없는 그 거리(‘결핍’)가 유발하는 향수와 그리움의 감정이 「산유화」의 기적적 완벽성을 가능케 했다는 통찰이다. 하지만 그러한 ‘거리’는 또한 시인 스스로 청산에의 그리움을 강렬하게 느끼고 일체감을 맛볼 수 있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거리를 그(*소월)는 무의식 중에 직관하였다.” 김동리, 위의 책, p.45
김동리가 보기에 소월은 “<임>을 더불어 즐기기보다 본질적으로 <임>을 찾고 구하는 데서 그리워하는 편” 김동리, 위의 책, p.42
이며, “그가 청산과 자기와의 거리를 <저만치>라고 손가락질로 가리킬 수 있는 순간은 그가 가장 그의 <임>의 품 속에 깊이 안길 수 있는 순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 순간 그의 체내의 맥박은 청산의 그것에 가장 육박했을 때요 이 순간의 맥박이 그의 시혼을 불렀을 때 저 「산유화」의 기적적 해조는 구성되었던 것이다.” 김동리, 위의 책, p.44

「청산과의 거리」의 분석에서 보인 김동리의 관점을 정리하자면, 접근욕망은 분리를 전제한다는 것이고, 심층 그것은 ‘거리’로부터 가능해 지는 독특한 실재라는 것이다. “보물은 처음부터 거기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벗어날 때 생기는 이상한 것이다.” 조성훈, 앞의 논문, p.35
본고에서는 이를 낭만적 아이러니의 구조로 이해하고 있다. 김동리가 말한 청마의 ‘에스프리’, 그 문학이 발하는 비극적 정조 또한 바로 이와 같은 구조에 힘입고 있으며, 그것은 김동리 자신과 그의 그룹(‘문협파’)이 근거하고 있었던 ‘한’의 구조에 다름 아니기도 했다. “「산유화」의 기적성(완벽성)이 인간과 자연의 ‘거리’(저만치)에서 비로소 달성되었음을 보여 주는 이 평론이 실상 김동리 자신의 문학관임은 새삼 말할 것도 없다.”라는 김윤식의 발언(김윤식, ꡔ미당의 어법과 김동리의 문법ꡕ, 서울대 출판부, 2002.9, p.218.)은 문협파의 주요 인물들이 왜 그토록 ‘소월’의 시에 관심을 경주했었던가 하는 사실과 함께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동리의 위의 글과 유치환의 「소월과 춘성」(ꡔ신문예ꡕ14, 1959.8-9; 특집-소월의 시를 말한다)을 비롯하여 서정주의 글, 「소월의 자연과 유계와 종교」(ꡔ신태양ꡕ 통권79호, 1959.5), 「소월 시에 있어서의 정한의 처리」(ꡔ현대문학ꡕ, 1959.6), 장편의 소월론인 「김소월과 그의 시」(ꡔ서정주문학전집2ꡕ, 일지사, 1972, pp.142-193) 등이 있다. 이에 대한 상세한 검토 또한 소월과 문협파의 문학사적 맥락을 드러내는 작업이 될 터이지만, 여기에서는 줄인다.

오세영은 아이러니적 구조 분석을 통해, 소월 시에 나타난 ‘정한’의 심리를 명확히 밝혀 놓은 바 있다. 오세영, 「한(恨)과 그 시적 반영」, ꡔ김소월, 그 삶과 문학ꡕ,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0
그는 소월의 「진달래꽃」과 「초혼」을 분석하면서, “그 구조라는 측면에서는 아이러니를, 정서라는 측면에서는 한의 심리를 정교하게 형상화시킨 작품” 오세영, 위의 책, p.46
이라고 결론짓는다.

김동리가 소월 시의 의미 구조를 거리에서 파악했던 것은 옳은 것 같다. 나는 그것을 존재의 양면성이 지닌 모순의 거리로 이해하고자 하는데, 그렇다면 소월이 ‘저만치’라는 말로써 표현했던, 이 상호 일치될 수 없는 거리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는 그것을 역설적 거리라고 말하려 한다. 소월 시에 있어서 역설의 거리는 두 가지 양태로서 존재한다. 첫째는 소월 시의 대표적 정서인 한이 갖는 역설적 거리이며, 둘째는 한의 소유자인 주체와 그 한을 지양함으로써 도달되는 초월적 주체 사이에 놓인 거리이다. 오세영, 위의 책, pp.48-9 한편, 오세영은 분석을 진행하는 동안 ‘아이러니’를 ‘역설’로 환치하고 있는데, 그 근거는 “리챠즈의 아이러니는 브룩스의 역설과 그 원리에 있어서 서로 일치하는 것”이고 “실제로 브룩스는 그의 역설이 리챠즈의 아이러니로부터 차용된 것임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이러니와 역설이 그 원리에 있어서 동일한 것이라면 우리는 소월의 한을 역설의 개념으로 고쳐 불러도 무방”할 것이기 때문이다(오세영, 위의 책, pp.46-7). 하지만 ‘아이러니’를 ‘역설’로 환치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일이 왜 불가피했는가 하는 점은 조금 다른 문제일 듯하다. 필자의 단견으로는, 아이러니보다는 역설에 대한 검토가 활발히 이루어진 현 상황 속에서 소월에 대한 심도있는 논의를 기하기 위한 방편적 조처라 생각된다.


위의 글에서 오세영은 “존재의 양면성이 지닌 모순의 거리”를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①첫째는 “한이 갖는 역설적 거리”인데, 이는 그가 앞에서 이미 전개했던 「진달래꽃」과 「초혼」 분석에서 보여주었듯이, 좌절/미련, 원망/자책의 구조가 갖는 주체 내부의 모순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텐션을 가리키며 ②두번째의 ‘거리’는 한을 지닌 주체와 한을 초월․극복한 주체(범신론적 자연) 사이의 거리를 가리킨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오세영은 <왜 김소월의 시가 단지 연시에 머무르지 않고 생의 근원성을 탐구하게 되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내리고 있다. 즉 위에서 분석한 바와 같은 “한의 역설적 거리를 지양할 수 없다는 깨달음--인간의 근원적인 부조리성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심각한 비애가 생기며, 바로 그러한 비애가 소월 시의 철학적 배경을 이룬다는 것이다. 오세영, 위의 책, pp.33-56

청마는 「동박새와 동백꽃」(1964.11)에서, 자신의 젊은 시절이 동백꽃 “빛깔보다 진하고 충실”했던 것으로 회고한다. 또한 그것이 “못 잊힐 애정처럼 사무치게 되새겨짐”은 그가 이제 그 시절로부터 먼 거리에 있게 된 때문으로 설명한다. 자신의 현재 위치를 “인생을 일실”한 것으로 표현하여 과거와의 거리를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법(시간적․공간적 ‘거리’의 응시)은 청마의 시작법에서는 익숙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청마는 “이탈과 몰입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는 아이러니적 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 구조를 단순하게만 볼 수는 없다. 청마에게 있어서 조국에 대한 愛憎이나 자연과의 합일과 거리, 존재론적 모순과 균열, 회귀에의 욕망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자연과 사회, 타인과 자신과의 ‘거리’, 나아가 자기 자신의 분열과 균열을 응시했던 청마에게는 그와 같은 거리와 일치의 감각이 다른 어느 시인보다 두드러져 보인다. 對極的 거리감이 자아내는 비극적 황홀감, 이상과 현실의 날카로운 인식과 더불어 그 모순적 태도나 양가적 의미들은 모두 이러한 아이러니적 旋回의 구조 속에서 함께 발생한다. 그리하여 필자는 청마의 시적 인식의 성취와 한계는 모두 그의 아이러니적 발화 혹은 사유방식과 깊이 관련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유의 틀은 어떠한 과정을 밟아 마련된 것인지 규명해야 하는데, 여기에서는 그것을 우선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먼저 청마 스스로 유년을 회고하며 드러내 보인 죽음과 분리의 이미지들에 대한 분석, 그리고 청마의 시론으로 불리기도 하는 초기작품 「기빨」에 나타나는 ‘존재론적 모순’에 대한 검토 등이다.

1) 回歸와 유년의 의미--분리와 균열

노발리스에 의하면 예술은 인간 존재의 근원으로, 즉 본질적 실재의 세계로 회귀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다.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 사이의 모순을 지양하고 절대적 화해를 지향하는 정신적 경향을 낭만주의자들은 ‘동경’이라고 불렀다. 김진수, 「낭만주의 예술론에 있어서 에로스의 개념」, 한국미학예술학회편, ꡔ예술과 자연ꡕ, 미술문화, 1997, p.128

낭만주의를 특징짓는 중요한 정신적 기조는 이와같은 憧憬이다. 낭만주의는 현세계를 불완전한 미완의 것으로 보았고 스스로가 지양, 성장해 가는 한 과정으로 보았다. 낭만주의자들이 감각적 현실을 부정하고, 관념 세계를 동경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르네 웰렉은 낭만주의자들의 이러한 관념 지향성을 신플라토니즘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낭만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동경의 문제는 여기서 발단된다...미완의 현실에서 이 세계에는 없는 완전한 실체를 꿈꾸는 것, 그 스스로 해체, 파괴되면서 영원한 형성을 욕망하는 것이 낭만주의자들의 동경이다. 슐레겔은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무한한 것에 대한 동경이 계발되어야 한다>고 했으며....무한에 대한 이와 같은 동경은 낭만주의자들의 일반적인 태도였던 것”(오세영, ꡔ문학연구방법론ꡕ, pp.211-2).
예술작품은 다만 그러한 절대성에 이르려는 동경의 흔적과 파편들로서만 현상된다. 끊임없는 자기 정체성을 향한 이러한 욕구와 현실적인 충족 불가능성은 낭만주의의 고유한 동경이라는 욕구의 형식을 만들어내지만, 저 욕구의 무한성과 충족의 유한성 사이에서는 긴장이 생겨난다. 그 긴장의 영역을 낭만주의자들은 ‘아이러니’라고 부른다. 김진수, ꡔ우리는 왜 지금 낭만주의를 이야기하는가ꡕ, 책세상, 2001, p.56
.
청마의 시편들 중에는 ‘되돌아감(회귀)’의 욕망이 표현된 일련의 작품들이 있다. 고향에의 그리움, 즉 ‘향수’를 운위하거나 유년시절을 회고하는 시편들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들 작품들에는 현실의 난입으로 인해 따사로움의 세계와 영원히 멀어지게 되었다는 상황인식과 함께, 그곳으로 되돌아가려는 욕망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으며, 특이하게도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 또한 다른 한편에 존재하고 있다. 청마의 시에서는 그러한 모순적 욕망들이 복합적으로 길항․공존하고 있다.
먼저, ‘鄕愁nostalgia’ 김영석은 ‘노스탈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흔히 향수로 번역되는 이 말의 어원은 그리스어의 <회귀>이며 ‘시공을 멀리한 것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김영석, 앞의 논문, pp.40-41)
의 아이러니 구조에 대해 살펴보자. ‘鄕愁’는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다. 그것은 고향을 떠난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것으로 그러한 그리움의 정서에는 현실적이든 가상적이든 이미 그 안에 ‘분리’와 ‘떠남’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것은 떠나고자 하는 마음, 즉 밖을 향한 ‘憧憬longing’과 짝을 이루어 서로의 존재 근거가 되고 있다. 이어령, ꡔ공간의 기호학ꡕ, 민음사, 2000, p.391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향수는 곧 고향에서 밖으로 떠나고자 하는 동경의 반대 감정과 하나로 어울리게 되는 것이다.” 과연 낭만주의자들의 ‘동경’이 ‘떠나고자 하는 것’만을 가리키는지는 의문이기는 하지만(일반적으로 ‘그리움’, ‘갈망’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향수’와 ‘동경’은 유사어로 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어령의 이와 같은 지적은 청마 시에 나타난 “모순과 순환성”을 설명하는데 유효한 관점을 제공하기에 본고에서도 ‘동경’과 ‘향수’를 대립적 쌍으로 다룬다.
향수는 고향으로부터의 떠남, 그 거리에서 추동되는 것이며, 그것은 다가가고자 하는 욕망이면서도 다가가면 사라질 것이기에 그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아이러니를 근거로 한다.

나는 영락한 고독의 가마귀
창랑히 설한의 거리를 가도
심사는 머언 고향의
푸른 하늘 새빨간 동백에 지치었어라

고향 사람들 나의 꿈을 비웃고
내 그를 증오하야 페리같이 버리었나니
어찌 내 마음 독사 같지 못하야
그 불신한 미소와 인사를 꽃같이 그리는고

오오 나의 고향은 머언 남쪽 바닷가
반짝이는 물껼 아득히 수평에 조을고
창파에 씻인 조악돌 같은 색시의 마음은
갈매기 울음에 수심저 있나니

희망은 떠러진 포켓트로 흘러가고
내 흑노같이 병들어
이향의 치운 가로수 밑에 죽지 않으려나니
오오 저녁 산새처럼 찾어갈 고향길은 어디메뇨
(시 「鄕愁」 전문, ꡔ동아일보ꡕ, 1934.2.21, ꡔ청마시초ꡕ “ꡔ청마시초ꡕ에는 55편이 3부로 나뉘어 수록되어 있다. 대체로 회람지 ꡔ소제부ꡕ를 발간한 1930년 이후, 통영에서의 어둡고 답답한 명정 시대, 부산과 평양을 오고간 유랑, 실업과 방황 등이 연속된 1939년까지를 배경으로 한 작품집이다.”(문덕수, ꡔ청마유치환평전ꡕ, p.100)
에 수록)

청마의 나이 27세 때인 1934년 2월 21일 동아일보에 발표된 이 작품은 청마가 1934년 부산 초량으로 이주하기 전에 머물렀던 평양(1932년부터 거주)에서 쓴 것으로 판단된다. 청마의 초기작 중에서도 이 작품은 주목을 요하는데, 그 이유는 그의 문학활동의 전 시기를 아우를 수 있는 테마의 하나로서 ‘향수’가 이 작품에서 중요한 모티프로 나타나 있으며, 그 모순적 양상 또한 두드러져 보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꿈을 비웃고 자신이 증오하여 버린 고향과 고향사람들을 북방의 먼 이향, “설한의 거리”에서 “새빨간 동백꽃”의 형상으로 시인이 그리워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시인은 다시 “어찌 내 마음 독사 같지 못하야/ 그 불신한 미소와 인사를 꽃같이 그리는고”라고 자신을 책망한다. 시인이 고향을 떠난 후로도 애증에 시달리는 실제적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조화 및 통일성에 대한 동경이 강할수록 동시에 그것의 부정도 마찬가지로 강하게 작용하는 것이 아이러니의 근본 속성”이며, “일치라는 유토피아적 표상이 증대되는 순간 양자간의 괴리는 더욱 깊어지며, 이것이 아이러니의 중요한 특성인 것” 최문규, 「독일 낭만주의와 ‘아이러니’ 개념」, ꡔ문학이론과 현실인식ꡕ, p.100에서 인용.
이라는 지적은 이 부분을 해석하는 중요한 참조점이 될 수 있다. 자신이 버리고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하고 다시 그것을 책망하는 모순된 감정은 이미 ‘향수’의 구조적 차원에서 마련된 것이다. 즉, 청마에게 있어서 향수, 나아가 합일에의 그리움에는 이미 ‘분리’가 전제되어 있었던 것이며, 이러한 부정과 긍정의 양가적 구조는 청마 문학의 모순적 양상과 그 본질적 구조 해명에 중요한 토대가 될 것이다.
한편, 시 「향수」에서 그려진 고향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되는데, 그 하나는 자신이 버린 현실의 고향이요, 다른 하나는 자신의 꿈 속에서 가꾸었던 ‘저녁 산새처럼 찾어’가 안길 고향이다. 청마는 ‘고향’으로부터 떠남과 되돌아감의 양가성과 더불어, ‘자연’에 대해서도 두 개의 대립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그 하나는 냉혹한 자연의 질서이며, 다른 하나는 돌아가 안길 모성적 자연의 의미이다. 두 개의 양립 불가능한 해석(기의)이 하나의 기표 속에 동시적으로 공존하고 있는 ‘상황의 아이러니(situational irony)’이며 여기에서 아이러니스트는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있는 것이다. 다음의 분석은 이러한 청마의 모순을 이해하는 데 시사하는 바 크다. “기대하고 예상하고 있던 과거의 기의가 지각되고 있는 현재의 기의와 서로 어긋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념화된 과거의 개념적 형식과 현재 지각되는 개념적 형식 혹은 이미지가 불일치되는 방식이다. 따라서 아이러니스트는 내부적으로 분열되고 있다. 과거와 현재, 신념과 지각의 분열: 아이러니 모두에서 핵심적 구조는 분열(split)이다.” 조성훈, 앞의 논문, p.7
시인은 마지막 행에서 “오오 저녁 산새처럼 찾어갈 고향길은 어디메뇨”라고 그러한 모순적 상황을 표현하고 있는데, 위에서 보인 바와 같은 이중적 고향의 의미가 하나로 묶여져서 시인에게 육박할 때 그러한 모순을 시인은 영탄조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검정 사포를 쓰고 똑딱선을 내리면
우리 고향의 선창가는 길보다도 사람이 많았소
양지 바른 뒷산 푸른 송백을 끼고
남쪽으로 트인 하늘은 기빨처럼 다정하고
낯설은 신작로 옆대기를 들어가니
내가 크던 돌다리와 집들이
소리 높이 창가하고 돌아가던
저녁놀이 사라진 채 남아 있고
그 길을 찾아 가면
우리 집은 유 약국
행이불언하시는 아버지께선 어느덧
돋보기를 쓰시고 나의 절을 받으시고
헌 책력처럼 애정에 낡으신 어머님 옆에서
나는 끼고 온 신간을 그림책인 양 보았소
(시 「歸故」 전문, 제2시집 ꡔ생명의 서ꡕ(행문사,1947.6) 수록.)

만주시절 쓰여진 듯한(ꡔ재만시인집ꡕ, 1942.9.20에 게재됨) 위의 작품에서 시인은 과거 고향 마을을 회상하며 그 고향집에서의 한 장면으로 들어서고 있다. 거기에서 그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학창시절 모습을 본다. 시인은 지금 과거를 회상하며 자신의 유년으로의 회귀를 시 속에 그려놓고 있다. 시인은 이미 시간적 거리를 갖고 있는 상황에서 과거를 바라보고 있으며 그러한 거리감이 이 장면을 설화적으로 만든다. 시인의 회상 속에서 과거는 설화적이고 동화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마지막 행의 “나는 끼고 온 신간을 그림책인 양 보았소”에서는 과거 속에 다시 더 오랜 과거의 용어 ‘그림책’이 끼어들어 있어서 그러한 회귀의 심화 과정을 암시한다. 이 작품에서 그려진 과거회귀의 끝지점에는 ‘유년’의 그림자가 놓여 있다. 이어령이 분석한 바대로 “귀고의 경로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내/외의 무수한 차이로 기술”(p.396)되어 있으며 “「귀고」의 마지막 <내> 공간의 귀향점은 시간의 소급, 과거로 끝없이 퇴행해 가는 유년 시절”(p.398)인 것이다. 이어령, 앞의 책 참조.

설화적, 동화적으로 이상화된 꿈 속의 고향으로의 회귀는 ‘유년’으로 이어지며, ‘유년’ 바로 그것은 청마 문학의 중요한 모티프의 하나인 ‘향수(되돌아감)’를 불러일으키는 근원이자 회귀점일 것이다. “자아가 시간의 깊이인 ‘과거’에 관여함으로써 그 자아는 현재의 시간형식에서 분열되었던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가게 된다.” 보러, ꡔ절대적 현존ꡕ, 문학동네, 1998, p.7
하지만 과연 그러한 회귀에 의해 분열이 극복된 것인가? 여기에 청마의 유년의 기억, 그리고 그의 작품에 나타난 유년기의 이미지들이 주목받을 이유가 있다. 청마는 자작시 해설서 ꡔ구름에 그린다ꡕ(1959)를 펴낸 바 있는데, 그 첫 부분 「생장기」에는 행복하고 조화로운 세계보다는, 그의 유년시절의 가족과의 ‘분리’ 체험과 그러한 ‘소외’에 따른 ‘내/외’ 공간의 첫체험, 그리고 ‘죽음’ “죽음은 다른 모든 것을 흡수해 버리고 모든 기준과 법도 소멸시켜버리고 마는 거대한 예외가 된다. 그 보편적인 예외에 대항하는 무기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기괴함과 촌스러움과 독특함의 미학인 아이러니이고, 다른 하나는 상응의 미학인 아날로지이다.” 파스, 앞의 책, p.97
의 이미지와 같은 어두운 그림자가 놓여 있다. 청마의 자전적 기록이기도 한 ꡔ구름에 그린다ꡕ의 서두에 놓인 이 유년의 일화에 주목한 연구자를 찾기 힘들다는 사실은 일견 놀라운 일이기도 하다.


세살 터울인 내 아우가 생기자 아기에게 대한 시샘이 유달리 심하던 나는 우리 집안에선 「각씨오매」라 부르는 먼벌 되는 홀로 사는 할머니에게 저녁이면 북문 밖 오리 길을 업혀 가선 할머니한테서 자고 아침이면 도로 업혀서 집으로 오곤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외할아버지가 차린 글방으로 글 배우러 외갓집으로 갈 만큼이나 철이 들도록까지 이 각씨오매 곁에서 자란 것이었으니 저녁 으스름 들길을 할머니 등에 업혀 갈 때 그 당시 역시 그 할머니가 귀애하던 친척 아이가 죽어 묻혔다는 건너산 골짝을 바라보고, 듣고선 오기나 할 듯이 할머니가 그 아이의 이름을 소리내어 부르며 혼자 뇌이던 군노래를 철 없는 마음으로도 한량 없이 눈물겨워하였는가 하면...(중략)... 한 번은 할머니한테 업혀 갔다가 금시에 어떻게도 집으로 도로 오고팠던지 앙탈 끝에 막상 되돌아 와서 처마에 등불을 달아 두고 가족들이 모여 앉아들 있는 자리에 내려 놓이자 그 휘잇한 밤 들길을 할머니가 혼자 돌아갈 것이 얼마나 가엾고 미안스러웠던지 그렇다고 도로 같이 가겠단 말은 어린 염치에도 할 수는 없고 그래서 그 후로는 그러한 앙탈은 다시는 안했던 것입니다.” (유치환, ꡔ구름에 그린다ꡕ, p.14)

세 살 터울인 동생이 생기자 유년의 청마는 집안에서 ‘각씨오매’라 불리던 친척 할머니 집에서 잠을 자고 아침이면 도로 집으로 업혀오는 일을 글방에 글배우러 갈 때까지 계속하게 된다. 이 유년의 일을 회상하고 있는 청마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는 이미지는 ‘죽음’과 ‘분리’의 이미지이다.
그 할머니가 귀애하던 친척아이가 묻혔다는 건너편 산을 바라보며 부르던 할머니의 군노래 소리에 눈물겨워하기도 했다는 일화가 주목되는 것은, 그것이 어린 시인에게 ‘죽은 아이’가 묻힌 ‘건너편’의 세계를 상념케 했고(‘죽은 그 아이는 어떻게 되어버린 것일까?’), 그곳을 바라보며 부르던 할머니의 노래소리에 눈물겨워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알베르 베겡이 말했듯, 죽음에 대한 “낭만적 영혼들의 전형적인 경험”이며, 그 첫 움직임의 기록으로 주목되는 이미지이다. 베겡, ꡔ낭만적 영혼과 꿈ꡕ, 문학동네, 2001, p.84

다음으로 유년의 청마는 할머니에게 떼를 써서 한 밤 중 집에 돌아온 적도 있는데, 그때의 광경이 대조적인 강렬한 이미지로 제시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즉, 가족들만 모여앉아 밝히고 있는 등불과 할머니 혼자 되돌아가야 할 ‘휘잇한’ 밤길의 대조가 그것이다. 거기에는 “세상이 온통 신기하게 보였던 만화경을 빼앗긴 아이의 절망”, “아름다운 환상의 환락에서 깨어난 어린아이의 움직임, 갑작스러운 추락” 베겡, 앞의 책, p.359
이 개입되어 있다. 청마가 타관으로 유학가기 전까지 매년 섣달 대 그믐날 그 할머니 곁에서 자고, 또한 훗날 “할머니 할머니 나의 할머니”(「석류꽃 그늘에 와서」 이어령은 이 시에서의 ‘할머니’를 청마의 ‘어머니’와 연계하여 설명하고 있는데(이어령, 앞의 책, p.399 “「귀고」의 어머니가 할머니가 되고 유약국 집안이 무덤으로 나타나 있다.”), 청마의 ꡔ구름에 그린다ꡕ(pp.14-15)에 설명된 바대로, ‘할머니’는 그대로 그 일화에서의 ‘각씨오매’로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당시 청마에게 ‘각씨오매(할머니)’는 어머니 대신이었기에, “분절이전의 원기호”(p.400)를 설명하기 위한 문맥에서 이어령이 「석류꽃 그늘에 와서」의 ‘할머니’를 ‘어머니’로 해석한 것에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청마의 분리체험에 주목하기 위해서는 이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라고 불러야 했던 심정으로 미루어 보건데, 가족으로부터의 ‘분리’에 대한 의식이 이러한 대립적 이미지로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어두운 방에 엎드려 할머니를 기다리는’ 이미지 등, 이 일화에 나타난 ‘분리’와 ‘죽음’, ‘기다림’의 이미지들은 청마 유년의 기억 속에 강하게 남아 있는 것들이다. 본고에서 이 일화에 주목하는 이유는 우선, 이 글에는 청마에 의해 ‘선택된’ 이미지들이 들어 있다는 점, 즉 많은 세월이 흐른 시점에(ꡔ구름에 그린다ꡕ는 1959년 발행됨), 시인 자신의 삶과 문학을 설명하고 이해시키기에 ‘유효한’ 출발점으로서 시인에 의해 ‘다른 것도 아닌 그것으로’ 선택된 일화라는 점이다. 다음으로 이 일화는 청마의 ‘자서전’ 르죈에 따르면, ‘자서전’은 “실제 인물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소재로 하여 개인적인 삶, 특히 자신의 인성(人性)의 역사를 중점적으로 이야기한, 산문으로 쓰인 과거 회상형의 이야기”로 정의된다. 물론 르죈은 나중에 ‘산문으로 쓰인’ 이야기라는 조건과 관련해서 “자서전적 시의 기능성을 인정”하게 된다. 필립 르죈, ꡔ자서전의 규약ꡕ, 문학과지성사, 1998, p.17
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그러한 “자서전과 여타의 내면 문학 장르들 사이에는 자연스런 전이가 성립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르죈, 위의 책, p.19
비록 청마 유년의 작은 일화이기는 하지만, 여기에 나타난 분리와 죽음의 모티프가, 그의 유년기를 다루고 있는 작품들에 보이는 간극이나 급격한 단절, 그리고 양가적 미묘함과 시간적 공간적 거리감이라는 청마 문학의 주요한 테마와 긴밀한 관계에 있는 것이고, 이에 대한 분석에 해석적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작지 않다.

파랑이를 대고 보면 파아란 세상이 되고
노랑이를 대고 보면 노오란 세상이 되고

그날 나의 세월은
깨어진 유리병쪽으로도
희한히 곱고 놀랍기만 하였다.

새금파리 돌맹이 길바닥에 모고
해 따라 종일을 가난하게 놀아도
우리 엄마만의 나는 귀여운 왕자여서

놀기에 수럿 겨워 울고 울고 돌아가면
그때사 정녕 가리마 고와셨을 어머님
하늘 같은 품안이 있었으니.

뒤뜰 돌배나무 아래 가서 우러르던
성이 치어 든 장대끝 그 새파란 하늘!
( 「세월」, ꡔ청마시집ꡕ, 1954 )

시 「세월」에는 시인의 유년에 대한 추억이 몇 가지 형상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전반부에 보이듯, 그것은 행복한 유년으로 착색되어 있다. “그날 나의 세월은/ 깨어진 유리병쪽으로도/ 희한히 곱고 놀랍기만 하였다.” “감수성에 상처를 입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고통받는 소년은 예전의 이미지들을 상기시킴으로써 그에게 힘을 주는 놀이들 속으로 도피한다.” 베겡, 앞의 책, p.451. 이 작품에서의 ‘유리병쪽’ 놀이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엄마만의 나는 귀여운 왕자”였고, “어머님/ 하늘 같은 품안이 있었으니”까. 유년기의 시간은 상상력의 시간이며 또한 상상력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時空間의 정신 파스, 앞의 책, pp.61-62
이다(*아날로지). 그런데 그 시공간 속에 틈이 나 있다. “뒤뜰 돌배나무 아래 가서 우러르던/ 성이 치어 든 장대끝 그 새파란 하늘!”이라는 마지막 두 시행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머니에 대한 추억에서 형의 형상으로 넘어가는 전환이 급작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머님의 품안’은 멀리 ‘새파란 하늘’로 이동되며, 그 사이에 ‘성이 치어든 장대’가 개입된다. 한 연구자의 설명을 참조하자면, “청마는 가장 순수한 유아 공간 속에 이 <장대>를 끌어 들이고 있다. 장대는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것으로 청마 시에 있어 하늘을 매개하거나 어린 시절의 어머니의 품과 같은 순수한 공간을 지시하는 화살표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어령, 앞의 책, p.164
이 작품에서의 하늘은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공간이며, 장대는 시인과 그 하늘을 ‘매개(지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머니와 하늘을 매개하고 가리키지만, 또한 그러하기에 그 시공간적 ‘거리’를 환기하며 틈입된 매체이기도 하다(*아이러니).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 마주치게 되는 이 미묘한 저항, 청마에게 있어서 향수(되돌아감), 나아가 합일에의 그리움에는 이러한 ‘분리(떠남)’가 개입되어 있다. 시 「세월」(1954)은 청마 시의 향수와 그 양가적 양상을 형상화하여 보여주는 자전적인 작품인 것이다. 이러한 작품 해석과 관련하여 다음의 시 「동월」은 그러한 해석의 타당성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슥하여 한밤중의 만월이
저녁을 먹고 난 한동안
엄마 치마 자락을 끼고 놀던
비인 뜰악을 가득히 비치고
왼 집안은 고운 숨껼과 은실 같은 벌레 소리에
물을 끼얹은 듯 괴괴히 잠들었는데
한창 곤한 어린 꿈 위엔
대낮 같은 달빛에 가려 선
뒤뜰 늙은 돌배의 괴물같이 앙상한 그림자
(시 「동월(童月)」 전문, ꡔ생명의 서ꡕ 수록)

시 「동월」에서 달빛을 가려 선 “뒤뜰 돌배나무”는 아이의 잠든 꿈 속에 “괴물같이 앙상한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이러한 창백함(“앙상한 그림자”), 서느로움(“물을 끼얹은 듯 괴괴히”)은 위의 시를 ‘아이’를 가려선 ‘죽음’의 이미지가 느껴지는 창백한 한밤의 풍경으로 읽게 한다. 시 「세월」에서의 “뒤뜰 돌배나무”를 양가적으로 해석케 하는 근거도 이 작품에 있다. 한편, ‘만월’과 ‘나무 그림자’, 그리고 ‘아이의 죽음’ 이미지가 이루어내는 구도는 청마의 말년의 작품에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서 흥미롭다.

작고한 이중섭 화백은 6.25동란 당시 내 고향 충무에 얼맛동안 피난해 지내며 그 白晳長身, 윗수염을 가진 불세출의 예술가는 누구 모를 고독과 초려 속에서 조그마한 개인전을 가진 일이 있었다 그때의 작품 중에 달과 까마귀를 그린 한 폭이 유독 나를 마음 흡수하는 바 있어 항상 심저에 남아왔었는데 이즘 우연히 모지의 표지화로 그것이 나타나 있음을 보게 되어 놀랍고 반가왔다//

저걸 보라/ 어서 나와들 저걸 보라/ 검은 裝束한 邪敎의 亡者 같은 한 떼 새들은/ 가까운 전선줄 위에 이루 죽지를 부딪고 놀라 모여/ 前無後無, 저들의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저 가증스런 해와는 또 다른/ 한 발만큼이나 커다란, 커다라면서도/ 야릇하게 차거운 빛을 던지는 황황함에/ 경악과 不信의 가위 같은 부리, 유황빛 눈을 휩뜨고들/ 노호하며 다투는 변괴!//

아아, 저 해라는 것,/ 그 혁혁한 세력과 오만스런 엄위로써/ 저들의 존재를 여지없이 추달하던 저 해를/ 증오와 저주로서 가까스로 西山 저 쪽 넘어뜨리고/ 이제야 그지없이 평화한 죽음의 흑암세계 속에/ 五官마저 거부하고 길이 安住하려는데/ 난데없이 저것은,/ 한 발만큼이나 커다란,/ 저게 무언가?/ 저건 또 무어란 말인가?//

건너 어둔 등성이,/ 검은 침염수들의 고요로운 가장자리 위로/ 난데없이 死者의 死面 같은 차가운 얼굴을 내밀고/ 휘황히 나타난 저것은//

아아, 원만무결한지고!/ 바야흐로 앞산마루를 넌즈시 벗어나온/ 滿滿한 滿月을 앞에 하고/ 그러면서도 死者의 死面같은/ 차거운 빛을 휘황야릇하게 던지는 저것은/ 짐짓 무슨 意味의 괴변인가?/ 무엇을 혼령들에 추달하련건가?”
(시 「괴변--이중섭 화 <달과 까마귀>에」 전문, ꡔ현대문학ꡕ, 1967.2 유고시)

위의 작품은 청마가 작고한 후, 1967년 현대문학 4월호에 실린 그의 유고시 중의 한 편이다. 1953년 경남 통영에서 개최된 이중섭의 개인전에서 인상깊게 보았던 <달과 까마귀>를 10여년이 훨씬 지난 시점에 우연히 다시 보게 된 청마는 그에 대해 자기 나름의 시적 형상화를 시도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그가 강조하고 있는 이미지들의 의미에 주목해 봄으로써 그의 ‘心底에 항상 남아왔었던 것’, 그리고 동시에 청마 말년의 문학적 면모를 관찰할 수 있다.
우선, “유황빛 눈을 휩뜨고들/ 노호하며 다투는 변괴!” 등의 표현에서 보이듯, 청마는 그 그림에서 까마귀들의 “경악과 불신”의 수선스러움에 주목한다. 그들을 그렇게 경악케 하고 수선스럽게 한 존재는 바로 ‘달’이다. 달은 죽음과 어둠의 존재들(‘까마귀들’)을 놀라게 하는 빛을 발함으로써 생명의 의미를 보여주는 듯하지만, “그러면서도” 죽음의 “차거운 빛을 휘황야릇하게 던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청마는 이를 “짐짓 무슨 의미의 괴변인가?”라는 말로 그 복잡한 의미관계의 회로를 가리킨다. ‘달’이 갖는 양가적 의미의 혼란스러움, 그것이 까마귀들을 놀라게 하고 수선스럽게 한 근본 원인이며, 그 그림을 본 청마의 심정이며, 청마의 시를 읽는 우리들에게 전해오는 불안한 의미의 울림이다.
“무엇을 혼령들에 추달하련건가?”라는 마지막 시행에서의 ‘혼령’은 일차적으로는 앞에서 묘사된 까마귀를 가리키는 것이지만, 죽음과 사후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시인의 ‘혼령’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까마귀들의 ‘경악과 불신’은 시인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 ‘달’이 상징하는 것은 죽은 혼령들을 추달하는 죽음 저편의 세계에서 나오는 “커다라면서도/ 야릇하게 차거운 빛”이다. 그 빛 앞에서의 까마귀들의 수선스러움은 이제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하지만 아직 저 세상으로 건너가지 못한 죽은 자들의 혼백의 불안과 불신과 경악을 보여주고 있다. 청마는 이중섭의 그림 <달과 까마귀>에서 다른 무엇도 아닌, 이러한 ‘죽음’의 단면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낭만적 영혼의 첫 움직임(‘죽음 이미지’)이 그의 생애의 마지막까지 지속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괴괴한 울음소리로 인하여 할머니 품속에 꼼짝없이 붙안겨 자던 나의 어린 날의 어둔 밤과 꿈의 부피는 얼마나 가이없던가” 유치환, 「素朴--부엉이」, ꡔ예루살렘의 닭ꡕ, 산호장, 1953 수록
라는 시인의 말은 이러한 맥락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내 오늘 하잘것없는 소간으로 길을 가는데 우연히 한 개울을 건느다가 무심코 거기 잔잔히 흐르는 작은 흐름 속을 들여다보자
어머니!
나도 모르게 이 부르짖음소리 가슴에 치밀리며 어쩔 수 없는 울음 내쳐 간장으로 울며 갔네라
...(중략)...

세월이여, 세월이여, 일찍이는 나를 거기에서 하염없이 살게하고 다시 이끌어다 이제는 이같이 멀리서 느껴 누리도록 내내 베풀어 준 지복한 세월이여
(「세월」 중간생략, ꡔ제9시집--시와 단장ꡕ, 1957.12)

청마는 시 「세월」(1954)을 쓴 지 몇 년의 세월이 흐른 후 다시 동일한 제목(「세월」)으로 ‘어머니’와 관련된 시를 발표하고 있다. 청마의 <어머니>에 대한 몇 편의 시들(「귀고」, 「대구에서」, 「설일」, 「세월」1954, 「세월」1957, 「어머님께 드리는 시」 등)은 정밀한 검토가 필요할 듯한데, 그 이유는 청마의 시편에서 그려지는 ‘어머니’는 이중적인 모습으로 겹쳐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즉 ‘따스한 품 속’과 ‘떨어져 있는 그리움’의 존재로서의 어머니. 이는 청마 유년시절의 어머니와의 분리 체험, 그리고 시간적 공간적 <거리감>이라는 청마 문학의 주요한 요소와 일정한 연관을 갖는 것으로 이해되며 이 또한 <낭만적 아이러니>의 구도와 관련되어 있다.
위의 시에서 시인은 우연히 한 개울을 건너다가 “잔잔히 흐르는 작은 흐름” 속을 들여다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를 부르짖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린 시절의 이미지가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성인이 된 의식의 저변에서도 지속되고 있다는 것과 “바라만 보아도 우리의 삶 전체를, 그리고 아마도 우리의 존재 전체를 모호하게나마 통찰케 해주는 물질적인 대상들이 있다.”는 사실을 함께 살필 수 있다. 알베르 베겡, 앞의 책, p.87
개울물의 ‘하염없는’ 흐름과 ‘주름’은 변화와 지속을 모두 담아내고 반영하는 이미지로서, 청마는 그러한 거리와 분리에 대한 인식과 동시에 그 겹침의 양가적 순간을 위의 시에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작품의 마지막 행에 나온 ‘지복한 세월’이라는 표현은 반어이지만, 그 의미의 폭은 해당 시구나 작품 내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 구절은 시공간적 <거리감>이라는 청마 문학의 주요한 테마와 共鳴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원점으로서의 청마 유년의 어머니와의 분리 체험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청마에게 있어서 향수(되돌아감), 나아가 합일에의 그리움에는 이미 ‘분리(떠남)’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 여기서의 논점이며, 그것은 시인 자신에게서 떼어낼 수 없는 ‘지복한’ 모순이다. 이와 같은 구조에서 발생되는 특수한 ‘에스프리’를 김동리는 청마의 시를 추동시킨 근본적인 힘으로 보았던 것이다.
위에서 살폈듯이, 청마의 회귀점으로서의 유년에는 ‘죽음’과 ‘분리’, ‘어머니’의 이미지가 깊이 각인되어 있다. 이것들은 또한 ‘모태공간’이라는 테마로 포괄될 수 있을 것이며, <모태공간으로의 회귀> “인류는 심리심층에 원초적 고향에 대한 향수를 지니고 있는데 이 인류적 고향은 ‘대지’ 또는 ‘모태’라는 이미지로 파악되고 있다”(황패강, ꡔ한국서사문학연구ꡕ, 김영석, 앞의 논문, p.43에서 재인용). “이러한 모태적 지향은 불완전한 현세적 갈등을 보다 강력하게 체험할 때에 그것의 지양을 원하는 것에 다름 아니며 완전하고자 하는 결벽성이 강할수록 그러한 성향은 현저해진다고 볼 수 있다.(여기서 청마의 자학도 근본적인 해명을 얻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청마는 낭만적 이상주의자였다.” 김영석, 앞의 논문, p.43 참조. 하지만 김영석은 청마의 ‘낭만적’ 측면만을 지적하고 있을 뿐, 그 균열 양상(아이러니적 측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본고에서는 그 두 가지 모두를 동시에 바라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 바로 이것이 청마의 <향수>의 진면목일 것이다. 하지만 이미 지적했듯이 그 회귀점의 균열 양상이나 그에 대한 시인의 자의식 또한 여기에서 함께 검토되어야 한다.

내 자신을 스스로가 주체 못하는 밑 없는 절망 속에서 아프게도 나를 불러 손짓하고 또한 내 스스로 그것을 치욕으로 생각하는 망향의 먼 향수는 어쩌면 현실의 나의 고향이나 조국에 대한 그것이 아니라 영혼이 돌아가 의지할 그러한 정신의 안주지가 아니었던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국의 혼령들이 귀의한 혼령의 고토마저 내게는 내것인 듯 애닲게도 간절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유치환, ꡔ구름에 그린다ꡕ, p.43)

위의 글에서 유치환은 모순적 감정으로 자신의 향수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프게도 나를 불러 손짓하고 또한 내 스스로 그것을 치욕으로 생각하는 망향의 먼 향수”. 돌아감의 욕망과 그런 자신의 욕망을 치욕으로 바라보는 곳에 청마의 정신적 모순이 있다. 왜 그는 그와 같은 관련성 자체를 비판적으로 표현하고 있는가? 그것은 청마에게 “영혼이 돌아가 의지할 그러한 정신의 안주지”에 대한 욕망과 더불어, 지상의 삶에 대한 미련과 욕망이 동시에 존재하는 때문이다. “저 다행한 죽음의 하늘나라 그편에서도/ 나는 내가 부재(不在)한 이곳 먼 지상을 잊을 수는 없으리라”라고 시인이 말한 바 있듯이, 시인에게는 신의 세계에 귀의하기 전의 ‘지상적 삶’에 대한 미련과 삶의 의지 또한 남아 있는 것이다(“나는 내가 살던 이 먼 지상은 한 시인들 잊을 수는 없으리라”--시 「遠景」의 일부분, ꡔ사상계ꡕ, 1958.6).
청마 시에서의 ‘되돌아감’의 모티프 뒤에는 ‘죽음’과 같은 건너기 힘든 존재론적 간극이, 어머니와의 분리와 같은 체험적 균열과 시간적 거리가 상존하고 있으며, 아직도 떠돌 수밖에 없는 결핍된 현실에 대한 인식 필자는 청마유년의 모성결핍과 더불어 그가 살았던 시대의 부성결핍이 모두 ‘죽음’의식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 동시에 공존하고, 충돌하고 있다. 수직적 초월의 상징과 수평적 방랑의 모순적 긴장으로 「기빨」을 해석하고자 하는 다음 장의 논의 또한 동일한 양가적 긴장 구조를 갖는다. 이러한 거부와 열망, 이 모순된 욕망 속에서 낭만적 아이러니가 작동하고 있다. 아날로지와 아이러니의 공존, 상상력에 의한 통합과 아이러니적 ‘거리’ 인식이라는 양극단의 결합을 추구하던 낭만주의의 모순적 면모를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옥타비오 파스, ꡔ흙의 자식들ꡕ, 솔, 1999, pp.78-100 참조.


2) ‘旗빨’의 의미--존재론적 모순

유치환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기빨」은 수많은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최동호, 「청마 시의 깃발이 향하는 곳」(85), 김현, 「<기빨>의 시학」(87), 이어령, 「<깃빨>의 수직적 초월 공간」(95), 이어령, ꡔ공간의 기호학ꡕ(2000), 오세영, 「유치환의 <깃발>」(96), 이숭원, 「유치환 시의 이원성과 고독」(97) 등이 대표적이며, 참고로 ꡔ조선문단ꡕ(1936)과 ꡔ유치환전집ꡕ(정음사, 84)에는 「旗빨」로 표기되어 있고, ꡔ청마시선ꡕ(민음사, 74)에는 ‘旗ㅅ발’로 표기됨.
“「기빨」은 청마의 시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작품”(이어령)이라는 한 연구자의 언급에서 보이듯, 이 작품에는 청마의 문학을 해명해 줄 중요한 형상과 의미가 놓여 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표ㅅ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시 「기빨」 전문, ꡔ조선문단ꡕ, 1936.1, 제1시집 ꡔ청마시초ꡕ수록)

「기빨」은 유치환의 대표적인 초기작품으로 그의 출세작이기도 하다. “이상적 본향을 동경하는 낭만적 경향을 유감없이 표현” 최동호, ꡔ한국현대시의 의식현상학적 연구ꡕ,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89, p.63
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고, 이 시에 나타나는 ‘순정’, ‘바람’, ‘이념’이 유치환의 시 전체를 해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김종길, 「청마 유치환론」, ꡔ창작과 비평ꡕ, 1974 여름, ꡔ유치환전집1ꡕ, pp.343-4에서 재인용. “이 가운데서도 특히 ‘바람’이 그의 시에 허다히 나오며 그것이 그가 초기부터 보이고 있는, 그의 시의 주된 내용의 하나인 ‘우주와의 교감’에 연유함”.
아래에서는, 기존의 연구 중에서 대표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몇 가지를 검토하면서, 청마 시의 본질적 형상을 규명해보고자 한다.

① 유치환의 상상적 세계를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는 것....「기빨」.....그 시에는 그 뒤에 유치환 시의 중요한 주제가 된 여러 요소들이 높은 시적 결합을 이루고 있다.
② 서양 말의 노스탈쟈의 어원은 ‘되돌아옴’이다. 고향이나 어머니에게로 되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조금 심해질 때, 서양사람들은 그것을 노스탈쟈라 부른다.....바다를 향해 흔드는 손수건은 이별의 손수건인데, 노스탈쟈의 손수건은 ‘되돌아감’의 손수건이다.
③ 기, 나무, 바위, 산 등의 이미지는 허공-하늘과 땅-바다를 극으로 하는 수직적 초월성의 이미지들이다. 그 수직적 초월성은 고독한 사유의 과정 자체이므로, 외로운 초월성이며, 연대감이 없는 초월성이다. 그 비연대적 초월성이 그의 시에 지사적, 예언자적 품격을 부여하였으나, 그것이 그의 시의 이미지에 불모성, 사랑의 아름다운 순간이 배제된 삭막함을 낳았다. 동시에 그것이 자기가 벗어나 있는 것같이 보이는 생활에 대해 그 생활의 어려움을 묘사하는 시 대신에, 자기의 시씀을 꾸짖는 시를 씀으로써 그 미안함을 보상하게 만든다.
④ 기의 수직성은 바람에 의해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김현, 「<기빨>의 시학」, ꡔ유치환ꡕ, 지식산업사, 1987, 박철희 편, ꡔ유치환ꡕ, 서강대출판부, 1999에서 재인용. 이하의 김현의 글은 이 책에서 인용한 것이며 그 출처는 다음과 같다. ①116쪽, ②228쪽, ③236쪽, ④237쪽.


김현 또한 청마의 「기빨」이 그의 여러 작품들을 아우르는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말하면서 본격적인 분석에 들어간다(①). 우선 그는 「기빨」에 나타난 모순을 지적하는 가운데 ②의 글에서처럼 떠남(이별)과 되돌아감의 모순을 언급하고 있다. 되돌아옴이라는 의미를 갖는 ‘노스탈쟈’라는 단어와 시 속에 나타난 떠남의 모티프가 모순된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만약 이 작품의 ‘노스탈쟈’가 “생명의 원형....본연에의 향수” 즉, ‘本鄕’에의 향수라면 그러한 모순은 해명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즉 그것은 현실로부터는 떠남(안에서 밖으로)이겠지만 시인에게는 되돌아감(밖에서 안으로)의 의미를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세영, 「유치환의<깃발>-(오세영의분석적시읽기1)」, ꡔ현대시ꡕ, 96.8, p.150 참조.

한편 ③에서는 「기빨」에 나타난 수직적 초월성의 이미지들에 주목하고 그것을 “유치환 시의 기본 핵” 김현, 의의 책, p.243
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수직적 초월성’이라는 표현은, 인용문에서 보이듯, 청마의 고립적이고 비현실적인 면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적 전략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문협파의 보수적 이념이 4.19세대 비평가들에 의해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던 문학사적 맥락을 함께 고려해 본다면, 청마의 ‘깃발’을 논하는 마당에서 김현이 보여주는 인용문에서의 면모는 무의식적으로라도 그러한 세대적 간극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의심케 한다. “문학의 절대적 자기 준거성이란 일종의 환상이며, 문학이 이 고유의 가치와 구조를 보존하려 하면 할수록 고립은 심화될 수밖에 없다”(이광호, ꡔ미적 근대성과 한국문학사ꡕ, 민음사, 2001.12, p.42)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미당에게 향할 수는 있어도, 청마에게는 유보될 수 있는 비판점이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청마의 고립과 미당의 榮華를 고려할 때, 김현의 비판이 전혀 틀린 것만은 아니기도 하다.
, 또한 이 작품의 실제와 부합되지 않는 면을 갖고 있기도 하다. 최동호는 시인이 지닌 의식의 지향성이 수직적 수평적 공간에 충만하고 그 긴장감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운명을 대면케 되는 상황을 읽어내면서, “끝내 도달할 수 없는 도저한 거리”, “좁힐 수 없는 거리”를 강조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그의 표현대로 그것은 “표현된 것이 표현되지 않은 영역으로 펼쳐지고, 의식된 부분이 의식되지 않은 영역으로 전개될 때 일어나는 파동감으로 충만된 거리”일 것이기 때문이다(최동호, 「청마 시의 깃발이 향하는 곳」, ꡔ현대시2ꡕ, 문학세계사, 1985, pp.268-270). 또한 최동호는 그러한 파동감을 일으키는 ‘흔드는’과 ‘나부끼고’라는 두 개의 동사적 시어에 주목하여, “흔든다는 것은 능동적인 것이고 나부낀다는 것은 수동적이다...(중략)...<애수>가 <이념의 푯대 끝>에 있다는 것은 그의 의지적인 면과 서정적인 면의 근원적인 이중성을 암시한다”라고 지적하기도 한다(최동호, 「유치환 시의 영원과 내면적 깊이」, ꡔ한국현대시의 의식현상학적 연구ꡕ, 고대 민족문화연구소, 1989, pp.65-66). 최동호의 논의에서 지적된 청마 시의 ‘거리’와 ‘이중성’, ‘파동’의 양상에 대한 설명은 본고의 입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④에서처럼 김현은 기의 수직성을 뒷받침하는 논거의 하나로 ‘바람’을 들고 있지만 그가 인용하고 있는 김현, 앞의 책, p.238
청마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오히려 수직성으로 단순화할 수 없는 복잡한 의미망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바람과 나는 同氣, 우주의 가장 묵은 일문의 후예로서 세계의 어디에도 안주할 곳을 갖지 못한 영원한 漂迫人, 쉼없이 뉘우치고 탄식하고 회의하고 헤매어야 하는 운명>(유치환, ꡔ예루살렘의 닭ꡕ, 1953, p.16)이라는 청마의 발언은 바람의 수직성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정처없는 움직임, 방랑의 모티프로 일단 해석하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바람’은 청마 자신의 삶의 형상이었으며, 또한 그것은 낭만주의자들의 방랑과 명상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레베카 솔닛(김정아 역), ꡔ걷기의 역사ꡕ, 민음사, 2003, pp.164-185 ‘낭만주의와 걷기’ 참조 또한 ‘바람’의 이미지 분석 등은 Ⅲ-2장을 참조할 것.


<기>는 공중에 매달려 있는 하늘과의 관계에 초점을 두고 있는데, 어째서 그 <기>를 수평적인 해원과 관련시켰는가, 그리고 김현의 말대로 보통 노스탈쟈는 고향에 대한 정이므로 바다로 떠나는 사람이 뭍을 향해 손수건을 흔들 때 생겨나는 것인데 이 시는 그것이 반대로 되어 있는가? 하는 것 등이다. 그러나 그것을 병렬적인parallelism 은유로 파악해 보면 모든 의문에 대한 대답을 얻게 된다. 바다의 자리에 하늘을 놓고 거기에 <기>를 두게 되면 수평 지향적이었던 깃발이 본래의 자세대로 꼿꼿이 수직으로 일어서게 되고 그것은 하늘과 연결하는 우주수와 같은 공간적 의미 작용을 갖게 된다. 그리고 노스탈쟈는 항상 수직적 초월을 위해 끝없이 하늘을 향해 발돋움하고 있는 마음이 된다. 땅에 살면서도 땅의 중력을 거부하고 상승적인 삶을 희구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하늘을 고향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어령, ꡔ공간의 기호학ꡕ, 민음사, 2000, p.150


이어령은 청마의 시를 모델로 하여 ‘공간의 기호학’을 체계화하였는데, 그가 전개한 방대한 공간론과 치밀하고 섬세한 청마 시의 분석은 전례를 찾기 힘든 것이었다. 이어령, ꡔ공간의 기호학ꡕ(2000)은 1986년에 발표된 그의 박사논문(「문학공간의 기호론적 연구」, 단국대박사논문, 1986)을 公刊한 것이다. 본고 또한 이 연구에 힘입은 바 크며, 인용은 모두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에서 했다.
위의 인용된 글에 보이듯 이어령 또한 청마의 「기빨」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임을 전제하고, 떠남과 되돌아감의 모순을 나름대로 해결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는 김현과 마찬가지로 「기빨」의 의미를 우주수의 수직적 초월성으로 축소 또는 오독하고 있다. 작품 자체보다는 ‘우주수’라는 공간적 토포스topos를 앞세운 결과, 즉 깃발이 아닌 깃대의 수직성에 집착한 결과 작품의 올바른 해석으로부터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어령은 물론 수평적 공간인식이 동양에서 특징적임을 논하고는 있지만(ꡔ공간의 기호학ꡕ, 6,7,8장) 그것은 「기빨」(제4장 <「기빨」의 수직적 초월공간>)과는 관련없는 곳에서의 언급이다. 필자가 보기에 연구구조의 틀이 분석적 통찰을 제약한 것으로 보인다. 이어령의 최근 발언에서도 이러한 관점이 반복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김현과 나(*이어령)의 차이는 유치환의 「깃발」을 놓고 작품 분석을 한 것을 보면 아주 명확하게 드러나지요. 나는 유치환의 「깃발」을 땅과 하늘의 중간에 매달려 있는 존재로서 공간적으로 파악하지요. 그것은 실제의 역사로는 환원될 수 없는 자율적인 문학적 구조 안에 있는 의미이지요. 그러니까 유치환의 ‘깃발’은 땅에 있는 짐승이면서도 하늘로 향해 날아 오르려는 ‘박쥐’, 그리고 ‘물고기’이면서도 어부가 잡아 장대에 매달아 말리고 있는 ‘악구’의 이미지와 상동성을 띠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지상의 구속과 하늘의 초월이라는 모순과 그 양의성에서 아우성치는 존재들이지요. 그러나 김현의 시선은 스웨덴 병원선의 적십자 깃발, 인공기와 태극기 등 깃발의 내용으로 쏠려 있으며, 그 의미를 역사의 시간으로 환원시키려고 합니다.” 강진호 외편, ꡔ증언으로서의 문학사ꡕ, 깊은 샘, 2003, p.82

이렇듯 김현과 이어령은 수직적, 상방 지향적 상상력의 위상학topology에 집착하여 「기빨」의 시적 의미를 축소시키고 있다. 물론 두 논자의 차이 또한 존재한다. 김현이 깃발의 지시작용referential function, 즉 시니피에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것에 비해(“부산의 산허리 측후소 풍향계의 기폭”), 이어령은 공간적 구조 자체, 시니피앙이 발하는 시적 의미 작용signification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오세영은 이를 “미메시스mimesis적 차원”과 “세미오시스semiosis적 차원”의 대립으로 규정하고, “시가 사물의 세미오시스적 의미로 쓰여진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라고 하여, 김현을 비판하고 있다. 오세영, 「유치환의 <깃발>」, ꡔ현대시ꡕ, 1996.8, pp.145-6
하지만 그들은 모두, 깃발과 깃대, 수평축과 수직축 중에서 수직축(깃대)의 의미만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러는 사이에 ‘깃발’의 상징적 의미, 즉 인간의 존재론적 모순은 초월적으로 ‘승화’되고 만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정작 그려지고 있는 것은 수직축에만 한정되지 않는, 바람에 펄럭이는 운동성, 묶여진 곳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 무한과 피안, 영원에의 꿈과 좌절로서, 이는 청마 자신의 존재론적 모순을 시적으로 형상화시킨 것이다. 한편, 김영석은 불교와 도교의 공과 무를 통해 「기빨」의 “소리없는 아우성”이라는 모순 형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소리 있음>을 <소리 없음>으로 파악하고 동을 정으로 파악하는 이러한 직관의 비밀은 바로 앞 장에서 살핀 존재의 공성을 극명하게 드러냄으로 하여 생기는 것으로 인식된다. 곧 동시존재(co-presence)의 인지라 볼 수 있다. 이것은 또한 불교의 ‘색즉시공’이라는 반야적 지혜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본질적 직관이다.”(김영석, 앞의 논문, pp.37-38) 필자가 보기에 “동시존재의 인지”, 이는 역설적 인식 구조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며, 또한 이는 모순적 전체를 인식하고자 하는 아이러니와 무관치 않다. 불교와 도교의 수사적 원리에 대한 정밀한 고찰은 차후의 과제로 미룬다.

오세영의 논의는 이와 같은 연구자들의 오류를 넘어서서 깃발의 존재론적 의미를 적확하게 밝혀놓고 있다. 간략히 중요한 내용들을 보이자면 다음과 같다.

① ‘노스탈쟈’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 즉 상실된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서 연유하는 감정인데 여기서 이별한 님이 있는 곳 혹은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영원 혹은 무한의 세계로 화자가 손수건을 흔드는 공간을 일상의 세계로 환치시킨다면 이는 깃발이 처해진 존재의 조건과 그대로 일치(한다-인용자*)....더군다나 이 시의 ‘노스탈쟈’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라고 할 때는 더욱 그렇다.
② 유한과 무한의 경계선에서 허무성을 자각한 존재가 무한으로의 초월을 꿈꾸다가 끝내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정신의 아픔을 시로 쓴 것
③ 깃발은 수평적으로는 바닷가에 서 있으면서 먼 바다를(‘해원’) 향해 휘날리고 수직적으로는 깃대 끝(‘이념의 푯대 끝’)에 매달려 있다. 즉 깃발은 바다와 육지, 그리고 땅과 하늘의 경계선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작업은 일차적으로 이들의 상징적 의미를 살펴보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④ <하늘이 수직의 최정상임으로 피안이 되듯 바다는 수평의 최극단임으로 피안이 될 수 있다. 그런데 하늘가는 배라는 관념이 나타내듯이 수직과 수평의 두 피안은 중복되기도 한다.> 오세영, 「유치환의 <깃발>」, 현대시, 1996.8. 인용된 순서대로 ①150쪽, ②154쪽, ③149쪽, ④150쪽(④는 ꡔ한국문화상징사전ꡕ(동아출판사)의 글을 재인용한 것).


①의 글에서 오세영은 ‘노스탈쟈’를 영원 혹은 무한의 세계에 대한 향수로 해석하여, 떠남(안-->밖)과 되돌아감(밖-->안)의 모순을 해결하고 있다. 이는 앞선 연구들과 비교할 때, 청마 시 「기빨」의 해석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진전으로 평가된다.
또한 ②~④에서 보듯 수평과 수직축은 상징적 의미 속에서 등가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는데 이 또한 수직적 초월성만을 강조했던 이전 연구자들의 오류를 수정하는 관점으로 이해된다. 즉 “노스탈쟈의 손수건”이 해원을 향해 흔드는 것이든, 아니면 이어령의 주장대로 하늘을 향해 흔드는 것이든, 수평축이든 수직축이든, 그것은 모두 ‘피안’과 ‘무한’의 의미를 갖는 것이며, 인간존재의 지향점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동일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인간 존재는 “개별적인 중심”과 “우주 속에 위치한 중심” 모두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존재이며, “우리가 존재하는 순간부터 우리의 생리적 생명 자체는 분리된 생명과 전체적인 생명에 이중으로 소속된 흔적을 지니고 있다.” 알베르 베겡, 앞의 책, p.143
따라서 수직축, 수평축 등, 어느 일방의 위상학만을 강조하는 관점은 입체적으로 해체되어야 하며, 이 지점에서야 비로소 청마의 「기빨」에 나타난 존재론적 모순의 전모를 제대로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상/하의 상상력과 함께 안/밖의 상상력, 그리고 그 모순된 旋回와 긴장 체계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세영의 다음과 같은 지적 또한 본고와 동일한 맥락에 있다. “이 시는 ① 떠나고자 하는 것과 붙잡혀 있는 것, ② 무한한 것에 대한 동경과 유한한 것에의 피체(被逮)라는 두 모순된 행위를 ‘깃발’을 통해 은유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모순의 관계를 첨예화시킬수록 의미는 보다 시적인 것이 된다.” 오세영은 청마의 시 「기빨」에 형상화된 인간 존재가 지닌 근원적 모순과 함께 그 긴장체계가 갖는 시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오세영, 앞의글, p.147참조

청마는 「기빨」에서 뿐만 아니라 詩作의 전 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기’의 이미지를 작품화하고 있었는데 그 의미 또한 다양하다. 「악대(樂隊)」(1933)(“가난한 아이들은 허리를 굽으려/ 깃대에는 핏기 없는 내장을 매달어 메고/ 무거이 앞뒤를 따렀나니// 아아 이 파리한 인생의 행렬은/ 무엇을 보이려 함이런고”), 「그리움」(1939)(“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긴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기빨처럼 울고만 있나니”), 「형벌」(1949)(“나는 여전히 보잘 것 없는 추운 옷자락을 기빨같이 흩날리며”), 「심상(心象)」(1953)(“한밤을 내내도록 머리맡 지붕위에서 퍼득이며 보채어 우는 안타까운 울음소리”), 「사자도(獅子圖)」(1954)(“일체 비소함을 치욕하고/ 타산을 거부하고/ 더욱 이 암울한 포유류는 멀리 기계에 맞서므로/ 호올로 울울히 산정에 咆號하나니./ 아아 이는 차라리 의지의 적막한 기빨이로다.”) 등에서 직접적으로 나타난 ‘깃발’의 형상은 ‘파리한 인생의 행렬’(「악대」)과 고독한 보행과 그리움, 안타까운 몸부림과 의지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한편, 「박쥐」(1933)(“호올로 서러운 춤을 추려느뇨”), 「아지랑이」(1960)(“아지랑이 보오얀 장막, 풋보리 푸른 이랑을 빨간 만장, 노란 만장 나부끼고 가는 죽음 하나”), 「미루나무와 남풍」(1961)(“지금 남풍의 세찬 나의 손에 매달려/ 당신은 이내 몸부림치거니/...(생략).../영과 육의 그지없는 이 交歡/ 너울너울 하늘로/ 용틀임하고 오르는 사랑의 푸른 불기둥”)과 같이 ‘깃발’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작품도 살펴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서러운 춤과 ‘보오얀 아지랑이’와 같이 시야를 흐리는 죽음의 이미지, 에로스적 삶의 충동 등이 모두 ‘깃발’의 형상 속에서 표현되어 있다. 간략히 살펴보았지만 청마의 ‘깃발’은 수직적 초월로 단순화할 수 있는 형상이 아니다. 그것은 수평적 방황과 모순의 몸짓과 함께 읽혀지는 다양한 형상들로 변용되어 나타나, 삶과 죽음과 같은 존재론적 모순이나 의지와 애상, 역동적 몸부림과 머뭇거림, 향수(되돌아가고자 함)와 동경(떠나고자 함), 지향없음과 같은 인간 삶의 중첩되고 모순된 움직임과 상황을 가리키는 청마시의 핵심어로 사용되고 있다. 청마 시에 나타나는 ‘중간자적’ 존재들은 이러한 ‘깃발’의 형상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는 시인 자신의 형상이기도 하다.

















Ⅲ. 아이러니의 否定性과 그 指向

앞 장에서 살폈듯이 청마시에서 중심되는 아이러니적 구조는 ‘거리’에서 비롯한다. 대상에 대해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청마의 태도는 그 대상(자신과 사회, 자연 등)을 불문하고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으며, 그러한 ‘거리’에서 ‘다가가기와 멀어지기’의 양가성이 발생한다. 의지와 자학의 모순, 애국시와 사회비판시의 상충, 자연과의 합일에 대한 꿈과 괴리에 대한 자각 등 청마 시에 나타나는 이율배반적 양상 속에서는 끊임없는 긍정과 부정의 교차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구조 속에서 열정과 회의, (자기)창조와 (자기)파괴가 일어난다.
작가가 낭만적 아이러니에 의지하는 이유는 작가들 수만큼 많을 것이다. 필자는 청마가 낭만적 아이러니를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판단하고 그 이유에 대해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그 개인적이자 사회․역사적인 이유들을 묻는 작업은 청마뿐만 아니라 우리문학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작업과도 일정부분 관련될 것으로 본다.
우선, 청마가 살아간 <시대>가 아이러니적 시대였다는 점이다. 사회적, 시대적 양상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보였고 적극 발언하기도 했던 청마였기에, 그의 인생관이나 문학관에 앞서 시대적 양상과의 관련성 속에서 반어적 미학이 싹트게 된 것을 우선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자연스러울 수 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시 「칼을 갈라!」(1955)에서 볼 수 있듯이, “도둑이 도둑맞는”, “선이 사기하는”, “윤리가 폭행하는” 저자 거리였다. 그러한 당대적 상황에 대한 시인의 인식은 식민지, 해방전후, 전쟁, 독재 등등으로 이어진 억압과 혼란의 시기 속에서 점철되어 온 것이기도 했다. 식민지 시기의 ‘자학-의지’와 같은 모순적 양상이 방어기제로 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반어적 미학으로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며 그것이 억압적 정책에 직면했을 때는 일종의 정치적 의미 또한 얻을 수 있다. 비숍Bishop이 낭만주의 시기가 “음흉함disingenuousness과 아이러니의 시대”였다고 말하면서 “감정은 죽었고, 마음은 메말랐다. 사람들은 이전에는 존경받았던 가장 존경할만한 것들을 조롱한다.” Bishop, Romantic Irony in French Literature, Vanderbilt Univ. Press, 1989, p.12
라고 말했을 때, 그는 시대와 작가의 뗄 수 없는 관련성 속에서 ‘낭만적 아이러니’의 발생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시인이 처한 상황이 아이러니적 상황, 즉 이율배반적 판단과 양가적 망설임(조국애와 분노, 울분)을 요구하는 시대라면 작가는 아이러니를 통해 자신의 언어를 조탁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은 현실에 대응하는 한 가지 방식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본고에서는 청마 자신의 <인생관> 속에서도 그와 같은 반어적 양식에 기운 원인을 살펴볼 수 있다고 보았다. 자기 자신의 상반된 감정을 작품 속에 노출시키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청마에게는 인간이 모순적 충동들의 복합체요 역설적 동물이라는 시각이 있었던 것이며, 그러한 모순 양상을 포착하고 드러낼 양식으로서 아이러니를 또한 시인으로서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가 첫시집 ꡔ청마시초ꡕ에 첫 번째 작품으로 수록한 「박쥐」는 키에르케고르적인 중간자적 존재 양상 오세영은 인간의 중간자적 속성을 거미[蛛]에 비유한 케에르케고르의 견해를 빌려와 생명파의 ‘생명의 구경’적 의미에 대해 논하고 있다. 또한 생의 구경에 부딪치는 한계와 그 초극에 관한 김동리의 발언이 인용되고 있기도 하다. 오세영, ꡔ유치환ꡕ, 건국대학교출판부, 2000, pp.196-7
을 형상화한 것이다. 박쥐는 하늘도 땅도 아닌 “지붕 밑에 숨어” “파리한 환상과 괴몽에/ 몸을 야위고”, 어둠도 밝음도 아닌 “달빛 푸른 밤” 몰래 나와 서러운 춤을 춘다. 그것은 선과 악, 이상주의와 냉소주의 사이에서 흔들리는 모순적 충동의 춤이며, 청마 문학의 한 형상이다.
끝으로, 청마의 <문학관>을 검토함으로써 그가 낭만적 아이러니로 기운 이유를 종합해 볼 수 있다. 그는 고독과 허무에의 대결을 회피하지 않고 문학을 통해 본질탐구의 자세를 견지했다. 그가 생명파 시인으로 다루어진 이유이기도 했던 이러한 문학적 태도는 그러나, 그 자신만의 독특한 면모를 갖추어 갔다.
① 우선, 피상적 감상주의를 피하고자 하는 그의 문학적 열망은 아이러니적 발화 양식을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청마가 “나는 시인이 아닙니다”(ꡔ생명의 서ꡕ, 1947의 서문)라고 말한 것도 그런 반어적 맥락에서 읽히는 것이며, “시인이여/ 오늘 아픈 인생과는 아예 무관한 너는/ 예술과 더불어 곰곰이 영원하라”(시 「시인에게」, 1960.12)라고 노골적 반어를 사용한 맥락 또한 그러하다. 청마는 자신의 문학을 “심히 조잡한 문학 이전의 어떤 소재같은 것에 불과한” 것으로 말하고 있지만 그것이 “생명의 목마른 절규 같은 데서 자연 발생한” 것으로 “내면의 연소의 동력”에 의한 것이었음을 동시에 고백한다.(산문 「‘청마시초’ 무렵」, 1963)
자의식적인 작가들이 자신의 과도한 감상주의를 해독시키는 방식으로서, 비숍은 낭만적 아이러니스트에 의해 부여된 세 가지 방법을 설명한 바 있는데 이는 청마의 이러한 문학적 태도를 설명하는 적절한 틀이 된다. “작가적 현존의 성가신 침입에 의해 시적 열정의 마력이 깨어지는 것(‘주관적 아이러니’)” 여기서의 희생자는 독자이다. 다음으로 “주인공이 당혹스럽거나 손상입는embarrassing or demeaning 상황 속에 놓일 수 있는 것(‘객관적 아이러니’)” 여기서의 희생자는 주인공 또는 시적 화자이다. 그리고 끝으로 “작가가 독자들에게 진행 중인 시나 소설의 불충분성에 대해 사과할 수 있는 것(‘순진한naive 아이러니’)” 등이다. 비숍, 앞의 책, pp.10-11
청마가 자신의 작품을 “대수롭지 않은 글 부스러기들”(ꡔ나는 고독하지 않다ꡕ의 서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시인 자신이나 독자들의 문학적 환상과 몰입을 견제하는 하나의 예가 될 듯하며, 자신의 허위의식을 폭로하는 것 Ⅲ-1-2에서의 「감상저격」 등의 분석을 참조할 것.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청마는 「산중일기」(1959)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을 비판하고 있다. “날마다 신문의 지면에 넘쳐 흐르는 오늘 우리 사회의 갖은 부패와 악덕이, 이미 고황에 이른 양상들은 우리의 피를 역류케 하며, 더구나 나 같은 다혈질의 위인은 말할 수 없는 어떤 증오의 격충까지를 문득 느끼게 마련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나는 부끄럽게도 ‘카롯사’가 말한 바와 촌호도 틀림없이, 순간의 흥분만으로 족한 듯 언제나 그쯤으로 소시민의 무사주의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며, 그리고는 돌아 앉아 시를 씁네 문학을 합네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자기비판.
또한 동일한 효과를 노리고 있다.
② 둘째, 청마의 문학은, 절대에 대한 탐색과 더불어 그 탐색의 헛됨futility에 대한 동시적 인식 사이의 긴장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시 「나는 내게서 벗어나려 시를 쓴다」(ꡔ현대문학ꡕ, 1967.4)라는 유고시에서 시인은 ‘악을 쓰며 부르짖으며 버티며 안간힘을 쓰는’ 여러 존재들의 모습을 열거하고 있는데, 그것은 시인이 처한 모순적 상황을 대변하고 있는 형상들이기도 하다. 이 시의 앞 부분에는 “글을 쓴다는 것도 말없는 나의 외침이오 나는 나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글을 쓰오”라는 넬리 작스의 말이 프롤로그로 제시되어 있어 인상적인데, 이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틈 속에서 몸부림친 청마 자신의 문학관을 적절하게 담아내는 말이기도 했다. 참고로 넬리 작스Nelly Sachs는 라니츠키의 ꡔ사로잡힌 영혼ꡕ(빛살무늬, 2002)의 인물사전에 따르면 베를린 태생의 여류작가로 유태민족의 고난을 무겁고 신랄한 형상의 시로 표현했다. 1966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는데, 청마는 아마 노벨상 뉴스를 접하고 그녀의 글귀를 보았으리라 짐작된다.

③ 셋째, 현상을 불신하는 낭만적 아이러니스트의 경향이다. 그것은 나아가 자기 자신의 신념들을 불신하는 것과 연결되기도 하며, 아미엘Amiel은 이를 자기-모순에 토대한 ‘아이러니의 법칙’("the law of irony" based on self-contradiction)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目睹한 모순들에 의해 마비된 의식 속에서, 판단을 보류하려는(aporia), 행동과 감정조차 보류하려는 경향이다. 비숍, 앞의 책, p.12
이러한 태도는 청마의 문학관에서의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스타일을 낳은 원인으로 이해된다.

페터 스쫀디가 말한 바에 의하면(「슐레겔과 낭만적 아이러니」) 낭만적 아이러니스트는 실재를 일시적인tentative 어떤 것으로 보며 이것은 자신의 예술작품에 일시적인 스타일과 일시적인 내용을 생산케 한다. 그래서 그는 감정이나 극적인 행동이 최절정에 도달하는 바로 그 순간에 비판적 분석을 構築institute할 것이다. 작품의 무게 중심은 따라서 교체된다displaced. 비숍, 위와 같은 곳.


‘실재를 일시적인 것으로 보는 태도가 작품의 일시적 스타일과 내용을 생산케 한다’는 위의 인용문의 내용은 청마의 문학관에서의 단장 형식이 출현하게 된 배경을 설명해주고 있다. 그것은 김윤식의 지적대로 “<나는 시인이 아닙니다>라는 명제에 대응되는 한 가지 형식”이었던 것이며, “이를 하나의 표현 체계로 전개해 간 곳에 청마의 독특한 위기 의식 돌파 방식이 있었다.” 김윤식, 「청마시의 정신사적 소묘」, ꡔ발견으로서의 한국현대문학사ꡕ, 서울대출판부, 1997, p.397 참조. 김윤식은 소위 ‘문협정통파’로 불리는 김동리, 조지훈, 유치환 등이 비슷한 시기(1953-4)에 ꡔ문예ꡕ지에 발표하고 있는 아포리즘 형식에 주목하여, 그러한 형식이 등장한 이유를 묻고 있다. 종전 후, 적이 사라진 상황에서 ‘구경적 생의 형식’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이 사실을 반영한 것이 ‘아포리즘’ 형식이라는 것이 그의 답변이다.(김윤식, 위의 책, p.396).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시각이 곧바로 청마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고 있는 점에 있다. 김윤식은 청마만이 이러한 표현 체계를 지속시켜 나갔음에 주목하고 그 정신적 기반을 묻고, 그것을 ‘죄의식’, ‘회오’로 해석하고 있다. 이미 청마의 ‘회오’를 ‘위선’으로 비판한 바 있는 김윤식은 여기에서도 청마가 ‘회오신’이라 표현한 것에 주목하여, 청마의 ‘신’을 기독교의 신으로 오독하고 있다(pp.398-9). 하지만 청마가 “동해쪽 영동의 산골짝” 한 “유서 있는 조그만 고찰”에서 쓴 「산중일기」(1959)를 보면, 그의 ‘자학’이나 ‘회오’라는 용어에서 ‘위선’이나 기독교신의 의미를 읽어내려는 일은 단지 의도론에 그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 청마는 법당에서 들려오는 저녁 예불소리를 들으며 인간의 悲願을 생각하고 밤이 깊어올수록 처량히 들려오는 무수한 미물들의 “목숨의 울부짖음”을 들으면서, “신앙이란 스스로의 곰곰한 회오에서 우러나야만 마련인 것”이라 말하고 있는데, 이를 굳이 기독교적인 것으로 해석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또 다른 글에서 청마는 “나는 항상 회오의 煉苦에 한번 달궈져 나지 않은 신앙은 신용하지 못한다고 믿어오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인간성의 적라한 양상과 깊이”에 주목하고 있는 청마에게는 자연스러운 종교적 태도였을 뿐, “독선적인 종교의 ‘마네킨’”(「산중통신」, ꡔ나는 고독하지 않다ꡕ)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청마는 이영도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불도에 귀의하겠다는 말을 한 바도 있다. 그의 ‘회오’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님을 말하는 또 다른 예가 될 듯하다. 이와 더불어, ‘자학’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청마는 “인간이란 그가 가진 하나 이룰 수 없는 간곡한 비원 앞에서는, 여외의 바램 같은 것은 빛을 잃고 시들하여져서 죄다 내버려 돌아보지 않기 마련인 것이다. 그러한 심정의 자학같은 마음에서 그만 이곳으로 오고 말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청마 시에서의 ‘자학’과 ‘재생’ 구조에 대해서는, 이하 Ⅲ장의 논의를 참조.

청마가 ‘단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본격적으로 시집에 선보인 것은 ꡔ제9시집ꡕ(1957)에서였지만, 사실 ꡔ보병과 더부러ꡕ(1951)에서의 각 장의 머리를 장식했던 프롤로그들 순서대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이 기를 올려 들 자는 너다”(도스토예프스키), “그때에사 당신의 노래가 우리들에게 헛되이 불러지지 않았음을 알리라”(한스 카롯사), “「정신」의 바람이 진흙 위를 불므로서 비로소 「인간」은 지어진다”(산 테크주베리), “내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밀알 하나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양 한알대로 있나니”(요한복음12장24절) 등이다.(ꡔ보병과 더부러
출처 : 시인의손바래기
글쓴이 : 율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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