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옛글 모음

[스크랩] 도덕경 번역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8. 3. 19. 13:19

※ 본 자료는 인터넷 다른 사이트에서 다운로드 받아 재편집한 것임. 李文周

도덕경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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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서문
의미 전달에 있어서 말이라는 것은 글보다 전달 효과가 크다. 그 이유는 말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느낌까지도 전할 수 있고, 또 대화의 과정에서 말과 함께 몸짓과 눈빛이 사용되기 때문에 상대에게 자신의 의미를 보내기가 수월하다. 그러나 글자는 고정화되어 있고,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그 뜻이 오해가 될 수 있다. 특히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나 언어의 틀이 담아 내기 힘든 것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노자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을 쓴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내가 아는 것을 제대로 표현하기도 힘들 뿐더러, 그것이 고정화되어서 이해된다면 차라리 쓰지 않는 것 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보는 사람들에게 바라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언어에 구애를 받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언어는 도구이다. 의미가 전달이 되었으면 언어의 집착에서 벗어나기 바란다. 그리고 이 글에 대한 가열찬 비판으로 새로운 작업의 성과가 있었으면 한다. 노자는 책이 아니다. 책이 되어감이다. 아직 완성된 책이 아니다. 자라는 나무와 같이 멈춤이 없이 자라나기 바란다. 멈추는 순간 노자는 책이 되고 지식이 된다. 노자를 지식으로 알지 않기를 바란다. 노자는 자라나야 하는 것이다. 이런 말이 생각이 난다.


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진리도 고정되는 순간 죽는다. 노자가 살아 숨시기 위해서는 고정된 해석에 매달려서는 안된다. 원본은 김용옥씨의 길과 얻음의 성경을 큰 틀로 했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해석을 가미하였다. 또한 이글을 쓰는데 많은 도움을 준 전통철학연구회의 김승훈, 김옥선, 남은경, 김인석, 김완수, 함지형 학우에게 깊은 고마움을 표시한다. 그리고 이 글이 나오기까지 사년동안 나를 가르쳐주시고 질책과 함께 든든하게 지켜보아주신 다섯분의 은사님의 영명에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1995년 11월 21일 유재용


일장
직역
도를 도라고 규정지으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이라고 규정지으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은 하늘과 땅의 시작이고,
이름이 있는 것은 모든 것의 어미이다.
그러므로 늘 욕심이 없는 것으로 그 묘함을 보고,
늘 욕심이 있는 것으로 그 가장자리를 본다.
이 양자는 같은 것이나 나와서 이름을 달리 했다.
같은 그 근원을 일러 그윽하다고 하고,
그윽하고 또 그윽하다고 하여 뭇 묘함의 문이다.


해석
도는 바람이다. 느낄 수는 있지만 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도라는 것은 바탕이다. 도화지의 흰 여백이다.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리면 여백은 점점 사라진다. 그리고 그림이 완성이 되었을 때 여백은 없어진다. 여백이 없는 도화지에는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 도화지에 그림이 꽉차 있다. 화가는 이제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럼 그림은 이제 성장을 멈춘다. 고정 되어 있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어도 그 도화지에는 더 이상 그릴 수 없다. 그러면 그것은 이미 죽은 것이다. 고정되어 있지 않은 것, 비어 있는 것이 바로 바탕이다. 이 바탕의 총체가 도이다. (도화지에 그림이 꽉차면 여백은 사라지는가? 고민해 보기 바란다.)
도는 현재이다. 현재는 존재한다. 그러나 규정지을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노자는 도를 도라고 규정짓는 것에 반대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파를 위해서는 글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노자는 非常道라고 한 것이다.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 말을 음미하라. 늘 그러한 도가 아닐 뿐이라는 것이다. 즉 어느 순간에는 규정지은 도가 타당하다는 것이다. 단 그 순간에만 타당하다는 것이다. 만약 순간적으로도 타당하지 않다면 노자는 非道라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은 시간의 산물이 아니다. 현재이다. 도는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순간 순간 도는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흘러감이 도이다. 흐르는 강물을 규정지을 수 있는가. 순간적인 감정을 규정지을 수 있는가. 세상에 고정되어 있는 것은 없다. 우리의 삶 속에서 고정된 것을 찾을 수는 없다. 모든 것은 움직인다. 따라서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 단지 현재에 자신이 느끼는 느낌만이 있을 뿐이다.
도는 과정이다. 결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대상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내속과 밖에 흐르는 생명력이다. 도는 나이기도 하고 너이가도 한 것이다. 그리고 노자의 도는 진리, 근원이라 불리우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진리 근원의 다른 말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이기도 하다.
이름이라는 것은 편의를 위해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유재용 이 말은 한 인격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말 자체가 한 인격체는 아니다. 이 말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한 인격체를 대변할 수 는 있다. 그러나 이 말을 공유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이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름이 고정되어 나타나서, 이름 자체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실체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아니 이름이 실체를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언어는 의사 소통의 수단이다. 책이라는 말은 한글을 아는 사람에게 통용될 뿐이다. 영어로는 book이다. 그렇기 때문에 책이라는 말은 보편적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우리는 책이라는 말에서 책의 의미만 파악하면 되는 것이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구분 짓지 않음이다. 이름은 사람이 붙인 것이다. 따라서 인위가 내재해 있는 것이다. 인위가 내재해 있지 않은 것이 하늘과 땅 -우주- 그 자체이다.
이름을 짓는다. 하늘과 땅도 이름이다. 이름이 생기면 사물이 생긴다. 그리고 하나의 개체가 구분되어 진다. 틀을 가지지 않은 것에 어떻게 이름을 붙이겠는가. 나와 남의 구분이 확실하지 않다면 남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이다. 우주를 틀 지어 볼 때 이름이 생긴다. 이것이 인위이다. 틀 지어 보거나 보지 않는 것은 인간의 의식의 구조이다.
그렇기 때문에 욕심이 없이 우주를 대하면 그 묘함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묘하다는 것은 총체의 모습이다. 이 총체에는 나도 들어가기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경험을 통해서만 전달될 수 있는 부분이다. 나와 우주의 구분이 사라진 상태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묘라고 표현했다.
욕심을 가지고 보면 세상의 구체적 사물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천하다거나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사물도 우주의 한 부분이다. 아니 우주이다. 완벽하게 우주와 구분되어 있는 것은 없다. 만약 우주와 구분 된 것이 있다고 가정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 양자 무명과 유명은 같은 것이다. 우주에 대해서 사람이 어떻게 보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사물에 이름을 지어서 천지와 만물이 다르다고 생각한 것뿐이다. 이 무명과 유명의 근원이 바로 道이다. 이 도는 그윽하고 그윽한 것이다. 뭇 묘함의 문이 되는 것이다.


이장
직역
하늘 아래가 모두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까닭을 안다면,
그것은 이미 못생긴 것이다.
모두 착함의 착한 까닭을 안다면,
그것은 이미 착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은 서로 생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어 주고,
길고 짧음은 서로 겨루며, 높고 낮음은 서로 기울며,
음과 소리는 서로 조화하며,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이래서 성인은 함이 없는 일에 처한다.
말 없는 가르침을 행한다.
온갖 것을 만들면서도 잔소리하지 않고,
낳으면서 소유하지 않으려 하고, 하면서도 기대하지 않는다.
공적을 이루어도 그 공적에 머무르지 않는다.
아아, 머무르지 아니하는 것이 가지 않는 것이다.

해석
아름다움은 절대적인가. 나와 네가 느끼는 미의 기준이 같은가. 책을 덮고 잠시 고민하기 바란다.


아름다움은 시대 의식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 시대 의식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변한다. 그리고 개체에 있어서도 미의 의식은 바뀐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아름답다고 한다. 이것은 개성이 말살된 것이다. 그리고 변화 의지가 박탈당한 것이다. 고정되어 있는 미는 죽은 것이다. 곧 썩어 갈 것이다. 미녀를 본적이 있는가. 그 미녀가 고정되어 있는가. 변한다. 사람(미인) 자체가 변하고, 나의 의식이 변한다. 그리고 나와 남의 미적 기준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하나의 사물이나, 인물을 아름답다고 하면, 그들은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자신이 변화하고 싶어도 변화하지 못한다. 자유의 박탈인 것이다. 변화가 없고 고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죽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미를 미로 느끼면 그것은 이미 추악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노자는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아는 것에 반대를 한다. 착하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행위가 어떤 사람에게는 착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잘난 체 한다고 생각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어떤 행위가 절대적으로 착하다고 규정 짖는다면, 모든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행위 -이를테면 노인의 짐을 들어 드리는 행동- 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가치의 절대화에 반대한다. 충이 최고의 善인적도 있었다. 임금을 위하여 전장에서 죽어 나가는 병사들, 그들은 선이라는 이름에 자신의 자유의지를 박탈당한다. 가치가 절대화되어서 사람들을 억압하는 도구로 된다면 그것은 매우 추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된다.
길다는 것은 짧음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길다는 것이다. ‘길다’라는 자체가 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려움과 쉬움도, 높고 낮음도 그렇다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성인은 함이 없는 일에 처하는 것이다.
함이 없는(無爲)의 의미는 매우 반어적이다. 爲라는 것은 행위 의지를 가리킨다. 즉 이미 출발전부터 목적의식을 가지고 자신을 사람을 그것에 맞추어 나가려고 한다. 이것에는 강제가 따른다. 위는 욕망을 가지고 하는 일이다. 무위라는 것은 집착이 없이 일을 하는 것이다.
가르침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을 살지 않은 사람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그리고 그런 말로 남을 가르칠 자격이 없다. 그리고 노자는 남을 가르치는 것도 반대를 한다. 말없이 행하는데 다른 사람이 본받을 만하면 그 사람을 본받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만들면 그것이 영원히 자신의 것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천하에 내것이 있는가.
공치사가 무엇인지는 알 것이다. 내가 어떤 일을 했을 때 내가 했다고 자랑하는 것을 공치사라고 한다. 일 자체가 좋아서 일을 하여야 한다. 남의 보답을 바라고 자신이 했다고 자랑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진정으로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남을 위해서 일을 했다고 말을 하지만 결국은 자신을 위해서 일을 한 것이다.
공적을 이루어도 그것에 머무르지 마라. 머무르게 된다면 자신은 그것에 안주하게 된다. 발전이 없게 된다. 그때 나는 멈추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공적을 쌓을 수 있다. 새로운 공적을 쌓을 수 없을때 과거의 공적을 내세우게 된다.


삼장
직역
지식인을 받들지 않아서 백성들로 하여금 다투지 않게 하라.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아서,
백성들로 하여금 도둑질을 하지 않게 하라.
욕심 낼 것을 드러내지 않아서,
백성들로 하여금 마음이 혼란하지 않게 하라.
이런 이유로 성인의 다스림은
그 마음을 비우고, 그 배를 채우며
그 의지를 약하게 하고, 그 뼈를 강하게 한다.
항상 백성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고 욕망이 없게 하라,
무릇 지식이 있는 자로 하여금 감히 행하지 못하게 하라.
함이 없이 행하면 즉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다.


해석
투쟁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희소가치를 얻기 위한 노력으로부터 온다. 우리가 대학에 오고 좀더 많은 공부를 하려는 것은 공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가. -잠시 생각하라-
공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공부를 해서 어디에 취직을 하고, 무엇이 되겠다는 야망이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왜 사법 고시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가. 그것은 신분의 수직 상승을 위해서인 경우가 많다. 그럼 사법 고시에 합격하는 것이 나쁜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단지 모든 사람이 사법 고시에 합격을 하려고 하고, 그것을 위해서 다른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은 법관이 있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일들이 많이 있다. 진정으로 중요한 일들은 재화를 생산해 내는 일이다. 나는 쌀을 만드는 농부와 물건을 만드는 노동자가 법관보다도 중요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법관이 되고, 소위 엘리트가 되기 위해서 생산을 포기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되는가. 멸망하게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식인이 되어 사회 지도층이 되기를 원한다. 메스 미디어, 교육이 이것을 부채질한다. 그럼 누가 생산직에 근무하는가. 그곳에 근무하는 사람들을 낙오자로 평가한다. 똑똑한 사람은 똑똑한 사람으로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보다 낳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노자가 살았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엘리트를 중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적성과 꿈을 무시 당하고 소모적인 다툼에 끼여드는 것이다. 똑똑한 이를 숭상하지 마라. 숭상을 하면 모든 사람이 괭이와 삽을 버리고 책에 매달릴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남들의 우위에 서기 위해서 다툴 것이다. 그 위에서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패배자는 다수이다. 패배자가 많을 수록 개인은 물론이고 사회는 불행해진다.
다이아몬드는 매우 귀한 것이다. 그러나 다이아몬드 자체가 귀한 것은 아니다. 다이아몬드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기 위해서 노력하고,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그만큼 고민이 줄어드는 것이다. 자신이 이루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은 평생에 짐이 될 뿐이다. 그리고 억지로라도 얻으려 하려고 한다. 가질 수 없는 재화를 보이는 것이 바로 도둑을 만드는 지름길이다. 재화를 보이지 마라. 그것이 도둑을 막는 최선의 길이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욕망이 가득 찬 마음은 만족을 모른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러나 결국은 배가 터져 죽을 뿐이다. 그 배를 채우는 데에 중점을 두어라.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는 평생이 가도 부족하다. 마음의 환상을 버리고 실질을 취하라.
志는 자신의 의지이다. 자신의 사상 체계가 완성된 자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더 이상 배울 수가 없게 된다.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지 않을 수록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爲는 정치에 있어서 법이다. 무위는 법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더 정확히 말해서 법이 쓸모가 없는 것이다. 스스로의 자율에 의해 움직인다. 백성들이 모두 지식을 추구하려 하지 않고, 욕망의 대상을 알지 못하면 억지로 다스리지 않아도 잘 따르려 진다는 것이다.

넷째장
직역
도는 비어 있음을 사용하니 가득 차 있지 않는 듯하다.
깊도다. 온갖 것의 근원 같다.
그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그 얽힘을 푼다.
그 빛을 조화롭게 하고, 티끌을 고르게 한다.
맑도다. 혹 있는 것 같다.
나는 그가 누구의 아들인지 알지 못하나,
상제보다 먼저 있는 것 같다.


해석
우리가 건물에 들어간다. 그럼 건물의 벽을 쓰는 것인가 건물의 빈 공간을 쓰는 것인가. 내가 길을 갈 때 바닥에 깔린 아스팔트를 사용하는가. 비어 있는 길 위의 공간을 사용하는 것인가. -잠시 생각하라- 우주가 비어 있지 않다면 지구는 존재할 수 있는가. 인간은 존재할 수 있는가.
비어 있는 것을 사용할 때 그 비어 있음은 다함이 있는가. 그럼 비어 있음을 규정지을 수 있는가. 그렇기 때문에 깊다고 한 것이다. 그 천정이 보이지 않는 하늘처럼 깊고 그윽한 것이다. 이 도는 그래서 온갖 것의 으뜸 같은 것이다. 비어 있음은 도의 한 표현이다. -명심할 것이 있다. 도덕경에서 도를 규정지은 것은 없다. 나도 물론 없다. 단지 비유를 들뿐이다. 비유에 집착하지 말기 바란다.- 너와 나 사이에 빈 공간이 없다면 무엇으로 너와 나를 구분 지을 수 있겠는가. 만물이 만물로 인식되는 것은 만물 사이에 있는 빈 공간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물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날카로움은 오래가지 못한다. 진정으로 강한 자는 자신의 강함을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의 강함을 드러내는 자는 내면에 약함이 있기 때문이다. 빈 수레가 요란한 법이다. 날카로움을 무디게 한다는 것은 날카로운 칼의 날을 못쓰게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 날카로움이 극에 달하면 무디게 되는 것이다. 앎이 극에 다다르면 자랑하지 않는 것과 같다.
어지러움은 구분에서 생긴다. 나누고 나눌수록 세상은 어지러워진다. 나누지 마라. 도는 비어 있음 하나로 만물을 포용한다. 집단과 집단 나와 너, 나와 사물을 구분할 수록 세상은 어지럽게 된다.
빛이 뛰어남은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다. 남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남들과의 조화 자연과의 조화가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다. 자연에 반대하라 그럼 빛이 날 것이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다.
도는 티끌과 사물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도의 차원에서 보면 잘나고 못난 사람이 없는 것이다. 다 그 나름대로의 독특함이 있다. 그 독특함이 다른 것에 대한 우월은 아니다. 온갖 사물은 각기 자신만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비어 있음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실체를 알 수는 없다. 그래서 누구의 아들, 아들은 개별성과 개체성을 가진다. 따라서 즉 구체화된 사물로서 알지 못하다고 한 것이다. 단지 상제보다 앞서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추측을 할뿐이다. 여기서 상제의 象은 이미지이다. 물건이 만들어지기 전의 형상태이다. 제는 上帝로 해석이 된다. 그러나 이 상제의 진정한 의미는 나도 알지 못한다.


다섯째 장
직역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아서 온갖 것을 풀 강아지처럼 할뿐이다.
성스러운 사람은 어질지 않아서 백가지 성의 사람들을 풀 강아지처럼 할뿐이다.
하늘과 땅 사이는 풀무 같고 대피리 같도다.
비어 있는 데 구부러지지 아니하고, 움직일 수록 더욱 나온다.
말이 많으면 자주 곤궁해진다. 그 속을 지키느니만 같지 못하다.


해석
사람은 하늘에 인격적인 신이 산다고 믿는다. 그래서 예로부터 하늘에는 상제가 산다고 믿었다. 그리고 하늘과 땅은 이 신에 의해서 다스려 진다고 믿었다. 이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있는 사상이다. 그리고 그 신은 선하고 어질다고 규정을 해 놓았다.
노자는 그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노자는 그것을 하늘과 땅이라고 표현을 한다. 이것은 다른 말로 自然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자연은 어질지 않은 것이다. 즉 누구의 사정을 봐주고, 그 이해에 따라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어질다는 것은 인간에게 축복을 내려 주는 신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즉 인간 본위의 사상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신이 있지만 그 신이 돼지를 위한 신이라면 그것은 인간에게 어진 신이 될 수가 없다. 그 신은 돼지를 위해서 인간을 사육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인간뿐만 아니라 천지 만물을 공평하게 생각한다. 따라서 어질지 않은 것이다.
성인은 어질지 않은 사람이다. 즉 뭇 사람들을 똑같이 여길 뿐이다. 똑같이 대하고 그들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는 것이다. 친구라고 해서 편의를 봐주고,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불이익을 가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모든 사람이 동포가 되는 것이다.
하늘과 땅 사이를 보라. 그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비어 있음이 있다. 하늘과 땅 사이가 가득 차 있다면 그곳에서 무엇이 나오겠는가. 컵에 물을 가득 채우면 더 이상 채울 수 없는 것이다. 컵이 비어 있기 때문에 물을 담을 수 있는 것이다. 만물은 비어 있음에 의지해서 만들어진다.
말이 많으면 자주 궁해진다는 것은, 착간이라고 보여진다. 즉 옛날에는 글자를 대나무에 썼었다. 따라서 그 중 한 대나무가 앞에 끼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침묵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필요한 말 이외에 떠벌리는 말은 자신과 남을 피곤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여섯째장
직역
골의 하느님은 죽지 않는다.
이를 일컬어 그윽한 암컷이라 한다.
그윽한 암컷을 일컬어,
하늘과 땅의 뿌리라 한다.
이어지고 이어져서 마치 있는 것 같다.
써도 마르지 않는다.


해석
동양에 있어서 神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하느님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정신이다. 우선 하느님과 하나님의 차이를 알기 바란다. 하나님은 기독교의 신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동양의 上帝 개념이다.
정신은 알 수 없는 미묘함을 뜻하기도 한다. 골짜기를 바라보아라 그 사이의 텅 빈 공간, 노자는 그것을 곡신이라고 표현했다. 골짜기의 비어 있음이 신이라는 것이다. 이 비어 있음은 능동성을 가지지 않는다. 수동성을 의미한다. 이 수동성이 잘 표현되어 있는 것이 여성스러움이다. 여성이 아니다. 육체를 가지고 있는 개개의 여성을 말한 것이 아니다. 여자라면 가지고 있는 수동성을 현빈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 수동성은 남자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다. 남자에게도 수동성은 있다. 그러나 능동성이 더욱 강조되어 있는 것이다. 여성에게도 능동성이 있다. 그러나 수동성이 강조되어 있다. 따라서 현빈은 여성스러움, 바로 수동성을 의미한다. 혹자는 이것을 여성의 생식기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은 노자를 오해한 것이다. 여기서 牝-암컷- 이라고 하지 않고 玄牝-그윽한 암컷-이라고 한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현빈이란 여성스러움의 극치 그 심원을 말한 것이다.
이 수동성. 비어 있음은 천지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천지가 무엇을 이용하는지 본 적이 있기. 골짜기는 무엇이 있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지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 잠시 생각을 해보기 바란다. -


골짜기가 있기 위해서는 골짜기 사이가 비어 있어야 한다. 무엇이 그 사이를 비우고 있는가.


- 생각하라 -


비어 있음은 원래부터 그러한 것이다. 그래서 곡신이라고 했고 천지의 뿌리라고 했다. 천지는 그 사이의 비어 있음을 이용해서 움직인다. 하늘과 땅사이가 비어 있지 않다면 무엇으로 하늘과 땅을 구분할 수 있는가. 그것은 사물과 사물의 관계에서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비어 있음은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가. 골짜기와 골짜기 사이의 비어 있음은 골짜기에만 머물러 있는가. 그것은 모두 연결이 되어 있다. 지금 있는 방과 바깥이 문으로 닫혀 있어서 비어 있음이 끊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문을 여는 순간 그 비어 있음은 연결이 된다. 아니 원래부터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총체적인 비어 있음은 알 수 가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구분되어 있는 것들뿐이다. 비어 있음은 구분되어 있지 않다. 단지 그 속에서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비어 있음은 써도 써도 마르지 않는 것이다.


일곱 번째 장
직역
하늘은 넓고 땅은 오래간다.
하늘과 땅이 능히 넓고 오래갈 수 있는 것은,
스스로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히 오래 살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그 몸을 뒤로 하나 그 몸이 앞서고,
그 몸을 밖으로 하나 그 몸이 존재한다.
이것은 그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능히 그 사를 이룬다.


해석
자기를 이롭게 하려는 행동이 자신에게 진정으로 이로운가. 생각을 해보기 바란다.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들, 재화, 출세 등이 진정으로 자신을 위한 것인가 생각을 해보라. 재화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에 집착하는 마음이 위험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스러운 사람이 몸을 뒤로한다는 것에 대한 예를 들겠다. 몸이 아픈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먼저 아름다운 옷을 사야 하겠는가. 약을 사야 하겠는가. 누구나 약을 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현실적으로 그러한가. 자신의 몸을 쥐어짜면서 옷을 사지는 않는가. 노자는 몸을 위해서 약을 사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그 몸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태어남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옴을 뜻한다. 탯줄이 끊긴다. 이것은 어미와의 구분을 뜻한다. 하늘과 땅의 어미는 도이다. 하늘과 땅은 이 어미와 구분 짖지 않는다. 자신을 고집하지 않는다. 아직 탯줄이 연결이 되어 있다. 하늘과 땅은 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오래가는 것이다. 스스로 태어난다는 말은 자신이 스스로 자연, 도와 벽을 쌓는다는 것이다. 벽을 쌓지 않으면 하나의 개체가 성립할 수가 없다. 개체로서의 태어남은 도와의 분리를 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태어남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억지로 태어나지 않을 뿐이다.
私邪와 私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앞의 사사로움은 개인적인 이기심이다. 그것도 착각하고 있는 이기심이다. 자신을 위해서 무엇인가 한다고 생각을 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사로움을 버리는 것이 진정으로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앞의 예를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여덟째 장
직역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온갖 것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그러므로 거의 도이다.
사는 것은 땅이 좋아야 하고,
마음은 깊어야 좋고,
함께 할때는 사람이 좋으며,
말에는 믿음이 좋고,
바름에는 다스림이 좋야야 하고,
일에는 능해야 좋고,
움직임에는 때가 좋아야 한다.
대저 다투지 아니하니 허물이 없다.


해석
물은 자신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과도 같이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잃지 않는다. 물은 어디에 담아도 물이다. 그러나 나무젓가락을 작은 컵안에 담아 보아라. 나무젓가락은 부러진다. 그때에는 이미 나무젓가락으로서 사용이 불가능하다.


아홉째 장
직역
지니고서 그것을 채우는 것은 그것을 그치는 것만 같지 못하다.
갈아 그것을 날카롭게 하는 것은 오래 보존 할 수 없다.
금과 옥이 집에 가득하면 그것을 능히 지킬 수 없다.
돈이 많고 높다고 교만하면 스스로 그 허물을 남길 뿐이다.
공이 이루어지면 몸은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이다.


해석
구십 구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백원을 채우기 위해서 일원을 구하는 것은 어떤가. 백원을 채우면 만족할 수 있는가. 그는 이제 이 백원에 만족하지 않는다. 다시 이백원을 가지기 위해서 노력한다. 욕망은 끝이 없다.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것이 욕망이다. 이 욕망의 노예가 되지 말아라. 칼을 갈아 본 적이 있는가. 아주 날이 잘선 칼은 곧 무뎌진다.
금과 옥을 집안에 가득히 쌓아 보아라. 그럼 천하의 도둑들이 그 집에 들것이다. 그리고 그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그는 집을 떠나지 못한다. 이제는 금은 보화가 그 사람을 구속하게 되는 것이다. 돈과 지위가 많고 높음은 상대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내면을 살찌우지 못한다. 오히려 공허하게 만들 경우가 많다.
천지는 만물을 만들었지만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공을 이루고 자신이 이루었다고 집착을 하면 그는 영원히 그 공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내가 다리를 만드는데 공헌을 했다. 그래서 그 다리 앞에서 내가 만들었다고 자랑을 해보아라. 그에게 무슨 득이 있고,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나라면 다른 다리를 만들겠다. 공을 세우기 위해서 일을 하지 말고, 일을 하기 위해서 일을 하라. 일을 하다가 공을 이루었으면 그것에 집착하지 마라. 집착을 하게 되면 그 일에 매달리게 된다.


열째 장
직역
바탕의 기운을 싣고 하나를 껴안는다.
능히 떠날 수 있겠는가?
오로지 기로 부드러움에 다달아
능히 갓난아기가 될 수 있겠는가?
백성을 아끼고 나라를 다스림에
능히 지혜롭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그윽한 거울을 뜨물로 �어서 흠이 없게 할 수 있는가?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데 능히 암컷으로 머물 수 있겠는가?
밝고 깨끗히 사방을 비추면서 능히 함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것이 생겨나고 그것이 쌓여 가네
낳으면서도 낳은 것을 가지지 않고,
지으면서도 지은 것에 기대하지 않고,
자라게 하면서도 자란 것을 다스리지 않네
이것을 일컬어 그윽한 덕이라고 한다.


해석
영백이라는 것은 靈과 魂을 가리킨다. 이것은 나를 이루어 주는 形이다. 이 형의 의미는 덕경 오십일장에서 다루겠다.
도로 돌아갈 수 있는가. 그렇기 위해서는 근원의 기운을 한 몸에 싣고 하나-도-를 껴안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출발점이 부드러움을 이루어 갓난아이같이, 순수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방법이 나와 있다. 뜨물은 곡식을 �은 뿌연 물이다. 이런 물로 거울을 �으면 때가 더낄 뿐이다. 물을 바꾸어서 �아야 하지, �는 정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럼 거울은 무엇이고, 물은 무엇인가. 생각해 보기 바란다. 나도 모른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 것은 생사의 문제이다. 생사의 문제에 초탈해서 생사가 어찌되건 평정을 이룰 수 있는냐 하는 물음이다. 개인의 문제이다.
그리고 자신의 빛으로 세상을 구제한다고 할 때 내가 세상을 구제한다고 하지 않을 수 있는가. 라고 다시 묻는다. 이것은 관계 속에서 처해야 될 행동이다. 생사에 고요할 수 있고, 남이 알아주거나 말거나 자신의 일을 하면 도가 생긴다.
그렇게 하면 도가 생기고, 덕이 쌓여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덕에 대해서 말한다. 덕은 태어나게 하되 소유하지 않는 것이다. 즉 저것은 내가 만들은 것이다. 내것이니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이다.
학문을 함에 있어서 자신에게서 누군가가 무엇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자신에게서 엄청나게 많은 것을 배워 갈 수 있다. 그리고 남에게 그러한 지식이나 앎을 전수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서 다 배웠으면 떠나게 하라. 그를 지배하고 자신의 학설만을 고집하지 않게 하라. 그는 그 자체로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길을 나의 길로 만들지 마라. 그의 길을 나의 길로 만들지 않는 것이 바로 그윽한 덕이다.


열한째 장
직역
서른 개의 바퀴 살이 하나의 바퀴 머리에 모인다.
그 바퀴 머리의 빔에 수레의 쓰임이 있다.
찰흙을 빚어 그릇을 만든다.
그 그릇의 빔에 그릇의 쓰임이 있다.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든다.
그 방의 빔에
방의 쓰임이 있다.
그러므로 있음이 이롭게 되는 것은 없음의 쓰임 때문이다.


해석
노자는 참으로 자상한 인물이다. 그는 오천언으로 자신의 사상을 표현했다. 그러나 이 것은 너무 많다. 그래서 노자를 이해한 사람은 일장을 읽고 더 이상 읽지 않는다. 그러나 한 번 들은 것보다는 두번, 세번들은 것이 더욱 낳으리라는 생각에 노자는 계속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할 뿐이다. 내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을 이해하라.
수레바퀴를 본 적이 있는가. 아니 자전거를 보자. 자전거의 바퀴 살이 가운데로 모인다. 가운데는 빈 대롱이 있어서 그 살들을 하나로 묶어 준다. 만약 가운데에 빈 대롱이 없고 꽉찬 대롱이 있다면 살들을 그렇게 쉽게 연결시킬 수 있을까. 이때에 살이 사용하는 것은 대롱인가. 대롱의 비어 있는 공간인가. 어려우면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자
밥 그릇이 있다. 그런데 밥그릇에 흙이 가득하다. 그럼 밥을 담을 수 있는가? 밥을 담기 위해서는 흙을 덜어내야 한다. 그럼 그곳에 빈 공간이 생긴다. 그럼 밥은 어디에 담는가. 밥그릇인가. 밥그릇의 빈 공간인가. 물론 빈 공간에 밥을 담을 수는 없다. 그러나 밥이 놓여지는 곳은 밥그릇의 빈 공간이다. 그래서 노자는 밥그릇이 밥그릇으로 제대로 사용되는 것은 밥그릇의 비어 있음을 이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있음의 유용만을 생각했지 빔의 유용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노자는 그런 사고의 전환을 촉구하는 것이다.


열두째 장
직역
다섯 색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다섯 소리는 사람의 귀를 먹게 하고
다섯 맛은 사람의 입을 버리게 한다.
말 타고 수렵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한다.
얻기 어려운 재화는 사람의 행동을 어지럽게 한다.
이래서 성인은 배를 위하지 눈을 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눈. 감각 기관)을 버리고 이것(배)을 취한다.


해석
인간이 감각 기관에 몰입하면 자신의 실질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감각의 충족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망친다. 외부에 대한 추구는 만족을 모른다. 한번 자극을 받아서 쾌락을 느꼈으면 그 자극을 뛰어넘는 자극이 아니면 다시 쾌락을 누리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은 쾌락을 누리기 위해서 더 큰 자극을 원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길일뿐이다.
외부에 대한 추구는 결국 내부의 빈곤을 가져온다. 다이아몬드를 하나 구하기 위해서 평생 고생했다. 그래서 평생토록 즐기거나 배부르게 먹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죽기 전에 다이아몬드를 얻었다. 그것이 그에게 있어서 어떤 가치가 있는가. 이미 몸은 병들고 죽어 가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죽으면 그 다이아몬드는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눈을 위해서 평생을 버린 것이다.
그리고 눈에 좋은 음식을, 입에 맞는 음식을 먹는다. 그러나 그러한 음식일 수록 사람의 몸에 나쁜 경우가 있다. 나쁘지 않다고 하더라도 더 좋은 음식을 먹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한번 입맛을 들이면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은 먹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노자가 경계한 것이다.


이 부분은 노자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읽지 말기를 바란다.
노자는 내면으로 돌아올 것을 말한다. 실질을 취하라. 그대의 본질을 바라보아라. 외부에 대한 추구는 궁극적인 만족을 주지 못한다. 자신의 본질에 대한 추구가 중요한 것이다. 눈을 감고 내면으로 들어가기 바란다. 나는 누구인가? 이 문제를 풀기를 바란다.


열 셋째 장
직역
총애나 욕됨을 놀란 것 같이하라.
큰 걱정을 귀히 여기기를 자신의 몸같이 하라.
총애나 욕됨을 놀란 것 같이 하라는 것은 어떤 말인가. 총애는 아래로 하는 것이니, 그것을 얻어도 놀란 것 같이하고, 그것을 잃어도 놀란 것 같이하라. 이것을 일컬어 총애를 받으나 욕되나 늘 놀란 것 같이 하라는 것이다.
큰 걱정을 귀히 여기기를 자신의 몸같이 하라는 것은 어떤 말인가. 나에게 큰 걱정이 있는 까닭은 내게 몸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몸이 없는데 이르르면 내게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몸을 귀하게 여기는 것 같이 천하를 여기는 자는, 정녕코 천하를 맡길 수 있는 것이다.
몸을 사랑하는 것 같이 천하를 여기는 자는, 정녕코 천하를 맡길 수 있은 것이다.


해석
총애는 임금이 신하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양자간에 지배와 복종이 성립하는 관계이다. 이 총애는 상대를 자신의 수하로 만들 때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자는 이것을 경계한 것이다. 그리고 이 총애는 다시 욕됨으로 변한다. 상대가 자신의 수하이기를 거부하게 된다면 강제력을 동원한다. 노자는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총애를 받는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천하를 근심하는가. 남을 근심하는가. 그러나 가장 중요한 근심은 자신에 대한 근심이다. 자신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일은 하지 않으면서 남의 일이 안되고 있음을 비판하는가. 그리고 자신이 한다면 더 잘할 것이라고 말을 하는가. 그런 사람에게 남이 하던 일을 맡기면 그는 다시 자신이 하던 일을 근심한다. 결국 그는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기에 자신의 근심을 먼저 살피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근심을 아는 자는 천하의 근심을 해결 할 때 천하의 근심만 걱정을 한다. 다른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예를 들자. 그대들은 국어 공부를 한다. 그런데 그 시간에 영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걱정을 한다. 그리고 영어 공부를 할 때 그대들은 오늘 저녁에 무엇을 먹을까 걱정을 한다. 그는 결국 아무것도 진심을 다해서 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른 시각이 또 있다. 자신을 아끼지 않는 자는 남도 아끼지 않는다. 따라서 천하를 맡기면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천하에게도 잔인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남에게 잔인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에게 잔인해져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사랑하는 자에게 천하를 맡기라는 것이다.


열 넷째 장
직역
보이지 보이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이라고 한다.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희라고 한다.
만져도 느낄 수 없는 것을 이름하여 미라고 한다.
이 세 가지는 꼬치꼬치 캐물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섞어서 하나로 삼는다.
그 위는 밝지 않고, 그 아래는 어둡지 않다.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데 이름할 수 없다.
다시 물 없는 데로 돌아가니,
이를 일컬어 모습 없는 모습이오, 물 없는 형상이라고 한다.
이것을 일컬어 홀황1)이라 한다.
앞에서 맞아도 그 머리가 보이지 않고
뒤를 따라가도 그 꼬리가 보이지 않는다.
옛의 도를 잡아, 지금의 있음을 규정한다.
능히 옛시작을 아니 이것을 일컬어 도의 줄기라 한다.


해석
아지랑이를 본적이 있는가. 아지랑이는 보인다. 그러나 만져지지는 않는다. 바람을 본적이 있는가. 바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있다는 것을 느낄 수는 있다. 도는 이와 같다. 도는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려지지 않는다. 즉 인간의 감각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규정되고 잘려진 것들뿐이다. 물은 그런 구분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럼 물 자체가 구분되어 있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그럼 그 것을 구분하는 것은 누구인가. 사람이다. 사람이 물의 특성을 보고 구분하는 것이다. 그대는 자신의 팔과 손이 구분되어 있다고 보는가. 어디서부터 구분이 되어 있는가. 팔과 손을 분리시키는 순간 손은 죽는다. 그리고 전체도 죽어 간다. 팔과 손을 구분하는 것은 팔과 손 자체가 아니다. 인간의 의식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물을 구분하는 것은 인간의 의식이다. 이러한 인간의 의식이 개입하지 않는 상태가 이희미의 상태이다. 밝음과 어둠의 상대성을 뛰어넘은 상태를 일컫는다. 홀황은 비몽사몽간이라는 말이다. 술에 취해본적이 있는가. 그때 세상이 어떻게 보이던가. 마구 돌고 있지 않은가. 세상이 도는 것인가 내가 도는 것인가. 그리고 그때 본 세상이 참세상인가 술이 깬 뒤에 본 세상이 참세상인가. 그리고 우리가 지금 술에 취해서 세상을 보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는가. 말이 많이 빗나갔다. 본론으로 돌아가겠다.
바람을 앞에서 맞아 보아라 그럼 그 머리가 보이는가. 바람을 뒤따라 가 보아라 그럼 바람의 꼬리가 보이는가. 바람은 시작과 끝이 없다. 도는 시작과 끝이 없다. 동양의 사상에는 시작과 끝은 없다. 원만 있을 뿐이다. 시작과 끝의 사상은 서양의 사상이다.
도를 알 수 가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도를 알겠는가. 그것은 옛날의 도를 잡아서 보면 된다. 즉 지나간 자연현상을 살펴보면 지금 무엇이 일어날지를 아는 것과 같다. 능히 옛시작을 아는 것은 바로 도의 규칙을 아는 것이다.


열 다섯째 장
직역
예로부터 잘 행하는 자는 미세하고,
묘하며 그윽하고 통해서 깊어 헤아리지 못한다.
헤아릴 수 없기에 억지로 다음과 같이 형용한다.
머뭇거리네, 겨울날 천을 건너는 것 같이,
쭈물거리네, 사방이 두려운 것 같다.
근엄하도다, 그것은 손님과 같네,
흩어지도다, 그것은 얼음이 녹으려 하는 것 같네,
도탑도다, 그것은 통나무와 같네,
텅 비었도다, 그것은 계곡과 같다.
혼돈하도다 그것은 흐린 물과 같네,
누가 능히 자기를 흐리게 만들어
그것을 고요히 해서 물을 맑게 할 수 있겠는가?
누가 능히 자기를 안정시켜서 오래가게 하고,
움직여서 온갖 것을 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이 도를 보존하는 자는 채우려 하지 않는다.
채우려 하지 않기에
그러므로 능히 낡은 것을 새로이 이루지 아니한다.


해석
석수장이가 돌을 다듬어 하나의 예술품을 만들어 낸다. 그가 하는 행동을 말로 다 표현 할 수 있을까. 아니 백미터 달리는 운동선수의 움직임을 말로 다 표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단지 달리고 있다라고 만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세히 들어가면 수천 권의 책으로도 그의 행동을 표현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억지로 이름하는 것이다.
微妙玄通은 이러한 것을 표현 한 것이다. 모두 말하기 힘들다는 뜻이다. 도에 있는 자는 일을 할때 조심스럽게 한다는 말이다.
개울을 본적이 있는가. 물이 맑아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줄 아는가. 그것은 흙모래이다. 물은 흙모래를 투과하면서 정화가 된다. 이때 물이 통과하면서 그 부분은 흙탕물이 된다. 그러나 그 곳을 지나온 물은 깨끗한 물이 된다.
누가 이러한 일을 하는가. 바로 도를 보전하려는 자이다. 그는 채우려 하지 않는다. 채우는 순간 그는 물을 정화시키지 못한다. 스스로 새로워지려 하지 않는다. 정화된 물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흙탕물로 남는다. 그것이 도를 보전하려는 자의 행동이다.


열 여섯째 장
직역
빔에 이르기를 지극히 하고,
고요함 지키기를 돈독히 하라.
만물이 나란히 자라지만 나는 돌아감을 본다.
대저 물이 잘 자라는것 같지만 모두가 다시 뿌리로 돌아간다.
돌아갈 뿌리를 이름하여 고요함이라 한다.
이것을 명으로 돌아간다라고 한다.
명으로 돌아가는 것을 이름하여 늘 그러함이라 하고,
늘 그러함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 한다.
늘 그러함을 알지 못하면, 망령되이 흉을 짓는다.
늘 그러함을 알면 포용하게 되고,
포용하면 공평하게 되고, 공평하면 왕이 된다.
왕이 되면 하늘에 들어맞고,
하늘에 들어 맞으면 도에 들어맞는다.
도에 들어맞으면 영원 할 수 있다.
내 몸이 다하도록 위태롭지 아니하다.


해석
내 해석의 한계를 느낀다.
앞의 첫 문장은 이 글의 총화이다. 비어 있음과 고요함. 이것이 만물의 뿌리이다. 비어 있어야 채울 수 있다. 항상 비어 있고 배울 준비가 되어 있는 자세가 가장 필요한 것이다. 고요함도 마찬가지이다. 무언가를 �아서 뛰다보면 주의의 경물을 보지 못한다. 총을 쏘아 본적이 있는가.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에는 오직 표적만이 보인다. 그 주위의 풍경은 보이지 않는다. 넓게 보기 위해서는 달리는 기차에서 내려 배를 내밀고 뒷짐을 지고 보아야 한다.
나무를 보면 하늘로 치솟는 부분만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늘로 치솟기 위해서는 그 만큼의 깊이와 �이로 뿌리가 내려져야 한다. 그것은 드러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결과를 보지만 노자는 그 근원을 본다. 뿌리가 튼튼하지 않으면 그 나무가 크지 못하고, 곧 쓰러질 것임을 아는 것이다.
천하 만물의 뿌리는 고요함이다. 그 고요함을 일컬어 명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명이라는 것은 밝음이다. 자연의 움직임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것은 늘 그러하다. 이 늘 그러함을 아는 것이 밝음이다. 이 밝음은 인간 자신의 깨어 있음의 표현이다. 자연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아는 것이 밝음이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화를 자초하는 것이다. 잘 자라나는 나무의 윗부분만을 보고 우리는 그 나무에 매달린다. 그리고 이것은 영구 불변할 것이라고 착각을 한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에는 근본으로 돌아갈 뿐이다.
늘 그러함을 알면 포용하게 된다. 여기서 늘 그러함이란 고정된 사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뿌리로 돌아가는 것이 늘 그러함이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만 변하지 않는다. 근원의 차원에서 보면 잘난것도 못난 것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포용할 수 있다. 우리는 사상이 틀리고 얼굴 색이 틀리면 배척을 하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매한 짓이다. 나무의 잎이 틀리다고 나무가 아니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러한 짓을 우리는 아직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노자는 평등을 이야기 한 것이다. 모든 것이 평등함을 알라. 모든 것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모든 것이 평등함을 알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그때 공평하게 된다. 편견에 치우치지 않는다. 편견에 치우치지 않으면 천하가 그를 따른다. 이것이 하늘에 맞고 도에 맞는 것이다. 그러하면 내몸이 다하도록 위태롭지 않은 것이다.


열 일곱째 장
직역
가장 좋은 것은 밑에 있는 사람들이
다스리는 자가 있다는 것만 알뿐이다.
그 다음은 백성들과 친해지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백성들을 두려워하게 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백성들에게 모멸감을 주는 것이다.
믿음이 부족하면 불신이 있기 마련이다.
그윽 하도다, 다스리는 자는 그 말을 귀히 여긴다.
일이 이루어져 공이 있으면 물러난다.
백가지 성의 사람들이 모두 일컬어 나 스스로 그러할 뿐이라고 한다.


해석
필요한가. 필요하다면 일장부터 다시 읽기를 바란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어도, 도움을 받는 사람은 그 덕을 알지 못한다. 새냇물에 쓰레기가 하나 떠간다. 그것을 줏어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아무도 보는 이 없고, 그 자신도 덕을 행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물을 깨끗하게 한 행위이다. 밑에서 그 물을 마시는 사람은 산의 물은 원래 깨끗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누가 위에서 쓰레기를 치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가장 좋은 다스림이다.


열 여덟째 장
직역
큰 도가 없어지니까 어짐과 의로움이 있게 되었다.
슬기로움이 생겨나니까 큰 위선이 있게 되었다.
육친이 불화 하니까, 효도와 자애가 있게 되었다.
국가가 어지럽게 되니까 충신이 있게 되었다.


해석
거꾸로 가 보자. 이순신이 충신인가. 그때 임진왜란이 없었다면 이순신이 성웅으로 불렸을까. 을지문덕이 명장인가. 그때 수나라의 침공이 없었다면 그는 명장이 되었을까. 나라가 어지러운 뒤에야 충신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해가 가는가.
효를 왜 강조하는가. 쓰레기를 분리 수거하자고 왜 강조를 하는가. 그것은 쓰레기 분리 수거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효를 강조하는 것은 효가 사라져 가기 때문이다. 즉 육친이 불화 하기 때문이다.
슬기로움은 여기서 어떠한 의미로 쓰였는가. 그것은 꾸밈의 의미이다. 우리는 한 두개의 가면을 가지고 산다. 싫어도 좋은 척, 화날 때도 미소를 잃지 않는다. 그것은 위선이다.
인의가 생긴 것은 큰 도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인의를 외치지 마라. 큰 도를 살리는 것이 더 근원적인 문제이다.
그럼 큰 도는 무엇인가.


열 아홉째 장
직역
성스러움을 끊고, 지혜를 버려라,
백성들의 이익이 백배가 될 것이다.
어짐을 끊고 의로움을 버려라,
백성들이 다시 효와 자애로울 것이다.
기교를 끊고 이익을 버려라,
도적이 있지 않을 것이다.
이 세 가지는 꾸밈일 뿐이며 부족한 것이다.
그러므로 돌아감이 있게 하라.
순박함을 보고 통나무를 끌어 안으니,
사사로움을 적게 하고 욕심을 적게 하라.


해석
현대에서 지식을 버리고 살 수 있는가. 그러나 지식을 버리라고 한다. 그럼 어떻게 살란 말인가. 노자는 지식과 성스러움을 버리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것대로 가치가 있다. 그리고 속됨과 무지 또한 그대로 가치가 있다고 한다. 노자 당대에는 이 둘은 평행선에 놓여지 있지 않았다. 성스러움만을 추구하고, 속됨은 발로 짖밟았다. 그래서 노자는 성스러움과 지식을 깍아 내린 것이다. 지혜를 버리라고 한다. 성스러움은 속됨의 상대적인 표현이다. 성스럽다는 것은 속됨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성과 속은 동전의 양면이다. 차별을 두지 마라.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 자체에는 성과 속이 없다. 단지 인간의 의식이 차별을 둘뿐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이롭기 때문에 좋은 것이고, 저것은 인간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에 나쁜 것이다. 이것은 편견이다. 독사를 나쁘다고 하는가. 뱀은 뱀의 길을 갈 뿐이다. 해충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좋은가 나쁜가에 따라서 해충과 익충이 갈라진다. 그러나 벌레는 인간에게 좋게 되고 나쁘게 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 그들은 그들의 본성대로 살아갈 뿐이다. 차별을 가지지 마라.
어짐과 의로움은 앞에서 다루었다.
순박함과 통나무는 근원을 의미한다. 뒤에 나오겠지만 이 통나무를 재단 하면 가구가 된다. 그리고 쓰레기가 남는다. 우리는 가구를 문명의 산물이라고 본다. 그래서 통나무들을 베어 낸다. 무수한 통나무들을 베어 낸다. 그리고 그곳에 집을 짓고 나무 의자를 들여놓는다. 그리고 말한다. 보아라 인간이 이룩한 문명을 이 얼마나 위대한가. 그러나 인간의 문명은 나무하나 만들지 못한다. 단지 나무가 자라는 것을 방해하지 않고 옆에서 지켜 볼 뿐이다. 인간의 문명은 자연을 파괴한 정도와 비례한다. 그것이 진정한 발전인가. 통나무를 잘라서 나무 의자를 만든 것은 인간에게 이롭다고 생각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자연계 전체에서 볼 때에 그것은 발전인가.


스무째 장
직역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다.
예와 아니오가 서로 얼마나 갔는가.
선과 악이 서로 간 것이 같은가.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을 나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황량하도다.
그 중심을 못 잡았구나.
뭇사람들이 희희낙낙한 것이 큰 소를 잡아 잔치를 여는 것 같네,
봄에 누각에 오르는 것 같네.
나홀로 담백하구나,
그 아무것도 드러나지 아니함이 어린아이가 아직 웃지 않는 것 같다.
난감하구나, 돌아갈 곳이 없는 것 같네
뭇사람이 남음이 있는데
나홀로 부족한 것 같은가.
내가 어리석어 다른 사람의 그 마음을 알지 못하는가.
혼돈스럽도다.
세간 사람들은 밝은데, 나홀로 어둡구나,
세간 사람들은 잘도 살피는데, 나홀로 답답할 뿐일세.
담담하여 바다와 같고, 거센 바람이 일때는 그칠 줄을 모르네.
뭇 사람들은 모두 쓸모가 있는데, 나 홀로 완고하고 비천하여 쓸모가 없네.
나홀로 뭇사람과 다른 것이 있다면 먹이는 엄마를 귀히 여기는 것이네.


해석
글씨체가 다른 부분은 노자의 상태이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같이 두려워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두려워하는 것을 묻어 두고 있다. 희희낙낙하고 즐거워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저변에는 두려움이 있다. 그것은 생과 사의 문제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애써 외면을 한다. 그리고 잔치를 벌이고 즐긴다. 봄이 가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면서. 노자는 내면으로 들어가고 있다. 어린아이가 아직 웃지 않는 상태. 순수한 상태로 가고 있다. 그것은 매우 힘든 길이다. 그리고 그 길은 돌아갈 곳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왜 그렇게 순박하게 사는가. 이 세상에는 살필 것도 가질 것도 많이 있는데. 보아라 저 빌딩을 가지고 싶지 않은가. 저 금싸라기 땅을 가지고 싶지 않은가. 황금에 대해서는 너무 잘 살핀다. 그리고 나의 땅과 남의 땅에 대한 구분에는 별도 뜨지 않은 밤에도 가능하다. 빛이 없어도 구분 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 정도로 밝다. 그러나 노자는 바다와 같고 바람과 같다. 바람은 머물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는다. 땅에 황금에 빌딩에 머물지 않는다. 그랬기에 돌아갈 곳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멍청해 보인다. 사람들은 돌아갈 집을 마련한다. 노자는 식모를 귀히 여긴다. 옷갓 것을 먹이는 어미. 바로 생명의 근원이자 모든 물이 돌아가는 곳이다. 그곳으로 사람도 돌아간다. 노자는 육체가 돌아갈 집을 구하지 않는다.


스물 한째 장
직역
빔의 덕은 포용이니, 오로지 도는 이것을 따른다.
도가 물로 되는 것은 오로지 홀하고 오로지 황하다.
홀하도다 황하도다, 그 가운데 이미지가 있네.
황하도다 홀하도다, 그 가운데 사물이 있네.
깊고 어둡도다, 그 가운데 정기가 있네.
그 정기가 참으로 참되도다. 그 가운데 믿음이 있네.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 이름 사라지지 아니하니
이로써 뭇처음을 살필 수 있지.
내어찌 뭇처음의 모습을 알겠는가.
이것(도)으로 알 따름이다.


해석
도는 빔의 덕을 따른다. 도는 그 자체로 구분을 짖지 않다. 그럼 물은 어떻게 해서 생기는가.
도가 물이 되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홀과 황이라고 했다. 홀과 황은 비몽사몽간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구분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도와 물은 칼로 벨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자 그럼 도가 어떻게 물이 되는 지 살펴보자. 그리고 도와 물의 관계는 어떠한가 보도록 하자. 물은 인간의 의식이 규정을 짖는 것이다. 노자는 인간의 의식이 사물을 규정짓는 것을 단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선 홀하고 황한 가운데 이미지를 가지게 된다. 이 이미지가 발전하여 사물이 되는 것이다. 이때에는 황하고 홀한 것이다. 이 이미지가 굳어져 사물이 된다. 이것이 일장에서 본 무명이 유명으로 넘어가는 것을 자세히 설명한 것이다. 천지는 이미 있다. 자 보자 어린아이가 사물을 익히는 것은 맨 처음부터 구분되어 있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다. 그 사물의 이미지를 먼저 머리 속에서 만든다. 그리고 나서 그 이미지가 뚜렷해지면서 하나의 사물을 구체적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자 잠으로 돌아가 보자 잠속에서 깨어날 때 우리는 흐릿한 사물을 보게 된다. 이것은 사물이 흐릿해서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다. 사물과 사물을 구분해서 보는 작용이 우리에게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때가 홀황한 것이다. 그리고 점점 구분이 뚜렷해지면서 개개의 사물을 뚜렷하게 구분 되어 가는 것이 황홀한 것이다. 그때 우리는 하나의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사물을 깊이 파고들어 가면 깊고 어둡다는 것이다.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사물은 도의 다름이 아니다. 그래서 사물 가운데 정기가 있다는 것이다. 사물은 사물이면서 동시에 도이다. 이 사물의 도를 통해서 뭇 처음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스물둘째 장
직역
휘어지면 온전하고, 구부리면 펴진다.
파이면 고이고, 낡아지면 새로워진다.
적으면 얻고, 많으면 미혹하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하나를 껴안고, 하늘 아래 모범이 된다.
스스로 드러내지 아니하니 밝고
스스로 옳다 하지 않으니 빛난다.
스스로 드러내지 않으니 공이 있고,
스스로 자만하지 않으니 으뜸이 된다.
대어 오로지 다투지 아니하니, 하늘 아래 그와 더불어 다툴 자가 없다.
옛말에 굽으면 온전하여 진다고 한말이 어찌 허언이겠는가.
진실로 온전하니 그것으로 돌아가라.


해석
휘어지면 온전하다. 대세를 따르는 것이 몸을 보존하는 길이다. 이렇게 해석을 할 수 있다. 힘이 약하면 굽혀라. 복종하라. 그럼 목숨을 보존할 지니. 이것이 노자의 뜻인가. 자 다르게 해석을 해보자
강직된 사고를 가지면 더 이상 발전이 없다. 휘어짐은 유연함의 표현이다. 어린아이는 빨리 배운다. 그 이유는 자신을 고집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자신을 고집한 다면 그는 영원히 어린아이로 남을 것이다. 죽을 때까지. 그러나 어린아이는 마구 습득한다. 그것은 그가 그만큼 유연하기 때문이다. 유연하지 못한 것은 죽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러지고 만다. 자신이기를 고집하지 않기에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물을 보자 물은 어디에 담아도 자신이 그 틀에 변용이 된다. 그렇다고 물 그 자체가 바뀐 것인가.
산길을 가다가 열 갈래의 갈림길을 만났다. 그대는 어디로 가는가. 미혹하다. 하나의 길이라면 편하게 갈텐데. 무엇이든지 너무 많으면 미혹해 지는 것이다.
성인은 하나를 껴안는다고 했는데 그것이 무엇일까. 정답은 도이다. 그럼 왜 도를 껴안는가. 이성이면 더 좋지 않은가. 껴안는다는 말은 체득한다. 도와 합일된다는 말이다. 그 도는 드러내지 않고 자랑하지 않으며 옳다고 우기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투지 아니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생각해서 옳으면 됐지 남에게 자신이 옳다고 항변할 필요가 있는가. 현대를 살아가면서 이렇게 항변할 필요가 있을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때가 아닌데도 나서서 내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그는 누구를 의식하고 있는가. 자신의 행동이 남에게 어떻게 보일까 걱정을 한다. 이것이 바로 총과 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맹자에 이런 말이 나온다. 스스로 반성해서 옳으면 비록 천만인이라도 두렵지 않다. 이런 자세로 삶을 살기 바란다.


스물 셋째 장
직역
자연은 말이 없다.
그러므로 회오리바람은 아침을 마칠 수 없고,
소나기는 하루를 마칠 수 없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하늘과 땅이다.
하늘과 땅도 이렇게 오래갈 수 없는데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야?
그러므로 도를 따라 섬기는 자는 알아야 한다.
도를 구하는 자는 도와 같아지고,
덕을 구하는 자는 덕과 같아지고,
잃음을 구하는 자는 잃음과 같아진다.
길과 같아지는 자는 길 또한 그를 즐거이 얻으리.
덕과 같아지는 자는 덕 또한 그를 즐거이 얻으리.
잃음과 같아지는 자는 잃음 또한 그를 즐거이 얻으리.
믿음이 부족한 곳에는 불신이 있다.


해석
자연은 만물을 키운다. 그러나 내가 키운다고 말하지 않는다. 경작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내가 저 작물들을 키웠다고, 과연 그러한가 사람은 작물이 자라나는데 도움을 줄뿐이다. 그것을 키우는 것은 땅과 하늘이다. 그러나 내가 키웠다고 말하지 않는다.
회오리바람과 소나기는 하늘과 땅이 爲한 것이다. 그러나 하루를 가지 못한다. 하늘과 땅이 행한 것도 하루를 가지 못하는데 사람이 행한 것은 얼마나 가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행한 것이 영구 불변하리라 생각을 한다. 로마제국을 세운 자들도 그렇게 생각을 했을 것이다. 삼풍백화점을 세운 사람도 그것이 무너지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이룬 업적은 영구 불변하리라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인간은 지구의 45억년의 삶에 극히 일부분을 점유하고 있을 뿐이다. 수억년동안 지구를 지배했던 공룡이 지금은 석유가 되어 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을 얼마나 갈 것인가.
도를 구하는 자는 도와 같아진다. 아름다운 말이다. 왜 도를 구하는 자에게 도가 내려오지 않는다고 했을까. 구도자는 도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그 속에서 그는 도와 동일시된다. 그러나 도를 자신에게 맞추려는 자는 도가 자신과 같아진다. 그때 변하는 것은 도이다. 그 자신이 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도가 그 자신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변화는 없다. 도를 구하여 얻으려면 자신이 도가 되어야 한다. 자신을 뜯어고치지 않는 자는 결코 도에 다가갈 수 없다.
쉽게 풀어 보자. 영어를 공부한다. 그럼 내가 영어의 발음에 맞추어야 하는가 영어의 발음을 나에게 맞추어야 하는가. 그럼 도를 구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맹세는 어디서 오는가. 불신에서 온다. 사랑의 약속은 어디서 오는가. 불신에서 온다. 언어에 의한 계약은 불신에서 오는 것이다. 자연은 말이 없다. 진정한 믿음은 자연처럼 말이 없는 것이다.


스물 넷째 가름
직역
발돋움을 하고서 서 있는 자는
오래 서 있을 수 없고,
가랭이를 벌리고 걷는 자는 오래 걸을 수 없다.
스스로 드러내는 자는 밝지 아니하고,
스스로 옳다고 하는 자는 빛나지 아니하고,
스스로 드러내는 자는 공이 없다.
스스로 자만하는 자는 으뜸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길에 있어서는 찌꺼기 음식이오. 군더더기 행동이다.
물은 아마 그것을 싫어 할 것이다.
그러므로 도가 있는 자는 처하지 아니한다.


해석
발꿈치를 들고 있는 것과 가랭이를 벌리고 걷는 것은 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 것은 오래 가지 않는다. 그럼 인간이 행하는 부자연스러움을 살펴보자.
물이 왜 드러내고, 옳다고 우기고, 자만하는 것을 싫어하는가. 그것은 사물도 하지 않는 바이다. 사자도 자신이 밀림의 왕이라고 뽐내지 않는다. 그도 한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서 전력을 다한다. 물의 움직임은 자연스럽다.
노자는 뽐내고, 드러내고 자만하는 것은 발꿈치를 들고 서 있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과연 그러한가는 여러분이 생각해 보길 바란다.


스물 다섯째 장
직역
혼돈 되어 이루어진 것이 있었으니 하늘과 땅보다도 앞서 생겼다.
적막하고 모습이 없다. 홀로 서서 고치지 않는다.
두루 다니면서 위태롭지 아니하니, 가히 하늘 아래의 어미로 삼을 만하다.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하나, 글자로 말하기를 도라 하고,
억지로 이름하여 크다고 한다.
큰 것은 가게 마련이고,
가는 것은 멀어지고, 멀어진 것은 돌아온다.
그러므로 길은 크다.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왕도 크다.
영역 가운데 네개의 큰 것이 있으니,
왕이 그 하나에 자리잡고 있다.
사람은 땅을 본 받고,
땅은 하늘을 본 받고,
하늘은 도를 본 받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 받는다.


해석
도는 근원이다. 이것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름 할 수 없다. 그러나 억지로 이름하여 도라고 하는 것이다.
큰 것은 부서진다. 바위가 모래로 되듯이 도가 물로 변화한다. 이것은 도에서 멀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멀어진 것은 다시 도로 돌아간다. 모래가 용암 속에서 다시 바위가 되듯이 사물은 도로 돌아가는 것이다. 한 단계 높여 설명을 한다면 사물도 도의 한 표현 모습이다. 더 높혀 설명을 한다면 사물은 그 자체로 도이다.
도가 크고, 하늘이 크고, 땅이 크다는 것까지는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런데 왕이 크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임금이 큰가. 이것은 위정자들을 옹호하는 것인가.
왕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나랏님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임금 노릇할 왕이다. 이 말은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된다는 말이다. 왕의 세 가로획은 천지인을 가리킨다. 이것을 꿰뚫은 사람이 왕이다. 이것은 세속적 정치권력을 가진 왕을 의미하지 않는다. 스스로 주인 되는 인간을 가리킨다.
이러한 사람은 땅을 본받는다. 그것은 결국 자연을 본 받는 것이다. 스스로 그러함, 인위 하지 않는 무위의 행에 머무르는 자이다.


스물 여섯째 장
직역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뿌리가 되고,
고요한 것은 조급한 것의 주인이 된다.
이러한 까닭에 성인은 종일 다녀도
무거운 짐을 내려놓지 않는다.
비록 영화로운 모습을 보아도
편안히 처하며 초연해 있다.
어찌 일만 수레의 주인으로 하늘 아래 몸을 가벼이 하겠는가.
가벼운 즉 근본을 잃고, 조급한즉 주인 됨을 잃는다.


해석
무거운 것은 밑으로 내려가니 당연히 가벼운 것의 뿌리가 된다.
일을 행함에 조급히 하면 되는 일이 없다. 따라서 침착한 마음을 가지고 일에 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까닭에 성인은 매사에 무겁게 고요히 일을 하는 것이다. 영화로운 모습에 마음이 들뜨면 그 근본을 잃는 것이다.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려한 유혹을 보아도 가지려 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편하다.
일만 수레의 주인이라는 말은 천자를 가리킨다. 옛날 중국에서는 천자는 일만 수레, 여기서 수레는 고대 전차를 가리킨다. 일만대의 전차를 움직일 재력과 힘이 있었다. 전차 일만대면 움직이는 병력이 수십만이다. 그 아래 제후는 천승제후 백승제후라고 했다. 만승은 천자의 존엄을 나타낸다.
스스로 주인이 되면 천자와 같은 존재가 된다. 그런 사람이 함부로 몸을 굴리겠는가. 천하가 자신의 땅인데, 자신의 존엄성을 잃고 가볍게 움직이면 자신의 영역을 잃고, 조급히 행동하면 고요한 사람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그러니 스스로 주인 됨을 잃는 것이다.


스물 일곱째 장
직역
잘 움직이는 자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좋은 말은 흠이 없다.
잘 계산하는 자는 주산을 쓰지 않고,
잘 닫는 자는 빗장 나무를 쓰지 않는데도 열 수가 없다.
잘 묶는 자는 끊을 쓰지 않는데도 풀 수가 없다.
이런 까닭으로 성인은 항상 사람을 잘 구제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늘 사물을 잘 구제하며,
그러므로 사물을 버리지 않는다.
이것을 습명2)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좋은 사람은 좋지 못하는 사람의 스승이며,
좋지 못한 사람은 좋은 사람의 거울이다.
그 스승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그 거울을 아끼지 아니하면,
비록 지혜롭다고 해도 크게 미혹할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묘한 요체라 한다.


해석
도구를 가지고 하는 것은 이차적인 일이다. 도구가 이미 자신의 몸처럼 되면 도구가 없어진다. 아니 도구를 자신의 몸처럼 쓴다. 그것이 고수이다. 끈으로 묶인 사람을 푸는 것이 쉬운가. 마음속에 이념으로 묶인 사람, 쉽게 말해서 사랑의 포로가 된 사람을 푸는 것이 쉬운가.
고장난 텔레비전을 우리는 버린다. 낡은 털옷을 우리는 버린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든지 재활용할 수 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물상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도 버린다.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배척을 한다. 적으로 여긴다. 그러나 성인은 그러한 사람도 포용을 한다.
논어에 세명이 함께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는 말이 있다. 세명중에 뛰어난 사람이 없어도 그들의 행동을 보고 자신을 고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움직임을 자신의 모습과 비교해 보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거울이 된다. 좋지 못한 사람이 하는 행동을 보고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도 그에게서 배우는 것이다.
좋지 못한 사람은 좋은 사람을 보고 그의 좋은 점을 배우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좋지 못한 사람의 좋지 못한 점을 거울로 삼아 자신이 그러한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쁘다 해서 버리고, 좋은 점이 있으면서도 배우지 아니하면 비록 똑똑하다고 해도, 발전이 없는 것이다.


스물 여덟째 장
직역
그 수컷 됨을 알고,
그 암컷 됨을 지킨다면 하늘 아래의 계곡이 된다.
하늘 아래의 계곡이 되면,
덕이 항상 떠나지 아니하니,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간다.
그 밝음을 알고,
그 어둠을 지킨다면 하늘 아래의 모범이 된다.
하늘 아래 모범이 되면 덕이 항상 어긋나지 아니하니,
다시 가히(끝이) 없는 데로 돌아간다.
그 영예를 알고, 그 욕됨을 지킨다면 천하의 계곡이 된다.
천하의 계곡이 되면 덕이 항상 이에 족하니,
다시 순박함으로 돌아간다.
통나무가 흩어져서 그릇이 되는 것이니,
성인은 그것(樸)을 사용하여 본 받음의 으뜸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큰 다스림은 나누지 않는다.


해석
비어 있음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이제부터는 상대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겠다.
남자는 남자다. 그리고 남자에게는 여자의 속성이 있다. 여자는 여자다. 그리고 여자에게는 남자의 속성이 있다. 라즈니쉬가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은 남자와 여자의 결합으로 태어났다. 따라서 남자의 속성과 여자의 속성을 모두 이어받는다. 즉 하나의 생명체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남자와 여자의 합일로 가능한 것이다. 이때 태어나는 개체는 이 둘 중에 하나의 속성만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둘 다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 더 구체화 성에 따라서 남성과 여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컷으로 태어났으면 그 내면에는 암컷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암컷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자신이 남자이면서 여자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 천하의 계곡, 바로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도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몸안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노자는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의 남성됨을 알고 여성됨을 지킨다면 빔, 도, 근원이라 불리는 곳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한 단계 더 높여서 설명을 하면 자신이 빔이 되는 것이다.
흑백의 논리나 성격도 마찬가지이다. 순박함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본래의 속성이다. 때묻지 않은 어린아이의 모습이다. 이 어린아이가 구분하고 나누는 것을 배우면서 그릇이 되어 간다. 그 순박함을 잘라 내어서 어린아이는 이제 학생이 된다. 그리고 회사원이 된다. 사회 속의 하나의 부속품이 되어 간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은 순박함을 가장 높이 친다. 가장 높은 자리에 둔다. 큰 제도는 구분하지 않는 것이다. 하늘은 비를 뿌릴 때 좋은 사람의 논이라도 더 많은 비를 뿌리지 않고, 나쁜 사람의 논이라고 비를 적게 주지 않는다. 그냥 비를 뿌릴 뿐이다. 그것이 樸이다. 이 樸을 본 받으라고 한 것이다.
자 이제 순박함으로 돌아가 보자. 그럼 어린아이가 제일 행복한가.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의자가 된 나무를 다시 숲에다 심을 수 있을까. 우리는 노자가 이야기 한대로 삶고 싶을 수도 있다. -싫어도 상관은 없다. 그것은 개인의 선택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에게는 희망은 없는가. 의자가 된 나무도 빔이다. 그대는 아직 늦지 않았다. 의자가 숲속의 살아 있는 나무가 될 수는 없다. 우리가 어린아이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빔으로 돌아갈 수 는 있다. 그곳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구체적인 방법을 알고 싶은가. 수행하라.


스물 아홉째 장
직역
장차 천하를 얻으려고 욕망 하는 하는 자의 행동에서
나는 그것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본다.
천하는 신령스러운 그릇이다.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하려는 자는 패할 것이오, 잡으려는 자는 잃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은 혹은 가고 혹은 따르는 것이다.
혹은 들여 마시고, 혹은 내뱉는다.
혹은 강하고 혹은 여리다.
혹은 꺾이고 혹은 무너진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극심한 것을 버리고,
사치로움을 버리고, 과분함을 버린다.


해석
천하를 장악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천하를 소유할 수가 있는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하겠다. 개미가 길을 가다가 평평한 탁자 위를 지나가게 되었다. 개미는 그 탁자의 넓고 평평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 탁자에 깃발을 꽂고 “이것은 내 땅이다.”라고 선언했다.
어떻게 생각을 하는가. 웃기는가. 웃긴다면 이 책을 덮어라. 아직 그대는 이 책을 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천하를 소유한다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다.
천하는 인간의 것이 아니다. 천하는 그냥 천하다. 인간은 하늘 아래 기생해서 살아가는 존재일 뿐이다. 그대는 살구나무에 수많은 벌레가 그 나무에서 사는 것을 본적이 있는가. 그때 그 벌레를 어떻게 생각을 했는가. 우리는 그 벌레와 같은 존재이다. 인간에 대한 비하가 심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대는 왜 살구나무에 사는 벌레를 싫어하는가. 싫어하지 않는다면 다음 장으로 바로 넘어가리 바란다. 살구나무에 사는 벌레는 그냥 살뿐이다. 그 자체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 벌레는 살구나무가 죽을 정도로 착취하지 않는다. 만약 살구나무가 죽으면 그 자신도 죽는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안다. 솔잎혹파리가 있다. 그것은 소나무를 죽인다. 자 소나무가 다 죽으면 솔잎혹파리는 살 수 있는가. 때가되면 자연스럽게 놔두면 솔잎혹파리를 잡아먹는 새가 그 수를 줄인다. 그러나 인간이 그 새를 죽였다. 그래서 소나무가 죽어 간다. 인간이 죽인 것은 새뿐만 아니다. 살구나무를 정복해야 될 대상으로 여기고 마구 파헤친다. 물관을 잘라 버리고 잎을 갈가먹는다. 살구나무는 점점말라간다. 이제 살구나무는 살아나지 못할 것 같다. 그리고 살구나무가 죽는 순간 그곳에 있던 벌레들도 죽는다. 인간이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이치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앞서가는 듯 하면서도 다시 보면 뒤 따라 온다. 들여 마시면서 동시에 내뿜는다. 그대 호흡을 본적이 있는가. 호흡을 멈추고 있어 보아라 어떻게 되는가. 죽는다. 호흡은 들어옴과 나감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자연은 이런 것이다. 천하를 장악하려는 것은 숨을 잔뜩 들여 마신 뒤에 이것은 내것이다라고 생각을 하고 멈추고 있는 것이다. 돌려주어라 그래야 다시 채울 수 있는 것이다. 천하를 끝까지 취하려는 자는 세상의 법칙에 따라서 끝내 천하를 취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인은 극심하고, 사치하고, 과분한 것을 취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천지와 더불어 호흡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다.


서른째 장
직역
도를 가지고 사람의 주인을 보좌하는 자는
무력으로 천하를 강제하게 하지 않는다.
그 일은 잘 돌아온다.
군대가 있는 곳에는 가시덤불이 생긴다.
대군이 일어난 뒤에는 반드시 흉년이 있다.
부득이 해서 도와줄 뿐이지 무력으로 취하지 않는다.
좋은 성과가 있어도 자랑하지 않고,
좋은 성과가 있어도 뽐내지 않고,
좋은 결과가 있어도 교만하지 않고,
좋은 결과가 있어도 단지 부득이 해서 그랬을 뿐이니
좋은 결과가 있다고 해서 강함을 드러내지 마라.
사물은 강하면 곧 늙으니 이것을 일컬어 도가 아니라 한다.
도가 아니면 일찍 끝난다.


해석
칼로 일어난 자는 칼로 망한다. 군대는 생산을 하지 않는다. 매우 소모적인 집단이다. 그 군대를 먹여 살리려면 일반 백성들이 굶주린다. 노자 시대의 군대는 사병이었다. 왕의 욕심에 따라서 움직이던 사병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군대를 움직이는 일에 국민적인 합의가 필요치 않았다. 그러나 피해는 국민들이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도로 다스리는 자는 군대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리고 군대를 일으키는 것은 부득이 해서이다. 그래서 공을 이루어도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군대가 강하다고 해서 전쟁을 자주 일으키면 그 나라가 온전할 수 있겠는가.


서른한째 장
직역
아무리 아름다운 병기라 할지라도, 상서롭지 못한 기물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싫어하므로 도에 있는 자는 처하지 않는다.
덕이 있는 사람은 평상시에 왼쪽을 귀하게 여기고,
병기를 사용함에 오른쪽을 귀하게 여긴다.
병기라는 것은 상스럽지 못한 기물이므로 덕이 있는 자의 기물이 아니다.
부득이 해서 그것을 쓸 뿐이니 고요하고 담백한 것이 제일 좋은 것이다.
이겨도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그것을 아름답게 여기는 자는 살인을 즐기는 것이다.
대저 살인을 즐기는 자는 하늘 아래 뜻을 얻을 수 없다.
좋은 일에는 왼쪽을 높게 하고, 흉사에는 오른쪽을 높였다.
부관 장군은 왼쪽에 자리잡고, 상장군은 오른쪽에 자리잡는다는
말은 상례로서 그것(전쟁)에 처하란 것이다.
사람의 무리를 죽였으면 슬퍼하고 애통하여 울 것이다.
전쟁에 이겨도, 상례에 처할 것이다.


해석
칼이 아름다운가. 그러나 전쟁터에서 칼은 사람을 죽이는 도구일 뿐이다. 핵탄두가 아름답다고 여기는가. 미사일이 날아가는 모습이 아름다운가. 그것은 사람을 죽이는 도구이다. 전쟁놀이는 재미있다. 그런 사람의 심정이 전쟁을 부른다. 총을 쥐어 본 적이 있는가. 하다 못해서 각목이라도 쥐어 본 적이 있는가. 피가 끓는다. 시비를 가리지 않고 해결하고 싶어한다. 적을 베어 영웅이 되고 싶어한다. 칼을 들면 판단이 사라진다. 오직 적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덕이 있는 사람은 칼을 씀에 담백히 하란 것이다. 칼을 들어도 자신이 칼을 들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칼에 지배를 받지 않는다.
좌가 높고 우가 낮다는 것은 고대의 의식이다. 그래서 좋은 일에는 귀한 손님을 왼쪽에 두어 그 사람을 높인다. 전쟁이 좋은 일이라면 대장을 왼쪽에 자리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오른쪽에 자리하게 한다. 이것은 흉사때 쓰는 예법이다. 따라서 고대에도 전쟁을 흉사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대장이 왼쪽에 위치한 것이다. 이것은 초상을 당한 예이다. 전쟁은 이런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이겨서 영웅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한다. 이유가 어찌되었건 간에 전쟁으로 인해 죽은 사람을 위해서 슬퍼할 줄 알아야 한다. 백명을 죽이고 천명을 죽여서 영웅이 되는 것은 자랑이 아니다. 그것을 자랑이라고 여긴다면 세상은 온통 전쟁으로 시달릴 것이다. 지금의 전쟁은 어떠한가.
전쟁에서 이겨도 상례의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 것이다.


서른둘째 장
직역
도는 늘 이름이 없다.
통나무는 비록 작으나, 하늘 아래 신하로 삼을 자가 없다.
제후와 제왕이 능히 이것을 지킨다면,
만가지 것이 스스로 질서 지워질 것이다.
하늘과 땅이 서로 합하여 단 이슬을 내리듯이,
백성들에게 령(법)을 내리지 않아도 스스로 고르게 된다.
제동을 처음 거는 것이 이름이다.
이름이 이미 생겨난 연후에는 대저 그칠 줄 알아야 한다.
그침을 알면 위태롭지 아니하다.
도가 하늘 아래 있는 것은,
온갖 계곡의 시내가 강과 바다에 흘러 들어가는 것에 비유된다.


해석
도는 이름이 없다.
노자는 계속해서 위정자들에게 충고를 하고 있다. 노자는 어떤 이유 때문에 군왕들에게 충고를 하는가. -왜 그럴까?-
통나무는 작으나 누구에게도 복속하지 않는다. 왕이라고 해서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있을 뿐이다. 그것이 자연스럽다. 모든 인간은 통나무와 같은 존재이다. 개개인은 우주적 존재이다. 그 자체로 존귀하다. 그는 누구의 신하가 되지 않아도 된다.
남을 지배하려고 한다. 그때 자신은 존귀하고 다른 사람은 비천하다. 따라서 너희들은 나를 따르라. 그러나 이것은 폭력이다. 도의 행이 아니다. 자신에게 강제되기 싫은 것은 남에게 강제하지 마라. 통나무는 통나무의 삶을 살게 놔두어라. 이것이 정도이다. 왕이 강제로 사람들을 복속시키려 하면 반발이 일어난다. 백성들을 자연스럽게 놔두어라. 그러면 자체적으로 질서가 생길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렇게 하지 못했다. 그럼 지금은 이렇게 하고 있는가. 타율에 의한 규제에 대해서 노자는 거부하고 있다. 자율에 의한 규제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다스림이다. 법으로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정도이다.
제도, 법이 만들어진다. 그것은 이름이 있고 난 후이다. 이름은 규격품이다. 나는 유재용이다. 이때 나는 더 많은 이름을 가진다. 동양철학과 학생이다. 경기도인이다. 이제 다른 사람과 구분을 짖는다. 나는 동양철학과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과 사람보다 뛰어나다. 내가 하는 학문은 최고이다. 이제 자신은 특별해 지려고 한다. 아니 자신은 특별한 존재라고 자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남은 자신에 비해서 낮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구분을 두지 마라. 이름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지 마라.
도는 바다와 같다. 그것이 낮은 계곡이건-낮은 신분이건- 높은 계곡 이름난 산에서 흘러나온 약수이건 가리지 않는다. 일단 바다에 들어오면 무슨 산 무슨 약수라는 이름은 사라진다. 바다에서 자신이 무슨 산 무슨 약수임을 고집해 보아라. 그때 그 물은 바다와 단절이 된다. 우리는 바다에 떠다니는 약수이다. 자신이 누구임을 고집한다. 그것이 이름이다. 그 이름을 버릴 때 바다 가된다. 도가 된다.


서른 셋째 장
직역
남을 아는 자는 지혜롭다 하나,
자기를 아는 자가 밝은 것이다.
남을 이기는 자가 힘세다 하나,
자기를 이기는 자가 강한 것이다.
족함을 아는 자라야 부유한 것이요,
행함을 관철하는 자가 뜻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잃지 않은 자가 오래가는 것이오,
죽어도 잊혀지지 않는 자라야 오래 사는 것이다.


해석
천원으로 충족감을 느낀다면 그는 부유한 것이다. 천억으로도 충족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가난한 것이다. 작심삼일 하지 마라. 그런 자가 뜻이 있는 것이다.


서른 넷째 장
직역
큰 도는 범람하는 물과 같아서 좌로도 우로도 갈 수 가 있다.
온갖 것은 그것에 의지해서 생겨난대도 말하지 않는다.
공이 이루어 져도 이름이 있지 않다.
온갖 것을 입히고 기르면서도 주인의 행동을 하지 않는다.
항상 바램이 없기에 작다고 이름 할 수 있다.
온갖 것이 돌아가지만 주인의 행동을 하지 않으니 가히 크다고 이름할 수 있다.
끝내 스스로 크다 하지 않으니
그러므로 능히 그 큼을 이룬다.


해석
물은 길을 따라 흐른다. 그때에 물은 좌로 가고 우로 간다. 그러나 범람하는 물은 길이 없다. 형식이 없다. 좌와 우를 구분하지 않는다. 도는 범람하는 물이다. 좌우를 구분하지 않는다.
온갖 것이 도에 의지하지만 도는 여관비를 받지 않고 재워 준다. 양육비를 청구하지 않고 키워 준다. 그리고 이렇게 되어라 저렇게 되어라 잔소리를 하지 않으면서 지켜보기만 한다. 그리고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었어도 나서지 않고 뒤에서 지켜볼 뿐이다.
욕심에 없기에, 드러내지 않기에 작게 보일 수 있다. 하찮은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온갖 것이 돌아오는 곳이지만 주인 노릇을 하지 않는다. 바다가 강물을 보고 너는 내종이니 내말에 따라서 움직여라. 너는 아직 바다의 자격이 없으니 기다려라. 바다가 강물을 막는다. 그럼 바다가 바다로 존재하는가. 바다가 큰 이유는 강물을 막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크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교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럼 우주는 비교할 것이 있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크다고 한다. 넓다고 한다. 진정으로 큰 것은 비교할 필요도 자랑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서른 다섯째 장
직역
큰 이미지를 잡으면 천하을 움직일 수가 있다.
움직여도 해가 없으니 편안하고, 평등하고, 안락하다.
즐거운 음악과 먹이는 지나가는 사람을 멈추게 한다.
도가 입에서 나오면 담백하여 그 맛이 없다.
보아도 만족하게 볼 수 없고,
들어도 만족하게 들을 수 없으나,
그것을 사용해도 궁하지 않는다.


해석
천하를 장악하고 싶은가. 그럼 큰 이미지를 잡아라. 이미지는 무엇인가. 분화되기 전의 모호한 그 무엇이다. 즉 구분되어 있지 않음을 뜻한다. 큰 이미지는 도의 다른 표현이다. 천하를 얻고자 한다면 도를 잡아라. 도를 얻으면 천하를 움직일 수 있다. 그러나 천하를 움직여도 남들에게 해가 없다. 그것은 왜 그런가. 도로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칼과 돈으로 천하를 움직이면 어딘가는 삐그덕 한다. 불만이 쌓일 수 있다. 그러나 도로 움직이면 천하인이 편안하고 태평할 것이다.
사람은 음악과 음식에 대해서는 민감하다. 자극적이고 맛이 있고, 취미에 맞는 음악이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빠져든다. 도는 어떠한가. 누가 도를 말한다. 그 도의 말은 맛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지나가는 여인의 다리에는 관심이 있지만, 도에는 관심이 없다. 더욱이 도는 감각으로 완전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고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만족하게 보거나 들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귀와 눈으로도 어느 정도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만족한 것은 아니다. 도 그 자체는 아니다. 코끼리의 사진을 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코끼리가 아니다. 사진일 뿐이다. 하지만 그 사진을 통해서 어느 정도 알 수는 있다. 노자가 말을 부정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자 어떤 사람이 코끼리의 사진을 봤다. 그는 코끼리의 사진만 보았다. 그래서 실제로 코끼리를 보고 싶어서 아프리카에 갔다. 거기서 그는 거대한 코끼리를 보았다. 그러자 코끼리를 총으로 쏴 죽였다. 그리고 돌아와서 이야기했다.
“코끼리는 아프리카에 있지도 않아. 그곳에는 엄청나게 큰 괴물만 있어. 이 사진 속에 있던 이렇게 작은 코끼리는 없었다. 아마 그놈이 다 잡아먹었을 것이다.”
웃기는가. 말 같지도 않은가. 아니면 무엇인가 생각을 하게 하는가.
도덕경은 도덕경의 한문을 외우고 자구를 외우면서 남에게 자랑하기 위한 경전이 아니다. 자신의 삶과 의식이 바뀌어야 하는 경이다. 도덕경을 줄줄 외우면서 자랑을 한다. 나는 노자에 대해서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는 사진 속의 코끼리를 가지고 그 부분 부분을 나누어 설명을 한다. 그러나 정작 살아 있는 코끼리를 만나면 도망을 간다. 왜 너무 크니까. 자신이 알고있는데로 초식동물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는가. 도덕경을 외우는 일은 쉬운 일이다. 오천여 자밖에 안된다. 그러나 도덕경의 내용대로 사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자기의 변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노자를 마셔라. 그래서 자신의 삶이 되게 하라. 코끼리의 사진만 보고 그 사진 속의 코끼리만 들여다보지 마라. 코끼리에 대한 관심이 있다면 아프리카에 가서 코끼리를 타 보아라. 그러나 우리는 지금 사진도 없이 코끼리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다. 아프리카는 생각하지도 않는다. 남에게서 들은 코끼리에 대한 의미 없는 이야기만 주절거린다. 그리고 자신은 코끼리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을 한다. 진리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을 한다.
보고 듣는 것은 이차적이다. 관심이 촉발되었으면 도에 흡입이 되어라. 지식으로 알지 말고 삶으로 구현하라.


서른 여섯째 장
직역
장차 그것을 거둘려고 바란다면 반드시 먼저 길러 주어라.
장차 그것을 약하게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강하게 해주어라.
장차 그것을 폐할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그것을 흥하게 해주어라.
장차 그것을 뺏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그것을 주어라.
이것을 일컬어 미명3)이라고 하는 것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긴다.
물고기는 연못을 탈출해서는 안되니,
나라의 이로운 기물은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된다.


@@해석 부족하다.
농사는 자연과의 대화이다. 거름을 주고 밭을 잘 일러주어야 농작물이 잘 자란다. 농작물이 잘 자라야 거둘 것이 있는 것이다.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스물 아홉째 장을 다시 보기 바란다. 자연은 앞서기도 하고 뒤따르기도 한다. 한없이 강해지면 결국 스스로 붕괴하기 마련이다. 부유해지면 가난해 지기 마련이다.
이것이 도에 이르는 첫출발 점이다. 그래서 처세술로는 쓸 수가 있다. 그러나 대도는 아니다.


서른 일곱째 장
직역
도는 늘 함이 없으나 하지 않음이 없다.
제후와 제왕이 능히 그것을 지킨다면, 온갖 것이 장차 스스로 변화할 것이다.
변화시키려고 바래서 조작을 한다면, 나는 장차 이름이 없는 통나무로 진정시킬 것이다.
이름이 없는 통나무는 대저 욕망 또한 없다.
바램이 없는 것으로 고요하면, 천하가 장차 스스로 안정될 것이다.


해석
도는 자연스럽게 할뿐이다. 인간이 자연의 법도를 잘 지킨다면 온갖 것이 스스로 정화될 것이다. 우리는 지구를 오염시켰다. 그것은 자연의 법도에 인간이 반발을 했기 때문이다. 자연의 법도에 따른다면 자연은 스스로 정화를 시킬 수 있다. 스스로 변화되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그것을 막고 있다. 노자가 살던 시대에는 권력이 왕에게 있었다. 그래서 제후와 제왕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한 개인이 무엇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정치 지도자에게만 책임을 물을 때가 아니다. 전 지구적 책임이 각자 개인에게 있는 것이다. 이제는 누가 통나무로 때려눕힐 사람도 없다. 모두 통나무를 들고 서로가 서로를 경계해야 한다. 그 첫출발은 자기 자신이다. 욕망에 들 끌지 않고 고요히 있으면 된다. 그것으로 천하가 스스로 안정이 된다. 서로 자기가 아니면 안된다고 나서지 마라. 스스로 자기부터 변화한다면 천하는 자연히 안정이 된다. 제도가 문제가 아니다. 이제는 전 지구적 각성이 필요할 때이다.
무위에 대해서는 덕경에서 자세히 논의하겠다.
이제 노자의 도경이 끝이 났다. 후회가 든다. 직역은 김용옥씨의 틀을 벗어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해석은 독자적인 설명을 하려고 했지만 많은 부분 라즈니쉬의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쁘지는 않다. 그들이 말한것중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들의 말로도 설명이 가능한데 굳이 다른 말을 쓸 필요가 없다는 자기 변명도 해본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미진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내식대로 썼다. 이 글을 읽는 분들께서도 노자를 사랑한다면 자기 식대로 해석하기를 바란다.


쉬어가는 글
나그네
이야기의 무대는 고대의 사막의 한 오아시스이다. 이 오아시는 사방 수천리가 모래로 둘려 쌓여 있어서 아무도 찾는 이가 없는 곳이다. 그러나 가끔은 수대에 걸처서 한 두번 정도는 사람들이 지나간다. 물건을 사고 파는 대상들이거나, 정복을 위해서 떠나는 병사들이 지나치곤 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도 평생에 몇번 보지 못하는 일이다. 이런 마을에 나그네가 살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밖에 대한 꿈을 꾸고 있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언제인가 한번은 밖으로 나가보리라 생각을 하고 산다. 그러나 막상 밖으로 나가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 두명 정도는 밖으로 나가 보았지만 곧 머리를 설래 설래 흔들며 돌아온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사막은 너무 넓어서 그 끝이 보이지 않아. 나가지 않는 게 좋을 꺼야, 나도 간신히 살아서 돌아 왔어”
나그네는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매양 걱정을 하고는 했다. 자신도 나가 보고 싶었지만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바람결에 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꿈이었다고 생각이 든다. 한명의 노인이 어린 아이들을 모아 놓고 바다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 이세상의 끝에는 이 사막보다도 넓은 곳이 있다. 그곳에는 물이 가득 차 있는데 그 물은 맛이 이상하단다. 어린아이 하나가 노인에게 물었다.
“물이 맛이 이상하다니요. 물이 어떻게 맛이 이상할 수가 있어요”
“허허허 그건 나도 잘 모른단다. 단지 언제 부터인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란다.”
노인은 어린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네가 어른이 되면 한번 가보렴. 너는 갈 수 있을 꺼야”
“너는 갈 수 있을 꺼야”
나그네가 눈을 뜬 것은 새벽의 미명이 밝아 올 때였다. 사람들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고, 마을은 고요했다. 나그네는 물주머니와 낙타를 데려다가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였다. 그가 낙타에 올랐을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 왔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들은 사막으로 떠나는 사람들을 말리러 오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불확실한 사막보다는 편안한 이곳의 삶을 저버리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그네의 결심이 확고한 것을 알자 사람들은 그를 보내 주었다. 몇몇의 젊은이들은 그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도 언제인가는 저렇게 한번 나가보리라 생각을 하는 듯이. 몇몇의 노인들은 나그네에게 사막에서의 생존을 일러 주었다. 나그네는 마을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낙타를 타고 사막으로 나갔다.
며칠을 갓을까. 나그네는 방향을 잡지 않고 낙타가 가는 곳으로 놔두었다. 낙타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의 샘물도 찾아내는 동물이었다. 몇번이나 낙타의 도움으로 샘물을 찾아서 먹을 수 있었다. 그곳의 사람들은 나그네를 경계했지만 나그네가 바다를 찾아 떠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먹을 것과 물을 기꺼이 내주었다. 그렇게 길을 떠난지 몇달이 지났다. 나그네는 떠도는 풍문을 따라서 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은 하늘의 지붕으로 일컬어 지는 곳이었다. 너무도 높은 산이 있어서 그곳에 올라가면 하늘 아래가 다 보인다는 것이었다. 나그네는 그 말을 믿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산이 보이는 곳까지 다달았을때 나그네는 벅차오르는 희열로 몸을 주체 할 수 없었다. 이제 바다를 찾을 수 있겠구나. 나그네는 낙타를 빨리 몰고 나갔다. 그러나 산은 점점 멀어져 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달을 산의 윤곽만 �아서 갔다. 그리고 드디어 산의 가장자리에 다달을 수 있었다. 그런데 낙타가 산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나그네는 낙타를 보면서 고민에 빠졌다. 이 산을 넘고나서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이 상황에서 낙타를 두고 갈 수 는 없었다. 그러나 데리고 갈 수 도 없었다. 산은 가파라서 낙타를 업고 갈 수도 없었다. 결국 나그네는 낙타를 풀어 놓았다. 다른 여행객이 있다면 그 낙타를 타고 사막을 건너리라 생각을 했다. 산 밑은 평평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러나 산 정상을 향해 갈 수 록 산은 가파라지고 몸이 얼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 왔다. 나그네는 잠시 주저했다. 산의 정상은 운무에 가려 보이지도 않았고, 바람은 점점 더 차가워저 오고 있었다. 어쩌면 이곳에서 죽을 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내려 갈까 생각을 했지만, 내려가도 이제는 갈데가 없었다. 혼자서 드넓은 사막을 걸어서 돌아 갈수는 없는 것이었다. 나그네는 입술을 깨물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그네가 산고봉에 섯을때는 새벽의 별이 지고 있을 때였다. 어둠이 걷히면서, 안개가 걷히면서 산아래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주 멀리까지. 그곳에는 파아란 물결이 있었다. 아니 물과는 조금 달랐다. 나그네는 처음보는 풍경이어서 저곳에는 바다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산을 맨발로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피로도 고생도 모두 산 정상에 내버려두고 달리는 것이었다. 그는 한 곳만 바라보고 달렸기 때문에 주위에 양떼가 있는지도 몰랐다. 한달음에 산을 내려온 나그네는 숲의 가장자리에 이르렀다. 자신의 키보다 더 큰 나무들이 빼곡이 차 있었다. 두리번 거리던 나그네는 지나가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몇몇이 떼지어 다니고 있었다. 헌데 그들은 각기 공통적인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허리에 붉은 허리띠를 매고 있었다. 그들은 나그네를 이상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자기들끼리 쑥덕이더니 한 곳으로 총총히 달려갔다. 나그네는 길을 따라 앞으로 나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허리에 푸른 띠를 맨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도 나그네를 보자 신기한 듯이 바라보며 총총히 사라졌다. 나그네는 그중 한 사람을 불럿지만 아무도 뒤돌아 보지 않았다. 나그네가 성 문앞에 이르자 성문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나와서 나그네를 보고 있었다. 그들은 네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허리에 붉은 띠를 맨 사람들이 두패로 나뉘어 있었고, 허리에 푸를 띠를 맨 무리가 역시 두패로 나뉘어 있었다. 그들은 나그네가 다가가자 한 걸음씩 물러났다. 그리고 나그네가 한 걸음 물러나면 자신들이 한 걸음 다가 왔다.
“나는 바다를 찾아 떠나는 여행자 입니다. 부디 그 길을 아는 분이 있으면 길을 일러 주십시요”
그러나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군중속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그대는 잠시 기다리시오. 곧 현인들께서 나오실 것이오. 그 분들은 바다로 가는 길을 알고 계시오.”
“정말입니까.”
“그렇소.”
그러자 다른 세 부류에서 야유의 소리가 터저 나왔다. 그리고 잠시뒤에 네명의 화려한 복장을 한 노인들이 나왔다. 붉은 허리띠를 맨 두 노인과 푸른 허리띠를 맨 두 노인이었다. 그들은 서로 간격을 두고 앉았다. 그러자 뒤에 있던 군중들도 무리별로 간격을 두고 앉았다. 맨 좌측의 노인이 입을 열었다.
“그대는 바다를 찾아서 떠나는 여행자라고 들었소. 사실이오”
“그렇습니다. 바다로 가는 길을 아시면 일러 주십시요. 제가 사는 곳에는 바다가 무엇인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바다는 물이 아주 많이 모여 있는 곳이오. 그리고 그 맛은 이곳의 물과는 틀리오. 이곳에서 사는 사람들중에는 바다를 같다가 온 분들이 계시오. 우리는 그분들의 동상을 세우고 그분들의 뜻을 기리고 있소. 그리고 당신같은 여행자들을 위해서 그 분께서는 지도를 남기셨소”
노인은 품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갈대를 역어서 만든 책이었다. 너무 낡아서 만지면 곧 부스러질 것 같았다. 나그네는 반짝이는 눈으로 지도를 바라보았다. 지도에는 무수한 산과 강이 그려져 있었고 대충선이 그어져 있었다. 나그네는 그것을 보고 기가 질려 버렸다.
“저렇게 먼 거리라면 지도가 있더라도 길을 잊어 먹기가 쉽겠군요”
그러자 같이 푸른 띠를 멘 노인이 품에서 지도를 꺼냈다. 이번것은 조금 덜 낡아 있었다.
“이 지도를 보게 저것 보다는 쉽게 나와있네, 지도의 전문가가 저것을 보고 그린 것이지. 우리는 이것때문에 오래동안 싸워왔네. 우리도 바다를 찾아 떠나려는 여행자들이 많이 있지만, 어느 것이 확실한 지도인지 결론을 내리지 못했네. 그러나 나는 이것이 확실한 지도임을 믿네”
나그네는 두개의 지도를 번갈아 보았다. 두 지도는 별 차이가 없어보였다. 그러나 확실히 후자가 세세히 그려 놓고 있었다. 이번에는 붉은 띠를 두른 노인이 지도를 꺼냈다.
“우리는 북쪽에서 온 여행자들이라네. 우리 마을에는 이 지도가 전해져 오고 있었지 그래서 언제가 바다를 찾아 여행하리라고 다짐을 하고 있었네. 그리고 마을 사람중 몇몇이 바다를 찾아 길을 떠나서 이곳까지 왔네. 그런데 여기에 있는 지도는 우리 마을의 지도와는 상반이 되네. 그래서 우리는 갈피를 잡지 못하였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진정으로 바다를 가리키는 지도라고 생각하네.”
나그네는 그 지도를 바라보았다. 그 지도는 앞의 두 지도와는 아주 상반이 되었다. 앞의 지도가 남쪽을 가리키고 있다면 그 지도는 북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그네는 혼란 스러웠다. 그리고 마지막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빙긋이 웃으며 지도를 건네 주었다.
“이걸 가지고 가게. 나는 이제 이 지도를 따라 여행하기에는 너무 늙엇네. 그러니 이 지도를 가지고 자네가 가게.”
“노인장께서는 누구에게나 이 지도를 주십니까”
“그렇네. 저렇게 소중히 간직할것이 무엇이 있나. 나는 내가 얻은 지도를 다시 많은 종이에 옮겨 그렸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지도를 하나씩 가지고 있네.”
“그럼 왜 저들은 길을 떠나지 않지요”
“저들은 지금 혹시나 하고 있네. 이 지도가 아니면 어떻게 하는가. 그들은 우리의 논쟁이 끝난다면 마지막 남는 지도를 가지고 길을 떠날걸세”
나그네는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럼 언제쯤 논쟁이 끝이 날것 같습니까”
“그건 우리도 모르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 논쟁은 있어왔네. 그리고 자네가 원한다면 우리중 한 곳에 들어가서 논쟁이 끝이 날때까지 지켜볼 수 있네”
나그네는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고향으로 돌아가렵니다. 여기서 논쟁이 끝날때까지 기다리기 보다는 차라리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자네는 바다에 갈 수 있네. 조금만 기다려 보게. 우리의 논쟁이 곧 끝날 테니까”
나그네는 고개를 저었다.
“말씀은 고맙지만 저는 돌아가렵니다.”
나그네는 축처진 어깨를 뒤로하고 다시 산으로 향했다. 아주 천천히 산을 올라갔다. 급할 것이 없었다. 산들바람이 머리를 시원하게 해주었다. 산중턱에 다다르자 목이 마르는 것이 느껴왔다. 그러고 보니 하룻동안 물한모금 마시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그네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주위에는 양떼가 있었고, 그 양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양치기 노인이 졸고 있었다. 나그네는 그 노인에게 다가갔다.
“노인장께서는 언제 부터 이곳에 계셨읍니까”
“나는 줄곳 이곳에 있었네”
나그네는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어제 아침에 이곳에 왔었는데 아무것도 없었는데요”
“하하하 나는 자네를 보았다네, 자네는 너무도 빨리 산을 내려가더군, 나는 혹시나 자네가 다칠까봐 걱정이 �는데 이렇게 무사한 것을 보니 기쁘네”
나그네는 고개를 끄떡였다.
“물을 좀 얻어 먹을 수 있을까요”
“양젖이 있네. �챦겠나”
“예”
나그네는 양젖을 먹고나서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었다. 양치기 노인이 물었다.
“자네는 무슨 이유로 그리도 급히 산 아래로 뛰어 갔는가”
“바다를 찾아 여행을 떠났었습니다. 그래서 사막을 건너고 이 산을 넘어 왔습니다. 그래서 저 숲과 도시를 보게 되었지요. 저곳에 가면 바다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 있을 꺼라는 생각에 급히 달려갔습니다.”
“그곳에는 바다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 있던가”
“모르겠습니다. 바다를 같다고 온 사람들이 남겼다는 지도를 보니 모두 제각각이었습니다.”
“바다는 어떤 곧인가”
“저도 잘 모릅니다. 듣기로는 물이 아주 많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맛이 아주 이상하다고 합니다.”
노인은 고개를 끄떡였다.
“흠 물이 많이 모인 곳이라”
노인은 가죽주머니에든 양젓을 �아 부었다. 그러자 나그네가 휘둥그레 놀라며 노인을 제지했다.
“노인장, 양젖이 다 흐릅니다.”
“허허허. 양젖이 흐르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네. 보게”
양젖은 산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곧 멈추어 버렸다. 나그네는 고개를 갸웃했다.
“물은 이와 같이 아래로 흐르네. 이 산에 있다보니 그것 하나는 알게 되더군. 바다라는 곳이 물이 아주 많이 모인 곳이라면 아마도 많은 물을 필요로 할걸세. 저 샘물을 보게”
노인이 가리킨 곳은 양떼의 가운데에 솟아 오르는 샘물이었다. 그곳에서는 조금씩 물이 아래로 넘쳐 흐르고 있었다.
“저물도 언제가는 바다로 흘러가겠지. 저물을 따라가다 보면 바다가 나올거라는 생각이 드네. 바다가 그토록 크다면 저 작은 물이 들어가는 것을 막지는 않을 걸세”
나그네는 무언가 느끼는 바가 있어서 노인에게 총총히 작별을 고하고 샘물을 따라 갔다. 그뒤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흐르는 물을 따라가게. 먹을 수 있는 물을 따라가게. 고인 물은 먹을 수 없으니. 먹을 수 없는 물은 흐르는 물이 아니네”
나그네는 시냇물을 따라 여행하면서 많은 도시를 지나쳤다. 그곳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각기 지도를 들고 그를 맞이 했다. 나그네의 얼굴에는 확신이 가득차 있었고, 낡고 산발한 머리가 지저분해 보였지만 그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그걸 본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가 바다에 도달하면 자신들의 마을에도 들러달라고 하면서 양식들을 건네주었다. 그렇게 샘물을 따라가기를 몇년여. 샘물은 냇물이 되고, 냇물은 강물이 되었다. 그리고 나그네는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까지 다다랐다. 그곳은 사막보다도 더 넓은 곳이었다. 그 넓은 곳에 가득히 물이 차 있었고, 하늘의 태양마저도 바다속에서 나오고 있었다. 나그네는 바닷물로 첨벙첨벙들어갔다. 맛이 이상했다. 먹을 수 없는 물이었다. 그러나 그 물은 흐르고 있었다. 그 안에는 물고기들이 가득차 있었다. 나그네는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물이 목구멍으로 마구 마구 들어갔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나그네가 눈을 떳을때 자신이 딱딱하고 뜨거운 곳 위에 있다는 것을 느꼈다. 우욱 입에서 무언가 마구 �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이걸 먹게나”
나그네는 까칠한 손이 건네주는 걸 먹었다. 무슨 풀 같았는데 처음 먹어보는 것이었다. 그것을 우물우물먹자 속이 좀 �챦아 지는 것 같았다. 노인은 무슨 실로 된 것을 손질하고 있었다.
“노인장 그건 뭡니까.”
“물고기를 잡는 걸세. 그물이라고 하지. 헌데 사람이 잡힐 줄은 누가 알았겠나. 허허허 자네도 바다를 찾아 온 사람인가”
“그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늙은 어부들에게는 전해저 내려오는 전설이 있네. 가끔 가다가 바다에 빠진 사람들을 건지곤 한 어부들이 있지. 그들은 대부분 바다를 찾아 온 여행자들이라네. 내가 그 여행자를 낚는 행운을 잡을 줄이야. 허허허 이제 손주녀석에게 해 줄 이야기가 생겼네.”
나그네는 고개를 끄떡였다.
“이제는 어떻게 할 건가. 이곳에 남는 사람들도 있고, 다시 떠나는 사람들도 있네”
“돌아갈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 바다물을 가지고 갈 방법이 없습니까”
“어디다 담아 갈 생각인가. 아마도 먼 길을 왔을텐데. 물은 곧 증발해 버리네. 바다가 큰 이유는 강물들이 다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지만 저렇게 들어 온 물들이 곧 하늘로 올라가기 때문에 큰 것이네”
“방법이 없겠습니까”
“한가지 있기는 있네”
노인은 나그네를 데리고 한 곳으로 같다. 그곳에는 사각형으로된 곳에 바닷물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바닥에는 하얀 가루가 깔려 있었다. 노인은 그곳에서 하얀 가루를 푸대에 담아 주었다.
“이걸 물에다 타면 바다 맛이 날걸세. 이곳에서는 이걸로 음식을 해먹지. 많이 너서 먹으면 못먹네만 조금만 넣으면 아주 맛이 좋다네”
나그네는 그곳에서 며칠 머무르면서 소금이라는 것을 가지고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도시 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그가 가지고 온 소금의 맛을 보기 위해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렇게 그는 처음 도착한 도시까지 왔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소문이 먼저 이 도시에 온 것이었다. 나그네는 이제 한 웅큼 남은 소금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사람들은 그의 주변에 모여들어 그가 들려주는 바다에 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소금물의 맛을 보았다. 군중들을 헤치고 네명의 노인이 다가왔다. 그리고 네 노인은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서 바다게 가게 되었소”
나그네는 자신이 냇물을 따라 간것과 바다까기 가면서 보았던 풍경들과 도시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노인들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면전에서 물러나와 자신들끼리 쑥덕거렸다.
“그는 바다에 가는 길을 모르오”
“그렇소. 그가 말한 것은 우리들의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는 길이오.”
“그러나 그는 어느 이상한 곳에는 간 것같소”
“기다립시다. 그는 곧 떠날 것이오. 사람들은 다시 우리들의 지도를 필요로 할 것이오. 그때까지만 기다립시다.”
네 노인은 서로 마주 보면서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 지도를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서 산으로 갔다. 각기 자신의 스승들이 물려준 지도를 소중히 간직하고서.

덕경
서른 여덟째 장
직역
윗덕은 덕이 아니다. 이런 까닭에 덕이 있다.
아랫덕은 덕을 잃지 않으려 한다. 이런 까닭에 덕이 없다.
윗덕은 함이 없고, 무엇을 하려 함도 없다.
아랫덕은 함이 있고, 무엇을 하려 한다.
높은 어짐은 함이 있으되 무엇을 하려 함이 없다.
높은 옳음은 함이 있으면서 무엇을 하려 한다.
높은 예는 함이 있으면서 그것에 응함이 없으면, 즉 팔꿈치를 잡아 내동이 친다.
그러므로 도를 잃어버린 이후에 덕이 있고,
덕을 잃어버린 뒤에 어짐이 있고,
어짐을 잃어버린 뒤에 예법이 있다.
무릇 예법이라는 것은 가슴속의 믿음이 엷은 것이오, 어지러움의 머리이다.
미리 안다는 것은 도의 것 모습의 화려함이고, 어리석음의 시작이다.
이런 까닭에 큰 사람은 그 두터움에 처하지 그 엷음에 살지 않는다.
그 내실에 처하지, 그 화려함에 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해석
덕이라는 것은 체득을 가리킨다. 몸에 완전히 숙달이 되어서 버리고자 하여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노자의 도경이 그러해야 하는 바를 설명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면 덕경은 세세한 부분을 설명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해야 하며, 어떤 것이 체득인지 설명하고 있다.
윗덕은 자신이 덕스럽다고 여기지 않는다. 덕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자신이 덕스럽다고 생각을 한다고 해서 자신이 덕스러운 것인가. 윗덕은 덕과 분리가 되어 있지 않다. 몸으로 체득이 되어 있어서 덕 그 자체가 된다. 그러나 아랫덕은 덕과 분리가 되어 있다. 그래서 가지고 있을려고 하고 잃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덕이 무엇인가. 덕은 베품이다. 줌이다. 윗덕은 덕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내가 덕스러워야 한다. 덕을 잃으면 어쩌지. 그는 남을 의식을 한다. 덕스러워 보이려고 노력을 한다. 그것은 자신이 덕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불우 이웃돕기에 천만원을 냈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고 남들이 자신을 덕스럽다고 한다. 그래서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닌다. 그리고 그 이미지를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 매년 돈을 낸다. 그러나 그는 불우 이웃돕기가 목적이 아니다. 자신의 이미지를 굳히기 위해서 이다. 남들에게 자신이 덕스러운 사람이라고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그럼 이 사람이 진정으로 덕스러운가.
똑같이 천만원을 낸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이 덕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불우 이웃을 돕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어느 정도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도운 것뿐이다. 그는 자신이 덕스럽다고 불릴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윗덕이다.
지금은 아랫덕이라도 행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세상이다.
무위라는 것은 함이 없다는 의미다. 풀어쓰자면 목적 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비가 내린다. 그래서 농작물이 잘 자란다. 그런데 비를 뿌리는 하늘과 땅은 농작물이 잘 자라기를 바라며 비를 뿌리는가. 아니다. 목적의식이 없다. 그래서 농작물이 잘 자라고 만물이 번성해도 소유하지 않는 것이다.
無以爲라는 것은 목표를 가지고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어떤 제도나 법칙을 가지고 다스리지 않는다. 스스로 자라나게 놔둔다. 그 개체의 사물의 독립성과 존엄성을 인정을 해준다. 사자는 사자의 길이 있고 영양은 영양의 길이 있다. 자연은 사자가 영양을 잡아 먹는 것에 대해 불평을 하지 않는다. 사자를 폭군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자의 길이다. 자연은 사자나 영양이나 똑같이 대한다. 그냥 스스로 살게 놔둔다. 자연은 생명체에 간섭을 하지 않는다.
하덕이 행한다 함은 목적의식을 가진다는 것이다. 수로를 통해서 논에 물을 댄다. 작물이 자란다. 그 작물은 자신이 키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소유한다. 그것은 자신의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물은 누구의 것인가. 땅은 누구의 것인가. 모두 자연에게서 빌어 쓰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잊었다. 그래서 하덕에 처해 있는 것이다. 사자를 폭군으로 규정하고 악으로 규정하는 것은 인간의 눈에서 볼 때이다. 그리고 영양을 위해서 사자를 잡아죽인다. 재미를 위해 죽이는 경우가 허다하나 그들은 명분을 내세운다. 연약한 영양을 위해서라고, 그러나 사자가 사라지면 영양이 초지를 잠식해 들어간다. 그때 사람들은 영양의 사냥에 나선다. 초지를 위해서 나선다고 말을 한다. 그리고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 영양을 죽인다고 한다. 왜 영양은 이제 너무 불어나서 자신들의 농작물을 망치기 때문이다.
높은 어짐은 함이 있지만 목표를 가지고 하지 않는다. 목적의식은 있다. 그러나 다른 것들이 그렇게 할 때까지 기다린다. 스스로 행할 뿐이다. 그뿐이다. 남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지켜볼 뿐이다.
높은 옳음은 옳다 그르다의 판단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 길을 따르라고 선전을 한다. 그러나 강제하지는 않는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길이 옳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면서 몸으로 보여준다.
높은 예법은 이제 제도가 된다. 上義까지는 제도가 아니다. 그러나 예법에 와서는 제도가 된다. 규범화된다. 그 길을 따르지 않으면 제재를 가한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길을 따르도록 강요한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의를 잃버리고 어짐을 잃어버리고 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덕스럽지 못하게 행동하기 때문에 규범이 필요하다고 한다.
규범은 어떻게 해서 생겼는가. 그것은 서로 믿지 못해서 생긴 것이다. 저 사람이 나를 해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온 것이다. 왜 다른 사람이 나를 해치는가. 그것은 그 사람이 자신의 길을 나에게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럼 자신은 그렇지 아니한가. 자신도 남에게 자신의 길을 강요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강요한다. 왜 서로가 서로에게 강요를 하는가. 그것은 소유하려 하기 때문이다.이것은 내것이다. 이런 생각이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자신이 나무를 키우고 완성을 해도 가지지 않는다면 싸움은 잃어 나지 않는다. 그것이 상덕이다. 그러나 지금은 예마저 사라져 가고 있다. 이제 서로가 서로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법이 생긴 것이다.
미리 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정보에 지식에 밝다는 것이다. 땅 투기를 하려면 시대를 앞서가야 한다. 먼저 좋은 땅을 선점한다. 그리고 자신의 것이라고 선을 긋는다. 개미가 탁자 위에 선을 긋고 자신의 땅이라고 뻐기는 것과 같이,
그러므로 큰 사람은 내실을 중요시한다. 화려함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예는 형식이다. 그러나 덕과 어짐과 의는 형식을 살려서 되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형식을 취하기보다는 실질을 취한다. 그러나 지금은 형식도 아쉬운 시대가 되었다.


서른 아홉째 장
직역
옛날에 하나를 얻었다는 것은 이렇다.
하늘은 하나를 얻어서 맑고
땅은 하나를 얻어서 편안하고,
신은 하나를 얻어서 영묘하고,
골짜기는 하나를 얻어서 차고,
온갖 것은 하나를 얻어서 나고,
제후와 제왕은 하나를 얻어서 천하를 바르게 한다.
이것은 그것이(하나가) 도달한 것이다.
하늘이 하나로써 맑음이 없으면 장차 찢어질까 두렵다.
땅에 하나로써 편안함이 없으면 장차 쪼개질까 두렵다.
신이 하나로써 영묘하지 않으면 장차 가물까 두렵다.
골짜기가 하나로써 차 있지 않으면 장차 다할까 두렵다.
온갖 것이 나지 않으면 장차 멸망할까 두렵다.
제후와 제왕에 고귀함이 없다면 장차 실족할 까 두렵다.
그러므로 귀함은 천함을 근본으로 삼고,
높음은 낮음을 기초로 한다.
이런 까닭에 제후와 제왕은 스스로 일컬어 고독하고, 부족하고, 곡식이 부족하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천함을 뿌리고 삼는 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자주 가마를 타는 것은 가마를 안 타는 것만 못하다.
녹녹4)하여 옥석과 같기를 바라지 말고, 낙낙하여 보석 같기를 바라지 마라.


해석
得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자신을 비운다는 것이다. 컵에 물이 차 있으면 더 이상 물을 담을 수 없다. 그 컵을 비워야 물을 채운다. 얻음은 줌이다. 내가 얻은 만큼 남에게 주어야 한다. 그대는 호흡을 관찰해 보아라. 그럼 들어온 만큼 나간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컵을 비우지 않고 새 물을 채울 수 있겠는가. 얻음은 얻음과 동시에 줌이다. 두 가지는 다르지 않다. 줌이 바로 얻음이다. 자신을 비우고 하나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린다. 그리고 하나가 들어오는 순간 자신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둘이 되면 하나가 아니다. 체득이 되어야 하나인 것이다.
其致之이 말은 깊이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 하나가 도달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하나는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늘과 땅과 신은 하나가 도달할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하나는 기다리다 보면 어느새 자신과 같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얻는 다는 것은 이미 대상이 있다는 것이다. 그때에는 두개가 존재한다. 나와 대상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라는 것은 자연과 내가 합일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의 물방울이 바다를 가지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하는가. 바가지로 퍼담으면 되는가. 아니다 바다 속에 녹아 들어가야 한다. 그럼 자신이 바다와 하나가 된다. 그러나 취한 다는 것은 이슬방울이 바닷물을 바가지로 담아서 자신의 주머니에 집어넣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물이 하나 됨을 잃는다면, 자기를 고집 한다면 분열되고 짜개진다. 강물이 바닷가에 이르러 “나는 강물이다. 바닷물이 될 수 없다.”고 하면서 발을 멈춘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산이 평야를 보고 자신이 높이 있다고 평야를 짤라 내면 어찌되는가. 하늘과 땅이 서로 자기의 영역을 챙기기 위해 분열된다면 이와 같이된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노자는 자연이 하나가 안되는 것은 근심하지 않는다. 인간들이 서로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연의 비유를 들어 하나를 주장한 것이다.
하나의 생명체가 태어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다른 하나가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 그래야 새 생명이 태어난다. 모두가 돌아가기를 거부한다면 생명체가 태어날 수가 없다. 세상은 질량 보존의 법칙에 의해서 질서 지워져 있다. 다른 개체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한 개의 개체가, 혹은 수십억개의 개체가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모두들 자신을 고집 한다면 생명체는 태어날 수 없다. 그러나 자신도 영원히 존재할 수는 없다.
제후와 제왕은 다스리는 백성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백성들을 소유하고 마음대로 하려 해서는 안된다. 백성들과 제후 제왕이 떨어져 있으면 분열되고 점점 갈라진다. 제후와 제왕이 백성들과 하나가 되는 것은 매우 쉽다. 높은 산을 올라가기는 어렵지만 내려가기는 쉬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모든 사람이 정상에 서려 하기 때문에 내려가는 것은 더욱 쉽다. 올라가기는 길에는 경쟁자가 너무 많기 때문에 어렵지만 누가 내려가고자 한다면 서로 길을 비켜 준다. 왜냐하면 한 명이 내려가면 자신이 그 만큼 올라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후와 제왕은 스스로 다른 사람의 디딤돌이 되고자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노자의 꿈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꿈이기도 하다. 그러나 수천년이 지났지만 인류는 아직도 노자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노자는 아직도 꿈만 꾸고 있을 뿐이다. 노자를 깨우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다.
제후와 제왕은 모든 것을 나게 하고 편안하게 하는 존재이어야 한다. 그것은 일자가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제후와 제왕은 고귀해져야 한다. 고귀해 지기 위해서는 천해져야 한다. 그래서 왕은 자신을 일컬어 과인-부족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제후와 제왕은 자신이 왕이라는 것을 드러내지 마라. 옥과 보석처럼 알려지기를 바라지 마라. 일자와 같이하라.


마흔째 장
직역
되돌아가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다.
약한 것이 도의 쓰임이다.
하늘 아래 온갖 것이 있음에서 생겼는데,
있음은 없음에서 생겼다.


해석
되돌아가는 것. 그럼 어디로 되돌아간다는 것인가. 근본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출발점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럼 시간을 거꾸로 돌린다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원을 그려보자 출발점이 있고 선은 긴 여행을 통해서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다시 새로운 출발을 한다. 다시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해서는 되돌아 가야 한다. 새로 태어나야 한다. 물 컵에 물을 가득 채웠으면 비어야 한다. 그래야 다시 물을 채울 수 있는 것이다. 배움의 태도에 있어서 이러한 자세는 꼭 필요하다. 어떤 사상을 배웠다. 그래서 그 사상의 극점에 다다랐다. 학자로서의 명예와 부귀를 얻었다. 그래서 그 극점에 멈춘다면 그는 고정화되고 더 클 수가 없다. 이제 그는 죽은 것이다. 더 커 나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배운 것을 버려야 한다. 그것을 고집해서는 안된다. 글을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 같이 다른 상극의 사상도 배울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그것이 도이다. 극에 이르면 다시 반대로 향하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다. 나무가 자란다. 그래서 하나의 거목이 되었다. 그럼 다시 거름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나무들이 자신들의 삶만 영위하겠다고 한다면 결국 세상에는 한구르의 나무만 남게 된다. 그리고 그 나무는 토지의 영양분을 다 빨고나면 스스로 고사해 버린다. 나무가 자라고 다시 썩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인간도 그러한 존재이다.
어린 새싹은 매우 부드럽다. 그렇기 때문에 큰 나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새싹이 부드럽지 못하다면 성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겉 피부가 생장을 막기 때문이다. 이미 거죽이 딴딴하게 되었는데 그 거죽을 크게 할 수 있겠는가. 인간도 이렇다. 의식이 굳어져 있으면 다른 것을 배울 수 없다. 열려 있는 자세가 바로 약한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흡수한다. 자기 것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클 수 있는 것이다. 도의 쓰임은 이러한 것이다.
유라는 것은 무엇인가. 있음이란 인간 의식의 분화이다. 만물은 무엇엔가 있음에 의해서 태어났다. 그러나 있음은 어디에서 왔는가. 있다는 의식은 어디에 의지하는가. 그것은 없다는데 의지한다. 유무의 구분은 인간의 의식이 나누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물을 구분하기 전에 사물들이 아무런 구분도 없이 스스로 있는 상태가 무이다. 나와 자연은 하나이다. 구분이 되어 있지 않다.
그때 나라는 개념도 없다. 무는 인간의 인식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형상이 있다는 것은 구별이 있다는 것이다. 무는 구별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장자는 무한이라고 사용하였다. 모든 사물이 서로의 차별성을 가지지 않고 구별되어 있지 않은 것이 바로 무이다. 그것이 무이다.
유라는 것은 고정된 형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그 바탕에는 무엇이 있는가. 고정된 형체가 있기 위해서는 고정되지 않는 무가 있어야 한다. 즉 텅빈 공간이 있어야 한다. 이 세계가 모두 고정된 형체를 가지고 있다면 아무것도 움직일 수가 없다. 어떻게 우리는 공기를 가르며 움직일 수 있는가. 그것은 공기 사이의 비어 있음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왜 벽을 뚫고 가지 못하는가 그것은 벽에는 비어 있음보다 고정되어 있는 성질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 고정되어 있음이 유이다. 감마선과 엑스선은 그 벽의 비어 있음을 통과할 수 있다. 이 세계는 과학적으로 텅 비어 있는 세상이다. 우리는 원자 안에 전자가 돌고 있고 원자의 극소한 점에 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 전자가 돌아다니는 공간은 비어 있는 곳인가. 차 있는 곳인가. 그곳은 비어 있는 곳이다. 그 비어 있음이 붕괴되면 블랙홀이 탄생한다. 하나의 별이 점으로 축소가 된다. 별을 이루고 있는 것은 별 크기의 비어 있음이다. 우리는 그렇게 비어 있음에 의지해서 만물을 만들고 생성시키고 있는 것이다.
기철학을 보자. 기의 근본은 무형이다.


마흔한째 장
직역
윗 사람이 도를 들으면 열심히 그것을 행할 것이오.
중간 사람이 도를 들으면 있을까 없을까 한다.
아랫 사람이 도를 들으면 크게 웃는다.
웃지 않으면 도에 부족한 것이다.
그러므로 전해 오는 말이 있다.
밝은 도는 어두운 것 같고,
나아가는 도는 물러나는 것 같고,
큰 도는 치우친 것 같고,
윗 덕은 골짜기 같고,
큰 결백은 욕된 것 같고,
넓은 덕은 부족한 것 같고,
홀로 있는 덕은 가벼운 것 같고,
순박한 진실은 변하는 것 같다.
큰 모서리는 각이 없으며,
큰 그릇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고,
큰 소리는 소리가 없는 것 같고
큰 모습은 형체가 없다.
도는 숨어서 이름이 없다.
대저 오직 도만 잘 빌려주어서 이루게 한다.


해석.
진실을 말한다. 도를 말한다. 그런데 도가 세속적인 가치를 가지는가. 돈으로 거래가 될 수 있는가. 그렇기 때문에 도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았다. 도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가 갰는가. 공장을 세울 텐가. 보석처럼 가공을 해서 팔 텐가. 그게 돈 돼 나. 그렇기 때문에 아랫사람은 웃는 것이다. 쓸데없는 일이다. 한평생 배불리 먹고 남위에 서서 호령하는 것 보다 좋은 일이 있는가. 보석에 집착하지 말고 집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하하 웃기는 이야기다. 이것이 하사이다.
조금 물질적인 것만으로 살기에는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도를 들으면 긴가민가하다. 그러나 아직 물질적인 유혹에 대해서 눈을 돌릴 용기가 없다. 다 버리면 내일 어떻게 살아가지. 그리고 정말로 도라는 게 있는지도 모르잖아. 갈 등을 한다. 이것이 중사이다.
물을 찾아 나섰다. 목마름으로 타고 있다. 그가 길을 가다가 약수터가 있는 표지판을 보았다. 그래서 수원을 찾아 올라간다. 그곳에는 깨끗한 물이 있을 것이므로. 이것이 상사이다. 그는 도에 목말라 하고 있는 자이다. 그 길이 맡는지 틀리는지 구분할 여지가 없다.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대가 사물을 보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하는지 아는가. 그것은 그늘이 있어야 한다. 그늘이 없고 명암이 없다면 어떻게 사물을 구별하겠는가. 빛의 완전 없음과 빛속에 파묻혀 있음의 상태는 같다. 양자다 서로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빛속에 파묻혀 있으면 어둡다고 느끼는 것이다. 눈앞에 백열전구를 들이밀어 보아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도는 이런 것이다.
윗덕은 표시를 내지 않는다. 내가 했다고 자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다. 자기가 하고서도 드러내지 않음이 윗덕이다.
지구가 돌아갈 때 소리가 날까 안 날까. 움직이니까 당연히 소리가 난다. 그러나 우리는 듣지 못한다. 인간의 귀가 들을 수 있는 사이클은 지극히 미미하다. 만약 우리가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순간 고막이 터져 죽을 것이다. 아니면 지금의 목소리로는 서로의 의사를 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지구의 모습이 보이는가. 우주로 나가야 한다. 그럼 태양계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큰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도는 이렇게 크다. 그리고 다른 것들이 이룰 수 있게 바탕이 되어 준다.


마흔 둘째 장
직역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을 등지고 양을 끌어 않았고,
텅빈 기가 조화롭게 한다.
사람이 싫어하는 바는
오직 고독하고,
곡식이 부족하고,
곡식이 부족한 것이다.
그래서 왕과 공이 이것으로 칭한다.
그러므로 물은 혹 그것을 덜어내어도 채워지고, 혹 그것을 채워도 덜어낸다.
사람이 가르치는 바를 나 또한 가르친다.
강하고 힘센 자는 그 죽을 때를 얻지 못하니,
나는 이것으로 가르침의 아버지를 삼는다.


해석.
도는 무이다. 구별이 없다. 그리고 구체적인 형체를 지니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의 의식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이제 분화를 시작한다. 하나의 형체가 태어난다. 하나의 형체 이것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라는 말에는 둘이라는 의미가 표현되어 있다. 우리가 이것은 하나다. 라고 규정을 짖기 위해서는 주관과 객관이 분리가 되어야 한다. 이제 이 하나는 둘이 되었다. 둘이 되는 순간 개체의 사물과 나를 매개해 주는 무엇이 있어야 한다. 텅빈 공간이 있어야 한다. 이 빔으로 인해서 나와 사물은 구분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둘은 셋이 되었다. 나와 사물이 구분이 된다. 그러면 나는 이제 사물들을 마구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이 셋에서 만물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의식의 차원에서 본 설명이다.
이 만물은 음과 양을 가진다. 음은 수동성이다. 정체성이다. 양은 능동성이다. 움직임이다. 모든 사물은 움직인다. 동시에 정체성을 가진다. 음과 양은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는 바위가 언제인가는 모래가 되고 먼지가 됨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바위는 바위의 모습을 간직할 것이다. 이것이 바위가 음의 성질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바위는 어느 순간에도 움직이지 않는 순간이 없다. 계속 움직인다. 이것이 바위의 양이다. 음은 양의 상대적인 모습이다.
텅 빈 기가 만물을 조화롭게 해준다. 양의 극단에 이르면 다시 고요함으로 돌아간다.
왕은 사람이 싫어하는 이름을 스스로 칭하여 낮은 자리에 서려고 한다. 이것이 도의 이치이다. 물이 혹 부족하더라도 충기는 그것을 채워 준다. 그리고 물이 혹 넘치더라고 충기는 그것을 덜어 준다.
이러한 가르침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남들도 이러한 가르침을 편다. 그것을 나도 가르칠 뿐이다. 강한 것은 제명대로 살지 못한다. 바위가 양으로 치달아 급속히 움직인다면 아마 얼마 못 가서 바위로서의 삶은 끝이 날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음과 양의 성격을 다 가지고 있다 그러나 힘이 있다고 마구 낭비하면 자신의 몸을 빨리 분해시킬 뿐이다. 그래서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는 것이다.


마흔 셋째 장
직역
하늘 아래 지극히 부드러운 것이
하늘 아래 지극히 견고한 것을 앞서 달린다.
들어갈 틈이 없는 것은 있지 않다.
나는 이로써 함이 없음의 유익함을 안다.
말없는 가르침, 함이 없음의 이로움을
하늘 아래 이것에 다다르는 자가 드물다.


해석
부드럽다. 물은 바위보다 잘 달린다.
견고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으면 시대에 뒤떨어지게 마련이다. 수용성, 지금 세상이 변하는 것을 변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수용성이 필요하다. 고정관념을 가지고 세상을 자신의 고정관념에 맞추려고 하면 결국 세상에 뒤지게 되는 것이다. 나무의 뿌리는 단단한 바위를 뚫고 자란다. 그 뿌리가 바위보다 강하기 때문이 아니다. 나무의 뿌리가 가지고 있는 생명력과 부드러움이 단단한 바위를 뚫는 것이다. 들어갈 틈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들어가는 것이 생명력이다. 이것이 부드러움의 강함이다.


마흔 넷째 장
직역
이름과 몸중 어느 것이 가까운가.
몸과 재화중 어는 것이 귀중한가.
얻음과 잃음중 어느 것이 병인가.
이런 까닭에 심히 아끼다간 반드시 크게 쓰게 되고,
많이 숨기다간 반드시 크게 망한다.
만족함을 알면 욕됨이 없고,
그칠 때를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히 오래가리라.


해석
이름이라는 것은 허울이다. 코카콜라라는 이름이 코카콜라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갈증을 해소시켜 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름이 그 사물을 대변한다고 생각을 한다. 소나무라고 하면 우리는 늘 푸른 나무 그리고 솔잎이 있고 솔방울이 있는 나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어디에도 소나무는 없다. 우리의 관념 속에 있는 소나무는 없다. 자연에 있는 소나무는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것은 그대로 독창적이다. 그리고 그 순간 순간 변화한다. 자라난다. 소나무는 인간이 붙은 이름일 뿐이다. 그것이 소나무 그 자체를 대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름이 그 사물을 대변한다고 생각을 한다. 노자는 말한다. 소나무라는 이름보다 소나무 그 자체가 본질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그리고 다시 말한다. 몸과 재화중 어느 것이 더 귀한 가라고. 재화보다는 몸이 중요하다. 사람이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 개인의 인격이나 신체보다는 재화가 더 중요시 여겨진다. 일억짜리 기계를 차에 싣고 가다가 사고가 나면 사람이 다친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지금은 사람보다 재화가 더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 이것은 노자 시대부터 인간이 안아 온 고질적인 병폐이다. 재화란 무엇인가. 사람에게 유익하고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즐거움은 재화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知足함에서 즐거움이 오는 것이다. 그대는 무엇이 부족해서 재화를 추구하는가. 그것을 얻으면 만족하는가. 혹시 자신의 그림자를 쫓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림자는 아주 가까이 있지만 영원히 잡을 수 없는 것임을 아는가.


마흔 다섯째 장
직역
크게 이루어진 것은 모자란 것 같다. 그 쓰임이 낡지 않기 때문이다.
크게 찬 것은 비었는 것 같다. 그 쓰임이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크게 곧은 것은 구부러진 것 같고,
큰 재주는 졸속한 것 같고, 크게 말하는 것은 어눌한 것 같다.
뜀으로 추위를 이기고, 고요함으로 뜨거움을 이기고,
맑고 고요한 것이 하늘 아래의 바른 것이다.


해석
크게 이루어진 것은 완성이 되어서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진행형이다. 시대에 따라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 아니 그 틀에 이미 시대성을 초월한다. 그것이 큰 그릇이다. 성경과 고전은 시대를 초월해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가 말한 시대는 아주 오래 전이다. 현재는 과학과 문명의 발달로 그 시대와는 생산 체제가 다르다. 그러나 그 시대의 말이 지금도 통용되고 있다. 인간 이해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것은 그 시대에 따라서 새롭게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답을 전해 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식이 아니다. 진리 탐구에 대한 열망이다. 상식은 당장 이루어진 것 같다. 그리고 실생활에 매우 필요한 것이 틀림없다. 그에 반해서 진리에 대한 탐구는 매우 쓸모가 없고, 좀 덜떨어진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상식은 시시각각 변한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열망은 인류에게 아직도 남아서 굽이친다. 그렇기 때문에 고전이 아직도 읽히는 것이다. 그것이 모자라 보일지라도, 그 쓰임이 상식같이 일회적이고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그 의미의 해석이 새로워지기 때문에 아직도 연구되는 것이다.
바다를 본적이 있는가. 바다는 차 있는가. 비어 있는가. 바다는 바닷물로 차 있다. 그러나 바다는 비어 있다. 크게 찬 것은 이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크게 말한다는 것은 말을 잘한다는 것이다. 말을 잘하는 것은 그가 쉬지 않고 말을 쏘아 댄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말을 잘할 뿐이다. 말이란 무엇인가. 서로간의 의사 소통이 아닌가. 말은 의사 소통의 도구이다. 따라서 서로간에 의사 소통이 잘되는 것이 목표이다. 진정으로 깊은 표현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눈빛으로 몸으로 하는 것이다. 느낌이다. 그리고 말을 잘해도 상대가 감복을 받지 않으면 그것은 헛된 에너지의 낭비이다. 단 한마디의 말에도 상대의 동의를 얻어내고, 그를 변화시킬 수 있다면 그것이 말을 잘한 것이다.
추우면 어떻게 하는가. 뛴다. 더위면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조용히 있는다. 이것은 당연하다. 어려운가. 고요함과 맑음은 하늘 아래의 바름이다. 움직이는 것은 열이 난다. 세상에 움직이지 않는 것은 없다. 열이 난다. 그럼 어떻게 하는가. 쉬어야 한다. 고요함에 머물러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움직임에 치중한다. 세상이 움직이고 자신이 움직인다. 쉴 줄을 모른다. 노는 것도 쉬는 것이 아니다. 노는 것도 움직임 에너지의 소모이다. 이제는 쉴 때이다. 더울 때 열이 날 때 쉴 줄 아는 것이 도이다. 추우면 뛸 줄은 안다. 배고프면 움직일 줄은 안다. 그러나 열이 날 정도로 움직이면서 쉴 줄을 모른다. 그것이 욕망에 대한 추구이다. 이것은 쉴 줄을 모른다. 스스로 열에 받혀서 자체 폭발하기 전까지는.


마흔 여섯째 장
직역
하늘 아래 도가 있으면 달리는 말이 똥을 칠 틈이 있고,
하늘 아래 도가 없으면 교외의 싸움터에서 말이 태어난다.
족함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큰 화는 없다.
얻고자 하는 욕망처럼 큰 허물은 없다.
그러므로 족하여 할 때 족함을 알는 것이 항상 족하는 것이다.


해석
하늘 아래에 도가 있어서 싸우기전에 말이 통하면 달리는 말(전투용 말이다.)이 농업 생산에 종사할 수 가 있다. 즉 전쟁 비용을 산업 발전과 편리를 위해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늘 아래에 도가 없어서 말이 통하지 않으면 말이 싸움터에서 태어난다. 교외라는 말은 성의 외각을 뜻한다. 즉 최전선이다. 말이 싸움터에서 태어나면 잘 살아가겠는가. 사람들이 자신을 위한 삶을 살 수 있겠는가. 그럼 싸움은 왜 생기는가. 그것은 족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로가 자신이 더 많이 가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얻고, 가지고자 하는 욕망이 큰 허물이라고 한 것이다. 지금 만족할 수 없으면 영원히 만족할 수 없다. 자신이 족함을 느껴야 할 때를 알아 그때 족함을 느끼면 항상 만족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럼 자신이 족함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 그 배가 차고, 두 다리를 뻗고 편안히 잠을 잘 정도면 된다. 그러나 지금 현대에는 편안히 잠을 자기 힘들다. 언제 집이 무너질지도 모르고, 비행기의 소음은 창문을 두드린다. 이런 세상에 하늘 아래 도가 없어서 말이 통하지 않아 싸움이 일어나면 교외에서 말이 태어날 틈도 없게 된다.


마흔 일곱째 장
집 밖을 나가지 않아도 하늘 아래를 알고
창밖을 내다보지 않아도 하늘의 길을 본다.
그것에 나가면 멀어지고, 그것을 알수록 적어진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다니지 않아도 알고,
드러내지 않아도 이름이 있고,
하지 않아도 이루어진다.

해석
현대에는 컴퓨터가 있어서 컴퓨터 한대만 있으면 집안에서 세계의 일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노자가 이런 컴퓨터의 탄생을 예언한 것인가 하는 데에는 의문이 있다. 그럼 노자가 한 말은 무엇이겠는가. 도대체 그 시대에 집 밖을 나가지 않아도 하늘 아래를 안다고 자부할 수가 있는가. 혹시 노자는 우주인이 아닐까.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옛과 지금이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슬플때 울고, 기쁠 때 웃고, 괴로울 때 괴로워하고, 즐거울 때 즐거워하는 것은 매양 같다. 왜 괴로운가. 그 큰 이유는 얻고 싶은 것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이해가 되면 집밖을 나가지 않아도 세상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근심하고 기뻐하고 살아가는지 알게 된다. 세상 사람을 알게 되면 그 세상이 나갈 방향도 알 수 있게 된다. 즉 집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세상이 나아가는 방향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은 더 쉽다. 그것은 흐름을 가지고 있다. 별의 움직임은 괴도가 있다. 이 괴도만 알면 하늘에 오늘 무슨 별자리가 뜰지를 알게 된다. 자연과 하나가 되면 하늘이 나아가는 방향을 알게되는 것이다. 그래서 굳이 창밖을 보지 않아도 오늘 어떤 별이 떳고, 하늘의 길이 어디로 가는지 아는 것이다.
이것은 대상의 파악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직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 아래를 알겠다고 돌아다니면 그 핵심에서 벗어나게되고, 하늘의 별자리를 알겠다고 우주의 별들에 대해서 연구를 하면 더욱 혼란스럽게 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핵심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 그대는 거울을 본 적이 있는가. 거울을 한번 자세히 들여다 보아라. 그 안에 누가 있는지 보라. 그의 눈을 삼십분 정도 들여도 보고 있어라. 그럼 무엇인가 볼 수 있을 것이다.

마흔 여덟째 장
직역
학문을 하는 것은 매일 더해 가는 것이고,
도를 하는 것은 매일 덜어가는 것이다.
덜도 또 덜어내면 함이 없는데 이르게 된다.
함이 없으면서 하지 않음이 없다.
천하를 얻으려고 한다면 항상 일이 없게 하라.
그것이 일이 있음에 이르게 되면, 천하를 얻는데 부족하게 된다.


해석
지식은 쌓아가는 것이다. 한권의 책을 읽고 또 한권의 책을 읽고, 그는 무수히 많은 지식을 쌓을 수 있다. 그것이 학문을 하는 것이다. 도는 덜어내는 것이다. 가식을 덜어내는 것이다. 내게 주입된 고정된 가치관념을 덜어내는 것이다. 나를 규정지으고 있는 것을 덜어내는 것이다. 그릇을 부수는 것이다. 나는 학생이다. 나는 왕이다. 나는 운전수이다. 라는 틀을 부수는 것이다. 그래서 순수한 나의 존재에 도달하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를 규정하는 것은 내가 스스로 규정한 것이 아니다. 남이 나에게 씌운 멍에이다. 그리고 다른사람의 가치판단에 따라서 나도 움직인다. 나도 행동을 한다.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아가게된다. 이것에서 자신의 주체성은 사라진다. 나를 규정하고 있는 모든것을 던저 버려라. 그때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학문을 하는 것은 그릇에 물을 붓는 것이다. 바다위에 그릇이 떠있다. 바다는 존재의 근원이다. 그리고 그릇은 나이다. 이때 학문은 바닷물을 떠서 그릇을 채우는 것이다. 조금 더 조금더, 그러나 한계가 있다. 한계는 그 그릇의 크기다. 그러나 도를 하는 것은 그릇을 부수는 것이다. 해체하는 것이다. 그때 그는 바다와 하나가 된다. 그 자신이 물이된다.
無爲란 함이 없음이다. 그런데 노자는 덜어 내라고 한다. 덜어 내는 것은 爲가 아닌가. 그렇다. 덜어내는 것은 함이다. 목적 의식이 있고 그것에 매진하는 것이다. 함이 없기 위해서 함하는 것이다. 무위 하기 위해서는 해야 한다. 강렬한 추구 그 끝에서야 도달 할 수 있는 것이 무위이다. 함이 없다고. 그것 참 쉽네, 집에 콕 밖혀 있으면 되잖아. 그렇다. 그대는 집에 앉아서 방구들을 바라보며 배를 깔고 누위서 멀뚱멀뚱 있을 수 있다. 그리고는 말한다. 나는 지금 무위하고 있다고. 그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 것인가. 아니다. 어떻게 사람 단 한 순간이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가. 단 한 순간이라도 그대의 육체가 움직이지 않는 순간이 있는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 순간이 바로 죽는 순간이다. 살아 있는 것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다. 흡사 태풍처럼 말이다. 태풍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우리는 태풍을 느낀다. 그리고 큰 피해를 입는다. 그런데 단 한순간 태풍이 멈추었다. 그럼 그곳에 태풍이 남아 있는가. 아니다. 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멈추는 순간 죽는다. 실에 돌을 매달아 돌려 보아라. 그럼 원이 생긴다. 그것을 아주 빨리 돌려 보아라. 그럼 주위에 막이 생긴다. 다른 것들이 막에 근접하게 되면 돌에 맞아 튕겨져 나간다. 그렇게 되면 그 주위에는 아무도 가까이 오려 하지 않는다. 분명히 허공에는 단 하나의 돌이 떠있다. 그러나 원을 형성하고 무서운 파괴력을 가진다. 그런데 그 중심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밖에서 보면 돌고 있는 돌만 보인다. 왜 돌을 한 순간이라도 노치면 다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안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이제는 돌이 사람의 팔을 돌린다. 돌을 돌리는 사람이 돌을 멈추고자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돌을 집어 던질까. 아니다. 그럼 주위의 사람이 다친다. 어쩌면 내가 다칠지도 모른다. 돌에는 눈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실을 확 잡아 당길 수도 없다. 천천히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속도를 줄여야 한다. 그래서 돌을 멈추게 할 수 있을 때 까지 가야 한다. 다치지 않을 정도까지 속도를 줄여야 한다. 이렇게 속도를 줄이는 것이 무위하고자 하는 위이다. 완전히 멈춘상태가 무위이다. 위는 돌이 계속 돌고 있는 상태이다. 돌이 멈추는 순간 돌을 멈추고자 하는 위는 사라진다. 이세상의 위중에서 단 하나 가치 있는 행동은 돌을 멈추게 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돌이 멈추었으면 그 멈춘 돌이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다. 돌은 놓고 자유롭게 떠나면 되는 것이다. 무위는 돌이 멈추고 돌을 멈추게 하려는 위가 사라질때 오는 것이다. 무위는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원래 그대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돌로 가려진 세상을 바로 보게 되는 것이다.
천하를 얻으려고 하면 일이 없게 하라. 무슨 말인가. 어떤 일이 부상하기 전에 해결하라는 것이다. 즉 사건이 커지기 전에 해결하라는 것이다. 그 사건이 전조조차 보이기전에 해결을 해놓으면 천하에 일이 생길일이 없다. 예를 하나 들겠다. 콜레라가 기승하는 여름이 되기 전에 보사부에서는 예방접종을 맞으라고 홍보를 하고, 문교부와 협조를 해서 각급학교의 학생들에게 거의 의무적으로 예방접종을 맞게한다. 콜레라가 돌기전에 예방을 함으로써 콜레라 균의 한국에 상륙을 하더라로 피해를 최소화 하겠다는 것이다. 예방접종을 하지 않고 방치해둔 상태에서 콜레라 균이 상륙을 하면 일이 커지게 된다. 일이 커지기 전에 예방을 하기 때문에 콜레라 균이 상륙을 하더라도 쉽게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천하에 일이 없게 하는 것이다.


마흔 아홉째장
직역
성인은 항상된 마음이 없다.
백가지 성의 마음들을 마음으로 삼을 뿐이다.
좋은 사람은 나도 그를 좋게 해주고,
좋지 못한 사람이라도 나는 또한 그를 좋게 해준다.
좋음이 얻어진다.
믿을 만한자는 나도 그를 믿고,
믿지 못하는 자라고 해도 나는 또한 그를 믿는다.
믿음이 얻어진다.
성인이 천하에 있을 때 화해롭다.
하늘 아래에 그 마음을 혼돈되이 한다.
백가지 성의 사람들 모두 그 귀와 눈을 주목한다.
성인은 모두 그들을 어린아이로 만든다.


해석
성인은 자신의 고정관념을 가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무수한 사람들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백가지 성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에서 말을 한다. 자신들의 이익이나 권리를 주장한다. 이때에 지도자가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으면 그들의 말을 공평하게 들을 수 없다. 고정관념을 가지고 들으면 치우치게 된다. 그것은 분열을 가지고 온다. 공평하게 듣기 위해서는 고정관념을 가져서는 안된다. 지금의 법관들이 가져야될 자세이다. 어떤 사람을 죄인이라고 생각을 하고 바라보면 그의 죄상만 보게 될 것이다. 그의 일부분을 보고 그를 평가한다. 이것은 좋지 않은 자세이다. 상대방의 말을 들을 수 있게 자신의 마음을 열어놓아라.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 자신또한 그를 좋게 보고, 다른 사람이 그를 좋지 못한 사람이라고 하여도 그는 좋게 본다. 처음부터 선입관을 가지고 보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말에 가려서 그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사람의 단면만 보았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선입관을 가지고 보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의 좋은 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성인은 중간자이다. 다리이다. 두 개의 분열된 집단이 있다. 그들은 서로를 적대시 한다. 그때 성인은 다리를 놓는 자다.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서로에게 서로의 입장을 전달 할 수 있는 것이다. 극단에 이른 서로의 마음을 성인은 화해시키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신의 마음은 혼돈스러운 것이다. 혼돈이란 구분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선입관을 가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러한 자세로 사람을 대하면 모든 사람과 말이 통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차츰 그에게 말을 건다. 그리고 그를 주시한다. 왜냐하면 그야 말로 선입관을 가지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고, 같이 이야기 할 수 있는 상대이기 때문이다. 이때 성인은 이들을 어린아이로 만든다. 어린아이는 어떤 상태인가. 선입관을 가지지 않은 혼돈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상태이다. 성인은 이들에게서 선입관을 배제시킨다. 선입관이 사라진 상태를 노자는 어린아이로 표현 하고 있는 것이다.


쉰째 장
직역
나오는 것이 태어남이오, 들어가는 것이 죽음이다.
태어나는 무리는 열에 셋이고,
죽어가는 무리는 열에 셋이다.
사람이 태어나 죽음의 땅으로 움직이는 자 또한 열에 셋이다.
무슨 까닭인가.
그 삶을 살려고 살아가는 것이 너무 두텁기 때문이다.
대저 듣건데
삶을 잘 다스리는 자는,
땅을 다녀도 호랑이나 코뿔소를 만나지 않고,
군대에 들어가도 갑옷과 병기를 차지 않는다.
코뿔소가 그 뿔을 드러낼 바가 없고,
호랑이가 그 발톱을 내밀 곳이 없고,
병기가 그 칼날을 쓸 곳이 없다.
어째서 이런가.
그 죽음의 땅이 없기 때문이다.


해석
나오는 것이 태어남이다. 어디서 나오는 것이 태어남인가. 근원에서 나오는 것이 태어남이다. 그리고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죽음이다. 그 근원을 노자는 도라고 부른다. 그것을 어떻게 부르든지 상관은 없다. 이 근원에서 세무리가 나오면,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자들또한 세무리이다. 자연계는 형평성을 가지고 있다. 한곳이 넘치면 한곳이 부족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넘치는 곳의 물이 부족한 곳으로 흘러간다. 그래서 평형을 유지한다. 그리고 태어나서 삶을 살아가면서 죽음으로 향하는 자들또한 열에 셋이다. 결국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 죽음으로 치달아 간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생에 너무 집착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두려워 한다. 그래서 생에 매달린다. 그리고 무언인가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남기고 싶어한다. 영구불변하는 이름을 남기고 싶어한다. 로마의 황제 네로는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남기고 싶어서 로마시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기독교인에게 죄명을 씌워서 무수한 사람들을 십자가에 매달았다. 그의 소원대로 그의 이름은 아직까지 기억되고 있다. 왜 이러한가. 그것은 죽음이 단지 돌아감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생의 달콤함이 너무 깊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릴 수 없다. 삶아가면서 자신의 성벽을 쌓는다. 아주 두텁게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것처럼 쌓는다. 그러나 죽음은 밖에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내면에서 찾아오는 것이다. 성벽을 쌓아라. 그러나 죽음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자 원문을 잘살펴 보아라. 열에 셋이 세 번나왔다. 그럼 아홉이다. 그럼 열 개중 한 개가 모자란다. 이 한 개는 무엇인가. 바로 섭생을 잘하는 자이다. 생을 다스릴주 아는 자이다. 그는 자신이 도에서 나와서 도로 들어가야 하는 것을 안다. 그에게 죽음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단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갈 뿐이라는 것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호랑이를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갑옷을 걸쳐도 그것이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왜 그런가. 그에게 죽음이란 없기 때문이다. 단지 도로 돌아감만 있을 뿐이다. 집으로 돌아갈 뿐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여행자다. 도데체 어느 곳에 영원히 머무를 수 있겠는가.

쉰 한째 장 모르겠다.
@@직역 다시 한번 고민해볼것
도란 그것이 태어남이오,
덕이란 그것이 쌓아 감이요,
물이란 그것이 형체를 이룬 것이다.
세라는 것은 그것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까닭에 온갖 것이 도를 높이 여기고, 덕을 귀하게 하지 않음이 없다.
도의 높음과 덕의 귀함은 대저 명령이 아니고, 늘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도란 그것이 태어남 이오, 덕이란 그것이 쌓아 감이라고 한 것이다.
그것을 자라게 하고, 그것을 기르며, 그것을 멈추게 하고,
그것을 독하게 한다. 그것을 길러주고 덮어 감싸준다.
낳았으나 가지지 않고, 되게 해주어도 기대지 않고,
자라게 하면서도 다스릴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을 일컬어 그윽한 덕이라고 한다.




해석
도는 생명력이다. 모든 만물이 이 도에서 나온다. 덕은 얻음이다. 모든 만물들은 얻음으로 자란다. 양분을 얻지 못한다면 생물은 죽는다. 사람을 보라. 음식이 없이 다른 것들을 먹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죽는다. 얻음. 의식에도 얻음이 있다. 자라기 위해서는 다른 것들을 끊임없이 받아 들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정도 얻음이 있다고 생각을 하면 멈추어 버린다. 그럼 죽는 것이다.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도는 생명력이오. 덕은 사물이 태어 나기 위해서 얻어가는 과정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머니의 자궁속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가. 도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잉태가 된 순간을 가리키는 것이고, 덕은 어머니의 정혈을 얻어 생명을 유지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도와 덕이 아니다. 최소한의 느낌이라고 있어야 알 수 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형이다. 형체가 아니다. 형이다. 그림자 같은 것이다. 아이가 있다는 것을 어머니가 알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느낌이 와야 한다. 이 형보다 발전이 된 것이 성이다. 이루어 진 것이다. 아이가 태어 난 것이다. 이때 부터 아이는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 첫 과정이 호흡이다. 어머니의 뱃속에서는 호흡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 호흡이 자신이 개체로서 처음으로 얻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들이 호흡을 중요시 한 것이다.
노자는 사물이 처음 출발하는 점부터 단계적으로 이루어져 가는 과정을 설명했다. 그러나 우리는 끝에서 파고 들어가야 한다. 도는 그냥 알려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처음을 모른다. 우리는 이미 세이다. 단전히 고정되어 있는 집합체이다. 어미에게서 나왔지만 우리는 어미의 자궁속의 일을 알지 못한다. 거대한 나무를 보라. 그럼 우리는 그것이 어떤 나무인지 안다. 그러나 그것이 새싹일때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아는 것은 힘이 든다. 땅속에 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나무를 보고 그 나무의 첫 출발점을 유추할 수 있다. 그 나무가 아직 싹도트기 전의 상태에서 이것이 어떻게 자랄지 지켜 보면 노자의 말을 수긍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마 다 자란 나무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에 대한 추구는 그대의 현존에서 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의 근원에 도달 할 수 있게 된다. 도는 산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 가 도의 증거이다. 더 이상은 필요치 않다. 도가 다른 만물을 낳았는데 나는 낳지 않았는가. 아니다. 도는 그대를 낳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도를 높게 여기지 않는다. 자신을 먹이고 살려준 덕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스스로 먹고 살아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그대가 만든 것이 있는가. 지구는 그대가 만든 것이 아니다. 그것을 알라. 지구는 그대가 만든 것이 아니라 도가 만든 것이다. 그대의 식탁에 있는 음식들은 그대가 만든 것이 아니다. 농부가 만든 것도 아니다. 도가 만든 것이다. 전 우주의 과거가 만든 것이다. 그것을 잊지 말라.
도는 근원이다. 모든 만물이 도에서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만물이 도를 높이 여기는 것이다. 낳았지만 형체는 없다. 씨앗이다. 아직 이미지가 없다. 구별할 수 없다. 이제 조금씩 이미지가 생긴다. 씨앗이 발아를 한다. 그때 가 덕이다. 그리고 씨았이 땅위로 드러났다. 형체를 조금씩 갖추기 시작한다. 이때가 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때에 새싹만 보고 그것이 어떻게 자랄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 힘들다. 새싹은 구분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것이 다자라면 세를 이루게 된다. 자신의 영역권을 가진다. 이때에 이르러 하나의 사물이 이루어 졌다고 하는 것이다.
도는 근원이다. 그렇기에 도를 높이는 것이다. 덕은 토양이다. 사물이 사물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규율로 그러한 것이 아니다. 나면서 아는 것이다.

쉰 두째 장
직역 다시할 것 구멍부분
하늘 아래 시작이 있으니 이것을 천하의 어미로 삼으라.
이미 그 어미를 얻었으면 그 자식을 알아야 한다.
이미 그 자식을 알았거든 다시 그 어미를 지켜야 몸이 다하도록 위태롭지 않다.
그 구멍을 막고, 그 문을 닫으면 몸이 끝날때 까지 다함이 없을 것이다.
그 구멍을 열고, 그 일들에 건너다니면, 몸이 끝나도록 구하지 못할 것이다.
작은 것을 보는 것을 밝음이라고하고, 부드러운 것을 지키는 것을 강함이라 한다.
그 빛을 사용하여 그 밝음으로 다시 돌아가면 몸에 재앙이 남지 않는다.
이것이 항상됨을 익히는 것이다.


해석
도에서 하나가 나온 것이 하늘 아래의 시작이다. 이것은 근원을 가리킨다. 텅 비어 있다. 그러나 이것에 머무르면 안된다. 이 상태는 갓 태어난 아이의 의식상태이다. 이상태에서는 인간의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 만물을 구분할 줄 모르면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겠는가. 그래서 어미의 자식을 알라는 것이다. 이제 만물은 구분이 된다. 개물들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아는 것이다. 지식이다. 만물은 지식으로 다가온다. 노자는 지식을 부정하지 않는다. 지식은 필요하다. 나무를 나무로 보지 못하고 강물을 강물로 보지 못한다면 그는 며칠 못가서 죽으리라. 자 이제 지식을 알았다. 우리가 시식을 아는 것은 도의 자식을 알고 있는 상태이다. 만물을 구분할줄 안다. 그러나 여기서 머무는 것이 아니다. 한걸음 더 나아간다. 이제 그 어미를 지킨다. 만물이 자신만의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을 차별화 시키지는 않는다. 모든 것은 평등하다. 사물의 특수성을 부정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근원적으로 모든 것은 동일하다. 왜냐하면 한 곳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우치는 것이 그 어미를 지키는 것이다. 그럼 몸이 다하도록 위태롭지 않으리라.
구멍은 무엇이고, 문은 무엇인가. 바로 밖과 통하는 통로이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아홉개의 구멍과 감각기관 즉 몸이다. 이것을 닫아라. 이제 그는 만물을 구분하게 되었다. 그럼 어미를 지켜라. 그 어미를 지키는 것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문을 닫고 구멍을 막고 내면으로 길을 떠나라는 것이다. 내면으로 떠나는 길은 설명하는 것보다 스스로 해보는 것이 더 낳으리라 본다. 그 길은 스스로 가는 것이다.
문을 열고, 구멍을 열면 이제 그는 밖의 사물에 사건에 뛰어다닌다. 그는 많은 지식을 축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아는 것은 아들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신토록 그 어미를 구할 수 없는 것이다.
씨앗은 작다. 그러나 하나의 씨앗은 어미다. 그 어미를 보는 것을 밝음이라고한다. 부드러움은 새싹이 자라나는 모양이다. 이 부드러움을 지켜나가면 거대하게 클 수 있는 것이다. 끝까지 부드러움을 지켜라. 그럼 누구보다도 강해진다.
그 빛을 이용하여 그 어미를 볼 수 있는 데로 돌아가면 몸에 재앙이 남지 않게 된다. 빛이란 인간의 내면의 눈이다. 쉽게 말하면 통찰력이라고 할 수 도 있다. 나무를 보고 작은 씨았까지 알수 있는 눈으로 그 어미를 보고 그 근원을 보아 사람, 사물을 바라보는 자신의 차별성을 떨처 버린다면 몸에 재앙이 남지 않는다.
근원은 변함이 없다. 아니 변화환다. 끊임없이 움직인다. 고정되어 있는 것은 자신의 관념이다. 이 고정되어 있는 자신의 관념을 부수면 끊임없이 움직이는, 살아숨쉬는 도로 돌아가게 된다. 그것이 항상됨을 배우는 것이다.


쉰 셋째 장
직역
나에게 잠깐 동안 지혜가 생겨서,
대도를 행하하고 한다면 늦출까 그것이 두렵다.
큰 도는 대단히 평탄한데, 사람들은 샛길을 좋아한다.
조정이 매우 깨끗할 때 밭은 잡초가 무성하고, 창고가 텅 비어있다.
복장이 아름답고, 허리에 날카로운 칼을 두르고,
실컷 먹고 마시고, 재화에 남음이 있다.
이들을 일컬어 도적이라 한다. 도가 아니다.


해석




쉰넷째 장
직역
잘 심는자의 것은 뽑을 수 없고, 잘 껴안는 자의 것은 빼았을 수 없다.
자손이 제사지내는 것이 그치지 않는다.
그것을 몸에 닦으면 그 덕이 진실하고,
그것을 집에 닦으면 그 덕이 남고,
그것을 마을에 닦으면 그 덕이 자라고,
그것을 나라에 닦으면 그 덕이 풍요롭게 되고
그것을 천하에 닦으면 그 덕이 드넓게 된다.
그러므로 그 몸으로 몸을 볼 것이오,
그 집으로 집을 볼 것이오,
그 마을로 마을을 볼 것이오,
그 나라로 나라를 볼 것이오,
그 천하로 천하를 볼 것이다.
내가 어찌 하늘 아래의 그러함을 알겠는가.
이것일 뿐이다.

해석
이장은 개벽장이다. 전철연의 개벽전사들의 도움으로 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장의 대부분의 설명이 개벽전사들의 머리에서 나온것임을 밝히는 바이다. 모를 잘심는 자는 땅과 모가 분리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잘 껴안는 자는 껴안는 자와 안기는 것에 분리를 두지 않는다. 두 개가 하나로 합일된다. 따라서 뽑을 수 없고, 뺐을 수 없는 것이다. 이미 두 개는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무에 못질을 한다. 못질을 아주 잘하는 사람은 나무에 못질을 했는지 알아보지 못하게 못질을 한다. 이렇게 잘하는 것은 누구나 배울려고 한다. 따라서 그 길은 계속이어진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의 방법에 따라서 행한다. 이것은 체득이다. 그래서 그것(잘심고 잘껴안는 것)을 내몸에 닦으라고 한 것이다. 덕은 남이 닦아 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닦는 것이다. 남이 심는 것을 보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모를 심어 땅과 모가 분리가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느낌으로만 전수될 수 있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 남이 타는 것을 아무리 구경해도 자신이 잘타진 못한다. 용기를 내어서 한 번 타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때에 자전거를 타는 것이 자신의 것이 되고 그 묘미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자신의 몸에 닦으라고 한 것이다. 스스로 느껴보아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참된지 참되지 않은지 않다. 음식을 먹어보지도 않고 맛을 알수는 없는 것이다. 집에 닦으면 덕이 남음이 있다. 나를 보고서 가족이 따라한다. 이것은 자신의 완성이 다른 사람에게 전파됨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이 그것을 보고 따라한다. 유익한 기술은 서로 배울려고 난리를 친다. 이것이 점점퍼져나가서 천하에 드넓게 퍼진다.
이때에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마라. 그 집으로 그집을 보아라. 그 옆에 집이 움막이라고하여 그 집을 높게 보지 말고, 그 옆이 대궐같은 집이라고 해서 그 집을 천하게 보지마라. 선입관을 가지지마라. 비교해서 살피지마라. 자신이 얻은 만큼 알면 된다. 굳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우월을 가릴 필요가 없다. 자신의 길을 가면 된다.
하늘 아래의 그러함을 알지 못한다. 노자도 하늘아래의 그러함을 알지 못한다. 그러함은 하늘의 덕이 두루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노자가 어찌 아는가. 노자는 스스로 모른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본것만을 말한다. 자신이 본 몸과 마을 고을 나라를 말할 뿐이다. 다른 세계에 다른 사람은 자신이 본바와 다를 수 있다. 자신이 말한 것과 전혀 다른 무엇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여유가 있다. 하늘 아래의 그러함을 나는 알지 못한다. 단지 그가 본것만을 말할 뿐이다. 그 몸으로 몸을 말할 뿐인 것이다.


쉰 다섯째 장
직역
덕을 머금음이 두텁다는 것은 핏덩어리 아이와 같다.
벌과 전갈, 살모사, 뱀이 쏘지 못한다.
맹수가 덤비지 못하고,
새가 움켜쥘려고 달려들지 못한다.
뼈가 약하고 근육이 부드러운데 잡으면 노치지 않고
수컷과 암컷의 합침을 알지 못하는데 완전히 이룬다.
정기가 지극한 것이다.
종일 토록 울어도 목이 쉬지 않으니,
조화로움이 지극한 것이다.
조화를 아는 것을 일컬어 항상됨이라고 하고,
항상됨을 아는 것을 일컬어 밝음이라한다.
삶에 덧붙이는 것을 상서롭다 한다.
마음이 기를 다스리는 것을 강하다 한다.
사물은 굳어지면 곧 늙으니 이것을 일컬어 도가 아니라한다.
도가 아니면 일찍 마친다.


해석
赤子는 갓 태어난 아기를 가리킨다. 덕을 머금음은 이 갓 태어난 아이 같이 해야 한다. 벌이나 뱀이 쏘고, 맹수가 덤비지 못하게 보호한다. 덕도 마찬가지 이다. 간난아이처럼 잘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 덕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자라난다. 아이가 남녀의 성행위에 대해서 알지 못하지만 막상 닥치면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것과 같다.
아이는 하루종일 운다. 그래도 목이 쉬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아이는 지치면 쉰다.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이 조화다. 지치면 쉬고, 쉬고 나면 운다. 이렇게 할 줄아는 것을 늘 그러함이라고 하는 것이다. 조화를 알면 늘 울 수 있다. 활동할 수 있다.
삶에 덧붓이는 것을 상서롭다 한다. 이 부분에는 두가지 해석이 있다. 나의 해석과 개벽전사들의 해석을 따로 싣겠다. 나는 이 상을 안 좋은 것으로 보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삶에 더해간다. 아이는 살아가면서 더해간다. 즉 지식을 배워간다는 것이다. 그럼 이제는 조화를 잃어버린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때까지 목이 쉬도록 운다. 지식은 대상을 추구한다. 자신의 목이 쉬는지 쉬지 않는지 모른다. 쉴때도 운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은 끝이 없다. 삶에 지식을 더해가면 조짐이 보인다. 그 조짐은 마음이 나타날 조짐이다. 의식이 분열 되어 간다. 아직 도에서 근원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간난아이는 아직 마음이 없다. 감각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시비를 구별하고 좋고 나쁨을 구별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완성되어 기를 다스리면 사람은 강해진다. 이제 마음이 기를 다스리게 된다. 자신의 몸을 이용해서 대상을 추구한다. 그리고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강해진다. 자연스러움을 버린다.
壯이란 힘을 쓴다는 말이다.사물은 힘을 쓰면 곧 늙어버린다. 이것은 도가 아니다.
개벽주- 개벽전사들은 마음이 기를 다스리는 것을 좋게 본다. 즉 멋대로 날뛰다 보면 자� 몸이 망가질 수 있다. 기는 통제가 필요하다. 그리고 强자와 壯자가 글자가 다르다. 그 의미가 다른 것이다. 마음이 몸을 통제하면 수행을 할 수 있다. 따라서 강해 지는 것이다.


쉰 여섯째 장
직역
아는 자는 말이 없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그 구멍을 막고, 그 문을 닫으며,
그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그 얽힘을 푼다.
그 빛을 조화롭게 하고, 티끌을 고르게 한다.
이것을 일컬어 그윽한 같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는 친함을 얻을 수 도 없고, 멀어짐을 얻을 수도 없다.
이익을 얻을 수 도 없고, 손해를 얻을 수 도 없다.
그 귀함을 얻을 수 도 없고, 그 천함을 얻을 수 도 없다.
그러므로 하늘 아래에 귀함이 된다.


해석
말은 최소한의 정보를 나눈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나눌 수 있다. 그것 뿐이다. 말은 자신의 감정을 조금밖에 전하지 못한다. 그리고 상대방이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아니 말을 해도 알아듣게 하기 힘들다. 도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는 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보여준다. 실천으로 보여준다.
도에는 차별이 없다. 친해 지고 멀어지고, 이익을 얻고 손해를 보는 것은 차별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도는 누구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천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선입관을 가지고 다른 것들을 보지 않는다. 자신의 세력을 쌓기 위해서 친한 사람들을 만들지 않는다. 도에게 있어서 모든 사람, 모든 사물은 있는 그대로 평등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 아래에 귀하게 되는 것이다.


쉰 일곱째 장
바름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기이함으로 병사를 사용하라.
천하를 취할때는 일 없음으로 하라.
내 어찌 그것이 그러함을 알겠는가.
이 것일 따름이다.
하늘 아래 꺼리고 피할 것이 많으면 백성들이 가난해 지고,
백성들에게 이로운 기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라가 혼미해지고,
사람이 기교가 많으면 많을수록 기이한 물건들이 점점 생겨나고,
법령이 많으면 많을수록 도적이 많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성인이 말하기를
나가 함이 없음으니 백성들이 스스로 변하게 하고,
나가 고요하니 백성들이 스스로 곧아지고,
내가 일이 없으니 백성들이 스스로 부유해진다.
내가 욕망이 없으니 백성들이 스스로 통나무가 된다.


해석
정법은 무엇이고 기법은 무엇인가. 정법은 활짝 펼쳐놓고 하는 행위다. 드러나 있을수록 깨끗하고 당당한 것이다. 기이함이란 무엇인가. 상식에서 어긋나는 일이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것이다. 무력을 쓸 때는 그 파장을 최소화 해야한다. 전쟁을 해도 백성들이 전쟁을 하는 지도 모르게 해야 한다. 백성들이 전쟁을 하는지도 모르는 전쟁은 딱 하나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병사를 움직이는 것은 정도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법으로 하라고 한 것이다. 무력을 먼저 쓰는 것은 자신이 정도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상식에서 어긋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이하게 하라는 것이다. 적이 싸움을 먼저 걸어와 피하지 못한다 하여도 그것이 정법이라고는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무사라는 것은 천하를 취하기 위해서 발버둥 치지 말라는 것이다. 천하를 취할때는 아무일이 없어야 한다. 자연스럽게 천하가 굴러들어와야한다. 무력으로 천하를 장악하려 하지마라. 바퀴 벌래가 싱크대위에서 깔깔거리는 것과 똑 같을 뿐이다.
백성들이 생업에 종사하는데 규제가 심하다. 정권이 무서워서 밖으로 나다니기도 힘이들다. 그럼 당연히 백성은 가난해 진다. 일을 하지 못하는데 부유해질 턱이 있는가.
하나를 가지고 있으면 두 개를 가지고 싶어한다. 나보다 좋은 것을 가진 사람의 것을 빼앗으려고 한다. 백성들이 각기 이로운 것을 가지고 있으면 서로 빼았으려고 한다. 그것이 사람의 욕심이다. 기술이 발달해서 우리는 무수히 많은 물건들을 만들어 놓았다. 이제는 이러한 물건들이 사람을 헷갈리게한다. 사람이 보이지 않고 옷이 보있다. 차가 보인다. 차가 그 사람을 대변한다.
법은 무엇인가. 서로간에 믿지 못하는 불신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서로간의 신뢰가 무너져서 나온 것이 아닌가. 인간의 정이 메말라가면서 더욱 발전한 것이 법이다. 법령이 많다는 것은 그많큼 범죄가 많다는 것이다. 법령이 많아져서 범죄가 생긴 것이 아니다. 법령을 많이 만들어야 안심을 하는 우리들의 마음이 법을, 범죄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법은 불안에서 나온다.
강제로 사람을 규정하지 않는다. 스스로 규제하게 만든다. 물은 길을 일러주지 않아도 대해로 들어가는 길을 알고 있다. 사람만이 길을 알려주어도 그 길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누구나 이런 말을 할 수 있다. 법이 범죄를 만든다고? 그럼 지금 법을 없애면 범죄고 없어지겠네. 당신 말이야 법이 없어진 사회를 생각할 수 있어. 곳곳에서 범죄가 일어날 걸, 아마 그 첫 희생자가 당신이 될 지 누가 알아. 그래서 노자는 말한다. 나는 무욕할 뿐이다. 그거면 된다.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 생각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하든지간에 나만 무욕하면 된다. 다른 사람이 하기 때문에 나도 어쩔 수 없이 한다라고 핑계를 대지 마라. 그것은 자기 기만일 뿐이다. 나만 무욕하면 된다. 그렇게 그렇게 하면 모두들 원래의 순수상태로 돌아간다. 나만 돌아가면 된다. 그때까지는 법과 용기가 필요하다. 홀로 길을 가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어려운 길이기 때문이다. 내일로 미루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내일로 미룰 시간이 없다.


쉰 여덟째 장
직역
그 정치가 사리에 멍청하고 어두을 수록 그 백성들은 순박해 진다.
그 정치가 살피고 살필면 그 백성들은 이지러지고 이지러진다.
화여, 복이 의지해 있다.
복이여, 화가 업드려 있다.
그 끝을 어찌 알겠는가.
그 바름이란 없다. 바름이 바뀌어 기이함이 되고,
좋음이 바뀌어 요사스러움이 된다.
사람이 미혹한 그날이 오래되었구나.
이런 까닭에 성인은 모나면서도 나누지 않고,
날카로우면서도 상처내지 않고,
곧으면서도 방자하지 않고,
빛나면서도 광휘를 뿌리지 않는다.


해석
정치는 멍청하게 해야 한다. 자신의 손익득실을 따지고 정치를 하면 안된다. 그리고 자신의 이익에 따라서 강제로 사람들을 통제하지 않는다. 그럼 백성들도 서로 다투지 않게된다. 왜 자신에게 더 많은 것을 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치가들이다.
정치가들이 손익계산과 주판을 두드리면서 이것저것 살피면서 이리저리 왔다 같다가한다. 그럼 백성들의 가슴은 탄다. 그리고 오늘은 이렇게 내일은 저렇게 정책들을 바꾸어 버린다. 좋은 말로 시류를 탄다는 것이다. 정치가는 이익집단의 뜻에 따라서 정치를 하면 안된다. 소신껏 일을 해야 한다. 정치가는 자신의 소신을 먼저 밝힌다음 유권자에게 표를 구해야 한다. 먼저 표를 얻고 자신의 눈치껏 정치를 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소신이 유권자와 맞지 않으면 정치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소신과 유권자의 뜻이 맞으면 소신껏 정치를 하면된다. 시류를 탈필요가 없다. 시류가 자신의 소신과 어긋나면 유권자들이 자신을 찍지 않을 것이다. 그럼 무엇을 해보겠다고 나서지 마라. 조용히 물러나 있어라. 그럼 그 몸을 보전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시류를 타겠다고 계속 자신을 변화시키면 끝내 그 몸을 망칠 것이다. 정치는 초지일관 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사람의 길이 자신의 길과 같다면 유권자들이 찍어 줄것이고, 유권자들이 자신을 찍지 않으면 그들이 자신의 방법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집에서 편히 쉴 것이다. 정치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은 아직까지 대부분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아닌가. 굳이 몸을 망치려 들지 말기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은 자신에게 아주 탁월한 탁견이 있어서 시대에 우뚝서고 다른 이론들을 단칼에 베어버릴 수 있어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백성들이 원하지 않으면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겠다고 백성들을 끌고 가지 않는다. 억지로 자신의 방법을 이루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설사 백성들이 따라서 일이 이루어 졌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의 공덕을 알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빛이 나도 광휘를 뿌리지 않는 것이다. 성인은 방법만을 제시해줄 수 있을 뿐이다. 그 방법대로 행동하는 것은 백성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백성들이 깨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지금의 성인은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고, 교육을 해야 하는 것이다. 보라 역대의 성인중에 정치를 한사람이 있는가를, 그들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가리켜 왔다. 천하를 떠돌면서 사람들의 의식이 꽃피도록 했다. 그것이 성인의 길이다.


쉰 아홉째 장
직역 다시할 것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데는 아낌 같은 것이 없다.
무릇 오직 아낄줄 아는 것을 일컬어 일찍 회복되는 것이라 한다.
일찍 회복되는 것 그것을 일컬어 덕을 거듭 쌓는다고 한다.
덕을 거듭 쌓으면 곧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 없고,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 없으면 즉 그 끝을 알지 못한다.
그 끝을 알지 못하면 나라를 얻을 수 있다.
나라를 얻은 그 어미는 넓고 오래가는 것이니,
이것을 일컬어 뿌리가 깊고 단단하고, 오래 살고 오래 보는 도라 한다.


해석
이장은 개벽장이다. 개벽전사 원의 도움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아낌이라는 것은 樸散則爲器를 일컷는 것이다. 그런데 노자는 왜 다함을 알지 못하면 나라를 얻는다고 했을까. 이것에 대해서 개벽전사는 그 당시 사람들이 나라를 얻으려고 했기 때문에 방편으로 제시했다고 말했다. 즉 나라라는 그들의 꿈을 내세워 자신의 방법을 행하게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덕을 쌓는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베푼다. 그것이 점점 퍼져 나가면 나라가 스스로 복속해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 나라를 얻는 근본은 바로 덕이다. 이 덕이야 말로 오래 살고 오래가는 도이다. 이 덕의 실천은 아낌이다.


예순째 장
직역
큰 나라 다스리기를 작은 생선 �는 것 같이하라.
도로써 하늘 아래에 임하면, 그 귀신들이 신령하지 않다.
그 귀신들이 신령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 신령함이 사람을 해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신령함이 사람을 해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인도 또한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무른 양자는 서로 상하지 않으니 그러므로 덕이 서로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해석
이 장도 개벽장이다. 작은 생선조리는 자꾸 손을 대면 안된다. 자꾸 손을 대면 먹을 것이 없다. 왜 냐하면 쪼개저 버리기 때문이다. 도의 길을 가는 사람은 귀신도 그를 상하게하지 못한다. 사람이 상하는 까닭은 남을 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남을 상하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상처를 입어야 한다. 왜 그런가 다른 사람을 이유없이 상하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마음부터 모질게 먹어야 한다. 그럼 자신의 순박함이 사라진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때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주먹을 써야 한다. 에너지의 소비이다. 다른 사람을 비방하기 위해서는 함정을 파야하고 잔대가리를 수없이 굴려야한다. 스스로 몸을 혹사한다. 그래서 얻는 것이 무엇인가. 부귀공명인가. 그것이 중요한가 몸이 중요한가. 그렇기 때문에 남을 상하게 하는 사람은 자신의 상처를 감수해야 한다. 귀신이라고 해도 아무런 이유없이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 도의 길을 가는 사람은 귀신이 자신이 상처를 입어서까지라도 그를 상하게 할 이유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상하지 않는 것이다. 성스러운 사람도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는다. 그를 상하게 할 이유가 없다. 자신이 상해가면서 까지. 서로가 서로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서로가 자신에게 상처를 내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의 덕이 쌓아져 갈 수 있는 것이다.


예순 한째 장
직역
큰 나라라는 것은 아래로 흐르는 것이다.
하늘 아래가 그것으로 교류하고 하늘 아래의 암컷이다.
암컷은 항상 고요함으로써 수컷을 이기고,
고요함으로 아래에서 행한다.
그러므로 큰 나라는 작은 나라에 자신을 낮추면 즉 작은 나라를 얻을 수있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에 자신을 낮추므로 즉 큰 나라를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혹은 낮춤으로 취하고, 혹은 낮추기 때문에 취한다.
큰 나라는 사람이 순존하는 것 이외에는 더 욕심을 내지않고,
작은 나라는 사람밑에 들어가 섬기기를 바라는 것 이외에는 더 욕심을 내지않는다.
대저 양자가 각기 그 바라는 바를 얻을 수 있으니,
큰 나라는 낮추는 것을 잊지 마라.


해석
이 장 부터는 해석이 사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조금씩이나마 얻은 바를 설명해 보겠다.
큰 나라는 힘을 가진 나라이다. 주위의 약소국들이 큰 나라의 힘을 두려워하여 전전긍긍한다. 그래서 작은 나라들은 큰 나라에 눈치를 살피며 살 수밖에 없다. 그런데 큰 나라가 자신의 힘을 믿고 횡포이 군다면 작은나라들은 언제인가 힘을 키워서 큰 나라에 반기를 든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큰 나라라고 해서 강한 힘으로 약소국을 지배할려고 해서는 않된다는 것이다. 큰 나라가 약소국에게 먼저 자신을 낮추어 행동하면 작은나라는 큰 나라에 의지하게 되어있다. 즉 동맹의 관계가 형성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주종의 관계가 된다면 결국에가서는 분쟁과 싸움만이 남게 된다. 이때에 중요한 결정권자는 힘을 가진자이다. 약소국은 강국에게 어떠한 식으로든지 따라가게 마련이다. 이때에 큰 나라가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여 통치한다면 오래가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예순 둘째 장
직역
도라는 것은 만가지 것의 보금자리요,
좋은 사람의 보배이며, 좋지 못한 사람도 보유하고 있다.
아름다운 말은 시장에 어울리고, 고귀한 행동은 남에게 부담을 준다.
사람이 좋지 못하여도 어찌 그것을 버리겠는가.
그러므로 천자로 서서, 삼공을 두고,
비록 보석을 바쳐들고 사두마차를 앞세워도
앉아서 이 도에 나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
옛부터 이 도를 귀하게 여긴 것은 무었때문인가.
안된다고 하여도 이것으로 구하면 얻고,
죄가 있어도 이것으로 면책을 받음이 아닌가.
그러므로 하늘 아래 귀하게 여긴다.


해석
좋은 사람은 도를 보배로 여기고 잘 간직을 하고 키워간다. 좋지 못한 사람도 도를 가지고 있다. 도는 좋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남에게 아름답게 꾸며서 물건을 팔고, 위선된 행동을 해도 그 도는 떠나지 않는다. 아니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의 깊은 곳에는 도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이 되어서 장관들을 거느리고 돈 다발을 들고서 리무진을 타고 다녀도 이 도에 나가는 것만 못한 것이다. 그러한 일들이 영원하리라 보는가. 잠깐의 순간이다. 영화가 크면 클 수록 사라지고 난뒤의 폐허는 더욱 클 뿐이다. 외면의 것은 모두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내면의 도뿐이다.
죄는 없다. 단지 조금 빗나갔을 뿐이다. 도로 다시 돌아오면 된다. 도로 돌아오면 될뿐이다.


예순셋째 장
직역
함이 없음으로 행하고, 일이 없음으로 일을 하고, 맛이 없음으로 맛을 보라.
크고 작고 많고 적은 원한을 값을 때 덕으로 한다.
어려움은 쉬울 때 도모하고, 큰 것은 그것이 작을 때 행한다.
하늘 아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것에서 시작하고,
하늘 아래 큰 일은 반드시 작은 것에서 시작한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끝까지 큰 일을 하지 않으므로
능히 그 큼을 이룬다.
무릇 가볍게 응낙하는 것은 반드시 믿음이 적고
쉬운 일이 많으면 반드시 많이 어렵게 된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오직 그것을 어렵게 한다.
그러므로 끝까지 어려움이 없다.


해석
보답을 바라지 않고 일을 하고, 일을 한다는 생각이 아니라 즐긴다는 생각으로 일을 한다. 즉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에 있어서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은 오락이다. 즐거움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이 된다면 매우 힘든 일이다. 자신이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것이다. 일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데 그것이 일이 되는 것이다.
아주 작은 병이 있다. 몸에 상처가 조금 났다. 그때 치료를 하면 �챦다. 그러나 아주 작다고 그대로 방치하다가 더 큰 병을 불러올 수 있다. 감기가 아주 작은 병이라고 생각을 하고 치부하다가 폐렴으로 번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폐렴으로 번지기전에 처리를 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큰 일은 작은 데서 시작한다. 소홀한 관리 때문에 다리가 무너지고 무수한 인명을 �아가는 큰 일이 된다. 불은 아주 작은데서 일어난다. 그러나 건물 한채를 태우는 것은 순식간이다. 성인은 큰 불을 앞에 나서서 끄는 사람이 아니다. 큰 불이 나기전에 사전에 관리를 철저히 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고, 큰 일을 하지 않는 것 처럼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더 큰 일인 것이다. 아주 쉽다고 다음으로 미루는 것을 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미루기 때문에 아주 쉬운일이 어려운 일이된다. 쉬운일이 �치면 모두 어려운 일이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성인은 그때에 그 일을 끝마친다.


예순네째 장
직역
그것이 편안할 때 가지기가 쉽고, 그 조심이 나타나지 않을 때 계획하기 쉽다.
그것이 연약할 때 부서지기 쉽고, 그것이 미세할 때 흩어지기 쉽다.
그것이 아직 있지 않을 때 하고, 그것이 아직 어지럽지 않을 때 다스려라.
합쳐서 끌어안는 나무도 새싹에서 생기고,
아홉층의 누대도 한줌 흙에서 일어난다.
천리의 걸음도 발아래에서 시작한다.
할려는 자는 패할 것이고, 잡으려는 자는 잃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함이 없으므로 패함도 없고,
잡음이 없음으로 잃음도 없다.
사람들이 일하는 것은 항상 거의 이루다가 패한다.
끝을 삼가기를 시작과 같이 하라, 그러면 패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성스러운 사람은 욕망이 없기를 바라고,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배우지 않음을 배우고, 뭇 사람이 지나치는 곳으로 돌아간다.
이리하여 온갖 것이 스스로 그러함을 돕고.
감히 행하지 않는다.


해석
움직이는 것을 잡기는 어렵다. 땅투기는 그 조짐이 일기전에 땅을 사두어야 한다. 땅 값이 오르기 시작하면 것잡을 수 없게 된다. 즉 일을 닥치기전에 미리 계획을 해두면 편하다. 지금 눈앞의 이익만을 보지 않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도 염두에두고 행동을 한다.
合包之木이라는 것은 서로 껴안아서 닿을 수 있는 나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주 굵은 나무이다. 이런 나무도 그 시작은 매우 미미한 것이다. 일을 할 때에는 큰 나무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새싹을 가지고 해야 편하다. 일이 작을 때 미리 미리 해두는 것이 좋다. 그리고 끝이 다�다고 방심하지 마라. 이렇게 하면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쉽다. 그러나 실제의 삶속에서 이렇게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성인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데로 행동하는 사람이다.


예순 다섯째 장
직역
예로부터 도를 잘 행하는 자는
그것으로 백성을 밝게 하지 않고, 그들을 어리석게 하였다.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이 어려운 것은 그들이 지혜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나라를 도적이오,
지혜로서 나라를 다스리지 않는 것이 나라의 복이다.
이 두가지를 아는 것이 또한 둘도 없는 형식이니,
항상 이 형식을 아는 것을 가리켜 그윽한 덕이라고 한다.
그윽한 덕이여 깊도다. 멀도다.
사물과 더불어 되 돌아간다.
그러한 이후에 큰 따름에 이르게 된다.


해석
밝다는 것은 똑똑하게 한다는 뜻이다. 백성들이 똑똑하면 똑똑할수록 나라를 다스리기가 어렵다. 그래서 현대의 독재정권들은 3S(스포츠, 스크린, 섹스)로 사람들을 어리석에 만들었다. 그렇다면 노자는 이런 우민화 정책을 군주에게 권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우민화정책이 아니다. 정치를 하는데 어려움은 무엇인가. 바로 서로의 이익을 조절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사람과 그 기득권을 향해서 달려드는 사람들을 조정하는 일이다. 이제는 댐하나, 다리하나, 도로도 정부가 마음대로 놓지 못한다. 왜인가. 군사정권이 아니라 문민정부이어서 그런가. 그런것도 있지만 이제는 양보할 줄 모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것을 하나라도 더 찾기 위해서 밝은 대낮에 커다란 후랫쉬를 들고 설치는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 공익을 위해서 무얼하자고 한다면 사람들은 찬성은 한다. 단. 단 자신의 것에는 손을 대서는 안된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바대로 한뎌면 상관이 없다. 모두들 그렇게 말한다. 공익을 위해서 해도 좋다. 그러나 최소한 자신에게 조금의 손해라도 와서는 안된다. 그것이 공익을 위한다는 명분이 있어도 안된다. 그래서 강 상류 지방의 주민들이 생계를 위해서 마을에 공장을 유치하려고 하면 하류 지방의 사람들, 의회는 벌떼 같이 일어난다. 그러나 상류 주민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 하류지방의 자금을 끌어다 쓰려고 하면 얼굴을 붉히며 따진다.
“왜 우리돈을 다른 곳에 쏟아 붙는가. 상류 지방의 주민들은 그들이 알아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조금씩 양보하는 것이 편하고 이롭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드물다. 지금은 메스미디어가 너무나 잘 발달이 되어 있다. 이런 때에 정부는 사람들을 어리석게 만드는 정책을 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약간의 손해를 보는 것이 후일 큰 얻음으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확실히 제시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 우리의 현실에 있어서는 꿈인가 보다. 한 두명의 천재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곤 한다고 말한다. 이익을 �는 방향일 때는 그렇다. 그러나 대도를 따르는 길일때는…….
사물과 함께 되돌아가는 이 길이야 말로 큰 따름이다. 바로 존재계를 따르는 것이다. 근원에의 회귀이다.


예순 여섯째 장
직역
강과 바다가 능히 백개의 계곡의 왕이 되는 바가 있는 것은,
그들의 아래를 좋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히 백개의 계곡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백성의 위에 서고자 바란다면 반드시 말로써 그들의 아래에 있을 것이오.
백성에 앞서고자 바란다면 반드시 그 몸을 그들의 뒤에 둘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성인이 위에 있어도 백성이 무겁지 않고,
앞에 있어도 백성이 해롭지 않다.
이런 까닭에 하늘 아래가 즐겁게 밀면서도 싫어하지 않는다.
이렇게 함으로 그는 다투지 않으니,
그러므로 하늘 아래 능히 그와 더불어 다투지 않는다.


해석
바다가 큰 이유는 포용력이 있기 때문이다. 바다에는 온 갓 강에서 흘러드는 물이 모여든다. 바다는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 찬물 뜨거운 물을 가리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크게 되는 것이다. 인간사도 마찬가지 이다. 자신에게 조금 이롭다고 사귀고, 조금 감정을 상하게 했다고 떠나면 결국에 자신의 옆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된다. 바다는 강물이 싱겁다고 차별하지 않는다. 자신의 품에서 짜게 만든다. 강물은 자신의 개성을 잃어버린다. 그래도 강물은 바다로 몰려든다. 그것은 바다가 스스로 자신을 낮추기 때문이다.
남의 위에 서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힘과 권력, 돈으로 남의 위에 선다. 그러나 이런 자리는 항상 위협을 받는다. 언제 자신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 자신을 꺼꾸러 뜨릴지 모른다. 그리고 자신이 꺼꾸러 지면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은 그를 멸시하게 된다. 그러나 성인은 스스로 낮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렇기 때문에 편안한 마음으로 그를 추대한다. 그리고 그와 다투지 않는다. 왜냐햐면 그는 항상 자리에서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다른 사람이 하고 싶어하면 자리를 비워준다. 자리가, 권위가 무엇인가. 부정부패를 하지 않는다면 그 보다 힘든 자리도 없다. 그는 항상 물러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바다로 남는다. 강물이고자 하지 않는다.


예순 일곱째 장
직역
하늘 아래가 모두 나의 도가 크다고 말하나,
비슷할 뿐 닯지 않았다고 한다.
무릇 오직 크기 때문에 그러므로 비슷할 뿐 닯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닮은 것이라면 오래도록 그것이 미세한 것일 따름이다.
나에게 세가지 보물이 있는데, 지니고 그것을 보존 한다.
하나는 자애이고,
둘은 검소함이고,
셋은 감히 천하 앞에 나서서 행하지 않는 것이다.
자애로운 까닭에 능히 용감하고,
검소한 까닭에 능히 넓을 수 있으며,
감히 천하 앞에 나서서 행하지않기 때문에 그러므로 능히 그릇의 으뜸이 된다.
지금 자애를 버리고 용함할려하고,
검소함을 버리고 넓을 려고 하고,
뒤를 버리고 앞서려고 한다면
죽음 뿐이다.
무릇 자애로 싸운다면 싸움에서 이길 것이고, 그것으로 지킨다면 견고할 것이다.
하늘이 장차 그를 구하려 한다면 자애로써 그를 보호한다.


해석
지구는 크다. 그래서 축구공같지 않고 바둑판 같다고 생각을 했다. 대도는 그런 것이다. 그 속에 파 �혀 살기 때문에 지구가 얼마나 큰지 모르고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것과 같다.
용기는 무엇인가. 자신의 힘자랑을 하는 것이 용기인가. 자신보다 약자 앞에서 어깨를 으쓱이는 것이 용기인가. 아니다. 그것은 힘만 있으면 누구나가 할 수 있는 것이다. 힘이 있으면서도 굽힐줄 알고, 힘이 딸리면서도 나설 줄 아는 것이 용기이다. 강자라고 알려진 사람에게 덤빌 수 있는 것이 용기이다. 그냥 무조건 덤비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옳다는 신념을 가지고 하는 일이 강자에 의해서 제지될 때 나서는 것이 용기다. 그것은 자신과 같이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없이는 힘이 든다. 누군가를 위해서, 스스로 부서질 줄 알면서 나가는 것이 용기이다. 힘이 있으면 누구나가 용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용기가 아니다. 자신에게 힘이 있어도 자신이 잘못을 했다는 생각이 되면 무릎을 꿇고 사과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용기이다.
검소함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검소하면 넓게 쓸 수 있다. 생활에서 쓸때 쓸 줄아는 것이 검소한 것이다. 그리고 굳이 쓸 필요가 없는 것은 쓰지 않는 것이 검소함이다. 이렇게 산다면 넓게 줄 수가 있는 것이다. 넓게 고를 수가 있는 것이다. 쓸모도 없는 호화상품을 사서 정작 필요한 것을 사지 못하고, 필요한데 쓰지 못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으면서도 남들이 사니까 사는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엄청나게 많이 하고 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가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을 해보았다. 지금 당장 나에게 필요는 없지만 남들이 사니까 나도 사는 군중심리에 의해서 일어난 사회적 표현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앞서기 위해서는 뒤가 있어야 한다. 모두 앞서겠다고 달려나가면 뒤가 없게 된다. 그리고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면 결국에 가서 서로간의 싸움은 불가피하다. 왜냐하면 모두 목표로 하는 것은 아주 조금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자신이 갈길이 아니라면 뒤로 물러설 필요도 있는 것이다. 자신의 관심밖의 것에서 앞서려고 하지 마라. 설혹 남들이 돌아보지 않는 길이라고 하여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매진하라. 그러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앞서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애정이 없는 용기는 폭력이다. 자신의 힘만 믿고 날뛰고, 검소할 줄 모르고 낭비를 하고, 매사에 일등만 할려고 몸을 혹사하면, 결국에 남는 것은 한장의 부고장 뿐이다.
애정을 가지고 싸운다면 지지는 않는다. 자신의 이상을 가지고 싸운다면 고통스럽지 않다. 그리고 정으로 똘똘뭉친 곳은 꺽을 수 없다.


예순 여덟째 장
직역
장수 짓을 잘하는 자는 무력쓰지 않는다.
싸움을 잘하는 자는 노여워 하지 않는다.
적을 잘 이기는 자는 맞서지 않는다.
사람을 잘 쓰는 자는 그 아래에서 행한다.
이것을 일컬어 싸우지 않는 덕이라 한다.
이것을 일컬어 사람을 쓰는 힘이라 한다.
이것을 일컬어 하늘에 필적한다고 한다.
옛부터 지극함이다.


해석
제갈공명은 칼 싸움을 하지 않는다. 그는 한 칼에 쓰러질 약졸이다. 그러나 조조의 대군도 그의 머리에 자주 패했다. 장수는 칼을 믿고 싸우는 자가 아니다. 칼을 믿고 싸우는 자는 병사들이 주로 할 일이다. 장수는 머리로 싸운다. 그리고 포카나 고스톱을 처본적이 있는가. 그때 조금 잃었다고 열받아 하면 어떻게 되는가. 열받고 이성을 잃을 수록 돈을 많이 잃는다. 고수는 자신의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적과 주먹질을 하는 것은 어리석다. 어쨌든 자신이 한대를 맞아도 손해이다. 외교술과 협상으로 적을 승복시킨다. 무력은 맨 마지막에 억지로 쓸 일이다. 사람이 일을 할때는 그 일이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을 해야 일을 잘한다. 그래서 사람을 쓸려거든 그 사람들에게 그일에 대한 주인의식을 불어 넣는 것이 중요하다. 그 방법은 자신이 일하는 사람들의 아래에 처하는 것이다. 이런걸 보면 노자는 잔대가도 잘 굴리는 사람이라고 생각이 든다.


예순 아홉째 장
직역
병사를 쓰는데 이런 말이 있다.
나는 감히 주인이 될려고 하지 않고 객이 될려고 한다.
감히 촌보를 나가려 하지 않고 한 척을 물러날려고 한다.
이것을 일컬어 감이 없는 감이오, 팔이 없이 치고,
병기 없이 잡고, 이에 적이 없게 된다.
화는 적을 가벼이 여기는 것보다 큰 것이 없다.
적을 가벼이 여기면 거의가 자신의 보물을 잃게된다.
그러므로 싸우는 병력이 서로 비슷할 때는 슬퍼하는 자가 이긴다.


해석
객은 그 집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제 삼자의 입장에 서야 적과 나를 비교할 수 있다. 적과 나를 동등한 위치에서 놓고 볼 수 있기 위해서는 객이 되어야한다. 그리고 이길려고 성급히 나가지 않는다. 싸움은 희생을 부를 뿐이다. 이기는 것은 자신의 병력이 적게 희생하는 것이다. 이김만 생각하고 자신의 병력을 많이 희생하는 것은 결국 지는 것이다. 적의 병사가 모두 죽고 자신의 병사도 거의 죽었다면 승리는 누가 한 것인가. 자신의 병사와 자기는 이긴 것이 아니다. 살아 남았을 뿐이다. 전쟁은 싸워서 적을 많이 죽이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의지를 적에게 관철 시키는데 있다. 살육은 무의미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병력이 희생하는 것을 애통이 여기는 사람이 이기게 된다.


일흔 째 장
직역
나의 말은 매우 쉽게 알 수 있고, 매우 쉽게 행할 수 있다.
하늘 아래가 능히 알지 못하고, 능히 행하지 못한다.
말에는 근원이 있고, 일에는 우두머리가 있다.
무릇 오직 알지 못함이다.
이런 까닭에 나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나를 아는 자는 드물다.
나를 본보기로 삼는 자는 귀하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갈포를 입고 옥석을 품는 것이다.


해석
도는 아주 쉬운 것이다. 그래서 어렵다.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쓰레기로 넘쳐난다. 아주 쉽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다.
노자는 탄식을 하고 있다. 자신이 말하는 것은 아주 쉽고 누구나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누구나 앞서려고하지 뒤에 서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뒤에 선다고 한다면 그와 다툴 사람이 없다. 경쟁자가 없다. 유아독존일 뿐이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온전히 보전 할 수 있다. 타고난 그대로 삶을 살아갈 수가 있다. 그러나 이렇게 살면 화려한 턱시도를 입지는 못한다.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초라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무엇과도 바꿀 수없는 보물을 가지고 다닌다. 그 보물은 알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스스로 발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흔 한째 장
직역
알면서도 알지 않는 것이 최상이오,
알지 못하면서도 아는 체하는 것은 병이다.
무릇 오직 병을 병으로 알면 이것은 병이 아니다.
성인은 병이 없다.
그 병을 병으로 알기 때문에 이런 까닭에 병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해석
자전거를 탈 줄 아는가. 자전거를 타면서 커브를 틀때 어느정도의 각도를 틀어야 자전거가 쓰러지지 않고 도는지 생각을 하는가. 그걸 생각하고 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모르고타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감각으로 길에 맞게 각도를 튼다. 그것을 말로는 표현하지 못한다.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아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앎이다.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는 것을 아는 것보다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최상의 앎이다.
교통사고가 났다. 그런데 의사가 없었다. 그래서 사촌이 의사인 사람이 나서서 의료행위를 하겠다고 깝죽댄다. 응급치료를 넘어서 전문치료를 한다고 상처에 칼을 댄다. 그럼 급한 환자가 얼나마 고쳐질까.
술을 먹는다. 그런데 얼마만큼 먹으면 몸에 해롭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적당히 마신다. 그럼 몸에 병이 생기지 않는다. 자신이 아픈지도 모르고 몸에 어디가 고장나는지도 모르면서 술을 먹는다. 그것은 큰 병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몸이 아프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을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많이 본다. 부귀공명을 위해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생존을 위해서 몸을 부셔가며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노자가 말한 삶을 살 수가 있을까. 문득 회의가 든다. 자신의 몸에 병이 들어 점점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을 해야만 하는 현실이 무섭기까지 하다. 이런 현실에서 물러나 있다고 자신의 한 몸을 보존 할 수 있는가. 굶어 죽기 딱 알맞은 말을 한 것은 아닌가. 병을 알아도 치료할 수 없는 현실은 어떻게 하는가. 고민이다. 내가 버려야 할것은 무엇인가.


일흔 두째 장
직역
백성들이 두려워할 위엄이 없으면 즉 큰 두려움이 온다.
그 사는 곳을 업신여기게 하지 말고, 그 살아가는 바를 싫어하게 하지 마라.
무릇 싫어하는 것이 없게 해야, 이것으로 그 삶을 싫어하지 않게된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자기를 알면서도 스스로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을 아끼면서도 스스로 높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해석
사람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권위가 있어야 한다. 이 권위라는 것은 사람들이 그것에 따라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즉 백성들이 따를 규범이 없다면 다스리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겨나게 된다. 백성들이 삶을 일일이 간섭을 하고, 그들이 삶을 지겹게 느끼게 된다면 어디선가 혁명의 세력이 싹트게 된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이 지겹다고 느끼는 것은 향락에 빠져 있을 때이다. 업무에 시달릴때는 지겹다고 느끼지 않는다. 힘들다고 느낄 뿐이다. 위정자가 지겨운 것은 향락에 지칠때이다. 그렇게 할려면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야된다. 그럼 백성들은 자신의 삶을 지겹게 느끼게 된다. 그런데 노자의 시대와 지금 시대의 정치형태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지금은 백성들이 지겹게 여기면 위정자를 갈아치우면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노자는 자신이 짤리지 않고 위에 서는 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래 정권을 잡고 싶으면 백성들이 지겹게 느끼지 않게 해야한다. 힘들게 느끼는 것과는 다른 의미이다.


일흔 셋째 장
직역
감히 하는 일에 용감하면 곧 죽는다.
감히 무엇을 하지 않는데 용감하면 즉 산다.
이 두개는 혹은 이롭고 해롭다.
하늘이 그 싫어하는 바, 누가 그 까닭을 알겠는가.
이런 까닭에 성인은 오직 그것을 어렵게 여긴다.
하늘의 도는 다투지 않으면서도 잘 이기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잘 응하고,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오고,
천천히 하면서도 잘 꾀한다.
하늘의 그물은 크고 넓어서 성글하면서도 잃지 않는다.


해석
감히 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할때, 그리고 거대한 힘 앞에 도전할때, 그때가 감히 나서는 일이다. ‘쬐끄만게 감히 내 앞에서’라는 말이 있다. 개미가 탁자 위에서 그대를 똑바로 보고 여긴 내땅이라고 소리치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이 개미와 같은 상황일때가 감히 나서는 것이다. 무수한 사람들이 그를 막는다. 따라서 적이 많다. 적이 많으나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일을 한다. 그것은 용감한 것이다. 그러나 곧 죽는다. 적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일에 슬쩍 빠지면 산다. 몸을 보존할 수 있다. 그럼 하늘은 어느것을 싫어할 것인가. 그것은 상황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 앞에서 나선다고 다 용감한 것이 아니고 뒤로 물러선다고 해서 다 겁쟁이는 아니다. 매사에 때에 �추어서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성인은 나서고 물러남을 어렵게 생각한다.
하늘의 도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사과나무는 때가되면 열매가 열린다. 봄에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게 하려고 옆에서 장작을 때지 않는다. 물론 온실재배하고 최첨단 과학을 이용하면 가능하다. 그러나 이렇게 억지로 하지 않아도 때가되면 자연스럽게 열린다.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라고 수천번 주문을 외어도 때가 되지 않으면 안열린다. 가을이 오라고 소리쳐도 때가 되지 않으면 가을은 오지 않는다. 지금 급하고 빨리 되어야 하는데 아직 일이 이루어 지지 않은 걸 보면서 혹시 하늘이 잘못 길을 든것이 아닌가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늘의 그물-법도-은 크지만 노치는 것은 없다. 성인도 하늘의 법도처럼 때에 �추어 행동을 한다. 그렇다고 기회주의자로 오도하지는 마라. 성인은 자신의 이익에 따라서 변화하지 않는다. 대도를 따를 뿐이다.


일흔 넷째 장
직역
백성들이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죽음으로 그들을 두렵게 하겠는가.
만약 백성으로 하여금 항상 죽음을 두려워 하게하는데도,
기이한 행동을 하는 자가 있으면,
나는 잡아 얻어서 그를 죽일 것이다.
누가 감히?
항상 죽임을 맏은 자가 있으니 그가 죽여야 한다.
무릇 죽음을 맏은 자 대신 죽인다면,
그것을 일컬어 장인 대신에 깍는다고 할 것이다.
무릇 장인 대신에 깍는 자중에, 그 손을 다치지 않는 자가 드물다.


해석
죽음이 두렵지 않다. 그런 사람을 죽음으로 위협할 수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다른 무엇으로도 그를 두렵게 하지 못한다.
개인에 따라서는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도 있다. 자신의 명예가 회손되거나 대가 끊기는 것을 자신의 죽음보다 중요하게 여긴 경우도 있다. 어떻게 생각을 하면 죽음은 최후의 도피처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죽음을 도외시 한다면 그를 통제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우선은 백성들에게 죽음이 두려운 것이라는 것을 인식시켜야한다. 그럼 왜 죽음을 두려워 해야 하는가. 그것은 기이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다. 사회를 이루고 조직을 이루어 살아갈려면 서로 조금씩 양보를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만든것이 규범이다. 그러나 이 규범을 지키지 않는다면 제제를 가해야 한다. 이 제제중에서 가장 큰 것이 사형이다. 그러나 이 사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규범도 설수가 없다. 그러나 규범을 어겼다고 해서 누가 그를 심판할 수 있겠는가. 노자는 죽음을 관장하는자에게 일을 맏긴다. 그는 인간이 아니다. 법관이 아니다. 자연이다. 거침없이 구애없이 흐르는 강물이다. 대해다. 그걸 대신하겠다고 나선다면 나서는 자도 다친다. 성경에 이런 말이 있다. 노자에 왠 성경할지 모르나 예수와 노자는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예수가 제자들을 이끌고 바리새인의 마을을 지날 때였다. 그때 사람들은 재판을 통해서 창녀를 돌로 쳐죽이기로 했다. 그러나 예수가 나서서 그들을 막았다. “죄 없는자 돌로치라” 그러자 사람들은 차마 그를 치지 못했다. 그러자 율법학자들이 나섯다. 그러자 예수는 그들의 죄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자 율법학자들이 도망을갔다. “이 여인의 죄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이 심판 할 수 있다. 그리고 여인이여 그대의 죄는 사함을 받았다.” 창녀가 죄인인가. 그 여인을 창녀로 몰고간 사람들이 죄인인가.
죄인을 욕하는가. 죄인을 감정적으로 증오할 수는 있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죄가 있다면 당연히 사회적인 격리가 필요하다. 죄인에 대한 처벌을 하나님 아버지에게만 맏긴다면 사회는 성립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죄란 무엇인가. 인간이 만들어낸 가치규범에서 벗어난 것이 아닌가. 그것이 자연의 법 신의 법과 어긋나지 않는다고 어떻게 보증을 하는가. 선과 악은 시대에 따라서 달랐다. 그리고 하나의 행위도 시대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평가되었다. 과연 절대적인 선과 악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인간이 평가할 것이 아니다. 단지 그 시대의 사회적 규범을 지키기위한 법이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관점을 가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일흔 다섯째 장
직역
백성이 굶주리는 것은,
그 윗사람들이 세금을 너무 많이 먹기 때문에 굶주리는 것이다.
백성들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그 윗사람들이 할려고 하기 때문에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다.
백성들이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그 윗사람들이 삶을 두텁게 구하기 때문에 죽음을 가볍게 여긴다.
대저 오직 억지로 삶을 살지 않으려는 자가
삶을 귀하게 여기는 자보다 현명하다.


해석
자신의 삶을 인생을 귀하게 여긴다. 그래서 자신만 잘살려고 나만이라도 살아 남기 위해서 착취를 한다. 그리고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쥐어짜고 자신의 왕국을 지키기 위해서 성을 쌓게 한다. 그렇게 하면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자연히 어럽게된다. 그리고 자신은 고대광실에 살면서 백성들은 초목근피로 연명하게 하면 백성들은 상대적인 박탈감과 절대적 빈곤속에서 삶을 지겨워 하게 된다. 그럼 백성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반란을 일으킨다. 자신의 삶을 억리로 윤택지게 하지 마라. 스스로 자족할 줄 아는 자가, 자기만 살겠다고 날뛰는 자보다 현명한 것이다.


일흔 여섯째 장
직역
사람이 살아 있으면 부드럽고 약하고, 그것이 죽으면 견고하고 강하다.
온갖 사물과 풀과 나무중 살아있는 것은 부드럽고 연하다.
그것이 죽으면 마르고 딱딱해 진다.
그러므로 견고하고 강한 것은 죽은 무리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살아 있는 무리이다.
이런 까닭에 병사들이 강한 즉 이기지 못하고,
나무가 굳센 즉 잘리고,
강하고 큰 것은 아래에 자리잡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위에 자리잡는다.


해석
살아 있는 것은 움직인다. 움직임은 살아 있음의 증표이다. 움직이기 위해서는 부드러워야 한다. 그리고 중력의 영향을 받아 강한 것은 아래로 가라 앉는다. 그리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간다.


일흔 일곱째 장
직역
하늘의 도는 활을 당기는 것과 같다.
높은 것을 억누르고, 아래것을 들어 올린다.
남음이 있는 것을 덜어 내고, 부족한 곳을 보충한다.
하늘의 도는 남는 것을 덜어내고,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 것이다.
사람의 도는 즉 그러하지 않다.
부족한 것을 덜어내어서 남는 것을 받든다.
누가 능히 남음으로써 하늘 아래 받들어 지는가.
오직 도가 있는 자 이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행하되 기대지 않는다.
공이 이루어 져도 자리 잡지 않는다.
그 슬기로움이 드러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해석
활을 당기면 위에 실이 묶여 있는 부분은 아래로 내려온다. 그리고 아랫 부분은 위로 올라온다. 그래야 활이 나간다. 이것이 하늘의 도이다. 물은 아래로 흐른다. 그래서 부족한 곳을 채운다. 자연계는 모두 이와 같다. 그러나 인간은 이렇지 않다. 가진곳으로 높은 곳으로 모든 것이 몰려간다. 이제는 돈이 돈을 번다. 거대 자본이 있는 곳으로 작은 소자본들은 모여든다. 자연의 법칙과는 완전히 상반된 행위이다.
바다는 넘치면서도 더욱 모여든다. 이것은 도에 있는 자이다. 그는 스스로 낯춘다. 바다와 같다. 바다는 남음이 있지만 강물들이 계속 모여든다. 그 이유는 낮게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주기 때문이다. 바다는 수증기를 하늘로 보낸다. 그래서 비가 오게한다. 바다가 수증기를 뿌리지 않는다면 모든 육지는 마르게 된다. 그리고 결국은 강물도 마르고, 강물로 살아가는 바다도 마르게 된다. 바다는 하늘에 수증기를 주기 때문에 낮게 처할 수 있는 것이다. 가장 낮은 것은 가장 높은 것과 서로 통하는 것이다.


일흔 여덟째 장
직역
하늘아래 물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은 없다.
그러나 견고하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데 그것을 이길 것은 없다.
그 것을 대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약함이 강함을 이기고, 부드러움이 굳셈을 이긴다.
하늘 아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건만, 능히 행하지 못한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말한다.
나라의 더러움을 지니는 이것을 일컬어 사직의 주인이라 한다.
나라의 상서롭지 못함을 지니는 이것이 하늘 아래 왕이 되는 것이다.
바른 말은 반대인 것 같다.


해석
자주 인용하는 말이지만 떨어지는 물은 바위를 꾀뚤는다. 물의 약함은 진정으로 약한 것이 아니다. 강함이 승화되어서 약해 보이는 것이다.
왕은 나라의 부귀를 한 몸에 가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왕이 아니라 도적이다. 왕은 천하의 일을 자신의 일로 삼고 뛰어다니는 사람이다. 따라서 나라의 온갖 일에 뛰어든다. 일이란 무엇인가. 힘들고 괴로운 것이다. 그리고 좋은 일은 서로가 나서서 할려고 하기 때문에 왕이 나설 필요가 없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나서서 하는 사람이 왕이다. 그래서 나라의 온갓 힘든 일을 나서서 하는 것이다. 임금이 되어서 부귀를 누리려 한다면 그는 도적인 것이다. 도적 중에서도 아주 큰 도적이다. 백성들의 고혈을 훔치는 자이기 때문이다. 노자의 왕관은 우리가 생각한 기존의 왕관과는 다르다. 하늘 아래를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이 바로 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왕은 역사 이래로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 정부가 들어선 지금의 현실에도 왕은 도적처럼 보이니 안타까운 일이다. 이러한 면에서 수천년전에 백성들을 위해서 온갖 어려움을 뒤집어 쓰고 나가는 왕을 찾은 노자는 꿈을 꾸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때에 이런 왕을찾다니, 그러나 이러한 꿈이 있었기에 세계는 그나마 지금 여기까지 와 있는 것이다. 노자의 시대보다는 지금이 더욱 이러한 왕을 만들기가 쉽다. 지금의 왕은 우리가 만들 수 있다. 한 표를 소홀이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지도자는 아주 작은데서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일흔 아홉째 장
직역
큰 원한은 화해해도 반드시 남는 원한이 있다.
어찌 잘했다고 하겠는가.
이런 까닭에 성인은 왼쪽에 계약서를 잡고 있어도,
그 사람을 책망하지 않는다.
덕이 있는 자는 계약을 하고,
덕이 없는 자는 현물로 거래를 한다.
하늘의 도는 친함이 없지만 항상 좋은 사람과 함께한다.


해석
원한을 만들지 마라. 원한을 만들고 화해를 하는 것은 아무리 잘해도 잘한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원한을 만들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최상이다.
덕이란 믿음이다. 상거래를 함에 있어서 신용거래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덕이 있는 사람이다. 종이 쪽지 한장에 물건을 빌려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한번 신용을 잃어 버린 사람은 현물(현찰)을 가지고도 거래를 하기 힘든 것이 상거래 이다. 덕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남을 믿을 뿐 아니라, 남도 그를 믿어 주는 사람이다.
하늘의 도는 편애를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좋은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것은 하늘이 그에게 가는 것이 아니고, 그가 하늘의 도를 따른 다는 것이다. 하늘의 도를 따르지 않는 것은 스스로 괴로움을 만드는 것이다. 하늘의 도를 따르면 하늘이 그를 돕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늘은 편견이 없다. 단지 하늘의 도를 따르는 사람이 그 길에 맞을 뿐이다.


여든째 장
직역
나라는 작게 하고 백성은 적게 하라.
백성으로 하여금 생활의 그릇이 있어도 쓰지 않게 하라.
백성으로 하여금 죽음을 무겁게 여겨서 멀리 옮겨 다니지 않게 하라.
비록 배와 수레가 있어도, 그것을 타는 바가 없게 하라.
비록 갑옷과 병기가 있어도, 그것을 진열하는 바가 없게 하라.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새끼를 매듭지어 사용하게 하라.
그 음식을 맞있게 하고, 그 옷을 아름답게 하고,
그 사는 것을 편하게하고, 그 풍속을 즐겁게한다.
이웃나라를 서로 바라보아, 닭과 개의 소리가 서로 들려도,
백성이 늘어 죽을 때까지 서로 오고 가지 않는다.


해석
원시의 공동체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작은 나라와 적은 수의 백성들, 하나의 촌락이 국가를 형성한다. 그곳에서 만족을 하고 산다. 정복은 불만족에서 시작을 했다. 좀더 낳은 땅과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서 전쟁이 시작했다. 그러나 백성들이 자신의 처지에 만족을 할 수 있다면 이 작은 나라 적은 수의 사람으로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사는 곳이 가장 좋은 곳이라고 생각이 되어서 옆 동네에 가지도 않는다.
새끼를 매듭지음(結繩)의 의미는 고대의 간편하고 쉬운 정사를 가리킨다. 그리고 새끼의 매듭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던 시대로 돌아가자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 고대에는 새끼의 매듭 모양과 수로써 의사소통을 했다고 한다.
옆 동네에 가면 자신의 동네와 다른 무엇을 발견한다. 그래서 자신들의 동네는 옆동네보다 부족하다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옆 동네의 것은 자신의 동네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 전쟁이 일어났다. 그것이 차차 거대한 전쟁으로 발전한다. 남이 가진 것은 자기도 가져야 한다. 많이보고 많이 알면 알수록 자신의 주위는 점점 부족하게된다. 백명이 각기 가지고 있는 특성을 자신 혼자서 가지려고 한다. 부족하다. 마치 일톤 트럭에 백톤의 물건을 싣는 것과 같다.


여든 한째 장
직역
믿음이 있는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이 없다.
좋은 사람은 말다툼 하지않고,
말다툼 하는 사람은 좋지 못한 사람이다.
아는 자는 떠벌리지 않고,
떠벌리는 자는 알지 못한다.
성스러운 사람은 쌓지 않는다.
이미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나 자기가 더 남는다.
이미 다른 사람에게 주었으나 자기기 더 많아진다.
하늘의 도는 이롭게 하면서도 해치지 아니하고,
성인의 도는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


해석
믿음은 말에서 오지 않는다. 말과 그에 따른 실천에서 온다. 말만 잘하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말을 잘하는 사람중에는 사기꾼이 있다. 말만 들으면 곧 돈 방석에 앉을 것 같다. 그럼 그는 왜 돈 방석에 앉지 못했는가. 자신이 말한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질때는 따져야 한다. 그러나 따지는데 드는 비용과 잠시 양보할 때 잃는 손해중 어느 것이 더 큰 지를 생각을 해야한다. 잠시 양보하는 것이 더 큰 이익을 줄때가 많이 있다. 그런 때는 따지지 말기 바란다. 주면 들어온다. 비우면 채워준다. 그것이 자연계의 법칙이다.
자신을 위해서 무엇을 한다. 그러나 자신의 몸을 해치거나 남을 해쳐서 자신이 얻고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 싸움이 인다. 서로가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성인은 양보를 할 줄 알기 때문에 다투지 않는다. 남을 이롭게 하는 것 같지만 결국 자신이 이롭게 되는 것이다.

출처 : 명상시간
글쓴이 : 청풍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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