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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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나노튜브로 만든 필름 스피커.
‘공상(空想)’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이렇게 설명돼 있다. ‘현실적이지 못하거나 실현될 가망이 없는 것을 막연히 그리어봄.’
SF(Science Fiction)를 ‘공상과학소설’이라고 번역한 옛 사람들은 공상이라는 단어를 널리 알린 한편으로, SF를 천덕꾸러기로 만드는 데 한몫했다. 허무맹랑한 공상으로 가득하다고 천시받은 그 장르 문학의 대가인 아서 C. 클라크가 지난 3월19일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45년 통신위성 개념을 구체화했고, 힘들게 우주선을 쏘아 올릴 필요 없이 지구 궤도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도 구상했다. 또한 외계에서 거주 가능한 거대한 우주선을 구체적으로 묘사했고, 소행성 같은 외계 물질의 지구 침입을 막을 지구 방위 계획도 세웠다. 그래서 그는 미래학자라고도 불렸다. 그런 실현 가능성 있는 미래 예측이 담겨 있으니 그의 SF에서 ‘공상’이라는 단어는 빼도 무방할 듯하다.
그는 2001년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2100년까지의 미래 예측을 내놓은 바 있다. 정말로 진지하게 한 예측인지는 모르겠지만, 안 맞은 것도 있다. 2004년 최초의 복제인간이 출현한다고 한 것이나, 2006년 마지막 석탄 광산이 폐쇄된다고 한 것은 빗나간 예측이었다. 물론 조지 오웰이 ‘1984년’에 묘사한 세계가 1984년에 실제로 등장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작품이 쓰레기가 되는 게 아니듯이, 시기가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고 미래 예측이 틀렸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실현되는 시기는 달라질 수도 있는 법이다.
2100년까지 꿈이 실현된다?
그는 전기를 무한정 생산할 수 있는 ‘휴대용 양자 발전기’가 만들어져 중앙 집중식 발전소가 문을 닫을 것이라고 했다. 인간과 맞먹는 능력을 지닌 ‘인공지능’이 출현할 것이라고도 했다. 컴퓨터로 구성한 DNA로부터 공룡이 복제될 것이라고 했고, 고도로 발달한 외계 문명의 신호도 받을 것이라고 했다.
눈, 귀, 피부 등 모든 감각기관을 뛰어넘어 뇌에 직접 접촉하는 장치도 개발될 것이고 나노 기술로 무엇이든 만들어내는 만능 복제기도 등장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빛의 속도에 가깝게 움직이는 우주 추진 시스템도 개발될 것이라고 했다. 2100년까지 이런 예측들이 모두 실현될 수 있을까?
사실 2001년에 그가 한 예측들은 통속적으로 말해 과학을 ‘좀’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법한 것들이다. 앞으로 복제 인간이나 인공 지능이 출현할 것 같은가라고 물으면 대부분은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물론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실현될지 물으면 사람마다 다른 답이 나오겠지만, 과학 지식이 대중화한 시대인지라 미래 예측의 희소성도 그만큼 떨어진 것은 분명하다.
그래도 호들갑은 변하지 않는 듯하다. 새로운 과학적 돌파구가 생길 때마다 으레 ‘SF에 나오는 이야기가 현실이 됐다’면서 환호하니 말이다. 사실 그런 표현은 과학 소설이 공상 따위가 아님을 시사한다. 지금까지 그런 표현을 통해 찬사나 경악의 대상이 된 발견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앞으로는? 복제 인간, 인공 지능, 상온 핵융합, 만능 복제기, 순간 이동도 그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에 불가능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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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19일 91세로 타계한 SF의 거장 아서 C. 클라크.
SF 작가 아이작 아시모프에게 로봇 3원칙이 있듯이, 클라크에게도 3법칙이 있다. 제1법칙은 연륜 있는 저명한 과학자가 가능하다고 말하면 옳은 것이 거의 확실하지만, 불가능하다고 말하면 십중팔구 틀렸다는 것이다. 이따금 그 경험 법칙을 입증하는 사례가 나타나곤 한다. “포유류의 복제는 불가능하다”고 말한 과학자가 그렇고, “영장류의 복제는 불가능하다”고 말한 과학자가 그렇다.
과학 지식이 늘어날수록 실현 불가능한 영역은 줄어든다. 그렇다고 자신이 오랜 세월에 걸쳐 얻은 지식에 따르면 불가능한 것이 분명한데도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올바른 과학자의 자세가 아니다. 그래서 소신 있게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는 과학자가 나오게 마련이다. 대규모의 돈과 인력, 시간을 투자하는 거대 과학이 연신 쏟아내는 연구 성과들에 힘입어서, 낙관적인 분위기가 팽배한 지금도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는 과학자들이 있다. H. G. 웰스의 ‘타임머신’은 가능할까? 빛보다 빠른 우주선은 가능할까? 나를 순간적으로 화성에 전송하는 것은 가능할까? 죽기 직전 내 자신을 인격까지 고스란히 컴퓨터 안으로 옮기는 것은 가능할까? 이런 질문에 많은 과학자는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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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노 입자가 혈액 내 적혈구 표면을 뚫고 들어가는 모습. 나노 입자는 세포에 스트레스를 줘 세포 자살을 유도할 수도 있다.
이 대목에서 클라크의 제2법칙이 제시된다. 제2법칙은 가능성의 한계를 알아보는 방법은 그 너머인 불가능의 세계로 좀 더 나아가보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아는 물리 법칙들이 불가능하다고? 어디 정말로 불가능한지 보자. 타임머신의 경우 내가 과거로 가게 되어 어쩌다가 내 할아버지가 죽게 된다면 나는 아예 존재할 수 없게 되는 셈이니, 나로 인해 할아버지가 죽게 된다는 말 자체가 모순이다. 이 역설 때문에 타임머신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들쑤시다 보면 불가능 속에서도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다. 평행우주가 있다고 가정하면 어떤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그 일이 일어난 우주와 일어나지 않은 우주로 갈리게 된다. 할아버지가 죽은 우주도 있고 그렇지 않은 우주도 있고, 내가 태어난 우주도 있고 그렇지 않은 우주도 있다면 역설은 해결된다. 그렇다면 타임머신을 만들 수 있을까? 블랙홀과 화이트홀을 잇는 웜홀을 통해서? 우주를 구부려서?
우주 엘리베이터, 현실로?
답이 어떻든 간에 이렇게 불가능 속에서 가능성을 찾으려는 과학자는 얼마든지 있다. 특히 SF 작가들이 상상력을 발휘해 내놓은 제안들은 모험심 강한 과학자들의 도전 의욕을 자극하곤 했다. 클라크가 1979년 소설 ‘낙원의 샘’을 통해 대중화한 우주 엘리베이터는 적도 지표면에서 약 3만6000km 상공의 정지 궤도까지 케이블로 연결해 물자를 올려 보낸다는 구상이다. 이 아이디어는 19세기 말 처음으로 제기됐다. 파리의 에펠탑을 보고 착안했다는데 허황된 계획으로 치부됐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1990년대에 탄소 나노튜브가 발견되면서 이 구상의 실현 가능성이 진지하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엄청나게 튼튼하면서도 대단히 가벼운 탄소 나노튜브라면 우주 엘리베이터가 가능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것이 실현 가능하다면 지구에만 적용될 이유가 없다. 달에도, 화성에도, 다른 행성에도 얼마든지 설치할 수 있다. 매우 저렴한 비용으로 우주 개발이 가능하다. 지구 궤도에 토성의 고리처럼 띠를 두를 수 있고, 소행성의 궤도도 바꿀 수 있다.
나노 기술의 제안자라고 할 수 있는 리처드 파인만과 에릭 드렉슬러는 현재 널리 통용되는 나노 기술이라는 말과 구분하기 위해 ‘분자 제조’라거나 ‘분자 나노 기술’이라는 말을 쓴다. 그들이 보기에 거시 세계에 속한 인류의 현 생산 방식은 너무 엉성하고 조잡하다. 간단한 물건을 하나 만드는 데도 여러 원료가 대량으로 쓰이며 필연적으로 쓰레기와 오염물질이 발생한다. 그것은 우리가 원자 하나하나를 조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르고 붙이고 섞고 녹이고 부수는 조각, 알갱이, 액체, 기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원자로 이뤄져 있다. 그중에는 우리가 원하는 식으로 배열하거나 반응하지 않는 것이 많다. 그런 것들은 틈새, 불순물, 결함, 오염을 일으킨다.
원자를 하나씩 조작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식물은 공기 중에서 이산화탄소를 골라 산소 원자를 떼어내버리고 탄소만 양분으로 이용한다. 그런 식으로 원자를 하나씩 골라 반응시키고 결합시켜 원하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장치가 ‘만능 복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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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노 소재를 사용한 인조모발.
만능 복제기는 주위의 공기와 흙 등에 있는 원자들을 이용해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만들어내는 장치다. 원료를 대량으로 운반할 필요도 없다. 컵이 필요하면 컵을 만들어내고 커피가 필요하면 커피도 만들어낸다. 내일 입을 옷이 없다면 옷도 만들어낸다. 필요한 양만의 원자들을 모아 만들어내므로 낭비도 오염도 없다. 무엇이든 원하면 다 갖다 주는 동화 ‘알라딘의 마술램프’ 속 거인과 같다.
SF 작가 닐 스티븐슨은 ‘다이아몬드 시대’에서 나노 기술이 일상이 된 시대상을 그렸다. 탁구공만한 소형 감시 비행체, 먼지처럼 떠다니면서 온갖 활동을 하는 나노 기계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만들어내는 물질 변환기, 나노기술을 이용한 전쟁과 테러 등이 그것이다. 그가 말하는 물질 변환기가 바로 클라크의 만능 복제기다.
나노 단위에 속한 작은 원자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첨단 장치들이 잇달아 개발되면서 나노 기술이라는 말은 하나의 유행이 되었다. 은나노 가전제품, 나노 화장품 등 나노라는 말이 들어간 제품도 많이 나와 있다. 아직 정체가 모호하긴 하지만, 나노 세균이라는 용어까지 등장한 상태다. 하지만 지금 유행하는 이 나노 기술이라는 말은 우리가 나노 단위의 세계를 다룰 능력을 이제 겨우 초보적으로 지니게 됐다는 의미에 불과하다.
물질 변환기는 인류가 보다 더 능률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대를 상징한다. 우리는 더 이상 곡류, 채소, 육류를 자연에서 얻을 필요가 없어진다. 연료도 자연에서 구할 필요가 없다. 물질 변환기가 다 만들어내니까. 원자와 분자를 공급하는 컨베이어 벨트만 있으면 된다. 식량을 얻기 위해 자연을 파괴할 필요도 없어진다. 이야말로 꿈의 세계가 아닌가.
반면 물질 변환기가 뜻하지 않게 전염성 바이러스나 세균, 혹은 치명적인 독소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때는 악몽이 현실이 된다. 나노 기계를 인간의 몸속에 넣어 통제하는 세상이 오지 말란 법도 없다.
생명의 특성에 관심이 있고 생명을 흉내 낸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싶은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나노기술의 제안자들도 자기 복제 능력을 지닌 장치를 떠올렸다. 어떤 기능을 지닌 나노 기계가 스스로 자신을 복제하도록 한다면 금상첨화라고 본 것이다. 예를 들어 몸속을 돌아다니다 암 덩어리를 만나면 자체적으로 증식해 그것을 없애는 나노로봇 말이다.
그러나 인류는 자기 복제의 피해를 수없이 겪었기에 또 다른 자기 복제자가 등장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듯하다. 독감 바이러스 등 자연에 존재하는 바이러스들이 그렇고, 컴퓨터 바이러스도 그렇다. 통제를 벗어난 자기 복제는 극심한 피해를 안겨준다.
드렉슬러가 말하는 본래 의미의 나노기술은 엄청난 사회적 파급 효과를 빚어낼 수 있다. 인간 복제가 미칠 파장은 아마 그것에 비하면 초라할 것이다. 음식을 만들어낼 수 있는 물질 변환기라면 당연히 생물도 만들어낼 수 있다. 인간까지도 말이다.
클라크는 2040년이면 만능 복제기가 등장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나노기술에 회의적인 사람도 많다. 나노 기술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견해가 만만치 않은 가운데 윤리적 논쟁이 벌어지고 개발 한계를 정하는 규칙까지 논의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불가능하다는 쪽은 원자 수백개를 모아 정교한 분자 모터나 펌프를 만들었다고 치더라도, 양자 불확정성 때문에 그런 장치가 제 기능을 하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 장치가 가동될 때 생기는 열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열 때문에 모터나 펌프가 금방 망가지지 않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자연은 이미 나노 세계
이에 대해 옹호자들은 “자연이 아무 문제없이 나노 기술을 사용하고 있지 않으냐”고 반문한다. 생물의 세포 안팎에서 벌어지는 온갖 활동은 기본적으로 나노 수준에서 벌어지는 반응들이다. 광합성이든 에너지 생산이든 복제든 간에 생물 활동은 나노 수준에서 정교하게 조절되면서 이루어진다. 물론 때로 잘못되기도 한다. 오류가 일어나서 기형이 생기고 암이 생기고, 노화가 진행된다. 그러나 생물은 그런 문제들을 억제하고 약화시키는 등 나름대로 대처 방안들을 마련해왔다. 나노 수준에서 말이다. 옹호자들은 이런 점을 근거로 물질 변환기가 불가능하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라고 본다.
여기서 클라크의 제3법칙이 나온다. 충분히 발달한 기술은 마법과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분자 나노 기술은 아니지만 낭비를 줄이고 효과를 높이는 수준의 연구는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약물이 든 나노 입자로 암세포만 죽이거나, 척수 손상을 치료하거나, 각종 제품의 생산 효율을 높이는 연구 결과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그런 연구들이 드렉슬러가 내다보는 미래로 나아가는 길을 닦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만능 복제기라는 마법 같은 장치가 정말로 2040년에 등장할까? 누구도 ‘그렇다’고 단정하지 못한다.
순간 원거리 이동의 원리
과학 소설에 등장하는 것 중 아직까지는 실현 불가능하다는 견해가 우세한 것은 빛보다 빨리 이동하는 장치다. 아인슈타인 이론에 따르면 이동 속도가 빛의 속도에 가까워지면 질량이 무한대가 되어 빛의 속도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한다. 게다가 그 정도 속도라도 내려면 우주 수준의 에너지를 동원해야 한다. 그러나 빛보다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빛보다 빠른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들이 제시되어 있으니 좀 위안이 될 법도 하다. 우주 공간을 휘게 하면 된다.
순간 이동이라는 원거리 물질 전송은 어떨까. 지구에 있는 나를 순간적으로 화성으로 옮기려면 먼저 내 몸의 정보를 전부 다 읽어야 한다. 가장 단순한 방법은 내 몸을 이루는 원자들의 위치를 하나하나 읽는 것이다. 탄소 원자들은 3차원 좌표의 어느 지점들에 있고, 수소 원자들은 어디에 있다는 식이다. 내 몸에 있는 세포는 100조개나 되고 그 세포 하나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원자가 들어 있다. 컴퓨터가 그 정보를 다 읽어서 저장할 능력이 된다고 하자. 다음은 그 정보를 화성으로 전송해야 한다. 통신 기술이 발달하여 그것도 순식간에 보낼 수 있다고 하자. 그러면 물질 변환기에 그 정보를 입력하여 나를 재구성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그것은 순간 이동이 아니라 화성에 내 사본(寫本)을 만드는 것과 같다. 나는 여기 지구에 그대로 있고 말이다. 물리학자들은 양자론이 이 모순을 해결한다고 말한다. 광자를 이용해 내 몸의 모든 정보를 읽는 순간 내 몸을 이루는 모든 소립자의 양자 상태는 파괴되고, 그 정보는 광자에 실려 전송된다는 것이다. 여기 있는 나는 사라지는 셈이다. 물론 웜홀을 이용해 곧장 화성까지 갈 수도 있다.
나를 디지털화한다?
죽기 직전에 내 자신을 컴퓨터나 인터넷으로 옮기는 것은 가능할까? 몸과 마음을 더한 나라는 존재를 정보화할 수 있다면 가능하다. 정신이 뇌라는 물질 활동의 산물이고 뇌의 활동은 화학 반응이다. 그리고 그 활동은 뇌 세포들 사이의 전기 전달 형태로 이루어진다. 전기 전달은 디지털 부호화가 가능할 테니, 나를 고스란히 컴퓨터 데이터베이스로 옮기는 것도 가능할 수 있다. 막대한 정보량을 처리할 수 있다고 치고, 양자 불확정성으로 일어날 약간의 오류는 감수할 수 있다고 치면 말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전제가 해결될 수 있는 날이 언제일지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미래엔 그만큼의 정보를 필요로 하지 않고도 나를 전송하거나 저장할 방법이 나올 수도 있다. 그에 필요한 수학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데도 현재의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SF 걸작들이 그렇듯이, 아서 C. 클라크의 소설들도 인류의 미래를 탐구한다. ‘유년기의 끝’ ‘라마와의 랑데부’ ‘낙원의 샘’, 영화화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등 그의 대표작들은 나름대로 인류의 앞날을 제시하고 있다. 사실 인류 두뇌의 산물 중 가장 미래 지향적인 것은 SF다.
그리고 설령 전부는 아니라 해도 많은 과학기술자는 SF의 아이들이다. SF에 심취했던 아이들이 자라서 인공위성, 우주 탐사선, 인터넷을 개발해왔다. 거대과학은 비판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불가능의 세계로 나아가는 수단 구실은 톡톡히 해내고 있다. 입자 가속기와 유전체 계획이 대표적인 사례다. 분자 나노기술이 또 하나의 사례가 될지도 한번 지켜보기로 하자. 아서 C. 클라크를 추모하면서 말이다.
이한음 과학평론가 lmgx@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