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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벗에게 책을 보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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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뀐 뒤로 날씨가 줄곧 좋지 않습니다만, 지내시기가 평소보다는 나으리라 생각하니 적지 않게 위로를 받습니다. 이 정하(靖夏)는 망령기가 있고 속된 사람입니다만, 천마산을 여행한 일은 꿈에서까지 나타나더군요. 세상에 드문 절경을 감히 노형과 함께 즐기다니! 너무도 다행스럽고 다행스럽습니다.
헤어지고 난 뒤로 군산(君山)이 벌써 고인이 되었습니다. 지난날에 했던 여행을 슬픈 마음으로 되돌아보자니 비로 쓸어버린 듯 묵은 자취가 다 사라지고 없습니다. 노형께서 이 일을 떠올리면 고통스러움을 견디기 어려우실 터라, 어떻게 말씀을 올려야 할지요?
군산이 운관(芸館)에서_1) 운서(韻書)를 인출(印出)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절에서 마주 앉아 있을 때 한 부를 얻었으면 한다고 제게 부탁했었습니다. 지금에야 비로소 인출하는 일을 마쳐서 한 부를 봉정하여 약속을 실천하고자 합니다만, 이제 드릴래야 드릴 곳이 없습니다.
홀로 그 순간을 떠올려 보았더니 노형께서 마침 그 자리에 계셔서 그와 나눈 대화를 함께 들었더군요. 게다가 노형은 사촌 형제들 가운데 군산과 가장 친하게 지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감히 이 책을 노형께 보냅니다. 노형께서 물리치지 않고 받아주신다면, 군산에게 준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이 일이 보잘것없는 정성이오나 식언(食言)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오니 깊이 헤아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괴롭게도 눈병이 다시 발생하여 글씨를 쓰기가 겁이 납니다. 그래서 남의 손을 빌려서 편지를 쓰느라 다른 일은 미처 아뢰지 못하오니 너그러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신사년(1701) 2월 11일, 아우 정하는 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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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편지는 서암(恕庵) 신정하 공께서 우리 돌아가신 큰 아버지 죽취(竹醉) 공께 보낸 편지이다. 편지에서 말한 ‘절에서 마주 앉아 있을 때 한 부를 얻었으면 한다고 부탁했다.’는 분은 돌아가신 내 아버지 관복암(觀復庵) 공이고, ‘운관에서 인출했다’는 책은 곧 이 《삼운통고》이다.
이 편지 한 통을 보면, 옛 선배들이 벗과 교제하는 풍류가 진실하고 두터워 죽은 뒤에까지도 변하지 않음을 알 수 있고, 또 우리 선친과 큰 아버지께서 평소 우애가 몹시 돈독하여 친구들도 이처럼 신뢰하였기 때문에 결코 사라져 버리게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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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본래 내 책상자 속에 있었던 물건이었다. 처음에는 이러한 사연이 얽혀 있는 것인 줄 몰라서 예전에 아우 숙평(叔平)에게 주었다. 그 뒤에 이 편지를 얻고 나서야 비로소 그 사연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그에게 책을 주었고, 또한 책 안의 붉은 글씨와 인장이 모두 우리 큰 아버지의 필적이므로 숙평이 가져서 안 될 이유가 없다. 게다가 서암 공께서 우리 큰 아버지 보시기를 마치 우리 선친을 보시듯이 하셨으니 나와 숙평을 또 어떻게 무관한 사람으로 볼 수 있으랴! 그렇다면 우리 형제와 자손들은 대대로 서로 전해가면서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숙평은 이 책을 삼가 잘 보관하기 바란다. | |
- 김원행(金元行), 〈제구장삼운통고 부신서암수첩후(題舊藏三韻通考, 附申恕庵手帖後)〉,《미호집(渼湖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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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운관(芸館) : 정부의 책을 펴내는 교서관(校書館)의 이칭.
※ 글의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에 수록된 한국문집총간 220집 《미호집(渼湖集)》 13권 제발(題跋)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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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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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 후기에 널리 이용된 《삼운통고(三韻通考)》란 운서(韻書)의 뒤에 붙인 글이다. 부록으로 편지가 첨부되어 있다. 일반적인 발문이 책의 성격이나 가치, 간행의 동기와 과정을 서술하지만, 이 글은 그와는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책과 자신의 집안이 얽힌 사연을 적고 있는데 그 내용이 상당히 감동적인 데가 있다.
이 운서는 저명한 유학자인 김원행(金元行)이 소장하고 있다가 4촌 동생-김원행이 김숭겸(金崇謙)의 아들로 양자갔으므로 실제로는 친동생-인 숙평(叔平) 김탄행(金坦行)에게 준 책이다.
◁◀ 김원행 초상 _ 일본 덴리대학
그러나 뒤에 김원행은 서암(恕庵) 신정하(申靖夏)가 큰 아버지-실제로는 친부- 죽취(竹醉) 김제겸(金濟謙)에게 보낸 편지를 얻고 나서는 이 평범한 운서가 실은 자신의 양아버지 관복암(觀復庵) 김숭겸의 죽음과 관련된 애틋한 사연이 있는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요절한 양아버지가 임종 무렵에 보고 싶어했던 책이기도 하고, 아버지의 친구가 죽은 아버지를 그리워하여 사후에 보낸 특별한 의미가 있는 책이었다. 그런 소중한 의미를 지닌 책을 자식인 자기가 소장해야 마땅한데 그것을 집밖으로 내보낸 것이다. 그래서 동생의 소장품이 된 책에 편지의 내용을 쓰고 자신의 소감을 밝힌 다음, 이 책을 소중히 간직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글의 중심에는 신정하가 김제겸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그것이 지닌 의미와 감동은 김원행의 발문에 잘 밝혀져 있으므로 군더더기 설명이 필요 없다. 하지만 정리하여 이야기하면 이렇다.
신정하는 1700년에 친구인 김숭겸(1682~1700), 김제겸 등과 함께 개성의 천마산을 열흘 동안 여행하였다. 그런데 김숭겸은 이 여행에서 돌아온 지 한 달을 못 넘기고 죽었다. 여행하는 중에 김숭겸은 교서관에서 《삼운통고》를 인출한다는 말을 듣고 인출되면 자기에게도 한 부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마고 약속했는데 친구는 한 달도 못돼 유명을 달리했다. 친구가 죽고 난 다음 해에 책이 간행되었다. 비록 친구는 죽었지만 신정하는 죽은 친구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사촌 가운데 가장 친하게 지내던 사이이자 그 약속의 장소에 함께 있었던 김제겸에게 대신 책을 보냈다. 그리고 사연을 적은 편지를 동봉했다.
양아버지와 그의 친구, 그리고 친아버지 사이에 책을 두고 펼쳐지는 따뜻한 인간애와 우정을 김원행은 너무도 가슴 뭉클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 편지를 읽고서 그 사연의 의미를 발문에 살려서 이야기하고 있다.
신정하의 편지와 김원행의 제발문을 읽고 나니, 책은 책 자체만이 아니라 그것을 주고받고, 가지고 있는 사람의 정겨운 사연 때문에 소중한 것이 된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김숭겸 대신에 신정하로부터 《삼운통고》를 받은 김제겸은 나중에 성효기(成孝基)와 함께 이 책을 증보하여 《증보삼운통고》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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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 안대회 -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저서 조선의 프로페셔널 선비답게 산다는 것 18세기 한국 한시사 연구 산수간에 집을 짓고 등 다수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