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젊은 날의 수채화
南村 서 호원 문학
아스라이 인생 속에 묻힌 누렇게 빛바랜 일기장에 써 있는 추억속의
청평 휴가풍경 - 청춘일기 하나를 소개 할까 합니다.
1976년 27살 때 여름으로 기억 된다
그때도 지금처럼 7월 하순부터 8월15일 까지는 관공서의 휴가기간 이었다.
나의 고등학교 동창 영태는 답십리에 있는 전매청에 근무 하였다.
당시 전매청은 청평 강가에 캠프를 치고 전 직원들이 교대로 휴가를 다녀왔다.
녀석은 자기 순서가 8월 12일부터 15일 까지 떠난다 하면서
나와 동행하자 했다 나는 조그만 석유곤로 생산 회사에 근무 하면서
친구 영태와 답십리에 방을 하나 얻어 자취 생활을 하고 있었다.
1976년 8월 13일
나도 회사에서 휴가를 얻는데 성공 했고 8월 13일 함께 떠났다.
두 녀석의 호주머니를 다 털어도 겨 우 왕복 기차비정도 밖에 없었지만
별도의 돈을 마련하지 않았다. 빈털터리 무전여행이 그 당시 젊은이들 간에
꽤 유행을 하던 시절이다, 그것은 대단한 모험을 하는 것이며 배고픔과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때로는 위기에 빠지기도 하여 대단한 용기로
기발한 기치를 발휘해야 하기에 매우 흥미 있는 추억을 만드는 것 외에도
다녀오면 약간씩 픽션을 가미 하여 잘 꾸민 이야기가 친구들에게
오래 동안 좋은 술안주 거리가 되기에 충 분 했다.
물론 주머니가 빈 대신 등이 무거웠다 텐트와 코펠 군대담요 감자와 양파 쌀
양념 들을 빠짐없이 챙겨서 둘러메어야 하기 때문 이다.
저녁 5시가 넘어서 청량리 역에 나가니 놀려가는 젊은이들로 드넓은 광장에
기득 차서 북새통을 이루었다. 한쪽에서는 벌서 야외 전축을 틀어 놓고
춤판을 벌리는 녀석들이 난리 탱탱 브루스를 춘다.
개찰구가 열리자 그 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기차에 꼬깃꼬깃 접어서 포개졌다.
기차에 올라타니 앉을 자리는 고사하고 서있을 곳도 없다
심지어 짐을 싣는 선반에 까지 사람이 올라가 누워 있다. 그래도 아무도 불평 하는 이 없다
몇 년에 한번 일상을 벗어나 놀러 간다는 휴가기분에 들 떠 있다.
당시 거의 모든 국민들이 심한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침 4시만 되면 서울의 모든 시장은 각 지방에서 몰려드는 과일 야채
생선이 공매 입찰된다. 서울 시민이 하루 먹을 물량이 한꺼번에 몰린다.
그것을 실어 나르는 지게 진사람 리어카를 끄는 이
그것을 구매 흥정 하는 영세 상인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8시가 되면 출근 인파가 버스를 타는데 이른바 콩나물시루이다.
모든 직장이 아침 8시30분부터 저녁 6시 30분까지 12시간 근무에
밤 9시 반까지 추가로 야간 근무를 한다. 아주 철야를 하는 일도 많다
그러고도 한달에 한번 쉬는 곳도 많고 첫째와 셋째 일요일만
쉬는 직장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벌어도 겨우 밥 먹고 사는 수준이며 저축은 꿈도 못 꾼다.
이런 일상에서 탈출하는 기차가 경춘선이었다.
청평/강촌/춘천 까지 계속 강을 따라 달리는 기차를 타고 가다가
제 맘 내키는 대로 내리면 모두가 경치 좋은 강변이기 때문이다.
그 콩나물시루 기차에 찡겨서 어찌 할 수 없을 때 나와 가슴이 맞닿아 있는
소녀들이 있었다. 그렇게 가슴을 맞대고 있으려니 어색하고 민망해서 오히려
말이라도 건네는 편이 자연스럽겠다 싶어 대화를 했다. 대학교 1학년생
친구와 둘이 놀려 간다고 나섰다가 청량리 역에서 배낭을 잃어 버렸다고
한다. 떡을 사러 가면서 옆에 서 있은 사람에게 좀 봐 달라 했는데 와서
보니 없다고 했다. 그래서 떡이 든 작은 박스 하나만 들고
기차를 탓 다고 한다. 무슨 여자 아이들이 저리도 당돌할까? 옆에 있는
내 친구 영태가 흑기사가 되어 걱정 말라고 위로 한다.
오빠들만 믿어라 다 잘 곳을 마련 해 준다고 했다.
그 순진한 소녀들은 쫄랑쫄랑 겁 없이 따라 온다.
청평 역에서 내려 전매청이 강가에 자리를 빌려둔 캠프장을 찾아가
숲 속 평평한 자리에 텐트를 치고 주변 정리를 하고 있으니
먼저 와 있던 전매청 직원들이 캠프장을 아주 깨끗이 청소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자기들이 가지고 와서 미처 먹지 못한
돼지고기며 찌개꺼리들을 자기들의 동료인 영태에게 모두 주고 간다.
무엇 보다 4홉 들이 소주가 꽤 많은 것이 반갑다.
텐트에는 그 여자 아이들을 자게하고 우리들은 물가에 자리 잡고
야외용 간데라 불을 밝히고 석유 버너위에 큼직한 코펠을 얹고
그들이 주고 간 온갖 찌게 거리를 몽땅 넣고 보글보글 끓이면서
바둑판을 펼치고 친구와 바둑한수 놓으면서 등 뒤에 소주 괘짝에서
소주를 꺼내어 주거니 받거니 하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따라 온 여자 아이들이 처음에는 조금 경계하는 눈치이더니
저희들에게 별 관심 없이 대하자 안심 하고 저녁 식사를 하고 텐트로
들어갔다. 우리들은 바둑을 두면서 괴테의 문학이나 니체의 사상이나
동양의 장자 사상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도 하고 흥이 나면 소리 높여
유행가를 부르기도 하였다. 그렇게 시작된 바둑 두기가 새벽 날이 완전히
샐 때까지 계속 되었다.
8월 13일 아침
강가의 이른 아침 경치는 너무도 아름답다.
강가에 뽀얀 물안개 피어오르고
강물은 크고 작은 바위들 사이를 흐르면서 맑은 물소리로 연주를 하고
그 연주에 맞추어 온갖 이름모를 물새들은 소프라노로 오페라를 하고
매미들과 풀벌레들이 저마다 짝을 찾아
녹청높이 바리톤으로 청혼을 한다. 창문을 열어다오! 나의 사랑이여!
이때에 다리긴 물새들이 쪼르르 달려 나와 강변 빛나는 자갈밭을
아주 빠르게 가로지르며 춤을 춘다. 때로는 오 똑 멈추어 돌 사이에
장구벌레를 쪼기도 하고 또 문득 작은 양 날개 치켜들고
발이 안보이게 달리는 폼이 정녕 서양의 발레작품 백조의 호수로다
저 강 건너 논두렁에 백학 한 쌍 날아와 긴 다리 뽐내며
살포시 피어 오른 물안개 속에서 보일 듯 말 듯 학 춤을 춘다.
동서양 그 누가 이런 춤을 출 것이며
세상 어느 오케스트라가 이보다 아름다우며
세상 어느 뮤직컬이 여기에 버금가겠는가?
밤새 마신 술이 흥취를 더하니 마치 무릉도원에 앉아 있는 기분이로다.
문득 등 뒤에 빈병을 세어 보니 둘이 먹은 술이 4홉 들이 소주로 자그마치
17병 반 이다. 평생에 내가 한자리에 앉아 가장 많이 먹은 음주 기록이다
그렇게 많이 먹어도 그 맑은 청평 강물로 뛰어들어 30분 푸덕거리니
금시 술이 깬다. 역시 젊음과 건강이었다.
우리의 텐트에서 잠을 잘 잔 그 여자 아이들이
탁구를 한번 치자 한다. 고맙다고 탁구 게임 비를 내겠다. 한다.
이름도 정 현숙 한바탕 신나게 치고 그들은 돌아갔다
그리고 우리는 물가 텐트에서 낮잠을 잤다
오후에 어떤 텐트 옆을 지나는데 석유버너를 쓰다가 텐트 안에서 불이 나서
대피소동이 벌어졌다. 언제나 흑기사! 우리 두 사람은 뛰어 들어가 담요로
덮어서 진화 했다 사실 석유버너가 잘못되면 폭발 할 수 있기에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 일로 그 팀과 합류 하게 됐는데
인천 동양유리 회사에서 여자직원 30명이 왔다 한다.
그야 말로 30명의 꽃밭에서 남자라고는 달랑 우리 둘
보트도 타고 사진도 찍어 주며 아주 즐거운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전화 번호 주면서 다음을 기약 하고 그들은 모두 돌아가고
이미 어두워진 밤에 영태의 여동생이 4명의 친구들과 함께
우리를 찾아왔다. 그래서 텐트를 걷어 다른 곳으로 옴 기어 쳤다.
그들과 우리는 오래 전부터 애인처럼 잘 아는 사이여서 서로 가까이 앉아
서로 어깨를 맞대고 밤늦게 까지 술을 마시고 통 기타를 치며 노래하며 즐기다가
그들이 텐트로 들어간 후 우리 둘은 또 밖에서
어제 같이 보냈다. 아니 여동생들 자는 텐트 보초를 섰다.
8월 14일
아침에 날이 밝아 우리 모두는 기겁을 했다.
이미 어두운 밤에 텐트를 옴 기었기에 보지 못했는데
우리들의 텐트 옆에 높고 길고 큰 탁자가 있었는데 아침에 보니
그 탁자위에 물에 빠져 죽은 시체가 천으로 덮인 채 누어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모르고 그 옆에서 통 기타 치며 놀았던 것이다.
어제 한 남자가 익사체로 발견 됐는데 신원 파악이 안 되어
그대로 방치 되어 있었다 한다.
나와 친구는 밤새 시신을 지킨 셈이 되었다.
날이 밝으니 마침내 그 가족들이 오고 하루 종일 경찰이 오고 가며
관이 들어오고 시신을 수습했다 사람이 물에 빠지면 시커멓게 되고
물에 불어서 시신이 엄청 커 보였다. 고등학생이라 한다.
부모의 애통함을 보면서 우리들도 할 수 있는 일을 도와주었다.
저녁나절에야 장례식장으로 실려 갔다.
시신이 나간 후 날이 어두워지자
우리들의 남동생들이 제 친구 10여명과 함께 우리 캠프를 찾아왔다.
그들은 앰프 키타와 드럼을 가지고 왔다. 낮에 있었던 일을 모르는 그들에게
경찰이 그 큰 탁자를(시신이 누어있었던) 부수어 태워도 좋다 하고 갔다.
즉시 불을 피우고 그 모닥불을 둘러싸고 드럼과 기타 연주를 하니
청평 유원지 모든 젊은이들이 100여명 이상 모여 들었다.
그리고 광란의 밤이 되었다.
한 고등학생의 죽음과 그 부모의 종일토록 이어진 비통한 통곡소리!
그 뒤로 즉시 펼쳐지는 청춘남녀 100명의 광란
미친 듯 이글이글 타오르는 붉은 불빛에 순간순간 비치는
알몸 청춘남녀들의 춤추는 광기 어린 모습!
정리되지 않는 머릿속 혼란!
어찌 되었던 그 날 밤도 많은 사람이 모이니
돈 한 푼 없는 우리들의 가난한 무일푼 청춘이지만
가난한 캠프에 술과 음식이 넘쳐 났고
노래와 춤과 음악으로 밤을 지새웠다.
더운 여름밤 강변 캠프파이어!
거대한 불기둥 그 반경 100m 안에는 모기가 한 마리도 없다.
그러나 친구와 나는 묘한 정서 불안으로 결코 즐겁지만은 않았다.
8월15일
아침이 되니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피서지에 비 오는 풍경만큼
더 을씨년스러운 것도 없다. 모두 벗고 있는 군상들이 입술이 새파래져서
벌 벌 떨고 다닌다. 물이 차게 느껴져서 정나미가 떨어지니
모두가 짐을 싸서 황급히 떠난다.
우리는 내일까지 예정 되어 있어 동생들 일행을 모두 보내고
팔각정에 올라 비를 피하면서 찌개를 끓이며 청평 유원지를 돌아보았다
어제까지 사람으로 가득 차서 흥청대던 유원지가 텅 비었고 굻어진 빗줄기가
세차게 쏟아 붇는다. 몇 시간 지나니 청평 강물도 불어 흙탕물이 되는
것을 보며 이제 그만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모든 장비를 챙겨 배낭을 꾸리고 마루에 걸터앉아서 비가 좀 그치기를
기다리는데 아까부터 지붕이 있는 맞은편 침상에서 춤을 추는
한 무리가 있다. 그들은 30대 이상 되는 부인들인데 모처럼 계모임을 하고
나들이 한 것 같다. 신나는 춤곡을 전축 판으로 크게 틀어 놓고
브루스며 탱고며 지르박을 춘다.
그 속에 늙은 아저씨 한분이 끼어 춤을 춘다.
친구 영태가 요즘 사교춤의 스텝을 배우고 흥미가 많다 하며.
내게 설명 한다 슬로우! 슬로우! 퀵! 퀵!
내손을 붙잡고 이리 저리 가르치는데 그 쪽에서 한 사람이 이쪽으로 건너와
우리 손을 붙잡고 이끌면서 자기네들 춤을 좀 가르쳐 달라 한다.
친구는 짐짓 뽐내고 싶었을 것이다. 자의 반 타의 반 끌러 갔다.
술과 음식을 대접 받고 졸지에 춤 선생이 되어 아주머니들과 않고 돌아갔다.
먼저 있던 늙은 분은 하릴없이 슬그머니 빠져 나갔다.
20대 총각들이 2명씩이나 끼어드니 금시 춤판에 활기가 넘쳤다.
20여명의 부인들과 한바탕 춤판을 벌인 후 다시 술판이 벌어지고
다시 한번 놀자 하는데 이제 그만 가자는 축과 더 놀다 가자는 축과
자기네 들 끼리 갈등이 생기더니 결국 5명의 부인들이 남고 나머지는 모두
떠났다. 그 후에 술과 춤이 더욱 무르익다가 술이 거나해지자
부인들이 노골적으로 아주 농익은 농담을 하기 시작 했고 어떤 부인은
키스를 하기도 했다. 또 어떤 부인은 우리 5명을 총각 둘이서 책임질
자신이 없는가? 하고 정말 해서는 안 될 말! 책임질 수 없는 말을 해 댄다.
그리고 모두 박수를 치며 묘한 눈웃음들을 보내며 좋아했다.
그렇다 팬티 바람에 꺼림 없이 마주앉아 술도 마시고 서로 부둥켜 않고
춤을 추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 물가 피서지의 풍경이다.
이곳을 벗어나면 그 어디에서도 허용되지 못하는 진풍경이 아니던가?
이대로 더 있다가는 정말 큰일 나겠다 더 놀다 가자며 못내 아쉬워하는
그들 일행을 서울에 가서 2차로 하자고 하면서 일으켜 세워 나섰다.
이제는 도망을 쳐야 한다는 생각을 친구와 나는 똑같이 했기 때문이다.
우리 총각들이야 어울려 별일이 없겠지만 가정을 가진 저 부인 들은
불륜으로 가정이 파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서울 가서 놀자는 말에 기차를 타고 오면서도 그들은 계속해서 은밀한 농담을 건네며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농익은 유혹을 던진다.
정말 그들은 우리가 좋은 흥 풀이 대상으로 지목 되어 눈이 이글거렸다.
기회 있을 때 친구와 귓속말로 살 짝 “성북 역에서 튀자”했다.
우리 일행은 기차가 복잡 하여 짐칸에 앉아 왔는데 우리들의 집이 답십리 라 해서
청량리까지 함께 가도록 되어 있어 성북역에 기차가 서도 모두 안심 하고 있는데
기차가 섰다가 다시 서서히 움직일 때 둘이는 눈으로 신호를 보내며
아주 빠른 동작으로 배낭을 밖으로 던지고 기차에서 뛰어 내렸다.
그리고 서서히 빨라지는 기차에 손을 흔들어 줬다
부인들은 아쉬운 듯 우리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짐칸 문으로 상체를 내밀고 손을 흔들며 사라져 갔다.
그로서 왕복 기차비만을 가지고 떠난 3박 4일의 휴가피서가 끝났다.
지금으로 말 하면 5.000원 정도로 3박 4일을 늘씬하게 즐기고 돌아 왔다.
고등학생의 죽음과 캠프파이어/부모의 슬픔과 젊은이들의 환락
피서지에서 만난 수 십 명의 여인들/총각과 부인의 차이-절제의 미덕
젊음의 가치와 젊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새벽 강가의 서정적 풍경!
사람이 분위기가 좋을 때 먹을 수 있는 술의 한계극복!
젊은 날에만 할 수 있는 인생 실험과 깨달음!
새로 정립되는 소중한 가치관들을 배낭에 담고 돌아 왔다.
그리고 50년이 지나서 그 때를 회상 해 글을 쓰고 보니
젊은 날의 아름다운 한 폭의 수채화다.
누구나 늙는 것을 한 하지 말고 젊은 날의 수채화를 한 장 한 장
찾아내어 이처럼 그려보면 어찌 늙음을 외롭다 고만 하리오!
-- 남촌 생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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