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노숭(1762~1837)이 선인들의 일화를 기록한 책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집요한 성격을 가져 서로 지지 않으려고 경쟁하는 사연이다. 지기를 싫어하는 성격이라 해도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이런 정도까지일 줄은 예상하기 어렵다. 그 점이 이 사연을 흥미로운 이야기로 만든다.
이런 이야기가 전하는 것은 박세당(朴世堂, 1629~1703)과 박태보(朴泰輔, 1654~1689) 두 사람이 강직하고도 고집 세기로 선비들 사이에 유명하였기 때문이다. 부자는 모두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박세당은 고집스럽게 자기 길을 걸어간 학자로서, 뜻이 맞지 않자 과감하게 조정을 등지고 다시는 조정에 들어가지 않았다. 노론과 정치적으로 대결하여 후에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리기도 하였다.
박태보도 고집 세기로는 그 아버지에게 뒤지지 않았다. 소론이면서도 당론을 편들지 않고 소신에 따라 움직였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의 폐위(廢位)를 강하게 반대하여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진도에 유배 도중 노량진에서 죽은 사연이 너무도 유명하다. 비리를 보면 참지 못하고 의리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 사람으로 그를 존경하는 선비들이 매우 많았다. 이런 강직하고 고집 센 인물들이기에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보인 집요하고 고집스런 행적이 화제에 올랐으리라.
한편, 박세당 부자가 서로 지지 않으려 한 태도에는 아버지라고 해서 편들려고 하지 않은 심리가 깔려 있기도 하다. 심노숭은 다른 글에서 이런 이야기를 전한다.
박세당이 아들에게 윤선거(尹宣擧)와 남구만(南九萬)에 견주어 자신을 평가해보라고 하였다. 예상과 달리 박태보는, “윤선거는 도(道)를 실은 문장이고, 남구만은 나라를 다스리는 사업까지 담긴 문장이므로 유구하게 전해질 것이기에 아버지의 문장이 그들에게는 미치지 못한다.”고 답했다. 그러자 박세당은, “너는 나를 너무 가볍게 보는구나!”라고 대답했다. 객관적인 평가라면, 윤선거와 남구만의 문장도 높은 수준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박세당이 더 높은 수준의 문장이 아닐까 생각한다. 박태보가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