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삶의 깨달음에 이르는 길의 단
달라이 라마 지음/진현종 옮김
달라이 라마, 삶을 이야기하다
달라이 라마 지음/진현종 옮김
북로드/2004년 5월/227쪽/10,000원
▣ 저 자 달라이 라마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어로 ‘지혜의 큰 바다’ 또는 ‘큰 지혜를 가진 스승’이란 의미다. 티베트인에게 있어서
종교적으로는 살아 있는 부처로 숭앙받는 절대적인 신앙의 대상인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최고 정책 결정권을 갖는 국가 통치자다.
현재 인도 다람살라에서 티베트 망명정부를 이끌고 있는 제14대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Tenzin Gyatso)는 지치지 않는 평화 수호자로 알려져 있으며, 1989년에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활발한 저술 활동을 통해 평화의 메시지와 부처의 큰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 역 자 진현종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불교 저술가로 활동 중이다. 여러 권의 저서를 발표했으며 각종 매체에 논쟁적인
글과 서평 그리고 칼럼을 싣고 있다. 또한 영어와 중국어 번역가로, 불교를 중심으로 한 동양사상 관련 서적을 주로 번역하고 있다. 『틱낫한 스님과의 소박한 만남』『한권으로 읽는 팔만대장경』『공자의 열정』『노자의 웃음』 등의 저서와 『틱낫한 스님의 아! 붓다』『틱낫한 내 스승의 옷자락』,『티베트 우화』『내 인생에서 찾은 두 번째 행복』등의 역서가 있다.
▣ Short Summary
이 책은 삶의 깨달음에 이르는 길의 단계를 상세하고 알기 쉽게 설명해놓았다. 티베트 불교의 전통적인 수행법과 달라이 라마의 실제 삶 속에서 우러나온 경험담을 통해 깨달음이 일상화될 수 있도록 우리의 태도와 처신을 고치는 방법들을 가르친다. 그것은 수행의 가장 높은 목적인 평화, 연민의 마음, 고유한 집중과 지혜를 향해 삶의 자세를 변화시켜 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말과 생각과 행동을 잘 다스리는 길이 수행의 최고 목적이며, 진정한 수행은 인생 최고
의 투자다. 마음은 말과 생각과 행동을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원천이기에, 마음을 잘 다스리는 길이 수행자의 길이다. 그래서 수행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수행자의 길이야말로 행복의 길이요,
영원한 평화의 길이다. 마음 가운데 독을 제거하고 풍요로운 자양분을 공급하는 사람, 바로 그가 수행자다.
▣ 차 례
서문 - 의미 있는 삶에 이르는 길
들어가면서 - 행복에 이르는 길
제1부 수행의 기초
제2부 도덕의 수행
제3부 집중명상의 수행
제4부 지혜의 수행
제5부 딴뜨라
제6부 수행의 단계
역자 후기 - 진정한 웰빙은 수행의 일상화, 일상의 수행화에 달려 있다
달라이 라마, 삶을 이야기하다
달라이 라마 지음/진현종 옮김
북로드/2004년 5월/227쪽/10,000원
들어가면서
행복에 이르는 길
행복을 얻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바깥에서 구하는 방법이다. 좀더 나은 집과 옷, 그리고 친구를 얻으면
어느 정도 행복함과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두 번째는 정신의 계발을 통해 내면의 평화를 얻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방법은 대등한 것이 아니다. 마음이 평화로우면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법이다.
평화와 친절이 필요하다 : 우리는 모두 무력한 상태로 태어났다. 부모님이 우리를 친절하게 보살펴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 늘 두려워하며 자라난 아이들은 평생 동안 고통을 겪게 된다.
어린이의 마음은 매우 예민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친절한 관심이 필요하다. 어른 역시 친절이 필요하기는 마찬가지다.
친절과 사랑, 즉 진정한 의미의 형제애와 자매애는 매우 소중한 것이다.
그것들이 있어야 함께 사는 것이 가능하므로 친절과 사랑은 우리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된다.
연민의 마음을 기른다 : 우리 각자는 확실한 자아의식, 즉 ‘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또한 우리는 행복을 원할 뿐
고통을 원하지는 않는다는 기본적인 목적을 공유하고 있다. 좀더 깊은 차원의 행복을 얻는 법, 또는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을
생각해낼 수 있는 특별한 사고력을 갖춘 우리 인간만이 그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을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
개인, 가족, 지역 공동체, 국가 그리고 세계의 모든 차원에 걸쳐 우리가 맞닥뜨리게 되는 가장 해로운 말썽꾸러기가 바로
화와 이기주의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이기주의란 자아의식이 아니라 지나친 자기중심주의다.
평화와 평안 그리고 진정한 우정을 얻고자 한다면, 화를 최소화하고 친절과 따뜻한 마음을 길러야 한다.
서로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 21세기의 세계경제는 수많은 나라들과 그 국민들을 서로 의존하도록 만들어버렸다.
따라서 나라들끼리 서로를 존중해주지 않는다면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어버렸다.
빈국이건 부국이건 간에 한 나라 안에서는 빈민층과 부유층 간의 분쟁을 예고하는 심상치 않은 조짐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경제적 불화는 보다 강력한 전 지구적인 상호의존과 책임을 통해 치유될 수 있다. 하지만 위기 상황은 속출하고 있다.
전쟁 때문에 노인과 어린이들이 끊임없이 죽어가고, 무고한 사람들이 삶의 터전과 희망을 잃고 헤매고 있다. 군비경쟁을 통해
서로 우위를 차지하려고 하는 강대국들의 시도는 정말 비생산적인 것이다. 지금의 세계가 처한 절망적인 상황은 우리의 변화된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마음으로 국가와 이념, 문화와 소수민족 그리고 경제 및 정치체제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상호존중, 신뢰와 서로의 행복에 대한 관심은 지속적인 세계평화를 위한 최상의 희망 사항이다. 물론 국가 지도자들에게 이 문제에 대한 각별한 책임이 있기는 하지만, 모든 개인 역시 종교적 신념에 상관없이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 다만 인간이라는 것, 그리고 행복을 얻고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 지구의 시민인 것이다. 좀더 나은 미래는 우리 모두의 손에 달려 있다.
인간의 화합을 위해 노력한다 : 우리의 가족과 국가 그리고 세계가 필요로 하는 화합과 우정은 오직 연민의 마음과 친절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이제 우리는 탈출구를 찾기 위한 새로운 실천을 훈련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상적으로 보일지라도 인간의 가치와 인간의 하나됨을 인정하는 연민의 마음말고는 다른 대안이 전혀 없다. 이것이 지속적인 행복을 얻는 유일한 길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비심(慈悲心)이다. 즉, 진정한 의미의 형제애와 자매애를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보편적 종교라고 믿고 있다. 자신이
불자냐 기독교인이냐, 이슬람교도냐 힌두교도냐, 아니면 무종교인이냐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인류가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나는 연민의 마음을 전 세계를 잇는 스테이플 핀(Staple pin)이라고 부른다. 정치인, 기술자, 과학자, 주부, 의사, 교사 그리고 변호사 등 어떤 일을 하고 있든 간에 모든 사람에게 건전하고도 연민의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은
정신적인 성장의 기초가 된다고 할 수 있으리라.
제1부 수행의 기초
세 가지 수행법
티베트에서 불제자들은 스스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부처님의 경우를 본보기 삼아 수행법을 익히고 있다. 부처님의 일생을 통해
우리는 수행에 세 가지 단계가 있음을 알게 된다. 도덕이 첫 번째고, 그 다음은 집중명상이고, 그 다음은 지혜다. 그리고
우리는 깨달음의 길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연민의 자세를 기르고 지혜를 터득하는 것은 천천히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마음이 변하게 되면 주변 환경도 변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실천하는 관용과 사랑의 이점을 알게 된 사람들은 자신들 역시 그렇게 실천해보고자 노력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는 경전들은 세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① 도덕의 훈련
② 집중명상에 관한 말씀
③ 지혜의 훈련을 설명하는 일목요연한 지식
이러한 각각의 경전에서 주요한 수행은 ‘고요하게 머무르기(집중명상)’와 ‘특수한 통찰력(지혜)’의 결합에서 비롯되는
비범한 상태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결합을 일궈내려면 먼저 토대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것이 바로 도덕이다.
제2부 도덕의 수행
도덕의 종류
불교 계율의 주요한 원리는 다른 사람들을 돕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해치지 않는 것이다. 남을 위한 배려에서 비롯된
비폭력을 근본으로 하는 서원은 불교에서 볼 수 있는 세 가지 종류의 계율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① 개인적 해탈을 위한 계율의 골자는 남에게 해를 미칠 수 있는
신업(身業, 몸으로 짓는 일체의 죄업)과 구업(口業, 말을 잘못하여 짓는 업)을 삼가는 것이다.
② 소위 보살계(菩薩戒)라고 하는 남을 위한 배려의 계율은 이기심을 억제하는 것을 골자로 삼고 있다.
③ 딴뜨라(Tantra)의 계율은 다른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는 심신이 완전히 발전된 상태를 상상하는
특수한 기법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개인적 해탈의 계율 : 개인적 해탈의 계율을 수행하자면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미치는 신업과 구업을 삼가려는 자각이 필요하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십악(十惡)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십악은 세 가지 범주로 이루어져 있다. 몸으로 짓는 악업은
살생(殺生), 투도(偸盜)와 사음(邪淫)이다. 입으로 짓는 악업은 망어(妄語), 양설(兩舌), 악구(惡口)와 기어(綺語)다.
마음으로 짓는 악업은 탐욕(貪慾), 진에(瞋恚)와 사견(邪見)이다. 행동은 동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충동적이고 지나친 신업과
구업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동기를 제어하는 것이다. 사소한 목적에서 비롯된 동기는 개인적 해탈의 계율을 수행하는 궁극적인
이유, 즉 윤회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새로운 자세로 윤회를 넘어서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십악을 끊고
깨끗한 행동을 하겠다는 서원을 세우면서 계율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삼가야 한다
불자들은 먼저 부처님(佛), 깨달음(法), 정신적 공동체(僧), 즉 삼보(三寶)에 귀의한다는 맥락에서 계율을 지키겠다는 서원을 한다. 부처님은 고통과 한계 상황에서 귀의처를 찾는 법을 가르쳐주셨는데, 주된 귀의처 혹은 근본적인 보호처는 계(戒), 정(定),
혜(慧)의 수행을 통해 이룬 깨달음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부처님은 실제적인 귀의처, 즉 교리를 실천에 옮기는 법을 가르쳐주시기는 하지만, 주된 책임은 우리 자신의 실천에 있다. 개인적 해탈의 계율을 수행하면 전념(專念)과 내관(內觀)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도 도움이 된다. 전념은 자신의 신업과 구업을 아주 세세히 알아차릴 때 비롯되는 것으로 꿈을 꾸는 동안에도 지속된다. 먹거나 오갈 때, 혹은 앉거나 서는 등의 행동을 할 때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 강력한 전념의 상태가 확립될 것이다. 개인적 해탈의 계율을 수행하면 관용과 인내심도 늘어난다. 부처님은 인내심은 가장 높은 형태의 자기 수양이고, 그것을 통해 우리는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수행은 자신의 태도를 변화시킨다는 뜻이다. 지금으로서는 사회에 이바지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행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정직한 시민, 즉 인간 사회의 착한 성원이 되는 것이다. 심오한 사상을 알고 있는가 하는 여부와 관계없이
바로 지금 어디에 있든지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삼가는 것이 계율에 깃든 가르침을 되살리는
처음 단계의 핵심이다.
․ 일상 수행을 위한 요약
① 의식주에 집착하고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절에서 하는 만족의 수행을 재가신자(가정을 가지고 세속생활을 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 접목시켜야 하며, 또한 적당한 의식주에 만족하는 법을 배운다.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남는 시간이 있으면 명상을 한다. 그러면 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② 자신이 난처한 상황에 빠져 있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욕을 먹거나, 떠밀리거나, 두들겨 맞는 것을 떠나 남에게 몸으로나
입으로 해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강한 바람을 가져야 한다.
널리 도움을 베풀어야 한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을 기본으로 삼는 수행을 했다면, 이제는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을 길러야 한다.
먼저 개인적 해탈의 계율을 통해 화와 같은 것들을 제어하는 법을 배우게 되면, 비로소 남을 편안하게 해주고 위해주는 방법을
배울 수 있게 된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은 수동적인 수행인 반면, 남을 돕고자 하는 것은 적극적인 수행이다.
부처님은 세 단계의 계율을 가르치셨는데, 그것은 개인적 해탈의 계율, 남을 배려하는 계율 그리고 딴뜨라의 계율이다.
남을 돕는 일은 대승의 가르침, 즉 두 번째 단계의 핵심이자, 소위 말하는 보살계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자비심은 단지 친구나
가족 혹은 끔찍한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들에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들에게 확장되는 것이어야 한다. 자비심을 최대로
발휘하려면 인내심을 닦지 않으면 안 된다. 진정한 자비심은 이성에 근거한다. 통상적인 자비심이나 사랑은 욕망, 혹은 집착의
제한을 받기 마련이다. 우리는 어려운 시절을 통해 정신적인 힘을 얻게 된다. 또한 그러한 시절을 통해 화가 정말로 쓸모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화를 내는 대신 말썽을 일으킨 사람을 깊이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 까닭은 그들이 화나는
상황을 야기함으로써, 우리에게 관용과 인내심을 닦을 수 있는 아주 소중한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내 삶은 행복하지 않았다. 나는 중국 공산주의 침략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이웃 나라로 쫓겨와 우리의 문화를 재건설해야
하는 어려운 경험을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어려웠던 시절을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시절로 여기고 있다.
그 시절을 통해 나는 새로운 경험을 많이 했고 새로운 사상을 많이 배웠다. 그 덕분에 나는 좀더 현실적인 사람이 되었다.
현명하게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 내가 아무리 중요한 존재라고 해도 나는 다만 한 사람에 불과하다.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행복을 누릴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나는 하나고 남은 여럿이라는 데 차이점이 있다.
단 한 사람의 행복을 잃는 것도 간과할 수 없지만, 수많은 다른 존재들의 행복을 잃는 것만큼 중요하다고 할 수는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른 이들에 대한 자비심, 사랑 그리고 존중하는 마음을 길러야 한다. 종교, 이데올로기, 민족, 경제체제, 정치체제, 그리고 정부의 차이는 모두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나는 만일 우리가 이기적인 사람이라면 현명하게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통상적인 이기주의는 일신의 요구만을 염두에 두지만, 현명하게 이기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 대하기를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 대하는 것처럼 할 것이다. 결국 이런 방법을 취하게 되면 만족과 행복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심지어
이기적인 관점에서 본다 해도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고,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줄여야 더 나은 결과를 얻게
된다. 다른 이들을 배려할 줄 알면, 자신의 행복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남에 대한 배려가 소중하다고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로 인해 자신이 처한 상황을 대국적 견지에서 볼 수 있게 된다는 점 때문이다. 시야가 좁으면 사소한 문제조차 견딜 수 없게 된다. 모든 중생을 염려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시야가 넓어져서 더욱 현실적인 사람이 된다. 이와 같은 이타적인 자세는 자신의 고통을
당장 줄이는 데도 도움을 준다. 내가 사람들에게 간곡한 마음으로 바라는 것은 종교를 믿고 있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사랑과 친절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을 통해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된다.
우리의 책임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 세계사를 살펴보면, 가공할 인명 손실을 불러일으킨 커다란 비극들 모두가 인간 때문에
생긴 일임을 알 수 있다. 인간 때문에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긴다. 오늘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은 인종, 민족 그리고 경제적 대립에서
빚어지는 끊임없는 갈등과 공포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문제를 해결할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자신의 마음과 세상을 괴롭히는 감정인 탐욕, 증오 그리고 무지의 쓰레기 더미 한가운데서도 자비로운 태도를 가질 수 있고, 그것을 보석처럼 소중히 여겨야만 한다. 이 소중한 발견을 통해 우리는 행복과 진정한 평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보다 진정으로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잘 훈련된 태도는 자타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 그것은 일시적으로나 장기적으로나 그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다. 자비심은 무가지보(無價之寶)라
할 수 있다. 언제든지 남을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 남을 도와줄 수 없다면 최소한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계율 수행, 즉 지계(持戒)에 담긴 근본적인 의미다.
․ 일상 수행을 위한 요약
① 차분하고도 합리적인 마음가짐을 유지한다.
② 자신의 오른쪽 앞에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또 하나의 자기가 있다고 상상한다.
③ 자신의 왼쪽 앞에 자기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다시 말해 친구도 아니고 적도 아닌 고통받는 한 무리의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고
상상한다.
④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양쪽을 살펴본다. 그리고는 이렇게 생각해본다. “양쪽 다 행복을 원한다. 양쪽 다 고통을 떨쳐버리기를
바란다. 양쪽 다 이러한 목표를 이룰 권리를 가지고 있다.”
⑤ 다음과 같은 점을 생각해본다. 우리가 흔히 좀더 장기적인 이익을 위해 일시적인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처럼, 자신의
왼쪽에 있는 고통받고 있는 더 많은 사람들의 이익이 자신의 오른쪽에 있는 이기적인 단 한 사람의 이익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우리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더 많은 사람들이 있는 쪽을 향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제3부 집중명상의 수행
마음에 집중해보자
의미 있는 삶을 향한 길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계율이 오고, 그 다음에 집중명상이 오고, 마지막으로 지혜가
온다. 지혜는 심일(心一)상태의 명상에 의지하고, 명상은 계율의 자각에 의지한다. 의식적인 행동 양식을 가질 때 고요하게 머무르기, 즉 적정(寂定)이라 부르는 집중명상이 이뤄진다. 적정을 낳는 안정명상을 수행하는 방법에 대해서 논의해보기로 하자.
안정명상의 목적은 단 하나의 대상, 또는 주제에 집중할 수 있는 마음의 능력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은
다시 여러 문제를 뿌리째 뽑을 수 있게 된다.
집중명상에 의해 적정을 얻는 방법
적정을 얻는 최초의 원인이 되는 계율을 통해 평화롭고 편하며 세심한 행동 양식을 갖게 됨에 따라 추잡하고 산만한 마음을 버려야
된다. 소란스러운 일상생활에서 벗어난 수행을 위한 시간과 장소를 확보하고 명상을 일과로 삼아야 한다. 소음은 집중을 방해하므로, 처음에는 조용한 곳에 있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고 마음을 맑게 해주는 알맞은 식사를 해야 한다. 건강 상황에 따라서 고기를 먹을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채식이 가장 좋다. 또한 음식을 지나치게 많이 먹는 것도 좋지 않으므로 좀 덜 먹어야 한다. 물론
술을 마시거나 향정신 작용을 가진 약을 삼가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흡연도 바람직하지 않다. 적당한 시간의 수면이 필요하며,
집중명상의 초기 단계에서는 특히 몸의 자세가 중요하다. 될 수 있으면 결가부좌 또는 반가부좌를 취한다. 방석 두 개를 준비해서
작은 것을 둔부 아래에 깔아 둔부가 무릎보다 높은 위치에 있게 한다. 척추를 마치 화살처럼 곧추세운다. 고개는 약간 아래로 숙인다. 눈길은 콧등 위로 앞쪽을 향하게 한다. 혀는 입 천장에 갖다댄다. 두 팔은 약간 느슨한 상태로 둔다. 손의 위치에 대해서 말하자면, 딴뜨라 수행을 할 때는 왼손바닥 위에 오른손바닥을 올려놓고 양손의 엄지를 맞대서 삼각형의 모습을 만들고는 양손을 배꼽에서
손가락 네 개의 너비쯤 아래 두는 것이 중요하다.
명상 상태를 유지하는 데 가장 커다란 장애는 흥분과 해이(解弛)다. 흥분의 실체를 확인하고, 전념을 통해 마음이 그 영향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무기력은 해이를 낳는데, 그것 역시 명료함을 막는다. 마음이 너무 긴장되고 흥분한 상태에 있을 때면 기타 줄을 조금 늦추듯이 마음을 느슨하게 해주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무기력으로 마음이 충분히 긴장되지 않은 상태에 있을 때면
기타 줄을 조이듯이 마음을 추슬러서 긴장감을 높여야 한다. 집중명상을 할 수 있도록 받쳐주는 힘은 전념인데, 그것은 주의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대상에 열중하는 능력이다. 계속해서 대상에 전념하는 데 익숙해지면 내관을 해야 한다. 적정을 얻는 과정에서
내관이 맡은 임무는 마음이 해이나 흥분된 상태 하에 있는지, 또는 막 그렇게 되려고 하는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전념과 내관을 통해 계속해서 대상을 붙잡고 있을 수 있게 되면, 6개월 이내에 집중명상을 성취할 가능성이 있다.
처음에는 무진장 애를 써서라도 억지로 명상의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4시간 동안 끊임없이 생생하게 대상에 머무를 수 있게 되면, 견고한 안정성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몸과 마음의 바람직하지 못한
상태가 사라지고, 몸과 마음이 유연해지는 기쁨을 얻게 된다. 바로 이때, 적정을 이루게 된다. 매일 마음 그 자체에 집중하는 명상을 통해서도 적정에 이를 수 있다. 마음 그 자체에 집중하기 위한 단계로, 자비심 함양과 같은 긍정적인 공덕을 쌓음으로써 감정 상의
장애를 극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다음 단계는 자기 마음의 본성과 친숙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은 이른 아침으로, 잠에서 깬 직후 모든 감각 기능이 활성화되기 전이다. 이때야말로 청정한 빛으로 이루어진 마음의 본성을 경험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마음속으로 과거에 있었던 일을 생각해서도 안 되고 미래에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을 예상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밝게 빛나고 인지하는 마음의 본성을 알고 나면 그것에 집중한다. 전념과 내관의 힘을 이용해서 계속해서 그 상태에 머문다.
이러한 명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예민해지고 기억력과 정신 수행을 넘어 사업이나 공사, 가족부양을 하거나 교사, 의사 혹은
변호사가 되는 데 틀림없이 쓸모 있는 특질들이 늘어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매일 수행하면 화를 다스리는 데도 도움이 된다.
이러한 정신 수련의 또 하나의 이로움은 늙어감에 따라 몸에 변화가 생긴다 해도, 마음은 여전히 생기가 넘치고 적극적인 상태로
남아 있을 수 있다.
정신적 평정을 얻는 그 밖의 기법 : 곤란한 상황에서는 감정적으로 흥분하기 쉽다. 불교는 우리에게 매일 맞닥뜨리는
견디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스트레스를 없애고 평정을 얻는 여러 가지 기법을 제시하고 있다. 문제를 피하려 하기보다는
그것에 직접 초점을 맞추는 분석명상의 힘을 쓰는 것이 특히 효과적이다.
골칫거리가 생기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해봐야 한다. 하지만 극복할 수 없는 경우에 처하면,
자신의 행동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사실을 곰곰이 생각해본다. 고통은 업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알면, 삶은 부당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 역시 알게 되므로 어느 정도 평화로운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자신에게 처한 문제를 극복하고자 한다면 자신의 삶에 걸쳐 있는 고통의 범위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골칫거리를 좀더 넓은 견지에서 살펴본다. 누가 자기를 비난하면 맞대응하기보다는,
그러한 비난을 통해 자기애(自己愛)의 고리가 풀어짐으로써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능력이 강해진다고 생각한다.
이 기법은 실행하기 어렵지만 실행에 옮기는데 성공하면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제4부 지혜의 수행
정신수행에서 지혜의 역할
자신이 아니라 남들을 위해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사랑과 자비심을 가지려면, 먼저 고통을 직시해서
그 유형을 확인해봐야 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는 정신 및 육체적 고통, 변화의 고통 그리고 통제되지 않는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보편적인 고통을 겪는다. 고통을 야기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지, 즉 생물과 사물이 본래부터 존재한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된다. 우리 모두는 자아 또는 ‘나’라고 하는 확실하고 적절한 의식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에 더하여 본래부터 존재하고 있는 ‘나’라는 잘못된 생각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자아가 그 자체의 힘으로 존재하고, 선천적으로 성립되어 있으며, 스스로 내세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그렇게 따로 떨어져 있는 나, 즉 혼자 힘으로 존재하고 스스로 성립된 자아가 존재한다면 충분한 분석을 통해 그것이 몸에 있는지, 아니면 마음에 있는지, 또는 몸과 마음 양쪽에 걸쳐 존재하는지, 혹은 몸과 마음과는 별도로 존재하는지 더욱 확실하게 드러나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세히 보려고 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욱더 보이지 않는다.
그것을 볼 수 없다는 것은 그 현상들이 자신의 힘으로 존재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스스로 성립된 것이 아니다.
본래적인 존재를 생각하는 의식에는 확실한 근거가 없다. 실재에 근거하고 있는 현명한 의식은 생물과 그 밖의 현상, 즉 마음, 몸,
건물 등이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실재는 본래적인 존재가 있다고 하는 생각과 반대되는 상태에
있는 것임을 알게 되면 지혜는 차츰 무지를 극복해 나가게 된다. 현상이 본래부터 존재한다는 잘못된 생각의 무지를 없애면,
탐욕과 증오 같은 번뇌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다음에는 고통도 사라질 것이다. 더구나 공성을 깨달은 지혜는 남을 깊이 배려할 줄 아는 마음과 그로부터 우러나오는 자비행(慈悲行)을 갖추어야만 일체지(一切智)의 장애물을 제거할 수 있다. 이 장애물이란
심지어 감각 의식에조차 본래부터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 즉 가상(假相)에 물들기 쉬운 성향을 말한다. 그러므로 대자비심과 남을 자신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깨닫고자 하는 의도, 즉 보리심(菩提心, bodhichitta)과 함께 지혜를 길러야 정신 수행이 완벽해지는
법이다. 이렇게 되어야만 우리의 의식은 부처님의 일체지로 바뀔 수 있다.
무엇이 공(空)하다는 말인가 : 공성(空性) 또는 무아(無我)를 이해하려면, 먼저 현상에 무엇이 없다는 것인지를 확인해야만 한다.
무엇이 부정되는지를 알지 못하면 그것의 부재, 즉 공성을 이해할 수 없다. 공성은 무(無)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아니다. 모든 현상은 다른 것에 의존해서 발생하기 때문에, 그 존재는 스스로는 물론 그 밖의 다른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는 상관적인 존재라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다. 예를 들어 나무 탁자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그렇기는커녕 그것은 나무, 그것을 만드는 목수 등과 같은 아주 많은 원인에 의존하고 있다. 그것은 또한 스스로에 의존하고 있기도 하다. 나무 탁자나 어떤 현상이 정말로 독립적인 것이라면, 다시 말해 그것이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성립된 것이라면 분석을 통해 아무것에도 의존하고 있지 않은 존재의 실체가 보다 확실히 드러나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와 같은 불교적 추론은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생전에 선업을 쌓고 악업을 멀리한 결과를 믿어야 할 필요가 있다. 현상들은 원인과 조건에
의존해서 발생한다(緣起)는 사실을 알지 못함으로써 생기는 허무주의에 덫에 걸리지 않고 본래적인 존재가 공 하다는 미묘한 견해를 이해하기가 우리로선 당분간 너무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의식은 어떤 식으로 틀리게 되는가 : 모든 현상이 스스로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통상적인 지각 역시
틀리게 된다. 우리 모두에게는 ‘나’라는 의식이 있지만, 그것은 몸과 마음에 의존해서 나타나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는 영원하고 전일(全一)하며 독립적인 자아가 없다는 뜻이다. 좀더 자세하게 말하면 본래부터 존재하는
현상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불교는 몸과 마음의 연속에 의존해서 나타나고, 시시각각 변하는 자아의 존재를 정말
중요하게 여긴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러한 ‘나’라고 하는 의식이 분명히 있다. 불교의 무아설(無我設)은 이러한 자아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이러한 ‘나’를 가지고 있는 우리 모두가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원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수많은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것은 자아의식과 그 밖의 현상을 과장해서 본래부터 존재한다고 억지를 부리기 때문이다.
마음과 마음의 깊은 본성
완전한 지혜를 다루고 있는 어느 경전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고 계신다. “마음속에서 마음을 찾을 수 없다. 마음의 본성은 청정한 빛이다.” 비록 마음의 실체를 확인하는 일은 어렵다 할지라도, 마음은 존재하며 과연 깊은 본성인지 아닌지에 대한 검토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의 깊은 본성은 다만 그 본래적인 존재가 공 할 따름이다. 이 말은 무지, 탐욕 그리고
증오와 같은 마음을 더럽히는 잘못된 번뇌는 일시적인 것이므로 제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점을 알게 되면 마음의 깊은 본성은 청정한 빛, 즉 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의식은 앞선 순간의 의식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 연속에는 시작이 있을 수 없다. 의식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이 연속 때문에 마음은 좋은 상태로 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연속되는 마음이 청정하지 못한
상태와 연관되어 있는 경우, 우리의 경험은 윤회의 영역에 제한되게 된다. 연속되는 마음이 청정하지 못한 상태를 벗어나게 되면
열반에 이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모든 현상은 마음이 부리는 재주 또는 유희라고 할 수 있다. 윤회라고 하는 청정하지 못한 현상은 청정하지 못한 마음의 유희다. 열반이라고 하는 청정한 현상은 청정한 마음의 유희다.
잘못된 상태의 마음은 무지에 의존하고 있다 : 잘못된 상태에 있는 모든 마음은 의식을 자신의 뿌리로 착각하고 있다. 무지는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대상을 오해하는 의식의 일종이다. 잘못된 앎과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앎은 현상을 상반되게 이해하므로, 하나가 다른 하나를 해치기 마련이다. 수행을 통해 올바른 태도에 익숙해지면, 잘못된 상태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줄어들다가 마침내는
소멸된다. 불교의 체계는 바로 자연스러운 모순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는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바라지 않는다. 우리가 피하고자
하는 고통은 주로 마음의 태도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명상을 통해 광대한 자비심과 공성에 대한 심오한 지혜를 동시에 함양하면
연속되고 있는 잘못된 상태의 마음은 차츰 변하게 된다. 동기와 지혜를 동시에 함양해야 성불할 수 있다. 동기를 함양한 결과 얻는 것은 부처님의 색신(色身)으로, 그것은 다른 이들의 행복에 이바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지혜를 함양한 데서 비롯된 흔적은
부처님의 법신(法身)으로, 그것은 자신의 정신적인 성장이 완수된 것이다. 가장 중요한 동기는 자비심에 고무되어 보시(布施), 지계(持戒) 그리고 인욕(忍辱)같은 자비행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깨닫고자 하는 의도다. 주요한 형태의 지혜는
본래적인 존재의 공성을 깨닫는 지적인 의식이다. 불교의 토대에는 세 가지 측면이 있다. 그 중 기본이 되는 것은 두 가지 진리인
속제(俗諦)와 진제(眞諦)다. 이 두 가지 진리에서 각자의 진리에 연관되어 있는 동기와 지혜라고 하는 한 쌍의 요소가 길로 등장하게 된다. 과보(果報), 즉 그 길로 나아간 결과는 부처님의 두 가지 몸인 색신과 법신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것을 모두 얻으려면 두 가지 진리(속제와 진제)에 근거해서, 과보(果報,부처님의 색신과 법신)를 성취하는 데 이르게 해주는 길의 두 가지 특질, 다시 말해 동기와 지혜를 닦아야 한다.
제5부 딴뜨라
천신(天神)요가
불교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유형의 수행인 현교(顯敎)의 수행법과 밀교(密敎)의 수행법이 있다.
지금까지 논의해온 것은 현교의 수행법이었다. 밀교, 즉 딴뜨라의 특수한 목적은 자격을 갖춘 수행자가 하루 빨리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지름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딴뜨라에서는 수행을 할 때 천신요가라고 하는 상상력을 명상에 활용하고 있다.
독특한 이 딴뜨라 수행을 하자면, 자신이 부처님이 갖춘 몸, 행동, 방편 그리고 환경을 가지고 있다고 관상(觀想)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것을 일러 “정신적인 길로서 상상력을 택하기”라고 한다. 그러면 이 수행의 염려스러운 점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의
마음은 실재를 이해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고, 그로 인해 천신처럼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당장은 갖고 있지 못하다 해도 일부러 천신의 몸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상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상명상이다. 딴뜨라의 전문 수련자가 되려면, 즉 부처님이 특별히 설하신 딴뜨라 수행에 적합한 수련자가 되려면 수행자는 뛰어난 재능을 갖추고 있어야 하고, 공성을 깨달은 견고한 지혜를 이미 얻었거나 그 지혜를 빨리 활성화시킬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저 딴뜨라를 수행할 뿐이라면 그에 필요한 자격은 아직 부족한 것이다.
딴뜨라 수행을 위한 입문 의식 : 딴뜨라 수행을 하려면 선구적인 훌륭한 이들에게 관정(灌頂)을 받는 일이 특히 중요하다.
관정을 받는 첫 번째 방법은 입문 의식을 통하는 것이다. 딴뜨라에는 소작(所作), 행위, 요가 그리고 무상요가라는 네 가지 종류가
있는데, 각각의 딴뜨라에는 수행을 위해 마음을 다잡게 하는 고유한 입문 의식과 명상법이 있다. 자비심과 지혜의 현시(顯示)인
이상적인 환경과 그 안에 있는 신들로 이루어져 있는 만다라(曼茶羅, mandala) 안에서 치른다. 그 중에는 그림으로 그려져 있는 것도 있고, 갖가지 색깔로 물들인 모래로 만들어진 것도 있고, 그밖에 특별한 종류의 집중 만다라로 이루어진 것도 있다. 낮은 단계의
딴뜨라, 즉 소작과 행위 딴뜨라에서는 입문 의식을 치를 때 반드시 딴뜨라 계를 받아야 한다는 명확한 규정이 없다. 높은 단계의
딴뜨라, 즉 요가와 무상요가 딴뜨라에서는 입문 의식을 빠진 것 없이 완벽하게 치르고 난 뒤에 서약과 더불어 딴뜨라 계를 받아야
한다. 딴뜨라 수행은 주로 일상적인 자신의 모습과 환경을 극복하는 데 관련된 것이므로, 즉 그러한 것들에 대한 통상적인 개념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므로 자기에게 부처님의 몸, 자비행, 방편 그리고 거처가 있다고 관상해야 한다. 24시간 동안만 지키는 특정한 개인적 해탈의 계를 제외한 나머지 개인적 해탈의 계 모두는 일생동안 지켜야 한다. 보살계와 딴뜨라 계는 근본적인 파계를 하지 않는 한 무상의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줄곧 지켜야 한다. 먼저 개인적 해탈의 계를 받고 나서 보살계를 받은 다음 마지막으로 딴뜨라
계를 받는다. 보살계와 딴뜨라 계를 받은 재가자는 재가자판 개인적 해탈의 계를 지킨다.
이런 식으로 현교와 밀교의 수행은 상호작용을 한다.
․ 일상 수행을 위한 요약
딴뜨라 계율은 개인적 해탈의 계율과 자비의 계율 위에 세워진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딴뜨라 수행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자신과 남 그리고 환경과 자신의 행동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는 데 있다. 그러므로 자신이 자비심에서 비롯된 동기,
청정한 몸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주는 행실을 가지고 있다고 관상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제6부 - 수행의 단계
깨달음에 이르는 길의 개관
『반야심경』에서 부처님은 여러 단계의 길을 다음과 같은 짧고도 의미심장한 말씀으로 표현하고 계신다.
“따댜따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스와하.(나아가라, 나아가라, 넘어서 나아가라, 넘어서 끝까지 나아가라.
깨달음에 근거하라.)”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윤회, 즉 악에 물든 행동과 비생산적인 감정의 영향 아래 있는 존재의 상태로부터 떠나고 있는 것이다.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인가? 고통과 고통의 근원, 번뇌로 인해 확립된 성향을 영원히 잊어버린 법신을 부여받은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떤 원인과 조건에 의지한 채 나아가고 있는 것인가? 지혜와 자비가 결합된 길에 의지해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깨달음의 여러 가지 특질 : 모든 형태의 불교에서 수행이 근거하고 있는 것은 윤회를 벗어나고자 하는 의도다. 대승에서는
그에 더하여 남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깨닫고자 하는 의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딴뜨라에서는 적정과 특수한 통찰력이 결합되어
있는 집중명상을 강화시키는 기법을 통해,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을 막는 곤란한 장애와 깨달음을 얻는 일체지(一切智)에 이르는
장애를 모두 제거함으로써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부처님이 갖춘 특질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 상이한 ‘몸’으로 설명된다.
․ 자신의 행복을 충족시키기 위한 법신
․ 다른 이들의 행복을 충족시키기 위한 색신
속제(俗諦)와 진제(眞諦)라고 하는 두 가지 진리가 땅이다. 땅에 난 길은 동기와 지혜다. 그 길을 따라가서 얻은 과보는 부처님의
색신과 법신이다. 깨달음은 적절한 이해, 공덕의 축적 그리고 장애의 극복 같은 여러 가지 원인과 조건을 통해 일어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먼저 공덕을 쌓고 악업을 정화시키지 않으면, 그저 명상을 해본다고 해서 깨달음을 얻기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그것을 일상적인 사회생활 속에서 실천에 옮겨야만 한다. 그때서야 그 가르침의 참된 가치를 알 수 있게 되는 법이다.
수행의 진정한 가치는 곤란한 시기를 당했을 때 나타나는 법이다. 질병, 늙음, 죽음 또는 다른 절망적인 상황과 같은 피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화를 제어하고 감정을 절제하고 착한 마음가짐으로 끈기 있고 차분하게 그 문제에 대처해야 할 것이다.
이때 수행은 필요 불가결한 요소가 된다. 이런 식으로 수행해 나간다면, 적어도 그 문제로 인해 마음의 평화가 깨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상황을 직시하고 문제를 분석할 수 있게 되면, 그때 그것은 물 속에 들어 있는 커다란 얼음조각처럼
차츰 녹아 없어져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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