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옛글 모음

이름 없는 꽃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9. 8. 17.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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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꽃

2009. 08. 17. (월)

  잠시 교외로 나가면 꽃은 피어 있으되 그 이름을 아는 것이 많지 않다. 학문은 사물의 이름을 아는 것에서부터 비롯한다 하였으니, 꽃의 이름을 알지 못하여 부끄럽다. 그러나 실학자 신경준(申景濬)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브랜드에 얽매여 옷과 음식을 가리는 오늘날의 세태를 미리 안듯 이렇게 이름에 대하여 글을 지었다.

  순원(淳園)의 꽃 중에 이름이 없는 것이 많다. 대개 사물은 스스로 이름을 붙일 수 없고, 사람이 그 이름을 붙인다. 꽃이 이미 이름이 없다면 내가 이름을 붙이는 것이 좋을 수도 있지만 또 어찌 꼭 이름을 붙여야만 하겠는가?

  사람이 사물을 대함에 그 이름만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좋아하는 것은 이름 너머에 있다. 사람이 음식을 좋아하지만 어찌 음식 이름 때문에 좋아하겠는가? 사람이 옷을 좋아하지만 어찌 옷의 이름 때문에 좋아하겠는가? 여기에 맛난 회와 구이가 있으니 그저 먹어보기만 하면 된다. 먹어 배가 부르면 그뿐 무슨 생선의 살인지 모른다 하여 문제가 있겠는가? 여기 가벼운 가죽옷이 있으니 입어보기만 하면 된다. 입어보고 따뜻하면 그뿐 무슨 짐승의 가죽인지 모른다 하여 문제가 있겠는가? 내게 꽃이 있는데 좋아할 만한 것을 구하였다면 꽃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하여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정말 좋아할 만한 것이 없다면 굳이 이름을 붙일 이유가 없고, 좋아할 만한 것이 있어 정말 그것을 구하였다면 또 꼭 이름을 붙일 필요는 없다. 이름은 가리고자 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가리고자 한다면 이름이 없을 수 없다. 형체를 가지고 본다면 긴 것, 짧은 것, 큰 것, 작은 것이 이름이 아닌 것은 아니다. 색깔을 가지고 본다면 푸른 것, 누른 것, 붉은 것, 흰 것이라는 말도 이름이 아닌 것은 아니다. 땅을 가지고서 본다면 동쪽, 서쪽, 남쪽, 북쪽이라는 말도 이름이 아닌 것은 아니다. 가까이 있으면 ‘여기’라 하는데 이 역시 이름이라 할 수 있다. 멀리 있으면 ‘저기’라고 하는데 그 또한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이름이 없어서 ‘무명(無名)’이라 한다면 ‘무명’ 역시 이름인 것이다. 어찌 다시 이름을 지어다 붙여서 아름답게 치장하려고 하겠는가?

  예전 초나라에 어부가 있었는데 초나라 사람이 그를 사랑하여 사당을 짓고 대부 굴원(屈原)과 함께 배향하였다. 어부의 이름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대부 굴원은 『초사(楚辭)』를 지어 스스로 제 이름을 찬양하여 정칙(正則)이니 영균(靈均)이니 하였으니* , 이로서 대부 굴원의 이름이 정말 아름답게 되었다. 그러나 어부는 이름이 없고 단지 고기잡는 사람이라 어부라고만 하였으니 이는 천한 명칭이다. 그런데도 대부 굴원의 이름과 나란하게 백대의 먼 후세까지 전해지게 되었으니, 어찌 그 이름 때문이겠는가? 이름은 정말 아름답게 붙이는 것이 좋겠지만 천하게 붙여도 무방하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 아름다워도 되고 천해도 된다면 꼭 아름다움을 생각할 필요가 있겠는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면 없는 것이 정말 좋을 것이다.

  어떤 이가 말하였다. “꽃은 애초에 이름이 없었던 적이 없는데 당신이 유독 모른다고 하여 이름이 없다고 하면 되겠는가?” 내가 말하였다. “없어서 없는 것도 없는 것이요, 몰라서 없는 것 역시 없는 것이다. 어부가 또한 평소 이름이 없었던 것은 아니요, 어부가 초나라 사람이니 초나라 사람이라면 그 이름을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초나라 사람들이 어부에 대해 그 좋아함이 이름에 있지 않았기에 그 좋아할 만한 것만 전하고 그 이름은 전하지 않은 것이다. 이름을 정말 알고 있는데도 오히려 마음에 두지 않는데, 하물며 모르는 것에 꼭 이름을 붙이려고 할 필요가 있겠는가?”

* 굴원이 지은 『초사』〈이소(離騷)〉에 “선친께서 나의 출생한 때를 관찰하여 헤아리시어 비로소 내게 아름다운 이름을 내리셨으니, 나의 이름을 정칙으로 하시고 나의 자(字)를 영균으로 하시었네.” 라고 하였다.

 

     ▶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귀래정_전라북도문화관광넷 사진 제공

 

- 신경준, 〈순원의 꽃에 대한 단상(淳園花卉雜說)〉《여암유고(旅菴遺稿)》

※ 이 글의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에 수록된 한국문집총간 231집《여암유고(旅菴遺稿)》권10, 잡저(雜著),〈순원화훼잡설(淳園花卉雜說)〉중 무명(无名)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원문 바로가기]

[해설]

  전라도 순창 땅에 귀래정(歸來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그 정자를 세운 사람은 신숙주(申叔舟)의 아우 신말주(申末舟)다. 그 후손이 대대로 서울에서 생활하였고 귀래정에는 어쩌다 들렀을 뿐이다. 그 후 8대가 지나 신선영(申善泳)이라는 사람이 고향으로 내려와 귀래정에 다시 살게 되었다. 동쪽 바위 언덕에다 새로운 정자를 짓고 정자 아래 못을 팠으며, 못 안에 섬 셋을 두었다. 또 여러 기이한 바위를 모으고 온갖 꽃을 구하여 심었다. 이를 순창의 정원 순원(淳園)이라 하였다.

  그 손자가 순원을 물려받아 그곳에서 살았으니, 바로 뛰어난 실학자로 평가되는 신경준(1712-1781)이다. 신경준 역시 학업과 벼슬로 인하여 자주 고향을 비웠지만 그럼에도 조부가 새로 조성한 정원의 꽃나무를 사랑하여 하나하나 단상을 붙였다. 순원에는 연꽃과 난초, 매화, 국화, 복숭아나무, 철쭉, 모과, 작약, 앵두, 모란, 무궁화, 백합, 석류, 접시꽃, 영산홍, 옥잠화, 탱자나무, 동백, 창포, 산수유, 대나무, 백일홍(紫薇), 원추리 등 지금도 쉽게 볼 수 있는 수많은 종류의 꽃이 있었고, 그 밖에 조밥나무(常山), 사계화(四季花) 등 이름이 생소한 꽃도 있었으며, 목가(木茄), 명사(榠樝), 풍모란(風牧丹), 충천(衝天), 금정(錦庭), 면래(眠來), 어상(禦霜)처럼 어떤 꽃인지 알 수조차 없는 꽃도 있었다.

  신경준은 이러한 여러 꽃의 특성을 간단하게 설명한 후 그에 대한 고증을 겸하여 단상을 붙였다. 예를 들어 순원에 있던 난초와 유사한 풀을 설명하면서 난초와 혜초의 차이에 대해 고증하고 난초가 우리나라에 존재하는지도 따졌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30종이 넘는 화훼 하나하나에 대해 짧지만 운치 있는 글을 지었다. 그 중 하나가 이름을 알지 못한 꽃에 대한 단상이다.

  신경준은 이름이 없다는 ‘무명’ 역시 이름이라 하였다. 이름이 없어도 무명이라 하고 이름이 있지만 알지 못하면 그 역시 무명이 이름이 될 수 있다. 하였다. 굴원의 『초사』로 인하여 후세에 존재가 알려진 어부가 이름이 아닌 행적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것이라 하였다.

  ‘무명’은 인위를 배격하는 무위(無爲)와 닮은 사유구조이며, 송나라의 학자 소옹(邵雍)의 고사에서 비롯한다. 소옹은 그 집을 안락와(安樂窩)라 하고 아침에 그곳에서 태화탕(太和湯)을 마시고 흥이 일면 시를 짓고 살았다. 그리고 자신의 그러한 삶의 지향을 〈무명공전(無名公傳)〉에 담은 바 있다. 소옹을 배운 조선의 문인들은 사물에 붙인 이름이 인위와 명리, 차별을 조장한다 하여 ‘무명’을 긍정하였다.

  김수증(金壽增)은 화천의 곡운에 무명와(無名窩)를 경영하였는데 이때의 명은 명리(名利)로 속세의 명예와 이익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 채제공(蔡濟恭)은 마포에 잠시 우거하던 집을 무명정(無名亭)이라 하였는데 그 뜻이 구별을 없앤다는 신경준의 뜻과 닮아 있다. 채제공은, 이름은 구별을 위한 것인데, 구별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차별이 생기고 여기에서 천리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비판한 바 있다.

  이름의 이러한 부정적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봄직하지 않은가?

글쓴이 / 이종묵

*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 저서(역서)
- 해동강서시파연구, 태학사, 1995.
- 한국 한시의 전통과 문예미, 태학사, 2002.
- 누워서 노니는 산수, 태학사, 2002.
- 浮休子談論, 홍익출판사, 2002.
- 조선의 문화공간(1-4), 휴머니스트, 2006.
- 우리 한시를 읽는다, 돌베개,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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