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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사이에 도덕이 있어야 한다면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도덕이 있어야 한다. 도덕의 현실이 시대에 따라 변할 수는 있지만 도덕의 이상이 시대 때문에 변할 수는 없다. 조선후기 만동묘(萬東廟)는 명나라의 두 임금, 신종과 의종을 제사지내는 사당이다. 이미 멸망한 이웃나라 명나라를 생각해서, 아니 정확히 말하면 조선과 명 사이의 도덕을 생각해서 설립된 것이다. 조선은 명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질서 속에서 명과 각별한 조책(朝冊) 관계를 맺으며 오랜 평화를 누렸고 임진왜란 때에는 명과 연합하여 일본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었다. 명청(明淸)이 교체되어 만주에서 발원한 이민족이 천하를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지만 조선은 끝까지 명에 대한 도덕을 기억하면서 조선의 유교문명을 수호하고자 하였다. 세월은 다시 흘러 이번에는 조선 본토마저 일본에서 들어온 또 다른 이민족에게 강탈당했다. 새로운 이민족은 만동묘를 위험한 존재로 생각하여 제향을 금지하였고,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위패를 불사르고 묘정비(廟庭碑)를 쪼아버리는 만행을 저지르더니 다시 묘당을 철거하고 묘정비를 매립하여 존재 그 자체를 말살하였다. 일본은 왜 만동묘를 이다지도 두려워했는가? 경상도 합천 초계 지역 유학자 이직현(李直鉉 1850~1928)의 「화양일기」를 통해 20세기 전반 만동묘의 시대적인 의미에 관해 살펴보자.
우리나라 만동묘(萬東廟)는 실로 중화를 높이는 대의와 관계된 곳이다. 천하가 혼탁해지면 주례(周禮)가 노(魯)나라에 있는 법이라 중화의 일맥이 홀로 여기에 붙었으니 우리나라의 사유물이 아니다. 나라는 망할 수 있어도 의리는 망할 수 없다. 사람은 멸할 수 있어도 화이의 분수는 멸할 수 없다. 그 관계됨이 얼마나 큰가? 한번 세상이 변한 후 제향이 폐지되려 하니 팔도의 선비들이 금액을 갹출해서 제수를 바치려고 하였다. 그런데, 다른 도에서는 화양(華陽)의 본소에 모였는데, 유독 우리 영남 우도는 본도에 계를 설치하고 매번 봄가을로 제수를 바쳐 본소와 서로 의지하는 사이가 되었다. 무오년(1918년) 여름 본소에서 본도 창계(滄溪) 계소(契所)에 간통(簡通)이 왔다. 일본 오랑캐가 만동묘의 제향을 막으려고 괴산의 저들 경찰서에서 묘임(廟任) 정술원(鄭述源) 및 송주헌(宋冑憲) 두 사람을 불러 소위 총독령(總督令)을 들먹이며 봉향해서는 안 된다고 협박했고, 두 사람이 거부하고 따르지 않자 저들이 구박하는 것이 무소부지(無所不至)라는 내용이었다. 듣고 나서 통분함을 참지 못했다. 이것은 중화의 일맥이 붙은 곳인데 실컷 중화를 어지럽히는 저들 오랑캐가 듣기를 싫어하고 멸하려 하니 이는 실로 천지의 큰 변고이고 우리들이 좌시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결국 일본 사신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 : 즉 저들이 총독이라 칭하는 자)에게 서한을 보내 만동묘 제향을 폐지해서는 안 된다고 힐난하였지만 응답이 없었다. 이윽고 정과 송이 이미 항복의 깃발을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 극히 통탄해 하였다. 본도의 유림은 본소가 이미 멸망해서 봉향의 임무가 홀로 영남 우도에 있으니 의논이 없을 수 없기 때문에 6월 29일 삼가(三嘉)의 권씨 한천재(寒泉齋)에 모였다. 나는 족질 원택(源澤)을 보내 참여해서 듣게 하였다. 원택이 돌아와 선비들의 의논을 전했다. “이는 중화와 오랑캐가 혈전하는 때입니다. 참으로 굽힘 없이 의리를 지키는 사람이 아니면 오랑캐를 막아낼 수 없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촉망이 모두 숙부님께 있습니다.” (중략) 9월 8일 저들이 나를 추장(酋長)이 있는 곳(=괴산 경찰서)에 데리고 갔다. “공이 이직현인가? 만동묘 제향은 금령이 있는데 공이 어째서 유독 반항하는가?” 내가 말했다. “너는 내게 원수이다. 원수는 서로 존중할 의리가 없다. 너는 나를 공이라 하지 마라. 나는 너를 너라 하겠다. 너는 비록 오랑캐이나 옛날로 말하면 한 사람 황명의 신자였다. 무슨 생각으로 감히 내가 황묘(皇廟)에 제향하는 예를 방해하느냐?” 그가 뻣뻣한 얼굴로 비웃으며 말했다. “공과 나는 한 나라 사람인데 어째서 원수라 하는가?” 내가 말했다. “한 나라라고 말한 것은 황명(皇明) 때문에 그런 것이냐?” 그가 말했다. “명나라는 나는 모른다.” 내가 말했다. “그러면 나는 황명 유민(遺民)이고 일중(日中) 처사(處士)이다. 너는 어째서 한 나라 사람이라고 하는 게냐?” 그가 말했다. “명이 망한 지 오래 되었는데 어째서 기를 쓰고 명나라 명나라 하는가?” 내가 말했다. “아침에 죽고 저녁에 잊는 것은 오랑캐의 풍속이다. 아침에는 군신(君臣)이었다가 저녁에는 원수가 되는 것은 금수만도 못한 일이다. 군자는 존망으로 변심하지 않는다. 하물며 우리 황명이 나라를 재조한 은혜는 실로 만세에 잊기 어려운 것이다. 만약 황명이 아니었다면 네가 우리를 이미 오래 전에 어육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 종사가 이렇게 망극한 지경이 되었다만 네가 방자하고 잔폭하게 구는 것도 황명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황명을 추대하고 너를 원수라 하는 것이 어찌 옛날보다 두 배, 다섯 배는 되지 않겠느냐?” 그가 무안히 한참 있었다. (중략) 그가 다시 물었다. “총독에게 보내는 편지에 어째서 일사(日使)라고 했는가?” 내가 말했다. “나는 우리 임금을 받들 뿐, 네가 총독이라 부르는 명칭으로 그를 부르지 않는다. 그래서 일사라고 칭한 것이니 일본 사신이라는 말이다.” 그가 말했다. “누가 임금인가?” 나는 언성을 높였다. “너는 광무(光武), 융희(隆熙)를 모르느냐?” 그가 다시 물었다. “일중(日中) 처사(處士)는 무슨 뜻인가?” 내가 말했다. “일중은 조선이라는 말이다. 처사는 산림에 처한 사람을 칭한다.” 그가 말했다. “조선을 어째서 일중이라 칭하는가?” 내가 말했다. “왜국은 일출처(日出處)라 하고 중국은 일입처(日入處)라 하고 조선은 일중처(日中處)라 한다. 옛날에 그런 말이 있다.” 그가 말했다. “최익현씨와 서로 아는 사이인가?” 내가 말했다. “알다 뿐인가? 도의를 강마한지 오래요 절의에 감복하는 마음이 깊다.” 그가 말했다. “함부로 의병을 일으켜 필경 먼 섬에서 죽었으니 슬프지 아니한가?” 내가 말했다. “의병이라 말하면서 어째서 '함부로'라는 말을 하느냐? 의롭지 않게 살면 살아도 죽는 것이요 의리를 얻었다면 죽어도 사는 것이다. 어째서 슬프다 하느냐?” 그가 말했다. “공은 보안법을 아는가?” 내가 말했다. “너의 법을 내가 어찌 알까?” 그가 말했다. “이치에 닿지 않는 말로 선동해서 민심을 소란스럽게 하면 최익현처럼 먼 섬에 안치시키는 것이 이것이다. 공도 필시 이 법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말했다. “내가 지키는 것은 의리이다. 의리가 있는 곳이라면 머리를 자르고 가슴을 뚫어도 달게 받겠다. 하물며 먼 섬이랴? 그러나 오늘 일로 말하자면 나는 모르겠다만 유민으로서 황묘를 봉향하는 것이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이냐? 아니면, 오랑캐로서 황묘를 범하는 것이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이냐? 엄숙히 모여 향사를 받드는 것이 소란스런 일이냐? 아니면, 학대하고 구박하는 것이 소란스런 일이냐? 이치에 닿지 않는 것은 너다. 소란을 일으킨 것도 너다. 너는 보안법이 있으니 스스로 죽을 죄를 범한 것이다. 또, 네가 제향을 방해하는 것은 무슨 생각이냐?” 그가 말했다. “쓸데없는 일에 재산을 축내고 여러 사람을 불러 모아 소란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내가 말했다. “제사를 쓸데없다고 하는 것은 너희 오랑캐의 법도이다. 어째서 우리 소중화 예의지방을 오랑캐 법도로 똑같이 보는가? 제사는 예의 큰 절도이고 예는 소란을 제어하는 도구이니 어찌 소란을 일으킬 것이 있겠느냐? 너의 말이 틀렸다. 또, 나는 나의 의리를 행하고 본래 너의 일을 간섭하지 않았다. 너는 속히 전죄를 회개하고 다시 이렇게 난동을 부리지 말아라.” (후략)
- 이직현(李直鉉), 〈화양일기(華陽日記)〉,《시암집(是菴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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