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옛글 모음

퇴계(退溪)와 고봉(高峯),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1. 4. 7. 19:13

고전의 향기 - 백 예순 번째 이야기

퇴계(退溪)와 고봉(高峯), 논변을 마치며

2011. 4. 4. (월)

  논쟁은 한갓 논쟁을 위한 논쟁이 되는 데 그치고 마는 경우가 많다. 퇴계(退溪)ㆍ고봉(高峯)과 같은 탁월한 학자들 사이의 토론도 평행선을 달리는 논쟁이 오래 이어졌다. 그렇지만 이 두 학자는 지루한 논쟁을 번득이는 해학으로 멋지게 마무리하였고, 마침내는 서로의 견해를 일정 부분씩 수용하여 진일보한 결론을 도출하는 데 이르렀다.

 

  공이 호남(湖南)에 있으면 나는 영남(嶺南)에 있고 공이 서울에 있으면 나는 향리(鄕里)에 있었기 때문에 해가 바뀌고 오랜 시일이 지나도록 소식이 서로 격조했으며, 자중(子中)은 비록 내려왔지만 요즘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제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아간 이때 근황이 어떠한지요? 평소의 소양을 가지고 세무(世務)에 시험해 보면서 불안한 점은 없는지요?
  나는 여전히 궁벽한 시골에 살고 있으니 어리석은 자의 분수에 세상일을 물리치고 이렇게 궁벽하게 살아가는 것이 어리석은 나의 분수에 다소 다행스럽습니다. 다만 나이는 세월과 함께 달려가고 병은 늙음에 따라 심해지니, 지기(志氣)와 정력이 사그라져 감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지경에서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 학문에 힘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세상의 뛰어난 선비들은 물정에 어둡고 노경에 이르렀으면서도 뉘우칠 줄 모른다고 틀림없이 비웃을 것입니다.
  전일에 서찰을 왕복하던 논변이 내게 이르러서 그쳤으니, 아직 결말을 보지 못한 문제이고, 그중에 또한 나의 견해를 다 말하고 싶은 것도 한두 곳이 있었습니다. 중간에 다시 생각해 보건대 의리를 변석(辨析)하는 것은 진실로 지극히 정미하고 해박해야 하는데 돌아보면 그동안 논변한 것은 단서가 매우 많고 사설(辭說)이 매우 길어서, 나의 견해가 이루 다 망라하지 못하고 조예가 미치지 못한 곳들도 혹 있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왕왕 임시로 선유(先儒)들의 설을 찾아다가 나의 부족한 곳을 보충하여 공의 변론에 답하는 설로 삼았으니, 이는 과거 보는 선비가 과장(科場)에 들어가서 시제(試題)를 보고서 고사(故事)를 따다가 조목에 따라 대답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가사 이와 같이 하여 십분(十分) 타당하다 하더라도 기실 나 자신에게는 터럭만큼도 도움이 되는 게 없고 다만 쓸데없는 논쟁만 벌여 성문(聖門)의 큰 금기(禁忌)를 범하게 될 뿐입니다. 더구나 참으로 타당하다고 보장할 수도 없음에 있어서겠습니까.
  이로 말미암아 더 이상 마음을 내어 답장을 보내기를 지난날처럼 용감하게 하지 못하고, 다만 보내온 편지에서 두 사람이 나귀에 짐을 실은 것에 비유한 말씀을 가지고서 장난삼아 절구 한 수를 지어서 보냅니다.


  두 사람이 나귀에 짐을 싣고 경중을 다투는데  兩人駄物重輕爭
  헤아려 보니 높낮이가 이미 고르거늘  商度低昻亦已平
  다시 을 쪽의 짐을 갑 쪽에 죄다 넘기니  更剋乙邊歸盡甲
  어느 때에나 짐 형세가 균평하게 될거나  幾時駄勢得勻停

  

  그저 웃고 마시기 바랍니다.

 

[湖嶺京外, 隔歲綿時, 聞問相阻, 子中雖來, 時亦未見. 不審新去家食, 匪躬造端, 爲況如何? 平日所養, 試之應世, 能無臲卼否? 滉尙此屛僻, 愚分稍幸. 惟是年與時馳, 病隨老劇, 其於志氣精力, 銷落可知. 至此而始覺此事之不可不勉. 世有豪士, 必笑其迂晩而猶不知悔耳. 向者往復, 至滉而止, 惟是未結公案, 其間亦有一二欲畢其愚者. 中復思之, 辨析義理, 固當極其精博, 顧其所論, 條緖猥繁, 辭說汗漫, 或有鄙見包羅不周超詣未及處, 往往臨時搜採先儒之說, 以足己闕, 以爲報辨之說. 此與擧子入場見題, 獵故實以對逐條者何異? 假使如此, 得十分是當, 實於身, 已無一亳貼近, 只成閒爭競, 以犯聖門之大禁. 況未必眞能是當耶? 由是, 不復作意奉報如前之勇, 只因來誨兩人駄物之喩, 戲成一絶, 今以浼呈. 兩人駄物重輕爭, 商度低昂亦已平. 更剋乙邊歸盡甲, 幾時駄勢得勻停. 呵呵.]

 

- 이황(李滉),〈기명언에게 보냄[與奇明彦]〉, 《퇴계집(退溪集)》

 

▶ 고봉 선생의 위패를 모신 월봉서원(왼쪽)과 퇴계 선생의 초상(오른쪽)

[해설]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과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사이에 편지를 주고받으며 토론한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논변은 우리 사상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두 학자의 본격적인 논변은 대략 1559~1561년에 벌어졌고, 이 편지는 1562년 10월 16일에 보낸 것이다. 이때 퇴계는 62세였고 고봉은 36세였다.

  자중(子中)은 퇴계의 제자인 정유일(鄭惟一 1533∼1576)의 자이다. 그는 당시 조정에 벼슬하면서 퇴계와 고봉 사이에 소식을 전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 편지는 고봉이 보낸 편지에 대한 답서이다. 고봉은 한 필의 나귀에 짐을 싣고 두 사람이 양쪽에서 나귀를 몰고 가는 것으로 두 사람의 논변을 비유하였다. 즉 길을 가다 보면 나귀 등에 실은 짐이 한쪽으로 기울지 않을 수 없는데 짐이 기우는 쪽 사람이 상대편 쪽으로 짐을 들어 넘기면 상대편도 그렇게 하여, 서로 상대편 쪽으로 짐을 넘기기를 반복하므로 짐이 평정해질 수 없게 된다고 했다. 고봉의 이 비유를 퇴계는 시로 읊은 것이다.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대한 긴 논변을 이 자리에서 자세히 설명할 겨를은 없다. 간략히 정리하면, 퇴계는 사단과 칠정의 개념을 둘로 나누어 보았고, 고봉은 하나로 합하여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동양학에서는 체(體)와 용(用), 일(一)과 다(多), 전체성과 변별성, 어느 쪽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학문의 성격이 결정된다. 크게는 불교의 선(禪)과 교(敎), 유학의 주자학과 육왕학(陸王學) 내지 리학(理學)과 심학(心學)의 논쟁이 각각 이러한 개념들의 어느 한쪽에 섬으로써 벌어진다.

  사단과 칠정에 대한 논변에서 퇴계는 다(多), 고봉은 일(一) 쪽에 서 있었다고 볼 수 있지만, 양자는 모두 상대방의 선 자리를 아주 부정하지 않고 일정 부분 긍정하는 위에서 자기의 주장을 폈다. 퇴계는 일(一)만을 주장하면 사물의 변별성을 드러낼 수 없어 리(理)의 개념을 밝히는 성리학의 참된 의미가 없어진다고 우려하고, 고봉은 그렇다고 하여 다(多)만 강조하면 일(一)을 본체로 삼은 다(多)를 각개(各個)로 만들어 실상을 보지 못하게 된다고 반박한다. 이와 같이 양자가 서로의 치우침을 경계하는 과정을 통하여 각자의 착오를 깨닫고 마침내 중정(中正)한 결론에 이르렀다. 이러한 과정을 고봉과 퇴계는 나귀 등의 짐을 서로 떠넘기는 것으로 비유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퇴계가 고봉의 견해를 일정 부분 수용하여 만든 《성학십도(聖學十圖)》의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에 이르면, 사단과 칠정이 본래 하나의 정(情)이면서 발현하는 단서에서 개념을 달리하여 나뉘게 된다. 하나의 정임을 밝힌 것은 〈심통성정도〉의 중도(中圖)이고, 개념을 달리해 둘로 나눈 것은 〈심통성정도〉의 하도(下圖)이다. 여기에서 일(一)과 다(多)는 균형을 이루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서로를 융회(融會)할 수 있게 된다. 즉 각개의 다(多)는 전체성인 일(一)을 전제한 다(多)이므로 개체만 보고 전체를 망각하는 우(愚)를 범하지 않게 되며, 전체성인 일(一)은 각개의 다(多)를 포함한 일(一)이므로 사물의 다양한 개념을 무시한 채 공허한 관념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글쓴이 /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교무처장
* 주요저서
- 한주 이진상의 주리론 연구, 경인문화사(2007)
- 유학적 사유와 한국문화, 다운샘(2007) 등
* 주요역서
- 읍취헌유고, 월사집, 용재집,아계유고, 석주집 등

'놀라운 공부 > 옛글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득 나를 돌아보다  (0) 2011.05.05
차선(次善)에 머물지 말자  (0) 2011.04.07
기이한 난장이 안주부(安主簿)  (0) 2011.03.14
소(牛)의 떼죽음  (0) 2011.03.10
부부가 함께보면 좋은글   (0) 2011.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