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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寒岡) 정구(鄭逑)는 1579년 가을, 단풍과 국화가 어우러지기 시작하는 날에 손아래 벗들과 함께 가야산을 유람한다. 일행은 전망이 훌륭한 봉천대(奉天臺)에서 휴식을 취하였다. 쉬고 있던 중에 당시 28세였던 곽준(郭 1551∼1597)이 위의 말을 하자, 이 말을 계기로 한강 일행은 서로 격려하며 다시 제일봉에 오르게 된다. 한강은 상상봉(上上峰)에서 일망무제로 펼쳐진 사방을 둘러보고는 아까 봉천대에서 본 경관은 말할 것도 못된다는, 다소 상징적이고 교훈적인 감회를 그의 유산록(遊山錄)에 서술해 놓았다.
‘려(慮) 자 지위’에 대해서는 조금 설명이 필요하다. 이 말은 《대학(大學)》의 경(經) 1장에, ‘정밀히 생각한 뒤에야 사리판단이 최선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慮而后能得]’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대학의 학습 목표에 3강령이라는 것이 있다. 명명덕(明明德), 신민(新民), 지어지선(止於至善)이 그것이다. 지어지선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마음공부가 필요하다. 그 과정은 여섯 단계로 되어 있다. 목표를 아는 지지(知止), 마음의 방향을 정하는 정(定), 마음의 동요가 없는 정(靜), 마음이 편안한 상태인 안(安), 일에 대처하는 것이 정밀하고 자상한 려(慮), 그리고 이 단계 위에 늘 지선의 상태에 도달하는 득(得)이 있다.
‘려(慮) 자 지위’는 앞의 4 단계보다는 높고 득(得)의 단계보다는 낮아 딱 봉천대와 같은 위치인 것이다. 요컨대 산 정상까지 올라가보자는 의사를 전달하면서도 차선에 만족하지 말자는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말이라 하겠다. 옛 성현은 이를 ‘태산을 흙 한 삼태기가 없어 이루지 못한다.[爲山九仞, 功虧一簣]’ 라는 말로 그 아쉬움을 표현하면서 자만하지 말고 계속 부지런히 노력할 것을 권유하기도 하였다.
곽준이라는 분은 홍의장군 곽재우의 종숙부이기도 하다. 곽 공은 정유재란 때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두 아들과 함께 순국하였다. 시호가 충렬(忠烈)이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는 공의 신도비에 ‘살신(殺身)하고도 성인(成仁)하였다’는 말로 높이 추앙하였다. 그러고 보면 공은 정말로 ‘려 자 지위’에 머문 사람이 아닌 것으로 인정받은 셈이니, 지난날에 한 말도 우연은 아닌가 보다. 이 분의 자가 양정(養靜)인 것도 참 공교롭다.
한강의 〈유가야산록〉은 남명 조식의 〈유두류록(遊頭流錄)〉을 계승하고 있는 작품으로 후대에 그 여운을 많이 드리웠다. 이 작품은 주세붕의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에서 발원한 일련의 청량산 유람기와도 통하는 면이 많다. 산에서 책을 읽고 시를 암송하는 등 유산을 도학 강마의 연장선으로 본 것이 특히 그렇다. ‘려(慮) 자 지위에 머물지 말자’고 한 말은 일상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수양 공부를 하고자 했던 선비들, 그런 선비들의 생기가 세상에 충만했던 목릉성세(穆陵盛世)의 분위기를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거니와, 오늘날 우리에게 2% 부족한 무엇이기도 하여 소개해 보았다.
필자는 몇 해 전 가야산 정상에 올라 불기둥처럼 솟은 바위와 초봄의 신록을 바라보며 이 말을 농담 삼아 크게 웃은 기억이 새로운데, 이제 그때 받은 감흥이며 고인의 깊은 속뜻을 필력이 졸렬하여 다 표현할 도리가 없다. 부득이 웅혼하고 장쾌한 당시(唐詩) 한 수를 들어 필자의 눌언을 대신하고자 한다.
登鸛鵲樓 관작루에 올라 - 왕지환(王之渙)
白日依山盡 태양은 서산에 걸리었고 黃河入海流 황하는 바다로 흘러가네. 欲窮千里目 천리 멀리 더 한껏 보고자 更上一層樓 다시 누각 한 층 더 올라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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