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은 제일 먼저 하늘에 제사 지내던 민족 | ||||||||||||||||||||||
천제(天祭)는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뤄지게 해달라는 기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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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우리민족은 천손(天孫) 즉, 하늘의 자손으로 불렸다. 하늘을 향한 간절한 바람과 그리움이 어찌나 컸으면 한 나라의 국가(國歌)에도 ‘하느님(하나님)이 보우하사’라는 말이 나오겠는가. 또한 한민족의 시조로 받드는 고조선의 첫 임금인 단군왕검은 천제(天帝)인 환인의 손자이며, 환웅의 아들로 나타난다. 동방예의지국 즉, 군자국(君子國)으로도 불리는 대한민국. 하늘의 큰 복을 받은 민족이기에 예로부터 외세의 숱한 침략과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백의민족. 외세의 압력과 계략으로 우리민족의 역사를 왜곡했던 그 설움을 극복하는 길은 우리민족의 역사를 다시 바로잡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첫 번째 걸음으로 ‘원구단(圓丘壇)’에 대한 의미를 되짚어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원구단(圓丘壇)이란 이 명칭은 지신(地神)에 제사 드리는 사직단(社稷壇)이 음양론(陰陽論)에 따라 방형으로 쌓는 것과는 달리, 원이상천(圓以象天)이란 관념에 따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단을 둥글게 쌓은 것과 관계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풍습은 농경문화의 형성과 더불어 시작됐으며, 삼국시대부터는 국가적인 제천의례(祭天儀禮)로 시행됐다. 하늘의 자손인 우리민족이 오랜 상고시대부터 매년 10월 상순에 국중대회를 열어 둥근 단을 쌓고, 단군께서 친히 하늘에 제사를 올려 국태민안을 기원해 왔는데, 이 제천단이 바로 ‘원구단’이다. 그리고 이 ‘원구단’ 천제는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등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삼국사기’에 인용된 ‘고기(古記)’에 의하면 ‘고구려·백제가 다 같이 하늘과 산천에 제사지내다’ ‘단(壇)을 설치하고 천지에 제사지낸다’라는 내용으로 미루어, 이때부터 이미 제천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성종 2년(983년) 정월조에 나타난 ‘왕이 원구(圓丘)에서 기곡제(祈穀祭)를 올리고, 몸소 적전(籍田)을 경작하였다’는 고려의 원구제는 5방의 방위천신(方位天神)과 전체 위에 군림한다는 황천상제(皇天上帝)에게 제사를 드렸다.
원구단의 수난 조선 초 제천의례는 제후국으로서는 행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명분론과, 이와 달리 농업국가로서 전통적 기우제(祈雨祭)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의견이 갈려 설치와 폐지를 거듭하게 됐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태조 3년(1394년)에 제후국의 예에 준하여 조선의 동방신인 청제(靑帝)에 제를 올리기 위한 원단이 설치되었고, 세종 원년(1419년)에 실시된 원구제(園丘祭)도 오랫동안 계속되던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시행했다. 조선 초부터 억제된 제천의례는 세조 2년(1456년) 일시적으로 제도화되어, ‘상정고금례(詳定古今禮)’에 실려 있는 고려의 원구단(圓丘壇)을 참작하여 1457년 원구단을 신설하여 제를 드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원구제도 세조 10년(1464년)에 실시된 것을 마지막으로 중단됐다. 원구단이 다시 설치된 것은 고종 34년(1897년) 조선이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여 제천의식을 봉행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이다. 이 해에 의정(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천신(天神)에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상소에 의해, 규모와 체제는 역대의 예전(禮典)을 기초로 해 영선사(營繕使) 이근명(李根命) 등을 시켜 길지인 남교(南郊) 회현방 바로 지금의 소공동으로 건립지를 선정한 후 단(壇)을 건립했다. 광무(光武) 원년(1897년) 10월 고종 황제의 즉위를 앞두고 남별궁(南別宮) 터에 원구단을 쌓았고, 10월11일 고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원구단에 나아가 천신에 고제(告祭)한 후 황제에 즉위했다. 이때에 건립된 원구단의 체제를 보면 황천상제위(皇天上帝位)는 단의 제1층 북쪽 동편에서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황지지위(皇地祗位)는 단의 제1층 북쪽 서편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있고, 대명천(大明天)과 야명성위(夜明星位)는 각각 제2층의 동·서쪽에 있으며, 제3층 동쪽에는 북두칠성(北斗七星)·오성(五星)·이십팔수(二十八宿)·오악(五岳)·사해(四海)·명산(名山)·성황(城隍)의 자리를 두고, 서쪽에는 운사(雲師)·우사(雨師)·풍백(風伯)·뇌사(雷師)·오진(五鎭)·사독(四瀆)·대천(大川)·사토(司土)의 자리를 두었다. 1911년 2월부터 원구단의 건물과 터는 조선총독부가 관리하였는데, 만행을 부려 1913년 원구단을 헐고 그 자리에 건평 580여평의 철도호텔(현재의 조선호텔)을 지었다. 현재 이곳에는 황궁우(皇穹宇)와 돌로 만든 북인 석고(石鼓) 3개가 남아있다. 팔각당 건물은 광무 3년(1899년)에 축조된 것으로 화강암 기단 위에 세워진 3층의 팔각 건물이며, 이곳 중앙에는 태조 이성계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고, 익공계 건물로 청의 영향을 많이 받아 복잡한 장식이 있다. 또한 석고는 제천(祭天)을 위한 악기를 상징하는 모습으로 몸체에는 화려하게 조각된 용(龍) 무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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