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는 하정 이덕주가 듣고서 맛깔스럽게 여겼던 속담을 적은 것이다. 상황은 이러하다. 어떤 사람이 나물이 먹고 싶어서 아내에게 들에 나가 나물을 캐어 오기를 바라자 아내가 나물이 없다며 거절하였다. 부부는 나물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는 둥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는 둥 실랑이를 벌였다. 곁에 있던 사람이 보다 못해 한 마디 거들었다: “지아비 눈에는 나물이 많이 보이고 지어미 눈에는 땔감이 많이 보이는 법일세.”
어떤 일을 여러 사람과 함께 논의하다 보면 각자의 의견이 달라 쉽게 결론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각자의 의견이 다른 것은 방법론이나 지향점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논의를 계속하다 보면 당혹스럽게도, 애당초 대상에 대한 인식부터 다른 데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될 때가 더러 있다. 어떤 문제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측은 그대로 두자고 주장하고 큰 문제라고 생각하는 측은 반드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대상을 놓고 논의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른 대상을 두고 논의하는 셈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논의를 진행하더라도 언성만 높아질 뿐 서로 동의할 만한 결론에 순조롭게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의 인식은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각자의 욕망에 따라 대상의 일면을 취사하여 인식한다. 어진 자가 보면 어질다고 하고 지혜로운 자가 보면 지혜롭다고 한다. 문제는 대상의 일면을 대상의 전부, 또는 대상의 진실로 고정하고 타인의 인식과 소통하지 않는 데에서 발생한다. 그런데 바로 여기 남편의 눈과 아내의 눈에 대한 속담이 소통의 열쇠가 될 수 있다. 욕망에 영향을 받는 우리의 기만적인 인식 습관을 탓할 필요 없이 그저 이러한 인식 습관의 배면에 각자의 욕망이 오롯이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서로 다른 욕망을 확인하고 인정하는 순간 대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자기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인식으로 나아간다. 들에 나물이 많을 뿐만 아니라 땔감도 많은 들이 되는 것이다. 대상을 인식하는 폭이 확대된다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과 대응의 가능성이 그만큼 확대됨을 의미한다. 우리의 욕망과 인식은 이런 과정을 통해 새롭게 수정되고 성장한다. 위의 속담에는 이런 성장을 가능케 하는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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