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빠름, 빠름”을 수도 없이 외치며 살아가고 있다. 국가 정책이건, 제품 광고건, 학습 방법이건 빠름만이 경쟁력을 지니 미덕인 양 소리 높여 말하고 있다. 원래의 성격이 그런 것인지 시대에 내몰려 어쩔 수 없이 밀려가고 있는 것인지, 언제부턴가 우리는 모든 일에 빠름을 최우선시하고 있는 듯하다.
전통문화의 단절을 초래했던 일제강점기의 내상이 치유되기 전에 한국전쟁이라는 지울 수 없는 외상을 입은 우리나라는, 몸과 마음이 모두 만신창이가 된 상황에서 ‘국가재건’이라는 부정하기 힘든 거국적 목표 아래 주위는 전혀 돌아보지 않고 오직 전진만을 강조하게 되었다. ‘하면 된다’는 각오와 ‘중단없는 전진’을 요구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사람들은 “바쁘다 바빠”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내 갈 길만 바빠 옆은 돌아보지를 않았다. 어쩌면 힐끗힐끗 보이는 옆 사람들의 모습과 주위의 상황들을 애써 외면했는지도 모른다. 자신만 앞서 가기 위해 주위의 사람들과 사물들을 짓밟고 있는 사람을 말리지도 않았고, 넘어져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던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지도 않았다. 주위를 돌아보다 보면 내 갈 길이 더뎌진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는 살아오면서 ‘느림’과 ‘멈춤’을 배우지 못한 것 같다. 언제나 빨리 하면 칭찬을 받았으며, 항상 남과 비교하고 남과 비교당하는 환경 속에서 자라왔다. 차를 운전하다가 누군가가 나를 추월하면 괜히 기분이 나빠지면서 더욱 속도를 내어 기어이 다시 앞서려고 하고, 빨리 걷는 것에 길들여져 느리게 걸으려 하면 자꾸 걸음이 꼬이기도 한다. 앞 차가 무슨 일로 잠시 정차하여 내 차를 멈추게 하면 여지없이 경적을 울려 갈 길을 재촉하고, 밥상에서 먼저 식사를 마친 경우 남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기도 한다.
그리고 세상도 빨리 변화하고 있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시점부터의 모든 변화보다 최근 100여 년의 변화가 더욱 가파르다고 어느 학자는 말하기도 하였다. 디지털의 지배를 받는 세상 속에서 어제 생산된 제품은 오늘 벌써 구식이 되어 있다. 아이들의 언어는 변화하여 어른들과 소통이 되지 않고, 앞서 가는 사람들이 보는 세상과 뒤에 가는 사람들이 보는 세상은 차원을 달리하여 연결선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의 속도 차이 때문에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갈등의 단계를 지나 소통 불가의 벽이 서로를 가로막고 있다.
이제는 사람들도 지쳐버린 듯하다. 그래서인지 얼마 전부터 ‘힐링’이라는 말이 세상의 화두가 되어버렸다. 방송에서도 출판계에서도.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강조한 책이 얼마 전부터 출판계를 장악하고 있다고 한다. 사람들도 이제는 아는 듯하다. 자신이 멈추지 않고 있으므로 힘들다는 것을. 빨리 스쳐 지나갈 때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걸음을 늦춘다거나 멈추고서 돌아볼 때 비로소 보이게 된다. 우리는 ‘빠름’을 외치면서 무엇을 보지 못하고 있는 걸까? 빠른 속도 때문에 정작 소중한 것은 보지 못한 채 지나치고 있지는 않은가?
위 시의 소를 타고 가는 저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느림과 여유를 느낄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오랜 옛날의 모습이겠지만 ‘느림’이라는 느낌 속에 석양 녘 방초길이 멀리 있어 보이지 않고, 오히려 천천히 눈앞으로 다가오는 듯하다. 소를 타고 가는 여유로움을 안겨주는 또 한 편의 노래가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정철(鄭澈)의 시조이다.
재 너머 성권농 집에 술 익단 말 어제 듣고 누운 소 발로 박차 언치 놓아 지즐타고 아이야 네 권농 계시냐 정좌수 왔다 하여라
현대인의 일상이라는 것이 아마 여유만으로는 살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정 소중한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가끔은 일부러라도 속도를 늦추거나 걸음을 멈추고서 주위를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빨리 가면 먼저 도달할 수는 있지만 결코 함께 갈 수는 없다고들 말한다. 지금은 소를 타고 친구를 찾아갈 수는 없겠지만, 잠시 일상을 멈추고서 옛 친구를 찾아 오랜 추억 속에서 천천히 술잔을 기울여보면 어떨까 싶다. “느림 느림”을 되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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