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옛글 모음

비난을 하더라도 지킬 것은 지켜야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3. 4. 22. 09:36

- 이백예순일곱 번째 이야기
2013년 4월 22일 (월)
비난을 하더라도 지킬 것은 지켜야
  만물의 진가는 일반적인 환경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법이다.

  여름에는 모든 나무가 푸른 잎을 자랑하기에 그들 사이의 우열을 비교하기는 쉽지 않다. 혹독한 겨울이 되어야 소나무나 잣나무, 대나무가 시들지 않고 생기를 발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평소에는 다들 더할 수 없이 혼후한 무골호인(無骨好人)이다. 그러나 일단 이념적으로 대립하거나 이욕에 눈이 멀게 되면 품격이 낮은 사람은 절로 추한 본색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편지의 뜻은 잘 알겠다. 그러나 나를 처벌하라고 임금께 청했던 사람들도, 그 의도를 추정해보면, 반드시 화를 일으키기를 즐기는 마음에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또 그들은 일찍이 이 아비의 벗들이었다. 교분이야 끊었지만 일말의 공경심은 여전히 남아 있다. 고인들이 절교한 뒤에도 상대에 대해 험담을 하지 않았던 것은 참으로 이런 경우의 의리였던 것이니, 어찌 꼭 그 이름을 마구 불러댄 뒤라야 족하겠느냐? 비단 글에서뿐만 아니라 평소의 말에서도 크게 조심해야 할 것이니라. 모 판서(某判書), 모 참의(某參議)라고 부르는 것이 의리상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
  하상(荷相)에 대해서는 내가 젊었을 때부터 지나칠 정도로 논박하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너는 언제고 내가 그 이름자를 부르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또한, 그 노성(老成)한 식견이 어찌 너희 형제들만 못하겠느냐?

書意見悉. 然參啓諸人, 究其心則未必出於樂禍. 且曾是父之友也. 交可絶也, 餘敬則故在. 古之人不出惡聲, 正是此等處義也. 何須斥呼其姓名然後可也. 非但書辭, 雖尋常言語間, 亦猛戒也. 曰某判書某參議, 於義庸何妨乎? 吾於荷相, 少日未嘗不已甚, 而汝曾聞吾呼其名字乎? 老成之見, 豈不及汝兄弟也?


- 조영순(趙榮順, 1725∼1775), 「기정아(寄貞兒)」,『퇴헌집(退軒集)』권7

  이 글은 조영순이 북쪽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가 유배를 당한 것은 전해에 영조(英祖)가 소론(少論)의 영수였던 최석항(崔錫恒) 등의 관작(官爵)을 회복시킨 일과 관련이 있었다. 그는 이른바 ‘노론사대신(老論四大臣)’ 중의 1인이었던 좌의정 조태채(趙泰采)의 손자였다. 의리상 돌아가신 조부에게 죄송스런 마음에 벼슬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상소를 올렸는데, 당파 때문에 그 조처에 반발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영조가 격노하여 유배를 명했던 것이다.

  그 후 그의 처벌에 대한 사헌부, 사간원 양사(兩司)의 논의는 한동안 잠잠해지는 듯했는데, 이때쯤 그 수장들이 다시 이 문제를 발의하였다.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이런 처사를 못마땅하게 여긴 그의 아들이 이 논의에 찬동한 조정의 관원들에 대해 불평을 해 댔던 모양이다. 요즘에 흔히 보는 것처럼 이름을 마구 불러대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달랐다. 속한 당파가 다르고 지향하는 바가 다르긴 해도, 단순히 자신을 해치려고 소인배들처럼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들 중에는 한 때 자신이 벗으로 존경했던 이들도 있고 높은 식견을 지닌 고관도 있었다. 자신이 다른 사람을 공격할 때도 사사로운 의도가 아니었던 것처럼, 상대도 그럴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렇기에 그는 아들을 타일렀다. 아무리 그들이 원망스럽다고 해도, 그들도 인격과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니, 이름을 함부로 불러대는 무례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말미에서 그들의 식견이 너만 못하겠느냐고 한 것은 준엄한 질책이었다.

  이런 예는 주자(朱子)라고 불리는 송(宋)나라의 대학자 주희(朱熹)의 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진회(秦檜)를 거론할 때면 꼬박꼬박 ‘진 노인[秦老]’ 또는 ‘진 정승[秦相]’이라고 부르거나, 그 집 이름인 일덕(一德)을 따서 ‘일덕 정승’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진회는 중국 역사상 가장 심한 소인배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19년 동안 조정의 권력을 독점하면서, 여러 차례 옥사(獄事)를 일으켜 충성스런 선비들과 훌륭한 장수들의 씨를 말렸다고 한다. 그런 진회를 누구보다도 미워했던 주자였지만, 정승에게 갖추어야 하는 예의까지 소홀히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편지 중의 ‘절교한 뒤에도 상대에 대해 험담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연(燕)나라의 명장(名將)인 악의(樂毅)의 말이다. 악의는 제(齊)나라를 공격하여 무려 70여 개의 성을 빼앗는 큰 공을 세웠으나, 임금에게 의심을 받게 되자 이웃 조(趙)나라로 망명하였다. 그 후 그의 보복 침략이 두려워 마지못해 사과한 옛 임금에게 악의는 충심 어린 말로 안심을 시켰다.

  “군자는 절교를 하더라도 상대에 대해 험담을 하지 않으며, 충신은 나라를 떠나더라도 자신의 명예만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君子交絶 不出惡聲 忠臣去國 不潔其名]”

  자식이 잘못을 해도 무조건 두둔만 하는 부모,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방팔방 돌아다니면서 악담을 해대는 부하들이 만연한 세상이다. 정치적으로 소속이 다르면 아무리 훌륭한 인물이나 견해라도 매도부터 한다. 자기가 권력을 잡았을 때는 해내지 못했으면서 남이 권력을 잡으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처럼 요구한다. 같은 일이라도 내가 하면 정당하고 남이 하면 부당하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진흙탕 속에서 싸우게 되면, 결국 자신도 진흙물을 뒤집어쓰게 마련이다. 비난을 하더라도 존중할 것은 존중하고, 인정할 것은 인정해주는 선인들의 금도와 품격이 아쉽다.

  조영순이 임종(臨終) 때 아들에게 불러준 자찬 묘지명(墓誌銘)은 편지의 감동을 더하게 만든다.

  “태평한 시대에 나서 태평한 시대에 죽으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이런 경우를 순리(順理)라고 하는 것이리라. 오직 깊이 충성하였고 원대한 뜻을 품었었으니, 아아, 백 년, 천 년이 지나더라도 알아줄 이는 하늘이리라.[生於太平, 死於太平. 夫誰之憾, 是謂順寧. 惟忠之深, 惟志之長. 噫千百世, 知者其蒼.]”

  이 얼마나 당당한 삶을 산 것인가?


  

  
권경열 글쓴이 : 권경열
  •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사업본부장
  • 주요역서
      - 국역 갈암집공역, 민족문화추진회. 1999
      - 국역 오음유고, 민족문화추진회, 2007
      - 국역 국조상례보편공역, 국립문화재연구소, 2008
      - 국역 매천집 3, 한국고전번역원, 2010
      - 국역 가례향의, 국립중앙도서관, 2011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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