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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 기를 죽이자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3. 4. 29. 23:25
- 이백예순여덟 번째 이야기
2013년 4월 29일 (월)
우리 아이 기를 죽이자
  식당이나 공공장소에서 어린아이들이 마구 뛰어다니고 소란을 피워도 제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설령 수선을 피우는 아이들을 타이르려고 해도 아이의 엄마가 남의 아이 기를 죽인다고 적반하장으로 나서는 통에 함부로 타이를 수도 없다고 한다. 이런 아이의 엄마는 자기 아이의 기를 살린답시고 망나니를 길러 내고 있는 셈이다. 유년의 교육에 부모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만큼 부모가 아이를 대하는 태도나 모습을 보면 아이의 앞날이 예견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학교 교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문제아 뒤에는 문제 부모가 있다거나 아이를 보면 아이의 부모가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역시 아이는 부모의 말을 듣고 자라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라는 법이다. 망나니 아이의 뒤에는 망나니 부모가 있는 것이다. 아이를 주체적인 건전한 민주시민으로 길러 내려면 아이를 편들거나 두남두지 말고 모름지기 아이의 기를 죽여야 할 일이다.

  7월. 이에 앞서 사헌부 소속 구실아치가 길에서 신분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궁노(宮奴)를 만나 잡아서 사헌부로 끌어가려고 하였다. 궁노가 사헌부 구실아치를 때렸다. 사헌부 구실아치가 사헌부에 고소하였다. 사헌부에서 사람을 보내 잡아오게 하였더니 궁노가 왕자의 우사(寓舍)에 뛰어들어가서는 나오지 않았다. 사헌부 사람이 문 앞에 가서 불러냈으나 끝내 나오지 않았다. 다음 날, 사헌부에서 다른 구실아치를 정하여 기필코 잡으려고 하였다. 궁중의 수노(首奴)가 그 궁노를 붙잡아서 사헌부 구실아치에게 넘겼다. 이때 김귀인도 왕자 우사에 있었는데 문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자 그 까닭을 물었다. 하인은 사헌부 구실아치가 궁노를 잡아가느라 나는 소리라고 보고하였다. 김귀인이 이에 임금에게 아뢰었다. “사헌부 구실아치가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을 금한다는 구실로 왕자의 우사에서 소란을 피웠습니다.” 상이 크게 노하여 지평 김찬에게 연유를 물었다. 김찬이 대답하였다. “사헌부 구실아치가 왕자의 우사에 간 것이 아니라 다만 수노의 처소에서 궁노를 잡아간 것일 뿐입니다.” 상이 사헌부에서 사사로이 구실아치를 비호한다고 의심하고 더욱 노하였다. 이에 사헌부 구실아치를 의금부에 가두라고 친필 전지를 내렸다. 그러고 또 말하였다. “사헌부에서 구실아치를 보내 왕자의 우사에서 사람을 잡아가서는 안 된다.” 사헌부에서는 이 일로 피혐(避嫌)하였다. 사간원에서 청을 올려 출사를 시킨 뒤에도 사헌부에서는 사직하고 나오지 않고서 “전하께서 신들을 믿지 않으시고 구실아치를 의금부에 가두고 심문하게 하셨습니다. 신들은 임금께 믿음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뻔뻔스럽게 직무에 나아가겠습니까?” 하고 아뢰었다. 이에 사간원에서도 사헌부와 합동으로 합문에 엎드려서 사헌부 구실아치를 사헌부로 돌려보내라고 청하였다. 홍문관에서도 차자를 올려서 언관이 간하는 말을 따르라고 청하였다. 상이 매우 노하여 따르지 않았다. 사헌부에서 사직을 한 지 여러 날이 되었다. 부제학 이이가 상을 당하여 집에 있다가 출사한 뒤 홀로 뵙고 아뢰었다. “이 일은 위아래가 서로 실수한 일입니다. 사헌부 구실아치의 일은 대관이 눈으로 본 것이 아니니 어찌 왕자 우사에서 직접 궁노를 잡아간 줄 알면서도 우사에 간 적이 없다고 고집하여 말했겠습니까? 이는 사헌부의 실수입니다. 전하께서도 직접 눈으로 보신 일이 아니고 다만 부시(여자와 환관)의 말만 들으셨습니다. 부시의 말은 다 믿을 수는 없습니다. 전하께서 법을 집행하는 관리를 대하심이 어찌 부시보다 못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전하의 실수입니다. 또한, 왕자 우사의 하인은 평소 오만방자하다는 평판이 있었으니 엄격하게 검속하고 다그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 왕자의 아보(유모)는 마땅히 순수하고 근실하며 인자하고 선량한 사람을 택해야 합니다. 후씨는 일개 부인이었지만 오히려 자식 교육의 방법을 알아서 늘 ‘굽히지 못할까 근심하고 펴지 못할까 근심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아드님이 계시는데 어찌 펴지 못할까 근심하십니까? 청컨대 의지를 돌리셔서 쾌히 공론을 따르소서.” 이이는 실상은 김귀인이 아뢴 말임을 알지 못하고서 부시라고 꼬집어 말하였던 것이다. 상이 크게 노하여 말했다. “너는 어찌 경솔하고 방자하게 말이 많아 이런 말을 하기까지 하느냐? 이 또한 내가 덕이 모자라고 어리석은 까닭이다. 하인의 일은 늘 인심이 경박하고 완악해서 네 말과 같은 일이 있을까 걱정하여 날마다 새삼 검속하고 다그친다. 네가 어찌 상세히 알 수 있겠느냐?” 이에 이이가 물러 나와 동료와 함께 차자를 올려서 간하였다.

七月. 先是, 司憲府吏路遇宮奴僭服, 將執詣憲府. 宮奴擊憲吏. 憲吏訴于憲府. 憲府使人捉來, 則宮奴跳入王子寓舍不出. 憲府人踵門呼出, 終不出. 明日, 憲府別定他吏, 期於必捉. 宮中首奴, 捉其奴付憲吏. 時, 金貴人亦在王子寓舍, 聞門外喧聲, 問其故. 下人以憲吏捉宮奴告. 貴人乃啓曰, 憲吏託以禁亂, 作亂于王子寓舍. 上大怒, 問其由於持平金鑽. 鑽對曰, 下吏不到王子寓舍, 只捉宮奴于首奴處而已. 上疑憲府私庇下吏, 愈怒. 乃下憲吏于義禁府, 御書傳旨而下. 且曰, 憲府不當發吏捉人于王子寓舍也. 憲府以此避嫌. 諫院啓請出仕之後, 憲府辭職不就曰, 殿下不信臣等, 移鞫下吏于禁府. 臣等不見信於君上, 何以靦然就職乎. 於是諫院合司伏閤, 請還憲吏于憲府. 玉堂亦上箚, 請從言官之諫. 上怒甚不從. 憲府辭職者累日. 副提學李珥遭服在家, 出仕後乃獨啓曰, 此事上下胥失之矣. 憲吏之事, 非臺官所目睹也. 安知直捉宮奴于王子寓舍, 而執言不往耶. 此則憲府之失也. 殿下亦非目睹, 只聽婦寺之言. 婦寺之言, 不可盡信. 殿下待執法之官, 豈可出於婦寺之下乎. 此則殿下之失也. 且王子寓舍下人, 素稱縱恣, 不可不嚴加檢飭. 而王子阿保, 當擇醇謹慈良之人. 且侯氏一婦人也, 尙知敎子之方. 常曰, 患其不能屈, 不患其不能伸. 今殿下有子, 何患其不能伸乎. 請回聖意, 快從公論. 珥實不知金貴人啓達, 故斥言婦寺. 上大怒答曰, 爾何輕肆多言, 一至此極乎. 此亦予寡昧之所致. 下人之事, 常恐人心薄惡, 有如爾說, 故日新檢飭. 爾豈能詳知乎. 珥乃退而與同僚上箚爭之.
 
- 이이(李珥, 1536~1584),「경연일기(經筵日記)」,『율곡전서(栗谷全書)』권29

 

▶ 중국문화사의 위인인 북송의 철학자 정호와 정이 형제의 초상화이다. 왼쪽은 정호, 오른쪽은 정이인데 정호는 봄바람 같은 기상, 정이는 가을 서리 같은 기상을 갖고 있었다 한다.

 

  이이의 「경연일기」에 수록된 기사의 한 토막이다. 우연히 일어난 사건 하나로 궁중이 떠들썩하고 관료와 국왕 사이에 자존심 경쟁으로까지 비화한 이야기이다. 이 사건에서 변수가 된 것은 김귀인의 개입이었다. 왕자 우사의 궁노가 왕자의 권위를 믿고서 한마디로 주제넘은 짓거리를 했다. 이 일을 목격한 사헌부 구실아치가 자기 업무의 고유한 권한으로 궁노를 제재하려고 하였다. 궁노가 왕자의 우사로 피신하자 궁노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왕자의 우사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는데 이 일로 김귀인은 왕자의 권위에 손상을 입었다고 느끼고는 생모의 자격으로 개입하고 나섬으로써 국왕과 관료 사이에서 갈등이 심화한 것이다. 이이는 왕자의 우사에서 소란을 피웠다고 왕에게 일러바친 사람은 왕자의 유모라고 섣불리 판단하고서 양비론을 내세워 중재하려고 하였지만 도리어 역효과를 내고 말았다. 이이가 보기에는 왕의 개입이 왕자를 과잉보호하는 일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왕자의 유모가 갖춰야 할 자질을 운운하고 후씨의 자식교육에 관한 금언을 들먹여 충고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이가 소개한 후씨는 북송의 유학자 정호와 정이 형제의 어머니이다. 정호의 호는 명도, 정이의 호는 이천이어서 정명도, 정이천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정호와 정이는 한 살 차이였지만 두 형제는 개성이 아주 달랐다. 정호는 봄바람 같은 이미지를 지녔고 정이는 가을 서리 같은 이미지를 지녔다고 일컬어진다. 학문 성향에서도 대조되어서 정호는 심학(心學), 정이는 이학(理學)의 비조가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두 형제는 북송의 유학을 체계화하여 주희가 송대 신유학을 집대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주희가 집대성한 신유학을 정주학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정이-주희 계열의 학문이라는 뜻이다. ‘우리 아이가 굽히지 못할까 근심하고 펴지 못할까 근심하지 않는다.’는 어머니 후씨의 교훈은 지금도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마음에 새겨야 할 금과옥조이다. 두 형제가 나란히 중국 문화사에 영원히 빛나는 이름을 올리게끔 한 어머니의 교훈답다.

  아이들은 봄에 새로 싹트는 풀이며 새로 돋는 나뭇가지다. 밟히고 꺾여도 금방 새로 싹이 돋고 새 가지가 난다. 이와 같은 어린아이의 기운을 소양(少陽)의 기운이라 한다. 나이 든 사람은 팔다리가 부러지면 아물어 붙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고 고생을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제대로 맞춰서 부목만 대어주면 며칠이 못 가서 금방 아물어 붙는다. 파릇파릇한 소양의 기운이 뻗치기 때문이다. 소양의 기운은 쑥쑥 자라나고 사방팔방으로 뻗어나는 기운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절대로 그냥 걷지 않는다. 세 걸음만 넘으면 막무가내로 내달리고, 걷더라도 그냥 걷지 않고 팔딱팔딱 뛰고 껑충껑충 걷는다. 그냥 힘이 뻗쳐서 주체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기를 살리려고 하지 않아도 기가 파들파들하게 살아서 펄펄 뛴다. 후씨의 말처럼 굽혀야 할 때 굽히지 못할까 봐 걱정이지 펴지 못할까 봐 걱정할 것은 없다. 어린아이의 기는 살려야 할 것이 아니라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살아 있는 것은 자기 삶을 더 확장하려고 하기 때문에 더 많은 힘을 가지려 한다. 힘은 삶의 밑바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힘을 올바르게 쓰지 않으면 폭력이 된다. 폭력이란 힘을 올바르게 쓰지 않고 함부로 쓰는 일이다. 반드시 물리적 힘을 써서 남을 해쳐야만 폭력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의 자라나는 기운은 맹목적 삶의 힘이다. 어린아이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저 살아 있음을 한껏 발산할 뿐이다. 그러니 아이의 기를 살린다 함은 아이의 맹목적인 힘만 살린다는 말이다. 맹목적인 힘만 살리다가는 결국 폭력을 조장하게 된다.

  애초에 아이들은 기가 죽는 일이 없다. 잠시 풀이 죽은 것 같아도 조금만 지나면 금방 기가 살아서 펄펄 뛴다. 소란을 피운다고 야단맞고 눈물을 찔끔거리다가도 언제 야단을 맞아 울었나 싶게 금세 해해거리며 장난을 치고 개구쟁이 짓을 하는 것이 어린아이이다. 야단을 맞아도 금세 잊어버리고, 울다가도 금세 해해거리고, 얌전하게 있으라고 주의를 받아도 금세 장난을 치고 하는 것이 오히려 아이답다. 이런 아이들이 자라남에 따라 점차 바깥으로 뻗기만 하는 기운을 거둬들이고 기운을 바르게 사용하도록 훈련을 받고서 주체적인 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기는 선으로도, 악으로도 될 수 있는 그저 단순한 힘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성의 통제가 필요하다. 이성의 인도를 받지 않는 맹목적인 힘은 위험하다.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준마도 굴레를 씌우고 고삐를 잡아 이끌지 않으면 어디로 달아날지 알 수 없다. 교육이란 바로 이런 기의 맹목적 힘을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제재하고 순치하는 일이다. 아이를 기르는 일은 이성으로 기를 성찰하는 능력을 키우는 일이다. 유아기 때는 아이를 맹목적 기의 아이로 키워놓고 나중에 사회성이 중요한 시기에 가서 뒤늦게 반듯한 아이, 모범적인 아이, 올바른 아이가 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남쪽으로 간다고 하면서 북쪽으로 향하는 것과 같다.


  

  
김태완 글쓴이 : 김태완
  • (사)지혜학교 철학교육연구소 소장
  • 주요저서
    -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소나무, 2004
    - 『중국철학우화393』 소나무, 2007
    - 『율곡문답, 조선 최고 지식인의 17가지 질문』, 역사비평사, 2008
    - 『경연, 왕의 공부』, 역사비평사, 2011
    - 『맹자, 살기 좋은 세상을 향한 꿈』, 아이세움, 2012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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