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종, 중종 연간의 학자ㆍ관료인 사재(思齋) 김정국의 문집 속에는, 자신이 관직을 역임하면서 보고 들은 일화(逸話)와 당시 인물들의 야담(野談) 등을 만필(漫筆)식으로 기록한 「척언(摭言)」이라는 제목의 글이 들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수령(守令)이 있었는데 성품이 고집스럽고 남의 말을 잘 믿지 않았다. 어느 날 감사(監司)가 공문을 보내어 “생치(生雉) 몇 마리를 급히 바치라.”고 하였다. 수령이 아전에게 물었다. “이른바 생치라는 것은 산 채로 잡은 꿩이렷다?” 아전이 답하였다. “아닙니다. 마른 것을 건치(乾雉)라 하고 마르지 않은 것을 통상 일러 생치라 합니다.” 수령이 화를 내며 말하였다. “이는 매우 잘못된 일이다. 어떻게 ‘죽은’ 놈을 ‘살아있다’고 한단 말이냐? 내 이를 감사에게 아뢰겠다.” 수령은 손수 붓을 들어 이렇게 써서 아뢰었다. “생치는 저 하늘 높이 날아다녀 잡기가 어렵기에 우선 죽은 꿩을 바칩니다. 운운” 감사가 글을 보고는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이 말이 비록 답답하기는 하나 또한 이치에 맞는 부분이 있구나.” 수령은 얼마 후 자리에서 쫓겨났다.
‘생(生)’이라는 글자가 경우에 따라 ‘살아있는 것’일 수도 있고 ‘마르지 않은 것’을 뜻할 수도 있는데, 이 수령은 그걸 모르고 융통성 없이 자기 생각만 고집하다가 남의 웃음거리가 되고 답답하다는 소리를 듣더니, 결국은 관직에서 쫓겨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렇게 융통성 없이 세상을 살면 자기는 물론이려니와 남들은 또 얼마나 피곤할까요. 더구나 직위가 수령이니 그 아랫사람들의 고충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만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나오는, ‘이치에 맞는 부분이 있다’는 감사의 말이 묘합니다. 수령의 생각이 답답하긴 해도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라는 뜻인데, 그러고 보면 ‘생(生)’이라는 글자가 ‘살아 있는 것’을 뜻해야 한다는 수령의 말이 옳은 것 같기도 합니다. 굳이 따지자면 살아 있는 것은 ‘생치(生雉)’, 죽은 것 중에 아직 마르지 않은 것은 ‘반건치(半乾雉)’ 혹은 미건치(未乾雉?), 상하지 않게 얼려서 보관했다면 ‘냉동치(冷凍雉)’, 마른 것은 ‘건치(乾雉)’라고 부르면 되겠군요. 그렇다면 수령의 그 고집은 단순한 고집이나 어리석음이 아니라 명칭과 실상이 걸맞아야 한다는 생각, 바로 ‘명분’과 ‘실질’의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엉뚱한 얘기 같지만 한때 ‘수입소’와 ‘한우’의 범위를 놓고 일어났던 논란이 떠오릅니다. 어디까지를 한우로 볼 것인가? 한국에서 나고 자란 것만 한우인가, 외국에서 났어도 어려서 한국에 들여와 키우면 한우인가, 외국에서 나고 자랐어도 일단 한국으로 들여온 뒤 일정 기간이 지나면 한우라고 할 것인가, 또 그때의 일정 기간은 도대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인가 등을 놓고 방송이 시끄러웠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러고 보면 ‘생치(生雉)’를 놓고 벌어진 이 촌극도 그저 웃고 넘길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명분’과 ‘실질’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온 아주 중요한 논란거리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