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현들은 인색함의 의미를 ‘부족함’으로 풀이하였다. 기(氣)가 부족한 것이든, 마음 한구석이 불안한 것이든 부족한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부족하면 채우려고 하고, 불안하면 비축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자신에게나, 남에게나 인색할 수밖에 없다.
이 글은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성호사설』에 있는 「잡찬」의 일부분이다. 그는 이 글에서 인색과 관련하여 두 가지 경계를 들고 있다.
하나는 자신에게 인색한 경우다. 잘 먹지도, 잘 입지도 못하고, 치료도 제대로 못 해본 채 마지막까지 움켜쥐고 있다가 결국 남 좋은 일만 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자신의 인생을 위해 너무 작은 주머니를 준비했거나, 너무 큰 주머니를 준비한 경우이다. 그러나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큰 피해를 주지는 않는다.
또 다른 하나는 남에게 인색한 경우다. 자기에게 필요치 않은 것이라도 남에게 주는 것은 무조건 싫어한다. 자기 배는 부르고, 남겨두면 음식이 상해도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는다. 이런 경우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 인색함의 영향이 자신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타인에게까지 미치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칫하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잃을 수도 있다.
성호가 예로 든 화원(華元)과 자가(子家)는 모두 춘추시대(春秋時代) 사람들이다. 화원이 어느 날 염소를 잡아서 그 부하 군사를 먹였는데, 공교롭게도 그의 마부 양짐(羊斟)이 그 자리에 끼지 못하였다. 나중에 전투할 때 양짐이 “지난번에는 당신 마음대로 염소를 처리했으니, 오늘은 내 마음대로 하겠다.”라고 하면서 수레를 몰고 적진으로 투항해 버렸다.
자가는 공자(公子) 귀생(歸生)이다. 임금을 뵈러 갔을 때, 함께 간 자공(子公)이 진귀한 음식을 먹게 되면 식지(食指)가 동하는 습관이 있다고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이 일부러 자라탕을 나누어주지 않자 원한을 품고 자공과 함께 그 임금을 시해하였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국 한 그릇 같은 사소한 문제 때문에 반역을 한다는 것이 우습기조차 할 수 있다. 그러나 공자(孔子)도 조정의 음복 고기가 자신에게 배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라를 떠나간 적이 있을 정도로 나름 의미가 있는 행위였다.
사실 30여 년 전까지도 불천위(不遷位) 제사 때 음복의 양이 고르지 않다는 이유로 노인 제관(祭官)들이 유사(有司)를 불러 호통을 치는 일이 잦았다. 우리나라에서 배고픔이 어느 정도 사라졌던 시기였음을 감안하면, 단순히 음식에 대한 욕심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정당한 대우를 해 주지 않은 것에 대해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중산국(中山國) 임금도 위의 두 경우처럼 양고기 국 때문에 나라를 잃을 위기에 처했다. 마지막까지 자신을 호위하며 따라오던 두 병사를 보고 물었다.
“너희는 내가 특별히 은혜를 베푼 기억이 없는 것 같은데, 왜 끝까지 남아있는 것이냐?”
두 병사는 말했다.
“임금님께서는 굶어 죽어가던 저희 아비에게 밥 한 덩이를 내려 살려주신 적이 있으십니다. 저희는 나라가 위태롭게 되면 목숨을 바치라고 한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임금은 탄식했다.
“베풀어주는 것은 그 양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상대가 얼마나 절박한가에 달렸고, 원한을 사는 것은 그 정도의 깊고 얕음이 문제가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느냐에 달린 것이구나.”
일이 닥치기 전에 이런 이치를 미리 깨닫기는 쉽지 않은가보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비슷한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