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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색하면 나라도 잃는다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3. 7. 17. 22:23

- 이백일흔아홉 번째 이야기
2013년 7월 15일 (월)
인색하면 나라도 잃는다
  인색한 것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자신에게는 후하면서 남에게는 인색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자신과 남 모두에게 인색한 경우도 있고, 자신에게는 인색하면서 남에게는 후한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이든 그 사람의 가치관에 달린 것이니, 다른 사람이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다. 백 년도 안 되는 인생이라고 덧없음을 노래하지만, 백 년은 긴 세월이다. 노후를 위해 아껴서 비축하는 것을 도덕적으로 비난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인색함 때문에 다른 사람이 상처를 받을 수 있다면, 조심할 일이다. 그 여파는 자신이 피해를 보는 정도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무릇 재물이란 인색하지 않으면 모으지 못한다. 인색하게 모으고 나서는, 마음이 습관처럼 늘 자기보다 형편이 나은 자와 비교를 하기 때문에 오직 부족하다는 생각만 하게 된다.
  그러므로 천성이 인색한 사람은 남에게 베풀어 주는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씀씀이도 넉넉하지 못하고, 자신의 병에도 약을 쓰지 못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죽어버리면 나중에 다른 사람의 소유물이 되리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또 맛난 음식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배가 부르면 그만인데, 나는 이미 배가 부를 대로 불렀으면서도 차라리 썩혀버릴지언정 나눠주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럴 경우 도마 위의 남은 음식을 얻어먹고 싶어 하는 사람이 한이 없을 텐데, 어떻게 몹시 원망하고 성내지 않겠는가?
  『시경(詩經)』에, “백성의 인심을 잃는 것은, 마른 밥 한 덩이 때문에 잘못되는 것이다. [民之失德 乾餱以愆]”라고 하였으니, 저 화원(華元)이나 자가(子家)의 일을 거울삼을 수 있다. 내가 언젠가 계집종들이 주인을 욕하는 것을 엿들은 적이 있는데, 대체로 제사나 잔치 끝에 남은 음식을 썩을 때까지 보관해두면서 나눠주지 않았다는 것으로 쉴 새 없이 혀를 차면서 흉을 보는 것이었다.

凡財不吝則不聚 旣吝而聚 心乎成習 常較於勝己者 惟覺不足 故性慳之人 不但無施與於人 亦不贍於己用 亦不捄藥於己疾 殊不知宛其死矣爲他人物也 又美味雖多 腹飽而止 我旣屬厭而敗壞不散者 亦衆也 人之冀沾於刀俎之餘者 何限 豈不怨怒之甚耶 詩曰民之失德 乾餱以愆 華元子家 可以監矣 余嘗竊聽群婢之詈主者 凡祀饗之餕 藏敗而不散 嘖嘖言不休


- 이익(李瀷, 1681∼1763), 「잡찬(雜纂)」,『성호사설(星湖僿說)』권28

  
  선현들은 인색함의 의미를 ‘부족함’으로 풀이하였다. 기(氣)가 부족한 것이든, 마음 한구석이 불안한 것이든 부족한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부족하면 채우려고 하고, 불안하면 비축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자신에게나, 남에게나 인색할 수밖에 없다.

  이 글은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성호사설』에 있는 「잡찬」의 일부분이다. 그는 이 글에서 인색과 관련하여 두 가지 경계를 들고 있다.

  하나는 자신에게 인색한 경우다. 잘 먹지도, 잘 입지도 못하고, 치료도 제대로 못 해본 채 마지막까지 움켜쥐고 있다가 결국 남 좋은 일만 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자신의 인생을 위해 너무 작은 주머니를 준비했거나, 너무 큰 주머니를 준비한 경우이다. 그러나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큰 피해를 주지는 않는다.

  또 다른 하나는 남에게 인색한 경우다. 자기에게 필요치 않은 것이라도 남에게 주는 것은 무조건 싫어한다. 자기 배는 부르고, 남겨두면 음식이 상해도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는다. 이런 경우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 인색함의 영향이 자신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타인에게까지 미치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칫하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잃을 수도 있다.

  성호가 예로 든 화원(華元)과 자가(子家)는 모두 춘추시대(春秋時代) 사람들이다. 화원이 어느 날 염소를 잡아서 그 부하 군사를 먹였는데, 공교롭게도 그의 마부 양짐(羊斟)이 그 자리에 끼지 못하였다. 나중에 전투할 때 양짐이 “지난번에는 당신 마음대로 염소를 처리했으니, 오늘은 내 마음대로 하겠다.”라고 하면서 수레를 몰고 적진으로 투항해 버렸다.

  자가는 공자(公子) 귀생(歸生)이다. 임금을 뵈러 갔을 때, 함께 간 자공(子公)이 진귀한 음식을 먹게 되면 식지(食指)가 동하는 습관이 있다고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이 일부러 자라탕을 나누어주지 않자 원한을 품고 자공과 함께 그 임금을 시해하였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국 한 그릇 같은 사소한 문제 때문에 반역을 한다는 것이 우습기조차 할 수 있다. 그러나 공자(孔子)도 조정의 음복 고기가 자신에게 배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라를 떠나간 적이 있을 정도로 나름 의미가 있는 행위였다.

  사실 30여 년 전까지도 불천위(不遷位) 제사 때 음복의 양이 고르지 않다는 이유로 노인 제관(祭官)들이 유사(有司)를 불러 호통을 치는 일이 잦았다. 우리나라에서 배고픔이 어느 정도 사라졌던 시기였음을 감안하면, 단순히 음식에 대한 욕심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정당한 대우를 해 주지 않은 것에 대해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중산국(中山國) 임금도 위의 두 경우처럼 양고기 국 때문에 나라를 잃을 위기에 처했다. 마지막까지 자신을 호위하며 따라오던 두 병사를 보고 물었다.

“너희는 내가 특별히 은혜를 베푼 기억이 없는 것 같은데, 왜 끝까지 남아있는 것이냐?”

  두 병사는 말했다.

“임금님께서는 굶어 죽어가던 저희 아비에게 밥 한 덩이를 내려 살려주신 적이 있으십니다. 저희는 나라가 위태롭게 되면 목숨을 바치라고 한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임금은 탄식했다.

“베풀어주는 것은 그 양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상대가 얼마나 절박한가에 달렸고, 원한을 사는 것은 그 정도의 깊고 얕음이 문제가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느냐에 달린 것이구나.”

  일이 닥치기 전에 이런 이치를 미리 깨닫기는 쉽지 않은가보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비슷한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권경열 글쓴이 : 권경열
  •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사업본부장
  • 주요역서
      - 국역 갈암집공역, 민족문화추진회. 1999
      - 국역 오음유고, 민족문화추진회, 2007
      - 국역 국조상례보편공역, 국립문화재연구소, 2008
      - 국역 매천집 3, 한국고전번역원, 2010
      - 국역 가례향의, 국립중앙도서관, 2011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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