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은 1452년 왕위에 올랐고, 1453년 계유정난이 일어났으며, 1454년 윤6월 세조에게 양위하고 상왕이 된다. 그리고 1456년 6월 사육신의 사건이 일어나자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었고, 이듬해인 1457년 10월 죽임을 당한다.
김종직은 1453년(단종1) 23살로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유학하고, 1455년(세조1) 24살로 동당시(東堂試)에 합격하였으나 1456년 회시(會試)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이해 부친상을 당했으며, 1457년 상중에「조의제문」을 짓는다. 29살이 되던 1459년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들어선다. 사헌부 감찰, 홍문관 수찬, 이조 좌랑 등 정통관료의 코스를 거쳤고, 세조가 죽자 시책문(왕의 시호를 정하여 올리는 글)과, 만사(죽은 이를 애도하는 글)를 짓는다. 성종 때는 경연에 들어갔고, 도승지, 이조참판 등 핵심 요직을 지냈다.
김종직이 꿈을 꾸었다는 10월은 바로 단종이 유배지에서 살해당하던 그달이다. 실제로 김종직이 이글을 10월에 지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시기를 적시한 것으로 볼 때 단종을 애도한 것이 분명하고, 강물 운운한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무엇보다도 그 내용을 조금만 뜯어보면 세조를 비유한 것에 의심이 없다. 이런 그가 세조 때 벼슬길에 들어 성종 때는 핵심 요직을 지내고 경연에 들어갔으니, 후세에 사람들이 도대체 「조의제문」 지을 때는 무슨 마음이고, 또 벼슬할 때는 무슨 생각인지 헷갈리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특히 계유정난이 일어난 해에 성균관에 유학하였고,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며, 또 그때 「조의제문」도 지었으니, 이익을 취하면서 명망을 훔치려 했다는 허균의 비판에 딱히 대답할 말도 없을 듯하다.
「자객열전(刺客列傳)」에 올라있는 예양(豫讓)은 주군이 죽고 나라도 없어졌는데, 끝까지 주군을 위해 복수를 하려다 자신도 죽는다. 설사 복수를 위해서라도 거짓 충성을 바쳐서는 안 된다고 한 예양은 영원한 충절의 표상이 되었다. 관중은 다르다. 자기가 섬기던 주군을 죽인 환공(桓公)에게 벼슬하였다. 비록 환공을 춘추오패의 하나로 만들고 제나라를 중흥시켰지만, 주군을 죽인 환공에게 벼슬했다는 점은 문제였다. 그러나 이를 지적한 제자에게 공자는 무력을 쓰지 않고 제후를 규합하였으니 관중이야 말로 인(仁)이라고 하였고, 필부필부의 작은 의리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하면서, 백성이 지금까지 그의 혜택을 입고 있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군신의 관점이 아니라 백성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말한 것이다.
하루는 김종직이 성삼문을 충신이라고 말하니, 성종의 낯빛이 변했다. 이때 김종직이 “신은 전하의 성삼문이 되겠습니다.”라고 하자 풀렸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김종직의 마음속에는 현실에 대한 의지와 충절에 대한 마음이 모두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예양도 되고 싶고, 관중도 하고 싶은 것이다. 세조의 잘못된 처사는 참을 수가 없지만, 그렇다고 출세의 의지를 꺾기도 어려웠던 것이다. 출세를 이록(利祿)으로 본다면 허균의 비판이 맞겠지만, 경세(經世)의 포부로 본다면 둘이 같이 존재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그래서 성종은 생전에 그의 「조의제문」을 보았지만, 문제 삼지는 않았다.
사실 충절이란 왕조의 유지에 필요한 덕목이지, 백성을 위한 관점은 아니다. 백성의 입장에서 보자면 충절은 권력 투쟁을 잘 싸놓은 포장지에 불과할 것이다. 오히려 관중 같은 능력으로 백성을 편케 하는 것이 예양의 충절보다 나을 수 있으며, 그래서 공자의 평가를 배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왕조시대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에도 여전히 김종직에게 충절을 요구하는 것은 김종직만큼도 인식이 분화되지 못한 것이며, 더욱이 그를 포용했던 성종의 생각에는 한참 못 미치는 것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