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實學者)인 순암(順菴) 안정복이 광주(廣州) 경안면(慶安面) 덕곡리(德谷里) 텃골에 살면서 같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향약(鄕約)을 만들어 시행할 적에 만든 향약규례 가운데, 상례(喪禮)에 관한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순암은 이 글에서, 부모님을 편하게 모시기 위하여 묏자리를 가려서 잡는 것은 괜찮지만, 자신이 복을 받기 위하여 부모님의 혼령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부모에게 불효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이 세상에는 신안(神眼)이 없어진 지 오래여서 제대로 풍수를 볼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풍수설을 믿을 것이 못되며, 천도(天道)는 공평하여 부모님에게 불효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절대로 복을 주지 않으니, 풍수설을 믿을 것이 못 된다고 하였다.
순암만이 풍수설에 대해서 비판한 것은 아니다. 우리 선인들이 대부분 다 풍수설에 대해서 허탄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특히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풍수론(風水論)」이라는 글에서 “말라비틀어진 무덤 속의 뼈가 제아무리 산하(山河)의 좋은 형세를 차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자기의 후손(後孫)을 잘 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복을 받기 위하여 좋은 무덤 자리를 찾아다니는 세태에 대해 직설적으로 질타하였다.
풍수설에 대해서 아주 단순한 의문이 있다. 이 세상에는 우리 민족처럼 조상을 장사지내면서 무덤을 만들지 않고 화장(火葬)을 하거나 풍장(風葬)을 하거나 하는 풍습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이런 풍습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묏자리의 좋고 나쁨은 아예 따지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또 풍수설을 믿는 중국의 경우를 보면, 서쪽 산악 지방은 그야말로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조차 따질 수 없는 험준한 산만 이어져 있는 곳도 있다. 중원 평야 지대나 남쪽 평야 지대는 1,000리를 가도 조그마한 동산조차 보이지 않아, 안산(案山)이니 조산(祖山)이니 하는 것을 아예 말할 수조차 없다.
그런 풍습을 가진 사람들이나 그런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길지(吉地)와 흉지(凶地)에 따라 복을 받고 재앙을 받는다고 하는 풍수설은 아예 논할 수조차 없다. 그런데 그 사람들 가운데에도 부자가 있고 가난한 사람이 있으며, 자손이 번성한 사람도 있고 가문이 영락한 사람이 있다. 이 사람들은 어떤 연유로 해서 부자도 있고 가난뱅이도 있으며, 복을 받는 사람도 있고 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것인가? 만약에 풍수설이 아닌 다른 것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풍수설은 믿을 것이 못 되는 것이다.
풍수설만이 아니다. 관상술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는 우리 한민족이 속한 황인종뿐만이 아니라, 백인종이나 흑인종 등 여러 인종이 살고 있다. 그런데 관상술이라는 것은 유독 중국인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만 있으며, 백인종과 흑인종에게는 아예 없다. 그 신묘하다는 관상술이라는 것이 중국 사람과 우리나라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인가? 백인종이나 흑인종은 외계 사람이라도 되길래 그 술법이 적용되지 않는 것인가? 참으로 모를 일이다.
또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이 사주가 기구하고 관상이 형편없는데, 부모를 장사지내면서 아주 좋은 길지(吉地)에 모셨을 경우,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복을 받지 못할 것인가? 복을 받는다면 사주팔자나 관상은 별 볼일이 없는 것이며, 복을 받지 못한다면 풍수라는 것은 별 볼일이 없는 것이다. 반대로 사주팔자가 좋고 관상이 좋은데 부모님을 길지가 아닌 곳에 장사지냈을 경우,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인가? 복을 받지 못할 것인가? 복을 받는다면 사주나 관상이 영험한 것이며, 풍수설은 엉터리이다. 사주와 관상과 풍수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영험한 것인가? 모두 영험한 것인가? 아니면 모두 엉터리인가? 참으로 모를 일이다.
땅 있으면 어디에고 백골 묻을 수 있나니, 有地可能埋白骨 애를 쓰며 이산 저산 찾아다닐 필요 없네. 不須勤苦覓靑山 어찌하면 풍수 책을 모조리 다 태워 없애, 何緣火得靑烏集 온 천하에 상 치르는 어려움을 없게 할꼬. 天下終無送死難
이 시는 퇴계(退溪)의 고제(高弟)로서, 임진왜란 때 진주(晉州)에서 순절(殉節)한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이 당대 사람들이 장사지내면서 이른바 길지라는 좋은 묏자리를 찾기 위하여 이산저산 헤매고 다니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 지은 「축종 상인(竺宗上人)의 시축(詩軸)을 차운하여 제(題)하다」라는 제목의 시이다. 축종 상인이 어떤 사람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아마도 당시에 풍수설에 뛰어난 승려였던 듯하다.
오늘날 과학문명이 이처럼 발달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관상술이니 사주팔자니 풍수설이니 하는 것들이 여전히 성행하고 있으며, 이런 것들을 신봉하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 아마도 예전부터 전해져 온 의식이 너무나 깊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어서일 것이다. 또 개개인의 삶이 너무나 팍팍해서 이런 허황된 것들에게나마 의지하여 위안을 받고 싶어서일 것이다.
사주가 맞는 것인가, 관상이 맞는 것인가, 아니면 풍수가 더 맞는 것인가? 실제로 그런 이치가 과연 있기나 한 것인가? 그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제아무리 사주가 좋고 관상이 좋고 묏자리가 좋다고 하더라도, 성실한 삶을 살지 않고 허랑방탕하게 살면서 일생을 허비하거나, 나쁜 마음을 먹고 악을 행하여 남의 눈에 눈물이 나게 한다면, 큰 복이 오히려 재앙이 된다는 사실이다. 또 이런 것들을 지나치게 신봉하면서 거기에 의지한다면, 삶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해가 되는 점이 더 많다는 것이다. 이 점 명심하고 삶에 임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