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옛글 모음

첫눈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3. 11. 14. 21:06

- 일흔세 번째 이야기
2013년 11월 14일 (목)
첫눈

아이들 첫눈 온다 알려 오지만
늙은이를 오히려 놀래키누나
한 해가 저무는 줄 알겠으니
여생이 얼마인지 따져 보노라
청춘의 옛 친구 이제 없는데
백발의 머리만 새로 더하네
홀연 앞날의 일 생각하자니
이제부턴 죽음도 편안하여라

兒童報初雪
却使老夫驚
歲律知將暮
餘生問幾齡
靑春無舊伴
白髮有新莖
忽憶前頭事
從今歿亦寧

- 유집(柳楫, 1585~1651)
「초설(初雪)」
『백석집(白石集)』
 


  유집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쓴 인물이지만, 이괄(李适)의 난과 병자호란 등 국난을 당해서는 의병을 모아 직접 전장에 나서기도 했던 충의의 인물이다. 이 시는 그가 몇 세 때 지은 작품인지 자세하지 않지만, 내용으로 보아 노년에 첫눈을 맞이하여 감회를 읊은 시이다.

  아이들은 눈을 좋아한다. 시의 첫 구에 등장하는 아이들도 단순히 눈이 왔음을 알리는 정도가 아니라 첫눈이 내린다고 좋아라 시끌벅적 떠들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이들임에 틀림없다. 아이들은 왜 눈이 좋을까? 경험에 비추어 볼 때 특별한 이유 없이 그냥 좋아하는 것 같다. 아이들만 눈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어른들 중에도 눈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동심에 그냥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눈에 얽힌 추억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눈 오는 운치를 즐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첫눈의 약속을 손꼽으며 기다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각각 저마다의 사연과 감정으로 첫눈은 많은 사람에게 기다림의 대상이 되고, 마음을 설레게 만들기도 한다.

  절기상 겨울을 시작하는 때는 ‘입동’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입동이 언제인지도 모르고 지나다가 첫눈을 맞이한 뒤에야 비로소 겨울임을 느끼게 된다. 시인도 첫눈을 알리는 아이들의 소리에 겨울을 깊이 느끼며 상념에 잠긴다. 겨울은 한 해의 끝에 놓여있기에, 겨울과 함께 한 해가 저물고 또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된다. 노년에 한 해를 더 보태는 것은 그만큼 생의 끝자락에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감을 의미한다. 청춘 시절을 함께 보냈던 친구들은 하나둘씩 저세상으로 떠나가고 나에게 더해지는 것은 흰머리뿐임을 자각하는 시기에, 내일을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나에게는 내일이 없는 오늘만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이것이 아이들처럼 첫눈을 기쁘게 바라보지 못하고 덜컥 놀라게 되는 시인의 마음일 것이다.

  첫눈에 놀라 마음이 무거워지는 사람이 어찌 노년의 시인뿐이겠는가. 어릴 적 눈 내리는 겨울만 되면 어머니는 혼잣말로 중얼거리셨다. “없는 사람 살기는 그래도 여름이 좋은데……” 목돈을 들여 겨우내 쓸 연탄을 들이는 것이 연례행사였고, 산동네 한 계단을 더 오를 때마다 더해지는 배달비를 아끼느라 온 식구들이 몇 번이고 연탄을 나르며 비탈진 동네 길을 오르내렸다. 그마저 넉넉지 못한 집에서는 가끔씩 옆집에 한두 장의 연탄을 꾸러 다니기도 하였고….

  입동이 지났다. 겨울이 되었다. 사람들의 옷도 그에 맞게 두꺼워졌다. 지금도 가끔 들리는 얘기들을 접해 보면 어릴 적 내가 듣던 어머니의 그 걱정스러운 중얼거림이, 아직도 우리의 주변에 많이 울리는 듯하여 마음이 애잔하다.

 

글쓴이 : 이정원(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