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 바꿔야 할 한국사]
실증사학은 한국사의 올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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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를 말할 때 김부식(사진 위 오른쪽)의 ‘삼국사’(왼쪽)와 일연 (사진 아래 오른쪽)의 ‘삼국유사’(왼쪽)는 빼놓을 수 없는 가치를 가진 사료다. 두 사서는 한민족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전한다. |
역사는 무엇이며, 역사에서 철학은 왜 필요한가. 역사가 사실들만 있으면 저절로 구성되는 것처럼 생각하기 일쑤다.
그러나 역사는 반드시 사관(史觀)이라는 것을 통해 구성된다. 역사란 객관적으로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역사기술자의 관점과 선택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일제는 실증사학이라는 말을 통해
마치 자신들이 구성한 식민사관이 객관적인 것이어서 고칠 수 없는 요지부동의 사실인 양 주입해왔다.
역사는 구성물이다.
역사는 역사를 쓰는 사람의 관점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사람(역사가)이 사실과 사건을 연결하는 것이고,
그 연결의 이면에는 일관성 있는 관점이 있다. 그것을 사관이라고 한다.
일제 혹은 일제 앞잡이로서 구성된 조선사편수회가 한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무엇인가. 바로 식민사관이다.
일제는 고대의 사료가 부족한 점, 같은 지명이 여러 곳에 있는 점, 같은 지명이라도 변하고 이동한 점,
고유명사와 보통명사가 혼재된 점 등을 이용해 한국의 역사가 처음부터 한반도 안에서 벌어진 식민지였던 것처럼
조작하는 관점에 의해 한국사를 구성했다. 이를 위해 가장 오래된 고대 조선을 역사가 아닌 신화라고 해석했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일제 때 구성된 식민사관의 역사를 배우고 있다.
실증사학은 식민사관을 은폐해왔다.
실증사학은 마치 역사가 자연과학적 사실처럼 그렇게 실증적으로 있는 것처럼 오도했고, 일제가 구성한 한국사를 바꿀 수 없는 역사적 경전처럼 받들었다. 그들이 일제 때 양성한 친일사학자와 그들의 제자들을 통해 관리해 온 것이다. 실증사학은 한국사의 올가미였다. 일제의 실증사학은 저들이 만들어놓은 줄거리를 고치지 못하게 못박아 놓았다. 이는 마치 한국 산천의 정기를 끊어놓기 위해 백두산·한라산·지리산 등 명산에 수많은 철심을 박아놓은 행위와 같은 것이다.
독일의 근대사학자 레오폴트 랑케가 말하는 실증주의 사학은 역사학의 사료와 사실을 확보하는 데는 다소 기여하였지만 역사학 본래의 역사서술 목적을 성취하는 데는 여러 문제와 한계가 있음이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에 의해 비판받은 바 있다. 그런데 지금도 우리 역사학계는 실증사학을 빌미로 우리 스스로 쓰는 한국사의 스토리텔링을 외면하고 있다.
신채호(왼쪽)와 김구는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우뚝한 인물들이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 ‘독사신론’ 등을 저술해 근대사학의 비조로 꼽히며, 김구가 주장한 ‘문화국가론’은 근대사학이 추구하는 이상적 역사상으로 꼽을 만하다. |
식민사관에 의해 양성된 식민사학자들은 저들의 사관에 맞는 사료가 나오면 침소봉대하고,
위배되는 사료가 나오면 함부로 폄하하고 무시하는 것을 밥 먹듯이 하고 있다.
역사 비정(批正)에서도 식민사관 틀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고 있다.
한국사의 일본 종속이 오늘의 한국사이다.
결국 오늘의 한국사에는 우리가 보는 한국사는 없고, 일본이 보는 한국사만 있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조선시대로 올라가면 중국에 대한 사대사관이 있다.
일제 식민사관에 앞서 조선의 중국 사대사관은 한민족의 고대사를 축소하고 왜곡했다.
말하자면 한국사는 일제의 식민사관과 조선의 중국 사대사관에 의해 고금에 협공당하는 위치에 있는 셈이다. 이러한 한국사는 한국의 지정학적인 위치와 함께 당시의 국력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관점을 필요로 한다. 역사학은 과거의 학문이 아니라 현재의 학문인 것이다.
역사가 항상 새롭게 쓰여야 하는 이유는 시대정신의 반영이며 관점의 해석학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역사학자의 전유물도 아니다. 실증 운운하면서 역사를 특정 시각에 제한하거나 옥에 가두는 일은
역사적 폭력이다. 실증사학은 역사적 폭력행위를 자행해 온 것이다. 한국사는 그동안 역사적 폭력배인 실증사학 패거리(이를 점잖게 ‘역사카르텔’이라고 한다)에 의해 좌지우지되었으며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대륙을 호령했던 우리 민족의 웅혼한 기상을 생생하게 전한다. 그러나 대륙을 발판으로 전개됐던 한민족 역사는 일제강점기에 훼손됐고, 오늘날까지도 제대로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민족주체사관·대륙사관을 성립해야
우리 사학계를 지배하고 있는 실증사학은 실증(정작 실증도 아니다)이 마치 어떤 절대적인 관점인 것처럼 으스대면서기껏 우리 자신(한민족집단)의 관점 대신에 조선의 중국 ‘사대사관’과 일제의 ‘식민사관’으로 대체해왔다.
한국사가 남의 사관에 종속된 것은 역사철학을 가지지 못한 우리 자신의 문제이지, 중국이나 일본의 문제가 아니다.
식민사관이나 사대사관은 일본이나 중국의 잘못이 아니고 순전히 우리 잘못이다. 민족사관과 대륙사관이 역사학의 주류가 되지 못한 탓이다. 일본이나 중국을 원망한들 무슨 소용인가. 일본이 우리 역사를 왜곡했느니, 중국이 우리 역사를
축소했느니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우리는 우리 민족사를 당당히 쓰고 후손에게 가르치면 그만인 것이다.
문제는 우리 역사를 쓰고 연구하는 담당자들이 사대사관과 식민사관에 길들여져서 우리 역사를 쓰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저들의 사관이 옳다고 여기는 데 있다. 식민사학자들은 마치 세뇌되거나 마비된 사람과 같아서 우리 역사의 정답이
중국 혹은 일본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것이 객관적 학문을 하는 것인 양 착각하고 있다.
한국의 실증사학은 문헌 고증과 비판에서도 실제로 과학적이지도 않으면서 과학성을 표방하며 역사를 독점하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사회적 지위(대학교수·연구원 등)와 이익(월급·연구비 등)을 누리며 불가침의 아성을 쌓아왔다고
말할 수 있다. 자연과학적 기술과 지식을 동원한다는 점에서 과학적 역사학이라고 불리는 고고학도 식민사학에 합류하고 있다. 그래서 실증사학은 고고학적 결과도 문헌사학의 고압적 자세와 자의적 해석으로 뒤집는다.
우리 민족이 역사적 종이 되었다고 하면 누구나 기분 나쁘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종의 신세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 역사를 우리의 비전에 따라 자신 있게 쓰는 주인정신이 필요하다.
오늘의 역사학자나 역사기술자들은 ‘삼국사’(그동안 ‘삼국사기’로 알려졌던 사서는 본래 ‘삼국사’이다)나 ‘고려사’를
쓸 때의 사관들보다 후퇴했음이 분명하다. 고려 후기부터 서서히 주체성이 없어지더니 조선을 거쳐 일제 식민지가 되고
부터 주체성이 완전히 없어졌다. 역사에서 주체성이 없는 줄도 모르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자체가 식민지 시대의
반영이며 잔재이다.
식민사학이 존재하는 한 일본 제국주의는 완전히 물러간 것이 아니며, 주체가 없는 역사를 자각하지 못하는 한
결코 민족과 국가는 세계사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주인의식이 없는 민족은 언젠가는 망한다. 우리는 일제 식민지배를
통해서 그러한 교훈을 뼈저리게 배웠다. 반대로 주인의식이 있는 민족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 문제는 주인의식이다.
우리 역사관은 민족의 창세신화와 민족정신을 반영한 뿌리를 명확히 하는 데서 출발하여 우리 조상들이 남긴 발자취와
그들이 전개한 역사를 바라보는 민족주체사관·대륙사관이 되어야 한다. 역사는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실은 현재적 인식의 지평에서 과거를 해석하는 것이다.
◆한국의 역사학은 고려 이후 후퇴했다
오늘날 한국의 역사적 상황과 현실은 ‘삼국사’를 기술한 김부식이나 ‘삼국유사’를 지은 승(僧) 일연의 시대보다 후퇴했다. 역사를 한답시고 밥을 먹고 있는 많은 역사학자들은 직무유기를 하고 있고, 민족에게 죄를 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부식과 일연이 기록한 역사와 그 정신마저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삼국사 초기기록 불신(임나일본부설)’이나
‘한사군 한반도설(고조선 한반도설)’ ‘단군조선=신화’라는 이름 아래 왜곡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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