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학교 일로 경북 경주에 출장 간 적이 있다.
거기서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관리와 학자들이 조선고적보호회를 조직하여 관리상태가 부실했던
경주의 고적들을 목척을 둘러쳐서 보호해줬다는 초청강연을 들었다.
물론 보호를 명목으로 고적들을 조선인으로부터 ‘분리’ ‘배제’시켰다는 ‘근대’적 시선과, 조선의 역사를
일본의 역사와 연결시켜 식민주의 사관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는 설명도 곁들여졌다.
이런 활동은 그들(일본인 관료, 일본인 학자 등)의 ‘시선’을 위한 보호였다.
그러나 말미로 가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사회의 여러 사회문제의 책임을 일제라는
과거(절대 악)에 전가시키는 태도’가 현재 진행형이며 안타깝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는 ‘일본이 절대적
가해자가 아니고, 우리도 피해자만은 아니다.’ 라는 주장과도 맥락을 같이하는 말이다. 소위 뉴라이트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로 보거나 위안부를 자발적 매춘으로 보는 시각과 유사하다.
최근 일본에서 발표된 글의 제목으로 ‘제국의 민중들’이라는 개념으로 보천교의 활동을 다룬 경우도
보았다. 내용을 세밀히 살펴보지 않아 무어라 말하긴 그렇지만 보천교를 따랐던 그 많은 사람들을
‘제국의 민중들’이란 시각에서 다루었다는 점은 좀 씁쓸한 느낌을 주었다.(물론 식민모국과 식민지를
분절시키지 않고 ‘제국’이라는 틀로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음도 이해한다)
도쿄의 카쿠슈인學習院대학 우방문고 자료실에서 서류를 확인하고 있는 김철수 박사 |
더 진행되면 ‘보천교는 유사종교가 되면서 근대 종교화가 추진되었다.’ 라고 주장하게 된다. 사실 이런 비슷한 주장들이 이미 발표되기도 했다. 이는 종교의 근대화란 시선에서 보천교를 평가하는 것이다. 종교라는 용어는 기껏해야
1883년 정도에
우리사회에 나타난 개념이다. 그것도 religion이라는 다분히 기독교적 개념을 접했던 일본 학계가 만들어낸
용어로, 이후 조선사회로 유입된 개념일 뿐이다. 그 용어로 민족종교를 재단하는 것, 그래서 근대라는
이름으로 미신(사이비)으로 몰아버리는 것은 다분히 제국주의적 시선이다.
곧 ‘근대=문명=기독교 ↔ 보천교=미신=전근대’라는 틀이다. 이러한 제국주의적 시선은 식민주의적 시선과
연합되면서 식민권력은 1915년 「포교규칙」을 제정해 보천교를 ‘종교 유사단체’ 곧 ‘유사종교’로 분류해
버렸다. 요즘 말로 ‘종교 같지 않은 종교’, ‘종교 아닌 종교’인 것이다. 보천교에 굴레를 씌운 것이다.
보천교=유사종교=사이비 종교단체로 말이다. 식민권력은 이제 이 종교단체를 회유하거나 억압하여
친일단체로 만들거나 제거(박멸)해야 했다. 소위 근대적 종교로 만들거나 인정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는 식민정책의 근본 틀인 동화정책에서 이루어진 결과이다. 그런데 식민권력이야 통치 상
그렇다 하더라도, 식민지 언론과 종교계 및 지식인 등 많은 주변 세력들이 이에 동조하였다.
그들에게 주어진 반대급부가 뭘까?
이렇게도 볼 수 있다. 당시 기독교, 천도교 등 기득권 종교계는 민족종교와의 분리를 통해 제도화된 근대종교로 인정받고 보호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당시 기독교의 입장에서 충분히 확인가능하다. ‘보천교만 아니면 우리 기독교를 모든 조선민족에게 선포하는 것이 하룻거리 일로써, 획기적으로
조선에서의 교세를 독점할 뻔 하였는데 보천교는 우리 기독교의 발전에 큰 장애물이며 커다란 악마’라
보고 보천교 박멸을 입에서 입으로 전하였다고 했다.
또 식민지 언론과 지식인들도 ‘근대’를 지향하는 자신들의 열의와 카르텔을 보호받으려 했을 것이다.
마치 오늘날 학계에서 보여지는 ‘식민사학의 카르텔’ 보호처럼 말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발표된 글 중에는 「보천교-친일인가 항일인가?」 라는 제하로 쓴 글도 보인다. 보천교,
친일인가? 항일인가? 왜 우리는 이런 문제제기의 글이 한편도 없는가? 당연해서? 아니면 관심이 없어서?
후자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연구자의 입장에서 보면 참담한 실정이며, 다른 연구자들을 꾸짖기
전에 필자인 내 자신이 반성해야 할 문제이다.
이 칼럼을 쓰면서 다짜고짜 이 제목부터 먼저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직 보천교가 무엇인지,
그리고 보천교의 각종 활동들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읽기가 어렵고 의아해할지 모르나 먼저 다루는 것은
시선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모든 글의 내용을 읽고 난 뒤에 보천교와 친일, 항일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순서이긴 하지만 시선을 바로잡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통탄스러운 친일의 굴레
보천교=친일단체 ?
‘유죄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 죄의 여부를 가리는 형사절차의 기본원리인 무죄추정의
원칙이다. 죄를 입증할 수 없으면 무죄가 선고된다. 보천교의 친일행적이 입증되고 확정되었는가?
무죄는커녕 보천교에 친일의 굴레가 무겁게 씌워졌다면 우리는 그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보천교에 대한 최초의 연구자로 볼 수 있는 이강오 교수는 차경석의 반민(反民)행위를 4가지로 정리하였다.
①한민족의 경제적 침식(侵蝕) : 교도들의 재산 납입
②민족운동의 외면 : “우리민족의 독립운동에는 한 푼도 준 일이 없었다.”
③친일사절의 일본파견
④시국대동단의 설립과 활동
①은 종교 활동과 관련된 문제이고 직접적인 관련 자료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③과 ④는 서로 연결된 사안으로 심층적인 고찰이 필요한 부분이다.(본 칼럼의 후반부에서 다룰 예정이다) 특히 교단기록인
『보천교 연혁사』를 한 번이라도 찬찬히 읽어봤다면 ③과 ④의 문제가 얼마나 복잡한 상황이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시국대동단의 활동 그 자체만 본다면 친일을 말하기에 어렵지 않겠지만, 식민권력이
교주 체포령 및 보천교 말살 단속을 압박하는 가운데 차경석이 보천교를 살리기 위해 고민하고
동분서주하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인 만큼 그렇게 쉽게 친일로 연결지울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런데 이강오 교수의 지적 중 우리의 관심을 끄는 문제는 ‘보천교가 독립운동에 한 푼도 준 적이 없다’는
②의 내용이다. 역으로 독립운동 단체에 한 푼이라도 준 사실이 확인되면
보천교의 친일 용의는 벗어나야 하는 것 아닌가?
이 문제는 본 기획 글을 마지막까지 확인한다면 어렵지 않게 그 답을 얻을 것이다. 식민권력이 생성한
자료들(『보천교일반』 『양촌 및 외인사정 일람』 및 각종 공문서들)을 살펴보면 차경석은 1910년대에
이미 ‘국권회복 표방’ 혐의로 ‘갑종 요시찰인’으로 편입되었고 3·1운동 전후로 국권회복 운동과 군자금
모집 활동에 참여하였으며, 1920년대에는 상해 임시정부와 만주의 정의부 활동 및 김좌진
장군의 독립군단과도 연결되어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일제는 한국을 강점한 후 동화를 식민정책의 주요한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이에 따라 한국인들의
민족의식을 약화시키고 일본민족에 동화시키려는 노력을 꾸준히 전개하였다. 여기에 중요한 것이
교육(특히 역사교육)과 종교였다.
일제는 강점 내내 이러한 노력을 중단한 적이 없었다. 아직 채 교단도 안정화되지 않은 형성기의 종교,
특히 소위 유사종교들이 식민권력의 이러한 정책에 저항하기는 쉽지 않았다. 더구나 자신들이 강점한
다른 민족들에게 조차 단순한 복종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신권적 천황제를 정신적으로
승인하고 천황을 현인신(現人神)으로 경배하라는 강요는 민족종교에는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이미 일본의 오오모토(大本)교에서도 좋지 않은 기억을 갖고 있었던 식민권력으로서는 타 종교에 비해
새로운 국가 건설을 기도하며 다수의 신도를 확보하고 군자금을 지원하는 등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던 보천교는 초기에 박멸하거나 어용화 시켜야 할 대상이었다. 외형적으로는 유화정책을 사용하면서 분열과 그 조직의 약체화를 꾀했다. 종교통제 기구도 이원화시켰다. 소위 종교단체는 학무국 종교과에서 담당했지만 유사
종교로 분류된 보천교는 총독부 경무국에서 감독토록 하여 강력한 폭력성과 억압성을 띤 통제를 가하였다.
이런 점에서 보천교는 식민지 종교통제정책의 ‘하나의 본보기’라기 보다는 ‘주요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 보천교에 대해 『보천교일반』과 같은 보고서, 식민권력 곧 조선총독부, 경찰부, 조선군참모부, 육군성 등에서 생성된 다수의 보고서 및 공문서들을 들 수 있다. 이들 대부분은 비밀문서로
취급되어졌다. 일제강점기에 식민권력이 종교단체를 대상으로 조사 보고한 자료는
기독교(조선총독부 1921) 등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
왜 보천교에 대한 별도의 보고서가 많을까? 대수롭지 않았다면, 또 민중들에게 영향력이 없었다면,
그 규모가 소규모였다면, 곧 식민권력에 덜 위협적이었다면(보천교에 대한 비판적 언사 그대로,
친일 종교단체로 식민정책 수행에 긍정적 영향력을 미치고 독립운동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면)
식민권력이 이처럼 보천교에 주목했을까 하는 문제의식이다.
그런 종교단체를 친일행위를 한 반민족적 단체로 매도해 버리면 차월곡과 그를 따른 수백만의 민중들은
억울해도 너무 억울할 것이다.
파사현정(破邪顯正)
새로운 역사적 증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들이 만들어진다. 어릴 때부터
교육 받아 특정 이미지를 주입받아온 우리들로서는 역사 담론을 뒤집을 만한 새로운 증거가 나올 때마다
혼란스럽다. 학계는 찬반으로 들끓는다. 기존 이미지에 고착된 역사관에 비판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학자들을 소수(minority)로 매도해 버린다.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기존 이미지는 조선총독부의 시선이다. 조선총독부가 이 땅에서 사라진지는
오래 되었지만, 그 총독부가 만들어놓은 시선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식민권력 카르텔의 메카시즘적
광풍이 21세기 백주 대낮에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유물 한 점의 발견으로 호들갑을 떨며 기존 역사 해석을 버리고 새로운 역사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버젓이 식민권력이 생성한 다수의 보고서 및 공문서까지 있는데도 이를 부인하려 한다면
그건 도가 너무 지나친 처사이다. 굳이 조선총독부의 시선을 수호하려는 신념으로,
침묵하고 동조할 필요가 있을까?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 했다. 사견(邪見)과 사도(邪道)를 깨고 정법(正法)을 드러내는 일, 쉽게 말하면
그릇됨을 깨뜨리고 올바름을 드러내는 일이다. 잘못된 견해에 사로잡힌 시선을 타파하고 옳은 진리를
향한 시선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
파사현정(破史顯正)에서 ‘邪’를 ‘史’로 바꿔 보았다. 잘못된 역사를 타파하여 옳은 역사를 드러내야
할 때다. 보천교에 대한 잘못된 시선과 틀에 박힌 부정적 이미지를 바로 잡는 것도
그러한 과정을 위한 첫 걸음이다. 오죽하면 요즘 적폐청산이라 하지 않는가. 바로 적폐를 청산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