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증산도 개벽문화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 (4)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7. 11. 2. 23:24

김철수 교수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

(4)진정원 불온문서 사건

- 만세운동을 꿈꾸다

1923년 9월 1일, 일본에서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였다. 일본 도쿄 남쪽에 위치한 

가나가와현(神奈川県)을 진앙지로 발생한 지진은 수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발생시켰고 

민심을 흉흉케 했다. 문제는 이런 자연재해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일본 제국주의 

권력이었다. 당시 일본 내에서는 일본공산당이 설립되면서 계급투쟁이 격화되었고, 

식민지로 강점된 한국과 중국에서는 민족해방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일본은 이러한 대내외적 위기상황에 직면하여 한국인과 사회주의자를 탄압할 기회를 엿보던 

중이었다. 대지진은 좋은 기회를 제공하였다. 내무성은 각 경찰서에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내용을 하달했고, 이에 ‘조선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약탈을 하며 일본인들을 습격하고 있다.’ 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수도 도쿄(東京)과 가나가와현, 사이타마현(埼玉県), 지바현(千葉県)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계엄령 아래에서 군대·경찰이 조직적으로 움직였고 각지에서 자경단이 

조직되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한국인과 사회주의자가 수없이 피살되었는데, 약 6,000명 

가량의 한국인이 학살당했다.

보천교 불온문서 사건에 관한 경찰 문건

 
이러한 관동대지진의 소식은 식민지 조선에도 금방 전해졌다. 민심이 동요되었고 사회가 

불안하였다. 그런데 보천교 진정원에서 이 기회를 이용하여 소위 ‘불온문서’를 만들어 

배포하려던 사건이 발생했다. 그 간단한 내용은 이렇다.

“경성부내 보천교 진정원은 동경지방 관동대지진에 수반된 민심의 동요를 이용하여 오는 

부업품공진회(副業品共進會) 개최에 맞춰 사람 출입이 왕성함을 기해 불온문서를 

산포(散布)하여 민심을 선동하려는 불온계획을 착착 진행하였다. 이미 일부의 준비를 마쳤고 

진정원 간부 등은 이름을 보천교 의식참열(儀式參列)이라 칭하며 전북 정읍 소재 보천교 

중앙본소를 향해 출발 준비 중이라는 정보를 접하였다.”

보천교 불온문서 - 선전문

불온문서의 내용이 자못 궁금할 것이다. 선전문(宣傳文)은 ‘순리(循理)의 천도(天道)는 

악자(惡者)를 증(憎)하며 폭자(暴者)를 감(戡)한다. 전 달에 도이왜적(島夷倭敵)의 제도(帝都)인 동경(東京)에서 일어난 진재(震災)’ 운운하면서 시작된다. 종교단체답게 불온문서는

 ‘하늘의 순환이치’에서 시작하여 악한 자와 난폭한 자는 결코 하늘에서 용서치 않음을 

서두에 내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관동대지진은 ‘섬나라 오랑캐 왜적[島夷倭敵]’의 수도인 도쿄(東京)에서 발생했으며, 

‘역사적 광채가 빛나는 한민족이 금일 망국에 이르렀으나’ 다시 한 번 기회를 맞아 일어설 것을 촉구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1919년 3·1민족독립운동도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계기가 되었고, 고종의 인산일인 1919년 3월 1일에 맞추어 봉기한 독립운동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시 제국주의의 도시[帝都]에서 발생한 대지진을 기회로 한민족이 

분연히 일어설 것을 촉구했다.

강점 치하에서 일본을 ‘섬나라 오랑캐 왜적’으로 표현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민족 독립운동에서 보천교의 위상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가능하다. 비록 성공하지 못하고 체포되었지만 보천교를 재평가할 수 있는 하나의 자료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식민권력은 본 사건을 조사한

 결과, 정보제공자가 보천교에 대한 불만으로 사건을 조작했다고 보고 정보제공자를 구속하면서 사건을 축소·종결지었다. 그러나 이 시기를 전후한 식민권력의 관련 공문서 및 보천교의 

상황 등 여러 정황을 볼 때 한 두 명이 조작하였다고 보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많다).

그 뿐만 아니다. 관동대지진이 발생하기 전인 1923년 7월, 경성부(京城府)에 살았던 

부여(扶餘) 사람 김목현(金穆鉉)의 활동으로 발각된 사건이 있었다. 만주 독립군단 총사령관 

김좌진 밀사 참모인 유정근(兪政根)이 검거된 것이다. 유정근은 천안 출신으로 본명이 

유민식(兪民植 1888-1969)이며 김좌진 장군과 함께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 중 

한 명이다. 그는 일제에 강점당하던 해에 만주 망명길에 올라 국권회복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도 참여하는 등 민족운동에 활발히 참여하였다. 대종교 활동도 했으며, 

아호를 후단(後檀) 곧 ‘단군의 후예’로 할 만큼 항일의식이 투철한 투사였다.

김좌진 군자금 관련

그는 1922년 2월경 김좌진 장군이 ‘조선독립 착수에 필요한 병력과 무기가 필요하나 자금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밀명을 받아 보천교도인 신찬우(申贊雨)와 함께 국내에 

특파되었다. ‘자금을 조선 내 유력자로부터 모집하고 독립군 병력을 충실하게 하기 위하여 

약 600만 명의 신도를 갖고 있는 보천교 교주 차경석을 북만주에 초치(招致)하고, 조선독립운동에 가입하게 할 목적으로 김좌진으로부터 박영효, 한규설, 차경석 등에게 보내는 서장(書狀)을 지니고’(판결문서) 들어온다. 그 서장에는 김좌진 장군이 전하고 싶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우리들은 서로 연락과 원조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조선독립이라는 대사에 전심으로 2천만의 대동원으로 한꺼번에 일본을 축파(蹴破)하고 조국을 부흥시켜야 하니 이의 완성에 

진력하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당시 조선에서 교세가 대단했던 보천교 교주 차경석을 만주로 데려가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정근이 체포되면서 이 계획은 실패하였지만 모금된 군자금은 만주 독립군에게 

전달되었다. 이 때 유정근의 검거로 김좌진과 보천교 간부의 긴밀한 연락망이 적발되었던 

것이다. 이 사실 역시 국내의 어려운 상황에서 보천교가 이면에서 끊임없이 민족독립 활동과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이후 유정근은 다시 만주로 건너가 1925년 

3월 10일 영고탑에서 결성된 신민부에서 경리부 위원장 및 각군사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군사령관 김좌진과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앞서 지적한 ‘일제 강점기 보천교가 친일(親日), 사이비 유사종교의 

대명사로 이미지화된 평가’가 얼마나 잘못된 것이지 쉽게 알 수 있다. 보천교에 씌워진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적 굴레를 벗기고 제대로 평가해야 할 필요성을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