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증산도 개벽문화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 (1)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7. 11. 2. 23:56

김철수 교수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 (1)보천교 이해 -


- 이번부터는 중원대학교 종교문화학과 교수인 김철수 박사의 

보천교에 관한 글을 연재합니다.  일제 강점기 국권회복 및 독립운동자금 모금 등을 통해 

당시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희망을 준 민족운동이었다는 의미에서 

보천교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의 시간을 가져봅니다 -


잃어버린 보천교

현재 한국인들 중에 보천교를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보천교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까지

아는 사람은 당연히 극소수일 테고, 명칭만이라도 얼마나 알고 있는지 그 숫자가 자못 궁금하다

 국민의 1%나 될까? 전북 정읍시 고창군을 지역구로 둔 유성엽 국회의원이 국회 인사청문회

(2017.6.14.)에서 보천교와 관련된 질의를 하였다. “일제 강점기 보천교의 국권회복 및 독립운동자금 모금 등은 당시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희망을 준 민족운동이었다는 의미에서 역사적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역사적 재조명을 어떤 방식으로 언제 어떻게 할 겁니까?” 

이에 대해 당시 장관 후보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보천교의 일제 때의 성과에 비해서 굉장히 

연구는 덜 되어있고 또 역사적 재조명도 필요한 상황이기 때문에 <중략> 관련 부처와 협의를 

해서 재조명의 방식을 찾아보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반갑고도 놀라운 발전이다.

국회에서 거론된 것도 그렇고 정부 차원에서 관심을 갖겠다고 운운한 것도 여지껏 처음이다. 

물론 ‘임명된다면’이란 전제조건이 달렸지만. 대통령도 ‘잃어버린 가야사 복원’을 언급하는 

마당에 ‘잃어버린 보천교 재조명’까지 더해진다면 그건 아마 

‘잃어버린 역사의 대개벽(the great opening) 상황’일 것이다. 

그런 만큼 우리에게 보천교는 잃어버린 역사이고 꼭 회복해야 할 역사이다.

일본 가쿠슈인學習院대학에 보관된 젠쇼 에이스케善生永助의 사진 

모듬 더미에 들어 있는 대흥리 전경 사진

보천교는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그러니까 일제강점기의 절망적 상황에서 우리민족에게

숨 쉴 여력을 제공해주고 민족독립의 희망을 심어줬던 민족종교이다. 민족종교라 하면 

그 시초를 보통 동학에서부터 찾는다. 곧 19세기 중반 수운 최제우(1824-1864)가 동학을 

창교한 이래 많은 민족종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20세기 초에는 

증산 강일순(1871-1909)이 천지공사(天地公事. 1901-1909)를 집행하여 

한국 민족종교사에 한 획을 그었다.

천지공사는 큰병(大病)이 든 천하를 삼계대권을 주재하여 조화로써 천지를 개벽하고 

불로장생의 선경을 건설하려는 설계도이자 청사진이다. 보천교는 이러한 ‘9년 동안의 

천지공사’를 마친 강증산이 1909년 세상을 떠난 후 그 제자였던 차경석이 조직한 교단이다.


주지하다시피 한반도는 19세기 후반부터 호시탐탐 노려왔던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1910년 강점되면서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식민지 상황에서 기독교나 불교처럼 제도화되지 

못한, 더욱이 스승(교조)의 빈자리를 메우면서 이제 막 교단을 형성해 나가야 했던 제자(교주)의 운명은 험난할 수밖에 없었다. 명칭도 없었고 조직도 없었고 심지어 함께 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다. 증산을 따랐던 사람들조차 증산이 세상을 떠나자 실망에 가득 차 뿔뿔이 

흩어졌거나 냉담해 버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일제 식민권력은 강점 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종교단체 형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식민권력이라 하면 식민 종주국의 구성원이 식민지 지배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한 동화정책(다민족 통합과제)을 추진한 권력으로, 식민 모국의 관련조직 및 

식민지 관료조직 등으로 구성된다.

넓게는 총독(통감과 총독들)과 행정관료들, 경찰, 헌병 등 식민관료들 뿐만 아니라 일제에 

협력적인 언론 출판인들과 종교인들 및 친일 한국인들까지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들은 식민지 한국사회에 민족종교가 형성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식민지 상황에서 종교가 갖는 파괴력을 자신들의 역사(특히 메이지 시대) 경험에서 

충분히 인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보천교의 씨앗이 뿌려져 

활발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보천교의 출발은? 보천교란?

보천교의 출발은 언제로 봄이 타당할까? 그전에 먼저 ‘보천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구체적

 설명도 없이 막무가내로 ‘보천교의 출발’이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를 이야기 하면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해를 어렵게 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보천교에 대한 

상세한 이해는 독자들의 노력에 맡겨야 될 것 같다. 기획 글 전체가 그런 내용이고 보면 

하나하나 읽어나가면서 독자 스스로 보천교가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을 잡아나가는 것이 

좋은 듯하다.

대흥리의 '보천교중앙본소' 팻말이 걸린 문앞에서 답사에 나선 일본 중앙대학의 니시무라 교수와 김철수 교수

여기 출발하는 지점에서는 보천교의 의미를 간략하게 살펴보고 왜 ‘잃어버린’이란 수식어를 

덧붙였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그것이 본 칼럼을 끌어나가는 실마리이기 때문이다.

보천교의 출발을 찾을 경우, 증산의 유지를 계승하여 새로운 교단을 만들려는 의지를 

기준으로 본다면, 보천교는 증산이 세상을 떠난 1909년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연유에서 보천교 교단에서 펴낸 『보천교 연혁사』

(1948)도 1909년을 포교 1년으로 보았다.

프랑스의 종교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종교를 구성하는 4요소를 의례, 감정, 믿음, 조직으로 

보았다. 보천교 역시 의례를 행하고 교조에 대한 숭배감정과 정당화 신념으로 본다면 

1909년을 출발점으로 보는 것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다만 교조가 만들어 놓은 기존 교단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 아니고 새롭게 교의체계를 정하고 새로운 교단 조직, 곧 신자 공동체를 

형성해 나가는 것을 기준으로 본다면 문제는 다소 복잡하다.


증산 사후, 증산의 유지를 계승하는 교단들은 여러 분파로 나뉘어졌다. 보천교와 관련된 

교단으로 본다면 1911년 고판례(1880-1935)가 창립한 선도교를 최초의 교단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고판례는 강증산의 부인이며 차경석은 고판례의 이종동생이다. 1907년 차경석의

 집에 들렀다가 증산을 만났고 1909년 종통대권을 전수받아 1909년 이후 증산의 유지를 

받들면서 차경석과 함께 교단형성에 노력하였다. 그것이 선도교였다.


그러나 점차 의견차가 생기면서 차경석과 거리를 두게 된다. 차경석은 독자적인 활동을 하면서

 조직을 구성한다. 그 대표적인 형태가 1916년의 24방주 조직구성이다. 따라서 보천교의 

출발을 조직 구성으로 본다면 1916년 24방주를 조직하고 업무분장한 때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교단에는 교주와 신도가 사제의 관계처럼 형성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1921년 차경석을 공식적으로 ‘선생’으로 호칭한 때부터 사제지간의 관계가 형성되었다고 보고, 이 해를 기준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명칭으로 본다면 1922년 1월에 보천교라는 명칭을 등록·신고하고 서울에 보천교 서울출장소인 ‘보천교 진정원’이라는 간판을 내건 해로도 볼 수 있다

.

 물론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사안이 복잡하다는 

이야기이다. 각각의 기준도 문제가 없지는 않다. 대부분의 종교교단 형성이 그렇듯 명쾌한 

출발점을 찾기는 쉽지 않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래서 ‘잃어버렸다’는 뜻은 아니다. 

다소 복잡하긴 해도 분명히 교단형성은 1910년 일제 강점과 함께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강점 직후부터 조선민중의 사상과 행동이 ‘민족’이나 ‘독립’과 연결됨을 두려워했던 식민권력은

식민지 한국인의 동향을 일거수일투족 감시하였다. 더욱이 강점과 더불어 각종 사회단체들을

 전부 해산시킨 식민권력의 입장에서 종교단체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식민권력의 감시와 통제는 주도면밀하게 이루어졌다. 실체를 확인해서 민중과 분리했고 지식인을 동원하여 

내분을 일으키고 왜곡시켜 소멸하도록 공작했다.

그런 면에서 결론적으로 본다면 식민권력의 종교통제 정책은 성공했던 것이다. 식민지 

상황에서 엄청난 교세를 확보했던 보천교는 1936년 차경석의 사망과 함께 해체되어 버렸고, 

처음에 지적했듯이 해방 이후, 아니 현재 우리들의 기억 속에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기억하는 사람들조차 식민권력이 생성해 놓은 부정적 이미지로 남아있을 뿐이다. 친일과 

사이비 종교단체의 대명사로 말이다.

당시 보천교가 잘못한 죄라고는 일제강점기에 교단을 형성한 죄, 자칭·타칭 600만이라는 

수많은 조선민중과 함께 했던 죄, 그런 만큼 자금이 많았던 죄, 그리고 식민지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국외로 나가지 않고 국내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친 죄 밖에는 없는데도 말이다. 

물론 이런 죄 아닌 죄는 당시 식민권력에게는 심각한 위협을 가했던 요소들이었음은 사실일 

것이다. 보천교가 이 세상에 이름을 알린지 어언 100여년에 접어들었다. 이제 이러한 죄 아닌 죄를 끌러주고 보천교에 씌워진 왜곡된 이미지를 풀어주어야 할 때다. 그건 곧 보천교를 향한 

식민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시선을 걷어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