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우리역사 바로알기
국권침탈 후 일제의 만행
♥한국사 1910년 국권침탈 후 일제의 만행은
시간대 별로 세그룹으로 나눕니다.
첫번째 단
♥한국사
1910년 국권침탈 후 일제의 만행은 시간대 별로 세그룹으로 나눕니다.
첫번째 단계는 1910년 경술국치이후부터 1919년 3.1일 기미독립만세혁명까지 무단통치기라고 구분합니다.
두번째 단계는 1919년 기미년 이후부터 1930년대까지 한민족의 정신까지 말살하는 단계로서 문화통치기입니다. 기미독립운동으로 인하여 일제는 단순한 무단통치만으로는 우리민족을 영구통치할 수 없음을 깨닫고 정책적으로 민족문화와 역사정신을 말살하기위한 정책과 기관을 만듭니다.
일본왕의 특명으로 만들어진 조선총독부 직속기관이 바로 조선사편수회이며, 이곳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왜곡하여 식민사관인 반도사관의 기반을 확고하게 세우게 됩니다.
이때 조선사편수회에서 식민반도사관 확립하는 등에 반민족행위의 죄를 저지른 한국인으로는 최남선, 이병도, 신석호, 이능화 등이 있습니다.
세번째는 1930년대부터 일제는 중일전쟁을 염두에 두고서 우리나라를 병참기지화하면서 인적물적 자원수탈과 함께 민족말살정책을 시행한 때로 민족말살기에 해당됩니다.
1930년대에는 중일전쟁 이후부터 1945년 일제패망까지 본격적인 전시체제로 들어가면서 인적물적수탙과 더불어 생체실험과 위안부, 징용, 징병등의 강제동원이 이뤄진 때입니다.
일제시대의 왜곡된 대표적인 식민역사관인 일제반도사관은 지금까지도 우리역사를 반도사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서 우리의 혼과 역사정신을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두번째 문화통치기의 실상은 친일파를 육성시켜 우리민족을 서로 이간질시키며 분열시키려는 비열한 정책으로 일제의 민족기만술을 정책적으로 시행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본은 과거 역사적으로 나쁜 악행을 많이 저질렀지만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기미는 여전히 없으며 역사왜곡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현재 역사가 지금까지도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은 아시는지요?
아래 내용은 환단고기를 중심으로 답변한 내용 중 일제의 반도사관을 아직도 네이버에 고수하는 부류가 있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아픈 일제시대의 과거사 뿐 아니라 우리의 왜곡된 역사도 올바로 세워야 할 것입니다.
해방을 맞은지 60년이 넘은 오늘날까지 우리는 왜 일본의 역사식민지로서 남아야 하며, 또 그로 인하여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역사찬탈까지 당해야 하는가? 아래에 자세하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반도 식민사관들의 뿌리에 해당하는 이병도, 신석호의 과거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인용출처는 반민족문제연구소 윤재식님의 글이며, 결론은 현재의 역사교육과 사학계가 식민사관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신석호, 이병도 - 반민족 식민사학자에서 국사학계의 거두로]
신석호
1934 진단학회 발기
1945 국사관 관장
1949 문교부 편수국장, 고등고시 위원
1951 국사편찬위원회 사무국장
1958 한국사학회 이사장
1963 동학기념사업회 부회장, 대한민국문화훈장(대통령장) 수상
1974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이사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
신석호는 한국 사학계의 거두로서 사망 직전가지 활발한 활동을 했다. 1926년 경성제국대학 사학과에 입학하여 1929년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 들어가서 꾸준히 활동해서 해방되던 당시에는 수사관(修史官)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해방이 되자 재빨리 이병도(李丙燾), 김상기(金庠基) 등과 함께 임시 중등국사교원 양성소를 설치하여 교원 양성에 앞장서기도 했으며, 현재까지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국사편찬위원회를 창설시키는 데 1등 공신 역할을 했다.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성균관대학교, 영남대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이 밖에도 수많은 요직을 거치면서 한국 사학계의 제1인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이렇게 화려한 경력의 이면에는 친일 인사로서의 반민족적 행위가 자리잡고 있다. 친일파 처리 문제의 실패라는 한국현대사의 비극으로 인하여 신석호는 한국사학계의 권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는 다른 친일 인사들처럼 군국 일본을 찬양하는 글을 발표하거나 강연회를 통해 민중을 현혹시키거나 하는 가시적인 행위를 많이 하지는 않았다. 일종의 연구보국(硏究報國)으로서, 식민사관 창출에 일조함으로써 우리의 민족성을 근저부터 흔들어 놓았다. 역사의 왜곡은 물질적 수준인 착취의 범위를 뛰어넘어 민족 그 자체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해방은 왔고 그는 과거의 행적에 대해 죄가를 치러야만 했다. 그러나 역사는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고, 신석호 자신도 이 문제를 덮어 버렸다. 이제 그는 또다시 사학계에서 세력을 떨치기 시작했다. 한국현대사를 장식했던 독재 정권은 그에게 권위자로 군림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식민사관의 주역
일본은 한국의 식민지화를 역사적인 견지에서 정당화하려 했으니, 이러한 필요에서 나온 관점이 식민사관이다. 한국사의 전개 과정이 한민족의 자주적인 역량에 의해 자율적으로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외세의 간섭과 압력에 의해 타율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하는 타율성론과, 왕조의 교체 등에도 불구하고 사회경제구조에 아무런 발전도 가져오지 못했다고 설명하는 정체성론이 식민사관의 핵심이다. 이렇게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을 핵심으로 하는 식민사관을 제도적으로 창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가 조선사편수회이며, 그 대표적 성과물이 《조선사》라는 저서이다. 신석호는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가서 《조선사》 간행에 적극 기여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사(총35권, 1938년 완성)》의 성격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조선사》 편찬의 실무책임자인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는 {동아일보} 1925년 6월 13일자 신문에서 "한국은 동양 화란(禍亂)의 원천이 되어 있던 고로 동양의 평화, 인민의 복지 증진을 위하여 병합된 것이니 이 병합의 목적을 진실하게 편찬할 생각"이라고 편찬 의도를 밝힌 바 있다. 이러한 목적에 맞춰 나온 편찬 요강 중 하나가 편년체(編年體)이다. 일본은 《조선사》가 공명정대한 학술적 사서(史書)라는 것을 강조했는데, 이것을 가시적으로 보장해 주는 편찬 체제가 바로 편년체였던 것이다. 당시 사학계에 풍미되었던 실증사학을 보장해 주는 듯이 간주되었던 것이 편년체였는데, 이것의 근본적인 목적은 연도가 정확하지 않은 단군조선을 사서에서 제외시켜 버리려는 데 있었다. 또한 이 연장선에서 조선이 동북아시의 패권을 잡았던 삼국 시대 이전 시기를 왜소, 왜곡시키려 했던 데도 그 일단의 목적을 두었다. 실제로 《조선사》에는 이러한 목적이 관철되었다. 신석호, 이병도 등 당시 친일사학자들이 실증사학을 도입함으로써 역사학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 이면에는 일본의 식민 지배 이데올로기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조선사편수회는 사서 편찬을 이유로 자료를 독점하여, 군국 일본의 의도대로 취사선택해 《조선사》를 간행했으니 식민사관의 온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조선사편수회 설치 초기인 1920년대 중반에는 일본 소재 대학 출신들이 직원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나, 경성제대가 설치된 이후로는 이 대학 사학과 졸업생들이 주로 충당되었다. 신석호가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간 것은 바로 이 경우에 해당된다. 신석호는 1929년 경성제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곧바로 조선사편수회 촉탁(囑託)으로 기용되었고 1930년에는 수사관보, 1937년에는 수사관으로 승진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신석호가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간 시기의 사회 여론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1920년대 중반 조선사편수회가 《조선사》의 편찬을 기도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에서는 이 사건을 최후의 정신적 파탄으로 간주하고 공정한 사서의 편찬을 촉구하였다. 한편 조선인에 의한 역사 연구의 필요성을 역설하는가 하면 민족주의 사가들의 저술을 연재하는 등 자구책을 모색하였다. 최남선이 1928년 조선사편수회에 가입하자 민족주의 역사학자 정인보(鄭寅普)가 울분을 참지 못했다는 일화는 이미 항간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1929년 신석호의 조선사편수회 가입은 그의 역사 의식 결여를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다.
신석호는 친일학회에 가입하기도 한다. 경성제대와 조선사편수회 임원들이 중심이 된 친일학회 청구학회(靑丘學會)가 1930년에 조직되는데, 신석호는 여기서 위원직에 있으면서 실무를 담당했고, 학술지 {청구학총}에 몇 편의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렇게 신석호는 조선사편수회 등에서 연구보국에 힘쓰면서 식민사관의 창출에 직접 관여하여 우리 민족의 소멸에 일조했던 것이다.
● 국사편찬위원회 창립의 주역
8·15해방은 신석호의 신변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했다. 총독부 역사 왜곡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던 신석호는 해방 후에도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해방과 더불어 그는 이병도 등과 함께 임시 중등국사교원 양성소를 설치하여 교원을 양성하였다. 역사를 왜곡했던 장본이 바로 그 지식으로써 새로운 국가의 국사교원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또한 같은해 국사관의 관장이 되더니만, 정부 수립 이후인 1949년 3월에 이를 국사편찬위원회로 개편 조직하여 사무국장으로 취임하였다(1965년 퇴직). 당시 문교부 장관이 위원장을 겸임했으므로 사무국장인 신석호가 실질적인 책임자였다.
1958년 12월 이승만은 국사편찬위원회의 신석호 등을 경무대로 불러, 일제가 우리의 역사를 왜곡했으니 우리 역사상 독립 정신이 어려있는 사실을 구명(究明)하여 표준될 만한 학설을 세워 왜곡 선전된 것을 시정하라고 주문했다. 이에 따라 1960년 4월까지 전체 6권의 《국사상의 제문제》라는 저서를 간행했다(국사편찬위윈회사, 235∼236쪽). 그런데 이 자리에 참석했던 사람들을 보면 신석호를 위시해 조선사편수회에서 역사 왜곡의 주범을 활약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바로 이들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다는 명목하에(그것도 독립정신이 어려있는 사실의 구명이라는 면에서) 《국사상의 제문제》를 간행했던 것이다. 이들에게 이것을 주문한 이승만이나, 양심의 거리낌없이 선뜻 이 작업에 착수했던 그들이나 모두 우리 민족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1961년에는 일제하 항일 운동에 참여한 순국선열과 생존 지사에 대한 포상 계획이 확정되고, 그에 따른 공적 조사 업무가 국사편찬위원회에 넘어감으로써 아직도 우리의 역사는 친일 인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것은 1968년까지 지속되었다. 1962년부터는 독립운동사에 대한 편찬 계획에 들어가기도 했으니 이래서 나온 책인 《한국독립운동사》였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이와 같은 사업은 모두 신석호가 책임자로서 사무국장에 재임하고 있던 시기(1965년 퇴직)에 이루어졌다. 신석호뿐만 아니라 당시 그곳의 고위직은 대부분 친일 인사가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비극은 아직도 완전히 가셔진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신석호 등 식민사관의 주범들에 대한 완전한 구명이 이뤄지지 않았던 것도 한 이유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명백한 오류는 하루바삐 시정되어야만 한다. 구체적인 예로 여기서는 신석호와 관련하여 한 가지를 지적해보고자 한다.
현재의 국사편찬위원회는 과거야 어떻든 간에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국사학 관련 기구이다. 그런데 1990년 이곳에서 나온 《국사편찬위원회사》를 보면 어이없는 기록이 있다. 직원 명단의 재직 기간을 보면 조선사편수회의 경력도 포함하고 있다. 신석호로 예를 들어 보자면, 역대 사무국장 명단에서는 그의 재임 기간을 '(1929.4) 1946.9∼1965.1.21'로 표시하더니, 역대 퇴직(전출)자 명단에서는 그나마 괄호도 없애고 '1929.4∼1965.1.21'로 적어놓고 있다. 의도적이건 아니건 간에 이것만 놓고 본다면, 국사편찬위원회는 식민사관의 온상이었던 조선사편수회의 직접적인 연장이란 말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잘못은 결코 사소한 것으로 치부될 수 없다. 어떻게 본다면 우리 민족의 근현대 역사학은 식민사관의 극복과 궤를 같이 하여 발전해왔다. 그리고 그 작업은 아직도 채 끝나지 않은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사편수회의 부정과 극복이 아닌, 연장선으로서의 국사편찬위원회라고 해석될 수 있는 그러한 기록은 하루바삐 시정되어야만 할 것이다.
● 정권에 밀착한 민족주의자(?)
위에서 우리는 신석호가 일제에 의해 왜곡된 한국역사를 바로잡고자(?) 활동했던 것을 보았다. 그 예의 하나가 이승만의 지시에 의해 간행된 《한국독립운동사》에 적극 참여했던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책이 국사편찬위원회의 명의로 간행된 것이었다면, 다른 곳에서는 신석호 자신이 직접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새벽} 1955년 1월호에 실린 [국난극복사-대일투쟁편]에서는 임진왜란 당시의 우리 민족의 항일 운동을 다루더니, 1955년 12월 {사총} 1호에 실린 [한말 의병의 개황]에서는 본격적으로 근대의 항일 투쟁을 다루고 있다. "의병의 충의(忠義)는 실로 높이 평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 10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에 대한 연구 발표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이 작업에 착수한다는 것이다. 이유야 그럴듯하지만, 식민사관의 주역이 항일의병을 다룬다니 말이 안 된다. 그러더니 1962년에는 자신이 역사 왜곡에 몰두할 때 항일 투쟁에 앞장섰던 인사들을 다뤄 {양지}에 [합방 이후의 항일 투쟁]을 발표하기까지 했다. 반민특위가 와해되고 친일파가 재등장하여 주요 요직에 두루 참여하자 신석호도 본격적으로 민족사학자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학술 활동 이외에도 신석호는 민족주의자로 행세한다. 1954년에는 민충정공 기념사업회 이사로 임명되어 1959년에는 민충정공 영환신도비문을 직접 짓는다. 1955년 5월에는 애국가 작사가 조사위원으로, 1958년에는 독립기념사업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61년에는 이준열사 사인조사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더니 1963년에는 동학기념사업회 부회장으로 피선됨으로써 명실공히 민족주의자가 되었던 것이다. 급기야 친일 인사인 그가 1962년부터 1968년 독립유공자를 선정하기도 했고, 1980년에 다시 한 번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이제 신석호는 식민지 시대 항일 운동의 평가자로 나서면서 사회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고, 한국사학계의 거두로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그가 이렇게 득세할 수 있었던 것은 역대 정권과의 밀착 관계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승만 정권 당시 신석호는 정부가 필요한 한 국사관련 사업에 적극 참여했다. 위에서 살펴보았던 예 외에도 문교부 편수국장, 국기(國旗) 시정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더니, 한국전쟁 당시에는 육군본부 전사감실 편수관, 육군대학 강사 등을 두루 거쳤다. 전쟁 후에도 이승만 정권이 가장 친애하던 사학자의 한 사람으로 요직에 기용되었다. 그러다가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고 박정희 군부 독재가 등장하자 신석호는 역시 정권에 영합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여전히 행사할 수 있었다.
먼저, 그의 화려한 경력 중에서 군부 독재와 직접적인 밀착 관계를 드러낸 것을 보면, 1961년에 혁명재판사 편찬위원회의 위원으로 위촉되었고, 1963년에는 한국군사혁명사편찬회 고문으로 피선되는 등 화려한 활동을 보여 주더니,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63년 8월에는 박정희로부터 직접 대한민국문화훈장(대통령장)을 수여받았다.
1950년대 이승만 정권에 밀착해 활동했던 신석호는 박정희가 정권을 잡자, 재빨리 이승만을 비난하고 박정희를 찬양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박정희의 집권이 역사적 필연이라고 선전하는데, 이것이 잘 드러난 경우가 1962년 {최고회의보} 9호에 실린 [6·25와 우리 민족의 방향-반공특집]이다.
이 글에서 신석호는 먼저 6·25 발발의 근본 원인을 소련 공산주의자들의 세계 제패 야욕에 두고, 반면에 미국은 '자유스럽고 살기 좋은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진주한 것'으로 보고는 박정희의 쿠데타를 역사적 필연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한 대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나라는 조선 왕조 후반기 약 3백년간 당파싸움으로 사회가 부패하여 결국 일제의 침략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특히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고 있는 우리로서는 더욱 일치단결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올바른 정치를 해나가야 할 터인데 해방 직후부터 민족 진영은 사분오열하여 서로 헐뜯고 정권과 이권을 획득하기에 혈안이 되었고 대통령 이승만은 유아독존의 망상에 사로잡혀 국민을 무시하고 독재 정권을 수립하기에 급급하였고…… 4·19혁명으로 인하여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으나 그들도 또한 부패하고 부정 불법을 감행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유당보다도 무능하여 공산간첩과 용공주의자들이 판을 쳐도 수수방관하여 대한민국의 장래가 매우 위험하게 되었으므로 박정희 의장을 중심으로 한 국군장병이 일어나 5·16군사 혁명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59∼61쪽).
이와 같이, 신석호는 이승만 정권과 밀착 관계를 유지하다가 박정희가 권력을 잡자 그것의 역사적 필연성을 주장하면 자신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했다.
● 끝나지 않은 역사의 심판
신석호가 아무리 민족주의 사학자로 해방 후 행세했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그가 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에 가입하여 친일행각을 벌인 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이 점은 여러 가지 기록을 통해서도 남아 있다. 이 점에 관하여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해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신석호에 관련한 여러 기록을 보면 그의 친일행위에 대한 해명은 없고, 면죄부라 간주되는 기록이 있어 주목된다.
우리 역사학계는 일제의 패전 직후 그들이 강점 소유하고 있던 귀중한 민족사료의 파괴와 반출을 막고 보존하여야 할 시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러 명의 뜻있는 인사들이 이를 위하여 발벗고 나서게 되었다. 그 좋은 예가 조선사편수회에 근무하고 있던 신석호, 김건태 양씨의 희생적인 노력이었다.(《국사편찬위원회사》, 56쪽).
이 '희생적인 노력'이란,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 공사관 기록의 사진 원판 4만 4천 매와 기타 중요 사료를 대피 보관하여 학계에 이바지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행위는 의의있는 일이라 할 만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신석호의 행위가 근 15년간 식민사관의 창출에 일조한 그의 친일행위를 정당화시켜 주거나, 혹은 그 죄값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그의 친일행위는 그것대로 객관적으로 구명되어져야만 할 것이며, 그가 중요 문서를 보존했던 행위는 그 행위대로 정당하게 평가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행위는 과대포장되어 평가되고, 친일 부역행위는 일방적으로 은폐되었다는 데 한계가 있다. 앞서도 보았듯이 1960년대까지 신석호는 전혀 자신의 과거 행적에 대해 반성의 빛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1970년대에 와서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이제 그는 공개적으로 떳떳하게 일제의 만행과 그 처리 문제 등을 언급한다.
여기서 반드시 따지고 넘어가야 할 것은 36년간에 걸친 일제 식민지 통치가 남긴 유산을 정리해 보는 일이겠지요.……또 하나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해외교포의 귀환이라든가 친일파의 처리 문제 등으로 우리 민족의 커다란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으며 문화적으로는 언어를 말살하고 창씨개명, 동방요배(東方搖拜) 등을 통하여 민족정신이 가물가물했습니다. 이 외에도 우리가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유산은 많이 열거할 수 있지요([한국과 일본의 좌표], {세대}, 1970년 8월호.)
일제가 남긴 유산을 정리해야 하고, 친일파 처리 문제도 남아있다고 떳떳하게 말하는 신석호를 누가 친일 인사였다고 의심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민족정신을 말살하려 했던 일제의 만행을 말하는 대목에 와서는, 그가 식민사관의 주범이었다고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지경이다.
어쨌든 일제 시대부터 제5공화국에 이르기까지 정권은 여러 번 뒤바뀌었지만, 신석호는 내내 역사학계의 거두로서 행사했다. 그가 사망한 지 10년이 넘은 지금에서야 그의 친일행각과 해방 후 행적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근현대사의 또 다른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직도 이것은 걸음마 단계이다. 식민사관에 봉사했던 인사들의 행적과 그들이 남긴 역사의 왜곡을 완전히 규명하고, 잃어버렸던 역사의 진실을 찾을 때만이 우리 민족의 비극은 마감될 수 있을 것이다.
#윤재식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
'놀라운 공부 > 우리역사 바로알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민족의 운명 (0) | 2018.09.04 |
---|---|
♥대종교가 세운 민족 대학 홍익학원 (0) | 2018.09.03 |
유불선(유교,불교,기독교) (0) | 2018.09.03 |
동북아의 시원 문명, (0) | 2018.09.03 |
신지비사 (0) | 2018.07.23 |
'놀라운 공부/우리역사 바로알기'의 다른글
- 현재글국권침탈 후 일제의 만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