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한 서역 지역 왕이 “바실라(신라)는 파라다이스처럼 아름다운 곳이며, 침략으로부터 안전하다”며 추천 편지와 함께 신라로 가는 뱃길을 알려줍니다.
천신만고 끝에 신라를 찾아간 아비틴 일행은 신라왕 타르후르로부터 큰 환대를 받았습니다. 아비틴은 신라 왕자 가람과 둘도 없는 친구가 됐고, 신라 공주 프라랑과 결혼해 아들 파리둔도 얻게 됩니다. 신라는 그야말로 약속의 땅이었던 셈이죠.
이란에 전해져 내려온 중세 서사시 『쿠쉬나메』의 주요 내용입니다.
『쿠쉬나메』는 수 백 년 동안 현실성 없는 ‘판타지’로 취급받다가, 20세기 후반부터 재조명을 받게 됩니다. 이 서사시의 비밀을 벗길 동방의 한 설화가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왕이 개운포(開雲浦, 지금의 울산항)에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길을 잃고 말았다. 일관(日官)의 조언에 따라 절을 세우도록 하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다. 동해의 용이 기뻐하며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 앞에 나타나 기이한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 중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라벌로 들어와 정사를 도우니, 이름은 처용(處容)이라 하였다.” (『삼국유사』-「기이」)
『삼국유사』에 의하면 처용은 헌강왕 때 뱃길을 따라 울산항에 들어온 외국인입니다.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처용무(處容舞)와 역사 기록을 보면 처용은 얼굴이 검고 눈이 깊으며 코는 매부리코로 오래전부터 서역인이라는 가설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처용이 신라에 나타난 시기(879년)가 흥미롭습니다.
이 시기는 당나라 황소의 난(875~884)이 한창이던 때입니다. 특히 879년엔 황소가 이끄는 반란군이 최대 무역도시 광저우를 점령해 약탈과 살육을 벌였습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광저우에서 10만 명의 외국인이 살해됐는데 이곳에 집단 공동체를 형성한 아랍-페르시아계 무슬림들이 대거 희생됐다고 합니다. 『쿠쉬나메』에서 페르시아 왕자 아비틴 일행이 신라로 피신하게 된 계기가 된 사건입니다.
이렇게 페르시아와 신라의 두 설화가 결합하면서 퍼즐이 조금씩 맞춰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페르시아의 멸망과 황소의 난은 시간대가 딱 들어맞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산조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자 피루즈가 중국으로 망명해 항쟁을 지휘했던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쿠쉬나메』가 12세기에 완성되다 보니 여러 시기에 걸쳐 벌어진 사건들이 압축돼 섞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러 정황을 고려해보면 처용은 ①페르시아의 마지막 왕자를 따라 중국에 정착했다가 ②황소의 난 때문에 신라로 건너간 난민 집단에 속했던 한 인물로 추정됩니다.
그렇다면 처용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일단, 왕자를 따라 망명한 일행이라면 페르시아에서 지도층에 속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삼국유사』에서 “왕은 (처용에게) 예쁜 여성을 아내로 삼게 하고, 급간(級干) 관직도 주었다”고 하는데 급간은 신라에서 성골·진골 다음으로 높은 계급인 6두품만이 받을 수 있는 관직입니다.
처용은 훗날 서라벌에 전염병을 퍼뜨린 ‘역신’ 처치한 것으로 유명한데, 이것은 아마도 당대 최고 수준이었던 중앙아시아의 의학지식 덕분으로 보입니다.
이래저래 처용의 신분이 범상치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실제 왕실의 후예였던 건 아닐까요?
신라에서 3개 성씨가 번갈아 왕을 했다는 것도 이를 방증합니다. 특히 3대 시조 중 하나인 석탈해 설화는 이런 과정을 비교적 소상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석탈해는 왜국의 동북쪽 1000리 떨어진 다파나국에서 태어났다. 다파나국 왕의 부인이 큰 알을 낳았다…여자는 비단으로 알을 싸서 보물과 함께 궤짝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웠다… 처음에 금관가야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다. 다시 아진포(지금의 영일만) 어귀에 다다랐을 때 바닷가에 있던 할멈이 궤짝을 열어보니 어린아이가 있어 거두어 길렀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석탈해가 한반도 외부에서 왔다는 점은 “왜국의 동북쪽 1000리”라는 점에서 확실합니다. 학계에선 러시아 오호츠크해 연안의 캄차카 반도를 꼽고 있습니다. 물리적 거리도 거리지만 이 지역에서 석탈해와 관련이 깊은 까치 아이의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까마귀 남자와 결혼한 여인이 까치 알을 낳자, 이 알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바다 멀리 보내버렸다는 내용입니다.
『삼국사기』 석탈해 설화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궤짝이 도착했을 때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 울면서 따랐다고 하여 ‘까치 작(鵲)’에서 ‘새 조(鳥)’를 빼고 석(昔)을 성(姓)으로 삼고, 궤짝을 열고 나왔으므로 이름은 탈해(脫解)라고 했다.”
이를 『삼국유사』-「가락국기」는 더 상세하게 전해줍니다. 석탈해가 금관가야에 나타나 김수로왕에게 나라를 넘기라고 요구했지만, 김수로왕이 거절하자 술법 대결까지 벌였다가 패배한 뒤 신라로 달아났다는 겁니다. 이 때 "김수로왕이 석탈해를 쫓아가려고 군선 500척을 띄웠다"는 것을 보면 석탈해가 꽤 많은 무리를 데리고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텃세를 과시한 김수로 역시 인도에서 건너온 허황옥과 결혼해 나라를 세웠습니다. 허황옥 세력과의 결합을 통해 발전할 수 있었던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