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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의 역사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8. 10. 19. 00:05

검은 얼굴에 매부리코 처용…첫 이민은 페르시아 무슬림?


  

유성운의 역사정치㉑
 7세기 중엽 사산조 페르시아가 이슬람 제국의 침공으로 멸망합니다.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자 아비틴은 중국 당나라로 망명해 저항세력을 이끌죠. 하지만 얼마 후 당나라마저 극심한 정치적 혼란에 빠지자 아비틴은 고민에 빠집니다.
이때 한 서역 지역 왕이 “바실라(신라)는 파라다이스처럼 아름다운 곳이며, 침략으로부터 안전하다”며 추천 편지와 함께 신라로 가는 뱃길을 알려줍니다.
천신만고 끝에 신라를 찾아간 아비틴 일행은 신라왕 타르후르로부터 큰 환대를 받았습니다. 아비틴은 신라 왕자 가람과 둘도 없는 친구가 됐고, 신라 공주 프라랑과 결혼해 아들 파리둔도 얻게 됩니다. 신라는 그야말로 약속의 땅이었던 셈이죠.
이란에 전해져 내려온 중세 서사시 『쿠쉬나메』의 주요 내용입니다.
 

『 쿠쉬나메』의 필사본에 등장하는 삽화. 아비틴이 신라왕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장면 [중앙포토]

『쿠쉬나메』는 수 백 년 동안 현실성 없는 ‘판타지’로 취급받다가, 20세기 후반부터 재조명을 받게 됩니다. 이 서사시의 비밀을 벗길 동방의 한 설화가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쿠쉬나메』와 『삼국유사』의 만남

“왕이 개운포(開雲浦, 지금의 울산항)에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길을 잃고 말았다. 일관(日官)의 조언에 따라 절을 세우도록 하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다. 동해의 용이 기뻐하며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 앞에 나타나 기이한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 중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라벌로 들어와 정사를 도우니, 이름은 처용(處容)이라 하였다.” (『삼국유사』-「기이」)

 
『삼국유사』에 의하면 처용은 헌강왕 때 뱃길을 따라 울산항에 들어온 외국인입니다.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처용무(處容舞)와 역사 기록을 보면 처용은 얼굴이 검고 눈이 깊으며 코는 매부리코로 오래전부터 서역인이라는 가설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처용의 모습일까. 서역인의 얼굴을 한 경주 괘릉 무인석상의 모습. 신라에는 무슬림들이 다수 왕래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경상북도]

그런데 처용이 신라에 나타난 시기(879년)가 흥미롭습니다.
이 시기는 당나라 황소의 난(875~884)이 한창이던 때입니다. 특히 879년엔 황소가 이끄는 반란군이 최대 무역도시 광저우를 점령해 약탈과 살육을 벌였습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광저우에서 10만 명의 외국인이 살해됐는데 이곳에 집단 공동체를 형성한 아랍-페르시아계 무슬림들이 대거 희생됐다고 합니다. 『쿠쉬나메』에서 페르시아 왕자 아비틴 일행이 신라로 피신하게 된 계기가 된 사건입니다.
 
이렇게 페르시아와 신라의 두 설화가 결합하면서 퍼즐이 조금씩 맞춰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페르시아의 멸망과 황소의 난은 시간대가 딱 들어맞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산조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자 피루즈가 중국으로 망명해 항쟁을 지휘했던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쿠쉬나메』가 12세기에 완성되다 보니 여러 시기에 걸쳐 벌어진 사건들이 압축돼 섞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러 정황을 고려해보면 처용은 ①페르시아의 마지막 왕자를 따라 중국에 정착했다가 ②황소의 난 때문에 신라로 건너간 난민 집단에 속했던 한 인물로 추정됩니다.
 

처용무의 한 장면. 처용의 외모는 한반도 토착인의 얼굴과는 거리가 멀다. [중앙포토]

그렇다면 처용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일단, 왕자를 따라 망명한 일행이라면 페르시아에서 지도층에 속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삼국유사』에서 “왕은 (처용에게) 예쁜 여성을 아내로 삼게 하고, 급간(級干) 관직도 주었다”고 하는데 급간은 신라에서 성골·진골 다음으로 높은 계급인 6두품만이 받을 수 있는 관직입니다.
처용은 훗날 서라벌에 전염병을 퍼뜨린 ‘역신’ 처치한 것으로 유명한데, 이것은 아마도 당대 최고 수준이었던 중앙아시아의 의학지식 덕분으로 보입니다. 
이래저래 처용의 신분이 범상치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실제 왕실의 후예였던 건 아닐까요?
 
신라의 건국설화에 담긴 유이민 스토리
사실 한반도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교차하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오래전부터 다양한 무리가 끊임없이 유입됐습니다. 한반도 토착민들은 새로운 기술을 갖춘 유이민들과 협력해 국가를 건설했습니다.
신라에서 3개 성씨가 번갈아 왕을 했다는 것도 이를 방증합니다. 특히 3대 시조 중 하나인 석탈해 설화는 이런 과정을 비교적 소상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석탈해는 왜국의 동북쪽 1000리 떨어진 다파나국에서 태어났다. 다파나국 왕의 부인이 큰 알을 낳았다…여자는 비단으로 알을 싸서 보물과 함께 궤짝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웠다… 처음에 금관가야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다. 다시 아진포(지금의 영일만) 어귀에 다다랐을 때  바닷가에 있던 할멈이 궤짝을 열어보니 어린아이가 있어 거두어 길렀다.” (『삼국사기』-「신라본기」)

 

경주 동산 인근에 위치한 석탈해 왕릉. [중앙포토]

석탈해가 한반도 외부에서 왔다는 점은 “왜국의 동북쪽 1000리”라는 점에서 확실합니다. 학계에선 러시아 오호츠크해 연안의 캄차카 반도를 꼽고 있습니다. 물리적 거리도 거리지만 이 지역에서 석탈해와 관련이 깊은 까치 아이의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까마귀 남자와 결혼한 여인이 까치 알을 낳자, 이 알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바다 멀리 보내버렸다는 내용입니다.
『삼국사기』 석탈해 설화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궤짝이 도착했을 때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 울면서 따랐다고 하여 ‘까치 작(鵲)’에서 ‘새 조(鳥)’를 빼고 석(昔)을 성(姓)으로 삼고, 궤짝을 열고 나왔으므로 이름은 탈해(脫解)라고 했다.”

[유성운의 역사정치]
유이민과 토착민의 갈등 그리고 협력
물론 외부 세력이 들어올 때 두 팔 벌려 환영만 한 것은 아닙니다. “(궤짝이) 처음에 금관가야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다”는 내용에서 유추할 수 있죠. 석탈해 세력이 당초엔 가야 지역에 정착하려 했지만 이미 터를 잡고 있던 김수로 세력과 충돌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를 『삼국유사』-「가락국기」는 더 상세하게 전해줍니다. 석탈해가 금관가야에 나타나 김수로왕에게 나라를 넘기라고 요구했지만, 김수로왕이 거절하자 술법 대결까지 벌였다가 패배한 뒤 신라로 달아났다는 겁니다. 이 때 "김수로왕이 석탈해를 쫓아가려고 군선 500척을 띄웠다"는 것을 보면 석탈해가 꽤 많은 무리를 데리고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텃세를 과시한 김수로 역시 인도에서 건너온 허황옥과 결혼해 나라를 세웠습니다. 허황옥 세력과의 결합을 통해 발전할 수 있었던 거죠.

삼국유사 목판 복원에 최연소 본각수로 참여하는 박웅서(45)씨의 책상에 작업 중인 목판이 놓여 있다. 2016.01.22 / 군위=프리랜서 공정식

 
신라의 모체가 된 진한(辰韓)의 기록은 한반도 유이민의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게 합니다.
4세기에 진수가 지은 『삼국지(三國志)』-「한전(韓專)」에는 “진한의 노인들이 대대로 전하며 말하기를 ‘우리는 옛날의 망명인으로 진(秦)나라의 고역(苦役)을 피하여 한국으로 왔다. 마한이 그들의 동쪽 지역을 분할해 우리에게 주었다’고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혹독했던 만리장성 건축 공사에서 도망친 진나라 사람들이 흘러 흘러 지금의 경상도 지역인 진한까지 갔던 모양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진한(辰韓)이라는 명칭도 진나라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진한의 진(辰)과 진시황이 다스린 진(秦)나라는 한자가 다르긴 합니다.
하지만 우리 측 기록에도 비슷한 내용이 담긴 것으로 보아 이 구전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중국 사람 중 진나라의 난리를 견디지 못하고 동쪽으로 온 자가 많았는데, 마한의 동쪽에 많이 살면서 진한과 섞여 살았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시황제가 추진한 만리장성 공사. 많은 역사서는 진나라의 고역을 피한 중국인들이 고조선과 진한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현재의 만리장성은 명나라 때 증축한 것이다. [중앙포토]

유이민과 토착세력이 함께 건국한 나라

이처럼 우리 건국 설화의 특징 중 하나는 이주 혹은 난민 세력이 토착세력과 힘을 합쳐 나라를 세운다는 점입니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은 부여에서 도망쳐 졸본에 나라를 세웠습니다. 백제도 유사합니다. 주몽의 친아들 유리가 나타나자 온조가 남쪽으로 이동해 건국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MBC 드라마 '주몽' 제작현장, 송일국 (주몽) [중앙포토]

민족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단군은 또 어떻습니까. 천제의 아들인 환웅이 3000명을 거느라고 내려와 웅녀와 결혼해 단군을 낳았습니다. 외부에서 이주해온 환웅족과 곰을 섬기는 부족의 결속으로 고조선이 건국된 과정을 담고 있는 것이죠.
 
한 가지 첨언하자면 우리는 흔히 단군의 자손이라고 말하지만, 삼국의 건국 시조 중 누구도 자신을 단군과 연결 지은 적이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런 의식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앞서 살펴봤듯이 한반도의 고대사는 단일 민족이 아니라 이런저런 이유로 한반도에 들어온 여러 구성원이 함께 만들어 갔으니까요.
 

1997년 10월 3일 개천절을 맞아 강화도 마니산 첨성단에 열린 `제천제(祭天祭)` [중앙포토]

다른 민족의 건국 설화도 외부에서 온 영웅이 주인공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토착세력이 건국한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토박이 사상이 강했던 고대 그리스 아테네를 보면, 아테네의 전설적인 왕 에레크테우스는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의 정액이 떨어져 땅에서 태어난 아이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고 땅에서 솟아났다는 것은 토착 세력을 의미합니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기원전 5세기부터 '토박이(autochthon)'라는 단어가 쓰였는데 '땅에서 솟아났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고대 아테네의 영광을 상징하는 파르테논 신전. [중앙포토]

최근 제주도에 들어온 예멘 난민을 놓고 찬반 논란이 가열되고 있습니다.
사실 한국은 난민을 인정하는 데 엄격한 편입니다. 1994년 난민법이 제정된 이후 작년까지 23년 동안 국내 난민 신청 건수는 3만2733건이지만 이중 인정된 것은 706건에 불과합니다. 일부에선 민족의식이 강해 타민족의 유입에 대해 배타적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이들을 수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지만 한 번 받아주면 향후 계속해서 난민들이 유입될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습니다. 일각에선 이슬람이라는 종교적 특성에 대해서도 염려합니다. 
무엇보다 20세기 들어 인구가 폭증하고, 자원 고갈이 심화되면서 전반적으로 세계 각국이 유이민에 대해 점차 엄격해지는 분위기입니다. 그동안 온건한 정책을 펴온 유럽조차도 최근엔 문을 닫고 있으니까요. 정부의 고민이 깊어지는 대목입니다.
 
천 오백년 전 신라를 찾아온 난민, 아비딘 일행은 어떻게 됐을까요.
『쿠쉬나메』의 결말은 이렇습니다.
신라의 보호 아래 아비딘과 신라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파리둔은 훗날 조국으로 돌아가 나라를 되찾고 페르시아의 영웅이 됩니다. 이후, 자신을 도와준 신라를 어머니의 나라이자 ‘은인의 나라’로 받들어 양국은 영원한 우호를 다지게 됩니다.
이런 해피엔딩은 중세의 서사 문학에서나 가능한 일일까요.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이희근 『고대, 한반도로 온 사람들』, 김화영 『석탈해 신화의 연구』, 이희수 『이슬람과 한국 문화』, 김종성 『신라 왕실의 비밀』, 최혜영 『고대 아테네의 혈족 집단 신화와 외교술』, 『그리스 비극 깊이 읽기』를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유성운의 역사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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