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정원 자천수도법(수련,수행법)
지금까지는 스승없이 모든 법을 수용하며 혼자서 자립하는 법으로 공부를 해 왔고 구체적으로 실행할 수련,수행법인 일명 자천법을 선택하여 행할 단계가 되었다고 판단이 되어 여러 도학님들에게 안내하겠습니다.우리카페의 메뉴에 이 분들의 글과 강의를 올렸으나 구체적인 공부로서 선정,정리하여 올리오니 뜻이 있는 분들의 공부의지를 촉구합니다.
일단은 공부법은 머리,가슴,배로 크게 분류하여 수만가지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호흡법과 호수(주문)을 근간으로 올립니다.아래의 선생님들은 직간법적으로 제가 검증한 분들이며 여러해 동안 연구,수련을 통한 것이니 안심하시고 공부를 하셔도 좋겠습니다.
아래 선생님들의 공부법은 개략 다음의 부분에서 소개를 하려고 합니다.
현일 박재봉 선생님
-현일 선생님 소개
1972년에 태어나 충북 영동군 양산면에서 자라다가 초등학교 5학년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았다.중학교 2학년때 소설 "단"을 읽고 이것이 내가 원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길로 가기로 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생각보다 어려웠는데 별다른 거의 느낌이나 체험이 없었고 그저 그런상태로 지내다가 고등학교때 호흡의 잘 못으로 단전의 기운이 옆으로 새어 여러 수련과 방법들을 기웃거리다가 호흡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알게 되어 그것으로 했지만 그것 역시 도와는 먼 과정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또 없는 돈을 쪼개어 몇권의 책을 보면서 인식의 지평을 엿보았지만 그것과 내 수련과의 연결점을 찾지 못했다.
98년 외삼촌과의 만남으로 수련의 방향을 바꿀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효과가 있어 수련이 급진전하게 되었지만 개인적으로 득도의 순간은 없었던 것 같다.
그후 내 도덕을 이해하려 애쓰고 세상과의 접목을 생각해 왔지만 뚜렷한 방법을 찾지 못하다가 이젠 작은 결실들이 생겨나 또 다른 득도의 감정이 생긴다.
위 소개글은 가마오 출판사에서 2012년에 현일 선생님을 소개한 것인데
현재는 8권의 책을 출간했으며 곧 4권이 추가로 출간에 착수하였음을 알려드리며 그 책을 중심으로 많은 수행,수도자들이 수행의 지침서로 활용하고 있으며 계제자가 다수 배출되었습니다.향후 우리카페에서도 수행방법으로 소개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음,감정,의식,철학,수도법,천원계 공부법,우주론,창조론,공부계제
-현일 선생님 공부법의 특징
언뜻 보기에 초 고단자의 풍모를 잘 모를 수 있습니다.현재 동서양의 수련,수행의 공부법과 철학적 사고의 근원인 마음,의식,생각,성향의 작용이 공부하는 수행자에게 전달하는 메시지가 자신의 심층을 일깨워 근원으로 가는 법을 자신이 경험한 수행기를 세세하게 정리를 하여 최고의 단계로 올라갈 수 있는 방법들을 안내하고 가르침에 그 깊이를 알고 실천하기에 모두들 선뜻 마음을 못내는 것 같기도 하다.
제 자신도 공부에 접근하기까지 수년이 걸렸으니 말입니다.
실제 책을 접하고나서 공부법에서 심오함이 흘러나왔다.비록 내 자신이 공부한 글과 내용은 아니지만 믿음과 확신을 했으며 여러분들께 알려서 같이 공부했으면 해서입니다.내용이 너무 방대하여 일일이 소개하는 것 보다.책으로의 안내가 더 적절할 것으로 판단되어 책을 안내할까 합니다.
가마오출판사
http://cafe.daum.net/Gamao/KUdo/12
봉우 권태훈 선생님
봉우(鳳宇)權泰勳선생님 소개
◈ 연보(年譜) (1900∼1994)
1900년(庚子): 1세
경자(庚子:1900년) 음력 정월 20일 서울 재동(齋洞) 출생. 본관(本貫) 안동(安東). 자(字)는 윤명(允明) 또는 성기(聖祈), 아명(兒名)은 인학(寅鶴). 부친은 당시 대한제국의 내부(內部) 판적국장(版籍局長) 취음(翠陰) 권중면(權重冕)으로, 선생은 45세의 나이에 얻은 외아들이었음.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명신(名臣)이자 대학자였던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선생의 17대조요, 임진왜란의 구국명장(救國名將) 권율(權慄)이 11대조. 호(號)는 여해(如海), 봉우(鳳宇), 물물자(勿勿子), 연연당(然然堂).
1903년(癸卯): 4세
한학(漢學) 배우기 시작.
1904년(甲辰): 5세
고종황제 배알. 황제가 베푼 덕수궁연회에 부모와 함께 참석하여 사배(四拜)를 올리고 [황제폐하만세] 삼창[이것을 산호(山呼)라 함]. 부친은 대한제국 중추원(中樞院) 칙임의관(勅任議官)으로 재직. 집안 대소가(大小家) 모두 전성시대였음. 일로(日露)전쟁 발발. 모친은 숙부인(淑夫人) 경주김씨(慶州金氏). 절충장군상호(折衝將軍商浩)의 여(女). 부친, 이후 법부(法部) 검사국장(檢事局長), 한성재판소 판사비서원승(判事秘書院丞), 시종원(侍從院) 시종, 고등재판소 판사, 법원비서관 등을 역임. 신축년(1901)에 평산(平山)군수, 칙임의관(勅任議官), 을사년(1905) 봄에 진도군수, 정미년(1907) 능주(綾州)군수 역임. 고종황제 때인 을미년(1895) 출사(出仕:벼슬에 나감)하여 내외직(內外職) 두루 지냄.
1905년(乙巳): 6세
부친, 봄에 진도(珍島) 군수로 외임(外任:외직임명). 정배(定配:귀양감)중이던 당시 소론팔재사(少論八才士)의 한 사람인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 선생께 한학(漢學) 수학(受學), 사서(四書) 읽음. 일로(日露)전쟁, 일본의 승리로 끝남. 일본과 을사보호조약 체결됨. 당시 농상대신(農商大臣)으로 여기에 서명한 둘째 백부(伯父) 권중현(權重顯)과 그 아우였던 부친은 진도에서 서신으로 대의명분(大義名分)을 논하다 필경은 단의(斷義:형제의 의를 끊음). 모친에게 민족고유 정신수련법인 조식법(調息法)을 처음으로 배움. 모친은 아들에게 한학 공부를 더 잘하기 위한 방법을 가르쳐준다며 기억력증진법으로써 소개하였다 함.
1906년(丙午): 7세
진도에서 보냄.
1907년(丁未): 8세
사서삼경(四書三經)과 13경(十三經)을 포함하여 수백권의 경서(經書)를 읽음. 집안 상경(上京). 부친, 능주(綾州)군수로 부임.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이후 고종황제가 강제퇴위 당하자 벼슬 버리고 다시는 관계(官界)에 나서지 않음.
1908년(戊申): 9세
부친, 토혈증(吐血症)으로 위중한 가운데에서도 선서(善書:도교경전) 인간(印刊)에 전력을 다함.
1909년(己酉): 10세
벽진(碧珍) 이씨(李氏) 친영(親迎:결혼), 성가(成家). 서울 종로 마동(麻洞) 단군교(檀君敎:현 대종교) 포교당(布敎堂)에서 우연히 도사교(都司敎) 나철(羅喆) 선생을 뵙고 수교(受敎:가르침을 받음). 이후 일평생의 정신적 뿌리로 삼음.
1910년(庚戌): 11세
한일합병으로 대한제국 멸망. 부친, 충북 영동(永同)으로 낙향. 처음엔 영동읍 금리(錦里)로 갔다가 다음해 영동읍 남당리(南堂里)로 이사.
1911년(辛亥): 12세
영동(永同)보통학교 2학년 편입. 교사들로부터 수학의 천재라는 칭찬 받음. 3년간 통학. 영동의 천마산(天磨山) 삼봉(三峯) 정상에서 소학교 동창 이홍구(李洪龜), 안명기(安明基), 지도교사 박창화(朴昌和) 선생과 함께 민족독립과 세계최강국 건설 및 세계평화에 헌신할 것을 맹세. 보통학교생으로서 일본유람단에 끼여 처음으로 외국문물에 접함. 당시 영동보통학교의 학생년령은 최고 35세에서 최소 12세, 교장은 일인(日人) 판정산일(坂井散一). 한문(漢文), 수학, 조선어, 습자(習字), 수신(修身) 과목을 배움. 특히 한국인 교사인 박창화(朴昌和) 선생께 애국심을 배움.
1912년(壬子): 13세
백부(伯父:큰아버지) 하세(下世). 실인(室人:아내) 조요(早夭:일찍 죽음). 평해(平海) 황씨(黃氏) 재영(再迎:재혼). 소년시대의 불행이었음. 민족선도계(民族仙道界)의 거인(巨人)이신 우도방주(右道坊主) 김일송(金一松) 선생을 충북 영동에서 처음으로 만나뵘. 이때 일송 선생은 병객(病客)으로 부친의 사랑방에 머물고 있었고 봉우 선생은 병간호를 극진히 하였다 함.
1913년(癸丑): 14세
영남(嶺南) 유림(儒林)의 태두(泰斗)인 면우(I宇) 곽종석(郭鍾錫) 선생 배알(拜謁). 곽선생과 부친과는 친교가 있었으므로 가끔 서신왕래가 있었고, 이 해에 직접 부친의 서신을 휴대하고 처음 찾아뵈었다 함.
1914년(甲寅): 15세
가도(家道:가세) 아주 패함. 보통학교 졸업. 당시 도변(渡邊) 교장의 추천으로 경성제일고보에 무시험 입학되었으나 부친의 불허로 좌절. 선생 자신은 부친의 반대이유 외에 전문부(專門部:대학) 입학을 목표로 진학 하지 않았으나 부친의 중병(重病)과 이듬해 모친의 중병으로 결국 진학을 포기하게 됨. 이것이 자신의 용단성(勇斷性) 부족으로 일생의 진로를 그르친 것이며, 부모의 간병(看病) 이유로 어찌 유학(遊學)할 수 있겠는가 하는 선입감으로 미래의 낙후(落後)를 자감(自甘)한 것이었다고 회고(1964년 일기 중).
부친의 병환이 한때 위중하였으나 유의(儒醫) 이규신(李圭信) 선생의 처방으로 신효(神效)를 봄. 재차 일본 입국. 대판(大阪) 조일신문(朝日新聞)에 난 광고를 보고, 당시 일본 기합술계(氣合術界)를 풍미하던 태영도(太靈道)의 전중수평(田中水平)과 심리학자로 대일본최면술협회의 대가였던 전궁형(田宮馨), 세계정신○○도(道)의 고옥철석(古屋鐵石)1 및 당시 일본 정신계의 태두(泰斗)였던 원선불(原仙佛:하라)2, 그 제자 기바라(木原鬼佛)3, 최면술 박사 궁기옹(宮崎翁) 등 수십여 명과 교유(交遊).
특히 기바라의 금계학원(金鷄學院:동경 소재)에 머물며 기바라 선생의 특별후원과 배려(제자들 교육 현장을 견학토록 함)를 받았다. 시코쿠[四國]에 있는 송강도장(松江道場)에서 정신도계(道階) 2계(아홉 단계 중 위에서 두번째)를 받음. 또한 당시 유도, 검도계의 명인(名人) 스즈끼(鈴木)도장에서 검도(6단), 유도(6단)도 배움. 일본에 오기 전 한국에서 이미 [잡기]라는 재래체술(在來體術)을 상당 부분 익혔고, 삼촌께 검도도 배운 상태였음. 검도는 한 번의 대결로 6단의 예우를 받았음.
1915년(乙卯): 16세
신병(身病)으로 외부출입하지 않음. 가을부터 이윤직(李允稙) 군과 삼추삼동(三秋三冬)을 한학(漢學) 전공함.
1916년(丙辰): 17세
동짓달에 충북 영동에서 충남 공주 상신리(上莘里)로 이거(移居). 부친, 피난차 산중에 은둔. 신병(身病)으로 계속 고통받음.
1917년(丁巳): 18세
선비(先비'죽은어미비 :모친), 47세로 조요(早夭). 가도(家道)가 말할 수 없이 피폐해짐. 서계원(徐啓源), 서영원(徐永源), 서기원(徐基源), 유덕영(柳德永) 제익(諸益)과 교제함. 스승 정만조(鄭萬朝) 선생의 추천을 받아 당시 장안 재사(才士)들의 모임인 서울 이문회(以文會)에 출입함.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임규(林奎), 권덕규(權悳奎), 홍헌희(洪憲熙) 등과 교유. 부친과 평소 친교가 있던 설봉(雪峯) 지운영(池雲英) 선생과 지석영(池錫永) 선생 만남.
'선비(先비'죽은어미 비':모친)께서 다한(多恨)한 이 세상을 버리시고 중병을 가지시고 돌아가시었다. 불초(不肖)가 연유(年幼)한 관계로 극력(極力) 치료도 못 해본 것이 내 일생 한(恨)이 되는 것이요, 수한(壽限)이 47세라는 요(夭)를 면치 못하신 것이 더구나 한이 된다. 내가 철이 없어서 선비(先%)의 유훈(遺訓)을 지키지는 못하였으나, 나이가 먹을 수록 선비께서 현모(賢母)였고 또 성모(聖母)였었다는 감이 점점 더 두터워간다. 이전의 선철(先哲)들 누구보다도 귀하신 성모(聖母)를 불초가 모시고도 참으로 불초해서 그 유훈의 만일(萬一)을 행하지 못하고 불초도 백발이 성성한 일개 노옹(老翁)이 되었으니 어찌 감개무량하지 않으리요.' (1954년 3월 12일 회고 중)
1918년(戊午): 19세
전국적 유행감기로 사망률이 상당수에 달함. 연말에 고종황제 승하. 공주 상신리(上莘里) 집에서 김일송(金一松) 선생을 다시 뵙고 구월산(九月山:황해도 소재)으로 동행, 입산하여 스승으로 모시고 약 3개월 간 민족고유의 선도(仙道) 수련, 입문(入門)함. 27일 만에 산차(山借)4 삼통(三通)함[결사(決事)는 하지 않음]. 좌도(左道), 우도(右道)의 각종 심법(心法)을 전수받음. 계룡산 북사자대(北獅子臺)에서 동지 규합, 처음으로 정신수련 결사(結社) 시작함. 백두산 순례 후 면우(I宇) 곽종석(郭鍾錫) 선생 찾아뵘. 인천 미두장(米豆場)에서 산주(汕住) 박양래(朴養來:12세 연상) 처음 만남. 전북 황등에 사는 이인(異人) 신석태 옹 만남. 이외에 박동암(朴東庵), 윤신은(尹莘隱), 서직순(徐稙淳), 서만순(徐萬淳)과 만나 친교.
1919년(己未): 20세
3.1독립운동. 기미독립선언서 배포(경북 평해에서부터 동해안 따라 함경도 원산까지 배 타고 다니며 항구마다 선언서를 뿌림). 3.1운동 이후 만주에 들어가 당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상승장군(常勝將軍)] 노은(蘆隱) 김규식(金圭植:?~ 1929) 선생 만남. 김장군은 대한제국 시위대 부교(副校)로 있다 1907년 일제에 의한 군대 강제해산 전에 부대를 이끌고 의병을 일으킨 후 만주에서 무장독립운동에 전념하던 인물로, 전략전술과 실전에 있어 기존의 어떤 무장투쟁가보다도 뛰어난 공적으로 일본군과 백전백승한다 하여 [상승장군]으로 당시 만주독립운동계에 유명하였다 함. 선생은 우연히 김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무장항일투쟁에 처음으로 투신하게 됨. 이후 역시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신 동천(東川) 신팔균(申八均)선생과 만나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막역한 동지요 의기투합한 지기(知己)가 되었으나, 동천(東川) 선생이 먼저 전사(戰死)하였음. 3.1운동 이후 약 4년간 만주 출입하며 독립군 생활.
이후로 국내에 근거를 두고 미미한 지하운동으로 외면상 신문기자, 생명보험 외판원, 약품채약상, 각종 행상, 투기업자 등의 백면(百面) 백작(百作)으로 동지규합에 노력. 아울러 유사종교의 간부진들도 동원해 보고 학교 교원진들도 움직여 봄. 해방 전까지 공섭단(共涉團), 연방사(聯芳社), 동지계(同志契), 상애단(相愛團), 의열단(義烈團) 등 각종 집회로 동지규합에 전력을 다한 결과 동지가 수백명이 되었으나 해방 후 대부분 군(軍), 관(官)에 투신하고 사상적 전환으로 백여명 남음. 그나마 6.25사변으로 50여인 죽음. 추수학(推數學)으로 물가앙등을 예지함. 윤보병(尹普炳), 조기하(趙琪夏), 주회인(朱懷仁), 조석운(趙石雲), 박학래(朴鶴來), 김일창(金一滄), 제익(諸益)과 친교. 정신수련, 동지규합, 군자금 모금 등 활동도 계속함.
1920년(庚申): 21세
우연한 신병(身病)으로 6개월 와병. 기적적으로 생명 보전함. 이 병이 계기가 되어 도호(道號)를 [봉우(鳳宇)]라 함. 추수학(推數學)으로 물가폭락을 예지함. 재산 탕진, 방랑생활 시작. 조훈(曺勳), 허일(許一), 김철진(金哲鎭), 김장렬(金壯烈) 제군(諸君)과 친교함.
'1917년 모친 작고 후 서모(庶母)가 들어오고, 서모의 괴팍한 성격으로 불화하였다. 내 장지(壯志)는 비거천만리(飛去千萬里:천만리를 날아감)하고 방랑생활로 일시적 위안을 하고 다녔다. 이것이 내 중년 초까지의 불행이었다. 그 중에서 광달흉해(廣達胸海:가슴의 포부를 넓힘)라고 할까, 이문목격(耳聞目擊)한 등에서 약간의 상식은 얻게 되고, 방랑에서 협의행각(俠義行脚)으로 나가서 경제관념에 아주 소홀했던 관계로 궁불능자존(窮不能自存:궁핍하여 살아가기 힘듦)했으나, 조금도 불굴(不屈)하고 여전히 협의자처(俠義自處)하고 다녔다. 그러다 부친께서 81세에 하세(下世)하시고, 사회조류도 협의행각을 허용치 않으며, 더구나 왜정 때 고등 요시찰이 되어 영어(囹圄)생활도 상당한 횟수였다. 사회적이나 경제적이나에 진로(進路)가 몇 번 있었으나 모두 내가 기권한 것이었다. 그 후 을유광복이 되어 신생(新生) 애국애족자가 우후죽순같이 나오게 되자 이것도 염증이 나서 아주 기권하고 말았다.' (1964년 수필 「회상기(回想記)」 중)
1922년(壬戌): 23세
토혈증(吐血症)으로 욕을 봄. 우연히 신방(神方)을 얻어 쾌유함. 해외로 왕래하며 유랑생활로 가정생활은 형편없이 곤란해짐. 조일운(趙一雲), 이화암(李華庵), 이화당(李華堂), 정수당(丁隨堂). 하신부(河信夫), 김태부(金太夫), 김오운(金烏雲), 김봉규(金鳳奎) 제위(諸位)와 친교.
1923년(癸亥): 24세
아들 영창(永昌) 조요(早夭). 낭인(浪人)생활 계속. 신병(身病)으로 큰 출입 못함.
1924년(甲子): 25세
극도의 생활고. 호남 여행. 김봉두(金奉斗), 박호은(朴湖隱:당시 전남의 유림) 도유사(都有司), 황기문(黃奇門) 제위와 친교. 중국에 들어감. 전생(前生) 찾아감. 전생은 중국 산동성(山東省) 소재 주씨가(周氏家)의 부인(夫人)이었음. 성은 왕씨(王氏)였음. 전생의 가족들을 확인함. 당시 중국 도계(道界)의 살아 있는 최고 신선(神仙) 왕진인(王眞人)을 나부산(羅浮山:광동성 소재)에서 만남. 중국 도교(道敎) 오두미교(五斗米敎)의 발상지인 용호산(龍虎山:강서성 소재)의 장천사(張天師) 도릉(道陵)의 유적 답사.
1925년(乙丑): 26세
호남 광주에서 객지생활(이듬해까지). 이용련(李容連), 김창숙(金昌淑), 서몽암(徐夢庵), 이옥강(李玉岡), 전백인(全白人), 백락도(白樂道), 문수암(文殊庵), 김현국(金顯國) 등과 교유. 원상(原象) 공부 시작. 초여름 소성(邵城:인천)에서 20여명 동지와 함께 정신수련.
1926년(丙寅): 27세
광주에서 약종상(藥種商) 허가받음. 계속 객지생활. 종래 취미있던 문학을 아주 전환해서 심리학(心理學:정신학)으로 전공과목을 정하여, 이 방면으로 동지를 규합하며 함양시키는 데 미력을 경주하였음. 민족운동가들과는 계속 왕래함. 다른 방면의 친구들과는 좀 한산해짐. 이후로 규합한 동지 제위는 차종환(車宗煥), 김설초(金雪樵), 한강현(韓康鉉), 최승천(崔乘千), 김일승(金一承), 주형식(朱亨植), 신훈(申塤), 오송사(吳松士), 한인구(韓仁求), 민계호(閔啓鎬), 이용순(李用淳), 한상록(韓相錄), 조철희(趙哲熙), 임지수(林志洙), 권오훈(權五勳), 박하성(朴河聖), 김학수(金學洙) 등. 불교계 교유 혹은 사사(師事) 인물은 경허사(鏡虛師), 수월(水月), 혜월(慧月), 만공(滿空), 한암(漢庵), 석상(石上), 학명(鶴鳴), 용성(龍城), 용운(龍雲:만해), 만우(萬愚), 상로(相老), 경운사(鏡雲師) 등. 유교계(儒敎系) 인물로는 만나뵌 중 면우(I宇) 곽종석(郭鍾錫) 선생이 가장 위대하였으며, 전간재(田艮齋) 선생은 순문학자(純文學者)였지 도학자(道學者)는 아닌 것으로 생각되었다 함.
1927년(丁卯): 28세
상신리(上莘里) 본가로 귀가. 청년운동 조금 함.
1928년(戊辰): 29세
다시 객지로 왕래 시작. 인천 미두장(米豆場) 출입. 금강산, 묘향산 석굴 수련.
1929년(己巳): 30세
중국 왕래(3차 중국행. 20대 초부터 40대 초반 해방 전까지 10여 차례 왕래함). 북경지역에서 약 6개월 머물며 당시 외교부장 왕정정(王正廷)6, 오조추, 고유균(顧維鈞)7, 풍옥상(馮玉祥)8, 녹종상(鹿鍾祥)9, 원극문(袁克文)10 등과 교유. 중국의 전통적 정신수련 결사(結社)인 [천일선(千日禪)] 제도 참관. 겨울에 계룡산 갑사(甲寺)계곡에 입산하였으나, 단기(短期) 하산함.
1930년(庚午): 31세
청년들에게 정신연구[硏精] 권고하며 지냄. 이후 솔선수범하며 35세까지 매년 몇 달씩 농한기인 겨울에 정신수련을 계속함. 갑사(甲寺) 계곡 용문폭포와 간성장(艮成莊)에서 제자들과 겨울철 정신수련 결사(結社). (별 성적 없었음)
1931년(辛未): 32세
계룡산 북록(北麓)에 연정원(硏精院) 건물 낙성(落成). 당시에는 [연역재(演易齋)]라 명명했으나, 재원(財源)의 미비로 실제 운영은 못함.
1932년(壬申): 33세
인천에서 차종환(車宗煥), 한상록(韓相錄), 조철희(趙哲熙) 군을 만남.
1935년(乙亥): 36세
산림벌채사업 시작. 청년들 많이 접촉함.
'기사년(1929) 가을에 약간의 여자(餘資)로 아주 입산 준비를 하고 한일년(限一年) 입정(入靜)할 예산이 확립되어 오대산(五臺山)으로 갈 절차를 다했다가 우연하게 모씨(某氏)를 만나서 오대산행을 중지한 것이 내 제37차 실기(失機)였고, 기사년 동(冬)에 중국왕반(中國往返)을 하고 귀가해서 다시 입산 준비를 하던 중 모씨의 권고로 갑사(甲寺)에 입산해서 단시일로 하산하게 된 것이 내 38차 실기(失機)였다. 갑사 입산도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나 가정(家庭)이 가깝고 왕래가 잦아서 부득이 속히 하산하게 되고, 수련이 한도(限度)에 못 간 것이다. 오대산이나 묘향산(妙香山)이나 금강산으로 아주 1년을 한(限)하고 갔었으면 물론 그 이상의 수익(收益)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마장(魔障)이었다. 입산 준비만은 비록 자금이 없이라도 1년쯤은 될 수 있었다. 모모(某某) 친족(親族)의 원조가 확약된 것이 있었다. 1년 내지 2년, 3년 정도까지는 할 수 있었으니 이 기회가 나의 가장 큰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경오(1930년) 겨울 입산은 또 갑사(甲寺)로 되어 신미(1931년) 조춘(早春)에 하산하였으나 별 성적이 없었고, 이 해에는 군산으로, 대구로 출입하며 계룡산 위에 연역재(演易齋)를 건축하려는 것이 무준비(無準備)로 실패하고 (_) 이렇게 임신년(1932)까지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고 의존하지 않으려는 결심으로 별별 짓을 다해 보았으나 실패한 것이다. 이해에 차종환(車宗煥), 한상록(韓相錄), 조철희(趙哲熙) 군을 인천에서 만났다.' (1954년 일기 중)
1936년(丙子): 37세
12월, 부친 하세(下世). 향년(享年) 81세. 극도의 생활난으로 치상범절(治喪凡節:상례를 치르는 데 따른 당연한 절차)에 못 갖춘 점들이 많았음. 집상(執喪)을 예(禮)대로 못하고 겨우 형식을 지킬 정도였음.
1939년(乙卯): 40세
수십년래 희유(稀有)한 대한재(大旱災:가뭄) 발생. 전국적으로 많은 피해. 일본을 왕래하며 근근이 호구(糊口)함. (인삼 장사를 함)
1941년(辛巳): 42세
의열단(義烈團) 사건으로 7개월 간 대전경찰서에 구금당함. 영어생활중 애국지사 여운삼(呂運三)씨 만남. 이후 해방까지 민생고(民生苦)가 극도로 참혹하였음.
1945년(乙酉): 46세
8.15해방. 38선으로 국토분단. 일제하 암약하던 동지회(同志會)를 재발족하고 동지 규합에 본격적으로 나섬. 해방 이후 교유(交遊) 인물:엄항섭(嚴恒燮), 조경한(趙擎韓), 조완구(趙琬九), 조성환(曺成煥), 조병옥(趙炳玉), 윤치영(尹致映), 조봉암(曺奉岩), 송대용, 홍찬유(洪燦裕), 권중돈(權重敦).[(단군)기원동지회(紀元同志會)] 수십명 동지 규합. 탑골공원 뒤 사무실 운영.
1947년(丁亥): 48세
상신학교 설립을 주도하여 두칸짜리 목조 건물로 임시 개교. 학교 설립시 사재를 들여 학교에 필요한 각종 기자재를 기증하였고 지속적으로 학교 재정을 지원. 임시개교 이후 공주 교육청에 분교 인허가 사업을 도맡아 하였으며 이런 노력에 힘입어 1952년에 반포공립국민학교 상신분교로 설립이 허가됨. 1952년 1회 졸업생 배출.
1948년(戊子): 49세
대한민국 건국. 이승만 정부 출범. 개천절(開天節:음력 10월 3일), 계룡산 아기봉하(牙旗峯下:삼불봉 아래) 석굴에서 정신수양차로 동지 7~8인이 함께 모여 [용산 연정원(龍山 硏精院)]이라고 처음 명명함.
1949년(己丑): 50세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 암살당함. 천고유한(千古遺恨)의 민족적 손실이었음. 당시 김구 선생 영도(領導)의 한국독립당(약칭 [한독당]) 중앙집행위원 겸 계룡산특별당부 위원장을 맡아 정치 일선에서 활동중이었음.
1950년(庚寅): 51세
해방 이후 수차 상경(上京), 체류하며 겨우 지반(地盤)을 잡자 6@25사변 발발. 상신(上莘)으로 단신 피난 후 인민군에게 피체(被逮), 수개월 간 사상교양장(思想敎養場) 신세를 지다 기적적으로 생명을 보전함.
1951년(辛卯): 52세
이 해 봄에야 비로소 제자 권오훈(權五勳:당시 국회의원), 한강현(韓康鉉), 주형식(朱亨植) 등 수십인이 6.25에 희생되었음을 알게 됨.
1952년(壬辰): 53세
4월에는 지방의회의원 선거 출마(공주), 낙선.
1953년(癸巳): 54세
충청남도 교육위원회위원 선거 출마, 당선.
1959년(己亥): 60세
계룡산 구룡사지(九龍寺趾) 구곡(九曲) 위쪽에 연정원 건물 신축, 준공(세 칸 초옥이었음). 성주영(成周榮), 지정현(池正鉉) 등 수련.
'해방 후 한독당(韓獨黨)에 가입하여 비좌비우(非左非右)의 민족독립노선으로 외세의존세력 타파에 앞장섰으나, 결과는 좌익, 우익 양편에게 탄압만 받았다. 6@25사변 전에는 빨갱이라고 대한민국경찰에 붙들려가 몇 개월씩 옥살이하고, 6@25 터지자 이번에는 인민군에 반동분자로 잡혀 또 옥살이, 구사일생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일제치하에선 요시찰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왜경들에게 탄압받고 영어생활만 수십차였다. 일생 하루도 맑은 날이 없었던 느낌이다. 누구를 위해 싸워왔던가 스스로 의심이 난다. 그러나 앞으로도 이 싸움만은 그치지 않을 작정이다.' (1960년대 일기 중)
1951년(辛卯): 52세~1963년(癸卯): 64세
충남 공주군 반포면 상신리에 칩거. 매우 곤궁한 생활상.
1964년(甲辰): 65세
상경(上京), 한의원(漢醫院) 개업. 인술(仁術)로 수많은 난치병 환자를 고침.
1974년(甲寅): 75세
봉우선생님의 상신초등학교 설립을 기려 마을 사람들이 상신리 입구에 송덕비를 세움. 상신초등학교 학부모들이 처음 건의를 하였고 마을 사람들이 모금운동을 하여 비용을 마련했다. 비문은 당시 상신초등학교 교장이던 이병오씨가 작성했으며 행사 당일 마을 잔치를 열었다. 충남도교육청 간부를 비롯한 외부인사도 대거 참석한 큰 행사였음.
"봉우 권태훈 선생은 약 오십여년 전에 충북 영동에서 이곳으로 이주 하신후 한학교육으로 수많은 청소년을 선도하셨고 제반 애로와 난관을 무릅쓰고 벽촌인 이 지방에 상신국민학교를 창설 후세 교육에 큰 도움을 주셨으며 거액의 사재를 들여 학교에 교기를 비롯하여 많은 시설을 장만해주시는등 이 지방과 학교의 발전을 위해서 크게 공헌하셨기로 이 송덕비를 세움. 서기 1974년 3월. 상 하신 동민 일동 세움" (송덕비 비문)
1982년(壬戌): 83세
민족종교 대종교(大倧敎) 제12대 총전교(總典敎) 취임.
1984년(甲子): 85세
소설 《단(丹)》 출간. 봉우 선생 구술 내용을 작가 김정빈이 소설로 지음. 40만부 이상이 나간 당시 초베스트셀러로서, 이후 [단열풍(丹熱風)]이라는 사회현상으로 자리잡음. 단(丹), 단학(丹學), 단전호흡(丹田呼吸) 등의 용어가 널리 일반에 정착되었고, 민족고유의 선도(仙道), 정신사(精神史), 민족 상고사(上古史), 단군역사 및 기원(起源) 문제, 각종 민족정신수련법들에 대한 주의(注意)와 세간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대된 계기가 됨. 당시 기성 지식층들은 국수주의적, 복고적(復古的), 현실도피적 망상가로서 봉우 선생을 비판하는 경향을 보였으나, 북한 김일성 공산독재와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군사독재 치하에서 암울한 민족분단 고착화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대다수 국민들은 소설에서 보여주는 봉우 선생의 민족과 국가의 장래에 대한 원대한 비전, 즉 금세기 안의 남북통일 완수와 21세기 초 세계중심국가로의 대약진이라는 가시적(可視的) 예언에 숨통을 틔우고 환호함.
1986년(丙寅): 87세
민족정신수련단체 [한국단학회 연정원] 서울 광화문에 설립, 총재에 취임. 사단법인 유도회(儒道會) 이사장 취임.
1989년(己巳): 90세
수필집 《백두산족(白頭山族)에게 고함》 출간(1월). 《천부경(天符經)의 비밀과 백두산족 문화》 출간(11월). 구술(口述) 및 감수(監修).
1990년(庚午): 91세
백두산 천지(天池)에서 천제(天祭) 봉행(奉行).
1992년(壬申): 93세
《민족비전 정신수련법》 출간(8월). 구술(口述)과 저술(著述) 및 감수(監修).
1994년(甲戌): 95세
양력 5월 16일 오전 9시 36분, 충남 공주시 반포면 상신리 자택에서 선화(僊化).
-호흡법(오행연기법),원상법
박 현
건강,행공
-박현 선생님 소개
道家수련과 전통무예의 고수
박 현
4살 때부터 산중에서 스승께 호흡법, 무예, 진법, 산차(차력) 등 좌방 도술을 배웠다는 박현씨는 그러나 현실세계에 내려와서는 고려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지식인으로 ‘위장해’ 살아가고 있다.
한국의 도가(道家)는 크게 두 흐름이 있다. 좌방도가와 우방도가가 그것이다. 수레인 몸을 잘 달궈나가면 수레에 탄 마음도 저절로 달궈 깨닫게 된다는 게 좌방도가 수련의 핵심이라면, 아예 처음부터 마음을 잘 다스리면 몸인 수레도 달궈진다는 게 우방도가 수련의 고갱이다.
두 흐름의 수련이 마음을 깨치는 데 목표를 두고 있지만, 방법론이 다르다보니 세월이 흐를수록 수련자들의 심성이나 신분도 뚜렷하게 구별됐다. 직접적으로 마음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은 수련의 대중화 작업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 좌방도가 사람들은 무예니 진법(陳法, 주변 환경의 기운을 돌리는 술법)이니 산차(차력)를 표면에 들고 세상에 나섰다. 그러다 보니 조선의 신분사회에서 불이익을 받는 중류층이나 아예 글을 배우지 못한 하층민이 다수 좌방도가에 몰려들었다.
반면에 고요히 앉아서 마음을 다스리는 데 열중하는 우방도가 사람들은 혼자서 양생법을 익히는 편이었다. 또 이들은 대개 조선의 유가(儒家) 양반층이었으므로 신분상 드러내놓고 도가수련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화담 서경덕, 남명 조식 등이 우방도가 계열에 가까웠던 인물이다.
좌방도가는 그 근본을 고려 말 이비(李裨, 흔히 이고로 잘못 알려져 있음)에게 둔다. 일명 ‘자하선인(紫蝦仙人)’이라 불리는 그는 태백산 구화동에서 살았다 전해지는데, 그때까지 흐트러졌던 수련의 체계를 바로잡아 좌방수련을 중창(重創)했다 한다.
그런데 자하선인이 남긴 좌방 선맥을 정통으로 이어받았다고 분명하게 밝히는 사람이 있다. 현재 ‘바나리’라는 닦음 공동체 모임을 이끄는 박현씨(朴賢·한국학연구소장)가 그 주인공. 고려대 대학원에서 한국사를 전공한 현대 지식인인 그가, 무예와 진법 등을 얘기하는 좌방수련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는 것이 흥미롭기도 하다. 아무튼 그가 처음으로 대중에 공개한다는 좌방수련의 계보는 도가 역사를 연구하는데 자료적 가치가 있으므로, 다소 길지만 소개하기로 한다.
“여말 선초에 ‘부루아니’ 자하선인께서 ‘비루비니’ 공공(空空)선생에게 좌방수련 맥을 전했습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인 두 분께서 남긴 글이 요즘 세상에 전해지는 ‘신교총화’라는 책입니다. 공공선생은 ‘아시가비’ 무갑(無甲)선생께 맥을 전하셨고, 다시 ‘마니가비’ 고중(古中)에게 전해집니다. 고중선생은 세상에 격암 남사고(南師古)로 알려진 분으로 제 고향이기도 한 일월산에서 수도하셨는데, 역학 풍수 천문 복서 등에 달통한 사람으로 조선 중기 사회의 지식인이었습니다.
다음으로 그 맥을 이은 분이 ‘수바가미’ 은신(隱身)이고, 그 다음이 ‘서이도리’ 삼주(三柱)선생인데 이분이 바로 저의 사조(師祖)입니다. 이분은 한국에서 우방 수련을 표방하는 한 단체의 사조 이야기에도 잠깐 스쳐가듯 등장합니다. 당시만 해도 좌방과 우방이 서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전통은 자하선생께서 정리해 남기신 840자 ‘천부경습유’에 따라, 스승이 4명의 제자에게 맥을 전하는 것입니다. 삼주 사조께서는 ‘큰 대’자 돌림으로 대공(大共) 대초(大草) 대연(大燕) 대전(大全)을 제자로 두었고, 이중 막내인 ‘하나오니’ 대전선생이 그 맥을 받았습니다. 대 자 돌림의 제 사백부님들은 동학전쟁 때 전봉준, 서장옥 계열에 서서 잠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좌방도가 사람들은 고통받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대전선생은 관동(關東)선생께 맥을 전했는데 바로 저의 스승입니다. 스승님은 산와 진법을 하는 사람 정도로만 세상에 알려져 있었고, 원(元) 자 돌림의 제자 4사람을 두었는데, 막내인 ‘아라가비’ 원중(元中)이 바로 저입니다. 저는 4살 때(1960년)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스승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박현씨의 부친이 철부지 어린 아들의 손을 이끌어 좌방수련 ‘도사’에게 맡겼다는 것이 이채로운 대목. 그러나 영해 박씨인 그의 가계(家系)를 훑어보면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그의 고조부, 증조부는 동학 활동과 관련해 여기저기 숨어다니다가 조부대에는 경북 영양의 삼의 계곡이란 곳에 은거했다. 수련공부를 한 증조부(박종덕)의 영향을 많이 받은 아버지(박성호)는 8·15광복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더 깊은 산골인 일월산 자락으로 들어가 집 한칸 지어놓고 살게 된다. 이때 아버지는 ‘선도(仙道)선생’이 근방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인 박현을 맡긴 것이다. 60년대 초에 선도선생에게 맡겨진 이 어린이는 어떻게 공부했을까?
4살 때 입문한 좌방수련
“처음에는 아버지와 동갑인 맏사형으로부터 글 공부와 호흡 공부를 했어요. 한문은 천자문부터 시작했는데 8살까지 사서삼경을 다 외웠습니다. 그리고 호흡공부를 해 영적인 체험 정도는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8살부터 16살까지는 스승님께 본격적인 호흡 공부와 함께 무예, 진법, 의학(치료학)을 배웠고, 그 이후부터는 자력으로 공부했습니다.”
그는 때때로 대중을 상대로 한국학 강의를 하면서 한문 경전을 보지 않고 줄줄 칠판에 써나간다. 어릴 때 외운 경전이 머릿속에 컴퓨터처럼 저장돼 있기 때문이다. 그는 도가의 학문 습득법은 일반인의 그것과 차이가 있다고 밝힌다. 인체에는 두 눈 외에 보이지 않는 세 개의 눈이 있는데, 이를 활용해 책을 마치 사진촬영하듯 찍어서 머리에 저장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어느 책, 몇 페이지 몇째 줄에 무슨 글자가 있는지를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쓴다는 것이다. 또 호흡수련을 하면 저절로 뇌가 활성화돼 창조력이나 기억력이 높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는 17살 되던 겨울에 도시로 나와 고등학교를 다녔고 고려대에 진학했다. 80년대 암울한 시절이었다. 그의 스승들이 나라가 혼란할 때 외면하지 않았듯이, 또 좌방수련의 현실참여적인 성격 때문에, 그 역시 세상 흐름을 따라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운동권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변신해 ‘변증법적 지평의 확대’ ‘민중민주운동론’ ‘한국경제사입문’ 등 10여 종의 책을 집필했다. 그는 이를 ‘제2의 동학운동’이라고 규정했다. 동학의 ‘반봉건’ 운동이 현대의 민주화 운동이요, 동학의 ‘반외세’ 운동이 현대의 자주화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90년에 붙잡혀 감옥에 갔다온 뒤 운동권 생활을 마무리짓고, ‘본업’인 좌방수련 계승자 노릇을 하게 된다.
그가 제시하는 수행법은 당연히 몸을 잘 달구어 마음을 찾아가는 것으로, 입문자인 행자(行子)에서 수인(修人) 수자(修子) 대수자(大修子) 등의 단계가 있다. 이 수련법의 근본은 구궁기로식(九宮氣路息)이라는 호흡법. 1좌(坐)에서 9좌까지의 단계가 있는데, 행자(입문자)가 기초호흡법(지중신주념, 묵룡토주납, 백우중식좌)을 거친 뒤 본격적으로 1좌에서 5좌까지 닦으면 수련이 일단락돼 ‘수인’ 자격을 갖추게 된다.
또 수인이 됐을 때부터 무예와 진법 등을 전수받을 수 있다. 이 역시 몸을 단련시켜 마음으로 가기 위해 하는 것이다. 무예에는 구궁휴장, 구궁검식(검법) 등의 이름으로 역시 9단계가 있다. 전통무예에 대한 박현씨의 설명.
“저희는 무예를 안공(安功)이라 부르는데, 거의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전에 산에서 수행할 때는 산짐승 때문에 익혔는데, 지금 현대 세상에는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랑 싸우자고 무예를 익히는 게 아니잖습니까. 다만 안공의 자세가 저희 수련회의 기초 행공으로 응용돼 있으므로 필요하면 배울 수는 있겠지요. 저희 식구 가운데는 수인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 몇 명 있는데, 저는 그분들에게 무예를 모르는 삶이 좋다고 말합니다.”
고구려 벽화에 있는 무예 동작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박현씨 역시 20대 이전 혈기가 왕성한 시절에 스승에게서 배웠던 무예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적이 있다. 그는 웃음을 띠며 “간판을 건 데는 거의 가봤지요” 하면서 “젊은날의 객기(客氣) 아니겠습니까” 하고 어물쩍 넘어간다. 그러나 그를 아는 주변 사람들은 그가 측량할 수 없는 ‘무예의 고수’임을 부인치 않는다. 박씨는 다만 “세상에 전통무예라는 이름을 건 곳의 행공법과 박현 선생님이 배운 그것이 다른가”는 질문에는 상당히 다르다는 쪽으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수인의 자격으로 박현씨에게 전통 몸공부를 전수받고 있는 서해진씨(도서출판 바나리 대표)의 말.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 이미 다른 곳에서 무예를 익혀 지도자 길을 걷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다 무예 자체가 주인이 아니라 기와 마음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박선생님의 말에 충격을 받아 따라나서게 됐습니다.”
무예는 크게 수행에 초점을 맞춘 내가무예와 건강과 자기보호에 초첨을 둔 외가무예로 나뉜다. 자신의 내부에서 기의 운행체계를 따라, 즉 기가 가는 길을 따라 검이나 춤의 형태로 표출하는 것이 내가무예라면 외부(혹은 상대방)의 움직임에 맞추어 표현되는 것이 외가무예다. 이를테면 외가무예인 검도에서 대표적인 동작인 ‘내려치기’는 내가무예에서는 ‘살수(殺手)’라 하여 금기한다. 이는 그 동작이 자기 자신을 상하게 하는 기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내가무예, 즉 기 수련의 전형을 보여주는 동작이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등장한다는 점이다. 고구려시대 무덤인 삼실총에 그려진, ‘역사상’이란 이름의 벽화가 사실 박현씨가 스승에게 배운 무예의 한 동작인 ‘반역근세’와 똑같다고 한다. 박현씨의 설명.
“반역근세 자세를 취하면 인체의 혈해 영대 등의 기혈이 열리는데, ‘역사상’의 인체를 자세히 보면 바로 그런 혈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솟아나는 것을 묘사하고 있어요. 무용총의 무희들도 수련하는 동작으로 해석이 가능하지요.”
박씨는 요즘 앉아서 잠을 잔다. 이것은 특별한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앉아서 자는 것이 편안해서라고 한다. 그는 “이 세상에서 등을 대고 자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습니다”고 화두 같은 말을 던진다. 몸이라는 수레를 달궈 마음을 달구는 것이 왜 중요하고, 사람이라면 꼭 해야 하는지는 그의 저서 ‘나를 다시하는 동양학’에 차분히 밝혀져 있다.
위에서 언급된 공부법에 대해서 소개차원이며 박현 선생님께서 하셨던 공부 중 자신의 공부함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공부를 추가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무예부분은 별도로 연을 맺어서 배우도록 하셔야할 것 같습니다.박현 선생님의 공부모임인 바나리는 해체된 것으로 보이며 개인적으로 차문화활동을 하는 것이 목격되기도 하였지만 지금의 근황은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카페에선 박현 선생님의 공부는 아래 내용을 주 테마로 하겠습니다.
-장틀진공,상고사,불교수행법,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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