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교 2대 종사 무헌 김교헌 철형 ! 한국의 대표적 민족 사학자 3인은 단재 신채호,
대종교 2대 종사 무헌 김교헌 철형 !
한국의 대표적 민족 사학자 3인은 단재 신채호, 위당 정인보, 백암 박은식이다.
한국의 대표적 한글 학자는 주시경이며 그의 제자 중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사람은
북한에는 김두봉, 이극로 남한에는 최현배, 이희승, 이병기이다.
한국의 대표적 외교관은 신규식, 이상설, 이범윤이다.
한국의 대표적 정치인은 신익희, 이동휘, 이동윤이다.
한국의 대표적 교육가는 이시영, 이상룡, 안희제이다.
이런 기라성 같은 한국의 대표적 정치, 문화, 사상의 지도자들이 한 사람의 제자이거나 영향을 받았다면 믿을 수 있는가 ? 그러나 사실이다. 그런 위대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자.
무원대종사는 1910년 대종교에 입교하였고 만주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중 1916년 홍암 나철 대종사가 순교하시자 교통을 전수받고 활동에 나서 1922-1923년간에 46개의 시교당을 설치하였다. 만주에 34개소, 국내 6개소, 러시아지역 3개소, 중국본토 3개소였다. 이를 보면 대종교의 확장은 만주지역 동포를 중심으로 성장한 것을 알 수 있다.
무원종사 김교헌(金敎獻, 1868~1923)은 민족사학의 권위자로서,《신단실기(神檀實記)》와《배달족역사(倍達族歷史)》,《신단민사(神檀民史)》를 저술해 대륙사관의 기틀을 다지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인물이다.
본관은 경주, 호는 무원(茂園)이다. 명문거족의 후예로 수원에서 출생,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7대조 김주신(金柱臣, 1661~1721)은 숙종의 장인이며, 아버지는 공조판서 창희(昌熙), 어머니는 풍양 조씨로 판관을 지낸 희필(熙弼)의 딸이다. 자택은 영조 때 왕자궁으로 쓰이던 340칸 대저택을 하사 받은 것인데, 김교헌이 집안의 종손으로서 독립운동을 위해 전 가산을 팔은 뒤 보성학교와 명성여자실업학원(현 동국대 사대부고)을 거쳐 조계사에서 인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18세 되던 1885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 한림옥당·병조참의·예조참의·성균관대사성 등을 역임하는 순탄한 관직 생활을 했다. 그가 다양한 서적을 섭렵하고 지식을 넓힐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시기는 1903년 문헌비고 찬집위원 활동에서다. 김교헌이 5년에 걸쳐 완성한《증보문헌비고》(1908)는 상고부터 대한제국 말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등 각종 제도와 문물을 정리한 책이다. 1909년에는 규장각부제학으로서 국조보감 감인위원을 겸직하였는데,《국조보감》은 조선시대 역대 왕의 업적 가운데 선정(善政)만을 모아 후세의 왕들에게 교훈이 되도록 편찬한 편년체 역사책이다.
김교헌이 항일의식을 고취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06년 동래감리 겸 부산항재판소 판사와 동래부사로 재직할 때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통감부의 비호 아래 자행된 일제의 경제침략에 맞서서 이권 운동을 징계하여 다스리다가 일본인들의 횡포와 친일파 송병준의 모함으로 해직되었던 것이다. 사건 뒤 비밀결사 신민회 회원과 교우 관계를 맺었으며, 조선광문회에 입회하여 현채·박은식·장지연 등과 함께 고전간행사업에 중추 역할을 하였다.
1909년 음력 1월 15일 대종교의 중광(重光, 부활)은 구한말 고양되던 단군사상을 한민족 구심점으로 통합하는 강력한 종교운동의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김교헌 역시 입교하여 유근과 함께 ‘단군의 사적을 살핀다’는 뜻의 단군 기록 모음집-《단조사고(檀祖事攷)》(1911) 편찬을 주도하였다. 그는 종단에서 총본사 부전무·경리부장·도사교 위리·남도본사 전리·총본사 전강을 지내다가 1916년 9월 홍암 나철의 뒤를 이어서 제2대 도사교(교주)에 취임하였다. 1917년 일제의 박해를 피하여 대종교 총본사를 북간도 화룡현으로 옮기고 교세확장을 통한 독립운동의 강화를 꾀하는 한편, 동포들의 민족정신 교육에 전념하였다.
1918년 11월 무장항일투쟁 선언서인〈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핵심 역할을 하였다, 같은 해 12월 북로군정서를 조직하여, 서일(徐一)을 총재에 담당하게 하는 등 적극적인 무력투쟁을 전개하게 한 끝에 1920년 9월 청산리에서 대승리를 거두게 하였다. 그 뒤 일본군의 보복을 피하여 총본사를 영안현으로 옮겨 계속해서 구국항쟁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만주 지역에 걸친 일제의 토벌작전으로 독립운동 및 교단 기반이 크게 붕괴되자 병을 얻어 타계하고 말았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고, 묘소는 중국 화룡시 청호촌 언덕에 초라한 형태로 남아 있다.
< 대종교 홈페이지에서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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