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변도국(九變圖局)
한민족의 역사가 9번 변하여 10번째 마침내
大韓民國이란 大國으로 완성되어 지구촌을 十無極統一 한다는 문서
신지비사는 한민족의 위대한 역사를 밝히는 소중한 역사 문서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조 당시 명나라의 침략을 받는 상황에서 명나라의 눈치를 보느라 어쩔수 없이
당시 조선 최고의 학자들에 의해 역사서를 불태워야 했던 안타까운 상황을 적습니다
신지비사를 인용, 기록한 권근(權近 1352-1409).-권제(權踶 1387-1445)-권람(權擥1416-1465) 3대에 걸친 문헌이 보인다. 권근이 응제시, 건원능 신도비명 병서에, 권제가 용비어천가에,
권람이 응제시주에 각각 신지비사의 다른 이름인 9변도국(九變圖局)을 인용하여 썼다.
이는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확인 시키려는 의도가 뭍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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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계량도 비기의 존재 사실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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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계량(卞季良 1369-1430)은
친시 문무과 합행본명 초년 예통행 청사(親試文武科合行本命醮年例通行靑詞)에서
‘선가(仙家)의 비기(秘記)를 상고하고 깨끗한 기도의 글을 구하여,
본명(本命)의 때를 당할 때마다 그것으로 오래 사시는 축원을 간절히 드리옵니다.’
<동문선 제115권> 라 하여 비기의 존재 사실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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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계량(卞季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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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9(공민왕 18)∼1430(세종 12). 조선시대 초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거경(巨卿), 호는 춘정(春亭).
검교판중추원사(檢校判中樞院事) 옥란(玉蘭)의 아들이며, 이색(李穡)·권근(權近)의 문인이다.
1415년 세자우부빈객이 되었다.
이때 가뭄이 심하여 상왕이 크게 근심하므로 하늘에 제사하는 것이 예는 아니나 상황이 절박하니
원단(圓壇)에 빌기를 청하여 태종이 그에게 제문을 짓게 하고
영의정 유정현(柳廷顯)을 보내 제사드리게 하니 과연 큰비가 내리었다.
1420년(세종 2) 집현전이 설치된 뒤 그 대제학이 되었다.
특히 문장에 뛰어나 거의 20년간 대제학을 맡아 외교문서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대제학으로서 귀신과 부처를 섬겨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하여
주위로부터 ‘살기를 탐내고, 죽기를 두려워 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화산별곡 華山別曲〉·〈태행태상왕시책문 太行太上王諡冊文〉을 지어 조선왕조의 건국을 찬양하였다.
저서로는 《춘정집》 3권 5책이 있다.
《태조실록》의 편찬과 《고려사》 개수(改修)에 참여하였고 기자묘(箕子墓)의 비문과
〈낙천정기 樂天亭記〉·〈헌릉지문 獻陵誌文〉을 찬하였다.
《청구영언》에 시조 2수가 전한다. 거창의 병암서원(屛巖書院)에 제향되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 太祖實錄, 太宗實錄, 世宗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春亭集.>
< 태조실녹, 태종실녹, 세종실녹, 국조인물고, 연려실기술, 춘정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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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정, 불살라야 마땅할 것이라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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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설명한 내용 처럼 이를 뒷받침하는 서거정의 증언 기록을 보자.
1485년 성종 16년 2월 1일(계축) 전(前) 병조 참지(兵曹參知) 최호원(崔灝元)이
풍수설을 주장했다하여 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육조(六曹)에 의논하도록 명을 받고
서거정(徐居正)은 - 구변도국을 도선비기와 함께 참위서 예언서로 치부 하였다.
“참위서(讖緯書)는 으레 모두 정도에 어그러진 것이므로, 도선의 비보(裨補)한다는 말은 황당하고 괴이함이 더욱 심합니다. 고려(高麗)가 삼경(三京)·삼소(三蘇)라는 말에 현혹되어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대중을 동원한 것이 거의 쉬는 해가 없었으나, 화란과 패망을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그런 글을 얻는다면 오히려 불살라야 마땅할 것인데, 하물며 하나하나 존숭하고 장황하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라 하는 등 육조 대신들의 격론이 벌어진다.
徐居正 議: “讖緯之書, 例皆不經, 道詵 裨補之說, 荒怪尤甚。 高麗 惑於三京、三蘇之說, 勞民動衆, 殆無寧歲, 無救禍敗。 今得其書, 猶當火之, 況一一尊崇, 而張皇之乎?
< 成宗 175卷, 16年(1485 乙巳 / 명 성화(成化) 21年) 2月 1日(癸丑) 2번째 기사>
이 사건으로 최호원은 감히 요사스러운 말로 성명(聖明)을 모독(冒瀆)한 죄로 삭탈관직을 당하고, 유배형을 받는다.세조조(1412년)에 불태워진 신비집 즉 신지비사의 연장선상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서거정이 “불살라야 마땅할 것인데”라는 말은 이미 불태워 버린 책인데,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는 뜻을
담고 있음이다. 신지비사가 백성들에게 미친 영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73년이 지난 성종조에 신지비사는
참위서라는 이름으로 다시 낙인찍히고, 불태워졌음이 서거정의 증언으로 재확인 되었다.
*최호원(崔灝元)
자 : 혼연(渾肰) 본관(本貫) : 미상(未詳)
[이력 및 기타 사항]소과 : 1451(신미) 특별시 : 무자1468중(戊子1468重)
전력(前歷) : 전승(前丞) 관직(官職) : 첨지사(僉知事) 부(父) : 최안지(崔安止) 과거시험연도
: 1453 계유 시험명 : 증광시(增廣試) 등위 : 정과26(丁科26)
*서거정(徐居正):
1420(세종 2)∼1488(성종 19).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달성(達成). 자는 강중(剛中),
초자는 자원(子元), 호는 사가정(四佳亭) 혹은 정정정(亭亭亭). 목사(牧使) 미성(彌性)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권근(權近)의 딸이다. 학문이 매우 넓어서 천문(天文)·지리(地理)·의약(醫藥)·복서(卜筮)·
성명(性命)·풍수(風水)에까지 관통하였으며, 문장에 일가를 이루고, 특히 시(詩)에 능하였다.
1476년 《삼국사절요》를 공편하였다.
1477년 이해 《동문선》 130권을 신찬하였다.
그의 역사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는 《삼국사절요》·《동국여지승람》·《동국통감》에 실린
그의 서문과 《필원잡기》에 실린 내용이다.
《삼국사절요》의 서문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세력이 서로 대등하다는 이른바
삼국균적(三國均敵)을 내세우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의 서문에서는 우리나라가 단군(檀君)이 조국(肇國)하고, 기자(箕子)가
수봉(受封)한 이래로 삼국·고려 시대에 넓은 강역을 차지하였음을 자랑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은 이러한 영토에 대한 자부심과 역사전통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여 중국의
《방여승람 方輿勝覽》이나 《대명일통지 大明一統志》와 맞먹는 우리나라 독자의 지리지로서
편찬된 것이다. 이와같이, 그가 주동하여 편찬된 사서·지리지·문학서 등은 전반적으로 왕명에 의해서
사림인사의 참여하에 개찬되었다.
<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朝鮮前期史學史硏究(韓永愚, 서울大學校出版部,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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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비사는 왜 불태워 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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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근이 9변도국으로 고쳐 부른 신지비사의 근원은
행촌 이암(李嵒 1297-1364)의 단군세기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한종유(韓宗愈 1287-1354)의 영향이 미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권근은 이암의 아들 이강의 사위로 처조부라는 인과 관계에 있으며 ‘양촌집’에 이암에 관련된 시를
남겼고, 고려조 좌정승 한종유는 외조부로서 많은 문헌을 남겨 가풍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면 신지비사는 왜 불태워 졌을까?.
9변도국에서 보듯 고조선의 위치가 대륙 깊숙이 존재해 있었고, 이러한 근거가 명나라로써는
눈에 가시처럼 여겼을 것으로 본다. 명의 속국 입장에서 상국에 대한 거슬림을 사전 예방하여
그 어떤 억압이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차단하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 慶州大學校 論文集. 第六輯 ‘神誌秘詞’에 기록된
古朝鮮 3韓組織의 構造와 機能1.2 李康植, 淸州韓氏大同譜 1993>를 참조,
재 정리했음.
< 경주대학교 논문집. 제육집 ‘신지비사’에 기록된
고조선 3한조직의 구조와 기능1.2 이강식, 청주한씨대동보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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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암(李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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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7(충렬왕 23)∼1364(공민왕 13). 고려의 문신. 본관은 고성(固城). 초명은 군해(君侅).
자는 고운(古雲), 호는 행촌(杏村). 존비(尊庇)의 손자이며, 철원군 우(鐵原君瑀)의 아들이다.
1313년(충선왕 5) 문과에 급제하고, 충선왕이 그 재주를 아끼어 부인(符印)을 맡겨서 비성교감(秘省校勘)에 임명되었다.
1332년 충숙왕이 복위하여 충혜왕의 총애를 받았다고 하여 섬으로 유배되었다가
1340년 충혜왕의 복위로 돌아와 지신사(知申事)·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정당문학(政堂文學)·첨의평리(僉議評理)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찬성사를 거쳐
좌정승에 올랐다. 공민왕초 철원군(鐵原君)에 봉하여졌으나 사직하고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갔다가, 다시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제수되었다.
1359년(공민왕 8) 홍건적이 침입하므로 문하시중으로서 서북면도원수가 되었다.
1361년 홍건적이 개경을 핍박하므로 왕을 따라 남행(南行)하였고,
이듬해 3월 좌정승에서 사퇴하였다.
1363년 왕이 안동으로 피난할 때 호종한 공로로 1등 공신으로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하여지고 추성수의동덕찬화익조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翊祚功臣)이라는 호를
하사받았다.
글씨에 뛰어나 동국(東國)의 조자앙(趙子昻)으로 불렸으며, 특히 예서와 초서에 능하였고,
필법은 조맹부(趙孟頫)와 대적할만하며, 지금도 문수원장경비(文殊院藏經碑)에 글씨가
남아 있다. 그림으로는 묵죽에 뛰어났다. 우왕 때 충정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高麗史, 高麗史節要〉 *이암-이강女-권근-권제-권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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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유(韓宗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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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7(충렬왕 13)∼1354(공민왕 3). 고려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사고(師古), 호는 복재(復齋). 한양출신. 밀직 영(英)의 아들이다.
1320년(충숙왕 7) 심왕 고(瀋王暠)가 왕위를 노려 충숙왕과 대립하자 왕을 위하여 노력한
이조년(李兆年)과 더불어 의논하고 간신을 잡아 물리치니,
심왕에게 왕위를 전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342년(충혜왕 복위 3)에는 조적의 난으로 충혜왕이 원나라에 불려간 적이 있었는데
이때 시종 충절로 충혜왕을 변호하였다.
1343년에는 한양군(漢陽君)에 봉하여지고 찬성사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왕이 악양(岳陽)에 행차할 때에 왕에게 충성한 사람은 그와 이조년뿐이었는데,
이조년이 죽자 원나라에서는 원자(元子)를 부탁하고자 그를 부르게 되었다.
1344년 좌정승에 임명되었다.
충정왕이 왕위에 오른 뒤 권신들이 정치를 멋대로 처리하자 부원군(府院君)으로 향리에
물러앉아 도읍에 나타나지를 않았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高麗史, 高麗史節要.> *권희(한종유女) -권근 -권제
신지 혁덕이 쓴 9변도국 서효사
서효사의 내용 참조 http://blog.daum.net/skachstj/16462248
한민족 국통맥 9000년 역사 특강이 진행 되고 있습니다
남촌선생 힐링캠프 독자모임 주관
첫주 - 국통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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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토요일 오후6시
서울숲역 2번출구 호유빌딩 415호
문의 010-5775 5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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