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변경(大辯經)은 어떤 책인가
카카오 환단원류사 박민우 카톡강의방에서 발췌 2019.5.22 / 윤석현 | 2012.12.08 21:53 | 조회 8643
대변경 大辯經 은 어떤 책인가
대변경(大辯經)은 ‘환국-신시-삼한’에 유래한 고유 3수 원리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자
고대 역사를 3수 원리로 설명을 하고 있는 역사 경전이다.
“심경(心經)” 이나 “명심보감(明心寶鑑)” 처럼 문체가 완전히 다른 15권 이상의 책 핵심 문장을 추려서 모아 놓은 형태다.
나이테 1.
그런데 이 책. 주자 이상의 강박관념이랄까?
정말이지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정치, 종교, 역사 전반에 대해서 큰 틀은 철저하게 3수 원리로만 설명이 하고 있다.
경전으로서의 의미로 보자면 갑골 문자의 사상이나 동이족과 관련된 사상 이해 기부터 ‘단군세기’에서 ‘태백일사’ 까지
나오는 3수와 관련된 사상을 이해하는데 더 이상이 없는 최고의 경전으로 보인다.
<大辯經(대변경)에 담겨져 있는 내용
1) 정신문화적 차원
(1) 삼신 (조화신,교화신,치화신)
(2) 삼진 (성,명,정),
(3) 삼망 (심,기,신),
(4) 삼도 (감,식,촉)
(5) 삼식 (영,지,의)
(6) 삼혼 (영혼,각혼,생혼)
2) 역사 현상 분석
3수 원리에 입각하여 고대 역사를 분석을 하고 있다.
(1) 환(桓),단(檀),한(韓),
(2) 신시씨(神市氏), 청구씨(靑邱氏), 조선씨(朝鮮氏)
(3) 전(全),선(仙),종(宗)의 천도(天道), 지도(地道) 인도(人道)의 원리등
3) 고조선 3왕조 시대 분석
(1) 1세 단군 왕검부터 21세 단군 소태 까지를
수도는 송화강 아사달,
나라 이름 3한(三韓),
(2) 22세 색부루 단군부터 43세 물리 단군까지를
수도는 백악산 아사달
나라 이름 3조선(三朝鮮),
(3) 44세 구물단군부터 47세 단군 고열가 까지를
수도는 장당경 아사달
나라 이름 대부여 시대로 보고 있다.
4) 고조선의 제도 원리 분석
(1) 고조선 1왕조였던 삼한(三韓)은 조정을 3으로 나누어 통치하는 분조관경(分朝管境),
(2) 고조선 2왕조였던 삼조선(三朝鮮) 권력을 3으로 나누어 통치하는 분권관경(分權管境)
(3) 고조선 3왕조였던 대부여 시대는 마한 진한 번한이 완전히 다른 나라로 분리 되었다고 분석했다.
☞ 담고 있는 철학적 사상의 연대를 유추 해 보면 3수 원리이기에 음양 사상 보다 고대 사상에 해당한다.
음양론을 바탕으로 한 격물치기의 현실주의 중용(中庸) 보다도 더 형이상학적인 부분이 강조 되어 있어서
담겨져 있는 내용은 중용 보다 훨씬 더 고대의 사상임을 알 수 있다.
<大辯經(대변경)의 최초의 저본의 저자의 주체와 시칭>
환국(桓國), 신시(神市), 삼한(三韓)에 대한 역사서이다.
(1) 고조선은 수도를 3번 천도한 3왕조 시대로 분석하고 있다.
(2) 조정을 3개로 나누어 통치한 광대한 제국으로 보고 있다.
2) 고구려 개국 고주몽에 대한 내용 까지 나온다.
3) 고구려 초기 사관들이 3성조(三聖祖)시대 역사를 분석한 시각으로 적혀져 있다.
☞ 고구려 역사서가 大辯經(대변경)의 저본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이때 책 이름은 大辯經(대변경)이 아닌 經(경) 또는 단음절의 다른 이름이었을 것이다.
나이테 2.
그런데 대변경 원문을 보다 보면 이 책을 편집한 사람이 고대서적을 엄청 많이 읽고 연구한 학자의 느낌이 난다.
문장 마다 나타나는 문체와 문법이 다 다르고 설명하는 방식과 설명하는 사상이 다르다.
거대한 나무의 나이테를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그러면서도 3수 원리와 관련된 다양한 사상과 주석들을 총 집대성 하여 사상적 통일을 이룬
거의 완벽에 가까운 3수 철학 경전으로의 모습도 보인다.
이 부분에서는 대변경(大辯經) 고대의 문헌이 아니라 후대의 문헌으로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고대의 저본을 바탕으로 주석들을 모아 놓은 듯한 느낌의 책이다.
그래서일까? 주자가 중용(中庸) 원문에 주석을 달은 집주(集註)와 같은 느낌을 주는 책이다.
<나이테 2. 대진국(발해) 시대에 사상적 통합이 된 흔적>
1) 통일 신라는 불교 중심의 문화권에 있었던 시기였기에
환단의 사상을 집대성 할 수 있는 문화 여건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2) 고려는 왕건이 고려를 개국 하던 시절부터 문화는 당나라 영향을 많이 받았다.
현재 대한민국이 미국의 문화 영향권에 있는 수준으로 보인다.
3) 大辯經(대변경)의 저본이 되었을 고구려 역사 문헌을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문화권은 고
구려 유민의 나라 대진국(발해)이었다.
4) 환단(桓檀)으로 대변되는 민족의 정체성, 그리고 동이족 고유의 3수 원리와 관련된 다양한 사상과 주석들을
총 집대성 하여 사상적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문화적 여건이 조성 되었던 시기는 대진국(발해) 시기였다.
☞ 朝代記 (조대기)처럼 대진국(발해) 시대의 여러 문헌들이 하나로 편집되었을 가능성이 보인다.
책 이름도 여러 문헌이 하나로 되었다는 뜻에서 클 대(大)자가 붙었을 것이다.
환단고기에 나오는 대변설(大辯設)이 혹시 大辯經(대변경)의 저본이 되는 책이 아니었을 까 추측해 보기도 생각해 본다.
나이테 3.
이제 문장을 세세하게 검토하기 시작 하면 잘 비벼진 전주-비빔밥 같은 문장이 나온다.
하나의 문장 안에 시대가 다른 다양한 학설의 이론들을 설명하는 주석(註釋)이 중구 남방으로 인용 되어 있다.
주석의 경연장, 주석의 난장토론 같기도.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커다란 틀에서의 3수 원리를 논하면서도
세밀한 부분에서는 음양론적 배열이 나와 있는 곳이 있다는 점이다.
<고려 말 음양이 바탕이 된 유학적 설명이 덧붙여진 흔적>
1) 어떤 부분은 신교적 색체가 나오기도 하고 다음 줄에는 유교의 색체가 나오기도 하고.
2) 3수 원리를 설명하는데 일부러 1을 빼서 음양의 바탕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3) 행촌 이암 선생이 1363년 공민왕 12년 10월 3일에 쓴 단군세기 서문에 인용된 고문과 같은 사상적 철학,
비슷한 문체들이 나오고 있다.
4) 책 소지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문란적으로 몰려 9족을 멸하던 조선시대에 3수와 관련된 사상을 통합을 하는 책을
쓸 이유도, 쓸 수도 없다.
☞ 단군세기 서문 보다는 더 이전의 글로 추측이 된다. 유교적인 해석이 들어 간 것은 고려 중엽이나 말엽으로 보인다.
大辯經(대변경)이란 책 이름이 정해 진 것도 이무렵 일 것으로 추측된다.
017-1
-- 대변경이 전해지지 못한 사연에 대한 소고
이맥(李陌)
조선시대사인물 조선전기 성균관전적, 사헌부장령, 동지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정부(井夫), 분야 조선시대사유형인물. 시대조선. 성격문신, 성별남, 출생일1455년(세조 1) 사망일1528년(중종 23)본관고성(固城), 경력성균관전적, 사헌부장령, 동지돈녕부사관련사건중종반정조선전기 성균관전적, 사헌부장령, 동지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정부(井夫). 이강(李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의정 이원(李原)이다. 아버지는 이지(李墀)이며, 어머니는 정보(鄭保)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1474년(성종 5)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그 뒤 학문에만 힘쓰다가 1498년(연산군 4) 44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곧 성균관전적에 제수되고, 이어서 벼슬이 누천되어 사헌부장령에 이르렀다.
이때에 장숙용(張淑容)이 연산군의 은총을 기화로 호화주택을 짓고 축재에 광분함을 보고,
수차례에 걸쳐 이를 탄핵하다가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외방에 유배되었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몰려나면서 다시 관계에 진출하여 성균관사예에 제수되고,
이어서 사헌부장령을 겸하고서 관기 확립에 힘썼다.
벼슬이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이르렀는데, 성품이 매우 강직하고 매사에 공정하였다.
참고문헌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중종실록(中宗實錄)/국조방목(國朝榜目)/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집필자집필 (1997년) 최완기
이맥(李陌)은 태백일사를 쓰신 분이신데이맥이 『태백일사』를 썼다 『태백일사』를 쓴 이는 이맥李陌(1455~1528)이다. 이맥은 연산군 때 사람인데 너무 강직해서 연산군의 미움을 사 충북 괴산으로 유배당했다. 그리고 다시 풀려나 벼슬길에 복귀하였는데 그의 호가 일십당一十堂이요 『단군세기』를 쓴 행촌 이암李嵒의 현손(고손자)이었다. 연산군이 몰락하고 난 뒤 중종이 즉위하자 유배지에서 풀려나서 찬수관纂修官으로 재등용되었는데 그때 내각에 있는 비장도서를 읽고 깜짝 놀랐다. 우리 역사의 시작 즉 상고사가 전혀 달랐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단군 이전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던 것이다. 이맥이 내각의 비서를 읽고 『태백일사』를 지은 것은 중종(1506~1544) 초의 일이었다.
세조(1455~1468)가 모든 상고사 기록 즉 『고기』를 거두어들이라는 명(收書令)을 내린 지 불과 50년 뒤의 일이었다. 세조 2년, 왕은 각도 관찰사에게 민간에서 소장하고 있는 모든 상고사 기록을 압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영을 어기고 책을 숨기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하였으니 진시황의 분서갱유와 비슷한 문화탄압이었다. 이때 압수된 고기의 서목이 실록에 기재되어 있는데 그 중의 일부 서목이 『태백일사』에 수록되어 있다. 때문에 이맥은 목숨을 걸고 『태백일사』를 저술했던 것이다.
잠시 이맥이 『태백일사』를 쓰게 된 동기를 살펴보기로 하자.
때는 갑자년(연산군 10년 1506). 내가 괴산에 유배되었을 때 적소謫所에서 근신하고 있으니 너무 무료하여집에 간직해 두었던 사전史典들과 노고들에게 들은 이야기, 그리고 유배지에서 풀려난 뒤 16년 만인 경진년(중종 15년 1520)에 찬수관纂修官으로 있을 때 내각에 소장된 비밀스런 책들을 읽고 이들을 모두 합해서 책을 엮었는데 이름하여 「태백일사」라 한다.
(『태백일사』 발문跋文)
『태백일사』의 <일사逸史>란 말은 "정사正史에서 빠진 태백의 역사"란 뜻이다.
태백이란 태백산 즉 환인 환웅 단군의 역사란 뜻이다.
태백의 역사가 왜 빠졌는가 하면 조선왕조가 이를 금지하였기 때문이다.
당시의 조선왕조는 명나라와의 외교적 문제를 고려하여 단군 이전의 역사를 금지했던 것이다.
상고사는 금지된 역사요 국시國是에 위반되는 역사였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책의 소장자를 죽이겠다고까지 으름장을 놓았겠는가.
『태백일사』를 소중하게 간직하여 후세에 전한 분이 바로 이맥의 후손인 해학海鶴 이기李沂(1848~1909)였다.
이기 선생은 한말의 애국지사로 이름난 분이었고,
『환단고기』를 통해 우리 나라 상고사를 밝혀 준 숨은 민족사가이기도 한 것이다.
그의 호가 일십당一十堂이요 『단군세기』를 쓴 행촌 이암李의 현손(고손자)
연산군이 몰락하고 난 뒤 중종이 즉위하자 유배지에서 풀려나서 찬수관纂修官으로 재등용
이맥이 내각의 비서를 읽고 『태백일사』를 지은 것은 중종(1506~1544) 초의 일이었다.
세조(1455~1468)가 모든 상고사 기록 즉 『고기』를 거두어들이라는 명(收書令)을 내린 지 불과 50년 뒤의 일이었다.
이맥은 목숨을 걸어놓고 태백일사를 쓴 것입니다.
때는 갑자년(연산군 10년 1506). 내가 괴산에 유배되었을 때 적소謫所에서 근신하고 있으니 너무 무료하여
집에 간직해 두었던 사전史典들과 노고들에게 들은 이야기, 그리고 유배지에서 풀려난 뒤 16년 만인
경진년(중종 15년 1520)에 찬수관纂修官으로 있을 때 내각에 소장된 비밀스런 책들을 읽고
이들을 모두 합해서 책을 엮었는데 이름하여 「태백일사」라 한다.
(『태백일사』 발문跋文)
오늘 주제가 대변설(大辯設) 조대기 대변경인데
이야기가 점점 길어집니다. 이맥의 일을 마무리 짓고 다음은 대변설 조대기로 갑니다. 단고기와 훈민정음이 합창하는 인간 갱생의 길인하대 정치외교학과/융합고고학과 남 창희 - 조선왕조 최초의 금서 사건
세조의 역사서 수거령은 왜 내려졌나?
『조선왕조실록』 세조3년(1457)
5월 26일(무자) 3번째 기사
• 팔도관찰사에게 유시하기를,
“『고조선 비사(古朝鮮秘詞』,
『대변설
(大辯說)』,
『조대기(朝代記)』,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誌公記)』,
『표훈(表訓)』,
『삼성밀기(三聖密記)』,
『안함노 원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 (중략)
등의 문서는 마땅히 사처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進上)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
그래요 세종대왕 때 세종대왕의 스승이신 이맥의 증조부가 말입니다.
소격서에 제사를 지내는 관리로 재직했거든요.
세종이나 성종이나 할아버지 증손자간에 끈끈하게 조상을 잘 모시려는 충정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조 때 그러니까 문종 단종 세조입니다.
수서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수서령은 일단 소격서 폐지의 시작 점이 되는 것입니다.
조선은 신하들이 세운 나라이고 신하들이 왕권을 견제하며 이건 유교를 받들고 공자를 시조로 모시기 때문에
단국천황은 아예 머리속에 없는 것입니다.
그마저도 일연 때문에 단국 천황이 단군으로 격하되어 머리 속에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고려 말 조선초의 상황을 보면
민심이 흉흉할 수록 소위 미신이라고 하는 산천제신 도교 무교 신앙이 속속들이 행해져서 왕권이 흔들릴 정도였으며
그것도 궁중에서 왕비까지 궁녀들도 유교 보다는 도교적 무속 신앙에 몰래 퍼다주고 신봉하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왕의 입장에서 보면 신하보기도 민망하고
그래도 세종대왕은 너그나그캐라 라면서 신하 눈치 안보고 신미대사하고 친하게 지내고 그랬습니다.
소격서폐지 라는 말을 계속 묵살하면서 말입니다.
그런 상황의 조선 초기는 유교를 신봉하는 신하 유생들이 불교 무속 도교를 억압하려고
줄줄히 서서 오만가지 수단을 동원하던 때였습니다.
그런 정책적 분위기에서 세조는 명나라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었고
또 신하들에게도 입닥치게 할 필요가 있기 깨문에 수서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 아들 예종 대에서도 수서령이 내려집니다.
예종실록의 2차 수서령
• 傳于禮曹曰: “《周南逸士記》、《志公記》、《表訓天詞》、《三聖密記》、《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文泰》ㆍ《玉居仁》ㆍ《薛業三人記》一百餘卷, 《壼中錄》、《地華錄》、《明鏡數》, 及凡干天文、地理、
陰陽諸書家藏者, 京中限十月晦日, 呈承政院, 外方近道十一月晦日, 遠道十二月晦日, 納所居邑。 納者超二階,
自願受賞者及公私賤口, 賞綿布五十匹, 隱匿不納者, 許人陳告, 告者依上項論賞, 匿者處斬。 其速諭中外。
금서 목록의 공통점과 정치적 이유
• 1. 사대모화 역사관과 충돌하는 자주적인 상고 역사서(태종의 싞지비사 붂서 사건)
• 2. 선가(도가) 계열의 서적으로서 유학과의 사상적 충돌
• * 단종 폐위와 사육싞 처형 후 정통성 위기에서 명의 인정을 받기 위한 사대모화로의 경도 연출과 유불선 합일에서
유학 중심의 국가이념 재편과 유림 위주 신분질서 강화
사라진 상고사서를 비밀리에 정리한 이맥의 태백일사와 고성이씨 문중
이게 말입니다.
저번 시간에 말했던 율려는 천지 본음과 관계가 있어요,
훈민정음이 삼신오제본기의 영향을 받아서 창제 되었으니까요.
정말로 훈민정음은 율려의 부활이었습니다.
저번 시간 강의를 못보신분은 율려로 검색해서 꼭 보세요 ,
오늘 강의와 연관 있습니다.
아직 삭제 안 됐으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빼먹지 말고 부지런히 봐야해요.
조선 초기까지 궁중 태일칠성신앙 소격전昭格殿)에 대해서 검색
■ 태조실록 12권, 태조 6년 8월 29일
• 태일전(太一殿)을 파하여 소격전(昭格殿)에 합하였다.
• ■ 태종실록 1권, 태종 1년 5월 13일
• 북두초례(北斗醮禮)를 소격전(昭格殿)에 베풀고, 3일 동안 재계(齋戒)하였다.
• ■ 세종실록 1권, 세종 즉위년 9월 28일
• 동지총제(同知摠制) 이숙묘(李叔畝)를 시켜 시령 조화 태일초(時令調和太一醮)를 소격전(昭格殿)에서 거행하게 하였다.
• ■ 세종실록 8권, 세종 2년 4월 26일
• 소격전(昭格殿) 태일신(太一神)에게 기우제를 지냈다.
• ■ 세종실록 8권, 세종 2년 6월 1일
• 길창군(吉昌君) 권규(權跬)를 소격전(昭格殿)에 가서 북두칠성에 초제(醮祭)하고, 저녁에 소경 중[盲僧] 7인을 불러 모아 삼십품 도량(三十品道場)을 낙찬정 안뜰에 배설하고, 임금이 수라도 진어하지 아니하고 침소에도 들지 아니하며
정성을 다하여 기도하였다.
실록의 환단사서 핵심어 소격전과 태일의 용어 데이터 빈도수조사 결과 태종, 세종과 중종 때 관심이 가장 많음
소격전 텍스트 데이터 빈도수: 태조 (13), 정종 (1), 태종 (40),세종 (71), 문종 (3), 단종 (3), 세조 (22), 예종 (4), 성종 (45), 연산군(18), 중종 (203), 인종 (1),명종 (16), 선조 (6), 인조 (4), 효종 (3), 현종 개수 (3), 숙종 (2), 정조 (1)
키워드 太一빈도수: 태조 (5), 태종 (15), 세종(27), 문종 (4), 단종 (2), 세조 (5),성종 (15),연산군(4), 중종(24), 명종 (4),
인조 (2), 현종 (1), 정조 (3), 숚조 (2), 고종 (1)
중종 때 유림들과 소격서 논쟁
중종실록 13권, 중종 6년 5월 12일 “지금의 소격서(昭格署)가 바로 이것과 같은데,
사전(祀典)으로 보면 소격서는 바로 성신(星辰)을 제사드리는 것이니, 천자라야 하늘에 제사드리고
제후는 산천에만 제사드립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제사드리는 일은 자못 예에 합당한 것이 아니니, 혁파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중종은 고집스럽게 소격서를 지키려 하였는데 중종 때 이맥이 찬수관이 되어 비밀리에 태백일사를 쓴 것과
신하들이 이맥의 탄핵을 요구한 것은 중종+이맥 vs 모화유림 간의 이념갈등 구도의 과정일 수 있다
중종 때 이맥이 찬수관이 되어 비밀리에 태백일사를 쓴 것이 들통 났다는 말은 없는데
어째거나 이맥이 궁지에 몰리고 중종이 방어합니다.
실록 텍스트분석 결과 중종의 이맥 보호/
태백일사 묵인은 태일 칠성사상과 유가의 대립을 배경으로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가설 가능
아! 대단한 발견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의 위엄
• “장령 이사공(李思恭)이 아뢰기를 이맥(李陌)은 공론에도 불합하고 사사로운 은혜를 쓰심이 이와 같으시지만
그 인물이 합당치 못합니다.“
“대간이 이줄·이맥·이공우 등의 일을 논하고, 두 번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맥(李陌)·이위(李偉)·강태수·문계창과 소격서의 일을 아뢰고, 간원이 홍경주·심의 등의 일을 아뢰니, 전교하기를…”
“대간이 정난 공신 및 노영손(盧永孫)·상산군(常山君)의 가자 및 이맥(李陌) 등의 일을 아뢰었다.
또 아뢰기를, 소격서는 조종조(祖宗朝)에서 관아로 둔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좌도(이단)는 허탄(虛誕)하여 불씨(佛氏)와 다름이 없으므로 도가(道家)의 일을 역대에 더러는 숭상하고
더러는 숭상하지 않았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관아까지 두어 허비하는 비용이 또한 너무 많습니다.
이때에 있어 혁파함이 옳습니다.”
• 좌도(유가, 불교가 아닌 고유 우주론)와 이맥이 연루된 기록이 발견됨
여기까지보면 소격서와 유교 분쟁이 심화되면서 자연히 왕은 신하의 눈치를 보면서
또 명나라의 코치까지 가미해서 수서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조선초는 바로 유교화 되가는 과정에서 고려의 상무정신이 퇴락해가는 ㄱ
중종 때 이맥의 태백일사 목록
태백일사가 당시 정리 될 수 있었던 계기가 바로 탄압의 결과 였단 역설
902-1
강화도 大始殿 의 행촌 이암 영정
902-2
이래도 조선이 대륙에서 일제시대까지 있었단 말이 나옵니끼
단군세기의 저자 이암의 손자 이원은 세종의 스승이자 우의정/좌의정
902-3
궁중 선가제사에 이원이 자주 등장
이원은 이맥의 할아버지입니다.
피가 다릅니다.
그 후손들은 대대로 환민족사를 지켜왔습니다.
환단고기도 그 후손의 손에서 만들어집니다.
해학이기
■ 태종실록 1권, 태종 1년 5월 21일
• 좌승지(左承旨) 이원(李原)을 보내어 금성 양초(金星禳醮)를 신도(新都)의 소격전(昭格殿)에서 행하였다.
• ■ 세종실록 4권, 세종 1년 6월 8일
• 이조 판서 맹사성에게 명하여 소격전(昭格殿)에 비를 빌고, 검교 한성부윤(檢校漢城府尹) 최덕의(崔德義)로
석척 기우(蜥蜴祈雨)를 경복궁 경회루 못가에서 지내게 하고, 우의정 이원으로 원구(圓丘) 에서 비를 빌게 하였다.
• ■ 세종실록 16권, 세종 4년 4월 29일
• 성산 부원군(星山府院君) 이직(李稷)을 종묘(宗廟)에 보내어 기도드리고, 좌의정 이원(李原)을 소격전(昭格殿)에 보내어
기도드리게 하였다.
• ■ 세종실록 29권, 세종 7년 7월 15일
• 좌의정 이원이 아뢰기를, 제사하는 도(道)는 정결하게 하고 정성을 다하면 복을 받게 되고,
그렇지 아니하면 신이 흠향하지 않을 뿐 아니라, 화(禍)가 또한 따르는 것입니다.
어찌 외방에다가 사당을 설치하여 제사하게 한 것입니까.
하물며 별에게 제하는 장소로서 소격전이 있지 않습니까."하였다.
오늘의 끝 순서
선가 사서의 학맥과 세종대왕의 극비 프로젝트 훈민정음
천지인과 오행 표현 일색인 훈민정음, 삼싞오제본기의 영향?
902-4
삼신오제본기와 훈민정음의 신관
盖五行在天則
神之運也,
在人則仁禮信義智
神之運也,
肝心脾肺腎質之成也
<정음해례 8>
훈민정음 정인지 서문
902-5
훈민정음 정인지 서문 발췌
我殿下,天縱
之聖,制度施爲
超越百王
훈민정음 해례원문 발췌
•天啓聖心而假
手焉者乎
훈민정음의 대국 조선 정체성
一朝制作侔神工,大東千古開朦朧
• 夫東方有國,不爲不久 +吾東方禮樂文章,侔擬華夏(예약문장이 화하에 견준다는 사대모화 국시와는 충돌
훈민정음에 새겨진 천부경
우주순환론
902-6
훈민정음과 천부경의 유사성
初中終合成之字言之(=천지인 삼신일체 사상)
亦有動靜互根陰陽交變之義焉(=천부경의 역사철학)
動者天也, 靜者地也,兼乎動靜者人也(=천지의 주인공 인간론)
천부경의 음양순환론과 동일한 텍스트
• 天地之化本一氣 陰陽五行相始終
§ 一元之氣 周流不窮 四時之運 循環無端
§ 故貞而復元 冬而復春
§ 初聲之復爲終 終聲之復爲初
훈민정음의 인간에 대한 정의
•人則無極之眞
(=천부경은 0무극에서 역사가 출발하여 10까지 분화발전하면 본원으로 돌아 오는 운동을 하는데
그 주인공을 인간이라고 함)
훈민정음의 천지 주인 인간론
•天地生成萬物而,
其財成輔相則必
賴乎人也
902-7
시간관계상 원문은 게시판에 올리니 참고하시고 나머지는 다음에 강론합니다.
훈민정음의 천지 주인 인간론
天地之用
發於事物
待人而成
역사의 목적은 순환운동의 에너지인 상생의 덕이 있는 태일인간 추려내기
• 一始無始一이오 析三極無盡本이니라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이니 一積十鉅 無匱化三이니라.
• 天二三 地二三 人二三이니 大三合六 生七八九하고 運三四 成環五七이니라.
• 一妙衍萬往萬來라도 用變不動本이니라
• 本心本太陽 昻明하고 人中天地一이니 一終無終一이니라
훈민정음에는 선가 소리 수행과 인간
재생의 사상이 함축
훈민정음 음운 수행론
•字韻則淸濁之能辨
•樂歌則律呂之克諧
•(노래로 율려 조화 가능)
훈민정음의 선가 수행의 요체
•ㆍ之貫於八聲者
•猶陽之統陰而
•周流萬物也
명상과 소리로 음양 균형회복
소리내어 행복을 만끽하는 홍산인 (환단고기는 홍산문화의 문화백서)
일본의 홍법대사 쿠카이 스님에 대한 방송과 천지인 一元으로 돌아가는 훔 소리 수행설명
결론:
• 1. 세종의 학맥에는 행촌 이암 고성이씨의 자주적 역사철학이 있고 이암의 손자 이맥의 태백일사와
훈민정음의 키워드 비교 분석을 통해 훈민정음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세종의 뜻이 노출되었고
• 2. 훈민정음의 모음, 자음 제자원리에는 환단사서의 삼신오제 즉 태일칠성 사상이 스며들어 있으며
합자원리에도 천부경 인간 존중사상이 노골적으로 설명되어 있는데
• 3. 클래식 음악처럼 좋은 소리는 위로이자 치유, 그리고 공동체의 생명 공감 능력의 증폭기(앰프)인데
백성을 생명과 성공의 길로 인도(훈민)하는 소리는 도대체 무엇일까에 대해 일본의 최고의 고승 쿠카이 스님의 답은
생명의 종자소리 “훔”이고 현대의학 디팍 초프라의 임상실험에서 훔 sound의 효과 입증
(심장 앆정, 암세포 억제)
• * 북극성(태을성)을 의식하며 음양균형 생명 종자 소리를 반복하는 홍산문화 이래 우리 전통 수행법의 가치 재발견 필요
뭔가 오바하는 느낌은 있지만 대체적으로 소리가 만물을 소생한다는 데는 공감이 갑니다.
그리고 이맥의 년대에 있었던 선가사서와 유가의 충돌론도 그리고 그 비서들이 자취를 감추게 된 내력도 알게 되었으며
비서들에 얽힌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엇으며 소격서 소격전이라는 사원을 통해서 조선 군주의 힘이 약해서
신하의 눈치를 봐가며 환단을 생각했다는 눈이 뒤집힐 정도의 충격적인 내용
도대체 나라가 뭔지 공자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조선을 통째로 말아먹고 600년간 환단사가 내팽개쳐져 저자에 굴러다녔어도
사라지지 않는 저력은 바로 우리가 환단원류사를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대변경 대변설 조대기 삼한비기 표훈천사 등등의 현재 태백일사를 통해서
그 나마 남아잇는 원전의 내용을 검토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한가지만 고구려의 사서는 유기 라는 짧은 제목으로 신라의 사서도 국사라는 짧은 제목으로 지어 졌지요
그러므로 대변설 이라는 제목은 대변경과 같은 것으로 역사를 삼수분화 철학으로 새긴 것으로 사료됩니다.
제목도 단순하여 모든 것에대한 말씀 이라는 뜻이지요.
안능시야
조대기는 동국통감 이라는 사서와 그 뜻이 상통합니다.
조선초에 동국통감을 짓기 전에 도참설로 낙인된 조대기를 말살하고
제목을 바꾸어 동국통감으로 역사를 재편성하게 됩니다.
이게 수서령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중종이 조광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선대에 세종께서도 소격서를 폐지하지 않았노라
그러자 조광조는
중종은 폐지를 요구하는 조광조에게 "세종께서도 소격서를 철폐하지 않았다."며 반론하자
조광조는 대뜸 "세종대왕의 유일한 오점이 바로 소격서를 남긴 것."이라고 받아쳤다.
이 때문에 열받은 중종은 이 놈하고 계속 가다가는 사달나겠다고 결론을 내린 것
예나 지금이나 급진적이고 과격한 개혁에는 무리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중용이 필요한 것입니다.
조선은 그래도 끝까지 유교를 숭상하는 나라였으므로 왕은 또 중용의 치를 발휘해서 조광조를 복권시킵니다.
어찌보면 시간이 해결한 것으로 보입니다.
모두 마음이 가라 앉았고 조용해 지니까 선비 유생들의 입김이 점점 강화 되면서 왕도 유교에 빠지고
그래서 복권을 하게 됩니다. 조광조는 충신인데 입바른 소리 한 거 가지고 중종이 너무 과민 반응했다는
그래서 중중이 죽고 없으니까 슬슬 중존의 이유없는 살생에 대해 명분을 찾지 못하다가
후세 사가들이 중종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남곤 심정을 희생 삼아 조광조를 죽이는 주초위왕이라는 역모 색출 사건을
만들어서 유포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왕은 이유없는 부당한 살생을 하면 안 되거든요. 그러면 그 역시도 연산군 처럼 쫓겨나게 되있었거든
어째거나 조선왕조실록에는 나뭇잎에 꿀물로 주초위왕이라 써가지고 한 사람을 매장 시킨 이야기는 없습니다.
중종대왕께서 열 받아서 갑자기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린 이야기만 기록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교의 수제자 조광조가 죽고 나서 어수선하니까 왕은 아무 죄없는 신하를 별다른 이유없이 죽여버렸으니
왕이 살인죄를 덮어써야 할 입장인 것이지요.
그걸 벗어나기 위해 왕을 위해 남곤을 희생시킨 사건
[출처] 902. 대변설(大辯設) 대변경(大辯經)|작성자 집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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