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조상님 먼
조상님은 대방국 사람이었다. 그리고 우리 가문의 시조 되시는 분은 중국과의 국경에 접해있으면서 전란이 많아서 또는 관리로써의 부임문제로 인해
고려말에 중화족과 동이족의 접경지에서 내륙쪽으로 들어오신 것이다. 필자는 고대의 대방지역이었던 그곳이 중국과 고려의 국경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마도 최근 재야사학계에서 주장하는 대륙고려의 학설을 살펴본다면 필자의 말이 맞을것이다.
혹자는 그럼 지나족의
후손이 아니냐? 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지나족이었으면 고려말기에 경상북도 선산에 정착하면서 곧바로 정부관리로 임용이 되었을까? 언어란
그나라의 문화와 관습을 빠짐없이 알고 있어야만 소통이 가능한 것이다.소위 netive 수준이란 그나라에 외국인으로써는 20년을 살아도 그나라
국민의 언어수준이 되기는 거의 불가능 하다. 정부관리라면 적어도 그나라에 살고 또한 고려말의 정세상 중국쪽과의 악화된 관계로 볼 때 외국인인
중국인일 수가 없다. 현재의 법도 그와 같듯이 고위 관리가 다른 국가 출신이면 이적행위를 할 수 있기에 타국국민은 그나라의 고위관리에 임용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할 수 있다.
실제 중국 산동반도와
요동쪽의 지역 언어는 중국의 서쪽지방의 언어와는 판이하게 다르다이렇게 덕산(德山) 황(黃)씨 가문은 경상북도 선산에 정착하면서 후손 대대로 묻힐
묘지가 있는 산의 이름을 대방산이라 지었고 후일 대방산 앞에는 대방초등학교가 설립되었다. 필자에게는 조상님들이 후손들에게 " 너희들의
본고향은 대방이었다. 이를 잊지 말아라" 하는 유시로 들린다. 덕산 황씨와 함께 경주 김씨들은 경상도에 정착하기 전만해도 만주와
카스피해를 오고가던 종족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금족이라 칭하였으며 자칭 금족들은 반도경주에서만 정착한 것이 아니고 서 아시아와 중앙아시아, 대륙과 만주 곳곳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밝다는 뜻을
가진 金이라는 뿌리말을 지켰고 한 가지가 신라(새라불, New Land/Field)를 세웠고, 통일의 전통을 이어받고자한 후금(황금족의 후예)의
누루하치는 중원을 제패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청나라는 조선이 괘씸했을 수도 있다. 고려의 건국과 조선의 건국에 1등공신이 모두 여진족이며 항상 같은민족으로 운명을 같이 해왔는데 정작 여진이
지나족을 정벌하여 대류을 수복하려 하자 인조가 타민족의 편을 들어 청나라를 공격하려 하니 배신감을 느꼇을 수도 있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지 않고
광해군이 왕위를 계속 이었다면 병자호란의 비극은 없었다.
미국이나 중국이나 본래
자신들의 것은 거의 없다 .다민족 국가는 세계 여러곳에서 유입된 사람들의 집합체일 따름이다. 그곳에서 민족을 찾는다는 것은 국가분리주의자로
보일것이다. 지나족이 그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면 한마디로 웃기는 이야기다.
중국인들의 주장은 항상
놀부심보였다. 네건 내꺼고 내건 내꺼다. 무엇이든지 모두 내거다. 그것이 중국인들 주장이다. 심지어 중국인들은 징기스칸 조차도 민족의 영웅이라고
칭하고 있다.그들이 반원운동을 해서 몽고를 북방으로 몰아낸 주원장을 그토록 칭송하면서도 말이다.(정말로 황당한 족속들이 중국인들이다. )
사실 제대로 따지고
보면 지나족이 중원의 주인이 된적보다 동이족의 지배를 받은 기간이 더 많다. 고대는 물론이고 송나라와 요나라의 전쟁에서 송은 요에게 패해서
중원대륙을 넘겨주었고 근세의 청나라, 몽고족의 원나라,그리고 고대로의 5호16국시대에서 5胡가 그러하며 은나라가 그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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