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문덕
신묘한 책략은 하늘의 원리에 통달하였고
오묘한 꾀는 땅의 이치를 꿰뚫었으며
전쟁에서의 공 또한 이미 높으니
족한 줄 알고 그만 둠이 어떠한가?
612년 늦여름, 고구려의 을지문덕이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보낸 시이다. 이 시를 통해 우리는 을지문덕의 탁월한 문장력과 지략을 읽어낼 수 있다. 꾀임에 빠져 평양성 가까이 끌려온 지도 모르고 우쭐해하기만 하던 우중문에 대한 조롱과 지금 물러나지 않으면 곧바로 반격하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은연중에 묻어난다.
을지문덕, 우리 역사에서 시대와 이념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으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몇 안 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열전에서 을지문덕을 김유신에 이어 두 번째 자리에 놓았으며, "고구려가 대국 수나라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을지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고" 평하였다.
이러한 평가는 고려․조선 시기에도 계속되었고, 근․현대에 들어와서는 외적을 물리치고 민족 정기를 드높인 위인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그런 만큼 그에 대한 역사 기록이 많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만 '삼국사기'에 실린 전기는 중국 사서(史書)의 기록을 재편집한 것에 불과하며, 내용도 612년 수군을 격퇴한 것이 전부이다. 그의 조상․출생지․성장 과정에 대하여 전하는 기록은 아무것도 없다. 그가 평양 석다산 출생으로 어려서 부모를 잃고 혈혈단신으로 자랐다고 기술한 위인전도 있지만, 역사적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중국 사서를 재편집한 것을 제외하고 '삼국사기'에만 전하는 기록은 "자질이 침착하고 날쌨으며 지략과 술수가 있었고, 글을 해독하고 지을 수 있었다"라는 것이 전부이다. 이러한 인물평도 612년 수나라 군대를 격퇴한 전공과 위의 시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과연 고구려인의 역사 기록을 토대로 서술한 것인지 의문스럽다.
결국 우리는 중국 사서를 통해 을지문덕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들 역사서에서는 이민족 인물의 평가에 인색한 중국인답지 않게 을지문덕을 위대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을지문덕의 행적을 처음 기록한 중국사서는 '수서(隋書)'이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는 과정에 대한 서술에서 을지문덕이 이름이 나오는 것이다. 을지문덕이 태어났을 6세기 말경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급변하고 있었다. 수가 진(陳)을 멸망시키고 오랫동안 분열됐던 중국 대륙을 589년 통일한 것이다. 수는 종전의 다원적인 국제 질서 대신 중국 중심의 국제 질서를 확립하려 했다. 동북아 일대에 독자세력권을 구축한 고구려에게는 엄청난 위협이었다.
고구려는 수의 침공에 대비하는 한편, 외교적 타협을 모색하였다. 양국은 일시적으로 타협하기도 했지만, 수가 고구려 서북방으로 손길을 뻗어옴에 따라 무산되었다. 고구려는 강경책을 선택하여 598년 2월 요서 지역을 선제 공격했다. 수도 30만 대군을 동원해 반격에 나섰지만, 장마와 전염병을 만나 퇴각해야 했다.
양국 관계가 교착된 사이 주변 상황은 고구려에 더욱 불리하게 돌아갔고, 수 문제를 이은 양제는 직접 사방 정벌에 나섰다. 612년 1월 마침내 수군이 고구려 원정길에 올랐다. 전투병만 113만명, 보급병은 그 두 배, 출발하는 데만 40일. 수 양제는 이 정도면 금방 고구려를 멸망시킬 줄 알았다.
그런데 처음 만난 고구려 요동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온갖 무기를 동원하여 여러 달 공격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급해진 양제는 곧바로 평양성으로 진격하기로 마음먹고, 우중문과 우문술을 사령관으로 삼아 30만 별동대를 편성했다.
수의 별동대가 압록강에 도착했을 무렵, 을지문덕이 수에 항복했다. 이때부터 을지문덕의 행적이 나온다. 당시 을지문덕의 명성은 대단했던 모양이다. 수 양제가 우중문에게 을지문덕을 만나면 잡아오라는 밀지를 미리 주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우중문은 밀지를 받들지 않고 위무사 유사룡의 건의를 받아들여 을지문덕을 놓아 주었다.
물론 을지문덕은 수군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거짓으로 항복한 것이다. 수나라 병사들이 군량미를 몰래 버리는 것을 보고 수군의 상황를 금방 눈치챘다. 을지문덕은 수군을 더욱 지치게 만들려고 계속 유인했다. 싸우는 척하면서 도망치기를 하루에도 예닐곱 번씩, 승리감에 빠진 수군은 더욱 깊숙이 진격했다.
이제 평양성 공격만 남은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평양성도 철옹성이었다. 더구나 군량미는 다 떨어지고 병사들은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이때 을지문덕이 앞의 시를 우중문에게 보냈다. 게다가 다시 한번 거짓 항복하면서 당신들이 물러나면 우리 왕이 당신네 황제를 찾아가 뵙겠다라고 물러갈 명분까지 제공했다.
수군은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수군을 기다린 것은 고구려의 항복이 아니라 거센 추격이었다. 수군이 살수(청천강)에 이르러 허겁지겁 건널 무렵 고구려 군이 총공세를 폈다. 이때 살아 돌아간 자는 겨우 2700명, 30만 대군의 1%도 안 되었다.
이러한 중국사서의 기술에 따르면 수의 대군은 을지문덕 한 명의 지략에 말려 패배했다는 결론에 이른다. 더욱이 이때의 패배로 인해 수의 지배질서가 점차 흔들리며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을지문덕의 지략이 독자세력권을 유지하려던 고구려와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확립하려던 수의 명운을 갈랐다고 평가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 중국사서의 기술처럼 고구려는 단지 을지문덕의 지략만으로 수군을 물리쳤던 것일까? 당시 수군의 최대 약점은 군량미를 수 천리나 운반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에 고구려는 수군의 약점을 최대한 활용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국경에서 도성에 이르는 요새마다 축조해 놓은 물샐틈없는 성 방어체계를 바탕으로 들판에 곡식 한 톨 남기지 않고 성 안으로 들어가 싸우는청야수성전을 펼쳤다.
을지문덕도 이러한 성 방어체계를 활용해 유인전과 기습공격전을 전개했다. 을지문덕의 뛰어난 전술은 혼자만의 힘으로 펼쳐진 것이 아니라, 튼튼한 군사방어체계와 이를 뒤받쳐주는 조직된 군대와 백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중국사서의 을지문덕 행적에는 이러한 것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중국인들은 왜 고구려의 방어체계나 이에 바탕을 둔 전술을 제대로 기술하지 않았을까? 단순히 고구려 방어체계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을지문덕의 행적을 처음 기록한 중국사서는 <수서>이다. 수서 편찬은 656년에 완료되었지만, 을지문덕의 행적이 담긴 본기와 열전은 629-641년에 작성됐다. 이 시기는 수를 이은 당(唐)이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주변국을 멸망시키면서 고구려 원정을 한참 준비하고 있을 때이다.
상황은 수가 고구려를 원정했을 때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당도 군량미를 수 천리 운반해야 했고, 고구려 국경으로 진입하면 철옹성같은 무수한 성들을 만나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약점과 고구려의 장점을 사실대로 기술하면 고구려 원정을 제대로 추진할 수 있을까?
아마 반대가 심했을 것이다. 실제 수 양제를 따라 고구려 원정에 참여했던 정천숙이 644년 당 태종에게 고구려는 길이 멀어 군량미를 옮기기 힘들며, 고구려인들은 성을 잘 지키기 때문에 쉽게 항복시킬 수 없다며 원정을 반대했다. 당 태종도 645년에 반대를 무릅쓰고 고구려 원정에 나섰지만 안시성을 넘지 못하고 퇴각해야 했다.
고구려 군사방어체계를 사실대로 기술하면 원정을 추진하기 쉽지 않았던 것이다. 고구려 원정을 추진하지 못한다면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구축하기도 힘들었다. 612년 고구려의 승리 요인을 을지문덕의 지략 탓으로만 기술한 중국사서에는 당 태종 등 고구려 정벌론자의 야욕이 강하게 스며있는 것이다.
중국사서에 담긴 이들의 야욕을 걷어내야 수나 당의 침공을 물리칠 수 있었던 물샐틈없는 군사방어체계 등 고구려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을지문덕도 혼자만의 영웅이 아니라,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적진에 뛰어들며 일반 병사나 백성들과 고락을 같이한 불후의 명장으로 재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여호규 / ․한국외대 교수)
(조선일보, 2004.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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