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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안중근이 이토 를죽인이유 15가지 안중근 의사의 일본법정 최후진술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6. 7. 26. 14:08
故 안중근
의사(1879~1910)


분류 : 위인/ 의사/ 독립운동가
생일 : 1879년 9월
2일 생
출생지 : 황해도 해주읍
학력 : 한학을 수학하고 승마·궁술을 익혀 문무를 겸비



자료출처 :
안중근 연구소 target=_blank>http://www.ahnjewngkeun.com/index.html
href="http://myhome.hanafos.com/~lsw0725/main.htm"
target=_blank>http://myhome.hanafos.com/~lsw0725/main.htm

관련사이트: 안중근 숭모회
href="http://www.contest.co.kr/97/patriot/html/sungmo_text.html"
target=_blank>http://www.contest.co.kr/97/patriot/html/sungmo_text.html

안중근
의사 기념관 target=_blank>http://211.216.102.215/97/patriot/html/




[연보]

1879년 9월 2일 황해도(黃海道) 해주읍(海州邑) 광석동에서 출생
1895 - 천주교에 입교
1905 -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경영하던 석탄상점을 처분
1907 - 남포에 돈의학교 설립,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1908 - 대한의군
참모중장
1909 - 우덕순·조도선·유동하 등과 함께 하얼빈역에서 이등박문을 살해하고, 하얼빈 총영사 천상준언·궁내대신비서관
삼태이랑·만철이사 전중청태랑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체포됨.
1910 - 여순감옥에서 순국(사형).

글씨에 뛰어나
많은 유필을 남겼으며, 재감중에 집필한 '동양평화론'은 해박한 사적감각으로 당시의 역사적 현실을 정확히 분석함

수상경력 :
건국공로훈장중장 추서 일대기]
조국을 건지려고 생명을 바친 수많은 선연들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민족정기의 발양자야말로 안중근의사다.



의사의 본관은 순흥이요 문성공 안유의 이십대손으로 1879년 9월2일에 황해도 해주읍에서 탄생하시니 조부는 진해 현감을 지낸 인수공으로 덕망이 높은 이였고, 부친은 성균진사 태훈공이었으며 모친은 백천조씨인데 의사는 나면서부터 가슴과 배에 검은 점 일곱개가 박혀 있어 북두칠성에 응한 것이라 하여 이름을 안응칠이라 불렀다.

그 뒤 집을 신천군 두라면으로 옮겨 산수 풍경이 아름다운 천봉산 밑 청계동에서 살게 되니 의사의 여섯살적 일이었고 어려서 글을 배워 문사의 앞날도 기약되더니 일곱살부터 말타기 활쏘기를 익혀 무사의 기질을 엿볼수 가 있었다.
16세때 동학혁명을 빙자한 지방 무리들이 일어나자 부친이 모집한 장별들을 이끌고 나가 그들을 진압했었고 김홍섭공의 따님 아려양과 결혼한뒤 천주교에 입교하여 영세를 받고 또 이어 도마라는 믿음의 이름을 얻은 동시에 홍석구 신부에게서 프랑스말과 새로운 지식을 배웠다.


10년이 지나 27세때 을사조약이 체결된 소식을 듣고 일본의 불법침략을 세계에 알리고자 상해로 건너갔다가 돌아와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에 안장한 뒤 이듬해에 집을 진남포로 옮기고 재산을 기울여 돈의학교와 삼흥학교를 세워 구구인재를 양성하기에 전력을 다하다가 가슴에 끓는 피를 누를 길이 없어 29세에 블라디보스톡으로 나가 대한의군 참모중장겸 특파독립대장의 이름을 띠고서 무력에 의한 치열한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었다.


30세에는 의병 300여명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와 경흥에서 일본 경찰과 교전하였고 회령에서는 일본수비군과도 격전하였다 31세에 노령 카리에서 결사동지 11명과 함께모여 손가락을 끊어 태극기에 대한독립 넉자를 혈서했었다. 그러자 이등박문이 러시아 대장대신 꼬꼬프체프와 만나 동양정책을 협의하려고 북만주를 시찰한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의사는 이때야 말로 나라와 겨레의 원수를 갚을 때라 하고 원흉을 없애려 하얼삔에 이르렀다. 마침내 역사적인 1909년 10월26일 오전 9시반 삼엄한 하을삔역 머리에 각국 대표의 환영과 군대의 호위속에 하차한 이등박문은 단신으로 달려든 의사의 벼락같은 사격 4탄에 즉사하였다. 의사는 총을 내던지고 대한국만세를 세번 외친 다음 유쾌히 웃으면서 노국 헌병의 손에 태연히 포박되었다가 곧 다시 일본관현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 통쾌한 소식을 전파를 통하여 세계각국에 널리 퍼지자 우리와 중국인민들로서는 기뻐 뛰지 않는 이가 없었거니와 의사는 여순감옥에서 다섯달 동안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끝까지 굽히지 않았으며 특히 옥중에서 자서전과 동양평화론등을집필하는 한편 매양 법정에서 한국의 국토국권을 침해하고 동양의 평화를 유린한 것등 이등박문의 열 다섯가지 큰 죄목을 들어 규탄함과 아울러 의거의 이유를 밝히는 태도야 말로 늠름할 따름 이었다.

일제의 재판은 마침내 2월14일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동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등에게도 각각 징역이 언도되었다. 의사는 2천만 동포들에게 뼈에 사무치는 유언을 남긴뒤 새옷을 갈아 입고 여순감옥 현장에서 조용히 순국하시니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요 향년은 32세라 비록 육신의 일생은 짧았으나 정신은 천추에 길이 빛날 것이다.
혈육은 준생 현생 오누이와 손자 웅호를 끼쳤을 뿐이로되 민족정기의 후계자는 만대에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자료 : 민족의 얼
안중근의사 사진첩(사단법인 안중근의사 숭모회) 중에서 발체



중근
의사의 일본법정 최후진술



(재판장)
변호인으로부터 이미 상세한 변론이 있었지만, 피고들이 마지막으로 할말 이 있으면 진술하라



(안중근 의사)
나는 검찰관의 논고를 듣고 나서 검찰관이 나를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하얼빈에서 검찰관이 올해로 다섯 살 난 나의 아이에게 내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람이 네 아버지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대답했다고 말했는데, 그 아이는 내가 고국을 떠날 때 두 살이었는데 그후 만난 적도 없는 나의 얼굴을 알고 있을 까닭이 없다. 이 일로만 미루어 봐도 검찰관의 심문이 얼마나 엉성한지, 또 얼마나 사실과 다른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이번 거사는 개인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한일 관계와 관련해서 결행한 것이다. 그런데 사건 심리에 있어서 재판장을 비롯하여 변호인과 통역까지 일본인 만으로 구성하고 있다. 나는 한국에서 변호인이 와 있으니 이 사람에게 변호를 허가 하는 것이 지당하다고 생각한다.


또 변론 등도 그 요지만을 통역해서 들려 주기 때문에 나는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사람이 봐도 이 재판을 편파적이라는 비방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검찰관이나 변호인의 변론을 들어 보면, 모두 이토가 통감으로서 시행한 시정 방침은 완전무결한 것이며 내가 오해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는 부당하다. 나는 오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토가 통감으로서 시행한 시정방침의 대요를 말하겠다.
1905년의 5개조 보호 조약에 대한 것이다. 이 조약은 황제를 비롯하여 한국국민 모두가 보호를 희망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토는 한국 상하의 신민과 황제의 희망으로 조약을 체결한다고 말하며 일진회(一進會)를 사주하여 그들을 운동원으로 만들고, 황제의 옥새와 총리대신의 부서가 없는데도 각 대신을 돈으로 속여 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이토의 정책에 대해 당시 뜻있는 사람들은 크게 분개하여 유생 등은 황제에게 상주(上奏)하고 이토에게 건의했다.


러일전쟁에 대한 일본 천황의 선전조칙에는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한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인민들은 신뢰하며 일본과 더불어 동양에 설 것을 희망하고 있었지만, 이토의 정책은 이와 반대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최익현이 그 방책을 냈다가 송병준에 의해 잡혀서 쓰시마에서 구금돼 있던 중 사망했다. 그래서 제2의 의병이 일어났다. 그 후에도 방책을 냈지만 이토의 시정방침이 변경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황제의 밀사로 이상설이 헤이그의 평화회의에 가서 호소하기를, 5개조의 조약은 이토가 병력으로 체결한 것이니 만국공법에 따라 처분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당시 그 회의에 물의가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은 성사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토는 한밤중에 칼을 뽑아 들고 황제를 협박해서 7개조의 조약을 체결시켜 황제를 폐위시켰고, 일본으로 사죄사를 보내게 되었다.


이런 상태였기 때문에 경성 부근의 상하 인민들은 분개하여 그 중에 활복한 사람도 있었지만, 인민과 군인들은 손에 닿는 대로 무기를 들고 일본 군대와 싸워 ‘경성의 변’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 후 십수만의 의병이 일어났기 때문에 태황제께서 조칙을 내리셨는데, 나라의 위급존망에 즈음하여 수수방관하는 것은 국민된 자로서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민들은 점점 격분하여 오늘날까지 일본군과 싸우고 있으며 아직도 수습되지 않았다.


이로인해 십만 이상의 한국민이 학살됐다. 그들 모두 국사에 힘쓰다가 죽었다면 본래 생각대로 된 것이지만, 모두 이토 때문에 학살된 것으로, 심한 사람은 머리를 노끈으로 꿰뚫는 등 사회를 위협하며 잔학무도하게 죽였다. 이 때문에 장교도 적지 않게 전사했다. 이토의 정책이 이와 같이 한 명을 죽이면 열명, 열 명을 죽이면 백 명의 의병이 일어나는 상황이 되어, 시정방침을 개선하지 않으면 한국의 보호는 안 되는 동시에 한일간의 전쟁은 영원히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토 그는 영웅이 아니다. 간웅(奸雄)으로 간사한 꾀가 뛰어나기 때문에 그 간사로 꾀한 ‘한국의 개명은 날로 달로 나아가고 있다’고 신문에 싣게 했다. 또 일본 천황과 일본정부에 ‘한국은 원만히 다스려 날로 달로 진보하고 있다’고 속이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동포는 모두 그의 죄악을 미워하고 그를 죽이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삶을 즐기고 싶어하지 않는 자가 없으며 죽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한국민은 십수 년 동안 도탄의 괴로움에 울고 있기 때문에 평화를 희망함은 일본국민보다도 한층 깊은 것이다. 게다가 나는
지금까지 일본의 군인, 상인, 도덕가, 기타 여러 계급의 사람과 만난 이야기는, 내가 한국에 수비대로 와 있는 군인에게 ‘이같이 해외에 와
있는데 본국에 부모처자가 있을 것이 아니가. 그러니 분명히 꿈속에서도 그들의 일은 잊혀지지 않아 괴로울 것이다.’ 라고 위로 했더니, 그 군인은 ‘본군일이 견디기 어렵지만 어쩔 수는 없다’라며 울며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러면 동양이 평화롭고 한일간에 아무 것이 없기만 하면 수비대로 올 필요가 없을 것이 아니냐?’ 라고 물으니, ‘그렇다.
개인적으로는 싸움을 좋아하지 않지만 필요가 있으면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수비대로 온 이상 쉽사리 귀국할 수
없겠다’라고 했더니, 그 군인은 ‘일본에는 간신이 있어서 평화를 어지럽게 하기 때문에 우리들도 마음에 없는 이런 곳에 와 있다는 것이다. 이토 따위를 혼자서는 죽일 수 없지만 죽이고 싶은 생각이다.’라고 울면서 이야기 했다. 그리고 농부와의 이야기는, 그 농부가 한국에 왔다는 당시에 만나서 한 이야기이다.


그가 말하기를 ‘한국은 농업에 적합하고 수확도 많다고 해서 왔는데, 도처에서 의병이 일어나 안심하고 일을 할 수가 없다. 또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해도 이전에는 일본도 좋았지만 지금은 전쟁 때문에 그 재원을 얻는 데 급급하여 농민들에게 세금을 많이 부과하기 때문에 농업은 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에 있자니 이와 같아 우리들은 몸둘 곳이 없다’라고 한탄하며 호소했다.


다음으로 상인과의 이야기를 말하겠다. 한국은 일본 제작품의 수요가 많다고 듣고 왔는데 앞의 농부의 이야기와 같이 도처에 의병이 있고 교통이 두절되어 살 수가 없다며, 이토를 없애지 않으면 상업도 할 수 없으니 자기 한 사람의 힘으로 되는 일이라면 죽이고는 싶지만, 어떻든 평화로워 지기만을 기다릴수 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도덕가의 이야기라는 것은 예수교 전도사의 이야기이다. 나는 먼저 그 자에게 말을 걸어 ‘이렇게 무고한 사람을 학살하는 일본인이 전도가 되겠는가?’라고 물으니, 그가 ‘도덕에는 나와 남의 구별이 없다.


학살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쌍한 자이다. 천제의 힘으로 개선시키는 수밖에 없으니, 그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말했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해서도 일본인이 동양의 평화를 희망하고 있는 동시에 얼마나 간신 이토를 미워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일본인에게도 이런데 하물며 한국인에게는 친척이나 친구를 죽인 이토를 미워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간이 멀어지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또 평화롭게 다스려지면 나아가서 오대주에도 모범이 돼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결코 나는
오해하고 죽인 것은 아니다. 나의 목적을 달성할 기회를 얻기 위해 한 것이다. 따라서 이제라도 이토가 그 시정방침을 그르치고 있었다는 것을 일본 천황이 들었다면 반드시 나를 가상히 여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이후 일본 천황의 뜻에 따라 한국에 대한 시정방침을 개선한다면 한일간의 평화는 만세에 유지될 것이다. 나는 그것을 희망하고 있다. 변호인의 말에 의하면, 광무3년에 체결된 조약에 의해 한국민은 청국 내에서 치외법권을 가지니 본건은 한국의 형법대전에 의해 다스려져야 할 것이며, 한국형법에 의하면 처벌할 규정이 없다고 했는데, 이는 부당하며 어리석은 논리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인간은 모두 법에 따라 생활하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사람을 죽인 자가 벌을 받지 않고 살아 남을 도리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법에 의해 처벌돼야 하는가의 문제가 남아 있는데,이에 대해 나는 한국의 의병이며 지금은 적군의 포로가 돼 있으니 당연히 만국공법에 의해
처리돼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재판장은 이것으로써 심리를 모두 마칠 것을 알리고, 판결은 오는 14일 오전 열시에 언도하니 출정하라는 뜻을 명하고 폐정했다.
메이지 43년 2월 12일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서기 와타나베 요이치. 재판장 마나베 주조.


안중근 외 3명 제6회 공판시말서, 피고 안응칠이라 하는 안중근 외3명, 위 살인피고사건에 대해 메이지 43년
2월14일 오전 열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형사법정에서 재판장 마나베 주조출석, 검찰관 미조부치 타카오 서기 와타나베 요이치 입회하에 통역 촉탁 소노키 스에요시 통역으로 심판을 공개하다.



피고인은 모두 신체의 구속을 받지 않고 출정하며, 변호인으로 미즈노 기치다로와 세이지가 출두했다. 재판장은 계속해서 재판할 뜻을 알리고 재판장은 이 판결에 대해 오 일 내에 항소할 수 있음과, 판결의 정본.등본.초본을 청구 할 수 있다는 뜻을 알리고 폐정했다.
메이지 43년 2월 14일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서기 와타나베 요이치. 재판장 마나베 주조.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15가지
                


모두 가슴아프고 시린 말입니다..

안중근의사는 진정한 한국인이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난뒤 안중근 의사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또

재판을 받으면서 까지도 나는 이토를 죽인것에 대해 잘못이라고는 하나도 없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는 이러하다

한국의 민황후를 시해한 죄요.
한국의 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요.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정권을 강제로 뺏은 죄요.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뺏은 죄요.
군대를 해산시킨 죄요.
교육을 방해한 죄요.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요.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요.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퍼뜨린 죄요.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엔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요.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요.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아..장부가 비록 죽을 지라도 마음은 쇠와 같고 의사는 위태로움에 이를지라도 기운은 구름과 같도다.



안중근 의사 저격시 마지막 1발의 총알을 남긴 이유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오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실은 많이 알고들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권총 내에 남긴 한 발은 과연 자살하기 위해서였을까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의연하게 체포를 당했다' 라는 말과 서로 맞지 않습니다.

자살을 하려 했다면
이토오를 쏜 후 바로 자기 머리에 권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어야 합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오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은 일본의 조선 침략이 부당한 것임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이 때는 한일합방 직전)

때문에 애써 그를 죽이고 자살해버리면 너무 허망하죠.

안중근 의사에게는 저격 이후에도 재판을 통해 일본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릴

무거운 의무가 지워져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자살하려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럼 왜 실탄 한 발은 남겼는가..

그것은 그 자신이 자살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안중근 의사 자신이 일부러 체포되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이죠.

실제로 안중근 의사는 이토오 저격 후에 그 자리에서 도망치지도 않았고

이후 재판에서도 당당한 모습을 유지해서 일본인 재판관들이 많이 당황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체포 당시 그는 이후 죽음보다 더한 고문과 괴로운 수형생활쯤은 분명 각오하고 있었을 겁니다.
                


                



安重根 義士 글모음


*일본군과의 전투중
의병대원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쓴 글.



男兒有志出洋外 事不入謀難處身

남아유지출양외 사불입모란처신
望順同胞警流血 莫作世間無義神
맹순동포경유혈 막작세문무의신


역:

사나이 뜻을품고 나라밖에 나왔다가
큰일을 못이루니 몸 두기 어려워라

바라건대 동포들아 죽기를 맹세하고
세상에 의리없는 귀신은 되지 말자



*安重根의사 사형 집행을 하루 앞둔 25일 취조관 중의 한사람인 境(사카이)경시는


『東洋平和論』의 미완을 애석히 여겨 그에게 결론만이라도 써주기를 요청하자 쓴
글.



東洋大勢思香玄
동양대세사모현
有志男兒開安眠

유지남아기안면
和局未成猶慷慨
화국미성유강개
政略不改眞可燐
정략불개진가련



역:

동양 대세 생각하니 아득고 어둡거니,
뜻있는 사나이 편한 잠을 어이 들리,
평화시국
못 이룸이 이리도 슬픈 지고,
침략 정책 안 고침은 참으로 가엾도다


장부가(丈夫歌)

丈夫處世兮 其志大矣
장부처세혜 기지대의
時造英雄兮 英雄時趙

시조영웅혜 영웅시조
雄視天下兮 何日成業
웅시천하혜 하일성업
東風漸寒兮 壯士義熱
동풍점한혜 장사의열

念慨一去兮 必成目的
념개일거혜 필성목적
鼠竊伊藤兮 豈肯比命
서절이등혜 기긍비명
豈度至比兮 事勢固然

기도지비혜 사세고연
同胞同胞兮 速成大業
동포동포혜 속성대업
萬歲萬歲兮 大韓獨立
만세만세혜 대한독립

萬歲萬歲兮 大韓同胞
만세만세혜 대한동포

역: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천하를 웅시함이여 어느 날에 업을 이룰고
동풍이 점점 참이여 장사의 의기가 뜨겁도다
분개히 한번 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쥐도적 이등이여 어찌 즐겨 목숨을 비길고
어찌 이에 이를 줄을 시아렸으리오 사세가 고연하도다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만세 만세여 대한독립이로다
만세 만세여 대한 동포로다


*1908년 두만강 전투때

우리들의 소원을 단 한번에
성공하지 못하면 두번
세번 열번 백번이라도 해보고 올해 안되면 내년에
해보고 십년 백년이 걸려도 좋다.
우리대에 안되면 아들대 또 손자대까지 가서라도
대한독립을 되찾고야 말 것이다.

*이등도살가(우덕순 의사)

만났도다 만났도다 원수 너를 만났도다
너를 한번 만나고저 일평생에 원했지만
천신만고 거듭하여 가시성을 더듬었다

너를 한번 만나려고 수륙으로 몇 만리를
혹은 윤선 혹은 화차 로국 청국 방황하고
앉을 때나 섰을
때나 앙천하고 기도하며

우리 민족 이천만을 멸망까지 시켜놓고
금수강산 삼천리를 소리없이 뺐으려니
살피소서 살피소서 주 예수여 살피소서

궁흉 극약 네 목숨이 나의 손에 달렸으니
지금 네 명(命) 끊어지니 너도 원통하리로다
덕 닦으면
덕이 오고 죄 범하면 죄가 온다
너를 오늘 만나보니 너 뿐일 줄 아지 마라
너희민족 오천만을 오늘부터 시작하여
한놈 두놈
보는 대로 내손으로 죽이리라

*어머니께 보낸 옥중 편지 중에서

불소자는 감히 어머님께 한 말씀 올리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소자의 막심한 불효와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드릴 말씀은 허다하오나,
훗날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온 뒤 누누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부디 배려를 거두옵고 마음 편안히 지내옵소서.


*아내에게 보낸 옥중 편지 중에서

우리들은 이 이슬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친주의 안배로 배필
이 되었으나, 다시 헤어지게 되었소.
부디 세상에 처하여 심신을 평안히 하고 영원의 낙을 바랄 뿐이오.

size=4>*동포에게 고함

余가
韓國獨立을 恢復하고 東洋平和를 維持하기 위하야
三年間 海外에서 風餐露宿하다가
竟히 其目的을 到達치 못하고 此地에서 死하노니
惟我二千萬兄弟姉妹는 各自奮發하야
學問을 勉勵하고 實業을 振興하야 我의 遺志를 繼하야
自由獨立을 恢復하면 死者無憾이라.


역: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야
산년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도달치 못하고 이 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이천만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노력하야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뜻를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남은 한이 없겠노라.



*두 동생에게 남긴 최후의 유언


내가 죽은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나라가 주권을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큰 뜻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 오면
나는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가계도


         ;


  안중근의사 순국 직전 모습





                

 


                

우리는 현재 엄청난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나라안팎으로 경제문제며 동북아 문제며 북핵문제며  이럴때 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세상을 살아야 하겠다

출처 : ─┼★불가사의에 답이있다★┼─
글쓴이 : 진리각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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