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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정충보국精忠報國의 충의명장 악비岳飛장군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6. 7. 26. 14:25
[역사인물탐구] 정충보국精忠報國의 충의명장 악비岳飛장군
 지난 역사 속에는 뛰어난 지략과 용맹 그리고 심법을 가진 많은 명장들이 인류사에 한 획을 그으며 그 이름을 떨쳐왔다.
 종정님께서는 “모든 일꾼들이 도꾼(道軍), 즉 상제님 도의 진리군사로서 명장이 되어야 한다. 인간역사 동서고금의 명장, 창업군주, 제왕들의 심법과 왕도(王道)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중국 한족(漢族)의 추앙받는 민족영웅으로, 관성제군과 무묘(武廟)에 합사(合祀)되었고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에 비견되기도 하는, 남송시대의 명장 악비(岳飛) 장군의 삶을 통해서 진정한 도꾼, 명장의 길에 대해 생각해보자.
 
 
 

 
 ‘정충보국(精忠報國)’을 등에 새겨준 어머니
 악비 장군(1103∼1141)은 남송(南宋) 초기에 문무를 겸전한 명장으로 자는 붕거(鵬擧)이며 상주(相州) 탕음(湯陰, 현 하남성) 사람이다. 전설에 의하면 악비가 태어날 때 그의 집 지붕위로 새 한 마리가 울며 날아가, 그의 부모는 그가 장래에 높이 그리고 멀리 날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飛)라고 이름 지었다 한다.
 
 악비는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했는데, 특히 병서를 좋아하여 『손자』, 『오자』 등을 공부했다. 후에 그는 고향 어른인 주동(周同)을 스승으로 삼아 활쏘기를 익혔는데 무예가 뛰어나 양손으로 다 활을 쏠 수 있는 백발백중의 명궁수가 되었다.
 
 당시 송나라는 북방의 요, 서하와 강화를 맺고 매년 막대한 양의 세폐(歲幣)를 바치며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금나라가 일어나 강성해지자 송나라 조정에서는 금나라와 1120년에 해상(海上)의 맹약을 체결하고 요를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목주와 산동성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악비는 이때 20세 나이로 군에 입대하여 반란군 토벌에 공을 세워 병의랑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부친의 사망으로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후 금나라가 요를 함락시키고 송나라 수도 개봉으로 진격해오자 악비는 다시 의용군에 지원한다.
 
 소설 『설악전전(說岳全傳)』에 의하면, 악비가 군대로 떠나기 전 그의 어머니 도씨(桃氏)는 조상을 모신 사당으로 아들을 불러 선대의 위패에 절을 올리게 한 뒤 ‘나라에 충성하고 불의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당부하며 그것을 깊이 새기라는 뜻에서 그의 등에 ‘정충보국(精忠報國)’ 네 글자의 문신을 새겨 주었다. 그런데 ‘국(國)’ 자의 마지막 점은 새기지 않았는데, 이는 악비가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버려야 할지 모르지만, 정충보국을 실현하고 살아서 금의환향하게 되면 그때 마지막 점을 새겨주겠다고 약속했다. 그후 이 네 글자는 악비를 명장으로 만들어준 평생의 신념이 되었다.
 
 
 악비 장군의 지략과 심법
 악비가 동경에서 군관을 지내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기병 1백여 명을 거느리고 황하 기슭에서 훈련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적지 않은 수의 금나라 군이 눈앞에 나타났다. 갑작스런 사태에 놀란 군사들이 당황하자 악비는 침착하게 말했다. “당황하지 마라. 적들은 우리보다 많지만 우리 병력이 얼마인지는 모른다. 놈들이 손을 쓰기 전에 우리가 먼저 손을 쓰면 이길 수 있다.” 그러고는 앞장서서 돌진해 적장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렸다. 이에 고무된 병사들도 그를 따라 용맹하게 돌격했고, 적군은 숱한 사상자만 내고 황급히 도망쳤다. 이 일로 인해 악비의 용맹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정강(靖康) 2년(1127년), 악비가 동경유수(東京留守) 종택의 휘하로 있을 때였다. 금나라 군사가 다시 남하하여 사수를 침공하자 종택은 악비에게 금나라 병사들의 진입을 막도록 했다. 이에 악비는 죽노도(竹蘆渡)에서 적과 마주하여 한밤중에 3백 명의 병사들에게 횃불로 온 산을 밝히게 하여 병사가 많은 것처럼 위장했다.
 
 멀리서 이를 본 금나라 병사들은 산이 온통 적군으로 가득하다 여기곤 허둥지둥 퇴각하기 시작했다. 악비는 금나라 병사들의 대열이 흩어진 틈을 타 기습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악비는 고종으로부터 ‘정충악비(精忠岳飛)’라 새긴 깃발을 하사받았고 32살의 젊은 나이에는 절도사가 되었다.
 
 악비 장군은 용맹과 지략도 뛰어났지만, 개인의 영달은 일절 구하지 않았다. 한번은 고종(高宗)이 악비 장군의 집이 초라하여 임안에 집을 다시 지어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악비 장군은 “북쪽 오랑캐가 아직 멸망하지 않았는데 신이 어찌 집을 마련하겠습니까?”라고 하며 사양했다. 또 일찍이 고종이 악비 장군에게 “천하가 태평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으니 “문관이 돈을 좋아하지 않고, 무관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아야 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아들인 악운에 대한 악비 장군의 엄격함에 대해서도 많은 일화가 전해온다. 악비 장군의 정벌 싸움에 악운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전하여 몇 차례나 큰 공을 세웠지만 악비 장군은 이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 주위 장수들이 악운을 대신하여 섭섭한 뜻을 전하자 악비 장군은‘공평하지 않다’라는 한마디로 묵살했다.
 
 악비 장군의 휘하군대인 악가군은 군기가 엄격하기로 유명하였는데 건강유수였던 두충이 금나라에 투항한 후 그 휘하부대는 민가를 약탈하였지만, 악비 장군의 군사는 식량이 떨어져 사흘을 굶은 상태에서도 백성들의 재산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악가군에게는 이런 규율이 있었다. ‘얼어 죽더라도 백성의 집 재목을 뜯어 불을 피우지 않으며, 굶어 죽더라도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지 않는다.’
 
 악비 장군은 사병이 아프면 약을 지어 치료해주고, 원정을 갈 때면 사람을 보내 장병의 가족들을 다독이고 전사자 유족들을 진심으로 위로했다. 상을 받으면 자신은 하나도 가지지 않고 부하들에게 균등하게 나눠주었다.
 
 악비 장군의 이와 같은 충의로운 심법과 병사에 대한 지극한 관심, 공평무사한 대우, 겸손하고 모범을 보이는 자세, 용맹함, 지혜로움 등은 용장 지장 덕장 복장을 넘어 역사에 길이 추앙받는 위대한 명장이 되게 했다. 악가군은 이러한 악비 장군에 대한 믿음과 충성으로 생사를 함께하여 천하를 떨게 하는 불패의 군대가 되었다.
 
 

 
 억울한 죽음과 명예회복
 주선진까지 진격한 악비 장군은 고토를 수복하고자 황하를 건너 바로 금의 심장부인 황룡부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이때 고종과 재상인 진회(秦檜)는 군부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 불안을 느껴 연속해서 12개의 금패를 보내며 악비 장군에게 철군을 명하였다. 악비 장군은 “십년 고생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는구나!”하고 탄식하며 군사를 돌렸다.
 
 악비 장군의 회군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남녀노소가 모두 나와 회군을 막으며 통곡했다. 이때의 정경을 『송서(宋書)』에는 ‘백성들의 곡성이 온 들판에 가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악비 장군은 임안에 돌아오자 추밀부사(樞密副使)로 임명되고 병권을 회수 당했다. 고종과 진회는 사람을 파견하여 금나라에 강화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악비가 금나라에 끝까지 항전할 것을 주장하자 진회는 악비를 해할 음모를 꾸몄다. 그는 감찰어사 만사설(万俟卨)을 부추겨서 악비를 모함하는 상주서를 조정에 올렸다. 결국 악비는 만사설이 날조한 허다한 죄목으로 관직을 내놓고 악주로 은퇴했다.
 
 그러자 진회는 악비의 원래 상관이었던 장준(張俊)과 결탁하고, 악비군의 부장인 왕귀, 왕준 등을 사주하여 악비의 수하 장수 장헌(張憲)이 악비를 도와 병권을 탈취하려고 병변을 일으켰다고 참소했다. 그리고 악비의 아들 악운도 장헌에게 편지를 써서 이 일을 획책한 바 있다고 참소했다.
 
 이리하여 소흥11년(1141) 9월, 장헌이 먼저 옥에 갇히고 10월에 악비와 악운도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진회는 어사중승 하주(何鑄)를 보내어 악비를 심문했는데, 악비는 두말하지 않고 옷을 벗어 등에 새긴 ‘정충보국(精忠報國)’ 문신을 보여주었다. 이를 보고 크게 감동한 하주는 더 이상 심문하지 않고 그를 옥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악비의 죄목이 적힌 서류들을 읽어보았는데 반역을 했다는 것이 확실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주가 그 사실을 보고하자 진회는 그를 다른 곳으로 따돌려 버리고, 다시 만사설에게 명해 악비의 죄목을 만들게 했다.
 
 조정대신들은 악비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어떤 관원들은 상주서를 올려 악비를 변호하였지만, 도리어 진회 일당에게 해를 입었다. 이에 분노한 노장 한세충은 진회를 찾아가 악비가 반역을 했다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고 추궁했다. 그러자 진회는 “비록 증거는 없지만 혹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오?”라고 대답하였다. 결국 소흥11년(1141년) 12월, 진회는‘혹 있을지도 모른다’는‘막수유(莫須有)’라는 죄명을 뒤집어 씌워, 자신의 부인 왕씨와 비밀리에 논의하여 악비를 임안의 감옥 풍파정(風波亭)에서 독살하였다. 그리고 악운과 장헌도 참수하였다.
 
 그때 ‘외순’이라는 한 옥리가 있었는데, 그는 매일 대하는 악비의 인품에 크게 감동받아 밤을 틈타 옥중에서 악비의 유해를 운반하여 교외의 채소밭에 묻었다. 후에 외순은 임종을 앞두고 그의 아들에게 이 일을 알려주며, 훗날 악원수의 원통함을 씻을 날이 올 것이라며 이 사실을 적어서 연통(鉛桶) 속에 넣고 시신 곁에 묻어 증거로 삼으라고 당부했다.
 
 과연 22년이 지난 후, 효종(孝宗)은 악비의 유골을 수습하고 그의 충심을 기려 무목(武穆)이라는 시호를 추서하였다. 영종(寧宗) 가정(嘉定) 14년(1221년)에는 악왕(鄂王, 악은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옛 수도)에 추봉하고 악왕묘에 배향하였다. 그리고 다시 시호를 충무(忠武)로 개정하였고, 1914년 이후에는 관우와 함께 무묘(武廟)에 합사(合祀)하였다.
 
 후에 악왕묘 층계 아래에는 진회(秦檜)와 그의 부인 왕씨(王氏), 만사설(万俟卨), 장준(張俊) 이 네 사람의 상을 만들어 손을 뒤로 결박해 무릎을 꿇려서 앉혀놓았다. 그러자 악왕묘를 참배하는 중국의 한족들이 이 간신들의 상에 침을 뱉기도 하고 돌이나 몽둥이로 구타하는 바람에 철상이 훼손되어 여러 번 보수했다. 또 밀가루로 진회의 모양을 만들어서 기름에 튀겨먹는 유작회(油炸檜)라는 요리가 등장하기도 했다. 지금도 간사하고 나쁘다는 것을 이를 때는 종종‘진회와 같다’는 표현을 쓰는 것을 보면 중국인들이 진회를 얼마나 미워하고, 악비를 추앙했는지 알 수 있다.
 

 무장(武將)이면서 학자로서도 뛰어났던 악비는 전쟁터를 누비는 생애 속에서도 애국의 충정을 담은 수많은 글을 남겼는데, 그 중 ‘만강홍(滿江紅)’은 천고의 명문으로 당시는 물론 후대에도 침략에 대한 투쟁의지를 고취시키는 문장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충의명장(忠義名將)
 2003년 12월, 중국은 때 아닌 ‘민족영웅 논쟁’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중국 교육당국이 개정한 교육대강에서 “악비는 외국 침략에 대항한 인물이 아니므로 더 이상 ‘민족 영웅’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정의한 사실이 보도되면서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그동안 악비 장군은 중국사에서 이민족에 맞서 싸운 충절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동북공정의 영향으로 악비 장군이 민족통일을 방해한 인물로 격하되고 있다한다. 동북공정의 억지논리를 펴다보니 역사왜곡의 부메랑으로 자국의 충의명장인 악비 장군을 폄하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중국인들은 가장 존경하는 무인으로 삼국시대의 관운장과 남송의 악비 장군을 꼽는다. 관운장은 후세사람들이 관성제군(關聖帝君)으로까지 추앙하고 있다. 상제님께서 관운장을 칭찬하신 말씀을 통해 악비 장군이 숭상받는 면모 또한 엿볼 수 있다.
 
 
 관운장(關雲長)은 병마대권(兵馬大權)을 맡아 성제군(聖帝君)의 열(列)에 서게 되었나니 운장이 오늘과 같이 된 것은 재주와 지략 때문이 아니요 오직 의리 때문이니라. 천지간에 의로움보다 더 크고 중한 것은 없느니라. 하늘이 하지 못할 바가 없지마는 오직 의로운 사람에게만은 못 하는 바가 있느니라. 사람이 의로운 말을 하고 의로운 행동을 하면 천지도 감동하느니라. (道典 4:15:1∼5)
 
 
 개벽시대, 상제님의 천지 도꾼인 우리들은 어떻게 명장의 대열에 설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심법을 닦는 것이 제1의 우선 과제일 것이다. 천지부모와 일월부모의 삶과 심법을 그대로 느끼고 체득하여 일심정성으로 실천역행 할 때, 우리는 진정 후천 5만년 추앙받는 명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악비 장군이 정충보국을 등에 새겼듯이, 천지일월의 말씀을 각골명간하며 사명기(司命旗) 높이 들고 출사표를 던지자. 그리고 명장의 대열로 나서보자.
 
문운용 (증산도 본부)


 <참고도서>
 안경전,『개벽실제상황』, 대원출판, 2005년
 풍국초, 『중국 상하 오천년사』, 이원길 옮김, 시원문화사, 2005년
 중국사학회, 강영매 옮김,『중국 역사 발물관』, 범우사, 2004년
 둥예쥔 편저, 황보영 역, 『옹전원전 치국』, 시아출판사, 2001년
 호우요바이 지음, 한정은 옮김, 『옛 성현에게서 얻는 자녀교육의 지혜』, 북폴리오,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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