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장족의 기원
「환단고기」 〈삼성기〉하편에 의하면 인류의 시조는 인류의 정신적 아버지와 어머니를 뜻하는 나반(那般)과 아만(阿曼)이다. 그들은 바이칼 호수를 중심으로 살았는데 이들 사회가 점차 비대해지자, 종족간의 반목과 기상이변 그리고 새로운 세계의 개척 등 복합적인 사정으로 바이칼 호수를 등지고 이동해 갔다.
나반과 아만의 정통 후예들은 천산으로 이주하여 동방족의 시조가 되었다. 광명제국인 환국(桓國)을 건설해 초대 안파견 환인(桓仁)천제로부터 7세 지위리(智爲利)환인까지 3,301년 전하며, 다시 배달국(倍達國)으로 이어져 초대 신불(神 ) 환웅천황으로부터 18세 거불단 환웅천황까지 1,565년을 전한다. 그리고 다시 단군 조선으로 이어져 47세동안 2,096년을 전하니 소위 말하는 ‘삼위성조’ 시대를 이룬다.
한편 나반과 아만의 후예 중의 일부는 타림 분지로 들어가 서방 서장족을 이루어 후일 한(漢)족의 뿌리가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한족은 상고사의 과정 중 3,000여 년 간에 걸친 동방족과 서방 서장족 간의 끓임없는 투쟁과 융화과정 중에 정형화된 개량 민족이다.
종국인들은 한족의 역사 시조로 황제 헌원(제위기간 : B.C 2692∼BC 2593)을 내세운다. 황제 헌원은 배달국의 8세 안부련 환웅천황 때 강수의 군병 감독관이었던 소전씨(영제 신농씨의 아버지)의 별파(別派)인 공손씨(公孫氏)의 후손인데 후일 서방족인 서릉 지방의 누저에게 장가를 들어 데릴 사위로 들어간 뒤로부터는 서방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동방족인 황제 헌원을 한족의 시조로 내세우는 이유는 서방족에 가담하여 끝내는 동방족울 흡수, 동화시켜 한족이 형성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2. 고대 동북아 정세
동북아의 고대사는 처음부터 동방족(東夷族, 倍達族, 朝鮮族)과 중화족 간의 패권 다툼이었다. 처음에는 기마민족인 동방족의 절대 우세 속에서 중화족의 발은 내북지방 화산(華山) 주위에 묶이고, 황해로의 진출도 철저히 봉쇄당하였다.
B.C 3,512년 배달국 제 5세 태우의 환웅천황의 12번째 아들인 태호 복희씨가 중화족인 수인씨의 나라를 빼앗아 기산(崎山)서쪽의 강수(姜水) 지역을 천황의 영지로 편입시켰다. 또한, 신용의 변화를 보고 괘도를 그리고 신시의 계해를 바꾸어 갑자를 처음으로 하였다. 후일 그 여동생 여와가 왕위를 이었다.
B.C 3,240년 제 8세 안부련 환웅은 강수지역의 신국(新國)을 화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소전(少典)장군을 강수에 파견했다. (식민지 통치를 위한 총독의 파견이었다)
그 후 소전 장군의 아들 신농씨(神農氏 : 의약과 경농의 시조)가 종화족이 대부분인 강수 지역을 배달국의 영지로 계속 존속시키기 위해 부득이 여와의 왕위를 빼앗았다. 우리 역사에 기록된 첫 번째 군사 혁명이다. 신농씨는 왕위에 오른 후 의약과 농경기술을 발달시킴으로써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그 후 배달의 제 10세 갈고환웅이 염제 신농씨를 중화족의 최고 통치자(왕 : 제후)로 정식 임명하여 제후국으로 삼아 공상을 포함한 동쪽 배달의 영토와의 국경을 정하는 국경 협약을 맺었다.
이로부터 유사이래 계속돼 온 동방족의 중화족에 대한 일방적인 지배는 막을 내렸다.
3. 서방족의 반란
배달국은 국력이 점차 쇠약해지자 주위의 여러 졔후국들의 도전을 받아 사방의 영토를 많이 잃게 되었다. 배달국 제 14세 치우천황때에 이르자 신농씨 나라의 마지막 8대 임금인 염제 유망(楡罔)이 국정 협약을 무시하고 화병(華兵)을 동이식 훈련으로 무장시켜 공상을 습격하였다. 공상을 점령한 후 수도를 그 곳으로 옮겨 배달국에 정면으로 도전해 오니 유망은 민족을 배반한 첫 번째 인물인 셈이다.
이에 치우천황은 병력을 갈로산으로 집결시켜 거기서 나는 철로써 활, 창, 갑옷, 투구 등을 만들어 무장시켰다. 이처럼 최초로 철제무기를 사용하고, 머리에 철두갑을 만들어 쓰시니 동두 철액(銅頭鐵額)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리고 동이 민족의 자랑거리인 큰 활(大弓)은 바로 이 때 생긴 것이어서 이 때부터 중국인들이 우리 민족을 동이(東夷)라고 부르게 되었다.
치우천황은 형제 종당에서 81인을 뽑아 제군(諸君)의 부령(部領)이 되게 하여 탁록(琢鹿)을 함락했다. 그 후 1년 안에 아홉 제후들을 복속시켰다. 다시 옹호(雍狐)산에 가서 9가지 야금술로써 수금과 석금을 캐내고 예(芮)의 창과 옹호의 극(삼지창)을 만들어 다시 군사를 정비하여 직접 이끌고 양수(洋水)에 진출, 공상에 쳐들어가니 유망은 소호(少昊)를 시켜 항전해 왔다.
치우천황은 예과와 옹호국을 휘두르며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적의 병사로 하여금 혼미케 하여 스스로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 소호는 대패하고 유망과 함께 탁록으로 달아나자 치우천황은 다시 진격하여 일거에 정벌하였다. 이 해 중화족의 12제후들이 항복해 왔다.
4. 탁록의 대결전
유망이 패망하자 유망의 제후로 있던 헌원이 대신 동방 배달의 천자 문화권으로부터 벗어난 독자적인 ‘천자의 뜻'을 품고 중화족의 천자가 되려 하였다. 탁록에 도읍하여 화산족(華山族)과 하족(夏族)이 하나가 된 화하족(오늘날의 中華族 탄생)의 대군을 일으켜 치우천황에게 대항해 왔다. 이리하여 봉황도동의 동이족과 그들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용도동의 중화족 간의 그 유명한 탁록의 대결전이 전개된다. 실로 동양 역사의 주도권 쟁탈전이 이로부터 10년 간에 걸쳐 73회의 대 격전을 치르며 격렬하게 계속되었다.
치우천황은 먼저 항복한 장수 소호를 보내 탁록에 쳐들어가 이를 전멸시켰다. 헌원은 그래도 스스로 굴복치 않고 감히 백 번이나 싸워왔다. 이에 치우천황은 구군(九軍)에 명을 내려 네 갈래로 나누어 출동케 하고 자신은 보병, 기병을 이끌고 곧바로 탁록의 유웅(有熊)이라는 벌판으로 진격하였다.
“그대 헌구야! 짐의 고함을 밝히 들으렷다. 해의 아들이라 함은 오직 짐 한 사람뿐으로 만세를 위하고 공동생활의 옳음을 위해 인간의 마음을 닦는 맹세를 짓노라. 그대 헌구여! 우리의 삼신일체의 원리를 모독하고 삼윤구서(三倫九誓)의 행을 게을리 하였으니 삼신은 오래도록 그 더러운 것을 싫어하고 짐 한 사람에게 명하여 삼신의 토벌을 행하도록 하였으니 그대 일찌감치 마음을 잡아서 행동을 고칠 것이다. 자성은 너에게서 찾을 것이니 그대의 머리속에 있음이로다. 만약 명령에 순응치 않는다면 하늘과 사람이 함께 진노하여 그 목숨이 제 목숨이 아닐 것이다. 네 어찌 두렵지 않은가?”
헌원은 여러 차례 싸웠으나 매양 졌으므로 그 원한이 더욱더 커졌다. 이에 헌원은 신시(神市)를 본받아 크게 병기와 갑옷을 만들고 지남차(指南車)까지 만들어 대항해 왔다. 한 싸움에서 우리쪽 장수 가운데 치우비(蚩尤飛)라 하는 자가 있어 불행하게도 공을 서둘다가 진중에서 죽게 되었다. 치우천황은 크게 진노하여 군을 움직여 새로 돌을 날려 보내는 기계를 만들어 진을 치고 나란히 진격하니 적진은 종내 저항할 방도조차 없었다.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치 못하게 하면서 싸움을 독려하니 적군은 마침내 마음에 두려움을 일으켜 혼란을 일으키고 도망하였다. 탁록에 성을 쌓고 연( )의 회대(淮岱)지방을 모조리 점령하니 헌원의 무리들은 모두 다 신하되기를 원하며 조공을 바쳤다.
그리하여 치우천황은 헌원을 배달국의 5제(五帝) 벼슬 중에서 으뜸가는 벼슬인 황제(皇帝)로 임하여 수석 제후국왕으로 삼고, 배달국의 국경을 원래대로 공상(空桑) 이동(以東)으로 환원했다.
이 전쟁은 결과적으로 화족(華族), 하족(夏族)들을 깨우쳐 동이족(東夷族)에 상응하는 민족의식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중화족이 대동단결하는 결과를 낳았고, 아울러 헌원이 황제로 임명됨으로써 지금까지 동이족에 의해서 식민통치 되었던 중국의 영토가 중국인들의 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5. 동방의 무신(武神) 치우천황
치우천황은 그 후 수도를 지금의 중국 산동반도에 있는 청구(靑丘)로 옮겼다.
역대 단국성조들께서는 치우천황의 큰 법력과 천지를 흔드시는 진취적인 기상을 기리시어 소도(蘇塗)에 상을 모시고 받들었다.
또, 치우천황의 위용은 위력적인 숭배와 추앙의 대상이 되었다. 진(秦)·한(漢) 때의 백성들이 해마다 10월에 산동성에 동평군 수장현 관향성에 있는 높이 7장(丈)의 치우릉에 제사를 지내면 붉은 기운이 반드시 뻗치므로 치우기(蚩尤旗)라고 불렀다
.
한고조 유방도 자기 고향의 풍속을 따라 동방 무신(武神)의 원조인 치우천황에게 제사지내고 군사를 일으켰다. 그 후 5년 간 항우와의 초한전에서 끝내 승리하여 제위에 오른 뒤에는 치우천황의 사당을 장안에 짓고 더욱 공경하였다. 이 때문에 그도 10월을 세수(歲首)로 정했다.
치우천황의 신하된 헌원은 동방배달의 청구(靑丘:치우천황의 수도, 후대에 동방 조선의 별칭)에 이르러 풍산을 지나가다 치우천황의 국사(國師)인 자부(紫府)선사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 「음부경」 이라 불리우는 「삼황내문」을 전수 받아 갔다. 이처럼 신교의 대도를 전수받아 헌원은 ‘황노학(黃老學)’이라 불리는 도교의 시조가 된 것이다. 당시에 헌원뿐 아니라 공공, 창힐, 대요 등이 모두 동방 배달에 와서 자부선사로 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이처럼 배달의 치우천황(B우리의 14세 환웅천황으로 신시(神市)의 전통을 이어 역사상 처음으로 동방을 대통일하여 신교(神敎)문화권으로 통치하였다. 자오지천황(慈烏支 天皇, 치우천황), 그는 동방 무신(武神)의 원조이며 우리 민족 불세출의 대영웅이다.
당시 중국인들은 천왕의 머리엔 뿔이 나 있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치우천왕은 뿔이 둘 달린 투구를 쓰고 전장에 나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지금도 최고위층 사람을 우두머리라 하고 있다. 우두란 소머리를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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