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욕심이 많은가 봅니다. 예로부터 3절이라 하는 시서화를~ 어젯밤 잠이 오지 않아 시,글,그림을 모두 그렸는데... 아직도 미숙해 보입니다~ ^^* 뻘쭘하네여
아래는 문학평론가 이만재님께서 이번 시집에 평론을 주셨습니다
李 晩 宰 (詩人․小說家․文學評論家) 말(글)은 반드시 문학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문학은 그 특정한 창작을 위해 말의 속성을 이용할 따름이다. 작자는 그의 작품 속에 자신의 개인적 말투와 사회의 공통적 관습을 적당히 뒤섞는다. 말의 뜻이 사회의 공통적인 약속에 부합될 경우에, 이를 흔히 외연(外延)이라 하고 , 개인적인 요소가 개입되었을 때에는 그것을 내연(內延)이라고 부른다. 보다 상상력이 풍부한 문학은 내연적(개인적, 함축적)의 美를 되도록 많이 살린 글이다. 그래서 통상적인 문법에서 약간 벗어나든가, 관습적인 말 대신 독자의 관심을 끄는 낯선 낱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는 흥미를 끌면서 두렷한 개성의 소유자임을 보여주는 기교로 볼 수 있다. 대개 시는 운율과 수사법 등 그 자체의 전통을 응용한다. 특히 말의 시작과 마무리를 적절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이 때문이다. 무릇 문학은 말의 창조력을 최대한도로 발휘시킨다. 그래서 문학작품의 말은 어떤 감정이나 사상을 담기 위한 수동적인 수단이나 겉치장이 아니라, 문학작품 그 자체가 깊이를 지닌 형상인 것이다. 이민홍시집「이보시게...」에 든 60여 편의 작품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놀랍게도 적멸의 도량 같은 그윽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면서, 맑고 깨끗한 시어들이 안정된 자리에서 서로 화음을 이루어 염주처럼 윤나는 듯했다. 대표적인 몇 편을 인용해보기로 하겠다. ①//바람이 불었구나/세월의 때를 이르러//비우라 한다/아니다/비우라 한다/때지어 놀던 무리/무감(無感)으로 지우고 겸허히 이른다//저곳에 가는길/비우고 버리고 -시「저곳에 가는길」의 일부 ②정처 없는 시간/마음은 어데 있노//매임 없는 자유로운 사색을/나는 사랑하리//만물의 초상 위에 구별없는/세월을 위안 삼으리//채우다가 비우는/무욕의 기품으로 살아가리 -시「지금 어드메…」의 전문. ③//또 다른 하나를 원하며/채워진 것보다 더 많이 바라는 것이/사람의 마음입니다/…중략…//갖고 있던 것을 잃은 뒤에/그것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는 것은/이미 늦은 일이기 때문입니다//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는 연습을 해야겠습니다. -시「선물」의 일부, 인간의 욕망이란 참으로 묘하다. 채우면 채울수록 더욱 강하게 새로운 욕망을 갈구하게 된다. 욕망이 화(禍)의 씨앗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욕망을 충족시킴으로써 부족함을 메우려 하지 말고, 차라리 욕망을 죽여, 모든 탐심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버림으로써 만족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빈 공(空)’은 결코 예사스런 말이 아니다. 비운다는 것, 비워서 없다는 것. 범부의 경계로서는 단번에 삭일 수 없는 용어일 것이다. 가시적인 모든 현상을 접기 위해 차분히 눈을 감고 깊이 생각해 보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어떤 인연이 모여서 찰나에 생성된 것임을 깨달게 된다. 예를 들자면, 산소와 수소가 결합하여 물이 되었고, 다시 산소와 수소가 분해되면 물은 사라지고 만다. 실체인 물은 공(空)이다. 때문에 무(無)와 같고, 무니까 공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은 공하며 순간순간 변하므로 무상(無常)하다. 실제로 있어 영원불멸한 것임을 착각해서, 모두들 재물이나 지위 그리고 명예, 심지어는 종교적 이념까지도 집착의 포로가 되어 헛된 삶을 자처하지 않는가. 부끄러움을 모른 체, 욕심을 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으로 스스로 교만심을 내며 때로는 수단과 방법도 뛰어넘어 아첨하기도 하면서 번뇌를 쌓고 서로 능멸하는 불감의 시대를 탄식하지 않을 수 없지 않는가. 인용한 시①에서……/저곳에 가는길/비우고 버리고……는 현실적이든 이상적이든 목적지에 다다르기까지 심신에 티끌 하나도 갖지 말고 청청한 기원으로 닿고 싶은 절실한 소망을 형상화하였고, 시②는 깊은 사유로 무위자연에 사는 선비정신을 그렸으며, 시③은 마음을 비우는 작업을 통해 순리에 따라 살고픈 심상을 표출한 시다. 이 3편의 시에서 이민홍의 불교적인 공관(空觀)을 엿볼 수 있다.
①//강가의 돌멩이 하나/들에 핀 무명초/바람을 타고 가는 구름도/눈에 모두 넣고 친숙해야지//언젠가/그리울 날에는/추상같은 슬픔도/침묵처럼/깊이 사랑해야지 -시「그리울 날」의 일부. ②//드물게 벗한 세상/오욕을 피하랴마는/내 해탈 타일러/삭풍에 의연한 이를 보고 싶다 -시「바람 부는 날」의 일부. ③//금생(今生)의 스침이랴/세월 엮은 연(緣)일랑/된 눈물이 되사//나미야 꽃은/억측(憶測) 없어라//후재(後在)는 어찌하야/여생(餘生) 품을 님/향기로 남으리까? -시「여백(餘白)」의 일부. ‘회향(迴向)’을 ‘回向’이라고도 한다. 그 의미는 ‘굴하다’, ‘변하다’, ‘무르익다’, ‘무르익게 하는 일’, ‘돌리는 일’를 내포하며, 특히 불교에서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을 타인을 위해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자기가 행한 선행을 돌려서 자기의 깨달음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돌리는 것이다. 이렇듯 자기가 쌓은 선근(善根)을 돌려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쓴다는 데에서는, 생명이 있든 없든, 산 사람뿐 아니라 죽은 사람을 위해 독경이나 염불 등의 공덕을 돌리고 불도로 향하게 하는 것도 역시 회향의 공덕이라고 하겠다. 회향은 보리심(菩提心)을 낳는다. 보리심이란 곧 도심(道心)이다. 위로는 불타의 정각의 지혜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마음을 뜻한다. 세계는 암흑 속의 촛불에 비유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불꽃을 중심으로 빛은 원형으로 어둠을 비추며 불꽃으로부터 멀어짐에 따라 어두워지다가 마침내 어둠과 구별이 없게 된다. 가까이 하면 밝고 멀리 하면 어둡고. 이것은 자기를 초월해 있는 절대자(?)에 대한 경건성일 수도 있다. 비단 절대자가 비로자니가 아니라도 그렇다. 부처든 예수든 알라든 더 나아가 잡신이라도 무방하다.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의 자기부정과 이타심(利他心)과 전인류적 관심이라고 하는 세 가지 조건만 있으면 이윽고 스스로 보리심을 깨달았다고 할까. 시①은 현존하는 모든 것, 시인과 동시대에 존재하는 우주의 근원적 실체를 귀하게 인식하려는 마음을 읊었고, 시②는 절실한 만남, 그 기다림을 향한 애끓는 심상을 형상화했으며, 시③은 어지러운 삶의 질곡에서 벗어나 여한이 없는 삶을 지향하려는 바램으로, 모두를 아울러서 회향하고픈 깊은 마음이 담겨있다. ①//無力한 갈대/長考한 시간 속/정적에 취한 무위의 사색/격정의 날이/다시 오려마는 -시「새벽」의 일부. ②無量 千變의 世波를 던져/눈물과 한숨 다 토해 버리고//뒤안길 굽어 놓고/잠시 도피를 떠날 일이다//바랑을 지고 -시「바랑을 지고」의 일부. ③/색은 공이요/공은 색이여라/홍련암 동해여/석가의 법은/천년 만년 진리라/이제 또 다시 하루를 열어 억겁을 노래하라/아, 낙산사여 -시「아, 낙산사」의 일부. 무위(無爲)란 모든 법의 진실체를 뜻하며, 여기서 ‘위(爲)’는 위직(爲作) ․ 조작(造作)을 의미한다. 이는 곧 인연인 위작이나 조작을 여의고, 만물의 온갖 법인, 생상(生相), 주상(住相), 이상(異相), 멸상(滅相)의 변천이 없는 진리이다. 무량(無量)이란 말 그대로, ‘헤아릴 수 없는~’, ‘한량없는~’을 뜻하는 불교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시①은 인고의 세월 속에 감격스런 그 날이 오길 갈망하는 심상을 읊었고, 시②는 다사다난한 현실을 벗어나 적막한 자연의 품을 향해 홀연히 떠나는 심정을 형상화했으며, 시③는 낙산사, 법의 향기 그윽한 도량을 찬양하며 읊조렸다. 바람처럼 구름처럼 흘러가는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려는 자세가 돋보인다.
①//한잔 또 한잔에/내 가슴 가득 만져지는/쓰디 쓴 알콜 자맥질//이런 날/고개 젖히면…/낮달은 숨고//한숨 독백으로/어느 사이 내 어깨엔/저녁이 앉는다 -시「독백」의 일부. ②//세월은 가라/향수의 南村에도/한파가 멱을 쥐었느니//슬픔 될 화석에/회한의 서리 실컷 안고//이별 서두른/낙엽은 정처없다//동장군 으스름 늑장에/총총한 별은 빛나 더 서럽다 -시「나목(裸木)」의 일부. ③//또 하루가 지나/한걸음 반걸음/멀어지며 당신의/세상에 밖에 선/고독한 타인이 되겠지요//꽃잎 지는 지금/나는 엄동을 지나 꽃샘바람/무섭던 그때처럼/나는 외로움에/사무칠 위험한 이방인 -시「꽃잎 지던 날」의 일부. 철학자 스튜어트는……‘시는 고독의 순간에 그 자신에게 그를 고백하는 느낌뿐이다……그 고백이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되지 않고 남에게 어떤 인상을 남기려는 목적을 위한 수단일 때에, 그것은 시가 되기 그치고 웅변이 된다……웅변은 듣는 것이요, 시는 엿듣는 것이다……고 설파했다. 하지만 근대의 서정시는 주로 그 전달보다 개인의 감정의 표현에 역점을 둔 것 같다. 그래서 시인의 내밀한 마음의 움직임을 엿보는 듯하다. 여하튼 시는 문학의 기본적 장르의 하나인 동시에 인간의 깊은 내면을 암시하는 일체의 길을 가리키는 말도 된다. 인간의 깊은 내면이란, 즉 인간의 원시적 성품과도 상통하다고 하겠다. 시는 원시시대의 주문(呪文)같이 내면을 건드리는 힘 있는 말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래서 흔히 ’시인은 가장 문명화된 사람이면서 가장 원시적인 사람이다‘고 일컫는 것이 바로 시의 특질을 뜻하는 것이다. 시①은 적적한 한낮, 무엇인가 풀리지 않는 답답함을 낮술로 달래면서 삶의 어두운 무게를 읊었고, 시②는 한겨울 추위가 물러나고 봄날이 오길 바라는 심정을 그린 시며, 시③은 군중 속의 외톨이, 지독한 외로움의 실체가 된 자신을 자탄하며 쓴 서정시다. 인용한 시들은 서정성이 매우 짙다. 서정시는 어떤 심리상태나 사고와 감정과정을 표현하는, 단 한 사람의 화자를 제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일인칭으로 표현되었다고 해도, 반드시 시인 자신과 동일 인물로 간주하긴 어렵다. 때로는 화자는 지어낸 가공의 인물이어서 실제 시인과는 아주 다를지도 모르는 인물인 것이다. 이 시집에서, 나타난 이민홍의 시세계에서 나타난 비유언어(比喩言語)는, 정상적이거나 표준적인 의미로 인식하는 것과 다른 언어에 퍽 익숙해 보인다. 선택된 낱말이 현저한 변화를 꾀하면서, 축자적 의미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사족(蛇足)이 없어 시어가 매우 정갈하다. 그러면서 지극히 추상적인 것을 멀리하고 보다 구체화에 노력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사용된 낱말은 시의 소재에 따라 그 형식의 수준에 걸맞게 위엄 있고 우아하게 다룬 점이 예사스럽지 않다. 우아한 대리어(代理語)를 사용하여 미천하거나 전문적이거나 진부한 낱말은 피하기 위해 돌려 말하는 우회어법(periphrasis)도 없지 않다. 아무튼 시의 생명은 공명(共鳴)이다. 울림. 독자의 가슴에 메아리치게 할 울림, 바로 그것이 살아있는 시의 생명이다. 이민홍 시인의 울림은 불심을 바탕으로 하여, 마치 고적한 산사의 범종의 소리가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멀리멀리 울려 펴질 것으로 믿는다. 독자들의 가슴 속으로 속으로……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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