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시대의 역사를 바꾸는데 기여한 4명의 여인
노중평
우리 상고시대역사와 고대역사에는 특이한 여자들이 등장한다.
한인천제가 한국을 세울 때 부인이 된 항영, 배달나라를 세운
한웅의 부인이 된 웅녀, 부여를 세운 금와왕의 부인이 된 유화,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부인이 된 소서노, 소서노는 아들 온조를
도와 백제를 세웠다.
이분들이 남기고 간 족적을 더듬어 보기로 한다.
1 한국의 항영과 하백의 딸
하백녀
단군왕검은 14살 때 웅심국녀(웅심국왕의 딸)와 혼인했고,
서기전 2333년에 배달나라(조선의 전신)를 건국하면서 하백녀를
맞아들여 비로 삼았다. (<朝鮮紀>)
우리 역사에서 하백이 처음 등장하는 때는 단군왕검에 비가 된
하백녀(하백의 딸)의 아버지 때이다.
당시에 가장 큰 세력가는 단군왕검이었고, 그 다음의 세력가는
하백이었다.
이들은 모두 단국檀國을 구성하는 양대 지주였다.
단국의 주인은 홍제洪帝였다.
단군왕검은 홍제의 태자太子로 있었다.
그러나 단군왕검이 홍제의 적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사실상 웅심국왕으로서 단국제檀國帝를 겸직할 처지에
있었다. (<조선기>, <부소보서扶蘇譜序> 등)
그가 단국을 승계하려면 하백의 도움을 필요로 하였다.
하백은 황하의 지류인 수분하의 동쪽에서 숙신肅愼(요동遼東)에
이르는 거대한 땅을 다스리고 있었다.
하백은 홍제 8년에 수분하 동쪽으로 침범한 제곡고신帝嚳高辛을
격퇴함으로써 홍제로부터 받은 봉작이었다.
하백은 원래 한국桓國을 세운 풍이족 출신으로 적제赤帝(양자강
남쪽을 다스리는 임금)로서 축융祝融(불의 신에 제사지내는 제관)
의 지위에 있던 한인천제의 61세 직계후손이었다.
그를 곤오昆吾라고 하였고, 곤오는 치우천왕의 대를 이어 청동기
문명을 발전시킨 분이었다.
청동 솥을 만들기 전엔 도기陶器 솥을 만들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소성蘇姓 집안에서 만들었으므로 솥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하백河伯의 백伯은 풍백風伯과 같은 계열임을 나타낸다.
풍백은 원래 배달나라를 세운 한웅천왕 때부터 제사를 관장하던
집안이었다.
그는 풍물패(길굿패)를 이끌고 천왕이 이동할 때 길굿을 하였다.
이들을 풍이馮夷라고 하였다.
풍馮은 종족이 마가馬加임을 나타내는 문자이다.
마가가 물가(황하)에살았으므로 마馬자 앞에 빙冫자를 붙였다고
볼 수 있다.
곤오의 다음 대도 또한 하백이었고, 하백에 딸이 있어서 단군왕검
과 혼인하여 비妃가 되었다.
단군왕검이 그의 비가 된 하백녀가 굿을 할 때 동참하여 함께
함으로서 검儉자가 생겨났다고 생각되는데, 인人이 여자를
의미하는 문자이고, 첨僉이 처음을 뜻하는 문자로 볼 수 있으므로,
단군왕검이 처음으로 여신에게 제사지내는 여자제관을 도와서
제사를 함께 주관하였으므로 생겨났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지나의 여요전설
지나에는 여요餘姚 전설이 있다.
여요는 순제舜帝 때 생겨난 말이라고 하는데, 지나 문명발상지의
하나인 하모도유지河姆渡遺址에서 유래한다.
하모도유지란 “하백의 어머니가 건너온 유적지”라는 뜻이다.
하모도유지는 여요시餘姚市 동쪽에 있다. (지나의 여요시 정부신
문 변공실辨公室 소속의 여요시신문센터에서 발행한
<대공보大公報-동남명읍東南名邑 여요餘姚신문>
2004. 3. 30.자 기사. “문명의 서광이 솟아 일어난 지방”)
지나에서는 이 유적지를 지금으로부터 7,000년 전의 문화유적지로
보고 있는데, 인류의 선조사와 지나문명사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2000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지 못하여, 지금까지의 역사가
5,000년의 역사에 머물러 왔는데, 지나의 역사교과서를 개편하여,
현재 연합국에 개편한 교과서를 반영하여 인문지도상에
여요문명을 표현할 수 있도록 주진중이라고 한다.
당시에 황하유역에는 지금 사람의 선조들이 황무지를 개간하여
소량이나마 쌀을 생산하고 있었다.
지금 남지나(남중국)의 동해변에 해당하는 곳은 거칠고 풀이
뒤덮인 미개한 땅(荒蠻之地)으로 인식되어 온 곳이었다.
여기에 한 무리의 선조가 이미 야생종의 벼를 베어다가 심어
벼의 종자를 생산하였다.
그들은 석기를 대량으로 다듬어 썼고, 뼈를 다듬어 섰고, 동남아
일대에서 볼 수 있는 원시적인 건란식乾欄式建築을 하였고,
우물을 팠고, 누에에서 잠사를 뽑아 옷감 짜서 옷 해 입었고,
나무를 가지고 배 만들었고, 세계 최초로 만든 관악기인 뼈 피리
불었고, 세계 최초로 태양신을 받들어 모시는 형상을 만들어내었
다. 이를 하모도문명河姆渡文明이라고 한다.
하모도문명이 후대에 여요대지餘姚大地(황하유역)로 들어와서,
삼왕오제시대三王五帝時代(주, <대공보>에서는 皇자를 쓰지 않고
王자를 쓰고 있다)인 요제堯帝 때, 동해지빈東海之濱(발해만 내해
의 동쪽-고조선시대의 항구)에 도착하여, 여요일대餘姚一帶를 개
발하여 살기 시작하였다.
요제의 다음 대인 순제는 그의 아들에게 이 곳을 분봉分封하여,
그 자손들이 요강姚江의 양안兩岸에 살았다. 순舜의 성姓이 요姚
인데, 여요라는 지명이 여기에서 유래한다.
전설은 역사기록과 비교할 때 전설일 뿐이다. 우리의 역사기록인
오이족 출신의 항영을 여요로 바꾼 것이 여요전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요로 불리는 곳은 한국시대에 한인천제의 비가 된 오이족烏夷族
이 살던 땅이다.
순舜의 성姓이 요姚라고 했는데, 성姓은 모계족성母系族姓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순의 족성이 요에서 오이족의 족성이 요로 밝혀진 셈이다.
따라서 한인천제의 비가 된 항영姮英의 족성을 요姚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순의 모계족성이 요이므로, 그가 동이족임이 틀림이 없다고 하겠다.
사실상 이 시대에 종국인의 조상이나 중국의 조상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2 배달나라의 웅녀
우리 조상과 지나의 조상은 동이와 하화(화하)로 갈라서기
전까지는 구려족九黎族에 속한 이족夷族이었다.
이족은 춘분의 기에서 나온 종족이라는 뜻이고, 하화족은 하지의
기에서 나온 종족이라는 뜻이다.
하지가 춘분에서 나오므로, 하화족은 그 뿌리를 이족에 두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족은 하나님의 역할을 맡은 별을 칠성님으로 정했다.
칠성님의 끝별인 요광성(무곡금성)에서 나오는 심상치 않은
파장이 번개를 만든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이 행사하는 일을 번개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하화족은 번개가 내는 소리를 하나님이 행사하는 일로
표현하였다.
그러니까 이족은 빛을 하나님으로, 하화족은 소리를 하나님(뇌성
보화천존雷聲普化天尊)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이족의 조상을 구려라고 하고, 구려를 구성하는 종족을 풍이風夷
라고 하였는데, 풍이는 하나님이 행사하는 일을 바람으로 보았다.
풍이족은 한국桓國을 세우고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들은 바람의 형상으로 뱀을 내세웠고, 그들을 대인(큰사람→한
웅桓雄)이라고 불렀다. 전세계에 뱀과 거인의 신화가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풍이족은 바람을 하나님으로 보았고, 동이족은 빛을
하나님으로 보았고, 하화족은 소리를 하나님으로 보았던 것이다.
하화족이 동이족으로부터 떨어져나가기 위하여 만들어낸 신화가
복희와 여왜(여와)신화이다.
당시에 복희는 배달나라에서 신적인 존재로 숭상을 받던 제 6세
다의발 한웅천왕이었다.
그가 모든 종족의 숭상을 받게 된 데엔 이유가 있었다.
삼태극 이론을 양태극 이론으로 줄여 철학과 사상의 새로운
이론체계를 제시한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음양조화이론을 음양대립이론으로 바꾸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하화족은 동이족의 지족支族으로서 성경에 나오는 카인과 같은
성품을 타고난 사람들이었다.
공격적이고, 독립적이고, 약탈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음양대립이론은 체질적으로 맞았다.
그들은 다의발 한웅을 복희로 부르기로 하였다.
복희는 해가 다시 뜬다는 말이다. 다의발 한웅은 발이 크기 때문에
다의발로 불리게 된 분이었다.
그가 태어난 곳이 발족이 사는 곳이었다. 발족은 발이發夷로 불리
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발해연안에 살았다. 그러므로 다시 떠오르는 해를 자기들
의 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해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의식을 만들어내었다.
해마지 같은 것이 그런 것이었다.
다의발 한웅은 태우의 한웅에게서 태어났다.
태우의 한웅은 하화족에 의하여 태호로 불리게 된 분이다.
태우의를 줄여서 태호라고 했던 것이다.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을 합하여 태호 복희라고 하였다.
태우의 한웅은 서북쪽으로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섰다.
이족의 중심지인 청구가 늘 홍수의 위협을 받고 있고, 지층이
불안하여 언제 지진이 일어나 물 속으로 가라앉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는 뇌택(화서의 나라)이라는 곳에 닿았다. 여기가 발해만에 있는
청구가 물속에 가라앉고 나서 후에 두 번째 청구(오늘날의 탁록)
로 불리게 된 곳으로 볼 수 있는 곳이다.
뇌택은 화서華胥가 다스리는 여자들만의 나라였다.
화서는 태우의 한웅이 발이 크므로 그가 발이 출신으로 천왕의
자리에 있는 분임을 알아차렸다.
화서는 태우의와 관계하여 다의발 한웅을 낳았다.
다의발이란 발이가 많이 퍼진다(종족이 많이 퍼진다)는 뜻이다.
하화족은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 복희와 여왜를 그들의 조상으로
하였다.
뇌택은 우레가 치는 못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사시는 곳이다. 그들은 번개를 뇌공雷公이
라고 하였다.
번개의 위력을 믿었으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뇌공이 여기저기 때려 주는 피해가 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빛은 외면하고 소리만을 취하여 하나님으로 정했다고
볼 수 있다.
복희와 여왜의 또 다른 신화는 뇌공(못된 하나님)이 장마를 일으켜
천하를 전멸시킨다. 이 홍수에서 오직 복희와 여왜 남매만 살아남
는다. 그리하여 그들이 하화족의 조상이 된다.
이 단순한 신화에는 신화에 드러나지 않은 청구침몰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이 감추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황하 입구에 있던 청구가 이때에 침몰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청구가 침몰하자, 그 일대에 살던 여러 종족의 대이동이 일어났을
것으로 추리할 수 있다.
그중의 일부가 지금의 탁록에 정착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의 가설을 세울 수 있는데, 토착세력인 여왜와
이주세력인 복희 사이에 전쟁과 타협을 거쳐서 적대적인
두 종족이 통합되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청구(涿鹿, 탁록은 상商나라 이후에 쓰이기 시작한 명칭이다)의
토착세력으로 화서의 후예 황제를 들 수 있고, 이주세력으로
복희의 후예 치우(자오지 한웅)를 들 수 있다.
황제와 치우 두 분이 탁록에서 10년 동안 싸운 것은 토착세력과
이주세력 사이에 신시를 열고 화백회의를 할 수 있는 청구를
차지하기 위하여 벌인 숙명적인 싸움이었다고 본다.
우리 신화와 역사에서 단군신화가 생성되던 당시의 토착세력은
범으로 나타나고, 이주세력은 곰으로 나타난다.
곰(姑+任, 고임→곰)은 마고를 신으로 모시는 종족이다.
마고의 신상을 지키며 제사지내는 종족이기 때문에 곰으로
불린 것이고, 범(凡, 모두 다)은 마고에 대한 제사권을 행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범으로 불린 것이다.
곰은 마고여신을 모신다는 뜻이고, 범은 모셔야 마고여신이 없다
는 뜻이다.
단군신화에서 곰이 한웅의 여자가 되고, 범이 한웅의 여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제사권의 유무에 있었다고 본다.
한웅을 한곰, 즉 큰곰, 다시 말해서 여성적 존재인 마고의 남성화로
생겨난 이름(熊, 여성적 존재→雄, 남성적 존재)으로 본다면 이러한
추론에 타당성이 주어진다.
여성적 마고의 짝으로 남성적 마고가 태어남으로 해서, 마고와
한웅의 결합이 가능해지는데, 이를 신화로 표현한 것이 단군신화이다.
그렇다면 이 신화의 무대는 어디가 될 것인가?
아무래도 청구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청구는 기독교의 에덴(御天)
동산의 모델로 볼 수 있는 곳인데, 청구가 주는 이미지가 여성적이
기 때문이다.
청구라는 말은 부드러운 여체를 연상하게 하는 말이고, 청구에는
청구請求라는 의미도 있으므로, 단군신화에서 한웅에게 혼인할 것
을 간청한 곰족 여인의 유추도 가능해진다.
여기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곰족이 지진으로 잃어버린
청구靑丘와 <부도지>에 나오는 부도符都와의 관련성이다.
우리가 하늘을 구천九天이라고 하는데, 청구의 하늘을 아홉 방위
로 나누었기 때문에 구천으로 불렀다고 볼 수 있다.
<부도지>에서 팔여八呂의 음이 들려오는 방위가 사정사유四正四
維의 팔개방위이다.
여기에 청구의 중심을 포함시키면 모두 구천이 된다.
구丘와 구九를 같게 봄으로써 이러한 추리가 가능해진다.
3 부여의 유화
“주몽은 동부여왕 금와金蛙가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와 사귀어
낳은 아들이었다.”
이 한 줄의 글에는 엄청나게 많은 고대의 역사가 숨어 있다.
그러나 설명이 없다. 그러므로 역사를 밝힐 수 있도록 문헌고증에
의한 추론이 필요하게 된다.
그 다음에 할 일이 추론을 논증할 수 있는 고고학적인 뒷받침이다.
위 글에 동부여東扶餘가 등장한다.
동부여가 나오니 북부여에 대하여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하백河伯이 등장한다. 하백이 누구인지도 풀어야 한다.
하백의 딸 유화柳花에 대해서도 알아보아야 한다.
이 수수께끼의 인물들에 대한 의문을 풀고 난 다음이라야
고주몽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동부여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예인濊人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현재 한반도의 동북부에 살고
있었다.
송화강 상류에서부터 동남쪽으로 지금의 한반도 북부에 해당하는
곳에 살았다.
고고학자 최무장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공통점을 가진 많은
고고학적 유물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고고학자들은 서단산西團山문화가 예문화에 속한다고 주장하였다.
문화의 상한선은 서주西周시대에 해당하며, 예인이 서주시대에
동북지역에 거주했음을 밝혔다.
현재의 함경도와 지나의 연변지구도 예에 속해 있었다.
(<부조예군지인夫祖濊君之印>) 동예東濊(동부여의 전신)는
인구가 2만호에 28만여 인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
(<후한서무제기後漢書武帝紀>)
그러나 2만 호에 10만인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고도 하였다.
(<삼국지동이전三國志東夷傳>)
맥족은 동쪽으로 농안農安, 요원遼源에 이르고, 서쪽으로 통유通
楡, 심양瀋陽에 이르고, 남쪽으로 본계本溪, 단동丹東에 이르며,
북쪽으로 지지할(제제합이齊齊哈爾)이 이르렀다.
그 동쪽은 예, 서쪽은 동호東胡, 남쪽은 동이東夷라고 하였다.
(<예맥> 최무장)
예보다 먼저 상주商周시대에 맥족이 있었다.
북장의 유목민을 맥이라고 하였다. 이들을 구맥九貊이라고 하였는데,
풍이족 출신의 한인천제가 구주九州에 봉했던 그의 자손들(<부소
보서>)이 맥족의 조상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시경노송詩經魯頌>에서, 회수淮水가에 살던 회이淮夷를 만백蠻
貊이라고 하였다.
만蠻자에 충虫자가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뱀을 종족의
아이콘으로 섰던 풍이족의 후예로 볼 수 있다.
발이發夷의 발發은 맥과 발음이 같은데, 발해연안에 살았던
종족을 말한다.
이외에 북발北發, 맥국貊國, 백민白民(부여의 조상, 백은 하백으로
볼 수 있는데, 맥인의 한 갈래로 본다.),
고이高夷(맥족의 한 갈래로 고구려의 조상으로 본다)는 바다 밖,
즉 산융山戎(지금의 대능하 유역)과 숙신肅愼(지금의 송화강 동쪽)
사이에 있었다. (<예맥> 최무장)
맥국은 연에게 멸망당하였다.
연이 진에게 멸망한 이후에 부여가 생길 때 부여의 주축이 되었다.
해모수가 고조선의 제 47세 고열가단군 57년이 되는 해인 임술
원년(서기전 239)에 부여를 세우니, 이 나라를 북부여라고 하였다.
북부여의 4세 단군 고우루 때 가섭원으로 천도하여 동부여로 부르게 되었다.
이어서 고두막, 고무서, 해부루, 금와로 이어진다.
금와가 하백녀 유화와 사귀어 고주몽을 낳았다. 하백은 원래
황하와 인접지역을 다스리는 임금의 호칭인데, 우리 역사에서
하백이라는 호칭이 처음 나오기 시작하는 때는 배달나라에
속한 단국檀國의 제 2세 홍제洪帝 때이다.
제곡고신帝嚳高辛 밑에 있던 곤오昆吾가 고신의 학정을 피하여
홍제에게 귀순하고, 고신이 수분하綏芬河 동쪽을 침범했을 때,
이를 물리쳐 그 공으로 봉작하게 된 것이 하백河伯이라는 관작이었다.
곤오의 딸을 하백녀라고 하였고, 하백녀는 단군왕검의 부인이 되었다.
그로부터 47세가 흘러 고조선이 멸망하였고, 북부여를 지나
동부여에 들어서 하백녀가 나타났는데, 하백녀라면 곤오의
후손으로 볼 수 있다.
곤오가 한인천제의 직계후손이므로 하백녀 유화 또한 한인천제의
직계후손이 된다고 하겠다.
따라서 금와왕과 유화의 관계를 바람을 피우는 그러한 남녀관계로
보아서는 아니 되고, 당시의 사회제도나 풍습을 살핀 연후에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4 고구려 · 백제의 소서노
어느 날 필자는 인천지명에 대단히 밝다고 알려진 어떤 사람과
문답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공연한 것을 물었다는 후회를 하고 말았다.
실은 그가 별로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허부공항시대
가 와서, 인천동항에 외국에 거주하는 4세 한국인이 와서 토박이
인천사람을 만나서,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고 갈 수 있다고 본다.
“인천에 합당한 단 하나의 옛 지명을 찾는다면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그야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서 찾아야 하겠지요.”
“그 책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미추홀이라고 했습니다.”
“미추홀이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 글쎄요 …”
“또 다른 이름은 없습니까?” “매소홀이라는 이름도 있지요.”
“매소홀요? 그건 무슨 뜻입니까?” “글쎄요 …”
“또 다른 이름은 없습니까?”
“아, 있지요. 소성이라는 이름도 있습니다.”
“그건 또 … ?” 이런 식으로 대화가 진행되면,
질문자가 기가 질릴 지경이 되고 만다.
본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우리의 고유한 지명에 대한 지식의
수준이 이 정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왜 이렇게 형편없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지금까지 제대로 인천의 지명을 연구한 연구자가
없었고, 따라서 합당한 연구방법도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해온 지명해설은 신용할 수 없는 설명이라고
제처 두고 연구해서 다시 설명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지명은 그 땅의 이름이다.
그렇다면 이 이름이 역사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그 땅이 갖추고
있는 자연조건에서 나온 것인지를 따져서 이 이름의 의미를 추적
해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엔 왜 그러한 한자를 지명에 썼는지 이를 문자학적인 측면과
역사학적인 측면에서 밝혀 보아야 할 것이다.
(문자학이란 문자가 갖는 의미는 물론이고, 그 문자가 갖고 있는
고유한 이미지를 도출해 내는 학문이다) 이렇게 그 문자의 의미와
이미지를 도출하면 지명이 갖고 있는 숨겨진 의미가 드러난다.
문자학을 통하여 인천의 옛 지명 미추홀, 매소홀, 소성이 갖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밝혀낼 수 있다.
이제부터 문자학적인 방법을 동원하고 역사학의 도움을 받아서
인천의 옛 지명에 무슨 의미가 숨겨져 있는가를 밝혀 보기로 한다.
미추홀彌鄒忽이라는 지명은 초기 고구려사와 백제사의 천착이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한 말이다.
이 지명에 고구려를 세운 소서노와 미추왕(味鄒王, 고주몽)이
관련이 되어 있고, 여기에 백제를 세운 소서노의 두 아들 온조와
비류가 또한 관련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추홀이라는 말은 당시에 고구려와 백제에서 쓰던 말을 한자화
하여 기록하였다고 볼 수 있는 문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미彌자에는 ‘사사직도祀社稷禱(사직에 제사지내
소원성취를 기도하다)’,
‘母婢(부인이 스스로 자기를 낮추어 부르는 말)’ 등의 뜻이 있으므로,
소서노가 추모왕과 비교하여 자기를 낮추어 한 말로 해석이 가능하다.
또한 미彌자를 弓+爾의 문자로 보면, 활을 가지고 있는 너(女)라는
의미가 됨으로, 소서노와 아들과의 관계를 나타낸 말로 보아도 된다.
그러므로 소서노가 아들 비류나 온조를 ‘너’라고 했다고 해석한다.
추鄒는 미추왕을 의미하는 말이고, 홀忽은 골(谷), 즉 땅을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미추홀은 소서노 쪽에서 보면, “소서노와 미추왕의 땅”이
되고, 아들 비류나 온조 쪽에서 보면, 어머니가 아들에게 한 말,
“네가 사직에 제사하고 기도하여 소원성취하여 얻은 추모왕의
땅”이 된다.
미추홀은 후대에 가서 고구려로 주인이 바뀌면서 이름을
매소홀買召忽로 하였다.
매소홀은 미추홀이 라는 이름이 어떻게 하여 생겨났는가를 밝혀
주는 이름이다.
매買자가 ‘산다, 買入하다’는 의미이고, 소召자가 소서노召西弩의
성이므로, “소서노가 추모왕으로부터 산 땅”으로 해석된다.
매소홀은 주인이 신라가 되면서 이름이 소성邵城으로 바뀐다.
소邵는 소씨召氏의 나라라는 뜻이다.
처음에 召와 邵의 두 성이 있었으나, 두 성이 卲로 합치면서 邵씨
가 되었다.(<氏族博考>)
그래서 신라가 멸망한 고구려와 백제의 잔재를 지우기 위하여
買자와 召자를 버리고 소성邵城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렇게 백제의 미추홀은 주인이 고구려로 바뀌면서 매소홀로,
다시 주인이 신라로 바뀌면서 소성으로 바뀌었다.
이 세 가지 이름에 삼국시대의 역사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렇다면 미추홀의 지명이 생긴 진짜 위치는 어디일까?
인천시청에서 <인천의 지명을 소개하는 글>에는 미추홀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인천에서 미추홀이라는 지명을 찾으려 한다면, 그곳이 어디인지
당연히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러나 소래사람들이 소래에서 미추홀이라는 지명을 찾는다면,
미추홀이 어디인가를 대번에 알 수 있다.
소래가 소서노가 상륙한 곳이기 때문에 미추홀이 어디인지를
알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래를 소래召來로 쓰지 않고 신라 때부터 소래蘇來(지금
은 蘇萊로 쓰고 있다)로 써왔기 때문에, 문자학적인 분석을 거치지
않으면, 소서노가 상륙한 소래가 어디인지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소래는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이 이곳에 상륙하
여 생긴 지명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이 말은 믿을 수 없는 말이다.
신라 이전에 백제의 땅이었기 때문에, 백제가 지은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소서노가 그의 나라 어하라於瑕羅를 출발하여 황해를 건너서
상륙하기에 가까운 곳을 찾았을 때 이 곳이 적지였다는 것을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백제시대엔 소서노가 온 곳이라고 하여 소래라고 하였을 것이므
로, 지금의 지명은 옛 지명 소래召來에 소정방이 욌음을 의미하는
소래蘇來를 덮어 쓴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곳에 소래산이 있고, 소래산 밑으로 부천으로 넘어가는 길에
비루와 비리의 두 고개가 있다.
이 두 고개는 비류와 관련이 있다.
인천에서는 “그곳에서 별이 잘 보여 비루와 비리 두 고개 이름이
생겼다”고 알고 있으나, 별은 고어에서 ‘펄’이라고 하였고,
푸를청靑자를 써서 표현하였으므로(예, 北斗七靑), 비루와 비리라
고 하지 않고 프르라고 했어야 하였다.
강화도에는 별밭 마을이 있는데, 별밭을 성전星田으로 표기하고 있다.
부루고개와 비루고개를 강화도의 표기법대로 따라 한다면 별고개
로 불러야 하는데, 그렇게 부르지 못한 이유는 이 고개가 비류가
넘어간 고개이기 때문일 것이다.
<輿地圖書>(영조 36년 발간 1760)에는 인천의 문학산성文學山城
을 미추왕고도味鄒王古都라고 하였다.
미추왕의 옛 도읍이라는 뜻이다. 이곳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
備考>에서 “비류가 도읍하던 곳”으로 명기하여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고구려에서 미추홀을 매소홀로 개명한 것으로 보아서, 이 곳도
소서노가 미추왕으로부터 사들인 땅 매소홀買召忽의 일부였을 것
이다.
소서노가 이 곳에 그의 대리자로 비류를 임명하고, 온조를 데리고
동북쪽과 동남쪽으로 지경을 넓히며 옮겨 갔을 것이라는 추리가
가능하다.
지금은 소래를 시흥시(소서노가 소래에 상륙했을 당시에 군포,
안양, 영등포, 서초 일대를 포함하여 잉벌노仍伐奴라고 하였다)가
관장하고 있는데, 당시에 시흥을 포함한 주변 일대의 지명을
잉벌노仍伐奴라고 했던 점으로 보아서, 미추홀을 추모왕으로부터
매입한 소서노가 온조와 함께 토착세력을 정벌해 나가면서 그가
인솔한 백성들을 살게 하여 잉벌노라는 지명이 생겨난 것이라고 하겠다.
잉仍자는 人+乃자로 ‘이어 사람을 살게 하다’는 뜻으로 풀이가
가능하고, 벌伐자는 소서노가 토착민을 토벌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노奴자는 소서노로 해석한다.
따라서 잉벌노는 “소서노가 정벌하여 얻은 땅”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문학산文鶴山의 문文자는 천문天文을 의미하는 문자로,
학鶴자는 북두칠성의 기운을 은유하는 문자로 보인다.
문학이라는 문자에서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학을 타고
날아 북두칠성에 접근하는 신선(집안군 오회분4호묘)’을 떠올릴
수 있다.
필자는 이 그림이 무당이 칠성거리를 할 때 무아지경에서 느끼는
트랜스라고 보는데, 문학이라는 말이 이 산에서 소서노가 칠성거
리를 함으로써 생겨난 말이 아닌가 한다.
소서노가 문학산에서 천제를 지낼 때 칠성거리를 하면서 생겨난
말로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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