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7년(헌종 3년) 3월 19일, 함경남도 함흥의 둔지에서
출생. 자는 懋平, 子明 호는 東武
본관은 全州, 아버지 이반오의 3남 2녀 중 장남. 이반오는
4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이제마는 넷째 부인 경주 김씨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에 즈음하여 조부 충원공이 용마도하(龍馬渡河: 일설에는 좋은 제주말 한 필이 집으로
들어왔다 함.)의 꿈을 꾸었는데 그의 濟馬라는 이름도 이에서 연유했다고 함. 조부 충원공만이 서자 출신인 그를
각별히 생각해 적자와 다름없는 처우를 하도록 주변에 훈계했다 한다.
어린시절부터 고전을 통독했으며 글쓰기에 능했고, 무예를 즐겨 자신이 스스로 호를 東武라 하였다. 그러나 그는 열결반위증(식도협착증,구토증), 해역병(손발의 마비를 동반하는 다발성 신경염) 등 자신이 평생 지녀야 했던 병 때문에 고생했고, 그 때문에 한의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마는 13세(일부 기록 15세)에 표연히 집을 떠나 정처없이 유량을 시작했다. 국내 뿐만아니라 만주, 연해주 등을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던 것으로 추정되며, 30세 전후에 우연히 객사에서 한석지의 ‘명선록’(양명학 계열의 서적)을 발견하여 크게 감화를 받게 된다.
무위도통사 김기석의 천거로 40세(1876년) 늦은 나이에 무위별선군관으로 관직에 들고, 50세 때 진해현감으로 제수되었다. 을미사변이 일어난 이듬해(1896년) 최문환의 난(일부 학자들은 최문환을 의병장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진압한 공로로 고원군수로 임명되었지만(1897년) 이듬해 모든 관직을 그만두고 함흥 만세교 부근 보원국이라는 약방을 차려 말년을 보내다가 1900년 6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임종 때 ‘나는 이제 가지만 백년 후에 온
세상은 사상의학으로 귀일(歸一)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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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체질의 창시자.동무 이제마 선생
1.인생내역.
동의수세보원의 저자인 이제마(李濟馬)선생은
서기 1838년 음력3월19일 함흥에서 출생하였으며 자는 무평(務平)호는
동무라 하고 본관은 전주李씨이다.
고종 25년에 군관직에 등용되었으나 사직하고 진해 현감이 되어 관기를
바로 잡았으나 관직에 뜻이 없어 이 또한 사직을 하고 서울로 올라와
저술과 학문 연구에 전심하였으며 그의 일생을 한의학 연구와 제자들의
교육에 전념하면서 사상의학을 확립하였다.
2.동무가 사상의학을 연구한 이유
자신의 신병인 해역증과 열격반위증이 오래동안 계속되어
여러 가지의 방법으로 치료를 해보았으나 도무지 효력이 없어 이상하게
생각하여 오랜 연구 끝에 사람은 각자의 체질이 다르고 그 또한 체질에
따라 약도 달리 써야 낫는다는 이치를 깨달아 본격적으로 연구를 하게
되었다.
3.동무의 저서
동무의 저서로는 동의수세보원외에 천유초.제신편. 격치고 등이 있다.
동무는 1900년 음력8월21일 6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후 1909년에 이 책을 율동계(栗洞契)에서 출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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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마 선생은 1837년 3월 9일 함경도 함흥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제마의 이씨는 전주이씨입니다 그러니 왕족입니다 그러나 대대로 집안에서 큰 벼슬을 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이제마의 아버지가 진사에 합격했습니다 집안은 함흥에서 대단한 부자입니다,
그리고 이제마의 조부가 충원공이라는 사람입니다.
이진사가 어느날 향교에 일을 보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주막에서 술을 먹었습니다,
늦게까지 먹다가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어요, 친구들이 이진사를 주막집에 놓고 갔다.
그 주막집 주모가 아주 못생긴 딸이 있었는데 이진사의 방에 딸을 동침시켰습니다.
그후 10달 후에 할아버지 충원공이 꿈을 꾸는데 어떤 사람이 탐스런 말을 집안 마당으로 들여와 내가 제주도에서 가져온 용마인데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사주는 사람도 없어서 당신에게 주고 가니 잘 키워달라 해서 충원공이 그말이 너무 탐스럽고 잘 생겨서 툭툭 치고 있는데 꿈을 깼다.
그런데 밖에서 일이 벌어진 거다. 어느 여자가 애를 강보에 싸가지고 와서 당신네 자손입니다 그런겁니다
이진사를 불러 물어보니 10달전에 주막에서 잔 여자이다. 할아버지가 꿈 생각이 나서 모자를 그냥 들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제주도에서 가져온 말이다 하여 제마라 합니다.
이진사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서자로 입적을 안 시켰다.
호적상으로는 서자가 아니나 문과 급제는 생각을 안하고 어려서부터 무예를 좋아했다.
이제마가 워낙 총명해서 암기력이 뛰어났고 시도 잘 썼다.
집안에 책이 많았기 떼문에 많은 책을 탐독하고 할아버지가 꾼 꿈 때문에 이제마는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행복하게 큰 것 같습니다.
이제마의 행적을 보면 무위통도사라는 벼슬을 하는 김기정이라는 사람이 이제마를 천거해서 대신중에 김의정이라는 사람의 집으로 불려 갔는데 국가를 구하는 발책이 뭐겠느냐? 이제마가 하는 말이 나에게 대포를 줄 수 있느냐, 그 대포를 광화문 쪽으로 향해서 설치해라. 우선 나라가 바로 잡힐려면 너희 놈들을 다 쏴 죽여야만 한다, 조정이 썩었는데 무선 개혁이 되겠느냐 라고 하니 김의정이라는 사람이 기절초풍을 하여 그냥 돌려 보냈다,
이렇게 성격이나 말이 직설적이고 거침없이 표현하는 사람이다.
이제마가 유일하게 벼슬로 간 것은 진해현감입니다.
1892년부터 1893년까지로 바로 동의수세보원을 쓰기 직전입니다.
진해현감을 할적에 곤장을 치는데 엎드려 있는 사람이 너무 아파하니까 참다 못해 내려가서 궁둥이를 어루만져 주고 사슬을 풀어주며 내가 비록 국법이 있어 이런 형벌을 내리지만 사람이 아파서 괴로워하는 것을 보지 못하겠노라 하면서 진해현감을 그만두고 올라왔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때 의사로서의 경지가 상당히 깊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萬室之邑 一人陶則不足也 百家之村 一人醫則活人不足也 必廣明醫學 家家知醫 可以壽世保元"이라 하셨는데 이것은 만가구의 읍에 질그릇 굽는 사람이 한사람이면 부족하고 백가구의 마을에 의사가 한사람이면 사람을 살리는데 부족하니 반드시 널리 의학을 알고 집집마다 醫를 알아야 비로소 세상을 온전히 할 수 있다는 말로서 모든 사람들이 사상의학 체질을 알고 상식화하여 질병으로부터 화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다.
사상을 만드신 東武 李濟馬 선생은 1837년 출생 1900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약 100년전에 사시면서 동의수세보원을 만드셨읍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근대적이고 우리하고 가깝게 접할 수 있는 의학입니다
그때의 사회적 배경을 보면 성리학적인 사회사상에서 실학사상으로 바뀌는 시대, 성리학을 탈피하려고 하는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학뿐만이 아니라 유학이라든지 다른여러가지 분야에서 실학사고가 풍미하던 시절입니다.
가령 연암 박지원이라든지 정약용등 이외에 여러 실학자들의 공통적인 현상은 기존 유학에 대한 무언가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해 볼려고 부단히 애를 쓰던 시기 입니다
서양근대사에 있어서 르네상스는 기존종교 소위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어떤 보이지 않는 지배정신, 이것이 중세유럽주민들을 어떻게 보면 속박하였는데, 그것을 자연쪽으로 , 자연으로 돌아가라 하는 것이 르네상스의 기본정신이죠, 그래서 초자연적인 Power에서 무언가 자연쪽으로 탈출해보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李朝後代의 실학정신은 오히려 자연적인 입장에서 인간적인 입장으로 탈출해보자 하는 시각입니다 기존 우리 한의학 내지 사회학을 볼때 인간과 자연의 天人合一사상을 주장합니다.
사람이 人君이 되자면 그냥 인군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늘이 낳아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현상은 벌써 운명론적으로 결정된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기에 순응할수 밖에 없다는 그런 시각입니다, 이것이 성리학의 주기론적 이론입니다
한의학은 黃老學派입니다 이것은 老子의 道敎사상에서 유발된 학파로 여기에서 周易으로 넘어갑니다. 그래서 老子 莊子 周易 黃帝內經 이렇게 넘어와서 나중에 음양오행론으로 해서 한의학으로 넘어오기때문에 우리가 황노학파라 합니다
황노라는 것은 말하자면 일종의 도교에 있어서 주역의 사고입니다
주역의 사고는 모든 인간의 존재를 무시해버리고 우주자연에 대한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인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內經의 기본정신을 보면 인간이 살아가자면 환경의 지배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자연과 환경에 순응해서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학정신에 와서는 모든 관점이나 사고의 중심에 인간이 들어섭니다
가령 정약용선생의 脈論을 보면 "한강물에 손을 터억 집어넣으면 이것이 오대산 물인지 금강산 물인지 어떻게 아느냐 이겁니다"이렇게 실랄하게 기존의 관념들을 비판합니다
물론 정약용선생의 이말이 맞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기존의 관념, 절대 불가침의 사상에 비판을 시작하고 뭔가 인간중심의 새로운 방향을 찾으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존의 사고에 대한 대반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 수세보원에서 보면 인간과 자연의 비중을 동등하게 보았습니다.
이제마 선생은 우주사물의 현상을 사심신물의 사상적 방법을 이용하여 설명합니다 사물은 자연, 심신은 인간, 이렇게 사상중에 이상은 자연 이상은 인간 이렇게 비중을 같이 두었습니다 뭔가 질병을 볼 때 인간을 생각하며 자연도 봐야 된다 좀더 덧붙이면 인간을 중심에 두고 기타 주위의 자연 환경을 봐라 하는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