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桓대륙의 주인,
천손민족이다
9. 한대륙의 주인은 천손민족이다
해뜨는 동방은 우리나라 천하관의 표현
癸亥年(B.C. 238) 檀君 고열가(高列加)가 마침내 位를 버리고 아사달(阿斯達)에 들어 가셨다. 진조선(眞朝鮮)은 오가(五加)와 함께 종정(從政)하니,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 종말을 맞았다(癸亥檀君古列加遂棄位入阿斯達眞朝鮮與五加從政未復而終焉 馬韓世家)
종정(從政)을 혹자는 秦始王 政에게 정복 되었다고 풀이 하지만, 억지 해석이다. 東洋史 어디에서 姓을 놔두고 이름만 표기한단 말인가. 秦始王에게 정복 되었으면, 종진(從秦 ; 진나라에 복종했다)이라 했을 것이다. 굳이 秦始王의 이름(嬴政)을 쓰고 싶으면, 從嬴이라 해야 한다. 여기서 從政이란 '五加와 더불어 政治를 따르다'로 해석 되어야 한다.
檀君世紀, 北夫餘紀를 보더라도 眞朝鮮을 차지한 것은 北夫餘다. 朝鮮의 강역이 티벳고원 북부를 제외한 동아시아다. 티벳고원 북부마저 朝鮮의 諸侯國인데 呂政이 무슨 수로 萬里長城을 쌓는단 말인가. 大夫餘가 呂政에게 멸망 했다면, 三國이 중국 대륙에서 건국할 수 있는가. 三國이 중국 대륙에서 일식관측할 수 있는가. 三國의 日蝕記錄이 있는 한, 中奴들의 역사가 중국 대륙 전체를 무대로 벌어졌다는 얘기는 날조다.
秦始王. 아주 보잘 것 없는 자다. 中土도 다 통일하지 못한[서쪽에는 西戎(濊貊, 南匈奴)이 있었다] 呂不韋(?~235 B.C.)의 자식은 檀帝의 신임을 받고자 하면서도 檀帝를 직접 찾아 뵙지도 못하고 고작 中土에 있는 太山에 가서 祭를 올리려다 滄海力士 黎洪星의 공격을 받고 도망친 자다.
그 해가 癸未 22 年(B.C. 219) 이니까, 呂政이 신임을 받고자 한 檀帝는 北夫餘의 解慕漱다. 北夫餘는 여전히 중국의 ‘上國의 上國’[中國의 上國은 番韓과 馬韓이다. 夏나라, 燕나라가 番韓에, 周나라가 馬韓에 사신을 보내 새해인사를 하고, 기후(箕詡)가 番朝鮮 왕이 되자 燕나라가 사신을 보내 축하한 것은 番韓, 馬韓이 上國 이었기 때문이다]이었다. 무엇보다 呂政이 大夫餘를 차지했다면 三國이 중국 대륙에서 건국할 수가 있는가.
'政'은 무력으로 상대방을 지배하는 것이며 부정(不正)한 것을 바로 잡는 것이라 했다. 따라서 종정(從政)은 무력에 복종했다 혹은 자연스러운 일(高列加 檀帝가 入山한 뒤 五加가 眞朝鮮을 다스렸는데, 그 당시는 君主制만 존재할 때라 여러 명이 협의해서 다스리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을 따랐다는 뜻이다. 요컨대 종정(從政)은 北夫餘에 복종했다고 풀이해야 한다.
“眞朝鮮은 五加와 함께 政에 복종하니,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 종말을 맞았다.” 이 말은 解慕漱가 무력으로 眞朝鮮의 五加를 굴복 시켰으나, 한 동안은 五加體制를 그대로 두었다가, 北夫餘에 병합 시켰다는 의미다.
중국 대륙의 역사가 동이족(東夷族)과 화하족(華夏族)의 경쟁과 협력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것이었다. 현재 중화사상을 이끌고 있는 夏華族을 중국인들은 華夏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본래 黃河의 상류 지역에 있는 임분(臨汾)에서 살았다. 東夷族에 속하는 소호족(小昊族)은 山東의 곡부(曲阜)를 중심으로 살았고 그 수가 夏華보다월등하게 많았으나 夏華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으며 살았다. 東夷族의 정신적 중심은 山東의 泰山이었고 그 정상에 있는 天祭壇에서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며 살았다 -(우리에게 공자는 누구인가. 국민일보, 2001. 01. 27.)
“중국 대륙의 역사가 東夷族과 夏華族의 경쟁과 협력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중국 대륙의 역사는 오로지 우리민족이 만들어왔다.
“중국 대륙의 역사가 東夷族과 夏華族(華夏族)의 경쟁과 협력으로 이루어져 온” 것은 티벳고원 북부의 中土 뿐이다. 太昊도, 神農도 그 땅으로 들어갔지만, 본격적으로 우리민족이 그 땅에 진출한 것은 慈烏支 한웅이 中土를 정복하면서 부터다.
날조사에서도 華夏族은 黃河 상류 지역에 살았다. 黃河 상류 지역은 柴達木盆地와 티벳고원이다. 더 연장해 봐야 사막과 초원, 염호 등으로 이루어진 오르도스다. 여기가 임둔(臨屯)이라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누가 中土의 주인인가. 黃河 하류에 산 東夷族인가, 柴達木盆地와 티벳고원에 산 華夏族인가.
柴達木盆地나 티벳고원은 문명이 꽃핀 장소가 아니었다. 柴達木盆地는 극도로 추워서 高句麗 이후 대대로 우리나라가 濊貊族이나 살라고 한 땅이다. 濊貊族 李成桂 조차 추위와 기근으로 못 견디고 제 동족들에게 高麗에 귀순할 것을 권고한 후 회군했다고 날조한 땅이다.
華夏族은 옛 黃河인 金沙江 상류 너머에 살았다. 티벳고원 북부의 서쪽에 살았던 것이다. 거기에 臨屯이 있었다. 中土로 진출한 우리민족은 4 대강 상류 즉 티벳고원 북부의 동쪽에 살았다. 거기에 山東이 있었다.
티벳고원 북부를 華夏族과 東夷族이 나눠 살았던 것이다. 그것을 中國史에 확대시켰듯이 중국 대륙 전체로 확대시킨 것이다.
“중국 대륙의 역사가 東夷族과 華夏族의 경쟁과 협력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것이나 “이곳은 東夷民族이 찬란한 문화를 꽃 피운 곳”이나 “이곳은 중국문화의 주요 발상지 중의 하나로 東夷族이 건립한 상당히 강성한 옛 중국의 중심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라는 山東省 성자애(城子崖) 박물관의 안내문은 역사날조 차원에서 쓴 글이다. 수적으로월등히 열세 라면서 華夏族이 무슨 수로 東夷族을 제치고 중국 대륙의 주인으로 행세할 수 있단 말인가.
太昊와 神農이 封土로 받은 땅이 티벳고원 이므로 中土의 토착민인 華夏族의 植民地史는 실로 오래 되었다. 慈烏支 한웅이 재정복에 나서 中土를 다스리던 神農의 후손을 서쪽으로 밀어내고 蚩尤氏들이 中土 東部를 차지했다. 華夏族은 神農의 피지배 종족에서 神農과 蚩尤氏의 피지배 종족으로 변한 것이다. 기원후 까지도 華夏族은 中土의 피지배 종족으로 살았다.
華夏族의 害毒은 참으로 커서 그 어떤 우수민족도 오염시켜 미개의 나락으로 끌고 들어가는 힘이 있었다. 中土로 간 蚩尤氏들, 日本의 百濟人과 新羅人, 중국 대륙의 한민족을 모조리 미개의 나락으로 끌고 갔다. 그러니까 대대로 지배받고 살았으나, 우수 華夏族 문화로 미개 유목민족의 문화수준 까지 끌어 올렸다는 中奴의 주장 따위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 우수 한민족이 미개 華夏族을 지배했을 때조차도 미개의 바닥까지 곤두박질쳤다.
中土로 간 우리민족이 바닥까지 떨어진 후에야 華夏族은 그 땅에서 우리민족과 경쟁할 수 있었다. 그래봐야 우리나라의 속국이었다. 중국은 5 천년 내내 우리나라의 속국 이었던 것이다.
呂政(秦始王)은 옛 黃河인 金沙江 상류에 살았다. 이미 캐시미르 및 타림분지(塔里木盆地)를 통해 정복민도 들어온 터라, 呂政은 티벳고원 북부의 동쪽만을 통일했다. 그런 자가 무슨 수로 黃河 하류에다 萬里長城을 쌓을 수 있는가. 고작 滄海力士의 공격을 받고 부리나케 달아난 呂政이 무슨 수로 3년만(B.C. 215년)에 중국 대륙을 지배하고 있는 北夫餘의 解慕漱를 축출하고 萬里長城 공사를 시작할 수 있는가.
티벳고원 북부의 일부를 통일한 呂政이 정말 3년 만에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萬里長城을 쌓았다면, 劉邦은 慈烏支 한웅이 아니라, 呂政을 軍神으로 떠받들었을 것이다. 慈烏支 한웅은 軒轅과 10년간이나 전투를 벌였으니까. 그러나 史記에도 劉邦이 전투에 앞서 언제나 蚩尤에게 祭를 올렸고 蚩尤 사당까지 세웠다고 했다.
太白山은 長安 서쪽에 있다. 長安이 朝鮮의 중요 도읍지니까, 그 당시도 陝西省에 太白山이 있었다. 華夏族은 華山에서 유래한 이름 이라는데, 현재 華山은 長安 바로 동쪽에 있다. 원래는 九月山 이었다. 秦王 呂政이 太山에 제사드리러 왔다가 滄海力士 黎洪星에게 공격당한 太山은 中土에 있었다. 中寇는 우리나라를 따라서 티벳고원 북부에 있는 山東의 산을 太山이라 불렀던 것이다.
“동순(東巡)하여 망제(望祭)를 지내고 마침내 동후(東后)를 찾아뵙다(東巡望秩肆覲東后 書經).”라는 書經의 기록은 중국의 실체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檀君을 대하여 呂政은 물론, 堯,舜 때부터 중국의 지배자가 직접 보고 禮를 올리지도 못하고 멀리서 우러러 보며 祭를 올린 후에야 알현할 수 있는 높은 존재였던 것이다.
“辰國(辰韓)은 天帝의 아들이 다스리는 곳이다. 고로 5년 마다 巡狩하는데 낭야(琅耶)에 한 번씩 이르른다. 舜의 제후는 때문에 辰韓에 조근(朝覲)하기를 네 번씩이었다(辰國天帝子所治故五歲巡到琅耶者一也舜諸侯故朝覲辰韓者四也 番韓世家)."
이 땅의 史學者는 중국의 날조사를 보고 ‘檀君이 楡罔 집안에서 나왔다는 둥, 누비혼인으로 출생한 외손자를 사위로 맞아들이던 시대라, 檀君王儉의 아버지 홍제(洪帝)는 檀君王儉의 장인이 되고, 檀君王儉의 할아버지 태제(泰帝)는 妻 할아버지가 된다고 볼 수 있다’는 둥 망언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상고신화와 역사탐구. http://shamanism.view.co.kr/e-contents/ec2/forum_list/f10.html)
심지어 “檀君王儉은 14세 때 甲辰年(BC 2357) 熊心國 왕의 사위가 된다. 그래서 그를 웅녀군(熊女君)이라고 불렀다. 熊女君이란 熊女의 남편이라는 뜻이다. 熊女란 웅녀라 불리는 母系集團의 족성의 여자라는 뜻이다. 따라서 檀君王儉은 14세 때 族姓이 熊인 모계집단에 데릴사위로 장가갔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장인이 전쟁터에서 전사하자 그는 장인의 대를 이어 熊心國의 王儉이 된다.”는 헛소리를 지껄이기를 서슴치 않는다.
熊女君이 熊女의 남편으로 보이나? 熊女 임금이다. 어째서 熊女의 아버지, 조상, 스승 이라고는 안하나. 檀君世紀에 나오는 藍國君, 靑邱君, 句麗君은 藍國의 남편, 靑邱의 남편, 句麗의 남편인가. 藍國의 임금, 靑邱의 임금, 句麗의 임금이다.
“乙酉 2년 남국(藍國)의 임금(藍國君) 금달(今達)이 靑邱의 임금(靑邱君), 句麗의 임금(句麗君)과 주개(周愷)에서 회합하고 몽고리(蒙古里)의 병력을 합쳐 가는 곳마다 은(殷)나라의 성책을 부수고 깊숙이 오지로 들어가 회대의 땅을 평정하더니 포고씨(蒲古氏)를 엄(淹)으로, 영고씨(盈古氏)를 서(徐) 땅에,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임명하니, 은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위세를 우러러보며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乙酉二年藍國君今達與靑邱君句麗君會于周愷合蒙古里之兵所到破殷城柵深入奧地定淮岱之地分封蒲古氏於淹盈古氏於徐邦古氏於淮殷人望風惶怯莫敢近之 檀君世紀).”
웅녀군(熊女君)은 한웅(桓雄)에게 신덕(神德)이 있다 함을 듣고 곧 무리를 이끌고 가서 뵈옵고 말하기를 “바라옵건대 하나의 굴을 내리시어 하나같이 신계의 백성(神戒之氓)이 되게 하시기를 비옵니다.”라고 하니, 한웅께선 마침내 이를 허락하사 이를 맞아들이시고 아들을 낳게 하였다(熊女君聞桓雄有神德乃率衆往見曰願賜一穴㕓 一爲神戒之氓雄乃許之使之奠接生子 太白逸史 神市本紀)
아직도 熊女君이 檀君王儉으로 보이는가.
한인(桓因) 뒤에 한웅씨(桓雄氏)가 계속하여 일어나 천신의 뜻을 받들어 白山과 黑水 사이에 내려왔다. 사람 모이는 곳을 천평(天坪 하늘의 들)에 마련하고 그곳을 청구(靑邱)로 정했다. 천부의 징표(天符印)를 지니시고 다섯 가지 일을 주관하시며세상에 계시면서 교화를 베푸시니(在世理化) 인간을 크게 유익하게 하였더라(弘益人間). 또 신시(神市)에 도읍을세우시고 나라를 배달(倍達)이라 불렀다. 3.7 일을 택하여 천신께 제사지내고 밖의 물건을 꺼리고 근신하며, 문을 걸어 잠그사 스스로 주문을 외우며 몸을 닦아 공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더라. 약을 드시고 신선이 되시니, 팔괘를 그으시고(劃卦) 올 것을 알며 상(象)을 잡으시고 신을 움직였다. 또 여러 영험스러운 이들과 뭇 철인들이 보살피도록 하시더니 웅씨의 여인(熊氏女)을 거두어 아내로 삼으시고 혼인의 예법을 정하매, 짐승 가죽으로써 폐물을 삼았다(桓因…後桓雄氏繼興奉天神之詔降于白山黑水之間鑿子井女井於天坪劃井地於靑邱持天符印主五事在世理化弘益人間 立都神市國稱倍達擇三七日祭天神忌愼外物閉門自修呪願有功服藥成仙劃卦知來執象運神命群靈諸哲爲輔納熊氏女爲后定婚嫁之禮以獸皮爲幣 三聖紀全 上篇)
웅씨의 여인이 바로 熊女君이다.
사람들은 熊氏 부족이 우리나라에 합류한 것이 배달 마지막 한웅 檀雄 때라고 생각하지만, 1世 한웅 居發桓 때였다. 檀雄은 神人王儉의 부친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이, 그것도 역사학자라는 사람이 제 나라 역사책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하고 무분별하게 날조 중국 역사책만 신용하여 檀君王儉의 父親까지 딴 인간으로 바꾸어서 楡罔의 자손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神人王儉의 아버지는 檀雄이고 어머니는 熊氏의 王女이며 辛卯(B.C. 2370)年 5월 2일 寅時에 밝달나무 밑에서 태어났다(王儉父檀雄母熊氏王女辛卯五月二日寅時生于檀樹下 檀君世紀)
熊氏가 거발한(居發桓) 때부터 우리나라 사람이 되었다는 기사는 많다. 熊氏 사람 少典은 8世 한웅 안부련(安夫連) 때 사람이고, 少典의 후손인 公孫을 軒邱로 유배 보낸 때는 13世 한웅 사와라(斯瓦羅) 때다.
熊氏에서 갈려져 나간 자에 少典이라고 있었는데 安夫連 말기의 少典은 명을 받고 강수(姜水)에서 병사들을 감독하게 되었다(熊氏之所分曰少典安夫連桓雄之末少典以命監兵于姜水 三韓管境本紀)
소전(少典)의 별고(別孤 : 다른 일파에)에 公孫 이라고 있었는데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하였으므로 헌구(軒丘)로 유배 시켰다. 헌원(軒轅)의 무리가 모두 그의 후손이다. 사와라(斯瓦羅) 한웅 초기의 일이다(少典之別孤曰公孫以不善養獸流于軒丘軒轅之屬皆其後也斯瓦羅桓雄之初 三韓管境本紀)
熊女의 후손으로 최초로 王儉이 된 인물은 배달 12세 한웅 주무신(州武愼) 때의 ‘여(黎)’라는 인물이다. 黎와 神人王儉의 시차는 460년이다. 거불단(居弗檀)의 아들이 신인왕검(神人王儉)이 되는 까닭은 더 이상 熊氏나라의 王儉이 아니요, 우리민족 전체의 中祖가 되기 때문이다.
웅녀군(熊女君)의 후손으로서 '여(黎)'라고 하는 이가 있었는데 처음으로 단허(檀墟)에 책봉을 받아서 王儉이 되매, 덕을 심어 백성을 사랑하고 영토를 차츰 크게 넓히니 여러 곳의 왕검들이 나아와 특산물을 바치며 이로써 귀화하는 자 천여 명을 헤아렸다. 뒤에 460년이 지나 '신인왕검(神人王儉)'이라 하는 이가 있었는데 크게 백성들의 신망을 얻어 비왕(裨王)이 되었다. 섭정하신지 24년에 熊氏의 왕은 전쟁에서 붕어 하시니 왕검은 마침내 그 왕위를 대신하여 구한(九桓)을 통일하고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하였다(熊女君之後曰黎始得封於檀墟爲王儉樹德愛民土境漸大諸土境王儉來獻方物以歸化者千餘數後四百六十年有神人王儉者大得民望陛爲裨王居攝二十四年熊氏王崩於戰王儉遂代其位統九桓爲一是爲檀君王儉也 三韓管境本紀)
熊선의 이 熊女의 남편 이라면, 熊氏君은 熊氏 전체의 남편인가. 熊女의 후손으로서 '黎'라고 했으니, 처음으로 檀墟에 책봉 받아서 왕검이 된 인물도 이름이 熊女였다. 역시 熊女君이었던 것이다.
유위자(有爲子)가 묘향산(妙香山)에 숨어 살았으니 그의 학문은 자부선생(紫府先生)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지나가다가 熊氏君을 알현하니 熊氏君은 '나를 위해서 도를 말하라'고 청했다(時有爲子隱於妙香山其學出於紫府先生也過見熊氏君君請爲我陳道乎 馬韓世家)
熊氏君. 熊氏의 임금이다.
熊女君. 처음 우리나라를 찾아온 熊氏의 임금은 여자였다. 그래서 한웅 거발한(居發桓桓雄)과 혼인할 수 있었고. 熊女君과 神人王儉 과의 시차는 무려 1500년이다. 아직도 熊女君이 神人王儉의 배우자라 우기겠는가.
이 땅의 사학자들은 무려 1 만년에 이르는 우리나라 역사의 시차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 역사가 전부 같은 시간대에 발생한 것처럼 취급한다. 시차를 무시하기 때문에 후대에 일어나야 할 것이 먼저 일어난 사건이라고 날조해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 시차만 파악해도 도저히 성립할 수 없는 날조역사임을 단번에 알 수 있는 것이 많다.
神人王儉은 배달의 마지막 한웅인 檀雄의 아들로서 朝鮮을 개국한 후 비서갑(菲西岬)의 하백녀(河伯女)를 거두어 아내로 삼았다(納菲西岬河伯女爲后 三聖紀全 上篇). 1世 한웅 거발한(居發桓桓雄) 역시 熊氏의 여인을 거두어 아내로 삼으시고 혼인의 예법을 정했다. 왜 혼인의 예법을 정했겠는가. 熊氏의 여인을 맞이한 것이 1세 한웅 거발한(居發桓) 이라서 그렇다. 18世 한웅 居弗檀 이라면, 전해 내려오는 혼인의 예법에 의해 혼인을 하면 된다.
神人王儉이 어째서 “날짐승과 들짐승에게도 짝이 있고 다 해진 신발도 짝이 있나니, 너희 남자, 여자는 서로 화목하여 원망함이 없고 질투함도 없고 음란함도 삼갈 것이다(禽獸有雙弊履有對爾男女以和無怨無妬無淫 檀君世紀)."고 교화 했겠는가. 바로 옆 中土에서는 형제고, 조카고 가리지 않고 서로 탐하니까, 본받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中土가 하도 외설스러우니까, 배울까봐 22世 檀君 索弗婁는 禁八法(혹자는 禁八法을 두고 서슬 퍼런 긴장이 감도는 사회라고 하는데, 정반대다. 朝鮮은 弘益人間하고 敬天愛人하는 사회로 刑罰보다는 敎和에 중점을 둔 理想社會였다.
禁八法의 내용은 남을 죽이면 같이 죽여서 다스리고, 남을 다치게 하면 곡식으로 배상케 하고, 남의 것을 도둑질하면 신분을 무시하고 노비가 되게 하고, 蘇塗를 훼손 시키는 자는 가두어 두며, 예의를 잃은 자는 軍에 복무하게 하고, 근면하게 노동하지 않는 자는 부역을 시키며, 淫亂한 행동을 하는 자는 笞刑으로 다스리고, 사기치는 자는 훈계 방면하나 스스로 속죄하려 하면 공표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은 면하여 준다. 결국 殺人과 절도(竊盜)가 문제지만, 이것이야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율이다. 殺人을 처형으로 단죄함은 그 당시 전세계의 공통이었다. 禁八法이 있다 하나, 어기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오히려 인간답게 사는 지침을 제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다 朝鮮의 힘이 약화되고, 大夫餘, 北夫餘, 高句麗로 이행하면서 우리나라는 극단적인 형벌주의로 나아갔다)을 만들어 淫亂한 행동을 하는 자는 笞刑으로 다스리겠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婦女者들은 정숙하여 淫亂하지 않았기 때문이다(婦人貞信不淫闢 番韓世家). 그럼 남자는 淫亂 했던가. 우리나라에 賣春婦가 들어온 것은 1876년 日本과 丙子修好勒約을 체결하고 나서다. 정숙한 여자밖에 없는데, 무슨 수로 음란한 남자가 있을 수 있는가.
우리나라는 기원전 7197년에 개천한 한국(桓國)에서 부터 정숙함을 미풍양속으로 삼았다.
한국(桓國)에 5 훈이 있으며… 이른바 5 훈이란 첫째 성실하고 믿음으로써 거짓이 없을 것, 둘째 공경 근면함으로써 게으르지 않고, 셋째 효도 순종하여 어김이 없고, 넷째 염치와 의리 있어 음란치 않으며, 다섯째 겸손 화목하여 다툼이 없는 것 등이다 (桓國有五訓…所謂五訓者一曰誠信不僞二曰敬勤不怠三曰孝順不違四曰廉義不淫五曰謙和不鬪 桓國本紀)
熊氏 王(결국 배달의 제후 여러 王儉 중의 한 명이다)이 檀君王儉을 裨王으로 삼은 것은 檀君王儉의 母親 熊女가 熊氏나라의 王女였기 때문이다. 잘난 손자로 하여금
★ 한민족의 이동경로 이야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율이다. 殺人을 처형으로 단죄함은 그 당시 전세계의 공통이었다. 禁八法이 있다 하나, 어기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오히려 인간답게 사는 지침을 제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다 朝鮮의 힘이 약화되고, 大夫餘, 北夫餘, 高句麗로 이행하면서 우리나라는 극단적인 형벌주의로 나아갔다)을 만들어 淫亂한 행동을 하는 자는 笞刑으로 다스리겠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婦女者들은 정숙하여 淫亂하지 않았기 때문이다(婦人貞信不淫闢 番韓世家). 그럼 남자는 淫亂 했던가. 우리나라에 賣春婦가 들어온 것은 1876년 日本과 丙子修好勒約을 체결하고 나서다. 정숙한 여자밖에 없는데, 무슨 수로 음란한 남자가 있을 수 있는가. 우리나라는 기원전 7197년에 개천한 한국(桓國)에서 부터 정숙함을 미풍양속으로 삼았다. 한국(桓國)에 5 훈이 있으며… 이른바 5 훈이란 첫째 성실하고 믿음으로써 거짓이 없을 것, 둘째 공경 근면함으로써 게으르지 않고, 셋째 효도 순종하여 어김이 없고, 넷째 염치와 의리 있어 음란치 않으며, 다섯째 겸손 화목하여 다툼이 없는 것 등이다 (桓國有五訓…所謂五訓者一曰誠信不僞二曰敬勤不怠三曰孝順不違四曰廉義不淫五曰謙和不鬪 桓國本紀) 熊氏 王(결국 배달의 제후 여러 王儉 중의 한 명이다)이 檀君王儉을 裨王으로 삼은 것은 檀君王儉의 母親 熊女가 熊氏나라의 王女였기 때문이다. 잘난 손자로 하여금 한민족의 이동경로
자신을 보좌케 한 것이다. 아마도 熊氏 王은 아들이 없었을 것이다. 檀君王儉이 楡罔의 자손이라면, 朝鮮을 개국할 수 없었다. 누가 미개하고 난잡한 중국인을 우리나라 임금으로 떠받든단 말인가.
주목할 점은 중국이 자국의 五帝를 팽개치고, 우리나라의 五帝를 제사지냈다는 사실이다. 朱元璋이 허겁지겁 만든 가짜 五帝라서 그렇다. 秦나라는 白帝를 주신으로 삼고 靑帝를 보(輔)로 삼고, 黃帝와 염제(炎帝)를 제사했다. 漢나라는 靑帝, 白帝, 黃帝, 赤帝를 主神으로 삼았는데, 劉邦이 “나는 하늘에 五帝가 있다고 들었다“(하늘에 五帝가 있다면서 중국의 별자리라고 우기는 28수(宿)를 보면, 하필 黃帝가 빠져 있다)면서 黑帝의 사당을 추가로세웠다. 漢나라가 우리나라 祭天行事를 따른 것은 우리민족이세운 나라였기 때문이다.
北夫餘 檀帝를 알현하고 싶어도 알현할 수 없었던, 그래서 고작 泰山으로 제사 드리러 갔지만, 滄海力士의 공격을 받아 내쫓긴 초라한 呂政이 과연 皇帝를 자처했단 말인가. 漢나라도 北夫餘 말에나 잠시잠깐 皇帝를 자처했을까, 高鄒牟에게 정복된 이후로는 내내 우리나라 속국이었다. 明 이전까지 皇帝를 자처할 수 없었다.
隋, 唐은 高句麗도 아니고 新羅의 속국이었다. 新羅王도 奴客(奴卑)을 자처하며 高句麗 황제의 은혜를 구해야 했거늘, 과연 高句麗가 隋, 唐이, 魏晉南北朝의 미개 小國들이 皇帝를 자처하는 것을 두고 봤을 것인가(“百濟王이 廣開土王에게 歸依하여 스스로 맹세하기를 지금 이후로 영원히 大王의 奴客이 되겠습니다.”는 구절은 거짓이다. 百濟 황제가 奴客이라 했다면 高句麗 황제가 太皇, 太烈帝라 하지 않았다. 百濟皇帝를 王으로 격하시키면 되기 때문이다). 탁록(涿鹿)의 전투도 軒轅이 太陽의 아들을 자처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우리나라는 倭와 中寇의 우두머리를 통틀어 漢委奴國王이라고 불렀다.
高麗 시대만 해도 미개 중국은 역사날조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北夫餘紀 全篇에 걸쳐 漢나라 군대를 가리켜 한구(漢寇) 즉 漢나라 도적이라 했다. 그러나 李氏朝鮮이 우리나라 上古史를 말살한 뒤에 쓰여진 太白逸史 에서는 미개 유목민 ‘천하고 작은 생선’이세운 隋, 唐이 번듯한 皇帝國으로 변신한다. “楊廣은 左右에게 말하길 내가 천하의 주인이 되어 몸소 작은 나라를 쳐도 승리하지 못하니 이는 만세의 웃음거리가 아니겠는가?(廣謂左右曰予爲天下主親伐小國而不利是非萬世之所嗤乎 高句麗國本紀)” 天下의 주인은 高句麗였다. 隋의 天下는 티벳고원 북부였다. 隋는 新羅의 屬國에 불과했다.
明은 漢族이 아니라 華夏族이세운 나라다. 文盲者에 밥 빌어먹던 거지(白蓮敎徒)가세운 나라다. 中國은 朱元璋 같은 문맹자나 거지도, 呂政 같은 王의 血統을 이어받지 못한 자도 충분히 왕노릇을 할 수가 있었다. 어차피 저 땅을 지배한 수많은 유목민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高麗시대까지도 中國은 고작 티벳고원 북부에 있던 나라다. 明 역시 그 땅에 선 나라지만, 濊貊族 李成桂는 揚子江 이남을 떼어주고, 역사까지 뒤바꿔 明을 大國으로 부르며 성실 근면하게 섬겼던 것이다.
어지러운 천하를 통일한 사람은 장사꾼 여불위(呂不韋 ; ?~BC 235)의 아들 진시황제였다. 그는 동이족(東夷族)의 신임을 얻기 위해 태산에 제사를 드리려고 나섰다가 동이족 창해역사의 습격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그는 동이족 포섭을 단념하고 장안으로 돌아와 3년 후인 B.C. 215년에 만리장성 공사를 시작한다. 처음 장성의 위치는 난하의 서쪽이었다. 이는 동쪽의 조선을 막아 놓고 산동의 동이족을 박해하려는 계략이었다(우리에게 공자는 누구인가. 국민일보, 2001. 01. 27.).
중국을 가졌다고은날조한 呂政이 大國인가, 동북아를 80 개 제후국(78 제후국과 마한, 번한)과 나눠가졌다고 날조당한 朝鮮이 大國인가. 중국 대륙을 가졌다는 呂政이 동북아의 나라 北夫餘 檀帝의 信任을 받고자 애쓰는 것이 진짜 역사일 수 있는가.
半島史 대로라면, 呂政이 統一한 中國은 78 제후국의 上國(番韓, 馬韓)의 上國(北夫餘)의 上國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대제국 秦나라가 萬里長城은 뭣하러 쌓았단 말인가. 동북아의 81 개 小國이 그리도 무서웠단 말인가.
난하( 灤河)의 서쪽을 쌓은 것은 百濟다. 난하 유역의 長城은 요즘 따로 떼어내 燕나라 長城 이라고 우긴다. 그러나 明 때만 해도 倭는 燕에 속한다고 날조했다(山海經).
요(堯)가 회중을 살게 한 땅이 해 뜨는 동방이라는 뜻의 우이(嵎夷)라고? 양곡(陽谷)이 낮은 곳으로부터 태양이 솟아올라 온누리를 밝게 비추는 곳이라는 뜻이라고? 堯가 회중에게 嵎夷(陽谷)를 주면서 공경하는 마음으로 동방의 해뜨는 것을 맞이하여 봄 농사를 고르게 하라고 명했다고? 堯가 長安城을 차지하고 있었다면, 공경하는 마음으로 중천에 해뜨는 것을 맞이하라고 했을 것이다. 堯가 살고 회중이 살던 땅은 티벳고원 북부에 있었기 때문에 해뜨는 동방에 있는 天子, 즉 朝鮮의 檀帝를 공경하라고 한 것이다.
중국은 우리나라 속국이다. 그러니 중국 동부에 위치한 新羅 皇帝 金春秋는 절대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이 될 수 없다. 티벳고원 북부의 唐王 李治가 嵎夷道行軍總管 이었다. 聯合軍이라 하기엔 너무나 초라한 唐軍이 新羅의 지원군이었다.
해뜨는 東方은 단순한 말이 아니다. 萬物이 生하는 해가 뜨는 곳이라서 東方이라 했다. 東方은 우리나라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天下觀에서 만든 말이다. 서양에도 해는 뜬다. 그래도 해가 지는 西方이라 했다. 서아시아도 近東이지, 해뜨는 동방이 아니다. 해뜨는 동방은 세계의 지배자 배달의 한웅(桓雄), 朝鮮의 檀君이 계시는 땅이다. 그래서 중국도 5 천년이나 공경하는 마음으로 경건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던 땅이다.
타고르(Tagore Rabindraanath 1861~ 1941)는 李氏朝鮮을 東方의 등불이라 했지만, 李氏朝鮮은 등불조차 못되는 나라였다. 우리나라는 高麗時代 까지 내내 東方의 등불이 아니라,世界의 太陽 이었다. 우리나라의 문화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전세계로 전파 되었다. 東方의 등불 운운한 것을 보면 타고르는 우리나라가 동아시아의 天子國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인물이다.
아침 해가 빛나다. 朝鮮이라는 國號 역시 해뜨는 東方(朝鮮이라는 국호가 고작 朝水, 鮮水라는 江에서 비롯됐다는 史記의 기록은 날조다. 史記에는 周武王에 대한 기록도 있다. 武王 때 中國에는 漢字가 없었다. 史記는 우리나라 역사책을 보고 쓴 책이다. 朝水, 鮮水에서 國名을 땄다는 소리는 明의 날조 기사다. 나중에 漢字를 만들었을 때, 같은 義味로 바꾸지, 같은 音으로 고치지는 않는다. 따라서 朝鮮의 국호가 朝鮮이 아닐망정, “아침 해가 빛나다”라는 뜻은 맞다. 朝鮮의 원음은 쥬신이다. 우리나라가 漢字를 만들지 않았다면 音까지 비슷할 수가 없다)이라는 의미다.
아침 해는 환하게, 활기차게 떠오르지, 고요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歷史를 봐도 高麗時代 까지 언제나 활기에 넘친 大帝國 이었다. 우리나라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도, 隱遁의 나라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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