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제국 단절된 역사
8. 한 제국 단절된 역사 (1)
1) 한국사 말살은
이성계-이씨조선이 시초였다
우리나라 역사축소를 얘기할 때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인물이 三國史記 편자 金富軾(1075~1151)이다. 우리나라 역사말살을 얘기할 때 반드시 거론하는 것이 日本이다. 그러나 金富軾은 우리나라 역사를 축소하지 않았다. 日本은 우리나라 역사의 최후의 抹殺者일 뿐, 유일한 말살자는 아니다.
歷史抹殺은 무엇을 말하는가. 역사말살의 개념부터 정의하자. 歷史는 그대로 놔두고 이름만 抹殺이라 붙인 것은 말살이 아니다. 말살에 해당하는 역사축소 작업이 존재했기 때문에 역사말살이라 한다. 우리나라가 고작 滿州와 韓半島에 터 잡고 살았다면, 滿州에 웅거한 역사를 지우는 것은 歷史縮少는 될지언정 歷史抹殺은 되지 않는다. 동북아 전체가 우리나라 영토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최소한 중국 대륙까지 우리나라 영토 이어야만이 역사말살이 되는 것이다. 主人史를 奴隸史로 날조해야 말살 했다고 할 수 있다. 말살이란 滄海를 無로 만들거나 一粟으로 축소할 때만 붙일 수 있는 단어다.
잘난 조상은 광대한 영토와 빛나는 역사를 물려준다. 조상만 말살해서는 계승국까지 줄줄이 못난 나라로 만들 수가 없다. 倭奴가 아무리 미련해도 그렇지, 朝鮮의 존재를 지운다 해도, 朝鮮의 광대한 영토와 빛나는 역사를 계승한 三國과 高麗를 남겨놓고 韓國史를 말살했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인가. 三國史記, 三國遺史만 대조해 봐도 엉터리 역사책을 썼다는 걸 알 수 있다면, 누가 그런 ‘歷史抹殺’을 애써 하려고 하겠는가. 倭奴가 韓國史를 말살하려면, 배달사부터 해서 朝鮮史, 三國史, 高麗史까지 다 말살해야 한다. 倭奴가 밥 먹고 할 짓이 없어서 심심풀이로 우리나라 역사를 말살한 것이 아니다.
倭奴國. 순종해야 하는 노예 나라라는 뜻이다. 원래 中國倭에 붙여준 이름이나, 中國倭가 日本으로 집단 이주한 이래로 列島의 倭 또한 中國倭의 문화에 침몰되어 갔다. 中國倭가 日本으로 이주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李成桂의 나라는 日本을 倭奴國이라 불렀다.
倭奴의 韓國史 抹殺
倭奴에게는 韓國史를 말살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百濟, 新羅의 식민지이고, 大震國의 朝貢國, 高麗의 屬國이었기 때문이다. 李氏朝鮮에 까지 朝貢한 나라가 日本이다. 저 日本列島는 百濟, 新羅가 식민지를 건설한 땅이고, 高句麗는 百濟, 新羅의 上國 이었다. 日本은 高麗도 아니고, 高麗 諸侯國의 屬國이었다. 그리고 濊貊族의 나라에도 조공한 나라고, 濊貊族의 나라로 부터 가르침을 받은 나라다. 그러나 倭奴에 의한 말살은 韓國史 抹殺의 마지막이었다.
동기와 기회. 倭奴는 韓國史를 말살할 동기도 충분했고, 기회도 있었으나, 이미 그 전에 韓國史는 말살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말살할 수 있는 범위가 적었다. 三國遺史, 花郞世紀……. 倭奴는 우리나라 역사를 말살하기 위해 우리나라 역사책들을 뜯어고쳐 재보급 해왔다. 三國史記, 三國遺史는 壬辰倭亂 때 약탈해갔다. 日本은 李氏朝鮮을 강점했을 당시, 우리나라 역사책들 역시 日本書紀와 古事記 만큼이나 왜곡, 날조하고 싶었을 것이고 그럴 태세도 되어 있었지만, 이미 韓國史는 말살되어 있었다.
이미 李成桂가 朱元璋에게 우리나라 역사책을 다 준 지 5 백년이나 지났는데, 日本은 우리나라 역사책이 많다고 했다. 朝鮮半島史 편찬 요지에 아래와 같은 글을 남겼다.
“조선인은 다른 식민지에 있어서의 야만적이고 반개화된 민족과 달라서 독서속문에 있어서 문명인에 떨어지는 바가 없다. 고래로 사서의 존재하는 바 많고, …….” 倭奴가 그림책 에토키(繪解)를 들여다보고 퇴폐소설 우키요조우시(浮世草子)를 읽는 것은 독서문화라 그러겠지? 우키요조우시는 朝鮮通信使가 건너가 학문을 가르쳐주자, 최후의 문맹자 집단인 사무라이의 눈까지 번쩍 뜨게 만든, 倭奴 땅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퇴폐소설이다. 우키요조우시와 기생들의 음탕한 연회에서 출발한 가부키(歌舞伎) 등 잡다한 것을 한데 묶어 겐로쿠 문화(元祿文化)라고 한다. 한 마디로 퇴폐문화다. 壬辰倭亂으로 李氏朝鮮의 國富를 모조리 강탈해 가서 그것으로 퇴폐문화를 일으켰던 것이다.
倭奴는 한국 역사책을 焚書(1910년 11월 부터 전국의 경찰서를 동원하여 1911년 12월 말 까지 1년 2 개월 동안 계속된 제1차 전국 서적 색출에서 '檀君朝鮮' 관계 고사서 등 51 종 20 여만 권의 사서를 수거하여 불태웠다『제헌국회사, 군국 일본 조선강점 36년사』)하고 일본으로 빼돌리기에 혈안이 되었다.
倭奴王이 소유하고 있다는 족보책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815)은 중국의 문물을 전수 했다고 날조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뜯어 고쳐졌다. 중국계 가문 109 개는 모두 중국에 있던 百濟, 新羅系의 가문이다. 高句麗系 역시 百濟系, 新羅系 가문이다[날조 日本史에서 新羅의 문물 전수는 상당히 축소되어 있다. 中國倭에게도 新羅는 원수같은 나라였다. 추잡의 절정 기모노(きもの)섹스, 혼욕(混浴), 요바이(よばい) 풍습 때문에 新羅 땅에서 쫓겨났던 것이다].
하기야 家門이라는 말이 日本에서는 아무 의미 없는 말이다. 中國倭가 저 땅에, 기모노섹스, 混浴, 요바이의 性文化를 전파한 이래로 천년 동안 가문 해체를 경험한 나라다. 그저 다른 나라 보기에 창피해서 家門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다. 히로히토(裕仁)는 다이쇼(大正)의 섭정으로 있으면서 南淵書라는 희대의 僞書도 창작해내고, 倭奴王이 된 후에는 花郞世紀 날조에도 관여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新撰姓氏錄 역시 히로히토가 날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南淵書는 벌거벗고 흙구덩이에서 뒹굴던, 百濟의 군사식민지로 출발한 日本이 “太古 이래로 동아시아 제국을 예속했으며 당연히 예속시켜야 한다.”가 핵심 내용이다. 5 세기에도 日本은 원시 그대로의 아담과 이브였다.
日本의 순수창작이 아니다. “太古 이래로 동아시아 제국을 예속”한 것은 배달, 朝鮮, 高句麗였다. 배달과 朝鮮, 高句麗를 日本으로 바꿔치기 했을 뿐이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결단코 배달도, 朝鮮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데, 日本은 배달과 朝鮮이 동아시아를 지배한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나라 王朝의 모든 正史書와 온갖 역사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李氏朝鮮의 역대 濊貊族 왕들이 숨겨놓았던 한단 역사서 51 종 마저 日本으로 빼돌렸다.
倭奴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우리나라 역사서를 분서하고 개서해서 韓國史 말살에 광분 했다는 것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사실 韓國史 抹殺은 倭奴의 最大 國策事業이었다.
왜(倭)의 역사왜곡은 18 세기부터다. 1607년 부터 1811년 까지 204년간 파견된 朝鮮通信使에게 배우면서 역사왜곡에 열을 올린 것이다. 이 당시까지 倭奴는 그림책 에토키(繪解)나 들여다보는 문맹자들 이었지만, 학문을 깨우치자, 자신들의 초라한 위치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광적으로 역사왜곡을 해댔다. 참고서는 중국의 날조 역사책이었다. 우리나라의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가공의 중국 문명을 받아 들였다고 날조하기로 한 것이다.
왜(倭) 이전에 明, 淸과 李氏朝鮮 등이 韓國史를 말살했다 해서 왜(倭)의 韓國史 抹殺行爲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倭奴의 韓國史 말살은 李氏朝鮮의 역대 왕들이 숨겨온 한단 역사서와 1 차 사료에 집중되어 있다.
李氏朝鮮의 천문관측 기록은 일식 214 회를 비롯하여 수만 개에 이른다고 추정된다(인간과 우주, 1997). 李氏朝鮮 末 까지 보존되어 있던 관상감(觀象監)의 방대한 천문관측 일기까지 훔쳐간 倭奴다. 우리나라 천문기록까지 말살한 倭奴가, 奴隸史를 지우고자 혈안이 된 倭奴가 주인나라의 역사는 말살하지 않았단 말인가.
日本 쇼소인(正倉院)에서 新羅의 民政文書가 발견 되었다면, 기뻐할 것이 아니라, 어째서 그곳에 있었는지 부터 의심 해봐야 하지 않는가. 日本은 우리나라 역사를 말살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역사말살의 전력이 없는 나라라고 해도 일단 그것부터 규명해야 한다. 역사말살 행위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서 역사 말살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新羅가 자신의 民政文書까지 식민지 日本에 하사 했던가. 도저히 발견될 수 없는 장소에서 발견 되었으면, 어째서, 어떤 목적으로 그곳에 있게 되었는지 의심하는 것이 당연한 절차다. 물론 韓國史를 왜곡하고 날조하기 위해서다. 倭奴는 倭史와 韓國史를 사소한 것 하나까지 다 날조한 식민종족이다.
“州, 縣, 管, 驛들이 없고 곳곳에 촌리(마을)들이 있는데 다 靺鞨人들의 부락이다. 그 백성은 靺鞨人이 많고 土人(高句麗人)은 적다. 다 土人들로써 村長을 삼는데 큰 촌의 촌장은 都督이라고 하고 다음 가는 촌의 촌장은 刺使라고 하며, 그 이하는 다 백성들이 首領이라고 부른다. 토지는 지극히 추워 논농사에는 마땅하지 않다(無州縣管驛處處有村里皆靺鞨部落其百姓者靺鞨多土人少皆以土人爲村長大村日都督次日刺使其下百姓皆日首領土地極寒不宜 類聚國史)”고 柴達木盆地에 거주하는 大震國의 속민 靺鞨族을 설명한 것을 두고 大震國이라 날조한 日本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新羅의 民政文書에 나오는 인구와 재산 역시 최소한 두 자리는 축소했다. 논농사도 할 수 없는 靺鞨人의 나라에 조공을 하고, 新羅 선박을 타고 중국 대륙을 왕래하며 遣震史(遣眞使)를 보내던, 高麗의 제후국에게 조공하며 황제라 아첨하던 日本은 대체 어떤 나라란 말인가.
김정호(金正浩 ?~1864)는 1864년 까지 살았다. 金正浩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만들 당시 朝鮮의 영토는 東鴨綠江에서 黑龍江 까지였다. 그렇다면 金正浩가 부분도를 만들었던가? 倭奴가 韓半島 이북을 떼어 버리고 다시 만든 날조지도다.
大東輿地圖는 倭奴에게 있어서 植民母國의 역사를 말살할 더없이 좋은 도구였다. 金正浩의 사망에서 30 여년만 더하면 倭奴가 우리나라에서 날뛰기 시작한 시절이다. 大東輿地圖를 倭奴가 20 세기에 다시 제작한다 해도 아무도 알아차릴 수 없다.
大東輿地圖 木刻版이 舊總督府 건물에서 나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倭奴가 우리나라 영토를 보호 하려고 韓半島만 표시된 지도 원판을 숨기지는 않았다. 淸과 협정도 맺어 우리나라 영토를 넘겨준 종놈이 아닌가. 나중에 발견될 것을 감안해서 後代에 까지 길이길이 우리나라의 역사를 半島史로 왜곡, 날조할 목적하에 넣어둔 것이다. 金正浩의 또 다른 지도 靑邱圖에는 義州가 현 大凌河 유역에 있었다. 현 大凌河가 西鴨綠江 이였다는 의미다. 大凌河 유역에 세운 淸碑를 白頭山定界碑라 유포시킨 倭奴다. 漢委奴가 漢委奴의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슨 짓인들 못할 것인가.
倭奴가 우리나라 역사를 半島史로 축소 하려면, 우리나라 영토 축소가 선행 되어야만 한다. 땅마저 中奴에게 넘긴 상황에서 이를 마무리 하는 것이 지도축소이다. 그것은 中奴가 날조지도를 통해 우리나라 영토를 가로채고, 李氏朝鮮이 존속 내내 해온 짓거리라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역사를 半島史로 축소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지도의 축소가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조선전도
1900년에 벌써 『조선산악론(An Orogrphic Sketch of Korea)』이라고 써서 전세계에다 소개한 것이다. 고토 분지로는 우리나라 지리와 관련해서 모두 3 편의 논문과 지명사전(공동), 그리고 지도 1 편을 남겼다. 3 편의 논문은 모두 영문으로 발표 되었다. 고토 분지로의 조선전도는 1903년 동경에서 발행 되었다. 컬러판이고 지명은 영문으로 표기되어 있다.
우리나라에 근대적 개념의 지리부도가 들어온 것은 倭奴가 李氏朝鮮을 강점하고 나서였다. “값싸고 질좋은 지도책이 대량 유통 되면서 재래식 전통지도가 자취를 감추게” 됐다는 것이다. 그렇게 잘 알면서 날조 이전의 지도를 연구할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고, 오늘날 까지도 倭奴가 만든 韓半島 지도에만 죽어라 매달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倭奴가 만든 半島史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현 사학계의 ‘독창적인’ 半島史라는 것이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중국 고지도도 연구하지 않는다. 현 遼水가 시종일관 遼水였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 태반 이니까.
大陸史를 논할라치면, 현 사학계는 民族史學으로 매도하기 일쑤지만, 그것조차도 자신의 견해가 아니다. 倭奴가 먼저 써먹은 소리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이다. 철저히 세뇌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역사연구는 민족사학(民族史學)일 수밖에 없다. 역사를 배우는 목적이 무엇인가. 祖上의 장, 단점을 배워 장점은 계승하고 단점은 고쳐서 국가의 밝은 미래를 열어가자는 것이다. 과거의 역사에서 배우는 게 아무 것도 없다면,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고 또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날조사를 實史라 믿고서는 아무 것도 배울 수가 없다.
日本은 植民地史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나라 역사를 축소한 것을 잘 알고 있다. 日本史가 하도 미개 하니까, 자기네끼리도 시침 뚝 떼고 이런다. “韓半島에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있다는 건 ‘한여름 밤의 잠꼬대’에 불과한 얘기다.” “왜 없다고 단정하느냐. 한국학계를 고무시켜 연구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이런다. “우리도 다 안다. 우리가 朝鮮의 역사를 왜곡 조작 하였다는 것을. 日本이 이렇게 빨리 文明化된 것은 다 역사를 조작했기 때문이다. 그대로 알렸다가는 자부심이 없어지고 기가 죽어 안되니까 거꾸로 해서 용기를 내게 했다. 기를 살려서 淸日, 러일전쟁도 이겼다.”
李成桂와 朱元璋이 韓國史와 中國史를 바꾸기로 거래했을 때도 日本史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만큼 미개국이었기 때문이다. 李氏朝鮮通信使의 가르침을 받은 18 세기에 들어와서야 미개 日本史를 날조하느라 야단법석이었다. 한국의 식민지에서 중국의 식민지로 자진해서 바꾸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 말살된 韓國史를 말살한다고 광분했던 것이다.
倭奴의 韓國史 말살 이전에 벌써 안정복(安鼎福 ; 1712~1791)이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三國史記를 무가치한 사서라 했다. 東史綱目은 箕子朝鮮을 정통으로 삼은 책인데, 그런 安鼎福의 눈에도 三國史記는 너무도 事大主義에 치우친 책이라 판단되었다는 것이다. 三國史記는 安鼎福이 東史綱目을 쓴 李氏朝鮮 이순(李焞 : 李氏朝鮮의 肅宗이라 불리는 濊貊族) 이전에 말살 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나라 ‘역사축소’ 문제 가운데 가장 문제된다고 너나없이 지적하는 것이 三國史記 ‘왜곡’이다. 그리고 왜곡의 당사자로 倭奴도, 中奴도 아니고, 三國史記의 편자를 지목한다. 그러나 金富軾은 三國史記를 왜곡하지 않았다. 흔히 말하듯 金富軾이 事大主義者라서 우리나라 역사를 축소 기술했다면, ‘중국이 있는데, 무슨 천문관측이냐?’하면서 천문관측 기록까지 다 빼버렸을 것이다.
현재의 半島史가 金富軾이 대륙의 지명을 전부 韓半島 주변에 우겨넣은 후에 생겨난 거라고 하기에는, 金富軾 사후의 高麗史와 李氏朝鮮史도 너무나 잘못 알려져 있다. 강조 하지만, 東寧府가 柴達木盆地이고, 雙城摠管府가 黃河 하류 이북이라는 사실은 高麗 末까지 내내 우리나라 영토가 동아시아라는 증거이다. 中國은 高麗의 속국이었다. 高麗의 도읍 開京은 高句麗의 마지막 도읍 平壤이다. 高麗 때까지 우리나라는 줄곧 중국 대륙에 위치했기 때문에 중국이 지명을 밀어 내거나 바꿀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중국 역사책이 ‘唐은 대제국이다’라고 써놓았다고 해서 과연 金富軾이 믿었겠는가.
金富軾이 생존할 당시, 宋人의 삶이란 “흙 침상에서 자며 토굴을 파서 아궁이를 만들어 그 위에 눕고, 遊女도 많고, 男女가 들에서 함부로 野合”하는 형편이었다. 金富軾이 ‘그래, 지금은 쪼그라져도 그 옛날에 중국은 대국이 틀림없었어’하고 이해했을까. 그렇다면 오늘날의 사학자들 보다 훨씬 이해력이 높았던 셈이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李氏朝鮮은 小國이라 高麗도, 大震國도, 三國도 小國 이라고 단정 하니까. 朝鮮은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확신하니까. 이씨조선 이라고 말하면 왜노의 후예쯤으로 보는 낯뜨거운 비난은 어찌할이거나…….
高麗는 新羅가 물려준 광대한 영토를 감사히 받으면 됐다. 오히려 高麗는 高句麗를 계승했다고 천명했다. 단순히 三國 중 高句麗가 가장 큰 나라라서 高句麗를 계승했다고 한 것이 아니라, 高句麗(朱蒙聖帝 당시)가 동아시아의 지배자였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지배자를 계승했다고 천명까지 했으니까, 高麗도 동아시아의 지배자로 군림했다. 고구려가 이상으로 가졌던 다물정신(多勿精神 : 復舊土)은 그대로 고려의 통치이념 이기도 했다.
근본적인 의문. 과연 皇帝國 高麗가 자국의 역사를 그것도 正史(高麗實錄)를 편찬 하면서 皇帝 칭호와 年號를 다 삭제 했겠는가. 국가의 위신을 드높이려고 建元稱帝했는데, 역사책을 편찬 하면서 축소, 누락 시켰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高麗가 아닌 누군가에 의해 축소되었던 것이다.
金富軾은 三國의 이해관계에서 초월한 후대 사람이다. 金富軾이 事大主義者라고 하는데, 高麗 末까지 우리나라가 동아시아를 지배했다. 金富軾이 事大했다면, 高麗에 한 것이다. 조국에 事大한 사람을 무엇이라 부르나. 愛國者다. 金富軾은 역사축소를 하지 않았고, 객관적으로 기록하려는 史家의 자세도 잃지 않았다. 요컨대 우리나라 역사축소는 金富軾이 三國史記를 편찬한 이후에 일어났던 것이다.
다음으로 의심되는 것이 몽고간섭기(蒙古干涉期)다. 蒙古는 朝鮮의 계승국을 자처했고, 당연히 우리나라 역사를 탐낼 수 있다. 三國을 제후국으로 밀어내고, 朝鮮의 계승국으로서 동아시아의 天子國 행세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꿈에 지나지 않았다. 高麗는 蒙古干涉期에도 長安에 도읍했던 대제국이다. 그런 高麗가 蒙古가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 하도록 놔두겠는가. 蒙古에게는 동기는 있어도 기회가 없었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三國史記가 왜곡 되었다고 주장 하지만, 三國史記보다 더 심하게 날조된 것이 바로 高麗史다. 무엇보다 韓國史 전체를 말살할 수 있는 것은 李氏朝鮮 뿐이다. 高麗가 高麗史를 말살하겠는가, 李氏朝鮮史를 말살할 수 있는가. 李氏朝鮮은 李氏朝鮮史도 날조 했지만, 李氏朝鮮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였다.
李氏朝鮮이 韓國史를 말살했다는 증거는 많다. 그 중 하나가 한단사(桓檀史) 말살 기록이다.
世祖 3년 丁丑 5월에 팔도관찰사들에게 유시하기를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대변설(大辯說), 조대기(朝代記),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誌公記), 표훈천사(表訓天詞), 삼성밀기(三聖密記), 안함노 원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 도증기(道證記), 지리성모 하사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仁)·설업(薛業) 등 삼인 기록, 수찬기소(修撰企所)의 1 백여 권과 동천록(動天錄), 마슬록(磨璱錄), 통천록(通天錄), 호중록(壺中錄), 지화록등 문서(地華錄等文書), 도선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의 문서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하도록 허가하고, 자원하는 서책을 가지고 회사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찰에 널리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世祖三年丁丑五月 諭八道觀察使曰 古朝鮮秘詞.大辯說.朝代記.周南逸士記.誌公記.表訓天詞.三聖密記.安含老.元董仲三聖記.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文泰山王居仁薛業等三人記錄.修撰企所一百餘券.動天錄.磨璱錄.通天錄.壺中錄.地華錄等文書.道詵漢都讖記等 不宜藏於私處 如有藏者 許令進上 其廣諭公私及寺社)
예종 1년 9월 18 일(戊戌), 예조에 전교하기를,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誌公記), 표훈천사(表訓天詞), 삼성밀기(三聖密記), 도증기(道證記), 지이성모하사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文泰)·옥거인(王居仁)·설업(薛業) 세 사람의 기(記) 1 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 지화록제서(地華錄諸書), 명경수(明鏡數) 및 모든 천문·지리·음양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집에 간수하고 있는 자는, 경중(京中)에서는 10월 그믐날 까지 한정하여 승정원(承政院)에 바치고, 외방(外方)에서는 가까운 도(道)는 11월 그믐날 까지, 먼 도(道)는 12월 그믐날까지 거주하는 고을에 바치라. 바친 자는 2 품계를 높여 주되, 상 받기를 원하는 자 및 공사 천구(公私賤口)에게는 면포 50 필을 상주며,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진고(陳告)를 받아들여 진고한 자에게 위의 항목에 따라 논상(論賞)하고, 숨긴 자는 참형(斬刑)에 처한다. 그것을 중외(中外)에 속히 유시하라” 하였다(睿宗己丑九月 傳于禮曹曰 周南逸士記.誌公記.表訓天詞.三聖密記.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文泰王居仁薛業等三人記一百餘券.壺中錄.地華錄諸書.明鏡數及天文地理陰陽諸書 家藏者 京中 限十月晦日 呈承政院 外方 近道十一月晦日 遠道十二月晦日 納所居邑 納者 超二階 不納者 許人陳告 告者 依上項論賞 匿者 處斬 其速諭中外)
성종 원년 12월 9 일(戊午), 여러 도의 관찰사에게 교서를 내리기를, “전일에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誌公記), 표훈천사(表訓天詞), 삼성밀기(三聖密記), 도증기(道證記), 지리성모 하소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왕거인·설업 삼인기 1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 지화록제서(地華錄諸書), 명경수와 무릇 천문·지리·음양 등 여러 서책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서울로 올려 보낼 일을 이미 하유(下諭)했으니, 상항(上項) 명경수 이상의 9 책과 태일금경식, 도선참기는 전일의 하유(下諭)에 의거하여 서울로 올려 보내고 나머지 책은 다시 수납하지 말도록 하고, 그 이미 수납(收納)한 것은 돌려주도록 하라” 하였다(成宗卽位己丑十二月戊午 下書諭諸道觀察使曰 前者 周南逸士記.誌公記.表訓天詞.三聖密記.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文泰王居仁薛業等三人記錄一百餘卷.壺中錄.地華錄諸書, 無遺搜覓 上送事 曾已下諭矣 其已收冊者 依前諭 上送 餘書 勿更收納 李氏朝鮮實錄)
책을 바치면 벼슬을 2 品階나 올려주고, 숨기면 그냥 사형도 아니고, 참형(斬刑)에 처한다. 대한민국은 나라를 위해 순직해야 2 계급 특진 시켜준다. 고작 책 하나 바친다고 벼슬을 2 품계나 올려준다는 것부터가 정상이 아니다. 책을 숨기면 죽인다고 하니, 이건 倭奴들이 韓國史를 말살한 것보다 더 심한 것 아닌가. 李氏朝鮮은 천문관측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 나라였다. 그런 나라가 以前 王朝의 天文觀測記錄은 없애고자 혈안 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地理다. 우리나라가 高麗 時代까지 중국 대륙에 있었기 때문에 地理冊에는 모두 중국 대륙이 그려져 있었다. 이 사실을 은폐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자랑스러운 自國史는 국민들로 하여금 널리 읽히게 해야지,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숨겨두지 않는다. 그래서 朝鮮도, 高句麗도 大震國도 모두 自國史 배우기가 국민들의 가장 중요한 학과과정이었다.
自國(?) 역사책을 수거해서 비밀장소에 감춰두고 自國民이 읽지 못하도록 하는 나라는 李氏朝鮮 말고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李氏朝鮮은 濊貊族의 나라니까 우리나라도 아니다. 自國史가 아니니까 韓國史를 말살할 수 있었던 것이다.
太白逸史를 보면, 震域遺記, 檀君世紀, 神誌秘詞 등世祖, 睿宗, 成宗 때 수거한 한단사(桓檀史) 등에 포함되지 않는 책들이 인용문헌으로 나오고 있다. 震域遺記, 檀君世紀가 수거목록에 없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목록만 봐도 朝鮮時代에 관해서 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李陌은 수거한 비밀서적과 “집에 간직한 여러 상자들을 취하여 조사해 본즉 사전(史傳)으로 가치가 있는 것과 또 평소에 여러 고로(古老)들에게 들은 것들을 합쳐서 채록(取閱家藏陳匧其有可據於史傳者與夫平日聞諸古老者幷擧採錄 太白逸史 跋)”했다고 했지만, 李陌의 집에서 간직한 문헌 역시 수거목록에 포함된 문헌인데, 제출하기 전에 채록했던 것이다. 한단 역사책을 수거한 李氏朝鮮의 왕들은世祖, 睿宗, 成宗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李氏朝鮮實錄도 내내 뜯어 고쳤으니까 요행히 눈에 띠지 않아서 삭제를 면한 것이 저 求書의 諭示로 둔갑한 것들이다. 실상 李成桂 부터 한단사를 수거 해야만 했다. 한단사 마저도 朱元璋에게 주었으니까.
古朝鮮秘詞. 李氏朝鮮이 세워진 후에 쓴 책이라 朝鮮을 古朝鮮이라 한 것이다. 한단 역사책을 수거하자, 한단사를 보충하기 위해 쓴 책이다.世祖 이전에 이미 한단사를 수거 했음을 암시한다. “책을 바치면 벼슬을 2 품계나 올려주고, 숨기면 斬刑에 처한다.”고 한 것은 이미 수거를 했지만, 수거가 제대로 안돼 극단의 처방을 할 수밖에 없었음을 알려준다. 李成桂와 濊貊族들이 한단사 말살에 얼마나 혈안 이었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李氏朝鮮이 한단 역사서를 다 수거하고 감춘 것은 우리나라 역사를 축소하기 위해서였다. 李氏朝鮮은 분명히 그런 의도를 가지고 우리나라 역사말살을 철저하게 실천에 옮긴 나라다. 한단사만 수거하고 없앤 것이 아니라, 三國史記, 高麗史에서 온갖 문헌을 다 조작했다. 高麗가 高麗史를 축소할 수는 없다. 高麗는 李氏朝鮮史를 왜곡할 수 없다. 李氏朝鮮史는 李氏朝鮮 스스로에 의해 날조된 것이다.
李氏朝鮮實錄도 광범위하게 날조된 책이다. 단계적으로 우리나라 영토를 축소한 것 외에도 李氏朝鮮 이후의 동아시아사를 다 바꿨다. 일례로 明, 淸은 동시대에 존속하고 淸에게도 李氏朝鮮 초 부터 조공을 했으면서 淸이 明을 멸망시키고 동북아를 가로채자, 李氏朝鮮實錄을 뜯어고쳤다.
明, 淸과 李氏朝鮮은 중국 대륙을 揚子江, 黃河로 삼등분했다. 정복에 의해 차지한 것이라 볼 수 없을 만큼 어색한 분할이다. 三國도 7 백년을 넘나들며 싸워온 揚子江과 黃河는 전투의 장애물이 아니다. 임의로 나눠 가지지 않고서는 그런 분할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淸은 스스로 明의 땅에 빌붙어 살던 미개종족임을 자인했다. 원래 미개종족이니까, 손해보는 것도 없었다. 역사날조를 할 당시에는 淸이 천년만년 중국 대륙과 동북아를 차지 하리라고, 머지않아 韓半島까지 집어삼킬 것이라고 믿고 있었으니까, 그 정도의 사실 인정은 감수했던 것이다. 더구나 黑水女眞을 끌어들여 滿州族으로 만들고, 자신들은 漢族으로 멋지게 변신할 생각 이었으니까.
李氏朝鮮은 이미 기록에 나타난 것만 따져도世祖 때 부터 한단 역사책을 수거해서 韓國史 말살에 적극 나선 나라다. 한단사도 말살한 李氏朝鮮이 三國史記와 高麗史를 그냥 둘 리 없다. 高麗史는 1392년 부터 1451년 까지만도 여섯 번이나 날조했다.
우리나라의 역대왕조 가운데 광대한 영토를 상실한 것은 李氏朝鮮 뿐이다. 그것은 雙城摠管府와 東寧府의 위치에서도 알 수 있다. 李氏朝鮮이 건국 하면서 우리나라 영토가 축소되었으므로 李成桂는 高麗史를 왜곡해 자신의 책임을 우리나라에 전가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李氏朝鮮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우리나라 역사를 모조리 말살해 버렸다. 영토 상실은 全王朝史는 물론이고, 우리나라 역사를 줄줄이 축소를 너머 말살한 이유는 될 수 없다. 李氏朝鮮의 비정상적인 행적은 단순히 우리나라 영토를 상실 했다는 사실 만으로는 설명이 안된다. 영토 상실 외에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5300년의 식민종족 중국에게 李氏朝鮮이 저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明, 淸의 무력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나라 역사를 줄줄이 축소했다면, 李氏朝鮮實錄에 그 기록을 남겼을 것이다. 李氏朝鮮은 高麗에게도 모든 책임을 전가한 나라다. 그런 나라이니 만큼 역사축소 책임을 中國에게 혹은 高麗에게 전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李氏朝鮮은 우리나라 역사를 축소하려 했다는 사실마저 감춘 나라다. 李氏朝鮮 에게는 떳떳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軍事大國은 李氏朝鮮이지, 明이 아니었다. 高麗가 발명한 모든 첨단무기는 明이 아니라 李氏朝鮮이 가졌다. 火藥, 火箭, 火口, 질려포(疾藜砲), 飛火槍…. 宋의 발명품으로 종이 위에서나마 인심 쓴 것들은 高麗 初의 발명품에 지나지 않는다 (飛火槍이 走火를 모방해서 만든 것이니까, 火箭, 火口, 疾藜砲도 中奴가 모방해서 만든 것일 가능성도 있다). 神機箭, 火車…. 高麗의 최첨단 무기들은 李氏朝鮮이 다 가로챘다. 高麗는 한민족 5 천년의 과학문화가 응집된 진정한 軍事大國이었다. 李成桂는 明, 淸의 무력 위협이 아니라, 협박에 굴복했던 것이다.
李氏朝鮮이 존속하는 내내 明, 淸에 적극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李成桂한테 우리나라의 統治者로서 결격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약점을 잡은 明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를 바꾸고, 영토까지 빼앗았던 것이다.
어떤 경우에 한 나라의 統治者가 될 수 없는가. 統治者 로서의 요건은 의외로 제한이 없다. 거지에 일자무식한 朱元璋도 중국의 통치자가 될 수 있었다.
오직 하나 우리민족이 아닐 경우에만 우리나라의 통치자가 될 수 없다. 淸이 中奴의 통치자가 되었듯이, 匈奴, 鮮卑, 거란(契丹), 濊貊, 蒙古 등이 줄줄이 中土로 가서 中土를 지배했듯이, 李成桂가 우리나라를 정복 했다면 충분히 우리나라의 統治者 행세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李成桂는 濊貊族이고, 우리나라를 정복하지도 못했다.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우리나라를 차지한 植民種族이 우리나라의 統治者가 될 수 있는 길은 華夏族과 제 동족에게 우리나라 영토를 넘기고, 우리나라 역사를 팔아먹는 것 뿐이었다. 그래놓고 온갖 인간들에게 역사말살의 책임을 덮어 씌웠다.
秦始王은 우리나라 역사를 축소하지 않았다. 中土 절반(티벳고원 북부 동쪽)을 통일한 秦始王 呂政은 解慕漱의 신임을 받고자 하면서도 檀帝를 직접 찾아 뵙지도 못하고 고작 中土에 있는 太山에 가서 祭를 올리려다 滄海力士 黎洪星의 공격을 받고 도망친 자다. 그런 자가 中寇의 역사가 한민족의 지배 하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은폐하려 했을까. 죽는 순간 까지도 解慕漱의 신임이나 바랐을 자다.
唐 太王 李世民도 우리나라 역사를 훔칠 수 없었다. 唐 高王 李治도 高句麗, 百濟 역사서를 분서할 수 없었다. 너무도 미개국이니까, 우리나라 역사를 훔쳐 自國史를 거창하게 꾸미겠다는 생각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흔히 거란(契丹)이 大震國史를 말살 했다고 말한다. 거란이 불태웠다는 大震國의 忽汗城 부터 거란은 王城으로 사용했다. 유목민족 거란이 동아시아 天子國의 皇城을 불태우면, 천막에서 사는 길밖에 없다. 거란이 분서 했다는 大震國史는 세세한 부분까지 모조리 中國史로 둔갑해 있다. 大震國 유민이 세운 나라들이 거란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忽汗城에 보관 중인 大震國 역사서는 분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全國에 보관 중이던 大震國史는 고스란히 남아 高麗가 물려 받았다. 원래 역사책은 전국민이 읽고 배우는 책이다. 史庫가 불탄다고 국민들이 가진 역사책이 사라지는가.
수천년사를 순수창작 한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 中國史는 未開史에서 文明史로 둔갑만 한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 역사와 완전히 뒤바꿔 썼다. 李氏朝鮮의 협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고려 때 송의 관리가 대동강 평양에 와서 기자묘(箕子墓) 찾아 보기를 원하였으나 그 때 한 사람도 알지 못한다고 하자, 고려 숙종 7년(1102) 예부상서(禮部尙書) 정문(鄭文 ?~1106)이 무주고총(無主古塚)을 하나 찾아 임금께 청하여 기자묘라 하고 사당을 세워 중사(中祀)로 제향을 올렸다. 그 뒤 평양의 사당에서 주벽(主壁) 단군왕검의 위패를 서향지좌로 하고 기자의 위패를 주벽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기자는 삭망향축(朔望香祝)까지 올리는 제전(祭田)이 있었지만 봄·가을 두 번 지내는 단군 제사에는 제전조차 없었다.
http://greatautumn.com.ne.kr/history/root_of_history.htm, 9 천년 역사의 뿌리를 찾아서)
高麗는 동아시아를 지배한 대제국이었다. 三國史記의 편자 金富軾 조차 箕子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箕子朝鮮이 高麗 때 전혀 먹혀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舞主古塚을 하나 찾아 箕子墓라 해? 李氏朝鮮은 사기그릇 몇 개 묻어두고 箕子墓라 한 나라다. 무엇보다 箕子를 한민족의 정통으로 떠받든 것은 李氏朝鮮이다. 李氏朝鮮의 얘기를 각색한 내용이었던 것이다.
高句麗의 平壤은 高麗의 開京이다. 浿水가 남으로 흐르는 平壤은 長安이지, 韓半島의 平壤이 아니다. 平壤에 箕子墓를 세웠다면, 중국 대륙에 있어야지, 현 平壤에 있을 수 없다.
한단사 부터 三國史記, 高麗史 등 우리나라 역사를 모조리 말살한 것은 李氏朝鮮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말살하고 우리나라 영토를 포기한 濊貊族의 나라 李氏朝鮮은 자신의 책임을 모두 우리나라에 떠넘겼다.
그래서 우리나라 역사를 모조리 말살하고, 우리나라의 피지배종족 漢委奴 明과 淸을 떠받든 濊貊族의 나라 李氏朝鮮은 잘난 나라로 추앙받고, 동아시아의 대제국 高麗는 단지 蒙古의 침입에 굴복했다는 이유 하나로 없느니만 못한 못난 나라로 평가 받아왔다. 그러나 蒙古는 高麗를 침입한 적이 없다. 아니, 침입할 수 없었다. 고려가 너무나도 거대한 대제국이었기 때문에 유럽까지 정복한 蒙古도 高麗만은 침입할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高麗는 위대한 조상을 계승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한 나라이고, 李氏朝鮮은 위대한 조상(?)이 있었다는 사실을 감추려한 나라다. 하기야 제 조상이 아니니까. 배달에서 高麗 시대까지 우리나라는 언제나 강대했다.
倭寇가 高麗 末에 침입 했다고 하지만, 李氏朝鮮 초에도 백여 차례나 침입했다. 李氏朝鮮은 크고 작은 倭亂까지 수시로 발생한 나라다. 그뿐인가. 결국 5 천년의 식민종족 華夏에게 중국 대륙과 동북아를 준 것도 모자라 上國으로 떠받들고 華夏의 일파인 倭奴 한테는 국권까지 빼앗긴 나라다. 그 결과, 우리민족이 어떠한 고통을 받았는지는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잘 알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말살하고 한단 역사서를 모조리 거둬들여 왕궁에 감춰 두었으니까, 사실상 倭奴가 王宮에 있는 한단 역사서만 일본으로 빼돌려도 우리나라 역사를 말살할 수 있었다. 李氏朝鮮이 그처럼 혈안이 되어 시시때때로 韓國史를 수거해왔기 때문에, 그게 전통으로 굳어져 倭奴가 우리나라 역사책을 수색, 압수할 때도 순순히 내놓았던 것이다.
2) 이성계는 예맥족이다
李成桂(1335~1408)의 고조부는 高麗에서 蒙汗으로 歸化한 인물이고, 李成桂의 父는 蒙汗에서 高麗로 귀화한 인물이라 했다. 李成桂의 부 子春(소위 桓祖라는 시호를 받았다)은 恭愍帝 4년에 처음으로 雙城摠管府 千戶 자격으로 高麗朝廷에 來朝하러 왔다고 했다. 李成桂의 고조부 이안사(李安社 : 소위 穆祖라는 시호를 받았다)는 高宗 때 사람으로 蒙汗에 歸化, 다루가치(達魯花赤)가 되어 濊貊族을 다스렸고, 李子春까지 蒙汗에서 벼슬을 살았다.
李安社가 蒙汗으로 귀화한 때는 高麗가 蒙汗의 침입을 받기 시작했다고 날조된 시기다. 高宗 때는 물론이고 蒙汗은 高麗를 한 번도 침입하지 못했지만, 高麗 高宗 때, 濊貊族에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濊貊族이 세운 金汗이 망한 것이다. 李子春이 高麗로 귀화한 때는 蒙汗이 쇠약해져 망하기 일보 직전인 恭愍帝 때다.
李成桂 家系의 특징은, 한 마디로 기회주의자들의 집안이라는 것이다. 出世를 위해서라면, 國籍을 바꾸는 것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李安社가 高宗 때 지의주사(知宜州事)를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 명망이 높았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이 출세를 위해 과연 국적까지 바꾸었단 말인가. 그래서 지방 관리의 탄압을 받아 蒙汗으로 도망쳤다고 날조했다. 고작 地方 官吏의 보복이 무서워 高麗 영토를 벗어나 蒙汗으로 갔다는 것이다.
이성계의 고조부모의 능인 덕릉(德陵)과 안릉(安陸)은 타타르인이 주 활동 거점지 달단동(鍵輯洞)에 있었다고 조선실록은 쓰고 있고 이성계의 출생지이자 성장지였던 영흥(永興)에는 성(萬里長城)이 통과하고 있었으며 (쌍성총관)부(府)의 북쪽에는 만리장성의 관문이 있었다고 정사서가 쓰고 있다.
(http://www.chosunsa.co.kr/lec1/history1%2813-1%29.htm, 이성계는 타타르인)
萬里長城은 “李成桂는 타타르인”의 저자가 추측한 것이고, 실제로 實錄에는 萬里長城 이라는 말이 없다. 高麗長城이다.
高麗 元宗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정책은 확고하게 異民族과 섞여 살지 않는 것이었다. 蒙古가 雙城摠管府를 설치한 것을 기화로 蒙古의 일파인 숙여진 일부가 雙城摠管府로 이주한 것이 아니라, 지명이 밀렸다.
중국 대륙의 지명 중 밀리지 않은 것은 長安(高句麗의 長安에 티벳고원 북부의 長安을 포겠으니까, 실제로는 밀린 셈이다)과 太白山, 桂林 정도일 것이다. 濊貊族은 高句麗 때 부터 柴達木盆地에 살았다. 高句麗와 大震國이 멸망할 때, 柴達木盆地에서 기어나오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우리나라에 의해 도로 柴達木盆地로 집어 넣어졌다. 12 세기 초 거란이 쇠한 것을 보고, 나라를 세울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을 깨달은 濊貊族은 中土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애원해서 柴達木盆地에서 나올 수 있었으나, 백 여년 뒤, 蒙汗에 정복되고 말았다.
濊貊族이 살던 달단동(鍵輯洞)은 柴達木盆地에 있었다. 高麗가 권력투쟁으로 어이없게 柴達木盆地 등을 상실하자, 또 다시 濊貊族은 中土에서 기어나와 蒙汗 땅이 된 柴達木盆地로 들어갔던 것이다. 蒙汗이 濊貊族을 우대했다고 하지만, 겨우 예전에 살던 柴達木盆地로 밀어 넣은 데 불과하다. 그 정도 우대라면 우리나라가 대대로 濊貊族에게 해주었다.
우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숙여진은 柴達木盆地에 사는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蒙汗人은 소수종족이라 長城 이북을 차지 하고도 방어할 병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같은 蒙古族인 숙여진과 거란을 활용했다.
雙城摠管府가 있던 黃河 하류 이북에도 百濟長城이 있었지만, 柴達木盆地의 북동쪽에도 長城의 끝자락이 길게 뻗어 있다. 高麗長城이다.
李安社는 다루가치(達魯花赤) 였다고 했다. 實史 에서는 東寧府는 1258년, 雙城摠管府는 1270년에 설치됐다. 實史에서는 쿠빌라이(世祖 1260~1294 재위)가 長城 이북을 가져가면서 蒙汗이 접수한 高麗 땅에 다루가치를 몇년 간 설치 했지만, 날조사 에서는 西京과 西北面에 한해서 高宗 때 부터 景孝帝 때 까지 다루가치를 설치했다. 그러므로 李安社가 다루가치라도 되려면 西北面인 東寧府에 살아야지, 東北面인 雙城摠管府에 살아서는 안된다. 李成桂는 東寧府의 高麗長城 지역에서 살면서 삐뚤어진 야망을 키웠던 것이다.
李安社는 언제 출생했는지 알 수 없고 1274년 까지 살았으므로 이미 李成桂가 高麗 皇位를 찬탈할 당시는 그런 사람이 있었는지 조차 모르는 상황이었다. 李成桂가 자신의 고조부 李安社가 蒙汗에 귀화하기 전 까지 高麗人이며 “高宗 때 知宜州事를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 명망이 높았다.”고 얘기 한다면 모두가 그런가 보다 할 수밖에 없다. 知宜州事를 지낸 李安社라는 인물이 실제로 있었다면, 더욱 신빙성을 더해 주겠지만, 李安社의 출생연도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全州李氏 족보에도 안 올랐던 사람이다. 高麗人 李安社는 존재하지 않았다.
李成桂의 父 子春이 高麗로 귀화하기 전, 雙城摠管府 격파에 절대적 협력을 했다고 날조하기 위해서 雙城摠管府 격파를 무려 12년이나 앞당겼다. 李安社가 高麗人 이었다면 그런 구질구질한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다.
李安社가 蒙汗에 歸化한 후 다루가치(達魯花赤)가 되어 살았던 東寧府는 濊貊族(숙여진)이 집단으로 이주해 우리나라의 감시를 받으며 천년 동안 살던 柴達木盆地이다. 濊貊族이 中土로 들어간 후 柴達木盆地에는 高麗人이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라가 망한 濊貊族이 柴達木盆地로 재차 이주했을 때는 高麗人과 같이 살았다. 그러나 高麗史와世宗實錄에서 揆園史話에 이르기까지 濊貊族과 李成桂의 家系를 기록한 모든 기사는 李安社와 李成桂가 高麗人이 아님을 가리키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 역사를 中奴에게 주고, 中奴史를 우리나라 역사로 둔갑 시켰던 것이다.
李安社는 濊貊族이었던 것이다. 李子春이 高麗로 歸化한 것은 李成桂가 21 살 때였다. 李成桂도 濊貊族으로 태어났던 것이다. 李成桂의 外家도 濊貊族 이라니까, 李成桂는 순수 濊貊族 혈통이다. 李成桂가 濊貊族 이라서 권력탈취를 위해 威化島 회군했을 당시, 東北面이 아니라 西北面의 濊貊族 천 여명이 밤낮을 달려와 지원했던 것이다(이성계는 타타르인).
李安社는 高麗人이 아니나 高宗 때 蒙汗에 귀화한 것은 맞다. 高宗 때 濊貊族이 세운 金汗이 蒙汗에 망했다. 李安社는 티벳고원 북부에 살다가, 金汗이 정복된 것을 계기로 蒙汗人이 되었다. 귀화가 아니라, 나라 자체가 멸망하고 蒙汗 땅으로 변했으니, 그냥 蒙汗人이 된 것이다. 李安社가 蒙汗이 될 당시는 雙城摠管府는 커녕 東寧府도, 8 站(jamuchi)도 설치되기 전이다. 그래도 다루가치 까지 된 걸로 보아 蒙汗에 적극적으로 충성한 모양이다. 李子春이 高麗로 귀화한 때는 蒙汗이 쇠약해져 망하기 일보 직전인 恭愍帝 때다. 李成桂의 집안은 전형적인 機會主義者의 家系였던 것이다.
‘李’는 李子春에 이르러 恭愍帝로 부터 받은 賜姓이기 때문에 李安社는 李安社가 아니고, 이행리는 이행리(李行里 翼祖)가 아니며, 이춘(李椿 度祖)은 李椿이 아니다. 李安社는 金汗式 이름과 蒙汗式 이름이 있었고, 李行里와 李椿은 蒙汗式 이름밖에 없었다.
恭愍帝의 蒙古式 이름이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 蒙汗은 자신의 딸을 대대로 高麗 皇帝에게 시집 보내는 수법으로 高麗에 빌붙어 살던 나라다. 高麗 皇帝의 은혜에 기대 산 나라였다. 高麗 皇帝가 그런 蒙汗의 이름을 가졌겠는가.
高麗 皇帝가 우리나라 말을 할 줄 모르는 蒙汗 皇帝의 손자가 되다 보니까, 몽고식 이름도 하나 붙여줄 수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한자를 사용한지 2 천년이 가까운 나라에서 맏이, 얼굴, 문서, 나무, 아이라고 열거해 통치자의 이름을 짓는가. 恭愍帝는 숙제(날조사의 忠肅王 1294~1339)의 둘째 아들이므로 설령 蒙古式 이름을 가졌다고 해도 顔帖木兒는 될 수 있어도 伯顔帖木兒는 될 수 없다.
伯顔帖木兒는 원래 문자를 모르던 미개 종족에게 蒙汗國이 공문서(인구통계 등) 작성을 위해 붙여 주었던 이름의 하나로 시간이 흐르자, 미개 유목민족 스스로 애용하게 된 것이다. 伯顔帖木兒는 상식적으로 顔帖木兒의 형 보다는 자손일 확률이 높다. 아들을 더 낳을 계획인 蒙古人이 첫아들을 伯顔帖木兒라고 했다면, 둘째 아들이 태어날 때까지 첫 아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다는 소리다.
안첩목아(顔帖木兒 ; 앤티무르)는 成桂의 曾祖 춘(椿)의 본명 이었다. 그런데 顔帖木兒의 아들 즉 子春의 몽고식 이름은 오서사불화(吾暑思不花)다. 伯顔帖木兒는 자연히 한 대 건너뛴 成桂의 본명 이었던 것이다. 한족으로 둔갑하면서 제 이름을 恭愍帝에게 떠넘긴 것이다.
成桂는 이두란(李豆蘭)과 결의형제를 맺었다지만, 원래 친형제간이다. 豆蘭의 본명은 帖木兒(티무르)다. 成桂는 伯顔帖木兒(빠이앤티무르)니까, 이 둘이 형제이었음을 알 수 있다. 成桂는 帖木兒가 태어날 때 까지 伯顔帖木兒라는 비천한 이름조차 없이, 이 새끼, 저 새끼로 불리던 종자였음이 분명하다. 7 살 까지 이름조차 없었던 伯顔帖木兒는 그 사실을 高鄒牟에게 슬쩍 떠넘겼다. 그런 천하디 천한 노예 종자가 유언비어를 유포해 高麗皇帝를 제거한 뒤 9999 개의 방을 가진 紫禁城을 짓고, 전세계에 군림하며 皇帝 노릇했던 것이다.
친형제간 이라서 한족으로 변신한 成桂는 濊貊族 帖木兒와 결의형제를 맺었다고 날조했다. 帖木兒는 成桂의 둘째 처 姜氏의 조카딸과 혼인했다. 형제가 나란히 이모와 조카딸에게 장가든 것이다. 같은 姓氏끼리 혼인하는 행위를 그치지 않았고, 사촌, 고종, 이종 누이들은 물론 이모, 조카를 가리지 않고 妻로 삼은 것은 新羅가 아니라, 濊貊族을 포함한 蒙古族이었던 것이다.
帖木兒(豆蘭)는 伯顔帖木兒(成桂)와 吾暑思不花(子春)이 귀화한지 16년 뒤인 1371년(恭愍帝 20)에 高麗에 귀화하지 않았다. 帖木兒는 伯顔帖木兒의 동생이고, 吾暑思不花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아비 吾暑思不花가 동족을 팔아 高麗에 東寧府를 넘긴 대가로 高麗에 귀화할 당시, 제 아비를 따라왔다.
東寧府 정벌이 1357년 11월에야 완료 되었으므로 吾暑思不花가 高麗로 귀화한 것은 1357년 말 내지 1358년이었다. 伯顔帖木兒(成桂)의 나이가 23 살 이었으니, 帖木兒는 10 살 전후였다. 그러므로 帖木兒는 千戶는 커녕, 百戶 조차 아니었다. 한족으로 둔갑한 伯顔帖木兒와 濊貊族 帖木兒가 형제간임을 부인하기 위해서 帖木兒가 吾暑思不花(子春)이 귀화한지 16년 뒤에 高麗로 귀화했다고 날조했다. 帖木兒가 李氏朝鮮 개국의 일등공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伯顔帖木兒와 朱元璋 사이의 연락책 이었기 때문이다.
顔帖木兒의 아들은 吾暑思不花, 吾暑思不花의 아들은 伯顔帖木兒와 帖木兒였다는 사실에서 成桂 집안은 姓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안사(安社)의 원래 이름은 뭘까. 한단고기에 나온다. 야사불화(埜思不花)다. 埜思不花와 吾暑思不花는 祖父, 孫子간이고, 伯顔帖木兒와 帖木兒는 형제간 이니까, 埜思不花의 아들 행리(行里)의 진짜 이름은 暑思不花나 思不花쯤 될 것이다.
날조사에서 成桂의 할아비는 椿, 아비는 子春이다. 그러나 누가 부모 이름에 子자 하나 붙여서 이름을 짓는가. 高麗에서는 없었다. 항렬에 따라 돌림자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成桂는 제 조상의 이름을 날조 하면서 무심코 濊貊族의 버릇을 모방한 것이다.
埜思不花는 본국(本國)이 아니라 번국(蕃國) 사람이었다. 元에 있으면서 순제(順帝)의 총애를 받은 것이 아니라, 1274년에 죽은 인간이다. 埜思不花는 향사(嚮使)도, 삭방도병마사(朔方道兵馬使)도 아닌, 東寧府의 다루가치(達魯花赤)로 횡포를 부렸다. 天使 즉 天子의 사신 정지상(鄭之祥)을 맞아 “다시는 高麗를 섬기지 않는다.”며 거만하게 굴다가 철퇴에 맞아죽은 종자다.
埜思不花가 죽은 후 그의 자손들은 대대로 능력껏 출세에 도움 될 蒙汗 여자와 결혼 했음에도 萬戶인지 千戶(상상 속에서 천호가 된 帖木兒의 예에서 보듯이 百戶, 十戶 혹은 아무 것도 아니었을 수도 있다)인지 외에는 東寧府에서 직위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高麗가 東寧府를 공격하는 기회에 吾暑思不花는 제 동족을 팔아 高麗로 전향했던 것이다.
“滿州의 동류(同類)를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로 여김은 유독 어찌된 까닭인가?(滿州之讎爲不俱戴天則獨何故耶 揆園史話 序文)" “淸나라 황제에게 우리가 조상이 같음을 얘기하자(說淸帝 談同祖 揆園史話 漫說)." 淸나라 皇帝와 조상이 같은 건 우리민족이 아니라, 李成桂다.
우리나라는 한국(桓國) 이후 高麗 때 까지 단 한 번도 異民族을 皇帝로 삼은 적이 없다. 한단사를 부정하는 사람들에게는 濊貊族 李成桂가 우리나라 왕이 되어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 그러나 기원전 7197년에 개천해 6 천년간 동아시아에 군림해온 나라 에서는 濊貊族은 절대로 皇帝가 될 수 없다. 濊貊族은 우리나라의 속민 이었다. 같이 섞여 산 것도 아닌, 그들만의 거주지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蒙古干涉期 이전 까지는 濊貊族과 한민족의 피가 섞이지 않았다. 아무리 恭愍帝 이후 濊貊族의 귀화를 허락했다 하나, 그런 濊貊族이 우리나라 지배자가 될 수는 없다. 熊氏族 女王이 배달 1 세 한웅 거발한(居發桓桓雄)과 혼인 했음에도 熊氏族의 첫 王儉(배달의 제후)이 나오기 까지는 무려 천년이 넘게 걸렸다.
만선사관(滿鮮史觀)에 찌들은 자들은 욕심에 눈이 어두워 麻衣太子 후손이 지도한 生女眞이 淸을 세웠다면서 淸이 우리나라라고 우긴다. 生女眞은 나라를 세우지도 않았고, 그러한 식의 논리는 우리나라 역사를 말살하는 작태다. 초라하게 쪼그라든 우리나라의 역사를 더욱 비참하게 하는 짓이다. 新羅人이 生女眞을 지도해서 濊貊族이 세운 淸이 우리나라라면, 濊貊族을 王으로 받든 우리나라는 濊貊族의 나라란 말인가.
李成桂는 자신이 濊貊族 이라는 사실이, 韓國史와 中國史를 바꿨다는 사실이 발각되지 않을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말 한 마디가 모든 진실을 알려준다.
"우리나라가 三韓을 통일한 이후 성실 근면하게 대국을 섬겼고, 홍무(洪武) 2년(1369) 明나라에 복종했던 정성도 그러했다(我國家統三以來事大以勤玄陵於洪武二年服事 高麗史)."
三國史記의 일식기록은 李成桂의 말이 얼마나 허구에 찬 거짓인지 적시하고 있다.
세상에 自國史를 말살하는 인간이 어디 있던가. 이병도(李丙燾 1896~1989) 조차 말살된 韓國史를 축소했을 뿐이다. 李成桂는 濊貊族이다. 李成桂에게 韓國史는 他國史였다. 그래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살할 수 있었다. 李成桂에게 있어서 韓國史는 교환의 대가로 자신이 왕노릇할 수 있는 비싼 상품에 지나지 않았다.
李成桂가 濊貊族 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고? 朝鮮人 보다 더 朝鮮人으로 살다간 沙也可도 있다. 沙也可의 영정을 보라. 거기서 倭奴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가. 朝鮮人 보다 더 朝鮮人 같이 생겼다. 沙也可 金忠善은 생김새 뿐만 아니라, 행동이나 정신 까지도 朝鮮人 이었다. 沙也可의 號는 中國을 그리워 한다는 慕夏堂 이었다. 우리나라 家門의 족보책을 뒤져 본다면, 李氏朝鮮이 얼마나 事大主義에 썩어빠진 나라인지 알 수 있다. 李成桂와 그 후손들은 王位를 지키기 위해서 필사적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5300년 동안 동아시아를 지배한 긍지 높은 민족이다. 李成桂가 濊貊族인 사실이 드러나면 아무도 李成桂를 우리나라 통치자로 추대할 사람은 없다. 濊貊族은 우리나라 땅에 등장한 기원전 19 세기 부터 朝鮮時代 까지도 줄곧 우리나라에 의해 멸시받던 종족이다.
李成桂는 江陵帝를 폐위 시키면서 신돈(辛旽 ?~1371)의 자식이라 했다. 그러면서도 江陵帝의 아들을 옹립했다. 결국 李成桂는 辛旽의 자식임을 알면서도 옹립 했다는 모순에 빠진다. 高麗皇帝의 혈통을 이어받지 못해서 皇位를 계승할 수 없다고 李成桂 스스로 말했으니까, 高麗人도 아닌 濊貊族은 당연히 우리나라 皇帝가 될 수 없다.
그래서 李成桂는 高祖父가 高麗人 이었다고 왜곡한 것이다. 그런데 濊貊族은 李成桂만이 아니다. 李成桂의 동족도 있고, 明으로 넘어간 濊貊族도 있었다. 李成桂가 濊貊族이란 사실은 明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李成桂가 濊貊族이란 사실은 李成桂가 皇帝가 되는 것을 막는 오직 하나의 결격사유였다. 高麗로 귀화한 濊貊族은 李成桂가 高麗人인척하고, 또 李成桂가 권력을 잡으면 그들에게도 유리 하니까, 입 다물고 있었지만, 明으로 간 濊貊族은 다르다. 李成桂가 濊貊族 이라는 사실을 朱元璋에게 알려야 그들의 출세길이 열리는 것이다.
당연히 明은 협박했다. 단 한 마디면 충분했다. “나는 네가 濊貊族 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나라 피지배 종족들은 언제나 우리나라를 부러워 해왔다. 그래서 朱元璋과 李成桂의 자리만 바꾸자고 했다. 朱元璋은 한民族의 皇帝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中奴가 너무 미개해서 李成桂가 거부했다. 그런 나라의 왕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 결과, 朱元璋과 濊貊族에게 현 黃河 이남을 주고 대대적인 역사날조 작업이 진행 되었던 것이다. 三國, 大震國, 高麗의 正史만이 아니다. 배달에서 朝鮮, 大夫餘, 北夫餘에 이르는 正史에서 史草, 潛夫論, 通志·氏族略 등 온갖 문헌에 기초 자료에 해당하는 공적 장부까지 다 朱元璋의 손에 넘어갔다. 여기에 文學, 科學 분야의 서적까지 더해졌다. 三國의 正史書만 해도 수천 권이다. 李成桂가 넘긴 문헌이 수만 권인지, 수십만 권인지 짐작이 안 간다.
明이 高麗에 遷都를 요구했다는 말(高麗史節要 禑王 9년)은 날조다. 明은 揚子江 이남을 차지했다. 高麗의 수도는 長安이다. 濊貊族이 요구했으면 모를까, 李成桂가 韓半島로 내빼기 위한 거짓말이었을 수도 있다.
高麗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자신이 실권을 잡고 있던 高麗末에 遷都를 단행했다. 그래야 高麗가 明에 영토를 빼앗겼다고 유언비어를 유포할 수 있기 때문이다. 遷都한 시기는 昌王 때다. 江陵帝를 폐위하고 고작 9 살인 昌을 옹립한 것은 韓半島로 천도하기 위해서였다. 천도 후 李成桂는 10 살인 昌王을 시해(弑害)했다. 어린아이를 죽이고 황위를 빼앗았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恭讓王을 옹립해 3년을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역시 폐위시키고 시해했다.
우리나라가 아무리 과거에 동아시아의 天子國이고 大帝國이었다 해도 高麗가 쪼그라든 초라한 나라였다면, 朱元璋은 우리나라 역사를 원하지 않았다. 똑같이 蒙古에 정복됐지만, 중국 대륙 중앙에 떡 버티고 있는 高麗와 국체조차 보존하지 못한 보잘 것 없는 중국. 몽고는 티벳고원 북부는 여지없이 정복했지만, 권력투쟁에 몰입한 高麗와는 전쟁조차 벌이지 않았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이 너무도 차이 나니까, 우리나라가 동아시아의 5 천년 天子國 이라는 사실을 새삼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高麗史에 長安城을 차지한 전쟁 및 다수의 전쟁 기록을 누락시킨 것은 李氏朝鮮 이었다. 高麗가 연전연승한 기록을 내버려두면, 李成桂가 중국 대륙을 朱元璋에게 준 사실이 탄로나기 때문이다.
李成桂는 우리나라 역사를 축소하는데, 아무 거부감이 없었다. 濊貊族 이었으니까. 단지 왕노릇만 할 수 있으면, 제 것이 아닌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三韓을 통일한 이후 성실 근면하게 대국을 섬겼고, 홍무 2년(1369) 明나라에 복종했던 정성도 그러했다(我國家統三以來事大以勤玄陵於洪武二年服事 高麗史)”고 서슴없이 날조한 것이다.
정도전(鄭道傳 1337~1398), 권근(權近 1352~1409) 등이 李成桂가 濊貊族 이었음을 몰랐을까? 李成桂가 濊貊族임을 알았든, 아니든 광대한 우리 영토를 포기하고 역사를 말살 하는데, 동참 했다는 점에서 鄭道傳, 權近 등 소위 李氏朝鮮의 開國功臣들은 모두가 매국노다. 연남생(淵男生 634∼679)은 같은 민족인 新羅에게로 갔고, 발기(發岐)는 百濟로 갔다. 하지만 鄭道傳과 權近 등은 일신의 영화를 위해 우리나라 피지배 종족에게 영토와 역사를 모두 다 주었다. 李成桂는 1 만년 韓國史에서 제1의 賣國奴다.
살수의 푸른 물결 굽이쳐 출렁이는데,
隋나라 백만 대군이 물고기가 되었음이여.
이제는 어부나 나무꾼의 이야기로만 남아,
나그네의 작은 웃음거리도 못되는구나.
(薩水湯湯漾碧虛 隋兵百萬化爲魚 至今留得漁樵語 不滿征夫一哂餘)
隋나라 백만 대군? 百濟와 高句麗가 동아시아 제1의 강대국 이었을 때, 백만 대군을 보유했다. 티벳고원에서 백만을 거느릴 수 있는가. 10 만도 벅차다.
조준(趙浚 1346~ 1405)이 明나라 사신과 더불어 축배하고 함께 백상루(百祥樓)에 올라 읊었다는 시(百祥樓賦詩)는 乙支文德을 칭송한 것이 아니라, 역사날조 작업이 성공하고, 李成桂와 朱元璋이 땅을 나눠가진 것을 축하하기 위해 지었다. 李成桂와 趙浚에게는 乙支文德 조차 한낱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蒙汗도 차지할 수 없었던 우리나라를 蒙汗의 동족 李成桂는 역사날조 하나로 차지한 것이다.
三國史記는 明이 축소했다. 李成桂가 날조 중국사에 일치시켜 三國史記를 축소하기란 불가능하다. 李成桂에게 맡기면 어디를 어떻게 축소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리 역사를 맞바꾼다 해도 축소 날조의 지침을 마련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중국의 날조 연호를 알아야 하고, 무얼 바꿀지 등등. 그 과정에서 三國史記의 천문기록은 빼버렸기 때문에 李成桂는 다시 三國의 天文記錄을 집어 넣어야 했다.
三國史記에는 온갖 인용 문헌이 등장한다. 소위 25 史는 시대구분만 해놓으면 책을 쓰기 전이라도 간단하게 이름 붙일 수 있다. 周書, 漢書, 三國志, 隋書...... 그 외 문헌은 우리나라 문헌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배구전(裵矩傳), 통전(通典), 회남자(淮南子), 논어정의(論語正義, 論語도 물론이고)는 원래 우리나라 책이다.
백상루(百祥樓) 백상루는 평안남도 안주읍성 서북쪽에 서있는 루대이다. 안주는 백제 때의 석성이다. 고려 때 처음 세워진 백상루는 조선시기 1753년 읍성의 면모가 완성되면서 고쳐지어지고, 관서8경의 하나로 "관서제일루(關西第一樓)"라며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며 내려왔다. 백상루란 여기서 백 가지 아름다운 경치를 다 볼 수 있다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내용과 서술에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공민왕 이후의 사실을 바로잡고, 특히 태조에 관한 내용을 충실히(恭愍王以下事多不實宜更竄定 太宗實錄 恭愍帝 이후 왜곡과 날조를 더하고 李成桂에 관해서는 확실히 부풀렸다는 소리다)", “본래의 史草와 달리 마음대로 고쳤던 곳이 바로 잡히게 되었다(이씨조선이 史草대로 쓰지 않았다는 실토다)", “국제관계가 고려된 부분에서는 儒敎的이고 事大的인 관점이 오히려 강화되었다(우리나라와 중국의 관계를 뒤바꾸었다는 소리다)", “이 부분을 實錄에 따라 바로 쓰도록 하고 있다(實錄을 무시하고 썼다는 소리다)", “편찬자 개인과 관련된 곳이나 청탁받은 곳을 제멋대로 썼기 때문에(이때 우리나라에 귀화한 濊貊族 대부분을 우리나라 사람으로 둔갑시켰다)”, “내용을 더 충실하게 하면서 이런 잘못을 고치게 하였다(내용을 더욱 날조했다는 뜻이다)", “늘어난 내용을 효과적으로 담기 위하여 체재를 바꾸는 일도 아울러 이루어져(체재를 바꾸면서 완전히 뜯어고쳤다는 소리다)"처럼. 高麗史를 날조하기 위해 늘어놓은 변명을 보면, 李氏朝鮮이 사실대로 역사를 쓰는 나라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너무도 많은 李氏朝鮮實錄의 역사왜곡 사례들을 이 좁은 공간에 늘어 놓을 수가 없다 혹시라도 관심이 있는 분들은 ( http://www.jeongdoryeong.net/josun_sillok11.html )를 참조하기 바란다.
李成桂 즉위와 동시에 우리나라 역사를 축소해야 하므로 시간이 촉박했다. 李氏朝鮮 중간에 느닷없이 三國史를 축소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李成桂는 高麗의 황위를 빼앗느라 바빴기 때문에 朱元璋이 三國史를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三國의 正史書는 놔두고 三國史記만 축소했다. 이렇게 축소된 三國史記는 李成桂 즉위 3년에 간행됐다.
大明混一圖
역사를 날조 하려면, 그에 선행해서 지명을 밀어낸 날조지도 부터 만들어야 한다. 中土의 지명을 밀어낸 시기는 李成桂가 실권을 잡은 高麗末 1389년으로 추정된다. 1389년, 朱元璋은 高麗 지도를 보고 大明混一圖를 만들었다.
동계의 화북 15 주가 몽고에 소속되어 쌍성총관부가 수립되었다.(살아 있는 한국사)
高麗 말 까지도 黃河가 金沙江이었다. 黃河를 밀어내 華北이라 쓴 날조지도를 보고 李氏朝鮮이 華北 15 州라 쓴 걸까. 일반적으로 高麗의 和州지역이 雙城摠管府가 되었다고 말한다. 恭愍帝는 雙城摠管府를 폐지하고 和州牧을 설치했다.
周나라에서 지도를 제작한 관원이 직방씨(職方氏)? 周나라의 시조 后稷도 우리나라 사람이긴 하지만, 周나라는 지도 제작을 하지 못했던 미개소국이다. 티벳고원 북부를 백 여개의 제후국에게 나눠주고 周王室은 고작 땅 한줌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나라가 어떻게 지도를 제작한단 말인가. 周書? 먹고 살기에도 급급했을 周王이 무슨 史官을 두고, 史草를 쓴단 말인가. 明이 우리나라 역사책을 베끼고, 우리나라 지도를 베껴서 周나라가 쓰고 그렸다고 한 것이다.
宋이 만들었다는 화이도(華夷圖 1137년에 만들었다)를 보면, 宋이 있던 티벳고원 북부는 대충 그리고, 우리나라 땅만 자세하다. 金沙江, 난창강(瀾滄江) 너머에는 지명이 몇 개 없다. 宋이 만든 지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明이 만들었다는 大明混一圖 역시 마찬가지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 대한 애착심이 없었던가. 高麗의 지도를 베끼면서 韓半島를 생략했을 뿐이다. 티벳고원 북부의 소국 明은 역사 맞바꾸기에 앞서 지명부터 밀어내야 했다. 그때 만든 것이 바로 華夷圖와 大明混一圖이다.
朱元璋과 李成桂 사이에 밀약이 이루어지자마자, 李成桂가 왕위에 오르기 전 부터 朱元璋은 서둘러 지명을 밀어낸 중국 대륙 지도부터 만들고, 李成桂는 韓半島에 중국 대륙의 지명을 우겨넣었던 것이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權近 外 1402)의 발문에는 權近이 蒙汗의 세계지도를 참고했으나 韓半島와 日本이 소략하므로 그것을 첨가해 새로운 지도를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蒙汗이 세계대제국을 건국했다면, 高麗 역시 아라비아(이 땅의 사학자들은 아라비아에서 한반도까지 航海를 해서 무역을 했다고 주장한다. 아라비아인들이 그처럼 항해에 능숙 했다면, 무역이 아니라, 세계정복에 나섰다. 西洋도 大西洋을 간신히 건너자마자 식민지 정복에 나섰다) 등과 세계 무역을 했다.
高麗는 세계 탐험까지 했던 나라다. 蒙汗은 천막 하나가 유일한 재산인 유목민족이다. 色目人이 아니라 雙城摠管府 땅의 高麗人이 蒙汗을 위해 일했다. 高麗人이 일한 과실이나 향유하던 蒙汗이 세계지도를 만들 능력이 있었단 말인가.
순우천문도
순우천문도(淳祐天文圖 1247)는 高麗의 천문도다. 지도도 못 만든 中奴가 天文圖를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淳祐天文圖에는 종대부(宗大夫 : 韓半島에 나타나는 고유의 별자리)가 없고 韓半島는 독자 천문체계를 갖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기원전 1916년 부터 대대로 전왕조로 부터 천문대를 물려받아서 천문관측해온 나라다. 淳祐天文圖는 중국 대륙에서 제작한 천문도였던 것이다. 長安城(開京)에서 제작한 천문도일 것이다.
1389년 高麗 지도를 베껴 大明混一圖를 만들고 나서 역사책 고치기에 들어갔다. 맨 먼저 날조한 것은 中國史가 아니고, 三國史記였다. 威化島 회군한 李成桂가 江陵帝를 내쫓고 내세운 昌王, 恭讓王은 합해 4년 동안, 제위에 있었다. 축소한 三國史記는 李成桂 즉위 3년에 간행됐다. 그러고서는 金富軾에게 책임을 전가한 것이다. 三國史記 편찬자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6, 7년은 三國史記를 축소 하기에도 촉박한 시간이다. 그래서 이후에는 中國史는 明이 날조하고, 高麗史는 李氏朝鮮이 맡아 축소했다. 高麗史는 1451년에 일단 완성했다. 60년 만이었다.
“우리나라가 三韓을 통일한 이후 성실 근면하게 대국을 섬겼고, 홍무 2년(1369) 明나라에 복종했던 정성도 그러했다(我國家統三以來事大以勤玄陵於洪武二年服事 高麗史).” 그렇다면 배달, 朝鮮 시대에는 中奴가 우리나라를 성실 근면하게 섬겼다는 소린가. 아니다. 李成桂는 三國史, 高麗史는 축소하고, 한단사는 말살했다. 그래서 이유(李瑈 1417~1468 李氏朝鮮의世祖라는 濊貊族), 이광(李晄 1450~1469 李氏朝鮮의 睿宗이라는 濊貊族), 이혈(李絜 1457~1494 李氏朝鮮의 成宗이라는 濊貊族)이 그처럼 한단사 말살에 혈안 이었던 것이다. 李成桂 역시 한단사, 三國史, 大震國史 등을 대대적으로 수거, 분서했음은 물론이다.
한단사(桓檀史)까지 축소할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또한 일개 제후국의 역사가 유구할 수는 없으니 배달과 朝鮮은 존재 자체를 부정키로 했다. 한단시대 中土에는 독자문화란 눈 닦고 찾아봐도 없었다. 중국이 문화라는 것을 갖기 위해서는 필히 한단사를 지워야 했다. 그래서 한단사는 李氏朝鮮 왕조 대대로 수거, 분서했던 것이다. 자신의 國號는 朝鮮 이라고 하면서,,,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李氏朝鮮은 날조 역사책에 부합하지 않은 모든 우리나라 역사책을 焚書하고, 明 으로부터 받은 날조 역사책을 보급했다. 그 외에도 李成桂는 배달 이후 축적된 방대한 지식을 담은 수많은 우리나라 문헌을 明에 건네 주었다. 온갖 책을 다 줬다. 文明大國 中國에 문학서적이 없어서는 안되지. 그래서 新羅人이 桂林을 두고 읊은 詩도 唐나라인의 작품으로 둔갑했다. 저 인구에 회자(膾炙)되는 唐宋八大家들의 주옥같은 싯귀들을 기억하는가? 기막힌 현실이 아닌가?
濊貊族의 나라라 李氏朝鮮은 5300년의 한민족 국가의 유산을 거식증(拒食症) 환자처럼 소모해댄 나라다.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는 高句麗의 천문도를 중앙부만 고쳤다. 그 천문관측 기술조차 우리나라가 물려준 것이다. 거북선(龜船)은 高麗 때의 전함이다. 火砲, 走火, 지화통(地火桶), 神機箭, 火車 모두 高麗 때 만들었다. 백자(白瓷)는 高麗 시대에 이미 시도됐다. 한글조차 高麗가 만든 문자다 ….
심지어 李氏朝鮮이 존속하는 동안, 한문명이 퇴보했다.
당시 삼포(三浦)의 교역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중국산 비단이었다. 조선 상인들은 명나라의 비단이나 그 원료인 백사를 들여와 삼포 왜인에게 팔아서 짭짤한 이익을 남겼다.(역사스페셜 3 권)
慈烏支 한웅의 中土 정복 이후 우리나라 사람들이 淮垈에 자리잡고 “농사짓고 누에치며 길삼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다(農蚕織牧 資以爲業 揆園史話)." 역대 檀君이 양잠(養蠶)을 강조한 것으로 보아 비단 만들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생업 중의 하나였다.
우리나라 역대 왕조는 비단길 무역을 통해 西方과 무역했다. 비단이 주수출품이었기 때문에 그 이름조차 비단길이었다. 李氏朝鮮은 黃河 이남을 明, 淸에 주고 韓半島로 내빼면서 비단제조 기술자까지 내팽개치고 온 탓에 비단 제작 기술까지 퇴보하고 말았다. 유구한 세월 선조들이 개발하고 개량해온 비단제조 기술까지 망각해 미개 明에 구차하게 의지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明의 비단 제조는 중국 대륙에 남은 우리민족이 맡았다.
후한서 동이전과 삼국지 동이전에서 “마한 사람들은 잠상을 알며 솜과 베를 만든다.” 한 것 또한 양잠법이 고대 동이족에서 시작됐음을 말하는 것이다. 고대 중국의 여러 문헌에는 해가 뜨는 동방에 거대한 뽕나무인 부상수(扶桑樹)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거대한 뽕나무가 신목(神木)으로 있는 동방을 부상국(扶桑國)이라 이른 것도 고대 양잠기술의 전래와 무관하지 않다.(실증 한단고기)
해뜨는 동방은 東夷族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朝鮮을 말한다. 우리나라는 뽕나무를 神木으로 삼을 만큼 비단 제작에 열심이었다.
그런데 高麗史를 올린 모 사이트에 보니까, “神木으로 東海 중에 多生하여 兩水가 同根으로 相依相存하므로 扶桑이라 하며 日出處라고 하였는데 산해경(山海經) 해외동경(海外東經)에서는 扶桑國 즉 日出國이라 하는 뜻으로 日本을 말한 것임”이라고 풀이해 놓았다.
산해경 해외동경(山海經海外東經)은 보면서 “倭는 연(燕)에 속한다”고 한 구절은 못 봤던가? 이 당시, 중국의 해외는 바로 중국 대륙이었다. 중국 대륙 대부분을 차지한 우리나라가 金沙江 너머에 있다는 의미로 쓴 것이다. 중국의 東海는 金沙江 이었다. 중국 대륙의 해뜨는 바다는 黃海는 될 수 있어도 韓半島 東海는 될 수 없다. 따라서 日本은 절대 扶桑國이 될 수 없다. 웃끼는 것은 일본역사날조의 대표격인 새역모에서 발간하는 日本史의 출판사 이름이 후쇼사(扶桑社)라는 이름이다. 왜들 친일에 목말라 하는가?
부상수(扶桑樹)는 동쪽 바다의 해가 뜨는 곳에 있다고 하는 신령스러운 나무다. 그 扶桑樹가 있는 나라가 동쪽에 있어 日出處라 했다. 우리나라다. 그래서 중국은 우리민족을 東夷族이라 했다. 그 원뜻은 오랑캐가 아니고 동쪽에 사는 어진 종족, 근본인 종족이다. 오늘날 옥편을 찾아보면 夷는 ‘오랑캐, 동방동족, 잘못, 상하다, 죽이다, 멸하다, 평평하다, 평탄하다, 깎다, 온화하다, 안온하다, 기뻐하다, 크다’라는 뜻이 있다. 정반대 되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오랑캐, 잘못, 상하다, 죽이다, 멸하다 등은 中土의 미개 오랑캐 華夏族이 揚子江 이남으로 기어 나온 후에 玉篇에 추가한 것이다.
倭에는 5 세기 말에야 양잠 기술이 도입됐다. 新羅人 진하승(秦何勝)의 선조가 건너가 양잠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양잠기술이 서툴렀는지 李氏朝鮮에 조공무역 하면서 15 세기 후반 이전 까지는 비단을 주수입품으로 가져갔다. 그러니까 절대 扶桑國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동아시아의 그 어느 나라도 日本을 日出國이라 불러준 예가 없다.
중국은 우리나라 역사를 훔치면서 심지어 면직물 제조법도 중국이 개발 했다고 날조했다. 그러면서도 “東夷族은 蠶桑을 알며 솜과 베를 만든다”는 後漢書의 기록을 三國志 에서는 “馬韓 사람들은 蠶桑을 알며 솜과 베를 만든다(馬韓 … 曉蠶桑作縑布 三國志)”로 고친 것으로 만족했다. 머리가 안돌아가서 그렇다. 심지어 日本에도 솜이 있었다. 후지와라 나카마로(藤原仲痲呂)가 주동이 되어 신라를 침공하려 했을 때, 日本 만으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어 大震國을 끌어 들이려고 했다면서 후지와라는 大震國의 사신 양승경(楊承慶)에게 솜 1 만 둔(屯)을 선물로 주었다는 것이다. 사신에게는 관례적으로 솜 300 둔을 주었다고 했다. 大震國과 연합해 新羅를 침공 하겠다는 계획은 사실이 아니지만, 솜은 있었다. 그 솜이 어디서 건너 갔겠는가. 우리나라다.
문익점(文益漸 1329~1398)은 붓뚜껑에 목화씨를 넣어오지 않았다. 티벳고원 북부에 사는 中奴가 우리나라에 왔다가 붓뚜껑에 木花씨를 넣어간 것이다. 중국이 처음부터 중국 대륙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날조하다 보니까, 종이 위에서나마 우리나라 사람이 붓뚜껑에 목화씨를 넣어가야 했던 것이다.
각저총(角抵塚)에서 발굴된 삼족오(三足烏) 벽화
이성계(伯顔帖木兒 1335∼1408) 초상
우리나라는 高麗 시대까지 坐式生活을 하지 않았다. 立式生活을 하자면 좌식생활시 보다 더 많은 생활공간이 필요하다. 탁자에 의자, 침상 그리고 가구에 부딪히지 않고 다닐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東北亞로, 韓半島로 축소되다 보니까, 집 크기도 축소 되어야 했으므로 부득이하게 선택한 생활방식일 것이다. 무엇보다 濊貊族은 坐式生活을 했다. 濊貊族은 유목민이라 천막이 곧 집이었다. 아무리 크다 한들, 건축물 보다 천막이 클 수 없고 또 이동이 필요하면, 천막을 걷고 간단히 짐을 꾸려야 했다. 그러므로 濊貊族은 입식생활과는 전혀 무관한 종족이다. 우리나라는 濊貊族의 풍습을 받아들인 결과, 좌식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묘청(妙淸 ?∼1135)이 建元稱帝 하자고 했다는데, 高麗, 아니 우리나라는 처음부터 建元稱帝한 大帝國이다. 妙淸은 또 金汗 및 그 밖의 많은 나라가 高麗에 항복하여 조공할 것이라며 西京으로 천도 하자고 했다는데, 이미 동아시아의 모든 나라가 高麗에 조공하고 있었다. 妙淸의 亂은 中奴의 亂을 우리나라 역사로 바꾼 것이다. 三國史記의 저자 金富軾을 事大慕華者로 몰아가기 위해, 우리나라 역사를 축소한 것은 李氏朝鮮이 아니라 金富軾 이라고 덮어씌우기 위해서 中奴史를 高麗史로 날조한 것이다. 妙淸은 상당히 미신적인 인물로 나오는데, 中奴의 未開王은 혹할 수 있어도 科學의 나라 高麗의 皇帝가 넘어갈 수는 없다. 妙淸은 中土에서 권력다툼 했던 인물이다.
李成桂가 역사를 축소시킨 덕에 中國은 萬里長城 이라는 거창한 건축물을 벽돌 하나 안 쌓고 만들어냈다. 明의 날조사에서 雙城摠管府의 위치는 實史와 동일하다. 雙城摠管附는 長城 이남에 설치했다고 했다.
李氏朝鮮이 淸에 영토를 빼앗길 때마다 高句麗長城도 종이 위에서 滿州로, 韓半島 이남으로 밀려났다. 상상 속에서 쌓았기 때문에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丙子胡亂(1636 )으로 桑乾河 이서까지 빼앗기자, 雙城摠管府는 滿州에 그린 날조 高句麗長城 이남으로 옮겨왔다. 李氏朝鮮이 韓半島 이북을 다 빼앗기자, 高句麗長城은 東鴨綠江 이남으로 밀려났다. 雙城摠管府도 長城을 따라 움직였다. 雙城摠管府에 있다고 날조한 李成桂의 고향도 함경남도가 되었다.
역사를 축소하면 끝내 영토까지 다 상실해야 한다는 진리를 李成桂나 鄭道傳 등은 몰랐다. 알았다고 해도 皇位를 찬탈 하려는 李成桂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종이 위에서 遼東을 상실한 李成桂가 高麗의 지배층을 이끌고 韓半島로 대이동하자, 朱元璋과 中奴가 티벳고원에서 빠져나와 長安城으로 들어간 후 우리나라의 복식으로 정비했다. 그걸 두고 “明의 복식은 唐, 宋代에 이미 수립 되었던 복식제도가 元代에 문란해 졌었기 때문에 건국 후 漢族의 의례를 회복해 관복제도를 재정비했다. 제도개혁의 범위가 상당히 넓어져 복식도 구체적으로 제한 되었는데 이 때에도 다른 시대와 마찬가지로 복식이나 복식도안, 색 등에서 엄격한 제한과 구별이 있었다(明史 輿服條 참조)”고 기술한다.
이렇게 만들어낸 服飾은 우리나라 역대 왕조의 복식과 차이가 없다. 티벳고원의 지배층도 唐 때 부터 우리나라 복식을 따랐기 때문이다. 李成桂가 高麗 皇位를 찬탈 했으니까 李氏朝鮮도 高麗의 복식을 그대로 물려 받았다. 그래서 李成桂는 百濟의 服飾을 기본으로 삼았다.
티벳고원의 中奴가 우리나라로 쏟아져 나오는 것은 “民生安定을 위해 인구 과밀한 江南에서 황폐한 江北으로 농민을 이주시키고, 부유층을 수도로 불러들여 경제부흥에 주력 하였다. 이로써 사상 최초로 南에서 北으로의 인구이동 현상이 일어났다”로 기술했다. 그러나 明은 揚子江 이남에 있었으니까, 江北으로 농민을 이주시킬 수도, 사상 최초로 남에서 북으로의 인구이동 현상이 일어날 수도 없었다. 淸 이후에 날조한 대목이다.
朱元璋의 정치적 반대세력이라! 中奴를 억압하고 멸시하는 蒙汗의 지배에서 中奴를 해방 시켜준 것이 朱元璋이라 하지 않았는가. 朱元璋이 蒙汗을 내쫓고, 中土를 통일 했다면 政敵이 있을 리 만무하다. 朱元璋에게 반대하고 싶어도 밀어주는 세력이 등장하지 않을 테니까. 비록 협박으로 달성한 것이라 해도 朱元璋은 中奴를 티벳고원 북부에서 벗어나게 해준 은인이다.
“흙 침상에서 자며 토굴을 파서 아궁이를 만들어 그 위에 눕고,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던 中奴가 어엿한 집에서 번듯한 옷을 입게 되었는데(이를 두고 庶民生活이 향상 되었다고 기술했다), “男女가 들에서 함부로 野合”하다가 번듯한 집안에서 그 짓을 하게 되었는데, 반대자가 나올 수 있는가. 미개 中奴가 우리나라 영토로 기어들자, 우리민족이 반발한 것이다.
李成桂와 高麗 지배층이 떠난 중국 대륙에는 여전히 우리민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족이었다. 朱元璋 이하 中奴들은 高麗가 전쟁에 패했다고 속이고 들어 왔지만, 우리민족이 中奴의 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어째서 동아시아의 天子國 高麗가 하잘 것 없는 中奴 따위에게 패했는지 납득이 될 리 없다. 朱元璋의 政敵은 우리민족 이었던 것이다.
李成桂는 表裏不同한 인간 이었다. 한단사를 말살 하면서도 朝鮮을 國號로 쓰고, 大帝國 高句麗를 미개 中奴의 제후국으로 만들고서도 高句麗 天文圖를 구하기에 혈안이었다. 李成桂와 그 후손들은 한단 역사책 등을 수거해서 王宮 깊숙이 감추었다. 日本도 한단사와 우리나라 正史書를 모조리 숨겨 두었다. 중국도 우리나라 역사책을 기밀장소에 감추어 두었을 것이 분명하다.
미개 中奴가 韓國史와 中國史를 뒤바꿀 수 있는가. 朱元璋 조차 까막눈 이었다. 한편 에서는 봉기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朱元璋에 협력하여 韓國史를 中國史로 바꾸었던 것이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고,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남쪽에서 왜구가 침범할 염려가 있으며,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병사들도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以小逆大 一不可 夏月發兵 二不可 擧國遠征 倭乘其虛 三不可 時方署雨 弩弓解膠 大軍疾疫 四不可 高麗史)”는 四不可論은 나중에 날조했다.
우선 중국은 단 한번도 大國이 아니었으며, 明도 마찬가지였다. 李成桂가 우리나라 땅을 넘기기 전 까지는 明은 티벳고원 북부의 나라였다. 大國은 우리나라였고 小國은 中國 이었다. 그러므로 中國이 高麗를 거스르는 것은 옳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三國時代부터 여름철에 수많은 전투를 해왔다. 이상하게도 우리 역사를 장식하는 중요한 전쟁은 여름철(음력 4, 5, 6월. 중국 대륙에서는 여름이 한반도보다 빠르다)에 집중되어 있다. 그럼에도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고,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병사들도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는 반론은 威化島 回軍 이전에는 단 한번도 없었다. 또한 火藥 발명국 高麗는 활을 못 쓰면 大砲, 走火, 鐵砲 등을 사용하면 된다.
遼東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남쪽에서 倭寇가 침범할 염려가 있다? 倭寇는 중국 대륙을 침범하지 않았다. 韓半島에서만 노략질했다. 李成桂는 遼東을 넘어 遼西까지 갔다. 西鴨綠江을 건너 泰川(富江)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遼東征伐이라는 말 자체도 성립하지 않는다.
3) 규원사화에는
숙종 당시 동아시아 實事가 있다
李成桂를 비롯한 濊貊族이 中奴를 漢族이라 하고, 中國을 漢나라로 인정 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그것은 濊貊族이 결코 漢族이라 불렸던 적이 없음을 말해준다. 漢은 桓이나 韓에 비해 협소한 개념이다. 漢民族만 가리켜 사용했기 때문이다. 桓은 朝鮮 이전부터, 韓은 朝鮮을 구분해서 가리키는 말이다. 朝鮮의 강역에는 蒙古나, 匈奴, 鮮卑도 살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蒙古族에 속한다고 해도 靺鞨과 거란은 중앙아시아에 있다가 朝鮮 개국 이후에 등장한 종족이다. 靺鞨은 12世 檀君 阿漢 때 등장 했으니까, 桓이나 韓조차 될 수 없다. 高句麗가 속민 濊貊族을 漢에 포함시켰을 리 없다. 그래서 漢委奴라는 말을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숙여진 병사의 모습
“女眞은 肅愼의 후예이다(女眞者肅愼之後也 揆園史話 漫說).” 앞의 女眞은 濊貊族을, 肅愼은 朝鮮을 말한다. 李氏朝鮮과 明이 역사를 날조하면서 濊貊族을 우리민족에 집어넣은 것이다. 李氏朝鮮의 王들이 濊貊族이라 하루빨리 한민족과 일치 시켜야 李成桂와 그 후손들이 안전하기 때문이다.
“神誌氏는 속진국에 봉함을 받으니, 땅의 기후는 모질게 한랭하여 오곡에 마땅하지 않았으나 넓은 지역에 사람이 드물어 목축이 매우 적합 하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활을 매고 검을 차고 유목과 수렵에 함께 종사하게 하였다. 후세에 그 백성들은 점차 黑水의 땅으로 옮겨가 마침내 어로와 수렵으로 생업을 삼으며 고생 하면서도 검약하니 건장 하고도 억세어졌다. 비록 용감하게 멀리 여러 나라로 나아갔으나 점차 글은 익히지 않게 되었는데, 후세에 漢나라는 읍루(挹婁)라고 일컬었고, 원위(元魏) 때는 물길(勿吉)이라 하였으며, 隋와 唐나라는 靺鞨이라 불렀으며 점차 북쪽 끝의 야만인들과 서로 섞이더니 점차로 그 풍속을 잃어버리고 한탄스럽게도 자못 쇠미해져 갔다. 가까이는 金나라와 女眞 등이 모두 그 후손으로 같은 족속을 달리 일컬은 것이다(神誌氏受封於嫘溍國地旣勁寒 不宜五穀 土廣人稀 牧畜頗適 乃使民帶弓佩劒 幷事遊獵 後世 其民漸徙黑水之地 遂以漁獵爲生 艱險儉嗇 㫿健勁悍 雖强勇遠出於諸國 漸至不習文事 後世漢曰挹婁 元魏曰勿吉隋唐曰靺鞨 稍與窮北蠻人相混 漸失其俗 頗有陵夷之歎 近古金女眞等 皆其後身 同族異稱也 揆園史話 檀君紀).”
蚩尤氏의 후손도 모자랐던지 神誌氏의 후손으로 까지 둔갑했다. “黑水의 땅으로 옮겨(徙黑水之地)”간 것은 黑水女眞이다. “북쪽 끝의 야만인들(窮北蠻人) 역시 黑水女眞”이다. 李氏朝鮮의 濊貊族은 제 동족을 野人이라 부르고 野蠻人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니 평양(平壤) 땅에서 수렵하며 노닐며 주변의 고을을 약탈한 오랑캐를 大震國으로 둔갑 시키고, 우리민족이 同族을 오랑캐라 불렀다고 날조하는 것도 당연하다.
黑水女眞이 黑水 땅으로 이주한 시기는 기원후이고, 神誌氏가 일족을 이끌고 大興安嶺山脈 이북으로 간 것은 기원전 24 세기다. 李氏朝鮮의 濊貊族 조차 黑水女眞과 섞인 적이 없다.
“그 옛 기풍은 다하여 없어지고 비록 글도 알지 못하지만, 여전히 天地에 제사를 지내고 친척을 공경하며 노인을 존경하고 손님을 맞고 벗을 믿는 등 예의바른 마음에 다정하고 성의가 있(其古風泯滅 雖不知書然猶有祭天地敬親戚尊耆老接賓客信朋友 禮意款曲 揆園史話 漫說)”지 않았으니까, 李成桂가 高麗人이라 속이고, 우리나라 영토를 잘라 朱元璋 등에게 주면서 우리나라 왕노릇을 한 것 아닌가.
“黑水의 땅에서 떨치고 일어나서 한 갈래의 군사만으로 遼東과 만주를 석권 하였으며, 長城을 넘어 변경(汴京)을 도륙한 뒤 徽王과 欽王을 사로잡아 북쪽으로 보내고 고주(孤主)를 꾸짖어 남쪽으로 귀양을 보냈으며, 유연(幽燕)을 넘어 중원의 선비들을 매질 하였다. 그러자 조가(趙家)의 군신들 가운데 정성과 성의를 보내며 신하를 자칭하고 조카라고 스스로를 일컬어 남아 있는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진회(秦檜)와 한윤(韓胤)의 무리는 모두 엉금엉금 기면서 아첨을 떨었으니, 이는 진실로 천고의 쾌사이며 동방 諸族의 자랑이다(方其奮興於黑水之地也 以一枝之師 席卷遼滿 越長城而屠汴京 禽徽欽而北去 叱孤主而南竄 跨幽燕而鞭笞中原之士 於是趙家君臣 莫不輸誠納款, 稱臣呼侄 苟乞殘喘 秦檜韓胤之徒 咸匍匐而獻媚 此誠 千古之快事而東方諸族之誇也 揆園史話 漫說).”
徽王과 欽王을 사로잡아간 金汗은 黑水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중앙아시아에 있다가 캐시미르를 통해 中土로 들어왔다. 中土에서 일부는 柴達木盆地로, 나머지는 黑水 상류로 갔다. 柴達木盆地의 濊貊族이 中土로 들어가 金汗을 세우고 동쪽에 있는 宋을 공격했다. 遼東은 커녕 遼西조차 석권한 적이 없다. 한때 大震國의 옛 땅 遼東에 빌붙어 있다[주변 고을을 약탈하고 올야국(兀惹國)이라는 나라를 세워]가, 高麗에 의해 遼西로, 다시 白頭山(白山) 밖으로 쫓겨났다. 그러니까 高麗는 金汗을 자랑으로 여긴 게 아니라 골칫거리로 여긴 것이다.
어떻게 그 먼 黑龍江에서 티벳고원 북부로 와서 나라를 세운단 말인가. 더구나 新石器人처럼 사는 종족이. 高句麗가 전쟁을 할 때면 늘상 지원군으로 나섰다는데, 黑水에서 한 번도 아니고 매 번 올 수 있단 말인가. 高麗 末, 李氏朝鮮 初의 혼란을 틈타 남하한 黑水 땅의 野人을 김종서(金宗瑞 1390~1453)가 되돌려 보냈다. 北崖 역시 揆園史話 漫說에서 “北으로는 野人을 꾀어 선봉으로 삼(北誘野人而爲前驅)”자고 했다. 바로 生女眞이다.
“高麗史·列傳에 이르기를 女眞은 본래 高句麗의 한 부락 이었는데, 蓋馬山의 동쪽에 모여 살았다(麗史列傳曰女眞本高句麗之部落 聚居于蓋馬山東云 揆園史話)." 역시 濊貊族답게 “당시의 女眞이 분명히 白頭山의 동북에 있었으므로 '蓋馬'가 '白頭'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當時女眞 明在白頭山之東北蓋馬之爲白頭 明矣 揆園史話).”라고 하고 있다. 濊貊族은 白頭山(예전 白山) 너머 柴達木盆地에 살았다. 蓋馬는 秦嶺山脈이다. 蓋馬하고 白頭는 아무 상관이 없다. 高麗實錄의 원문은 이렇다.
여진은 본래 고구려의 속민이었는데, 백두산의 북쪽에 모여 살았다.
속말부(粟末部)가 가장 남쪽에 살고 있는데, 太白山과 맞닥뜨린 곳에서 高麗와 더불어 접해 있다(粟末部居最南抵太白山 … 與高麗接 揆園史話 唐書)“에서 알 수 있는 것은 粟末部가 柴達木盆地의 가장 남쪽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柴達木盆地에서 長安 서쪽의 太白山과 접할 수 있는가. 柴達木盆地의 白頭山을 韓半島 太白山에 포갠 것이다. 종이 위에서 韓半島 白頭山 이북에 살던 濊貊族은 끝내 韓半島 북부까지 진출했다. 실제는 韓半島 전역으로 진출했다. 바로 李氏朝鮮이다.
“朝鮮의 근심 가운데 나라의 역사가 없는 것 보다 더 큰 것은 없다. … 우리나라의 經典과 史書는 누차의 兵火를 거치며 흩어져 거의 없어졌다(朝鮮之患莫大於無國史 … 我邦經史 屢經兵火 散亡殆盡 揆園史話 序文)." 兵火가 아니라, 李氏朝鮮 스스로 없애버렸다고 實錄에도 수차에 걸쳐 나온다. 李氏朝鮮은 우리나라 역사책을 求書의 諭示 말고도 兵火를 빌미삼아 지속적으로 焚書했던 것이다. 실상 전쟁 때문에 우리나라 역사책이 멸실된 경우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李氏朝鮮의 영토는 축소 되었고, 그때마다 三國의 영토와 高麗의 영토 또한 축소해야 했다. 우리나라 지도는 벌써 없앴으니까, 李氏朝鮮의 지도만 축소하면 해결됐다. 大震國은 유득공(柳得恭 1749~1807) 이전에는 우리나라로 인정 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大震國을 우리나라로 받아들이면, 그만큼 역사날조해야 할 꺼리가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高句麗 강역을 다 회복한 大震國을 두고 靺鞨人이 대다수였다고 말도 안되는 날조를 한 것이다.
揆園史話를 쓴 목적은 濊貊族과 한민족을 동일민족으로 만드는 데 있다. 李成桂가 朝鮮의 후예인데, 高麗人(李成桂는 21 살 때 高麗로 귀화했다)으로 태어나지 못해서 중국 대륙과 우리나라 역사를 포기했단 말인가. 朝鮮의 후예가 아니니까, 한단사를 말살한 것이다. 高句麗, 大震國, 高麗가 濊貊族을 어떻게 다루었나. 속민 이었다. 한 곳에 몰아넣어 감시했다. 정말 濊貊族이 우리민족 이라면 그런 식으로 대하지 않았다.
李成桂가 자신을 한민족이라 생각했다면, 黃河 이남을 朱元璋과 濊貊族에게 주었겠는가. 李成桂의 후손들이 자신을 한민족이라 생각 했으면, 東北亞를 淸에게 주었겠는가. 濊貊族의 염원이 朝鮮의 후예가 되는 것이었지만, 진짜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한단사도 수거해서 분서하고, 축소한 三國史, 高麗史도 또 축소해 수거해서 분서했다.
太白逸史와 비교해 보면, 揆園史話를 쓸 당시는 역사날조가 훨씬 더 진척 되었음을 알 수 있다. 北崖는 明을 가리켜 천한 종족이라 불렀다. “남쪽의 천한 종족들을 휘어잡게 하자(使撓其南鄙 漫說).” “우리가 어찌 中華가 아닐 것이며 中原이 도리어 오랑캐가 됨을 그대들이 어떻게 알겠는가(君等皆云華夷焉知我非華而中原之爲夷耶 太始紀).” 우리민족은 中華가 아니다. 저 말은 北崖가 우리 영토 중국 대륙을 李成桂가 朱元璋 등에게 준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李氏朝鮮의 王들은 자신이 濊貊族 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역대 왕들이 자손에게 맹목적으로 한단사를 수거, 분서 하라고 유언하면 따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너는 濊貊族이다’고 알려주지 않고는 한국사를 말살하지 않는다. 한단사 수거, 분서를 주지시키면서 중국이 미개국 이라는 사실 또한 상기 시켰음은 물론이다.
청나라 황제에게 우리가 조상이 같음을 얘기하고 그 이해득실을 나열하여 설복할 것이니, 조선과 더불어 요동(遼東), 만주(滿州), 유주(幽州), 영주(營州)의 땅에 나란히 웅거하여, 북으로는 야인(野人)을 끌어들여 선봉으로 삼고, 동으로는 왜(倭)와 연합하여 그들로 하여금 남쪽의 천한 종족들을 휘어잡게 하자고 할 것이다. 무릇 그러한 후에야 朝鮮의 강성함은 다시 살아날 것이요, 한(漢)나라의 거만함은 좌절될 것이다(淸帝 談同祖 陳利害 與朝鮮倂據遼滿幽營之地 北誘野人而爲前驅 東聯倭而使撓其南鄙 夫 然後 朝鮮之强可復 而漢之慢可挫矣 揆園史話 漫說)
李氏朝鮮 이라는 나라의 실상은 이 한 마디 말에 다 함축되어 있다. 揆園史話에는 날조 역사의 논조에서 벗어나는 글이 더러 눈에 띄는데, 이 역시 솔직한 北崖子의 심정을 서술한 대목이다.
저 글만 봐도 北崖라는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 수 있다. 祖上이 같으면 침략하지 않는가. 三國도 죽어라 싸워댔다. 祖上이 같으면 협박하지 않는가. 淸이 동아시아를 다 집어삼키는 것보다 더 큰 이익이 어디 있는가. 濊貊族이 한민족의 강역을 다 차지하는 것보다 더 큰 이익이 어디 있는가. 이해득실을 따지고서, 이미 淸나라 땅으로 변한 遼東, 幽州, 營州의 땅에 李氏朝鮮과 나란히 웅거 하겠는가. 이해득실을 따지고서, 淸이 일어난 滿州에 李氏朝鮮과 나란히 웅거 하겠는가.
이씨조선 초의 동아시아 티벳이 언제 티벳고원으로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明이 中土를 빠져나간 다음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蒙汗干涉期에 柴達木盆地를 수비하던 濊貊族은 蒙汗이 망하자 갈 곳이 티벳고원 북부 밖에 없다. 李成桂의 황위 찬탈 음모가 노골화 되었을 때, 朱元璋에게 李成桂가 濊貊族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보다 최고의 대우를 약속받는 일은 없다. 그런데 濊貊族은 더 있었다. 바로 柴達木盆地에 살았던, 날조역사 속에서는 雙城摠管府에 살았던 濊貊族.
柴達木盆地의 濊貊族도 李成桂가 濊貊族임을 알고 있으니까, 입막음을 해야 했다. 李成桂가 威化島 回軍을 했을 때, 달려와 도운 것은 李成桂가 高麗 皇位를 찬탈하면, 자신들에게 揚子江 이북을 주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同族이라 해도, 아무 대가없이 돕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후의 淸의 행보가 말해준다. 李成桂는 明에게는 揚子江 이남을, 濊貊族 에게는 揚子江 이북을 주었다.
“滿州에 웅거”하자는 데서 알 수 있듯이, 滿州는 지명이다. 揚子江 이북의 숙여진은 地名으로 종족명을 삼은 것이다. 淸이 揚子江 이북, 黃河 이남에서 시작 했으니까, 滿州도 그 땅에 있었다. 滿州가 옛날부터 있었던 지명 이라면 中土 에서도 4 대강 이북에 있었다. “太祖 누루하치(努爾哈赤)에 이르러 궐연히 건주(建州) 땅에서 떨치고 일어나서 팔기병(八旗兵)을 거느리고 滿州를 석권, 금한국(金汗國)을 세웠다(太祖努爾哈赤蹶然奮興於建州之地 率八旗之師而席卷滿洲創金汗國 揆園史話 漫說)." 揚子江 이북, 黃河 이남 땅 일부를 차지하고 金汗國을 세웠던 것이다. 李成桂가 숙여진에게 揚子江 이북을 주자, 즉각 숙여진끼리 싸움이 일어나, 부족 통합 과정을 거쳐 淸을 세운 것이다.
궐연히 떨치고 일어나서 八旗兵을 거느리고 滿州를 석권? 濊貊族은 中奴의 상대나 될까, 수천년을 빌빌대던 濊貊族이 갑자기 달라질 수 있는가. 淸이 西洋의 밥 이었다는 사실 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八旗兵의 무기는 협박이었다. 협박으로 朝鮮 땅을 다 차지했다. 中奴와 濊貊族이 딱 한 번 이긴 적이 있는데, 韓國戰爭 당시 메군(米軍) 한테서다.
“虞舜(帝舜有虞)이 幽州, 營州의 두 주를 藍國의 이웃에 두었기 때문에 檀帝께서 병사를 보내어 이를 정벌하여 그 왕을 모두 다 쫓아냈다(虞舜置幽營二州於藍國之隣帝遣兵征之盡逐其君 檀君世紀)." 藍國은 柴達木盆地다. 幽州, 營州는 柴達木盆地 서쪽 즉 岷江(두 번째 遼水) 이북에 있었다. 朱元璋은 幽州, 營州를 桑乾河 이서로 밀어낸 것이다.
“지금에 무릇 애친씨(愛親氏)는 혁도아라(赫圖阿羅) 사람이다. 그 선조는 멀리 속진의 후예에서 나왔고, 그 백성들은 高句麗와 발해(渤海)의 무리 중에서 많이 이어 받았으니, 이들이 남아 있는 檀君의 후예가 됨을 거의 단정지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에 있어서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스스로를 소중화(小中華)라고 뽐내고 있으니, 滿州가 우리와 친척됨을 긍정하고 인정하려 하겠는가. 저들이 女眞을 대함에 있어서도 이미 오랑캐로 여기고 그들을 배척하고 있으니, 우리가 滿州를 대하며 욕하고 배척하는 것을 어찌 괴이하다고만 하겠는가! 또한 저들이 朝鮮과 더불어 대립한 지가 이미 오래이며, 뭇 오랑캐와 더불어 서로 섞인지가 오래이니, 그 형세가 어찌 능히 다시 합치고서 오랫동안 갈라져 있었음을 후회할 수 있겠는가!(今夫愛親氏者 赫圖阿羅之人也 其先 遠出於嫘溍之後 其民多承句麗渤海之衆 是爲舊檀氏之遺裔 庶可斷焉 而今 夫 人囂囂然以小華自耀 肯認滿洲而爲親乎 彼等之於女眞 已以蠻胡斥之其於滿洲寧怪其罵斥耶且彼等之與朝鮮 角立者已尙矣 而與諸胡相混者久矣 其勢安能復合而悔其久分耶 此不必長說也 揆園史話 漫說)"
속진(嫘溍)은 神人王儉이 神誌氏에게 준 봉토로 濊貊族과 아무 상관없는 이름이다. 李成桂의 출신 종족인 濊貊族은 고작 3 백년 전에도 高麗의 은혜에 기대어 한 구석에서 살던 종족이다.
소중화(小中華)라 뽐낸 것은 李氏朝鮮이다. 韓國史를 말살하고 中奴를 天子國의 자리에 밀어 올리자, 스스로 中奴가 되기를 갈망한 것이다. “世俗에는 이미 妙香山을 가지고 太白山이라고들 한다. 즉 이를 보니 동쪽에 치우쳐 鴨綠江 이남의 한 구석을 차지한 땅일 뿐이라. 산의 祖宗을 崑崙山이라 떠들어대며 기분 좋아하며, 小中華를 가지고 스스로 달래며 만족한다(世俗旣以妙香山爲太白則其見只局於東鴨綠水以南一隅之地便唱山之祖宗崑崙欣欣以小中華自甘宜 太白逸史 神市本紀).” 三韓秘記가 출처라고 하나, 三韓秘記를 李氏朝鮮 때 썼거나 이전 시대에 쓴 것을 李氏朝鮮의 시각에서 고친 것이다.
揚子江 이북의 숙여진은 이름을 고쳐 滿州族이라 불렀다. “穴居生活을 하고, 변소를 주거의 한가운데 두어 오줌으로 세수를 하고, 짐승의 지방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으며 살았던(常爲穴居冬以豕膏塗身厚數分 以禦風寒 作於中廁之而居 三國志 魏書)” 濊貊族임을 은폐하기 위해서였다. 어째서 濊貊族의 미개 기사를 지우지 않았냐고? 李氏朝鮮을 濊貊族의 나라로 둔갑 시켰기 때문이다. 한민족은 미개 濊貊族의 나라로, 華夏族은 우수한 漢族으로 둔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淸은 漢族의 나라가 될 수 없었기에 滿州族 이라고 바꾼 것이다. 하지만 곧 滿州族은 漢族으로 변신했고, 현재의 滿州族은 生女眞이다.
淸이 뭇 오랑캐와 더불어 서로 섞인 지가 오래다? 오랑캐 濊貊族이 揚子江 이북으로 가서 한민족과 섞였다. 그리고 끝내 스스로를 漢族이라 불렀던 것이다.
東方禮義之國. 이 말은 李氏朝鮮의 풍속이 아름답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나라가 5300년 동안 漢委奴로 멸시한 中族의 나라 明을 李氏朝鮮이 하늘처럼 떠받드는 것을 칭송한 말이다. 李氏朝鮮의 역대 왕들은 明을 천한 종족이라 멸시 하면서도 朝鮮人들에게는 철저한 事大를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자 朝鮮人들은 ”스스로를 ‘小中華’라고 뽐내고(揆園史話)" “小中華를 가지고 스스로 달래며 만족(太白逸史)"했던 것이다.
“遼東의 들판을 바라보니, 遼東 벌판의 나무와 계주(薊州) 하늘의 구름은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 드문드문 흩어져 노닐고 있다(望遼野 遼樹薊雲點綴徘徊於指顧之間 揆園史話 序文)."
어째서 北崖는 遼東을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나. 淸에 빼앗겼기 때문이다. 땅은 明이 빼앗겼다면서, 明의 復活에 뜻있는 선비가 일어 났다면서, 李氏朝鮮人이 회한에 젖을 수 있는가. 淸이 차지한 遼東은 李氏朝鮮의 영토였고, 뜻있는 선비가 일어난 곳도 李氏朝鮮이었다.
北崖가 바라본 遼東은 어딘가. 揆園史話가 쓰여진 해는 1675년이다. 淸碑는 1712년, 大凌河에 세웠다. 결국 北崖가 바라본 遼東은 桑乾河 이동, 난하(灤河) 以西다. 明, 淸과 三分해 나눌 당시의 李氏朝鮮 영토는 黃河 이북과 동북아였다. 丙子胡亂 때는 桑乾河 까지, 丁卯胡亂 때는 灤河 까지 빼앗긴 것이다.
明을 누르기 위해 淸과 野人, 倭까지 연합해야 한다고 하면서 明의 퇴조를 거론하고 또 明의 부활을 거론할 수 있는가. 1675년 당시 明이 존속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는 말이 다음 대목이다. “우리나라의 선비들이 비록 밤낮으로 南漢山城의 치욕에 대해 이빨을 갈면서, 壬辰年에 신통치 않게 도움을 받은 의리로 明나라에 대해 보답하려고 한다. 그러나 1 백년 안에는, 내가 보장 하건데, 기필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我國之士 雖日夜以南漢之耻切齒 以區區東援壬辰之誼 欲向明而圖報 然 百年之內 余保 其必無是事矣 揆園史話 漫說).” 明이 이미 사라졌다면 어떻게 도움을 보답할 수 있으며, 더욱이 앞으로 1 백년 안에는 보답할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벌떼같이 일어난 뜻있는 선비는 桑乾河와 灤河 사이에 사는 李氏朝鮮의 선비였다. 李成桂와 北崖가 濊貊族이다 보니까, 이를 숨기려고 횡설수설한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濊貊族에 대한 거짓 自畵自讚은 잊지 않았다. “有史 이래 변방 밖의 뭇 종족 가운데 皇帝가 다스리는 漢나라 땅에 들어온 것 중에서 이처럼 강하고도 번성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有史以來 塞外諸族 入帝漢土者 未有若此之强且盛者 揆園史話 漫說).”
遼東(桑乾河 이동)을 탈취당한 것이 明이라 가정해 보자. 揚子江 이남의 明은 揚子江 이북의 淸에 의해 처음부터 영토가 분단되어 버린다. 그런 땅을 지킬 수는 없다. 遼東은 李氏朝鮮의 영토지, 明의 영토가 될 수 없다.
李氏朝鮮 王이 가짜 天子國 明을 위해 淸과 싸울 리가 없다. 李氏朝鮮 역대 왕들은 자신들이 濊貊族임을 감추기 위해 한민족 에게는 날조 事大主義를 세뇌한 반면 자신들은 미개 明을 경멸하고 있었다. 遼東은 明의 땅이 아니라, 李氏朝鮮의 땅이었다. 丙子胡亂(1636~1637), 丁卯胡亂(1627)은 李氏朝鮮의 영토를 두고 벌인 전쟁이다.
八旗兵이 향하는 곳에는 견고하고 강한 성벽이 없었다?(八旗之所向 更無堅城.强壁矣 揆園史話 漫說) 정말 長城이 없었다면, 쓸 필요조차 없는 말이다. 長城이 없는 곳마다 견고하고 강한 성벽이 없었다고 기술하지는 않는다. 실상은 견고하고 강한 성벽 즉 萬里長城이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更非我土矣. 遼東을 두고 전쟁이 벌어져 遼東의 소유권이 淸과 李氏朝鮮으로 왔다 갔다 했다는 뜻이다. 遼東의 뜻 있는 조선선비 즉 百濟長城 이서 주민들이 淸의 군대에 대항해 치열하게 싸웠던 것이다. 韓半島에서 보낸 지원군은 長城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했다. 李氏朝鮮王들은 淸에 맞서 싸울 수 없으니까, 百濟長城 以西 주민들이 스스로 무너지기를 마냥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한다는 소리가 “슬프다 한인(桓因)이여, 슬프다 한인(桓因)이여. 지금 한 조각의 진역(震域)과 한 줄기의 遺民은 장차 어찌 될 것인가(嗟桓因乎 嗟桓因乎 今片區震域一脈遺民 其將奚爲 揆園史話 漫說)." 한 조각의 震域은 淸이 빼앗은 발해만 長城 지역이고, 한 줄기 遺民은 그 땅에 사는 朝鮮人들을 가리킨다. 震域의 중심 長安城을 숙여진에게 줄 때는 쾌재를 불렀던 濊貊族이다. 震域이 아니라, 李氏朝鮮 땅을 잃었다고 슬퍼하는 것뿐이다.
"작은 거룻배로 鴨綠의 물길을 건너고자 하나 이미 갈마들어(更) 우리 땅이 아니구나(若越一葦鴨江之水 則已更非我土矣 揆園史話 序文)."
鴨綠의 물길. 이 말에서 李氏朝鮮 이라는 나라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西鴨綠江(桑乾河)을 빼앗기자, 서둘러 새로운 국경에 西鴨綠江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래서 灤河가 새로운 西鴨綠江이 되었다. 그러자 淸도 덩달아 새로운 西鴨綠江을 遼水라고 불렀다. 1712년 현 大凌河에 淸碑를 세우고, 1824년에는 현 遼水를 遼水로 불렀다. 그리하여 우리나라는 갈고(葛古) 한웅 이후 4900년 만에 鴨綠江이 하나가 되었다.
그레고리오 16세 조선교구 제정 지도
오른쪽 지도는 현재의 지도로 비교
揆園史話를 쓴 해로부터 천년 전은 新羅가 三國을 통일했을 때다. 결국 李氏朝鮮이 상실한 땅을 新羅가 상실했다고 뒤집어씌운 것이다. “옛 강역이 적국의 손에 들어간 지 이미 천여년”이라고 하면서도 그 땅에서 大震國이 일어났다고 했다.
“그후 발해(渤海)가 비록 일어나기는 하였지만 단지 新羅와 더불어 남북으로 대치하고 있었을 뿐, 서로 마음에 두지 않았으니 곧 소원해질 따름이었다(厥後渤海雖興 只與新羅南北相對不惟秦越而已 揆園史話 檀君紀)." 濊貊族이 柴達木盆地에서 빠져나와 멸망한 大震國의 平壤城 주변을 수렵하고 약탈한 것은 “渤海人들이 그 곳을 수렵하며 노닐었던 것을 그저 오랑캐들이 침입하여 주변의 고을을 약탈했다 라고 한 것은 단지 같은 민족을 욕하는 커다란 해악을 두려워해서이다(渤海人之遊獵其間者 則輒稱之以蕃人侵掠邊邑 則只恨其大害 揆園史話 檀君紀).”고 날조했다. 大震國史를 朱元璋에게 넘기고는 또 金富軾에게 덮어 씌웠다. “본래 神人王儉이 자리잡은 곳이다는 몇 구절만을 남겨 놓았으니, 어찌 그(金富軾)를 심하게 질책하는 것만으로 족하겠는가! 더욱이 渤海의 역사는 언급도 하지 않았으니, 金氏는 이로서 언제 까지나 그 허물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本神人王儉之宅數句亦何足深責而渤海史 幷不過問金氏於此 終不免其咎矣 揆園史話 檀君紀).”
李氏朝鮮은 淸에게 최소한 여섯 번이나 영토를 빼앗겼다. 丙子胡亂 때 桑乾河 까지, 丁卯胡亂 때 灤河 까지, 淸碑 세울 때 大凌河 까지 상실하고, 곧 현 遼水 까지 밀려나 1824년(“로마교황 그레고리오 16 세 조선교구 제정”의 참고지도)에는 이씨조선의 영토가 東鴨綠江 西北端에서, 黑龍江 하류가 되었다. 1909년에 日本이 淸과 ‘間島協定’을 맺어 韓半島 이북을 넘겨줬다. 그리고 李氏朝鮮은 日本한테 韓半島를 빼앗기고 망했다.
아무르강에서 스타노보이강 까지가 1689년 네르친스크조약에서 李氏朝鮮이 상실한 땅.
1858년 아이훈조약 체결 당시에는 흑룡강 좌안을 러시아령으로 하고, 우안의 우수리강에 이르는 지역을 조선령으로 하며, 우수리강에서 바다에 이르는 지역(연해지방)을 양국 공동관리 하에 두고, 흑룡강 좌안의 만주인 부락을 조선의 관할하에 두었다.
1860년에는 북경조약에서 이씨조선, 러시아 공동관리하에 있던 연해지역을 러시아령으로 했다.
다시 1904년 이씨조선이 청에 현 압록강, 현 토문강, 흑룡강 이북을 넘기자, 한반도와 주황색 부분이 조선의 땅으로 남았다.
이렇게 해서 로마교황 그레고리오 16 세 조선교구 제정의 원본지도가 만들어졌다.
李氏朝鮮이 세워짐에서 멸망까지 5 백년 동안 동아시아를 다 잃었다. 나라 자체가 망한 것이다. 인류 최고의 문명으로 5300년간世界를 밝히던 한민족은 李氏朝鮮 때문에 未開民族으로 평가받고 있다. 濊貊族이 얼마나 저능하고 무능하고, 비열한 지 알 수 있다. 탐욕만 무한대였던 것이다. 淸이라고 건국한 濊貊族은 또 어떤가. 저능하고 무능하고 비열하기는 매한가지다. 淸이 존속할 당시 中國은 서양의 밥이었다.
李成桂의 고향은 柴達木盆地이고, 1 차 날조사 에서는 雙城摠管府가 있던 현 黃河 하류 이북이었다. 최종적으로 축소된 날조역사에서 李成桂의 고향은 오늘날의 함경남도로 낙착됐다. 그런데 李氏朝鮮은 咸境道 출신자를 차별했다. 李成桂가 자신의 고향을 싫어했다? 李成桂가 차별한 咸境道는 바로 현 黃河 하류 이북이었다. 동아시아의 天子國 高麗가 고작 中奴 따위에게 패했다는 것도 납득할 수 없는데, 黃河 이남에는 中奴도 아닌, 숙여진이 살고 있었다. 천한 종족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며 살던 이들은 李成桂가 현 黃河 이남을 천한 종족들에게 줘버리고, 韓半島에 처박혔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도 자신들의 王으로 군림한 李成桂가 바로 그 천한 종족이라는 사실은 몰랐다.
로마교황 그레고리오 16 세 조선교구 제정의 원본지도(황색부분)
이 땅의 사학자들이라는 사람들은 “당시 間島 지역은 주인 없는 땅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중국 입장에서 間島는 변방에 있는 척박한 땅으로, 일종의 버려진 땅이었다.” 이러고 있다. 6 천년 自國史는 부정해가며 고작 우리나라를 남이 버린 땅이나 줍는 거지나라로 둔갑시킨 것이다. 濊貊族은 해도, 한민족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間島가 沃土라 朝鮮人이 건너가 토지를 개간했다고 할 때는 언제고, 間島가 척박한 땅이라 中奴가 버렸다고? 어디에도 버려진 땅은 없다. 한 치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인류는 지난 수만년 동안 전쟁을 해왔다. 中奴는 유사 이래로 티벳고원 북부조차 서로 차지 하려고 허구한 날 전쟁을 해댔다. 間島가 아니라, 馬羅島, 獨島라도 中奴는 기를 쓰고 빼앗으려 했을 것이다. 한 뼘의 땅조차 그냥 지나치지 않는 게 中奴다.
間島가 척박 하다고? 시베리아도 우리나라 땅이었다. 間島가 척박하면 韓半島는 티벳고원 북부쯤 되는가? 티벳고원 북부는 에베레스트 산쯤 되겠다. 하기야 티벳고원 북부 안에 에베레스트가 버티고 있다. 中奴는 그런 척박한 땅에서 수천년을 살아온 것이다. 거기에 비하면 間島는 완전 옥토다. 間島가 우리나라 땅이 아니라면, 中奴는 淸碑 따윈 세울 필요도 없었다. 제 땅 제가 차지 하는데, 定界碑를 세워 다른 나라에 땅까지 떼어줄 것인가. 鴨綠江 이북은 神市氏가 개천한 神市가 있고, 太白山이 있는 우리나라의 聖域이다.
北崖는 濊貊族을 한민족과 동족으로 만들기 위해 강변 하면서도 李成桂 등이 濊貊族임을 드러내서는 안됐다. 李成桂의 역사, 영토 축소 사실은 은폐 하면서 실로 교묘하게 써야 했던 것이다. 李氏朝鮮의 역대 왕들은 자신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역사를 축소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李氏朝鮮實錄 조차 끝없이 뜯어 고쳤던 것이다. 영토가 축소될 때마다 그에 맞추어 조작하다 보니까, 끝내는 韓半島를 강역으로 한 우리나라 역사가 성립해야 했던 것이다.
李氏朝鮮은 우리나라 역사말살을 건국의 정통으로 삼은 나라다. 李氏朝鮮實錄이 史草에 근거해 편찬했다는 소리는 거짓말이다. 李氏朝鮮은 우리나라 以前史 모두를 말살하고 날조한 濊貊族의 나라다. 高麗史 조차 “본래의 史草와 달리 마음대로 고쳤”고 “高麗實錄에 따라 바로 쓴” 게 아니라 완전 날조했던 것이다. 李氏朝鮮史 역시 사실대로 기록할 리 없는 濊貊族의 나라인 것이다.
“나라의 흥망은 뒤바뀜이 무상하니 지금 朝鮮의 불행은 앞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실마리가 아니겠는가(國之興亡不得免翻覆無常也 然則 安可以眠前榮枯 二三其心也哉 漫說).” 땅을 잃었다 하면, 우리나라 탓으로 전가하기 급급한데, 어떻게 불행이 끝날 수 있겠는가. 실패를 분석하지 않고, 실패를 거울삼지 않는 李氏朝鮮은 처음부터 비참한 종말을 맞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丙子胡亂, 丁卯胡亂. 女眞 대 女眞의 전쟁 이었다. 胡亂. 李氏朝鮮 王은 자신이 오랑캐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神機箭, 火車, 火砲, 거북선(龜船)...... 高麗의 첨단무기는 李氏朝鮮이 다 가지고 있었다. 李氏朝鮮은 무력에 있어서 아직도 막강했다. 李氏朝鮮은 전쟁에 열의 없는 濊貊族 때문에 졌던 것이다. 李氏朝鮮은 丙子胡亂, 丁卯胡亂에 이겨서는 안됐다. 당연히 이종(李倧 1595~1649 李氏朝鮮의 仁祖라고 불리는 濊貊族)은 지려고 기를 썼겠지? 매번 淸이 朝鮮 땅을 확고히 차지할 때 까지 지원군 파견을 온갖 이유로 미적 거렸던 것이다. 李氏朝鮮의 역대 사령관들이 文官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2 차에 걸친 胡亂 뒤에도 北崖는 정신 못 차리고 淸이 제 동족이라 믿었던가. 그러나 淸은 다른 계획이 있었다. 西鴨綠江을 난하(灤河)에서 현 遼水로 밀어낸 것이다. 그리고 1824년에는 東鴨綠江 까지 밀어붙이고, 1909년 淸日協定을 맺어 韓半島 이북을 전부 가로챘다.
李氏朝鮮은 숙여진(滿州族)을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李氏朝鮮王도 숙여진이고, 숙여진이 비밀을 누설할까봐 노심초사 했으니까. 淸은 李氏朝鮮王들이 말을 듣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우리나라 역사책을 다 보관하고 있었다. 그래서 後漢의 천문기록도 渤海灣의 현 北京에서 관측한 것으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黑水靺鞨이 여러 靺鞨 중에서 가장 강해? 穴居生活을 하고, 변소를 주거의 한가운데 두어 오줌으로 세수를 하고, 짐승의 지방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으며 산 종족이다. 숙여진 역시 文明化(?)되기 이전에는 그러했다. 高麗史에는 더 쉽게 풀이해놨다. 방이 없고 땅을 파서 나무를 걸치고 흙을 덮어 그 속에서 살며 수초를 찾아 다녔으므로 언제나 정처없이 옮겨 살았다고. 이런 종족이 어떻게 가장 강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싸울 때만 뭉쳤던가. 麻衣太子 후손 극기(克己)가 가서 지도한 生女眞은 나라를 세우지 못했다. 黑水靺鞨을 滿州族으로 둔갑 시키고, 新羅 末 부터 鴨綠江 까지 진출해서 살았다고 날조하기 위해서 종이 위에서만 가장 강한 종족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李氏朝鮮의 濊貊族 까지도 저들을 野人, 野蠻人이라 불렀다. “淸나라 皇帝에게 우리가 조상이 같음을 얘기하고 그 이해득실을 나열하여 설복할 것이니, 朝鮮과 더불어 遼東, 滿州, 幽州, 營州의 땅에 나란히 웅거하여, 북으로는 野人을 끌어들여 선봉으로 삼고(說淸帝 談同祖 陳利害與朝鮮倂據遼滿幽營之地 北誘野人而爲前驅 揆園史話 漫說)." “점차 북쪽 끝의 野蠻人들과 서로 섞이더니 점차로 그 풍속을 잃어버리고 한탄스럽게도 자못 쇠미해져 갔다(稍與窮北蠻人相混 漸失其俗 頗有陵夷之歎 揆園史話 檀君紀)."
마치 生女眞만이 濊貊族인 양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에 있어서 사람(李氏朝鮮人)들이 떠들썩하게 스스로를 ‘소중화(小中華)’라고 뽐내고 있으니, 滿州(淸)가 우리와 친척됨을 긍정하고 인정하려 하겠는가. 저들이 女眞을 대함에 있어서도 이미 오랑캐로 여기고 그들을 배척하고 있다(而今 夫 人囂囂然以小華自耀 肯認 滿洲而爲親乎 彼等之於女眞 已以蠻胡斥之 揆園史話 漫說).” 淸을 세운 濊貊族도 제 동족을 오랑캐라 업신여겼다. 生女眞을 동족으로 삼고 싶어 하는 건 大韓民國 사람들 밖에 없다.
번한은 첫 번째 위치
부여는 부우, 부소와 함께 티벳고원 남부를 봉토로 받았다가, 설유의 난을 평정한 후 티벳고원 남부 전체를 봉토로 받았다(규원사화). 三韓이 생긴 것은 단군왕검 재위 마지막 해인 庚子 93년(B.C. 2241)이다(檀君世紀). 이때 馬韓이 민강 이동 타강 이서에 자리잡았다. 부여의 봉토가 축소되었는지, 봉토를 옮겼는지는 우리나라 역사책을 찾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단군 색불루가 즉위할 당시 부여는 백악산(현 은허) 일대에 있었다.
읍루(挹婁), 물길(勿吉), 靺鞨, 女眞, 滿州라 불리는 李成桂의 종족은 우리민족이 되고 싶어 환장한 종족이다. 우리민족 이라면서 갑자기 등장할 수 없으니까, “옛적에 夫餘의 백성 가운데 몸을 피하여 설유(稧兪)의 땅에 사는 자가 있었는데, 마침내 그 땅의 백성들과 섞여서 거처하게 되니 자못 그 풍속을 익히게 되었으며, 거의 고정된 생업이 없이 수렵으로 생활을 하며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으니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맥(貊)'이라 하였다. 다시 점차 옮겨와서 엄려(奄慮)의 북서쪽 땅에서 살게 되어 마침내 藍侯의 백성이 되었다(昔 夫餘民有遁居于稧兪之地 遂與其民雜處 頗習其俗 殆無恒業 以狩獵爲生 獸皮爲服 人謂之貊復漸遷徙 處於奄慮北西之地 遂爲藍氏之民 揆園史話 檀君紀).”고 날조한 것이다. 우리민족에 맥(貊), 예맥(濊貊)은 없다. 貊, 濊貊은 濊貊族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남국의 위치
“高麗朝 부터 스스로를 낮추어 조공하는 사신이 북쪽을 드나든지 이미 수백년 인데도 한으로 여기지 않다가, 졸지에 滿州의 동류를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로 여김은 유독 어찌된 까닭인가?(自勝朝 以降貢使北行累百年而不爲之恨 猝以滿洲之讎爲不俱戴天則獨何故耶 揆園史話 序文)" 땅을 갈취 당했기 때문이지. 그래도 자신들이 우리나라의 땅을 갈취했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을 것이다. “朝貢 올리는 사신이 북쪽을 들락거린 역사가 백년이다. 이를 치욕으로 알지 못한다(其貢使北行歷累百年而不爲之耻 太白逸史 神市本紀)."
華夏族 한테는 三國時代 부터 朝貢 했다고 날조했다. 李氏朝鮮의 濊貊族은 華夏族에게 朝貢하는 것은 恨으로 여기지 않기는 커녕 자랑으로 여겼다. 李成桂의 거짓말에서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가 三韓을 통일한 이후 성실 근면하게 대국을 섬겼고, 홍무 2년(1369) 明나라에 복종했던 정성도 그러했다(我國家統三以來事大以勤玄陵於洪武二年服事 高麗史).” “지금에 있어서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스스로를 ‘小中華’라고 뽐내고 있다(而今 夫 人囂囂然以小華自耀 肯認 揆園史話)." “山의 祖宗을 崑崙山이라 떠들어대며 기분 좋아하며, 小中華를 가지고 스스로 달래며 만족한다(世俗旣以妙香山爲太白則其見只局於東鴨綠水以南一隅之地便唱山之祖宗崑崙欣欣以小中華自甘宜 太白逸史 神市本紀)." 그러니까 朝貢하는 사신이 들락거린 북쪽은 明과 병행해 존속하던 淸이다. 북쪽을 들락거린다고 한 것은 揚子江을 기준으로 이남에는 明이, 이북에는 淸이 있었기 때문이다.
李氏朝鮮은 明 뿐만 아니라 淸에게도 일찌감치 朝貢을 했던 것이다. 淸의 등장은 李成桂가 黃河 이남을 준 직후다. 朱元璋과 李成桂가 明을 上國으로 李氏朝鮮은 朝貢國으로 합의하자, 淸도 우리도 上國을 시켜 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淸의 협박은 李成桂 때 부터 시작 되었다. 그래서 물귀신처럼 高麗를 끌어들인 것이다.
李氏朝鮮王들은 드러내놓고 淸을 不俱戴天의 원수로 여긴 것이 아니다. 李氏朝鮮王들이 공공연히 滿州族을 同流라고 밝힐 수는 없었다. 濊貊族끼리 있을 때나 울분을 토로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혼(李琿 1575~1641 李氏朝鮮의 光海君이라 불리는 濊貊族)이 親淸政策을 취하고 이호(李淏 1619~1659 李氏朝鮮의 孝宗이라 불리는 濊貊族)가 北伐을 추진할 수 있는가.
결국 北伐은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한민족의 耳目 때문에 북벌을 준비하는 척 했을 뿐이다. 明의 출병요구에 원조하는 척 하면서 淸에 항복했다? 揆園史話를 쓸 당시에도 明은 멀쩡했다. 빼앗긴 것은 朝鮮의 땅이지, 明의 땅이 아니다. 李琿은 군대를 보내지도 않았다. 이공(李玜 1790~1834 李氏朝鮮의 純祖라고 불리는 濊貊族) 역시 濊貊族이라 淸碑를 세워 李氏朝鮮 땅을 가로채는 것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淸은 곧 현 遼水까지, 1824년에는 東鴨綠江 이북까지, 1909년에는 韓半島 이북 전부를 삼켰다.
비총(코무덤) 『토요도미는 코무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정권이 넘어간 뒤 이미지가 너무 잔인해 귀무덤(耳塚)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동아시아의 天子國에 恨이 있을 리 만무하다. 恨은 우리나라의 정서가 아니라, 李氏朝鮮의 정서다. 丙子胡亂, 丁卯胡亂 당시 이종(李倧 1595~1649 李氏朝鮮의 仁祖라고 불리는 濊貊族)은 자신이 濊貊族이라는 사실을 숨기느라, 士大夫의 부인들까지 淸에게 주었다. 壬辰倭亂을 위시하여 크고 작은 倭亂이 일어난 나라도 李氏朝鮮이다.
침략군은 가는 곳마다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하며 전라도를 철저하게 유린했다. 일본측 종군 의승인 케이넨(慶念)은 그 실상을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가는 곳마다 불을 지르고 어린아이 눈앞에서 부모를 베어 죽였으며, 시체가 무수히 쌓여 있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조선일기)
1 차 침략 때와 달리 倭軍은 더욱 참혹 하게도 朝鮮人의 귀 대신 코를 베기 시작했다. 倭將의 전공을 나타내는 코 영수증이라는 것이 있는데, 전북 김제 지역의 코 영수증만 약 3100 개에 이른다.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보내진 수만 개의 코는 당시의 참상을 말해준다(역사스페셜 6 권)
壬辰倭亂 당시, 수많은 朝鮮人이 日本으로 끌려 가서 西洋의 노예상인들에게 팔아 넘겨졌다. 倭奴强占期에는 日本軍에 강제동원되어 죽어간 朝鮮人은 6 백만으로 추정된다. 추정밖에 할 수 없는 것은 단 한 번도 조사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日本軍 위안부로 강제동원된 조선인은 20 만명에 이른다. 倭奴에게 끌려가 생체실험을 당한 朝鮮人도 부지기수다. 그래도 이희(李熹 1852~1919 李氏朝鮮의 高宗이라 부르는 濊貊族)의 庶子 이은(李垠 1897~1970)이라는 자는 李氏朝鮮이 日本에 강점되었을 때 조차 저 혼자 편하고자 日本軍 장교까지 되었다. 濊貊族 李成桂와 그의 후손들이 지배하던 李氏朝鮮에서 한민족의 삶은 고단 그 자체였다. 恨은 중국 대륙을 내놓고, 동북아도 유지하지 못한 채 韓半島로 축소 되었다가 끝내 망한 李氏朝鮮의 정서였던 것이다.
濊貊族과 섞인 李氏朝鮮은 모든 면에서 퇴보한 나라다. 日本으로 이주한 中國倭는 140 만 명으로 당시 日本 인구의 4 분의 1에 해당한다. 140 만 명이 우리가 감탄해 마지않는 百濟의 문화와 의식 수준을 미개의 바닥까지 끌어내린 것이다. 李成桂의 부 李子春은 千戶이고 李豆蘭은 百戶다. 고작 5500 명의 濊貊族이 와도 이 지경인데, 140 만이나 끌고 왔다면 우리나라도 日本처럼 미개소굴로 전락하고 말았다.
揆園史話 어디에 애국심이 있던가. 처음부터 끝까지 세 치 혀끝에서 노는 요설밖에 없다. 분명히 세상에서 가장 잘난 나라를 훔쳤는데, 역사를 다 말살하고 나자, 끝없이 축소되어 이제는 숙여진 淸에게도 땅을 빼앗기고 中奴 明에게도 조공해야 하는 현실의 억울함과 분함을 토로했을 뿐이다. 李氏朝鮮이 또 다시 영토를 세 번이나 잃고 韓半島로 축소 되리라라는 걸 알았다면, 北崖는 절대 揆園史話를 쓰지 않았다.
무릇 묘청(妙淸)이 난을 일으키자 왕명을 받들어 그를 토벌하여 전멸시킨 사람 또한 김부식(金富軾)이다. 김씨에게는 원래 믿을 만한 글이 없는데, 또한 妙淸의 요사스러움과 서경(西京)의 파탄을 미워한다 하면서도 더군다나 이 모두에 대해 깊이 있게 그 내용을 캐지 않고 글을 써내려가며 단지 ‘본래 신인왕검(神人王儉)이 자리잡은 곳이다’는 몇 구절만을 남겨 놓았으니, 어찌 그를 심하게 질책하는 것만으로 족하겠는가! 더욱이 발해(渤海)의 역사는 언급도 하지 않았으니, 김씨는 이로서 언제까지나 그 허물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김씨는 본디 한(漢)나라의 서적에 빠져 있고, 또한 웅장한 계책 같은 것도 결핍된 자인지라, 비록 우리나라의 일에 대해 근심하여 한숨을 쉰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엉뚱하게도 그 시작과 끝도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일 따름이다. 우리나라의 경전과 역사 서적이 입은 화는 이미 오래이니, 지금에 와서 아무리 탄식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또한 어찌할 수 있을 것인가(及夫妙淸之造亂奉命剿討者 又是金富軾也金氏旣無信文 又惡妙淸之妖西京之破 幷不深採其說 下筆寫過 只留本神人王儉之宅數句亦何足深責 而渤海史 幷不過問金氏於此 終不免其咎矣盖金氏旣醉於漢籍 又乏雄圖 則雖有甚歎於吾邦之事却茫然不知其始末之處 而亦無能而已矣 我邦經史之禍 其來久矣 今浩歎無益亦復奈何 揆園史話 檀君紀)
北崖가 얼마나 간사한 인간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妙淸의 亂은 中土에서 일어났다. 金富軾은 우리나라 역사를 편찬할 만한 인물이라서 三國史記를 편찬했다. 설령 金富軾이 中奴를 소망한다고 해도 仁宗(1109~1146) 이하 高麗人들이 엉터리 역사책을 보고 가만 있었겠는가. 원래 역사책은 그 특성상 바로 쓸 때까지 고치고, 또 고치는 책이다. 그래서 李氏朝鮮도 高麗史를 여섯 번이나 고쳤다고 실토했다. 실은 그보다 훨씬 많이 뜯어고쳤다.
三國史記는 우리나라 역사책만을 참고해서 편찬한 책이다. 三國史記를 편찬할 당시는 三國志, 後漢書, 魏書, 晉書, 宋書, 南北史, 舊唐書, 新唐書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모조리 李成桂가 건네준 우리나라 역사책을 분해해서 쓴 책들이니까.
三國史記의 참고문헌을 中奴에게 준 책으로 바꿔놓고 한다는 소리가 “三國의 역사를 편수하며 2 천년 동안의 옛 성인이 남긴 공덕을 빠트리고 기술하지 않고서, 단지 ‘海東 三國의 역년이 장구하나 옛 기록은 문자가 거칠고 졸렬하며 일의 자취는 이지러져 없어지고 앞선 말들이나 지나간 일들은 가뭇가뭇 어둡기만 하니……’라고 하며, 이와 같은 말로서 그 책임을 회피 하고자 하였다. 그러다 東川王이 천도한 해에 이르러서야 겨우 ‘平壤은 본래 神人王儉이 자리잡은 곳이다’ 혹은 ‘王이 王儉에 도읍을 하였다’ (東川帝가 遷都한 곳은 海城으로 神人王儉이 자리잡은 곳이 아니다) 등의 글귀가 있을 뿐이다. 당시를 지금과 비교하면 오히려 옛날에 5 백년이나 가까운데 옛 기록이 흩어져 없어지고 증거가 될 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일찍이 이와 같은 일이 이다지도 심할 줄이야! 더욱이 朝代記의 이름이 古朝鮮秘記, 지공기(誌公記), 삼성밀기(三聖密記) 등의 책과 함께世祖가 내린 求書의 諭示에도 보이는데 유독 김씨(金富軾)의 세대에 이 책들이 없었더란 말인가!(修三國史 而二千載往聖之遺烈 闕而無述 只以海東三國 歷年長久 古記 文字蕪拙事迹闕亡 前言往事幽昧...... 如彼等語 謀逃其責 至於東川遷都之年而僅有平壤者 本神人王儉之宅也或云王之都王儉等字 當時較今 猶近古五百年 而古記之散亡無徵曾若是其甚耶! 且朝代記之名與古朝鮮秘記誌公記三聖密記等書現於世祖求書之諭 而金氏之世 獨無此書耶 揆園史話 檀君紀)”
滿州族이 기꺼이 中奴의 王朝가 되고자 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당대의 대국에 속하고 싶어 하는 게 사람의 심리다. 高麗가 大帝國이 아니었다면, 朱元璋은 우리나라가 아무리 위대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해도, 우리나라 역사를 원하지 않았다.
蒙汗이 미쳤다고 遼史, 金史에 宋史까지 편찬해주나. 明이 했다. 淸이 遼史, 金史, 蒙史를 썼다면, 이미 宋史로 변한 高麗史를 재분해해서 써야 한다. 遼汗과 金汗이 蒙古에 속하긴 하지만, 蒙古는 자신을 中國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이들 역사책을 써주지 않았다. 거란은 타림분지(塔里木盆地)에, 濊貊族은 柴達木盆地에 집어넣고, 高麗軍의 침공을 방어하라 한 蒙汗이 아닌가.
蒙汗에게 있어 유일한 목표는 高麗에 기생해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다. 明이 쓰면서 우리나라 역사를 다 집어 넣었으니까, 明 아닌 다른 나라를 끌어들인 것이다. 그래야 蒙汗 아니 元이 中國의 王朝라고 왜곡할 수 있지 않은가. 中土는 蒙汗의 일부다. 내리 5 천년을 우리나라 속국으로 산 땅이다. 어떤 나라도 그런 中奴의 일부가 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蒙汗도 그랬다. 그래서 未開 中土를 봉쇄해 버렸던 것이다.
우리나라 피지배종족은 예외없이 배달과 朝鮮의 후손으로 자처했다. 그러므로 이들 피지배종족은 寧古塔만이 아니라, 朝鮮時代의 지명을 다 애용할 수 있다. “눌현(訥縣)은 지금 常春 朱家城子”가 아니다. 訥縣은 洛陽이다. 太白逸史는 이미 李成桂와 朱元璋이 역사를 날조한 이후에 찬한 책이다. 太白逸史에 나오는 地理比定은 축소된 강역 위에서 헤매고 있다.
淸은 遼水를 세 차례나 밀어내고, 西鴨綠江을 두 차례나 밀어 내면서 다섯 번이나 李氏朝鮮의 땅을 갈취했다. 明과 李氏朝鮮에서 영토 약탈 및 역사 약탈 수법을 다 배웠기 때문이다. 제 종족 이름으로 삼은 滿州 까지도 밀어낸 淸이 무엇을 밀어내지 못할 것인가. 寧古塔이 滿州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닝안현성(寧安縣城)에 있다고?
임진정왜도(壬辰征倭圖) 중에서
李氏朝鮮이 明의 거만을 꺾을 수 없었던 것은 약점이 잡혔기 때문이지, 군사력 때문이 아니었다. 明의 전력은 형편 없었다. 中國의 실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明의 海禁措置다. 朱元璋은 반대파(?)와 결탁하여 자신을 공격 할까봐 두려워 바다에 나가 倭寇와 접촉하는 것을 금하는 海禁措置를 취했다. 倭寇가 온다한들 몇 명이나 온다고 海禁措置 까지 필요 했던가. 韓半島에도 한 번에 많아봐야 고작 수만 명 밖에는 오지 못했다.
明은 壬辰倭亂 때 도우러 왔다면서 장수들은 하나같이 뇌물에 넘어가 倭와 결탁하고 병사들은 전투 중에 쭈그리고 앉아 졸았던 그런 나라다. 亂中日記와 明의 從軍 畵家가 그린 생생한 그림(壬辰征倭圖)으로 남아 있다.
그런 明이 어째서 李氏朝鮮을 도왔는가. 李氏朝鮮 아닌 다른 나라가 들어서면, 李成桂 처럼 협박해 上國 노릇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李成桂의 후손이 아니면 누가 明을 天子國으로 떠받든단 말인가. 中國에 事大함을 참을 수 없으면서도 매번 한단사(桓檀史)를 말살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얼마나 朝鮮의 계승국을 자처하고 싶었는데, 도리어 한단사를 말살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다 焚書하지 못하고 王宮에 숨겨둔 것을 日本이 빼돌린 것이다.
李氏朝鮮의 王들은 어째서 天文觀測에 狂的 이었나. 天孫民族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九夷니, 九黎니, 九桓이니 했지만, 진정한 朝鮮의 자손은, 天孫民族은 한민족 뿐이었다. 천문관측은 천손민족인 우리나라만 했던 것이다. 천문관측한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한민족이라는 증거였다. 朝鮮의 후예라고 믿고 싶었기에 李成桂와 그 후손들은 광적으로 천문관측에 매달렸던 것이다.
원래 李成桂는 중국 대륙은 자신이 갖고 同族 숙여진 에게는 동북아를 줄 생각 이었다. 李成桂의 계획이 실현됐다면, 韓半島는 濊貊族의 나라가 되었다.
李成桂는 天子가 될 생각 이었던 것이다. 李成桂 역시 우리나라 영토와 역사를 가지기 원했던 수많은 미개 유목민 중의 하나였다.
4) 요약본 단군세기는 이씨조선 때 썼다
檀君世紀를 썼다는 1363년은 恭愍帝 13년[檀君世紀 마지막에 “檀君紀元 원년 戊辰부터 금상폐하의 천조(踐祚) 후 12년 癸卯에 이르기까지 약 3616년(自檀君紀元元年戊辰至今上踐祚後十二年癸卯凡三千六百十六年也)”이라고 했다. 朝鮮 개국 으로부터 3616년이 되는 시기는 恭愍帝 13년이다]으로 한참 국토 수복 준비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다. 그렇다면 高麗에 高麗다움이 있어, 국토회복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은가. 그런데 檀君世紀 序를 보면, 완전 高麗가 망하기 직전에 처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夫餘는 부여 스스로의 길을 잃었으니 그 뒤에는 漢族이 부여에 쳐들어와서 점령해 버렸고, 高麗는 고려대로 길을 잃었으니 그 뒤에는 蒙古가 고려에 쳐들어와서 차지해 버렸다. 만약 그때에 이보다 먼저 부여에 부여다움이 고스란히 있었다면 漢人은 자기 나라로 돌아갔을 것이고, 고려에 고려다움이 있었다면 몽고사람들은 몽고로 돌아갔을 것이다 (夫餘無夫餘之道然後漢人入夫餘也高麗無高麗之道然後蒙古入高麗也若其時之制先而夫餘有夫餘之道則漢人歸其漢也高麗有高麗之道則蒙古歸其蒙古也 檀君世紀 序)
우선 蒙古는 武力으로 高麗 땅을 차지한 것이 아니다. 高麗가 권력다툼에 빠졌을 때, 賣國奴가 高麗 땅을 가지고 蒙汗으로 튄 것 뿐이다.
여기서 夫餘는 北夫餘를 가리킨다. 漢나라의 劉徹(B.C. 156~B.C. 87 날조사의 漢武帝)이 쳐들어와 패퇴하고 침략군 사령관 순체(荀彘), 양복(楊僕), 사신 공손수(公孫遂), 위산(衛山) 등을 기시형(棄市刑)에 처한 것을 두고, 정반대로 漢나라가 점령했다고 한 것이다. 날조한 漢四郡을 보고 쓴 대목이다.
정말 劉徹이 漢四郡을 설치 했다고 날조 했을까. 전쟁에 패한 劉徹이 漢四郡을 뒀다고 날조한다고 해서 무슨 위안이 되는가. 조소와 멸시나 받는다. 역사날조는 침공의 명분만 제공할 뿐이다.
樂浪은 中土에서 西南이라 부르던 나라다. 樂浪은 中土의 서남쪽에 있었다. 漢의 劉徹이 西南夷와 교류하기 위해 굉장히 노력했다는 史記의 기록이 무슨 말이겠는가. 樂浪을 끌어들여 당시의 열세를 조금이나마 만회해 보려고 한 것이다. 樂浪, 帶方, 玄兎, 臨屯의 漢四郡을 설치했다면서 그 樂浪과 교류하기 위해 굉장한 노력을 들였다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漢四郡은 明 때 날조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國號가 夫餘로 바뀐 것은 기원전 425년 大夫餘로 바꾸고 부터다. 劉徹이고, 노관(盧綰)이고, 배천(裵川)이고 간에 우리나라는 漢나라 군대를 언제나 격퇴 시켰다. 衛滿도 우리나라 사람에게 죽었다.
무엇보다 中奴를 漢族이라 부른 것은 朱元璋이 中土에서 빠져나와 역사날조한 이후의 일이다. 그리고 蒙古는 몽고고원에 없었다. 중앙아시아에 있다가 서쪽을 정복했다. 그러니 蒙古人이 돌아갈 곳은 蒙古가 아니라 중앙아시아였던 것이다.
요컨대 저 내용은 역사를 날조한 李氏朝鮮이나 쓸 수 있는 내용이다.
얼마 전에는 잠이나 청과 같은 무리들의 못된 의견들이 몰래 수많은 귀신들처럼 어두운 세상을 덮었다.
임승국(林承國) 선생은 오잠(吳潛)과 유청신(柳淸臣) ?~1329)이라 했다. 알려진 바로는 柳淸臣은 吳潛과 함께 高麗에 征東省을 설치할 것을 蒙汗에 건의하는 등 반역행위를 자행 하다가 귀국하지 못하고 9년간 蒙汗에 머물다가 1329년(임승국의 한단고기에는 1326년이라 나온다)에 죽었다. 그렇다면 1320년 부터 高麗 국내에서 사라진 인물이다. 吳潛에 대한 설명은 더욱 가관이다. 1323년에 蒙汗 황제에게 高麗의 국호를 폐하고, 元나라의 1 개 지방관서로서 行省을 설치할 것을 청원 하다가 귀양 간 인물 이라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太白逸史에 나온다. “행촌(杏村) 이시중(李侍中) 암( 嵒 1297~1364)은 일찌기 권신의 무리가 국호를 폐하려 하자, 이를 만류하고 청하여 行省의 의를 세웠으니, 그 소(疏)의 략에 이르기를 하늘 아래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나라를 가지고 나라를 삼고 또 각각 그 풍속을 가지고 풍속을 삼는다. 國界를 허물지 말라. 민속 역시 섞지 말라. 하물며 우리나라는 한단(桓檀) 이래로 모두 천제의 아들을 칭하고, 제천을 행하는 일 있어, 절로 분봉하는 제후와 근본이 서로 갖지 않다(杏村李侍中嵒嘗疏沮權臣輩欲廢國號而請立行省之讓其疏略曰天下之人各以其國爲國各以其俗國界不可破也民俗亦不可混也況我國自桓檀以來皆稱天帝之子祭天之事自與分封諸侯元不相同 太白逸史).”
高麗에 기생하면서 蒙汗이 高麗 皇帝를 갈아 치우고, 高麗의 國號를 폐하고 말고 할 수 있는가. 高麗의 영토는 長城 이남과 동북아 까지다. 그 땅을 蒙古가 하나의 지방관서로 삼을 수 있는가. 타림분지와 채달목분지는 싫다고, 거란과 濊貊族을 살게 하고, 蒙汗은 고작 현 黃河 하류 이북에서 살았다.
高麗는 대제국이다. 그런 高麗의 황제가 후계자도 지명하지 않고, 蒙汗이 高麗 皇帝를 선택하게 내버려 뒀을까. 나라를 이끌고 나갈 太子는 일찌감치 지명해서 장래의 皇帝로서 수업을 시킨다. 高麗 皇帝가 祖父의 나라 蒙汗을 사랑해서 고려 황제까지 선택하게 방치할 정도라면 어째서 高麗를 蒙汗에 합병 시키지 않았는가. 高麗를 이용하기 위해 여자를 내세워 대대로 附馬로 삼았던 蒙汗이다. 高麗皇帝를 선택하는 대신 高麗를 집어 삼키는 쪽이 더 이익 아닌가. 아무리 혈족이라 해도 영토와 권력이 개입되면 극히 계산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中土 에서는 형제끼리도 죽이고, 아비까지 죽인 후 나라를 차지했던 것이다.
“지금 다른 나라 사람들이 간섭하는 정치는 갈수록 심해져서, 임금님을 바꾸고 다시 앉히기도 하며 대신을 마음대로 임명하기도 하는 등, 멋대로 설쳐대고 있어도 나와 같은 나라의 기둥 되는 신하라는 사람들은 손을 맞잡고 앉아있을 뿐, 그 대책이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今外人干涉之政去益滋甚讓位重祚任渠弄担如我大臣者徒束手而無策何也 檀君世紀 序)” 李 嵒이 恭愍帝 때의 인물 이라면 절대 쓸 수 없는 말이다.
恭愍帝는 즉위 원년부터 강력한 排蒙政策을 실시했다. 사실상 蒙汗이 高麗의 정치에 간섭할 수도, 대신을 마음대로 임명할 수도, 더구나 임금을 바꿀 수도 없었다. 高麗史에는 “宰樞(宰相)부터 吏胥(최하 관리)까지 사람마다 활 하나, 화살 쉰 개, 칼 한 자루, 창 하나를 갖추게 하여 사열했다(宰樞至吏胥人備弓一矢五十劒一戈一閱 高麗史)”고 했다. 蒙古干涉期에 高麗는 開京을 지키는 치안 유지군만 있었다? 그런 高麗를 어째서 蒙汗은 합병하지 않았던가. 고작 사막과 고원지대로 만족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여자를 내세워 高麗를 지배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濊貊族도 高麗를 집어삼켰다.
날조사에서는 忠宣帝 7 개월 만에 忠烈帝가 복위하고 忠宣帝는 蒙汗에 10년간 머물다가 다시 즉위했다. 忠肅帝도 忠惠帝에게 양위 했다가 2년 만에 복위했다. 임금을 바꾸고 다시 앉힌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임금이 양위하고 복위하자, 여기에 살을 붙여 蒙汗이 갈아 치웠다고 날조한 것이다.
檀君世紀 序에는 “紅杏村의 늙은이가 江都 海雲堂[江都 海雲堂. 임승국 선생은 江都가 江華島라고 한다. 원래 江華道는 행정구역이지, 섬이 아니라고 전술했다. 江都가 강화도가 되기 위해서는 江都가 아닌, 江道이어야 한다. 날조했다면, 江島라고 했을 것이다. 江都가 강화道이던 아니던 섬이 아니다. 海雲堂도 바다의 구름이 보이는 (섬에 세운) 집이 아니다. 그 옛날 강을 바다라 부른 것처럼 강도는 강을 끼고 있는 지역이었다. 해운당은 강가에 세운 집에 붙인 이름이다]에서 쓰다(紅杏村수書于江都之海雲堂)”라고 자신을 밝힌 게 전부다. 檀君世紀에는 이암(李 嵒) 이라는 말이 없다. “나라의 기둥 되는 신하”가 아니라, “나와 같은 나라의 기둥 되는 신하”라 쓴 것은 “지금 다른 나라 사람들이 간섭하는 정치는 갈수록 심해져서, 임금님을 바꾸고 다시 앉히기도 하며 대신을 마음대로 임명하기도 하는 등, 멋대로 설쳐대고 있”던 당시에 ‘나도 있었는데, 똑같이 무력했다’는 자책이다. 李 嵒이 忠宣帝, 忠肅帝, 忠惠帝 때 사람이어야 쓸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李 嵒은 恭愍帝 때 사람이다. “檀君紀元 元年 戊辰 부터 금상 폐하의 천조 후 12년 癸卯에 이르기까지 약 3616년”이라고 檀君世紀 맨 마지막에도 나와 있다. 그러므로 그냥 “나라의 기둥 되는 신하”로 써야 한다. 그러나 檀君世紀 序를 李氏朝鮮에 들어와 쓰면서 高麗時代에 쓴 것으로 날조 했다면, “나와 같은 나라의 기둥 되는 신하라는 사람들은 손을 맞잡고 앉아 있을 뿐”이라고 반드시 썼다.
檀君世紀 序文과 本文의 어조 차이도 주목해야 한다. 檀君世紀 序는 감정이 격앙된 상태에서 썼지만, 本文은 전혀 아니다. 물론 序文 이라는 특성상 감정을 노출하고 本文 에서는 감정을 억제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檀君世紀의 본문 내용은 그보다 더해서, 완전히 요점 정리 형식으로 기술되어 있다. 감정억제는 커녕, 장대한 한단사를 다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간단하게 요약해놓은 글이다.
결정적으로 太白逸史에 보면, “檀君世紀에서 말한다.”며 檀君世紀에서 인용한 글이 나온다.
‘엄지손가락을 교차시키고 바른손을 올린 뒤에 삼륙대례(三六大禮)를 행한다.’ 엄지손가락을 교차시킴은 바른 엄지는 자(子)를 나타내고, 왼엄지는 해(亥)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른손을 더함은 태극(太極)의 형상을 만드는 것이다. 옛날에는 꿇어 앉기에 앞서 반드시 먼저 읍(揖)을 한 후 꿇어 앉았으니 바로 보통의 예의이다. 읍은 이를 가리켜 취(聚)라 한다. 마음을 모아 하늘을 생각한다. 꿇어앉음은 순(順)이다. 기를 순하게 하고 무릎을 합쳐서 땅에 감사하는 것이다. 배(拜)는 헌(獻)이다. 몸을 바치고 머리를 땅에 대며 선조에 보답하는 것이다. 헌은 또 현(現)이라고도 한다. 머리가 손에 닿는 것을 배수(拜手)라 하고 머리가 땅에 이르름을 고두(叩頭)라 한다. 고두는 곧 이마가 땅에 닿도록 머리를 굽혀 절하는 것이다 (檀君世紀曰交拇加右手行三六大禮交拇子右拇點子左拇點亥而加右手作太極形也古者跪必先揖也拜必先揖而跪也乃禮之常也揖之爲言聚也聚心拱手而念天也跪者順也順氣合膝而謝地也拜者獻也獻身叩頭而報先也獻一作現也頭至手曰拜手頭至地曰叩頭叩頭卽稽顙也 蘇塗經典本訓)
문제는 한단고기에 실린 檀君世紀에 저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을보륵(乙普勒)은 엄지손가락을 교차시켜 바른손을 올려놓아 삼육대례(三六大禮)를 행한 다음에 나아가서 말씀드렸다(普勒交拇加右手行三六大禮而進言 檀君世紀).” 丁巳 2년 3월 16 일, “檀帝께서 친히 행차하시어 경배하시니 첫 번째 절에 세 번 머리를 조아리고 두 번째 절에 여섯 번 머리를 조아리고 세 번째 절에 아홉 번 머리를 숙여 예를 올리는데, 무리를 거느리고는 특별히 열 번 머리를 조아렸다. 이를 삼육의 대례라고 한다(丁巳二年......三月十六日也帝親幸敬拜初拜三叩再拜六叩三拜九叩禮也從衆特爲十叩是爲三六大禮也 檀君世紀).”가 전부다.
高麗 시대까지 우리나라는 立式生活을 했으므로 꿇어앉지 않았다. 물론 朝鮮 시대에는 좌식생활을 했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입식생활을 했다고 해도 지극한 공경의 뜻을 표시했을 때는 꿇어앉았을 수도 있고. 三六大禮가 꿇어 앉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엄지 손가락을 교차 시키고 바른손을 올린 뒤에 삼륙대례를 행한다. 엄지손가락을 교차시킴은 바른 엄지는 자(子)를 나타내고, 왼엄지는 해(亥)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른손을 더함은 태극의 형상을 만드는 것이다.”까지는 한단고기에 실린 檀君世紀의 三六大禮로 볼 수 있다. 太白逸史에 소개된 三六大禮는 坐式生活한 濊貊族의 三六大禮 방식 인지도 모르겠다. 결론적으로 한단고기에 실린 檀君世紀는 原本이 아니고, 要約本 이었던 것이다.
高麗 시대에는 방대한 분량의 한단사가 넘쳐났다. 李氏朝鮮은 존속하는 내내 이 책들을 분서하느라 바빴다. 일본이 훔친 한단 역사책만도 51 種이다. 그러니까 檀君世紀는 나라가 위기에 빠져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쓴 글조차 아니다.
檀君世紀 序를 쓴 것은 역사가 날조된 李氏朝鮮 때다. 그렇다면 檀君世紀 요약본 역시 高麗 시대가 아니라, 李氏朝鮮 때 썼다는 결론이다.
어째서 요약본을 만들고, 實名을 밝히지 않았나. 求書(?)의 諭示 때문이다.
예종 1년 9월 18 일(戊戌), 예조에 전교하기를,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誌公記), 표훈천사(表訓天詞), 삼성밀기(三聖密記), 도증기(道證記), 지이성모하사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文泰)·옥거인(王居仁)·설업(薛業) 세 사람의 기(記) 1 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 지화록(地華錄), 명경수(明鏡數) 및 모든 천문·지리·음양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집에 간수하고 있는 자는, 경중(京中)에서는 10월 그믐날 까지 한정하여 승정원(承政院)에 바치고, 외방(外方)에서는 가까운 도(道)는 11월 그믐날 까지, 먼 도(道)는 12월 그믐날 까지 거주하는 고을에 바치라.
바친 자는 2 품계를 높여 주되, 상 받기를 원하는 자 및 공사 천구(公私賤口)에게는 면포 50 필을 상주며,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진고(陳告)를 받아들여 진고한 자에게 위의 항목에 따라 논상(論賞)하고, 숨긴 자는 참형에 처한다. 그것을 중외(中外)에 속히 유시하라” 하였다(睿宗己丑九月 傳于禮曹曰 周南逸士記.誌公記.表訓天詞.三聖密記.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文泰王居仁薛業等三人記一百餘券.壺中錄.地華錄諸書.明鏡數及天文地理陰陽諸書 家藏者 京中 限十月晦日 呈承政院 外方 近道十一月晦日 遠道十二月晦日 納所居邑 納者 超二階 不納者 許人陳告 告者 依上項論賞 匿者 處斬 其速諭中外 睿宗實錄)
한단사 등을 숨긴 자는 참형(斬刑)에 처한다. 그렇다면 한단 역사책을 편찬한 자는 어떻게 되는가. 일가친척 까지 다 죽었을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이른바 三族을 멸하는 것이다. 斬刑에 처한다는 협박은 협박으로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求書의 諭示가 아니었던 것이다.
祖上이 檀君世紀를 썼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후손들 까지 다 위험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실명 대신에 “紅杏村의 늙은이가 江都 海雲堂에서 쓰다.”고 고쳤다. 그리고 대대로 자손들에게만 조상이 썼다고 얘기했던 것이다.
檀君世紀 要約本은 李陌이 한단고기를 찬하기 이전에 만들었을 것이다. 李陌이 쓴 太白逸史는 날조사와 실사가 섞여 있는데, 檀君世紀는 요약본이긴 해도 實史다. 檀君世紀가 발각되면, 가족이 위험해 지니까, 당장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최소한의 단서만을 남긴 요약본을 만든 것이다.
原本 檀君世紀는 한없이 위대한 민족사라는 사실을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동아시아를 무대로 벌어진 역사라고 기록했던 것이다. 李氏朝鮮은 이미 이유(李瑈:世祖라고 불리는 濊貊族) 이전에 檀君世紀를 求書의 諭示에 포함시켜 혈안이 되어 수거했던 것이 분명하다.
檀奇古史라는 날조 한단 역사책이 증명하고 있다. 檀君世紀를 날조해서 쓴 檀奇古史는 사람들이 생각하듯 위대한 역사가 아니고, 한없이 초라하게 축소된 날조사다. 그것마저 위대한 역사로 보일 지경이면, 우리나라 역사가 얼마나 축소됐는지 알 수 있다.
濊貊族이 우리나라를 지배했던 李氏朝鮮 때, 우리민족은 실사를 남기기 위해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의 생명까지 담보해야만 했던 것이다. 역사를 남기기 위해 그토록 치열하게 살아야 했던 것이다.
5) 단기고사는 단군세기를
이씨조선의 시각에서 날조한 위서다
李氏朝鮮末 유응두(柳應斗)가 중국의 한 서점에서 발견하고 입수했다는 檀奇古史는 대야발(大野勃)이 쓰지 않았다. 檀君世紀와 番韓世家를 李氏朝鮮의 시각에서 철저하게 뜯어고친 위서다.
한단고기(桓檀古記)에 실린 檀君世紀는 원본을 요약한 것이다. 檀奇古史는 前檀君朝鮮, 後檀君朝鮮, 奇子朝鮮으로 나뉘는데, 그 실체는 檀君世紀와 番韓世家다. 檀君時代의 역사를 썼는데, 내용이 같은 게 당연하지 않는가 하겠지만, 문제는 같은 내용 일부를 제외하면, 모조리 엉터리라는 것이다. 檀奇古史에는 中土에서 冊曆을 구해간 사실이나 우리나라가 책력을 만든 사실이 은폐되어 있다. 中土와 관련 되었다 하면 정반대로 기술하여 中奴 치켜 세우기에 바쁘다. 현대적인 내용에, 주변국사의 연대가 엉터리고, 朝鮮史를 빌어 李氏朝鮮史를 얘기하고 있다. 그 외에도 온갖 문제를 가지고 있는 위서다.
檀奇古史가 원본 檀君世紀를 철저히 날조한 책이라는 사실은 양자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우선 서술형식 부터 똑같다. 연도, 기사 순으로 썼는데, 檀奇古史는 (즉위)원년, 2년, 3년 식으로 甲子를 빼버리고, 檀君世紀는 己亥 元年, 庚子 2년, 辛丑 3년 식으로 연도 앞에 甲字가 붙는다. 여기서는 같은 내용을 기술 하면서도 檀奇古史가 엉터리임을 살펴보자.
1世 檀君 王儉
125년 7월 5 일에 셋째 아들 부우(扶虞)를 江華에 보내 傳燈山에 三郞城을 쌓게 하시며, 祭天壇을 마니산(摩尼山)에 쌓고 하느님께 제사하시니, 동방민족이 하느님께 제사하는 풍속은 始祖 檀帝 때부터 시작되었다(檀奇古史)
戊午 51년(B.C. 2283) 임금께서 운사(雲師)인 배달신(倍達臣)에게 명하여 혈구(穴口)에 삼랑성(三郞城)을 짓고 祭天의 壇을 마리산(摩璃山)에 쌓게 하였으니 지금의 참성단(塹城壇)이 바로 그것이다(戊午五十一年帝命雲師倍達臣設三郞城于穴口築祭天壇於摩璃山今塹城壇是也 檀君世紀)
우리나라 始祖는 한인(桓因) 안파견(安巴堅)이고, 國祖는 한웅(桓雄) 居發桓이다. 檀君王儉은 中祖다.
檀君王儉 재위 51년 째 기술이 檀奇古史에는 125년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1 세 王儉 맨 앞에 ‘93년간 재위’라고 표기해 두었다. 125년은 틀릴 수 있다고 하자. 그런데 본문 에서도 “임금께서 천하를 다스리신지 120년에 나라는 태평하고 백성은 안락하며….”라고 쓰고 있다. 檀君王儉은 천하를 93년간 다스렸다. 檀君王儉은 辛卯(B.C. 2370)年 5월 2일 寅時에 탄생했다. 14세 되던 甲辰(B.C. 2357)年, 熊氏의 왕이 손자 檀君王儉을 裨王으로 삼았다. 비왕의 자리에 24년, 제위에 93년간 있었고, 130세 까지 壽를 누리다가 기원전 2241년에 붕어 하셨다. 그런데 檀奇古史에는 “150년에 임금께서 세상을 뜨시니 왕위에 계신 지 57년이며 제위는 93년이다.”고 엉터리 말을 하고 있다.
2世 檀君 扶婁
임금께서 太子가 되었을 때 中華의 백우(伯禹)와 더불어 친선하다가, 임금께서 왕위에 오르니, 禹도 舜의 자리를 대신하여 王이 되었다. 그때에 홍수가 9년 동안 천하에 범람하여 中華는 禹가 치수하는데 곤란을 겪고, 朝鮮은 彭吳에게 治水를 맡겨 치수가 완료되니, 우(禹)가 塗山會議를 각 나라에 요청 하였다. 임금께서는 彭吳를 특명대사로 삼아 禹에게 보내어 治水하는 법을 설명하셨다.(檀奇古史)
甲戌 67년(B.C. 2267) 檀君께서 태자 부루(扶婁)를 파견하여 도산(塗山)에서 우사공(虞司空)과 만나게 하였다. 태자는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을 전하여 주었다.
회대지방의 제후들을 평정하여 분조를 두고 이를 다스렸는데 우순(虞舜)에게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丁巳 50년(B.C. 2284) 홍수가 크게 나서 백성들이 쉴 수가 없었다. 단제께서는 風伯인 팽우(彭虞)에게 명하여 물을 다스리게 하고 높은 산과 큰 강을 평정하여 백성들을 편하게 하였으니 우수주(牛首州)에 그 비석이 있다(甲戌六十七年帝遣太子扶婁與虞司空會于塗山太子傳五行治水之法 淮岱諸侯置分朝以理之使虞舜監其事 丁巳五十年洪水汎濫民不得息帝命風伯彭虞治水定高山大川以便民居牛首州有碑 檀君世紀, 1世 檀君王儉條에 있다)
禹가 시조인 夏나라의 개국연대는 불확실하다. 기원전 2070년 부터 기원전 2183년 등으로 제각각이다. 하지만 2世 檀君 扶婁는 기원전 2240년에 즉위했다. 그러니까 扶婁가 檀君으로 즉위했을 때, 夏나라는 아직 등장하지도 않았다. 夏나라의 개국연대는 불확실 하니까 기원전 23 세기에 세운 나라라고 해주자.
그런데 洪水가 9년 동안 천하에 범람해도 건조 기후대인 티벳고원은 汎濫할 수 없다. 또 洪水가 난 해로부터 五行治水法을 전해준 것은 17년 뒤다. 9년간 홍수가 났다고 했으니, 홍수가 끝나고도 8년이나 지났다. 朝鮮에서는 洪水가 났지만, 中土에서는 가뭄으로 난리였던 것이다(太子 扶婁가 전해준 五行治水法은 灌漑農事法이었다).
朝鮮의 홍수는 우(禹)가 왕노릇할 때가 아니라 우순(虞舜)이 왕으로 있을 때 발생했다. 塗山會議를 열 때 우(禹)는 司空 이라는 中土의 관리 신분이라 회의소집을 요청할 수가 없었다. 우순(虞舜)이 上國에 애로점을 上伸하자, 檀君王儉이 塗山會議를 소집한 것이다. 彭虞가 사공 우(禹)에게 五行治水法을 알려준 것이 아니라, 太子 扶婁가 문서로 된 五行治水法을 전해주었다.
4世 檀君 오사구(烏斯丘)
그 해 가을에 夏나라 사절이 입조하였다(檀奇古史)
가을 8월에는 夏나라 사람이 찾아와서 특산물을 바치고 神書를 구해갔다(秋八月夏人來獻方物求神書而去 檀君世紀)
어째서 檀奇古史에는 夏나라가 神書를 구해갔다는 말을 누락 시켰을까. 5世 檀君 丘乙 5년 봄에 夏나라 학사 두 사람이 曆書[와 두건갑자기(斗健甲子記)]를 가지고 왔다고 해야 했기 때문이다.
檀奇古史는 烏斯丘 檀帝 20년에 平壤城을 쌓았다고 했지만, 平壤城을 쌓은 해는 朝鮮 개국 10년째다.
5世 檀君 구을(丘乙)
16년에 임금께서 고역산(古曆山)에 행차하시어 祭天壇을 쌓으시며 주변에 槿樹(무궁화 나무)를 많이 심었다(檀奇古史).
丁丑 16년(B.C. 2084) 친히 장당경(藏唐京)으로 행차하셔서 三神의 壇을 봉축하고 많은 한화(桓花 무궁화꽃)를 심었다(丁丑十六年親幸藏唐京封築三神壇多植桓花 檀君世紀)
檀奇古史에는 古曆山에서, 檀君世紀에는 藏唐京에서 제사지낼 단을 쌓았다. 寧古塔에서도 제사를 지냈으니까, 藏唐京에서도 제사를 지냈을 것으로 본다. 古曆山은 檀奇古史에도 딱 한 번 나올 뿐이다.
7월에 임금께서 비류강(沸流江)을 지나 강동에서 승하하시니 거기에 장사하였다.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 6世 檀帝시다(檀奇古史).
7월 檀帝께서 남쪽을 순수하사 풍류강(風流江)을 건너 송양(松壤)에 이르러 병을 얻으시니 곧 붕어하시어 대박산(大博山)에 묻혔다. 우가(牛加)인 달문(達門)이 뭇사람으로부터 뽑혀 大統을 계승하였다(七月帝南巡歷風流江到松壤得疾尋崩葬于大博山牛加達門被選於衆入承大統 檀君世紀)
붕어하신 장소도 틀리고, 장사지낸 장소도 틀리다. 6世 檀君 達門이 檀奇古史에는 太子이고, 檀君世紀에는 선출되었다. 揆園史話에도 檀君의 血統이 갈린 것을 숨기고 單一血統으로 기술하고 있다. 李氏朝鮮이 병적으로 李成桂의 血統에 집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李氏朝鮮은 賣國奴의 血統을 엄청나게 확산시켰다.
10世 檀君 노을(魯乙)
2년에 이아한(伊阿漢)을 숙정처장(肅政處長)으로 삼아 고시(考試)로 인재를 뽑았다(檀奇古史).
壬辰 2년 몸소 마을로 행차하셔서 안부를 물으셨는데, 어가(御駕)가 야외에 머무르니 賢者들이 많이 주위에 몰려 들었다(壬辰二年親臨墟落存問駕停野外賢者多歸之 檀君世紀)
16년에 동문 밖의 육지에서 연(蓮)이 나고, 長白山에서는 누운 돌이 일어나고, 渤海에 용귀(龍龜)가 나타나고, 黑水 강가에 金塊가 노출되니 그 수량이 열 한 섬이나 되었다(檀奇古史).
丙午 16년 동문 밖 십리의 육지에서 연꽃이 피어나더니 질줄 모르고, 누워있던 돌들이 저절로 일어섰다. 발해 연안에서 금덩이가 나왔는데 수량이 13 섬 이었다(丙午十六年東門外十里陸地生蓮不咸臥石自起…渤海沿岸金塊露出數量十有三石 檀君世紀)
누운 돌이 일어선 것은 지진현상이나 지중에서 부터의 힘이 작용해서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돌이 일어선 장소도 틀리고, 금덩이가 나온 장소와 수량도 틀리다. 長白山은 후대의 이름이다. 그것도 華夏式 이름이다. 南北國時代 까지도 白山이라 불렀다. “뒤에 한웅씨(桓雄氏)가 계속하여 일어나 天神의 뜻을 받들어 白山과 黑水 사이에 내려왔다(後桓雄氏繼興奉天神之詔降于白山黑水之間 三聖紀全 上篇)."
11世 檀君 道亥
첫 해에 유위자(有爲子)를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삼았다. 有爲子가 임금께 아뢰기를 “우리 천제국은 신조(神祖)께서 종교를 창립하여 국교로 삼으시고 백성들이 다 숭배하며 우러러 믿었으나, 세월이 가고 사람도 가니, 경(經)이 쇠잔해지고 교(敎)가 무너졌습니다. 백성이 신교(神敎)의 진리를 알지 못하고, 형식에 흘러 음탕한 짓을 마음대로 하며 미신에 빠져, 그 해로운 영향이 국정에 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엎드려 비옵기는, 전하께서는 종교를 혁신 하시어 다시 본래의 뜻으로 돌아오게 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종교를 진실하게 믿고 음란하고 겉치레를 일삼는 재앙에 떨어지지 말게 하옵소서.”하였다. 임금께서 이 말을 따라 종교를 크게 혁신하고 신앙을 바로 잡아 다시 성실하고 순박한 마음으로 돌아오게 하시니, 이때가 종교의 중흥시대가 되었다(檀寄古史).
國子郞의 스승으로 있던 유위자(有爲子)가 계책을 올려 말하길,'생각하옵건대 우리의 신시(神市)는 실로 한웅천왕(桓雄天王)께옵서 開天 하시고 무리를 거두심에 온전하게 하는 것으로 가르침을 세워서 백성들을 교화 하셨습니다. 이에 천경신고(天經神誥)는 위에 조술(詔述)하신 바요 의관대검(衣冠帶劒)은 기꺼이 밑으로 본을 보이는 것이니, 백성들은 범하는 일 없고 함께 다스려져 들에는 도적 떼도 없이 스스로 평안 하였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은 병도 없이 장수하며 주리는 이 없이 풍요로우니, 산에 올라 노래 부르며 달을 맞아 춤추었습니다. 먼 곳이라도 이르지 못하는 곳 없고 흥하지 않는 곳이 없게 되었으니 德이 넘치는 가르침은 만백성에게 주어지고, 칭송하는 소리가 四海에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에 뜨거운 정이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國子師傅有爲子獻策曰惟我神市實自桓雄開天納衆以佺設戒而化之天經神誥詔述於上衣冠帶劒樂效於下民無犯而同治野無盜而自安擧世之人無疾而自壽無歉而自裕登山而歌迎月而無遠不至無處不興德敎加於萬民頌聲溢於四海有 檀君世紀).
有爲子가 檀寄古史 에서는 太子太傅이고, 檀君世紀 에서는 國子郞의 스승이다. 무엇보다 有爲子의 말이 정반대다. 檀寄古史의 말은 李氏朝鮮의 세태에 관한 내용이다.
48년에 조서를 내려, 백성 된 자는 다 병역에 종사하게 하고, 백성이 다 군사 되는 법을 세우시고, 유학생 25 명을 夏나라에 보내어 夏書를 공부하라 하셨다(檀奇古史).
丁卯 38년 백성들 가운데서 장정을 뽑아서 모두 병사로 삼았다. 선사(選士) 20 명을 夏나라 서울로 보내 처음으로 나라의 가르침을 전함으로써 위세를 보였다(丁卯三十八年徵民丁皆爲兵送選士二十人于夏都始傳國訓以示威聲 檀君世紀)
檀寄古史 에서는 학생을 보냈고, 檀君世紀 에서는 스승을 보냈다. 檀奇古史 에서는 연도가 10년 후로 미뤄졌다.
56년에 기계공창을 松花江 기슭에 설치하고 각종 기계를 제조 하였는데, 나라 안에 현상(懸賞)을 걸어 새로운 기계를 발명하는 자는 각각 상을 받게 하였다(檀奇古史).
乙亥 46년 송화강(松花江) 기슭에 관청을 세우니 배와 그에 관계되는 여러 가지 물건이 크게 세상에 퍼졌다(乙亥四十六年設作廳于松花江岸舟楫器物大行 檀君世紀).
檀奇古史는 기계일반, 檀君世紀는 배에 관련된 물건에 관한 내용이다. 檀奇古史는 연대가 10년 뒤로 밀리고, 懸賞公募까지 하고 있다.
12世 檀君 阿漢
2년 여름에 발이 하나인 짐승이 松花江가에 와서 놀며 슬피 울었는데, 임금께서 有爲子에게 묻기를 “이것은 알지 못하는 짐승인데 발 하나로 뛰어 다니며 슬피 우는구나.” 하시니, 有爲子가 대답하기를 “나라가 장차 흥하려면 반드시 좋은 징조가 있고, 망하려면 반드시 요사스러운 일이 생겨서 신물(神物)에 나타나며 사체(事體)에 움직이고, 禍와 福이 장차 이르게 되면 착한 것도 알게 되며 착하지 못한 것도 알게 될 것이니, 이것은 天地調化의 징조입니다. 이 짐승은 夏나라 남쪽의 양수(陽獸)인데 신명한 물건입니다. 夏나라가 장차 어지러울 것을 미리 알고, 그 난을 피하여 이곳에 와서 슬피 울고 있습니다. 다만 이 짐승만 보아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천도(天道)의 운행을 살피면 만세의 일도 능히 미리 알 수가 있습니다.”하니 임금께서 “夏나라를 대신하여 天子 될 사람이 누구냐.”하시니 有爲子가 대답하기를 “신이 夏나라의 인물을 살피니 夏나라에는 그런 인물이 없고, 다음가는 사람으로는 천을(天乙 : 成湯)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어진 보좌관인 이윤(伊尹)을 얻어 덕행을 길러 그 이름이 세상에 높아졌으니 夏나라를 쳐서 天子(朱元璋에 이르러 中奴가 天子 행세를 했다. 秦始王에 이르러 皇帝 칭호를 처음 썼다고 날조했다)가 된다면 그 자손이 600 여년은 이어나갈 수 있겠습니다.” 임금께서 “그 다음은 누구냐.”하시니, 有爲子 아뢰기를 “西夷(여기서 西夷는 周나라를 가리키나, 周나라는 夷가 아니다)에 聖人이 나서 덕을 닦고 은혜를 베풀면 민심이 다시 돌아와 그 어진 분의 보필이 생기게 될 것이니, 그 자손이 왕위를 계승한다면 800년은 이어갈 것입니다.”
임금게서 “내 후손의 성쇠시기는 과연 어느 때인지 그 대략을 묻노라.”하시니, 有爲子 대답하기를 “國家盛衰의 운수는 하늘이 정하게 되어있는 것이므로 사람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백성을 선하게 다스리시어 덕이 萬邦에 넘치니, 나라의 문명정도가 中華를 훨씬 초월 합니다. 그러나 中華가 殷朝에 이르러서는 예악법도가 찬연히 구비될 것이며, 聖賢이 배출되어 경전을 저술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또 여러 학자들이 각각 그 이상을 말하리니, 문화의 향상이 前無後無하여 天下를 휩쓸 것이므로, 萬國이 그 문화를 암오하여, 다투어 그 나라에 와서 배우고 익혀 漢學 전성시대가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전하의 聖子臣孫이 혹 北方에서 터를 보전하며, 혹 東方으로 도읍을 옮기며 혹 南方에서 건국하는 자가 있겠으나, 큰 자는 땅이 수천 리 될 것이며 작은 자는 수 백리 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후손들이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하여 상대를 침략하는 전쟁만 일삼고, 문화는 점점 퇴보하여 조국문자는 돌보지 않고, 慕華思想이 날로 높아져 수천년 후에는 慕華하여 儒學에 미친 사람이 나라 안에 가득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文字는 다 없애고 漢文字만 정용할 것이며, 漢文으로써 우리나라 國名과 王號와 官名과 地名과 모든 물건의 이름을 번역할 것이며, 이름까지 中華 사람의 이름과 같아 우리를 中華 사람으로 알게 되고, 마지막에는 자손들이 그 선조를 잃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장래를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하고 심히 원통한 일입니다. 엎드려 비옵기는, 오직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고 염려하시어 뒷일을 미리 준비하시옵소서.”하였다.
임금께서 “선생은 참으로 千古의 신인(神人)이로다. 능히 半萬年 후의 일을 추측하도다.” 하시고 천하에 조서(詔書)를 내려, 碑石을 나라의 사방 경계에 세우고, 그 비면에 우리나라 문자로 제왕의 이름을 새겨, 영원히 國文을 보전하라 하셨다(檀奇古史).
丁亥 원년(B.C. 1834) 戊子 2년 외뿔 가진 짐승이 松花江 북쪽에 나타나다. 가을 8월 檀帝께서 나라 안을 두루 순수 하였는데 요하(遼河)의 남쪽에 이르르자 순수관경(巡狩管境)의 비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을 새겨 이를 전하게 하셨다(戊子二年夏四月一角獸見於松花江北邊秋八月帝巡國中至遼河之左立巡狩管境碑刻歷代帝王名號而傳之 檀君世紀).
檀奇古史가 기초로 날조한 番韓世家에는 “丙申年(B.C. 925)에 漢水 사람 王文이 이두법(吏讀法)을 지어 바치니 天王께서 좋다고 하시며 三韓에 모두 칙서를 내려 시행하였다(丙申漢水人王文作吏讀法以獻天王嘉之命三韓如勅施行 番韓世家).”는 기사가 있었다. 원래는 漢字를 만들었다는 기사도 있었는데, 중국이 漢字를 발명했다고 날조사에 속아 넘어간 李陌이 그 대목은 빼버렸던 것이다. 그러니까 원본 檀君世紀와 番韓世家를 토대로 작업한 檀奇古史의 날조자들도 우리나라가 漢字를 발명했다는 기사를 봤다. 그럼에도 漢字 발명 구절을 지우고 정반대로 날조했던 것이다.
有爲子는 檀奇古史의 말대로 “반만년 후의 일까지 추측”, 예언, 점찍고 있다. 有爲子는 11世 檀君 道亥 원년에 李氏朝鮮의 세태를 비판하고, 12世 檀君 阿漢 2년에는 점장이가 되었다. 참으로 놀라운 점장이다. 모든 걸 정반대로 말한다니. 有爲子는 13世 檀君 흘달(屹達) 26년에 이르면 宇宙를 논하고 있다. 有爲子가 죽은 것은 屹達 56년 이라고 한다. 有爲子는 檀奇古史 속에서 한 2 백년쯤 살았다.
“스스로를 ‘小中華’라고 뽐내고”(而今 夫 人囂囂然以小華自耀 揆園史話) “小中華를 가지고 스스로 달래며 만족”(小中華自甘宜 太白逸史)했던 李氏朝鮮人이 有爲子의 입을 빌려 한 말이니까, 분석해보면, 李氏朝鮮이 얼마나 초라한 나라인지 알 수 있다. 역사가 말살되면 저렇게 될 수밖에 없다.
九月山 馬韓村에 옛 글자로 된 비석이 하나 있어 범문(梵文)과 비슷한데, 後人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마을 이름은 ‘馬韓’이라 하는데
유난히 빼어난 돌 하나 있었네
깨어진 받침 자리엔 진달래 꽃만 붉고
글자는 어디로 가고 이끼만 푸르고나
천지가 처음 열릴 때 생겨서
나라가 흥하고 망할 때 세우기를 다 하였네.
문헌으로 다 고증할 수는 없으나
이것이 기(奇)씨의 자취가 아니겠는가(村名稱馬韓 別有殊常石 臺荒躑躅紅 字沒苺苔碧 生於剖判初 立了興亡夕 文獻俱無徵 此非奇氏跡 檀奇古史)."
뒤에 저 창해역사(滄海力士) 여홍성(黎洪星)은 이 비석을 지나며 시 한 수를 읊었으니, 다음과 같다.
마을 밖 변한(弁韓)이라 이르는 곳에
다듬어져 처음 생겼을 때 그대로
흥망의 황혼에 우뚝 서있으니
글에 보이는 증거는 하나도 없지만
이 어찌 단군(檀氏)의 자취가 아니겠는가(後滄海力士黎洪星過此題一詩曰 村郊稱弁韓別有殊常石臺荒躑躅紅字沒苺苔碧生於剖判初立了興亡夕文獻俱無徵此非檀氏跡 檀君世紀)
馬韓? 奇氏? 九月山에는 馬韓이 없다. 藏唐京을 기준으로 동태산(東泰山), 西九月山 이었다. 檀奇古史는 辰韓에다 馬韓을 포갠 것이다.
檀君世紀는 “가을 8월 檀帝께서 나라 안을 두루 순수 하였는데 遼河의 남쪽에 이르르자 巡狩管境의 碑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을 새겨 이를 전하게 하셨다. 이것이야말로 金石文의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앞말에 연결되어 있고, 檀奇古史는 다른 내용처럼 기술되어 있다. 奇氏의 자취라면서, 箕子朝鮮 편이 아닌, 12世 檀君 阿漢條에 기록해 놓고 있다. 檀君世紀의 기사를 날조 하면서 내용만 고치고 위치를 옮겨야 하는 것은 그만 깜박했던 것이다.
遼河는 中土와의 경계선 근처 즉 番朝鮮 국경에 있었다. 燕나라 아래에 있었다. 黎洪星은 시를 읊을 당시, 中土에 있었다. 그래서 ‘마을 밖 弁韓이라 이르는 곳에’ 즉 中土 밖에 서 있는 巡狩管境碑를 보고 시를 읊은 것이다.
29년에 처음으로 청아대부(菁莪大夫) 한불배(韓不倍)와 옥저대부(沃沮大夫) 고사심(高士深)과 맥대부(貊大夫) 신돌개(申突盖)에게 명하여 諸侯로 삼아 토지를 주니, 이것이 馬韓과 辰韓과 弁韓이 되었다(檀奇古史).
乙卯 29년 청아(菁莪)의 욕살 비신(丕信)과 서옥저(西沃沮)의 욕살(褥薩)인 고사침(高士琛)과 맥성(貊城)의 욕살인 돌개(突蓋)를 봉하여 왕으로 삼으셨다(乙卯二十九年命菁莪褥薩丕信西沃沮褥薩高士琛貊城褥薩突蓋封爲列汗 檀君世紀).
2世 檀君 扶婁가 扶餘를 망구왕(茫球王)으로 삼고, 셋째아우 扶虞를 東海王으로 삼고, 3世 檀君 가륵(嘉勒)이 가록(嘉祿)을 斯達王으로 삼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突蓋 등은 檀奇古史에서 조차 첫 제후가 아니다. 아마도 菁莪와 沃沮, 貊은 처음으로 王을 배출한 모양이다. 그리고 扶餘와 扶虞를 제후로 삼은 것은 扶婁가 아니라 神人王儉이다. 檀君世紀의 丕信이 檀奇古史에는 韓不倍로, 檀君世紀에는 西沃沮 高士琛이 檀奇古史에는 沃沮 高士深으로 되어 있다. 高士深은 옮기는 과정에서 실수로 추정된다.
三韓은 기원전 1806년이 아니고, 기원전 2241년에 나눈 朝鮮의 管境이다.
13世 檀君 흘달(屹達)
첫 해에 夏나라 신하인 한작(寒爵)이 故國을 회복하고자 하여 군사를 요청하니, 임금께서는 “이것도 하늘의 뜻이니 사람의 힘으로 할 일이 아니라.”하셨다.(檀奇古史)
己卯 원년(B.C. 1782) 이 해 겨울에 은(殷)나라 사람이 하(夏)나라를 정벌하니 하나라 걸왕(桀王)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홀달(屹達) 단제께서 읍차(邑借)인 말량(末良)으로 하여금 구한(九桓)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게 하니, 은나라의 탕왕(湯王)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 이에 末良에게 어명을 내려 군사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夏나라 桀王은 조약을 위배하고 병사를 보내 길을 막고 약속을 깨려고 하였다. 이에 殷나라 사람들과 함께 夏나라 桀王을 정벌하기로 하여 몰래 신지(臣智) 우량(于亮)을 파견하여 견(畎)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낙랑(樂浪)과 합쳐서 진격하여 관중(關中)의 빈(邠), 기(岐)의 땅에 웅거하며 관청을 설치하였다(是歲冬殷人伐夏其主桀請援帝以邑借末良率九桓之師以助戰事湯遣使謝罪乃命引還桀違之遣病遮路欲敗禁盟逐與殷人伐桀密遣臣智于亮率畎軍合與樂浪進據關中邠岐之地而居之設官制 檀君世紀)
20년에 법정학교(法政學校)를 세워, 法政 으로써 백성을 가르쳤다.(檀奇古史)
戊戌 20년 소도(蘇塗)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天指花)를 심었다. 미혼의 자제로 하여금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익히게 하며 이들을 국자랑(國子郞)이라 부르게 하였다. 國子郞들은 돌아다닐 때 머리에 天指花를 꽂았으므로 사람들은 이들을 天指花郞 이라고도 불렀다(戊戌二十年多設蘇塗植天指花使未婚子弟讀書習射號爲國子郞國子郞出行頭揷天指花故時人稱爲天指花郞 檀君世紀)
기원전 1763년에 우리나라 의무교육이 시작된 것이다. 花郞의 시작이었다.
14 대 檀君 고불(古弗)
56년에 전국에 있는 백성의 수를 조사하니, 총 인구가 1 억 8 천 만이었다.(檀奇古史)
乙亥 56년 관리를 사방에 보내 호구를 조사, 계산하게 하니 총계 1 억 8 천 만 인이었다(乙亥五十六年遣官四方査計戶口總一億八千萬口 檀君世紀)
아주 아주 중요한 대목이다. 기원전 1666년의 인구는 1 천 8 백만 명이었기 때문이다. 똑같이 열배로 부풀린 것은 오기가 기록된 책을 보고 썼기 때문이다. 잘못 적힌 책은 원본 檀君世紀다.
檀奇古史는 본문 전편에 걸쳐 시종 현대용어로 되어 있다. 현대에 고치면서 용어를 바꾸었을 수도 있다. 資本論, 植物學, 動物學, 心理學 등은 일반용어니까, 현대용어로 고쳤다고 해도 周易, 禮記, 性理學 등은 고유용어다. 무엇보다 禮記가 나오기 전에 禮記를 진상받고, 孔丘가 태어나기 전에 孔子敎가 출현하고, 性理學이 성립하기 전에 性理學이 등장할 수는 없다.
“(老勿) 2년에 周나라 사람 노진선(魯進善)이 春秋와 禮記를 임금께 바쳤다. 檀奇古史) ” 春秋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禮記는 중국에 없었다. 禮의 이론 및 실제를 논술한 禮記를 티벳고원에 사는 中奴가 어떻게 쓸 수 있단 말인가.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고 살았던 인간들이 무슨 예의범절을 따질 것인가. 날조한 바에 의하면 禮記는 前漢의 대성(戴聖)이 孔丘의 제자 이후 전해 내려오는 禮記 중에서 골라 찬한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가장 오래된 禮記조차 孔丘 사후에 나왔다. 노물(老勿) 2년은 기원전 594년이고, 孔丘는 기원전 552년에서 기원전 479년 까지 살았다.
“모불(牟弗) 8년(B.C. 1067)에 장성자(長成子)가 性理學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매륵(買勒) 30년(B.C. 675)에 우세숙(虞世叔)이 性理學과 心理學을 지어 임금께 바쳤다.” 性理學은 종이 위에서 중국 宋 ·明나라 때 학자들에 의하여 성립된 학설이다. 다시 말해 高麗(918∼1392)에서 만든 학설이다. 기원전 1067년 부터 유행한 학설이 아니다.
老勿 “8년(B.C. 588)에 齊나라 사람 공안명(孔安明)이 孔子敎를 들여와 전하였다.” 孔丘가 태어나기도 전에 孔子敎가 등장할 수는 없다.
“하늘이 허다한 元素로써 만물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있을 수 있으나, 이미 몇 개의 원소가 합하여 물질을 형성한 五行 등이 어찌 또 변하여 다른 물질을 형성할 수 있겠습니까.” 化學이 들어온 후에나 할 수 있는 말이다.
檀奇古史에는 天文學 내용도 상당부분 나오는데, 모두 근대 이후 西洋 天文學이다. 太陽界나 水星 金星 火星 木星 土星 같은 용어 역시 근대에 들어와서야 만들어진 용어다. 서양 천문학이 들어온 李氏朝鮮 후기에나 주장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구을(丘乙) “15년에 監星官 황보덕(皇甫德)이 임금께 아뢰기를 “제가 천문을 관측한 지 50년이 되므로 天體의 대강을 추측 하였습니다. 천체 중에 제일 큰 것은 北極星 같은 항성(恒星)입니다. 그 다음은 太陽의 종류이며, 다음은 水星 金星 地球星 火星 木星 土星 天明星 해명은성(海明隱星) 明星 같은 行星이 있어 太陽을 中樞로 삼아 회전하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도 역시 태양계의 하나인 行星입니다. 해는 땅의 온도를 조화하여 만물의 생장을 돕는 것이며, 지구의 외각에는 붉은 막이 포위하고 있어, 지면의 각종 기체를 보전 함으로써 기체가 발산하지 못하고“
天明星은 天王星이고, 海明隱星은 海王星, 明星은 明王星이다. 明王星은 1930년 1월에 발견 되었고, 檀奇古史는 1949년에 출간했다. 옛날에는 恒星이 太陽인 줄 몰랐다. 서양 천문학이 들어오면서 옛날 것하고 그 당시 최신 것하고 섞여서 들어온 모양이다.
“宇宙는 무한히 광대한 공간과 영원무궁한 시간을 이르는 것이니, 진기(眞氣)가 공간에 충만하여 항상 보편운동이 있어 영구히 윤회상을 지어냅니다. 그러나 혹은 일정한 進化의 과정을 밟아 나가는데, 그 진화의 상태는 늘 그 밀도 변화로 말미암아 생기고, 그 밀도는 계량할 것도 있고 계량 못 할 것도 있습니다.”
우주의 윤회니까 별의 탄생과 進化, 죽음, 超新星 폭발로 인한 중원소의 방출, 그리고 성간가스의 수축과 별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보편운동이라 표현한 것이다.
우주의 진화나 윤회는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 조차 인정하지 않았던 이론이다. 아인슈타인은 정적인 우주를 믿어 자신의 방정식에 우주항을 집어넣었다. 그 후 허블(Edwin Powell Hubble 1889~1953)이 우주가 팽창한다는 사실을 관측으로 증명하자, 아인슈타인은 우주항을 집어넣은 게 자신의 실수라며 빼버렸다.
“우주의 모든 물체가 서로 충돌함으로 파괴하여, 능히 고도의 회전력이 생겨 대기를 운동하게 하고, 기계적 충돌원인에 의하여 고도의 열을 내기 때문에, 반드시 신진운동의 세력이 생겨나 성운의 운동이 일어납니다. 星雲은 곧 태양과 만물의 본체이므로, 스스로 遠心과 近心의 서로 끄는 작용으로써, 혹은 집중하여 혹은 분산하여 나선형(螺旋形) 타원형(橢圓形) 환형(環形)을 이루고, 다시 집중작용으로써 끝내는 구형 혹은 星群을 이루니, 그 집단의 성원(成員)은 몇 개 혹은 몇 백 몇 천입니다. 이것이 천체 중의 태양계입니다.”
물체랬다가, 대기랬다가, 성운이랬다가. 물체가 서로 충돌해서 파괴된다고 회전력이 생기지는 않고, 대기가 충돌한다고 파괴되지도 않고, 성운 안의 기체가 충돌한다는 얘기인 듯. 어쨌거나 태양계 형성원인에 관해 1755년 독일의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에 이어 1796년 프랑스의 천문학자요 수학자인 라플라스(Pierre Simon de Laplace 1749~1827)가 처음으로 星雲說을 주장했다.
“太陽界의 물체는 집중작용에 의하여 분형상태로 되어, 널리 두루 구형으로 된 기체 중에 포함된 분자가 운동력 분산으로써 내부와 외부 사이에 점점 차고 더운 온도의 차이가 생기며, 때때로 환형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 한 물체를 이룹니다. 그 나머지 부분은 오히려 분화작용을 하여 점점 같은 온도와 같은 종류를 합하여 커져서 꼴을 이루니, 이것이 恒星과 太陽과 惑星과 중성(衆星)이 생기는 현상입니다.”
처음은 태양계의 물체고, 끝은 태양계 형성? 원시 태양계 원반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옛날에는 저런 주장이 있었는지, 서양 천문학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잘못 이해한 것인지 모르겠다.
“지구도 태양계의 하나의 행성이나 본래는 태양에서 분리된 천체이니, 한편으로는 공기와 수소의 높은 열로 각종 기체를 만들고 또 다른 요소를 합하여 환상기체(環狀氣體)를 조직하여 자체의 주위를 싸서 반사작용에 의하여 점점 냉각(冷却)됩니다. 이것이 장구한 시일을 경과하여 제일 뜨거운 부분을 분리하여 끝내는 냉각되어 고체(固體)를 이루기 때문에, 환기(環氣) 중에 포함된 무거운 요소는 가라앉아 고체와 액체를 이루고, 가벼운 요소는 위로 올라가 기체가 되어 늘 온도의 변화로써 구름과 비도 되고, 혹은 서리와 눈도 되고, 운동으로 전광(電光)이 일어나고 뇌성(雷聲)이 일어납니다.”
원시지구가 형성된 다음의 진화과정에 대한 설명이다. 옛날에는 저렇게 생각했던가 보다.
“태양광선이 늘 알맞은 정도와 때를 맞추어 비치므로 형형색색의 동식물이 빚어지기 때문에 동식물의 무수한 종자의 원인을 연구하니, 다 같은 原子에서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 그 위치와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만물이 만들어지니, 스스로 위와 아래, 영원과 순간, 고통과 즐거움,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것 같은 상대성의 원리가 있기 때문에 생명을 갖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相對性 理論은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로 부터 시작됐다. “일정한 속도로 운동하고 있는 곳에서는 정지한 곳에서와 같은 낙하법칙이 적용된다.” 그러나 상대성 이론을 사회 각 분야에 적용하기 시작한 것은 아인슈타인의 一般相對性理論(1916)이 나오고 부터다.
5世 구을(丘乙) “5년 봄(B.C. 2095)에 夏나라 학사 두 사람이 역서(曆書)와 두건갑자기(斗健甲子記)를 가지고 조정에 들어왔다.”
정반대로 쓴 날조 기사로 4世 檀君 오사구(烏斯丘) 즉위 원년(B.C. 2137) 가을 8월에는 “夏나라 사람이 찾아와서 특산물을 바치고 神書(曆書를 말함)를 구해갔다(甲申元年…秋八月夏人來獻方物求神書而去 檀君世紀)." 檀君世紀에는 5世 檀君 丘乙 때, 기존의 曆法 대신 처음으로 甲子를 사용해 曆書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것이 檀奇古史에 가면,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曆法을 만들었다고 바뀐다. 檀君世紀를 토대로 날조한 檀奇古史에 의하면, 중국의 曆法 제작이 朝鮮보다 빠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曆法을 만들기 2년 전인 丘乙 13년(B.C. 2087)에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혼천기(渾天機)까지 만들어 천도(天度)와 합했다고 한다.
5世 檀君 丘乙 15년(B.C. 2085)에 夏나라 曆書를 폐기하고 “國曆을 새로 만드니, 이것이 朝鮮曆書의 시작이다.” 물론 날조기사다. 기원전 3500년 경에 배달의 5世 태우의(太虞儀) 한웅의 막내아들 복희(伏羲)가 배달의 우사(雨師) 직책에 있으면서 만든 한역(桓易)도 처음이 아니다. 이전에 癸亥와 육계(六癸)를 만들어 사용한 것이다. 서량지(徐亮之 : 대만대학교 교수)도 中國史前史話에서 “曆法은 사실 東夷가 창시자이며, 소호(少昊) 이전에 이미 발명되었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曆書 제작 연도를 낮추는 것은 한국사와 중국사를 맞바꾼 李氏朝鮮 때나 가능하다. 천문관측한 적 없는 중국은 曆法도 제작한 적이 없다.
13世 檀君 흘달(屹達) 50년에 五星이 누성(婁星)에 모였다. 婁星의 자리가 바뀐 것은 우리나라 역사를 베낀 明 때다.
14世 檀君 古弗 “36년에 人魚 한 쌍이 상륙하였다.” 人魚는 서양인이 생각하던 상상의 동물이다.
기독교 교리까지 등장한다.
“경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도다. 대개 神은 陰陽과 理氣를 초월한 한 神이 자유로이 혼자 있는 것이니, 어찌 사람의 마음을 의뢰한 후에야 나타나겠는가, 우주 안에 참 神이 있고, 사람 몸에 靈魂이 있으니 산다는 것은 영혼의 빛이니라. 생명이 우주 안에 흘러 항상 물체를 따라 생리작용이 밀접한 곳에 드러나 보일 따름이니, 참 神이나 영혼은 영영 없어지지 않는 것인데 언제 흩어져 없어지겠는가.”
檀奇古史에는 현대지명까지 등장한다.
14世 古弗 檀帝 “36년에 발해 해변에 黃龍이 나타났다.” 渤海灣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발해만을 상실한 때 즉 淸碑를 세운 1712년 이후로 추정된다. 이 때 淸이 발해만에 大震國이 있었고, 거란 땅이 되었다고 날조했던 것이다. 高麗圖經에도 발해만은 遼海로 표기되어 있다. 李氏朝鮮이 고친 安含老의 三聖紀全에도 발해만을 遼海라 했다.
부여(夫餘), 길림(吉林),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부여조선(夫餘朝鮮)이라 하였다.
그냥 朝鮮이다. 44世 檀君 丘勿 丙辰 원년(BC 425)에 國號를 大夫餘라 고쳤다. 夫餘朝鮮이라는 나라도 있었다. 檀君王儉이 扶餘를 제후로 봉한 나라가 夫餘였다.
吉林은 근대에 中奴가 만든 지명이다. 이것은 22世 檀君 색불루(索弗婁) 때의 기사를 檀君世紀와 檀奇古史를 비교해 봄으로써 분명해진다.
辛丑 6년 신지(臣智)인 육우(陸右)는 “천년 제업의 땅이라 해도 대운이 이미 다했으며 영고탑(寧古塔)은 왕기가 짙어 백악산(白岳山)을 오히려 능가하는 듯 합니다. 청컨대 성을 쌓고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시옵소서”라고 상주 하였으나 단제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말씀하시기를 “신도(新都)에 이미 집이 있는데 다시 어째서 옮길 것인가?”라고 하셨다(辛丑六年臣智陸右奏曰阿斯達千年帝業之地大運已盡寧古塔王氣濃厚似勝於白岳山請築城移之帝不許曰新都已宅更何他往 檀君世紀)
6년에 육우(陸右)가 아뢰기를 “吉林은 천년 동안 도읍할 땅인데 대운은 이미 다 가고 寧古塔은 왕기가 서려 있으니, 寧古塔으로 도읍을 옮기는 것보다 못합니다” 하니, 임금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사람을 시켜 寧古塔에 성을 쌓았다.(檀奇古史)
千年帝業의 땅은 藏唐京이다. 운이 다했으니, 遷都 하자며 白岳山 보다 寧古塔을 권한 것이다.
索弗婁 檀帝는 寧古塔에 성을 쌓을 필요가 없었다. 寧古塔은 朝鮮의 첫도읍지이고, 20世 檀君 고홀(固忽) 36년에도 寧古塔을 개축하고 별궁까지 지었던 것이다(丙申三十六年修築寧古塔作離宮 檀君世紀).
辛未 36년 변방의 장수 신독(申督)이 병력을 믿고 난을 일으켰다. 이에 단제가 한동안 영고탑(寧古塔)으로 피하니 많은 백성이 이에 따랐다(辛未三十六年邊將申督因兵作亂帝暫避于寧古塔民多從之 檀君世紀)
36년에 반역하는 신하인 申督이 군사를 일으켜 궁성에 쳐들어옴으로, 임금께서 寧古塔에 피난하셨다. 이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寧古塔에 이주하여 살게 되어 동북방의 큰 도시가 되었다.(檀奇古史)
동북방의 큰 도시도 檀奇古史를 윤색하여 쓰면서 슬쩍 집어 넣었던 것이다. 寧古塔은 현 重京이니까, 서남방에 있었다.
18 세 단군 동엄(冬嚴)) “20년에 임금께서 서변(西邊)을 돌아보실 때에, 사람을 서장(西藏)에 보내시어 함문경(咸文經)을 구하여 왔다.” 西藏族. 西藏 이라는 이름은 17 세기에 생겼다. 朱元璋이 티벳고원을 빠져나간 후 티벳이 들어오고 나서. 라사(拉薩)의 포탈라궁(布達拉宮)은 明이 멸망하기 전에 지어졌다.
석가모니(釋迦牟尼)가 불교의 개조다. 그런데 釋迦牟尼는 기원전 5, 6 세기 사람(B.C. 563?~B.C. 483?)이다. 冬嚴 檀帝가 咸文經을 구했다는 해는 기원전 1465년이다. 釋迦牟尼 생전에 佛經을 제작했다고 해도 무려 천년이나 시차가 발생한다. 咸文經은 함무라비법전으로 여겨진다.
신시씨(神市氏)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이미 白頭山에 있으면서 점차 서남쪽으로 옮기고, 다시 패수(浿水)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다.
白頭山을 太白山에 포갠 날조기사다. 神市氏는 韓半島의 太白山으로 남하해, 黑龍江에서 柴達木盆地 남쪽에 있는 白山까지 영토로 확보했다. 그후 우리나라의 강역은 말 그대로 ‘동아시아’로 확대됐다. 티벳고원조차 우리나라 땅이다. 諸侯에게 封土로 주었으니까.
동쪽은 창해(滄海), 서쪽은 요서(遼西), 남쪽은 南海, 북쪽은 서비로(西非路)에 이르렀다.
2世 檀君 扶婁 당시의 국경이라는데, 檀君世紀에는 없다. 揆園史話에 의하면, 神人王儉 당대에 “檀君의 교화는 사방에 두루 미쳐 북으로는 大荒에 다다르고 서쪽은 설유(稧兪)를 거느리며, 남쪽으로 해대(海岱)의 땅에 이르고 동으로는 큰 바다에 닿았다(當是之時檀君之化洽被四土北曁大荒西率稧兪南至海岱東窮蒼海 揆園史話 檀君紀).” 檀君의 敎化지, 우리나라 영토를 기술한 건 아니다. 朝鮮은 우리나라 영토 일부에서 개국했다. 扶婁가 아니라, 神人王儉 말년의 국경이라 했다.
滄海는 韓半島의 東海이고, 南海는 東中國海다. 遼水는 이 당시 조그만 강으로 怒江 상류 근처에 있었으므로 遼西는 티벳고원 남부로 보아도 무방하다. 西非路가 시베리아라는 견해는 후대의 일식기록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番韓 36世 牟弗 “11년(B.C. 1074)에 교지국(交趾國) 사람이 표류하여 남해안에 와 닿았다.” 대체 交趾國은 언제부터 있었던 나라인가. 장현무전을 보면 明 때도 있었다.
중국과 우리나라를 諸侯國과 上國의 관계가 아닌, 대등한 관계 혹은 중국을 더 발전한 나라로 보고 있다. 중국을 우리나라와 대등하게 설정하는 것은 李氏朝鮮이 아니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얘기다.
舜이 이렇게 되어 中華의 天子가 되어 문명한 정치를 하니, 士農工商에 각기 직업을 주고 우(禹)의 아버지를 익산(翊山)에서 목을 쳐 간악한 무리를 내쫓았다. 이 때문에 漢族이 舜을 꺼려 오다가 禹의 덕망이 날로 높아지더니, 舜이 왕위에 오른 지 61년에 창오야(蒼梧野)에 행차하다가 한족(漢族)에게 해를 다해 승하했다.(檀奇古史)
회대지방의 제후들을 평정하여 분조(分朝)를 두고 이를 다스렸는데 우순(虞舜)에게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定淮岱諸侯置分朝以理之使虞舜監其事 檀君世紀)
天子? 승하(昇遐)? 秦始王 부터 皇帝 칭호를 썼다고 날조했다. 漢族은 華夏族 朱元璋이 훔쳐간 우리민족의 種族名이다.
檀奇古史 에서는 심지어 慈烏支 한웅이 軒轅에게 사로 잡혔다고 날조했다.
치우(蚩尤)는 이마가 쇠처럼 강하고 능히 크게 안개도 일으켰다. 그 때에 자부선생(紫府先生) 밑에서 함께 공부하던 中華의 黃帝가 공연이 炎帝의 왕위를 빼앗는 것을 보고 의분을 참지 못하여 黃帝와 탁록(涿鹿) 들에서 싸웠는데, 후원병이 오지 않아 黃帝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손자 특명(特明)이 또한 매우 용맹하여, 檀朝에서의 벼슬이 사도(司徒)에 이르고, 상균(尙均)과 더불어 檀朝를 도우니 정치의 문명정도가 中華의 禹朝보다 훨씬 뛰어났다.(檀奇古史)
자부선생께서 칠회제신(七回諸神)의 책력을 만드시고 삼황내문(三皇內文)을 천폐(天陛)에 진상하니, (자오지) 천왕께서 이를 칭찬하였다. 삼청궁(三淸宮)을 세우사 그곳에 거하시니, 공공(共工), 헌원(軒轅), 창힐(倉頡), 대요(大撓)의 무리가 모두 여기 와 여기서 배웠다(紫府先生造七回諸神之曆進三皇內文於天陛天王嘉之使建三淸宮而居之共工軒轅倉頡大撓之徒皆來學焉 馬韓世家)
헌원(軒轅)이 이로써 망연히 사라지니 유망(楡罔)도 이에 따라 영원히 떨어져 버렸다.
치우천왕(蚩尤天王)의 공덕은 세상에 전하여 능히 떨치고 그윽한 푸르름 속에 그 명성 위엄을 떨어지지 않고 있음이라(軒轅以是索然楡罔亦從以永墜矣蚩尤天王之餘烈世襲能振盡有幽靑聲威不墜 太白逸史 神市本紀)
慈烏支 한웅이 紫府先生 밑에서 공부했다? 紫府先生은 慈烏支 한웅의 신하다. 慈烏支 한웅이 三淸宮을 짓고, 紫府先生을 머물게 하자, 軒轅 등이 慈烏支 한웅을 알현하는 김에 紫府先生한테 배웠다. 생포된 慈烏支 한웅에게 군사를 주재하는 자들이 승리를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는가?. 慈烏支 天皇은 軒轅을 생포해 신하로 삼았다.
2世 檀君 扶婁에게 “전하께서 사자를 남함지(南閻地)에 보내시어 그 도덕과 정치를 시찰하고 와서, 나쁜 점은 버리고 좋은 점은 본받아 백성을 다스리는 데 시행 한다면, 나라가 문명하고 진보하는데 좋은 길이 될까 합니다”? 殿下란다. 우리나라는 天子國이다. 皇帝의 나라였다. 陛下라고 불렀던 것이다.
中土를 본받으면 文明이 진보하는 게 아니라 퇴보한다. 日本이 그랬고, 中土로 간 우리민족들이 그랬다. 끝내 원시인, 미개인이 되었다. 華夏族의 수준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番韓 33世 임나(任那) “10년에 위요(魏堯) 등 뛰어난 인재 18 명을 周나라 호경(鎬京)에 보내어 見學하게 하였다.” 큰 천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나라에 見學까지 보내고!
“10년에 임금(15世 檀君 伐音)께서 북쪽으로 행차 하시어 弱水에 이르러, 우속(禹粟)에게 金鑛을 채굴하게 하였다”는 檀奇古史의 기사는 韓半島를 염두에 둔 기사로 檀君世紀 에서는 서쪽이라고 나와 있다. “己丑 10년 檀帝께서는 서쪽으로 弱水로 가시더니 臣智 우속에게 명하여 금철 및 고유(膏油)를 채취하도록 했다(己丑十年帝西幸弱水命臣智禹粟採金鐵及膏油 檀君世紀).” 弱水는 타림강(代江)이다.
烏斯丘 檀帝 20년에 平壤城을 쌓았다. 이미 藏唐京에 도읍했고, 海城을 平壤이라 부르고 離宮을 쌓은 것은 44世 檀君 丘勿 때였다. 千年 帝業의 땅에 또 성을 쌓았다는 것이다.
20世 檀君 固忽 “28년에 임금께서 서남쪽으로 행차하시어, 殷나라 서울에 이르러 다음 달에야 돌아오셨다.” 이것 역시 동북아를 강역으로 볼 때만 가능한 것으로 殷나라의 수도는 藏唐京(長安)의 서쪽 즉 金沙江 상류에 있었다.
檀奇古史와 揆園史話에는 索弗婁가 21世 檀君 蘇台의 맏아들로 나온다. 索弗婁는 高登의 손자다. 蘇台 檀帝는 索弗婁가 아닌 徐于餘에게 帝位를 물려주려 했기 때문에 索弗婁가 기습적으로 白岳山(殷墟)에서 즉위식을 거행해버렸다.
檀奇古史 에서는 25世 檀君 솔나(率那)를 기준으로 前檀朝, 後檀朝로 나누고 있다.
19世 “종년(縱年) 첫 해에 맏아들 固忽을 太子로 삼고, 아우 종선(縱鮮)을 청아왕(菁莪王)으로 삼으니, 菁莪王의 증손은 서여(西餘)인데, 이 분이 조선기자(朝鮮奇子)의 太祖가 되었다.”世祖, 太祖, 光宗,世宗이라는 廟號는 신용할 수 없는 날조기사를 뺀, 문헌상에 남아 있기로는 大震國 시대부터 사용했다. 三聖紀全 上篇에도 “解慕漱를 제사하여 太祖로 삼았다”고 했지만, 三聖紀全 上篇은 李氏朝鮮人이 뜯어 고쳤다. 중국은 王이라 했고, 중국의 정복민은 酋長이니 선우(單于)니, 칸(汗)이니 하고 불렀으므로 대신 사용하면 황제국처럼 보일까 하여 明이 가져다 온통 도배한 것이다.
“기자(奇子)라는 뜻은 太陽의 아들이며 황손이다.” 軒邱(軒轅)가 太陽의 아들이라 자처하다가 慈烏支 한웅의 공격을 받고 패했다. 朝鮮 檀帝라고 가만있을 리가 없다. 날조를 해도 奇子朝鮮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한다. 檀奇古史 전체가 그런 식이지만. 奇子朝鮮을 정통으로 삼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낸 소리다. 奇子(箕子)는 殷나라 사람이 아니고, 朝鮮사람 이라면서.
檀奇古史의 奇子朝鮮은 番韓 30世 徐于餘 부터 奇子朝鮮이라 바꿔 부르는데 불과하다. 즉 朝鮮의 諸侯國 番韓이다. 과연 大辰國이 馬韓史도 빼버린 奇子朝鮮史(番韓史)를 썼겠는가. 高句麗, 北夫餘, 朝鮮으로 이어지는 정통성을 가진 大辰國이 제후국을 朝鮮과 동격으로 격상 시키겠는가.
마밀(馬密) “3년에 아우 마립한(馬立罕)을 대마도(對馬島)의 王으로 삼았다.” 番韓은 岷江 이서에 있던 나라다. 그런 나라가 對馬島(대만)를 지배할 수 있는가. 番韓은 中土의 침입을 막으라고, 淮垈지방에 옮긴 나라다.
여을(余乙) “2년에 서북쪽에서 金鑛이 발견되어 사람마다 많이 캤다. 이 소문이 나라 밖에까지 알려져, 동방에 黃金國이 있어 소의 머리에 까지 금으로 장식한다 하였다.” 奇子朝鮮의 실체는 番韓이므로 서북쪽은 中土와의 접경인데, 과연 黃金이 발견 되었다면, 중국이 가만 있을까? 番韓은 중국의 동방이 아니라, 남방이다.
도을(道乙) “4년에 人口를 조사하니 그 수가 4 천 3 백여 만 명이나 되었다.” 番韓은 怒江 이동에서 岷江 이서까지의 나라였다. 그런 소국에 기원전 517년의 인구가 4300 만 명이나 될 수 있는가. 6 세기의 高句麗도 4 천 만 명이었다. 百濟 땅 黃山江 이남을 차지했을 때.
인한(人韓) “15년에 북부여(北扶餘) 사절이 입경하여 정부기관의 개편을 보고 부러운 마음으로 우러러 사모하며 귀국하여 그 사실을 임금께 아뢰니, 임금께서 이르시기를 ‘나도 정부기관을 개조 하고자하여 깊이 생각한지 오래 되었는데, 오늘 돌아온 사신의 말을 들으니 바로 나의 생각과 같다’하시고, 다시 奇子朝鮮에 사절을 보내어, 개조한 정부기관을 모범으로 삼고자 기록하여 가지고 귀국하였다.”
北夫餘가 고작 番朝鮮(奇子朝鮮)의 행정조직을 부러워해?
番韓 64世 人韓 15년은 기원전 424년이다. 北夫餘는 기원전 239년에 건국했다. 날조를 하려면 自國史나 제대로 알고 할 일이지!
가색(可索) “40년에 노을문(老乙文)이 尙書(書經)를 올려 아뢰기를 천하대세의 가장 크고 웅장하고 격렬한 것은 사리(事理)가 그렇지 않을 수 없는데서 나온 것입니다. 혹 나라가 中華와 대립하여 수천년 동안 우호국으로 지내온 것은, 서로의 문화수준이 같기 때문입니다. 周나라가 통일한 후, 그 나라의 예악법도(禮樂法度)의 제도와 문물이 훌륭히 구비되어 점점 우리나라를 초월한 점이 있으므로, 천하백성들의 마음이 中華를 희망하여 中華의 전성시대가 우리나라에 두려운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周나라 무왕(武王)이 諸侯로 봉한 子弟들이 매우 많았는데, 代를 이을 자가 탐탁치 않아 서로 공격하기를 원수같이 하고, 諸侯가 王號를 함부로 일컬으니, 그 가운데 覇權을 잡은 것은 진(秦), 楚, 燕, 齊, 한(韓), 魏, 魯의 일곱 영웅들입니다. 이들은 날마다 전쟁만 일삼으니, 편할 날이 없어 戰國時代가 되었습니다. 그 반면에 主義와 思想이 극도로 팽창하여 학자마다 제각기 날뛰니, 그 중에 으뜸으로 꼽힐 만한 것은 공학(孔學), 노장학(老莊學), 양묵학(楊墨學) 등 입니다.”
有爲子는 “中華가 殷祖에 이르러서는 禮樂法度가 찬연히 구비될 것이며, 聖賢이 배출되어 經典을 저술하기 시작하고, 文化의 향상이 前無後無하여 천하를 휩쓸 것이므로, 만국이 그 문화를 암오하여, 다투어 그 나라에 와서 배우고 익혀 漢學 전성시대가 될 것”이라 했는데, 老乙文은 周나라가 “禮樂法度의 제도와 문물이 훌륭히 구비되어 점점 우리나라를 초월한 점이 있으므로, 천하백성들의 마음이 中華를 희망하여 中華의 全盛時代가 우리나라에 두려운 느낌을 주고 있”다고 하는군.
楊墨學이란 말은 들어본 적 없고, 陽明學은 明 中期에 생겼다. 中奴가 만든 유일한 학문(?)이다. 老莊學? 老子와 莊子의 학문이 인정받고 발전한 것은 老子, 莊子가 살았을 당시가 아니라, 魏晉 시대부터 특히 왕필(王弼 226~249)이 老莊思想으로 易을 설명한 주역주(周易註)를 쓰면서 부터였다고 날조했다. 老莊學이 성행한 것은 東晉(317∼419) 때라고 날조했고. 그러니 老莊學이 으뜸이라는 말을 하려면, 王弼 이후, 東晉 시대에나 할 수 있는 말이다.
3 세기에도 큰 천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 썼다고 기록된 나라가 “禮樂法度의 制度와 文物이 훌륭히 구비되어 점점 우리나라를 超越”한다는 말도 우습다. 秦나라 사람도 중국 남부로 가서 倭로 살면서 倭奴가 되었다. 고작 李成桂가 넘겨준 미개 中奴와 대등해 지고 싶었던가.
“蒙古 突厥과 匈奴와 西夷는 분산되었다 할지라도, 우리 東方의 夫餘族은 思想이 하나가 되었으니, 이 민족만이라도 화합하여 漢族을 대항하게 하여도, 능히 우리나라의 독립 자주정신을 보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께서 옳다 하시고 민족사상을 백성에게 일으키게 하니, 이 정신이 불멸하여 우리 夫餘文明을 일으켰다.”
나라의 독립자주 정신을 보전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은 李氏朝鮮 뿐이었다.
가색(可索) “42년에 임금께서 九月山에 오르시어 西海의 해지는 광경을 보시고 시를 지으셨다.”
九月山은 西安 옆의 현 華山이다. 九月山 옆의 강이라곤 북쪽을 흐르는 渭水, 남쪽을 흐르는 浿水, 白岳山 阿斯達에서 나오는 강 뿐이다. 西海에 해당하는 江은 없다. 番韓에 있는 강인가. 西海라면 맨 서쪽을 흐르는 怒江인데, 탕구라 산맥(唐古拉山脈)에 가려서 해지는 광경이 안보일 텐데? 韓半島에 만든 가짜 九月山에서 西海의 해지는 광경을 봤던 것이다.
수한(水韓) “5년에 中華의 秦나라는 富强하고, 산동육국(山東六國)은 전쟁이 그치지 않으니, 피난하여 입국하는 자 많았다.”
부강하면, 큰 천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쓰고 倭奴가 되는가.
番朝鮮 68世 水韓은 기원전 340년 에서 324년 까지 在位에 있었다. 秦나라는 기원전 221년 에서 기원전 207년 까지 있던 나라다. 秦나라가 세워지기 백년도 전에 中奴가 우리나라로 피난온 셈이다.
마한(馬韓) “25년에 中華의 진승(陳勝)과 항량(項梁)이 병사를 일으켜 天下에 큰 亂을 일으키니, 燕 齊 趙 백성들이 피난하여 入國 하였다. 임금께서 서쪽 모퉁이 한쪽을 주어 살게 하니, 한(漢)이 노관(盧綰)을 왕으로 삼았으나, 盧綰이 漢을 배반하고 匈奴로 도망하였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奇(箕)子朝鮮(番朝鮮)이 자국 땅(上下 雲障)에 중국인들을 살게 해주었더니, 他國(漢나라)이 盧綰을 王으로 삼았다는 소리다. 盧綰은 馬韓 땅을 차지했었다.
奇子朝鮮 12世 勿韓과 41世 기부(奇否), 42世 馬韓은 番朝鮮의 王名이 아니다. 창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奇否가 46년, 馬韓이 25년간 王位에 있었다니까, 番朝鮮이 멸망한 기원전 194년 부터 거꾸로 계산해 보면, 馬韓은 기원전 218년에, 奇否는 기원전 264년에 왕위에 오른 셈이다. 馬韓 25년 이면, 기원전 194년이다. 陳勝은 기원전 209년에 亂을 일으켰다. 陳勝이 난을 일으키고도 무려 16년을 꾹 참다가, 秦나라가 망하고 漢나라가 들어선 지도 9년이나 있다가 우리나라로 피난온 것이다.
“燕나라 사람 위만(衛晩)도 망명객으로 胡服을 입고 동쪽으로 건너와 朝鮮에 입국하여, 太子 기준(奇準)에게 항복하고 임금께 절하며 있을 곳을 구하였다. 임금께서 허락하시어 博士로 삼고, 서쪽 변방 백 리 땅을 주어 살게 하였다.”
衛晩(滿)이 東으로 건너 왔다면, 서쪽에서 왔다는 소린데, 서쪽은 唐古拉 山脈으로 막혀 있다. 어차피 고개 정도는 있겠지? 그렇다면 衛滿은 燕나라 사람이 아니라, 부탄이나 버마 사람이 된다.
李氏朝鮮 이니까, 우리나라를 오랑캐라 부르며 우리나라 옷을 胡服이라 불렀던 것이다. 이 당시 中奴는 큰 천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다. 다시 말해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었던 것이다. 3 세기 中國倭의 복식 이라니까, 同族인 衛滿도 같은 복장이 분명하다.
中奴가 큰 천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쓰고 있었으니까, 岷江에서 타강(沱江) 사이의 馬韓 지역을 일시 점령하고 있던 盧綰과 부하 衛滿은 당연히 중국의 구질구질한 옷을 벗어 던지고 제대로 만든 우리나라 옷을 입었던 것이다.
어째서 기후(箕詡), 기욱(箕煜), 기석(箕釋), 기윤(箕潤), 기비(箕丕), 기준(箕準)을 없애고, 番朝鮮의 마지막 왕을 馬韓으로 고쳤을까. 마한(馬韓)이 자신의 이름을 따서 목지국(目支國)에다 마한(馬韓)을 세웠다고 날조하기 위해서다. “임금께서 불의의 변을 막을 수 없어서, 宮人과 좌우 신하를 거느리고 배를 타고 피신하여 目支國 금마군(金馬郡)에 머물러 나라 이름을 馬韓이라 하였다.”
그러나 벌써 써먹었다. 12世 檀君 阿漢 “29년(B.C. 1806)에 처음으로 청아대부(菁莪大夫) 한불배(韓不倍)와 沃沮大夫 高士深과 貊大夫 申突盖에게 命하여 諸侯로 삼아 토지를 주니, 이것이 馬韓과 辰韓과 弁韓이 되었다.”고 벌써 날조했던 것이다. 그 전에 2世 檀君 扶婁 때 “셋째아우 부우(扶宇)를 동해왕(東海王)으로 삼으니 三韓은 東海王의 후세이다.”라고 한 번 더 날조했다. 奇子朝鮮 42世 馬韓이 目支國으로 가서 세 번째로 馬韓을 세운다는 셈이다. 馬韓이 세 번 있었다고는 하나, 檀奇古史의 三韓은 동일한 三韓을 가리키고 있다.
얼마나 뜯어 고쳤는지 檀君世紀를 가지고 날조 했음에도 檀奇古史는 지명을 찾을 만한 단서 하나 남겨두지 않았다. 해당 장소에 이르는 지형을 하나도 남겨놓지 않았던 것이다.
檀奇古史는 이유(李瑈 李氏朝鮮의世祖라고 불리는 濊貊族), 이광(李晄 李氏朝鮮의 睿宗이라고 불리는 濊貊族), 이혈(李絜 李氏朝鮮의 成宗이라고 불리는 濊貊族)의 求書(?)의 諭示 목록에도 없다. 檀奇古史는 檀君世紀를 날조 하면서 붙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대야발(大野勃)의 이름을 빌린 것인가. 大野勃이 大祚榮의 동생이라는 것도 의문이다. 大野勃. 꼭 乞乞仲象 같지 않은가. 大仲象이 아들을 한 명은 祚榮, 한 명은 野勃로 지었단 말인가. 大野勃은 乞乞仲象의 아들인가 보다.
檀奇古史는 檀君世紀를 李氏朝鮮의 시각에서 날조한 僞書다. 李氏朝鮮 後期에 들어온 基督敎가 소개되어 있고, 날조 中國史와 韓國史를 따라서 韓半島와 그 이북을 우리나라 강역으로 축소하고 있다. 20 세기 초반의 西洋 天文學 까지 소개되어 있다. 최소한 明王星이 발견된 1930년 까지 개작하고 있었다.
참으로 어리석은 李氏朝鮮人들이 아닌가. 누구도 저런 글을 보고 한단사(桓檀史)를 사실이라 믿을 수는 없을 것이다. 檀奇古史에는, 일부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위대한 역사 따위는 없다. 三國史記, 高麗史의 연장선상에 있는 한없이 축소한 날조사에 지나지 않는다.
李氏朝鮮 말, 倭奴가 이 땅을 강점했을 당시 실로 수많은 賣國奴들이 나왔다. 그 중에서도 歷史學者들은 거의 다가 매국노였다. 震檀學會 역시 알려진 바와 다르게 애국자 집단이 아니었다.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의 예정된 비극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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