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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으로 본 역사의 증거자료 7 -고려시대 지명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7. 4. 7. 15:25

고려시대의 지명

한문명 최후의
계승국 고려

출처: blog.chosun.com/stormmer

7. 한문명 최후의 계승국 고려 (1)


1) 고려의 영토는
   티벳고원 북부를 뺀 동아시아다


三國統一 직후 新羅가 百濟와 高句麗 땅을 전부 차지했다. 천하고 작은 생선(鮮卑族) 唐이 차지한 것이 아니다. 百濟, 高句麗 古土를 두고 唐과 新羅가 7년 전쟁을 벌여 매소성(買肖城) 전투에서 唐을 완전히 몰아냈다(?). 그런데 역사스페셜 6권에는 買肖城 전투를 이런 말로 시작한다.

현재 중국 역사학계가 인정하는 중국의 역사 지도에는 한반도의 백제와 고구려 지역이 당나라 영토로 표시되어 있다.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해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린 뒤 이 지역을 당의 지배 아래 두려고 백제의 옛 땅에는 웅진도독부를, 고구려의 옛 땅에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중국에서는 이것을 당나라 영토로 보고 현재의 역사 지도를 그린 것이다. 만약 신라가 나당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면, 한반도 전체가 당나라 것으로 그려졌을 것이다.

드넓은 東아시아를 다 놔두고 韓半島에다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했다고? 百濟 멸망 전쟁도, 부흥 운동도 전부 중국 대륙 東部와 渤海灣에서 있었다. 韓半島 전라도에 200여 城이 들어가는가. 어떻게 200여 城을 되찾은 부흥 운동이 가능하단 말인가. 본국 땅은 내버려두고, 고작 협소한 韓半島에서 결전을 치루고 復興運動을 하는 인간들도 있단 말인가.

“현재 中國 역사학계가 인정하는 중국의 역사 지도”라 함은 우리나라 사학계의 半島史觀에 맞추어 제작한 지도이다. 우리나라가 自國史를 축소해 대니까 얼씨구나 하고 그에 맞추어서 제작한 것이다. 자기나라 역사에도 無知 하니까 이런 희극이 벌어지는 것이다.

熊津都督府와 安東都護府를 설치한 것은 新羅다. 新羅는 東아시아를 다 차지했고 唐은 티벳고원도 아닌, 티벳고원 북부의 나라였다. 우리나라의 피지배 종족이라 그 종족명까지 鮮卑族이었던 유목민이 세운 唐은 韓半島는 구경도 못했다. 新羅를 대상으로 7 년 전쟁을 했다는 기록조차 사실로 보기 어렵다. 新羅에게 “對策은 없고 단지 大國의 처분만 바랄 뿐이다”고 한 唐이었다.

三國 統一 후 곧 大震國이 건국 되었지만, 그래도 新羅는 百濟 영토 일부를 차지했다. 大震國史로 치장한 唐이 순순히 내줄 수는 없으니까, 7 년 전쟁을 날조한 것이다. 7 년 전쟁 역시 순수창작은 아니고, 三國統一 전쟁이나 高句麗 復興運動 등에서 몇 개 슬쩍 빼왔을 것이다.

買肖城은 어디에 있었는가. 唐이 新羅와 7 년 전쟁을 했다는 것은 허구가 분명 하지만, 그래도 그 당시의 지명을 보고, 날조했다. 현 사학계는 臨津江 유역이라 하지만, 臨津江은 淮水다. 티벳고원 북부의 소국이 臨津江까지 와서 三國을 통일한 新羅와 결전을 벌일 수는 없다. 買肖城은 티벳고원 남부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북부에서 가까운 곳에. 金沙江 유역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7 년 전쟁이 新羅와 大震國 사이에 벌어진 전쟁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고구려의 옛터를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지니고 있다(復高麗之舊居 有夫餘遺俗 續日本紀)

高句麗는 동북아를 상실했다. 東北亞는 百濟가 차지했다. 中奴가 중국 대륙을 차지 했다면, 大震國이 어떻게 高句麗의 옛터를 회복 했다고 선언할 수 있는가.

三國을 통일했을 당시, 新羅의 영토는 티벳고원 북부를 뺀 東아시아다. 실로 엄청난 영토다. 잠깐이긴 해도 高句麗 조차 갖지 못한 면적 이었다. 大震國이 高句麗의 古土에서 건국하고 百濟 고토를 新羅와 나눠 가졌다. 이 말은 大震國이 大興安嶺山脈 이북을 차지했다는 말이다. 新羅는 중국 대륙 동부를, 大震國은 중부를 가졌기 때문에 그 반대가 될 수 없다.

우리나라는 영토 곳곳에서 천문관측하고 자연현상을 관측한 나라였다. 揆園史話도 “첨성대는 천 수 백년이 지났다(瞻星臺過千數百年而尙巍巍然特立 漫說)”고 했다. 北崖가 말살되고 은닉된 우리나라 역사를 잘 알고 있었다는 증거다. 北崖는 과거에 낙방한 선비가 아니다.

500년에 新羅의 중심지를 韓半島로 옮긴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高句麗와의 전투가 불가능하다. 新羅는 중국 대륙에서 멸망한 나라다. 375년 新羅는 百濟 땅 韓半島를 침공해 瞻星臺를 세우고 천문 관측했다.

후삼국 시대의 지명 : 신라장성의 위치에 주목하자. 삼국 통일 후 신라는 당연히 장안성으로 천도했지만, 대진국에게 장안성을 빼앗기자, 첫 번째 수도 금성으로 재천도할 수밖에 없었다. 평로치청이 신라 땅을 상당히 잠식해 금성을 위협하자, 계림으로 천도했다. 신라가 헌덕제 때 패수 유역에 장성을 쌓았다는 것은 신라가 평로치청(761~ 817)에게 한때 금성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금성을 회복하자, 금성 방어를 목적으로 장성을 쌓았던 것이다. 후고구려는 금성 지척에서 일어났다. 이때도 천도했다. 장성의 위치가 후고구려의 근거지와는 반대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장성을 패수 유역에 쌓았다는 것은 금성의 서북 방향에 쌓았다는 것이다. 후고구려는 금성의 동북 방향에서 일어났다. 신라장성의 위치가 패수 유역이라는 것은 대진국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해서 쌓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장성을 축조할 당시는 평로치청이 멸망했기 때문에 신라의 적은 대진국뿐이었다.

927년 견훤(甄萱)의 군대가 쳐들어올 당시, 경애왕(景哀王)은 11월(음력)에 포석정(鮑石亭)에서 놀고 있었다. 鮑石亭은 아열대기후 지역에 있었다. 新羅 말기의 수도는 중국 남부에 있는 桂林이다. 慶州에 鷄林이라 부르는 초라한 숲에 鮑石亭이라고 더욱 초라하게 만들어둔 곳이 있다. 李氏朝鮮이 만들었다. 李氏朝鮮은 큰 궁궐은 못 지어도 지명 바꾸고, 날조 내용으로 비석 만드는 정도는 할 수 있다. 그 짓을 엄청했다. 중국 대륙에는 아직도 계림(桂林)이 있다. 해남도(海南島) 정북으로 5 백 km 쯤이다. 밀린 지명이 아니다. 桂林의 山水는 천하 최고라 했다. 그런 풍광이 여러 곳에 있을 리 없다. 桂林은 金城(武漢)에서 700 km쯤 떨어져 있는데, 李氏朝鮮은 날조 金城(慶州) 안에 鷄林을 갖다 놓았다. 이 역시 전형적인 지명 포개기 수법이다.

三國統一 후 新羅는 당연히 長安城으로 천도 했지만, 大震國에게 長安城을 빼앗기자, 첫 번째 수도 金城으로 재천도할 수밖에 없었다. 평로치청(平盧淄靑)이 新羅 땅을 상당히 잠식해 金城을 위협했는데, 이 당시에 桂林으로 천도한 것이 분명하다.

이 당시 신라는 계림으로 천도해 있었다. 수도 금성 근처에서 후고구려가 건국했기 때문이다. 개성은 오늘날의 합비(合肥)다. 무진주(武珍州 전라도 광주로 날조했다)는 오늘날의 홍콩쯤 된다.

新羅가 헌덕제(憲德帝 41대 ?~826) 때 浿水 유역에 長城을 쌓았다는 것은 新羅가 平盧淄靑(761~ 817)에게 한 때 金城을 상실 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金城을 회복하자, 金城 방어를 목적으로 長城을 쌓았던 것이다. 後高句麗는 金城 지척에서 일어났다. 이때에도 천도했다. 長城의 위치가 後高句麗의 근거지와는 반대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長城을 浿水 유역에 쌓았다는 것은 金城의 서북 방향에 쌓았다는 것이다. 後高句麗는 金城의 동북 방향에서 일어났다. 新羅長城의 위치가 浿水 유역이라는 것은 大震國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해서 쌓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長城을 축조할 당시는 平盧淄靑이 멸망했기 때문에 新羅의 적은 大震國 뿐이었다.

高麗는 중국 대륙의 新羅 땅에서 일어난 後三國의 경쟁을 통해 건국한 나라다. 後三國 모두 중국 대륙에 있었기 때문에 경쟁할 수 있었다.

高麗史 현종(顯宗)조에 “이 달에 교서 내리기를 高句麗, 新羅, 百濟王陵, 廟堂과 그 소재지 州, 縣에 영을 내려서 수리를 깨끗이 하고, 나무하기를 금하고, 지나가는 자는 말에서 내려가도록 했다(是月敎高勾麗新羅百濟王陵廟令所在州縣修治禁樵採過者下馬)”고 나와 있다. 皇陵을 李氏朝鮮이 王陵으로 축소한 것이다.

大帝國 高麗가 과연 韓半島에 있는 손바닥만 한 古墳을 三國의 皇陵으로 알았을까. 우리나라 식민지 倭 列島에도 應神이 정착했을 당시부터 거대 고분을 만들기 시작했다. 길이 460 m에, 폭 300짜리 고분도 있다. 侯王이 다스리는 나라가 植民母國 보다 더 큰 陵을 만들 수 있는가. 식민지가 길이 460 m에, 폭 300짜리 고분을 만들었다면, 上國 百濟와 新羅는, 上國의 上國 高句麗는 대체 얼마나 큰 고분을 만들어야 하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太白逸史 神市本紀에서 찾을 수 있다.

고구려에 이르러서 능묘의 규격과 제도가 천하의 으뜸이 되었다(至于高句麗陵墓規制冠於天下)

高麗는 新羅에게서 물려받은 영토를 기반으로 건국한 나라다. 金富軾은 高句麗가 東아시아 태반을 차지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高麗는 高句麗의 계승국이라 천명했던 것이다. 百濟가 渤海灣이 아니라, 韓半島 남부에 있던 나라라고 믿었다면, 百濟는 중국 동부의 新羅와 무수한 전투를 벌일 수 없으므로 三國史記 자체를 쓸 수 없었다. 金富軾은 百濟가 百萬大軍을 보유 했으며 吳, 越, 燕, 齊, 魯 지역을 다스렸다고 三國史記에 기록한 인물이다. 百濟가 4 세기 말까지 東아시아 제1의 강대국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佛國寺는 528 년에 창건되고, 574년에 중건을 거쳐서 751년에 크게 개수했다. 751년 이전에는 그리 크지 않은 가람 이었다. 751년부터 中心地도 아닌 韓半島에다 佛國寺라는 工期가 수십 년이나 걸리는, 경내 면적만 11 만 7541 평에 달하는 대가람으로 개수한 이유는 중국 대륙의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을 수습하려는 염원 때문 이었다. 大震國이 高句麗 땅 대부분과 百濟 땅 일부를, 761 년에는 平盧淄靑이 건국해 新羅 영토 상당부분을 잠식했다.

768 년부터, 770 년, 775 년, 780 년에는 新羅 지배층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 뒤로 皇位 爭奪戰이 이어졌다. 김대성(金大城 : 700~774)이 석굴암(石窟庵)을 창건하고 佛國寺를 중창한 해가 751년이다. 平盧淄靑이 건국되기 전부터 新羅는 상당한 혼란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실상 新羅의 혼란은 百濟와 高句麗가 멸망한 직후 이들 나라 사람들이 復興運動을 하면서부터 시작됐다.

비록 平盧淄靑도 건국하고 後三國으로 亂立하지만 新羅는 高麗에게 중국 대륙 동부, 남부와 동북아 남부를 물려주었다. 다무라 엔쵸(田村圓澄)는 百濟 멸망 후 “日本使臣과 學僧들이 唐나라에 다닐 때 新羅 배를 이용했고, 이들이 日本으로 돌아올 때는 반드시 新羅를 경유했다”고 했다. 新羅가 東아시아의 해안을 다 차지했으니까, 新羅 선박에 동승하고, 新羅 항구에서 출발하고 기항해야 했던 것이다.

여기서 唐나라는 大震國이다. 역사왜곡 하면서 바꾼 말이다. 천하고 작은 생선(鮮卑) 唐은 未開 小國이다. 遣唐使를 파견해서 보고 배울 문물이 없었다. 新羅를 피해 唐으로 간 극소수의 高句麗人들이 唐 文物을 이끌었다고는 하지만, 우리나라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大震國은 대제국이긴 하지만, 이용가능한 해안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大震國의 영토는 시베리아까지 이르렀지만, 해안은 오오츠크(オホーツク)海 이북이다. 大震國의 중심지에서 너무 멀다. 그 외 동아시아의 모든 海岸이 新羅 영토였으므로 大震國은 항구를 얻지는 못했다. 그래서 日本이 新羅 선박으로 중국 대륙을 오간 것이다.

新羅는 百濟 땅을 大震國과 나누어 가졌지, 新羅 영토는 상실하지 않았다. 왕건(王建 877~943)의 세력기반이 浿西지방 이었다. 浿水는 현재의 漢水이다. 王建이 일어난 곳은 新羅 영토지, 大震國 영토가 아니다. 그랬다면 大震國을 멸망시키고 高麗를 건국했을 것이다. 浿水 하류는 新羅 땅이고, 浿水 상, 중류는 大震國 땅이었다.

759 년부터 몇 년간 日本은 新羅를 치자고 大震國에 제안 했다는데, 이때도 日本은 항해술이고 선박 제작기술이 형편없었다. 중국 대륙도 新羅 선박에 얹혀서 왕래했다. 그러고는 新羅를 치자고 제안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大震國은 동아시아 제1의 대제국이고 日本은 屬國이라, 新羅를 치자고 제안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그 옛날 新羅가 百濟 땅 韓半島를 침공 했듯이 日本도 단독으로 新羅 땅 韓半島를 침공하려 했을까. 이 당시 중국 대륙의 新羅 땅에 平盧淄靑이 건국되어 어수선하기는 했다.

日本은 新羅를 영원히 칠 수 없었다. 어째서 日本이 신공황후(神功皇后) 전설을 만들고 新羅의 침입을 물리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하코자키궁(はこ崎宮)에 이국항복(伊國降伏)이란 현판(신라가 멸망하기 꼭 10 년 전에 그 짓을 했다)만 다는 것으로 끝낼 수밖에 없었는지 분명해 진다. 新羅는 일본이 넘볼 수 없는 강대국이었던 것이다. 韓半島의 소국이 아니라, 중국 대륙의 大國이었다.

그런데도 倭奴는 1945 년 까지 전쟁에 패한 적이 없다고 역사날조하고 있다.

1945 년 9 월 27 일은 일본이 자랑하던 2600 년의 무패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날이었다.1)

白江 전투에서 新羅에게 전멸 당한 것은? 제1차 麗蒙 연합군에게 대파 당하고 농성전을 벌여야 했던 것은? 李舜臣에게 7 년 내내 패한 것은? 晉州大捷, 幸州大捷에서 방어군의 10 배가 넘는 병력 으로도 패한 것은? 倭史의 실상이다.

倭奴民族은 언제나 무패 역사에 종지부만 찍고 있었다.

倭奴는 패한 역사는 절대 인정하지 않는구나! 패한 역사는 다 감추는구나! 얼마나 패배에 시달렸으면, 고작 상상 속에서 적을 물리치기를 기원했느냐? 하코자키궁(はこ崎宮)의 현판 伊國降伏은 왜 쓴 거냐?

神功皇后 전설(日本의 역사는 應神이 倭를 세운 395 년 부터 이므로, 神功은 중국 대륙에 있었다. 그러므로 최소한 中國倭가 이주해서 日本의 권력을 장악했을 때에서야 神功皇后 전설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神功皇后의 모델이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제 남편까지 살해한 악독한 倭奴 여자라고 한다)은 또 무엇인가? 倭奴의 힘으로는 도저히 안되니, 귀신한테 新羅를 물리쳐 달라는 게 아니냐? 오죽하면 침입 하지도 않는 新羅를 막기 위해 百濟 멸망 직후 왜(倭)열도에다 서둘러 城을 십여 개나 쌓았는가? 그깟 中國倭 한테도 4 차례나 져서 기모노섹스와 혼욕, 요바이의 난잡한 성문화에 빠져든 倭奴가 아니냐?

그 결과 제 자식과 남의 자식을 구별할 방법이 없어, 천년 넘게 家系가 단절되어 가문해체의 지경에 까지 이른 나라가 日本이다. 배우자가 낳았으니, 내 자식 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나라가 日本이다. 일본의 가계는 핏줄로 이어진 가문이 아니다.

太古 적에 동아시아를 지배 했다고? 그런데 고작 日本 列島에 쪼그라든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전쟁에 패한 것이 아닌가? 탐욕스런 倭가 순순히 포기 했다는 것인가? 상상 속에라도 전쟁에 패하지 않고 동아시아를 상실할 수 있는가? 血統조차 제대로 간수하지 못해, 한민족과 75.8%(일본국립유전자협회가 공식인정하는 호라이의 연구이다)나 차이가 나는 倭奴民族이다.

百濟가 中奴와 倭奴를 통털어 漢委奴라고 불렀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百濟의 기준에 의하더라도 倭奴와 섞인 日本은 더 이상 동아시아를 지배한 한민족이 아니다. 심하게 오염된 유전자를 가진 식민종족일 뿐이다.

日本三大八幡宮の一つ筥(はこ)崎宮

미개 中國倭의 저질 문화를 받아들여 國風이라 하고, 후지와라 시대(藤原時代)라고 부르더니만, 고작 한국어에서 받침 떼고 음절을 늘여 日本語까지 만들 더니만(日本語 母體는 韓國語다, 2003. 10. 21, 주간조선), 그래도 한민족이 태고적부터 동아시아를 지배한 사실은 계승하고 싶었는가? 참으로 倭奴의 감정은 모순되고도 복잡하다. 日本에 自生한 민족이고 싶은 동시에 수천 년간 동아시아를 지배한 한민족이고도 싶어 하니까.

倭奴民族은 홋가이도(北海道)의 아이누族도 1869 년 부터 치열한 전투 끝에 간신히 정복하지 않았는가? 그것조차 메군(米軍)이 南北戰爭 당시 입고 사용했던 골동품 군복이며, 총기로 무장하고 정복한 것이 아닌가?

2600 년 동안 패하지 않는 역사를 가진 민족이 어떻게 일찌감치 세계정복은 못했더란 말인가. 蒙古도 하고, 匈奴(훈족)도 하고, 靺鞨(突厥)도 유럽까지 그 영토를 넓혀 나가지 않았던가. 욕심만 무한대인 倭奴가 어째서 고작 19 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세계정복을 꿈꾸었단 말인가.

倭奴 치켜세우기에 정신없는 西洋人들은 이런 것을 實證史學이고 客觀的 證據라고 부른다. 그래도 자신들에게 얽힌 것은, 이리 따지고 저리 따져 사실 여부를 확인한다. 그래서 2 차 대전도 일본이 승리한 것이 아니고 자신들이 승리한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倭奴의 無敗歷史가 2600 년에서 끝장난 것이다, 우리나라와 붙었다가 패했으면, 아직도 倭奴史는 무패 행진 진행 중이다.

日本의 날조 역사는 이처럼 하나같이 말도 안되는 거짓말로 일관하고 있다.

2600 년의 역사라는 것조차 거짓말이다. 日本의 역사는 395 년 應神이 列島에 도착한 때로부터 시작됐다. 이전에는 나라가 없었다. 1600 年史에 불과하다. 하물며 1945 년에는 1500 年史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런 日本史마저 대부분의 기간 동안 미개하기 짝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日本은 고작 중국 대륙 남부에 있던 中國倭를 종이 위에서 슬쩍 끌고 와 韓半島 남부로 갖다 놓고 任那日本府니, 三國을 지배 했다느니 헛소리를 늘어 놓지만, 漢委奴 中國倭가 日本으로 이주한 사실은 숨기기 위해 中國倭와의 전쟁도 아이누族과의 전쟁으로 날조했다. 中國倭가 일본으로 이주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中國倭도, 日本倭도 다 우리나라의 지배를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中國倭조차 廣開土境好太皇이 정복하기 전에는 나라가 없었다. 촌락의 연합체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나라 역사책을 베낀 三國志에도 倭國이 아니라, 왜인조(倭人條)라 했다. 그래서 5 세기 초 부터 부지런히 高句麗에 사신을 보낸 끝에 5 세기 말 倭를 통합한 大將軍이 되고 倭王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던 것이다.

高麗가 대제국 이었음은 高麗圖經, 高麗史, 해동역사2) 뿐만 아니라, 太白逸史에도 나온다. “우리 천수(天授) 太祖(王建)께서 창업의 바탕으로 高句麗의 多勿이 나라를 세운 풍도(風道)를 계승 하였다(我天授太祖以創業之資承高句麗多勿立國之餘風).”

단 한 치의 과장도 없는 사실이다. 高麗는 多勿의 國是를 계승했고, 李氏朝鮮은 이를 감추었던 나라다. 李氏朝鮮은 高麗의 광대한 영토를 물려받고도 온 세상의 평정은커녕, 우리나라 5 천년의 속국한테 다 떼어주고 끝내 韓半島로 찌그러들었다가 망한 濊貊族의 나라다. 역사말살까지 해가며 미개 소국 明을 문명대국으로 만들어준 濊貊族의 나라다. 자신이 창작한 문명대국 明만이 아니라, 淸에까지 굽실대던 濊貊族의 나라다.

高麗는 대제국 이었다. 몽고간섭기(?)에도 黃河 이남과 東北亞를 영토로 한 大國이었다. 蒙古의 영토라고 알려진 땅의 4 분의 1은 高麗 영토였다. 이 시기 티벳고원 북부의 중국은 나라 자체가 망했다.

高麗가 고작 손바닥만한 韓半島를 통일하느라 중앙세력과 지방세력이 타협했던가. 우리나라 수천 년의 피지배종족 匈奴도, 蒙古도, 靺鞨도 서유럽까지 제패했다. 그런데 이 땅의 사학자들은 우리가 고작 韓半島를 통일하는 것조차 버거워 중앙세력과 지방세력이 타협을 했다고 한다.

서양에 이르는 광대한 땅을 차지한 蒙古가 고작 韓半島 북쪽 끄트머리에 연연하여 두 곳에다 행정기관까지 설치했던가. 그 인력으로 서양을 계속 정복하면, 훨씬 더 넓은 지역을 차지한다는 것은 蒙古가 더 잘 안다. 서양으로 거침없이 뻗어가고 있었는데, 고작 손바닥만한 東鴨綠 강변에 그토록 강한 애착을 가진단 말인가. 굶어죽을 뻔한 소국 唐조차 百濟 땅에는 熊津都督府를, 高句麗 땅에는 安東都護府를 설치했다고 날조했다. 유라시아를 대부분 차지한 蒙古가 고작 白頭山 일대에 행정기관을 둘씩이나 설치해 지배했단 말인가. 고작 濟州島에 耽羅總管府를 설치하고 다루가치(達魯花赤)를 두었단 말인가. 편자 같으면 콘스탄티노플에 總管府를 설치하고 다루가치를 두겠다. 날조 蒙古帝國에 비하면 韓半島는 완전히 점에 불과하다.

몽고간섭기의 동아시아

쌍성총관부, 동녕부, 8 참(첩), 거란 수비지역 모두 사한국이 아니라 몽한 땅이다. 몽고고원에는 오고타이한국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소종이 몽고고원으로 도주해 몽한의 명맥을 이었다는 사실에서 몽고고원은 몽한의 직할지로 추정된다. 어쨌든 쌍성총관부와 동녕부에 의해 고려는 장성 이남과 동북아로 완전히 분단된 것이다. 몽한은 元으로 날조된 나라의 원래 국명이다.

蒙古가 유라시아 대제국을 건설 했다면서 고작 韓半島를 정복 하고자 40 년 동안 전쟁을 벌였다는 것인가. 蒙古가 韓半島에 눈독 들이지 않았으면, 서유럽도 정복하는 것인데, 蒙古만 몰랐던가. 우리나라가 지지리도 작은 小國 이라면서 어째서 이럴 때만, 우리나라의 가치를 무한대로 상승 시키는지 모르겠다. 東寧府와 雙城總管府, 8 참(八站)을 설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우리나라가 강대국이라 蒙汗의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高麗가 韓半島 뿐인데, 蒙古가 청야전술(淸野戰術)로 타격을 받을 수 있는가. 고작 수백 km를 비웠다고 군수품을 조달하지 못한다면, 蒙古는 서방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없었다. 중앙아시아와 서남아시아에도 사막이 넓게 펼쳐져 있다. 징기스칸(成吉思汗)이 蒙古高原을 통일하고 黃河 이북도 싸워서 얻었다니까, 고비사막이나 오르도스 사막에서도 전투를 한 셈이다. 날조 蒙古帝國에 비해 韓半島는 인체로 비유하면, 얼굴도 아니고 한쪽 귀에 불과하다. 蒙古가 韓半島를 침입 했다면, 韓半島 내에서 군수품 조달이 불가능할 경우, 韓半島 이북에서 조달하면 된다. 그러나 高麗는 淸野戰術 조차 사용할 기회가 없었다. 蒙古가 高麗를 침입하지 않아서.

西方에는 이슬람인을 다루가치(達魯花赤)로 두고, 高麗 땅에는 한때 西京(?)과 西北面 지역에만 72 명의 蒙古人을 다루가치로 두었다? 유독 韓半島 북부, 그것도 서쪽에만 72 명의 몽고인 행정관을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蒙古에게 西京(?)과 西北面 지역이 중요했던 이유는 高麗가 중국 대륙에 있었기 때문이다.

高麗는 전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고 건조한 나라다(小右記). 동아시아의 무역대국 高麗의 수도 開京은 국제적인 무역도시였다. 수많은 외국상인과 사절로 붐비고 이들이 묵는 10 여 개의 객관은 궁궐만한 규모라 했다.

貿易大國 高麗는 동아시아를 넘어 인도, 아라비아 등과도 교역했다. 이해 하겠지만 이 당시 유럽은 너무 미개해서 高麗의 교역 상대국이 될 수 없었다. 메국(米國)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콜럼버스 조차 수백 년 뒤의 사람이다.

高麗는 무역에만 힘쓴 게 아니고 高句麗를 계승했다는 자부심으로 잃어버린 옛 땅 회복에 나섰다. 高麗의 火藥과, 走火(로켓), 大砲를 체험한 中奴는 이것마저 훔치기에 나섰다. 走火를 모방해 만든 것이 비화창(飛火槍)이다. 宋이 아니고, 金汗이 만들었다. 金汗을 세운 濊貊族이 柴達木盆地에 있으면서 高麗의 走火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高麗는 濊貊族도 병사로 활용했을 것이다. 蒙古가 金汗의 수도 변경(邊京)으로 쳐들어 갔을 때 邊京의 수비군이 高麗의 走火를 모방한 飛火槍으로 대항했다. 이후 蒙古는 유럽을 침공 하면서 金汗에서 입수한 로켓무기를 사용했다.

최무선(崔茂宣 ?~1395)이 중국으로 가서 화약제조법을 배워 왔다고? 중국 대륙이 高麗 영토의 일부이다. 崔茂宣이 염초 제조법을 中奴 그것도 100 % 유목민족 蒙汗人 이원(李元)으로부터 배웠다고? 염초(焰硝)는 4700 년전, 배달 14 世 慈烏支 한웅 때 벌써 만들었다. 高麗人 李元이 中土에 가서 焰硝製造法을 가르쳐준 것이다. 그것으로 中奴도 화약 무기 비슷한 걸 만들었다. 高麗의 화약무기가 중국으로, 다시 蒙古로 전해진 것이다. 蒙古는 高麗의 화약 무기로 세계를 정복했다.

高麗는 權門世族의 나라였다. 이들 권문세족들은 山川을 경계로 삼은 거대농장을 소유했다. 농장에 마당 장(場) 자도 아니고 장전 장(莊) 자를 썼을 정도로 거대했다. 황실 소유의 농장은 360 개에 달했다. 대체 손바닥만한 韓半島에 그 땅들이 다 들어갈 수나 있는가.

하음(河陰), 진강(鎭江), 해령(海寧)의 전답에서 수확물을 제왕, 재추(宰樞) 이하 차별을 두어 분급(分給)했다(河陰鎭江海寧之田分給諸王宰樞以下有差 高麗史節要)

高麗는 諸侯, 諸王까지 거느린 皇帝國이었다. 날조사에서 高宗 44 년은 麗蒙戰爭의 막바지 라면서? 高麗 전기도 아니고, 이 당시에도 諸侯, 諸王이 있었다. 高麗는 실상 몽고간섭기(?)에도 제왕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최무선 영정

開城에 高麗의 궁궐터가 있다고? 현 開城에 있는 궁궐터는 高麗 諸王의 王城터이다. 의종(毅宗 1127~1173)이 직접 썼다는 글에 “日本이 보물을 바치며 毅宗을 皇帝라 불렀다”는 대목이 있다고 한다(역사스페셜 4권). 이상한 글이다. 毅宗이 직접 썼는데, 자신을 毅宗이라 그러고. 毅宗이 王에 불과 했다면 이렇게 썼다. “日本이 보물을 바치며 나를 皇帝라 불렀다.” 高麗는 東아시아의 유일한 皇帝國이었다. 그러니까 日本이 조공을 하면서 황제라 부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로부터 65 년 뒤에는 왜구(倭寇)가 출몰해서 高麗 땅에서 노략질을 하기 시작 했다는데...... 日本은 上國으로 섬겨온 高麗에서 온갖 잔학행위를 시작한 것이다.

주목할 점은 倭寇가 중국 대륙을 노략질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韓半島만 노략질했다. 高麗의 역사는 宋에 배당되었다. 倭寇가 16 세기에 明을 노략질하던 광경을 그린 왜구도권(倭寇圖券)이 도쿄 대학 사료편찬소에 소장되어 있다. 倭寇가 약탈한 明의 유물도 對馬島에서 발견됐다. 그런데 宋을 노략질 했다는 기록이나 宋의 유물로 날조된 중국 대륙에 있던 高麗의 유물은 日本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倭寇는 중국 대륙이 아니라 韓半島를 노략질한 것이다. 崔茂宣이 倭寇 500 척의 대선단을 격파했다(?)는 진포대첩(鎭浦大捷)과 李成桂(?)가 지휘했다는 황산대첩(荒山大捷)은 韓半島에서 일어났다. 실상 鎭浦도, 荒山도 아니었던 것이다.

日本은 중국 대륙이 아니라, 韓半島에 있던 高麗 諸王에게 朝貢을 했다. 高麗 시대에도 중국 대륙을 오갈 능력이 없었다. 日本은 高麗 제왕에게 조공하며 皇帝라 불렀던 것이다. 그 말이 너무 웃겨서 적어 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高麗를 韓半島의 나라로 축소시켜 놓았으니까, 日本이 조공하는 제왕을 둘 수 없고, 그래서 毅宗을 皇帝라 불렀다고 바꿨다. 일본은 1019 년 韓半島의 제왕이 파견한 高麗 함대에 정복되었을 때부터 韓半島에 조공했다.

기원전 65 년경에 그렸다는 기토라(キトラ) 고분 벽화 천문도에 의해 韓半島는 百濟 이전부터 북위 38.4° 에서,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주극원의 크기에서 李氏朝鮮 초 까지도 북위 38.4° 에서 천문관측 해왔음이 밝혀졌다. 북위 38.4°는 한반도의 고정적인 천문관측 지점이었다. 高麗 시대에도 당연히 북위 38.4°에서 천문관측했다. 그래서 최적 일식관측지와 韓半島를 다스리는 高麗 제왕의 궁궐 위치가 일치하지 않았다.

高麗의 도읍은 高句麗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도읍이고 大震國의 도읍인데, 韓半島에는 平壤城이라고 날조한 장소에서 떨어진 곳에 高麗 제왕의 궁궐이 있다 보니까, 遷都 사실을 감추고 高麗時代 내내 太祖 王建의 고향 開城을 도읍으로 삼았다고 날조한 것이다. 高麗는 新羅 땅에서 건국해 大震國 古土를 회복한 나라이다. 大震國의 平壤城을 회복한 후, 당연히 우리나라 제1 황성인 平壤城으로 천도했다.

開城이 王建의 고향 이었는지도 심히 의심 스럽다. 王建은 浿西세력을 기반으로 高麗를 건국했다. 後三國의 경쟁은 新羅 땅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浿西地方 이라고는 하지만, 浿水 하류만을 가리킨다. 문제는 浿西와 開城3)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사실이다. 王建이 開城을 기반으로 일어났으면, 浿東은 될지언정, 浿西는 될 수 없다. 王建의 부친(隆)은 금성태수(金城太守)니까, 王建은 開城세력이 아니라 浿西세력을 기반으로 高麗를 건국한 것이 확실하다. 開城에서 태어나서 金城太守로 임명된 부친을 따라와 金城(武漢)에서 성장했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나, 開城이 開京이라고 날조하기 위해 王建의 고향이라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開城의 궁궐터에서 봉황무늬가 새겨진 기와막새가 출토되었다. 韓半島(혹은 동북아)를 다스리던 諸王은 高麗의 皇族 이었던 것이다. 高麗 皇族은 蒙汗에 볼모로 갔다고? 高麗를 침략하지도 못한 蒙古가 무슨 수로 高麗의 황족을 줄줄이 끌고 간단 말인가.

倭寇가 강탈해간 高麗 佛畵 미륵하생경변상도(彌勒下生經變相圖) 및 관경변상서품도(觀經變相序品圖)에는 韓半島의 고려제왕이 살던 궁궐이 그려져 있다. 옛날에는 사진이 없었으니까, 高麗人이라도 중국 대륙의 長安城 근처에 살지 않으면 高麗 皇帝가 사는 궁궐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韓半島에 있는 장인이 만든 彌勒下生經變相圖, 觀經變相序品圖에는 韓半島에 있던 高麗 제왕의 궁궐을 그려 넣은 것이다.

高麗의 궁궐은 高麗 末 紅巾賊의 침입으로 불탄 이후 다시는 제 모습을 찾지 못했다고? 참 편리도 하네. 大震國의 長安城도 불탔다고 하더니, 우리나라는 궁궐도, 역사책도 모조리 불타는군. 아무 것도 불탄 게 없다. 大震國의 황성도, 高麗의 황성도, 大震國의 역사책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날조 高麗史에는 江華 천도 당시, 開京의 호수가 10 만이라고 했다. 開京은 長安城이다. 그런데 겨우 10 만? 開京에는 외국 사절과 상인들이 묵는 객관도 궁궐만한 것이 10 개라고 했다. 그런 곳에 고작 10 만호만 산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南北國 時代 新羅의 수도 桂林(鷄林)에도 17 만 8 천 9 백 36 호가 살았다고 했다. 그나마 桂林에는 新羅 귀족과 부유층만 모여 살았다. “47 대 憲康王 때 성 중에 초가집이 없었고 처마가 서로 맞붙고 담장이 서로 이어져 있었다(今之民間 覆屋以瓦 不以茅 炊飯以炭 不以薪 三國史記).”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統一王朝이자 동아시아의 지배자로 군림한 高麗의 開京에는 몇 가구가 살아야 하는가. 6 세기 초 百濟의 인구는 4600 만 명이었다. 高句麗와 新羅도 있다. 高麗의 인구는 2 억을 상회했을 것이다.

일본의 쇼유키(小右記)를 보면, 1019 년에 벌써 우리나라 에서는 大砲를 장착한 전함을 만들어 실전에 배치하고 있었다. 화약과 전함의 개발은 너무도 중요한 사건이라 절대 高麗가 누락시켰을 리가 없다. 火藥을 발명하고, 화전(火箭), 화구(火毬), 질려포(翐藜砲), 비화창(飛火槍)을 개발했다는 宋이 전쟁만 했다 하면, 여지없이 박살이 났다. 遼汗, 西厦, 金汗을 거쳐 결국 蒙古에게 망했다. 火藥은 宋이 발명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발명했다.

火藥은 장식품으로 발명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倭도 위협했던 것 아닌가. 高麗는 무력에 있어서도 강력한 나라였고, 이런 나라이니 만큼 失地 回服에 나선 것은 당연하다. 高麗가 黑龍江 유역 혹은 그 너머에서 관측한 일식기록이 일본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인당(印璫) 최영(崔瑩) 등 여러 장수들을 보내사 압록강 이서의 8 참(八站)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印璫崔瑩等諸將攻鴨綠江以西八站破之 太白逸史)

여기서도 ‘鴨綠江 以西’라고 했다. 江東六州가 방위와는 상관없는 명칭이라는데, 그렇다면 江의 以西, 以東, 江의 以南, 以北도 바꾸어 말한단 말인가. 동쪽하면, 서쪽으로 알아듣고, 북쪽하면 남쪽으로 알아 들었단 말인가. 高麗 때는 동쪽이 남쪽이었고, 북쪽이 서쪽이었던가.

江東6州는 西鴨綠江(嘉陵江)에 위치했다. 그래서 江의 동쪽 6州가 된 것이다. 太祖 王建이 西京을 중시하라 유시하고, 4 代 光宗이 西鴨綠江 밖의 濊貊族을 柴達木盆地로 내쫓았는데, 6 代 成宗 때 어떻게 거란이 高麗 영토인 西鴨綠江 이동을 줄 수 있는가.

江東 6州를 설치한 것은 成宗이 아니라 太祖이다. 지금의 鴨綠江에서 어떻게 江東 6州를 확보하는가. 수도 없이 高麗史를 날조 하면서도 李氏朝鮮은 江東 6州를 미처 江南 6州로 고치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西鴨綠江이 사라진 것은 대대적인 高麗史 날조가 끝나고 한참 후인 肅宗 때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사축소는 李氏朝鮮 내내 계속됐지만, 南北으로 흐르는 西鴨綠江이 사라졌으니 江東 6州를 고쳐야 한다는 것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역사날조가 얼마나 어려운 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리나라 영토를 韓半島로 축소시키기 위해 生女眞을 종이 위에서 新羅 말, 高麗 초에 南下시키고 熟女眞을 柴達木盆地에서 동쪽으로 끌고 왔다. 高麗 말, 李氏朝鮮 初라고 하지 않은 것은 물론 濊貊族이 책임을 면하기 위해서다. 熟女眞(滿州族)의 나라 金汗을 生女眞이 세운 나라라 날조한 것은 後代의 일이다. 生女眞은 李氏朝鮮에 조공하고 있었다고 高麗史와 李氏朝鮮實錄에 실려 있다. 생여진도 李氏朝鮮의 억압 및 차별, 멸시에 분연히 봉기해서 明을 정복하고 淸을 세웠던가.

수월관음도 일본에 있는 수월관음도는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알려져있다

高麗의 수도가 韓半島 開城이라면, 黑龍江 상류의 생여진을 정복한 高麗는 절대 東北九城을 둘 수 없다. 北九城을 설치해야 한다. 高麗는 滿州에서도, 黑龍江에서도 일식관측한 나라다. 李氏朝鮮도 1599 년 까지 滿州에서 일식관측한 것이 일본 역사책에 남아 있다.

東北九城은 반드시 高麗의 동북쪽에 위치해야 한다. 江東六州는 반드시 강의 동쪽에 위치해야 한다. 5 천년 천문강국이, 책력까지 중국에서 갖다 썼다고 날조 당하면서 방위라도 정확해야지, 그것마저 포기하면, 천문관측은 취미활동이었나.

高麗의 영토는 여러 책에 나와 있다.

고려는 남쪽으로 요해(遼海)에 막혀 있고, 서쪽으로 요수에 접하고, 북쪽으로 거란의 옛 땅에 접하고, 동쪽으로는 금나라 그리고 일본, 유구, 탐라, 흑수, 모인(毛人) 등의 나라에 접해(距;떨어져) 있다(高麗南隔遼海西 距夭水北接契丹舊地東距大金又與日本流球耽羅黑水毛人等國 海東繹史-烈水 地理考 高麗 疆域總論)

고려는 남쪽으로 요해에 막혀 있고, 서쪽으로 요수에 접하고, 북쪽으로 거란의 옛 땅에 접하고, 동쪽은 금나라와 맞닿아 있다. 또한 일본·유구·탐라·흑수·모인 등의 나라와 견아상제(犬牙相制) 모양으로 되어 있다(高麗南隔遼海西距夭水北接契丹舊地東距大金又與日本流球耽羅黑水毛人等國犬牙相制 高麗圖經)

高麗圖經이 원출처이다. 高麗의 강역을 기술한 저 대목 역시 슬쩍 고친 날조기사이기 때문이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저 기사가 高句麗 영토에 대한 기술이라고 단정한다. 왜냐하면, “高麗가 新羅를 계승 하였다고는 하지만 강토는 이미 압록강에서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하는 땅이 되었으며, 북방과 더불어 스스로 관계를 가지지도 않았었다. 또한 遼나라와 金나라의 기세가 국경을 위세로 억누르니, 구구하게 鴨綠江 이남의 수천 리 땅으로 다시금 웅혼하고도 거대했던 나라와 비교될 수가 없었기에, 백성의 기세가 저절로 쇠미해짐이 옛날보다 심하게 되었다(高麗旣承羅後 而疆土不出鴨水以外一步之地 自與北方無涉 且遼金之勢 威壓境上 區區鴨水以南數千里地 更非雄邦巨國之比 則民氣之衰微自有甚於古者矣 揆園史話)."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高句麗라면, 金汗이 있을 리 없다. 金汗은 1115 년에 세워진 나라다. 高句麗는 동북아를 상실했다. 高麗圖經은 高麗에 대해 기술한 책이었던 것이다.

우선 高麗의 영토가 “일본·유구·탐라·흑수·모인 등의 나라와 견아상제(犬牙相制) 모양으로 되어 있(日本流球耽羅黑水毛人等國犬牙相制)”으려면, 반드시 중국 대륙과 韓半島 이북에 땅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 韓半島 뿐인데, 어떻게 日本·流球·耽羅·黑水·毛人 등의 나라와 犬牙相制(개 이빨 형상)가 되겠는가.

遼水는 오늘날의 遼寧城에 있는 遼水가 아니다. 嘉陵江을 말한다. 李氏朝鮮 初에도 遼水는 桑乾河였다. 그리고 遼西도 高麗 땅이다.

高麗는 “남쪽으로 遼海에 막혀 있다(高麗南隔遼海)”에서 遼海는 발해만이다. 高麗의 영토가 韓半島고 遼海가 남해라면, 황해, 동해로는 안막혔는가. 遼海가 황해, 동해가 아님은 “고려는 ‘남쪽’은 요해(遼海)로 막”혀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고지도를 고쳐서 지명을 밀어낸 중국 고지도에는 한반도를 아예 생략했다.

1824 년에 遼水로 돌변한 현 遼水는 遼汗(916~1125)하고 전혀 관계가 없다. 우선 淸이 날조한 지리도에는 遼汗 때의 遼水가 난하(灤河)라고 표시되어 있다. 794 년 에서 1183 년 까지 黑龍江 이북에서, 1343 년에서 1599 년 까지 滿州에서 관측한 우리나라 일식을 일본이 베꼈다. 물론 遼汗은 발해만을 차지해본 적도 없다. 遼汗이 차지한 大震國의 동북아 영토는 大興安嶺山脈 이북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渤海는 국명이 아니다. 大震國이다. 따라서 大震國의 바다라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라면, 大震海라고 불렀을 것이다. 오늘날의 오오츠크해가 大震海로 추정된다. 시베리아가 大震國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三聖紀全 上篇에서도 渤海灣을 遼海라 했다. “衛滿이 몰래 서쪽 변방 한 모퉁이에 살았는데, 番韓의 準이 그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바다에 들어가 망하였다. 이로부터 三韓의 무리는 거의 漢水의 남쪽으로 옮겨갔으나 한때에는 여러 영웅들이 遼海의 동쪽에서 군대를 일으켰다(衛滿竊居西鄙一隅番韓準爲戰不敵入海而亡自此三韓所率之衆殆遷民於漢水之南一時群雄競兵於遼海之東).”

李氏朝鮮의 시각에서 우리나라 강역을 韓半島와 그 이북으로 축소한 날조기사다. 그래서 고작 우리나라 영웅들이 渤海灣 동쪽에서 군대를 일으켰던 것이다. 安含老의 三聖紀全은 實史에 날조사[“丙辰年, 周나라 考王 때(丙辰周考時)” 이후)를 덧붙인 글이다. 축소시킨 강역으로 보건데, 遼海를 발해만으로 바꿔 부른 것은 李氏朝鮮이 발해만을 상실한 18세기쯤일 것이다.

거란의 옛 땅이래야 중앙아시아고, 캐시미르를 통해 들어온 티벳고원 북부의 서쪽이다. 티벳고원으로 들어와 있다가 나라를 세워 티벳고원 북부를 일부(宋)만 남기고 다 차지했다. 중요한 것은 大震國 까지 멸망 시켰다는 사실이다 高麗圖經을 쓴 시점에서는 거란은 高麗에 의해 3차례나 격파되어 中土 내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高麗는 大震國의 古土를 전부 회복 하지는 못했다. 武臣政變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武臣이 정권을 잡았으니, 국방이 강화되겠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개인의 이익 외에는 관심이 없는 집단 이었다. 거란의 옛 땅이란 高麗가 회복하지 못한 大震國 古土이다.

거란이 한 때 大震國을 멸망 시켰으나, 그것은 거란이 강해서가 아니고, 大震國이 내부분열로 한없이 나약해졌기 때문이다. 12세기 이전부터 거란도 遼汗이라는 빈껍데기만 남은 상태였다. 金汗은 강성한 遼汗을 멸망시킨 것이 아니라, 高麗의 침공으로 겨우 명맥만 남아 있는 遼汗을 멸망 시켰던 것이다.

“동쪽은 金나라와 맞닿아 있다(東距大金)”는 말은 명백한 왜곡으로 金汗은 高麗와 서쪽으로 맞닿았다. 柴達木盆地에 살던, 高麗의 속민 숙여진은 高麗의 허가를 구하고 中土로 들어가 金汗을 세웠다. 그러므로 金汗의 太山은 티벳고원 북부에 있었다. “동쪽으로는 金에 접해 있다.”고 날조한 이유는? 우리나라 강역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라고, 도저히 못 찾으면 날조 中奴史를 순순히 받아들일 것이라고 판단한 때문이다.

유구(流球)는 류큐다. 지금의 오키나와(沖繩)로 일본과 대만 사이에 있는 섬이다.

탐라(耽羅)는 제주도가 아니다. 耽羅가 제주도라면, 日本을 쓸 필요가 없다. 또 耽羅가 제주도라고 한다면, 對馬島도 써야 하지 않는가. 耽羅는 臺灣이다. 하지만 耽羅는 高麗 영토였다. 高麗圖經 자체가 완전히 날조됐다.

三國志는 3 세기의 東夫餘를 설명하면서 “남쪽으로는 高句麗와 동쪽은 挹婁와 서쪽은 鮮卑와 접하고 있다. 북쪽에는 弱水가 있다(夫餘在長城之北去玄菟千里南與高句麗東與挹婁西與鮮卑接北有弱水方可二千里).”고 날조했다. 東川帝가 242 년 西安平을 공략했다. 이 당시 西安平은 遼西에 있지만, 날조 역사책에는 遼東 이라고 나온다. 날조사에서 이 당시 高句麗는 吉林市 일대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東夫餘는 동북평원에 있었던 셈이다. 東北平原 북쪽에 弱水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三國志가 우리나라 역사책을 분해해 쓴 책이라는 점에서 弱水는 中土 북쪽에 있었다. 東北平原 북쪽에는 黑水가 있었던 것이다. 남쪽 高句麗와 동쪽 挹婁와 서쪽 鮮卑와는 ‘접’한 반면, 북쪽의 弱水는 접했다는 말이 없는 것은 날조 東夫餘 영토가 黑水와 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中土도 弱水와 상당한 거리로 떨어져 있었다.

大震國도 黑水靺鞨을 비롯한 대부분의 靺鞨 세력을 복속 시켰다. 그런데 동북아는 3, 4 세기 이후 百濟 영토였고, 百濟 영토는 大震國과 新羅가 분할했다. 新羅가 중국 대륙 동부에 있었으므로 동북아 남부는 新羅, 북부는 大震國이 가질 수밖에 없다. 蒙古高原이 중국 대륙 동부를 가진 新羅의 영토라면, 大震國은 동북아로 줄어든 百濟 땅을 한 줌도 차지할 수 없을 뿐더러, 시베리아에서 일식관측할 수도 없다.

영토도 자연지형을 기준으로 나눈다는 점에서 大興安嶺山脈 이남은 新羅, 이북은 大震國의 땅이다. 日本이 베낀 710 년에서 792 년 사이의 일식기록을 보면, 몽고고원 이북에서 黑龍江 상류가 빠지고, 黑龍江, 중, 하류 유역 너머(스타노보이산맥)가 일식관측지로 나온다. 黑龍江 중, 하류는 新羅 영토지만, 중, 하류 저편은 大震國 영토다.

高麗史에는 “女眞의 강역은 서쪽으로 우리나라와 경계를 접해 있기 때문에 일찍이 거란과 우리나라를 섬겨 몇 번 와서 조회했다.”고 했다. 저 글만으로는 西女眞인지 東女眞인지 애매하다. 高麗의 서쪽인지, 女眞의 서쪽인지 적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西女眞은 高麗의 수도 지척에서 거주하는 탓에 수시로 와서 조회 해야지, 몇 번만 조회할 수가 없다.

黑水女眞은 거란과 高麗를 동시에 섬긴 것이 아니라, 거란과 영토를 접했을 때는 거란을, 高麗와 영토를 접했을 때는 高麗를 섬겼다. 大震國이 거란한테 멸망하고 나서 거란이 차지한 大震國의 영토를 高麗가 탈환했다.

大震國은 시베리아에서 일식관측했다. 국경지대에서 천문관측하는 나라는 없다. 新羅와 高麗가 黑龍江 중, 하류에서 천문관측 했다는 것은 黑龍江 중, 하류 너머도 우리나라 영토라는 의미다. 高句麗가 黑龍江 상류에서 일식관측한 시기는 2, 3 세기 까지이고, 이 당시는 生女眞이 黑水로 이주하기 전이다.

生女眞이 新羅가 아니라 大震國에 복속했고, 黑龍江 상류가 大震國 일식관측지(일본이 베낀 710 년 에서 792 년 까지)에서 빠졌고, 이후에도 黑龍江, 중, 하류에서 일식관측(일본이 베낀 794 년 에서 1183 년 까지)했다는 사실에서 黑水女眞이 거주 했다는 黑水는 黑龍江 전체가 아니라 黑龍江 상류만을 가리킨다. 그러나 黑水가 내내 우리나라 국경선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동쪽은 창해, 서쪽은 요서, 남쪽은 남해, 북쪽은 서비로에 이르렀다(檀奇古史)

2 世 檀君 扶婁 당시의 국경이라고 하나, 神人王儉 당시의 국경일 가능성이 높다고 전술했다. 여기서 문제는 그것이 아니고, 西毘盧가 시베리아라는 설이다. 日本이 베낀 710 년 에서 792 년 까지 大震國의 일식관측지가 시베리아인 걸로 보아, 한때 시베리아가 우리나라 영토였던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그때가 언제냐는 것이다. 高句麗의 일식도 黑龍江 상류에서 관측했다. 黑龍江 상류 너머가 우리나라 땅이니까, 그곳에서 천문관측할 수 있었다. 高句麗 이전부터 우리나라 영토는 시베리아를 일부 혹은 전부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시베리아를 일부만 차지 했다면, 西毘盧가 아니라, 南西毘盧라고 하지 않았을까.

대저 구한(九桓)의 족속은 나뉘어 5 종이 되고 피부의 색깔과 모양을 가지고 구별을 짓게 되었다. 그 풍속은 모두다 실제에 임하여 이치를 찾고 일을 계획하여 그것이 옳음을 구함이 같았다…. 백부의 사람(白部之人)은 피부는 밝고 뺨은 높고 코도 크며 머리털은 회색이다(蓋九桓之族分爲五種以皮膚色貌爲別也皆其俗就實究理策事而求其是則同也......白部之人皮膚晳頰高鼻隆髮如灰 太白逸史 三神五帝本紀)

白部人에 대한 설명은 白人種을 가리킨다. 오늘날 시베리아는 白人種과 혼혈이 많이 이루어 졌지만, 古시베리아인은 黃人種 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古考學 ·言語學 등에 의하면 슬라브족의 조상은 고대에 아시아로 부터 이동하여 3 세기 까지 적어도 1000 년 이상 카르파티아산맥(Muntii Carpati) 북방의 비스톨라江 유역에서 드네프르(Dnepr)江 유역에 걸치는 지방에서 살고 있었다고도 한다. 타림분지(塔里木盆地)에 사는 白人은 7 세기 이후 이주한 아랍인이다. 西투르키스탄(Turkestan) 북부의 철도 연변에는 슬라브族이 살고 있다. 이주민일 것이다. 어쨌거나 저 기사는 朝鮮의 강역 어딘가에 白人이 살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朝鮮의 강역이 서남아시아에 이르렀다면, 후대에 강역이 축소 되었다는 뜻이다. 바이칼호 일대는 우리민족이 살았으므로 白人은 북시베리아에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朝鮮에서 北夫餘로 또 다시 高句麗로 이어지는데 무력 사용은 없었다. 시베리아를 상실할 이유가 없다. 高句麗의 일식관측지가 黑龍江 상류이다. 시베리아는 高句麗 영토였던 것이다.

柴達木盆地에 눌러앉은 숙여진과 마찬가지로 黑水女眞도 우리나라 영토 내에 주저 앉았다. 유일한 선택이었다. 新石器人처럼 떠돌며 살았던 전투력이 없던 黑水女眞 으로서는 우리나라 영토 바깥으로 나가 남의 나라 영토를 확보할 수가 없었으니까. 黑龍江 상류에 눌러앉은 黑水女眞을 내버려둔 것은 이 시기에 高句麗가 동북아 북부를 상실 했거나 黑水女眞도 百濟의 침공을 방어하는데 활용할 수 있으리라 판단한 때문이다.

高麗圖經은 책 전반에 걸쳐 날조된 책이다. 高麗의 강역에 대한 기술조차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高麗가 遼水에 접했다는 것이나 金汗이 高麗의 동쪽에 있다는 것도 거짓말이다. 그러나 高麗 이전에 黑水 이북을 상실했을 가능성이 높다. 高麗圖經은 원래 高麗人이 쓴 책을 뜯어 고쳤기 때문이다. 시베리아를 상실한 시기는 大震國이 멸망했을 때다.

大震國 영토가 거란에게 넘어 갔지만, 시베리아는 거란의 지배에서 독립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식기록상 黑龍江 중류 이북은 여전히 高麗 영토다. 거란이 차지한 大震國의 고토를 찾겠다는 것이 高麗의 北伐政策 이니까, 시베리아 회복도 포함 되었지만, 武臣政變이 일어난 후에는 북벌정책도 폐기 되었다. 武臣政權은 개인적 이익 외에는 蒙古가 취한 高麗 땅을 탈환할 의지도, 古土 회복 의지도 없었다. 高麗가 시베리아를 탈환하지 못했으니, “高麗는 북쪽으로 거란의 옛 땅에 접한다(北接契丹).”

高麗圖經을 高麗人이 썼다는 점에서 原文은 이렇다.

고려는 북쪽으로 대진국의 옛 땅에 접한다.

毛人은 홋가이도(北海道)가 아니다. 왜냐하면 日本4)의 바로 지척에 있기 때문에 굳이 연달아 밝힐 필요가 없다. 사할린(サハリン) 섬이다. 日本이 베낀 794 년에서 1184 년 까지의 우리나라 일식의 최적관측지가 사할린의 맞은편이다.

日本, 流球, 耽羅, 黑水, 毛人이 섬이나 강이라서 高麗와의 사이에 바다 내지 물이 끼어 있었기 때문에 떨어질 거(距)를 사용했던 것이다. 高麗圖經의 글이 사실이면, 高麗 영토는 스타노보이(Stanovoy) 山脈 까지이다.

1421 년 아메리카를 발견한 정화(鄭和, 1371~1435)함대는 明이 아니라, 高麗의 함대이다(후대의 이씨조선의 태종조와 세종조에 해당된다). 아무리 우리나라로 기어들어 왔다고 해도 明은 曆法조차 만들지 못해 授時曆을 베껴서 大統曆이라 한 나라다. 明, 淸과 李氏朝鮮으로 분할된 이후 한문명은 퇴보를 거듭했다. 한문명은 高麗에 이르러 절정을 맞이했다. 高麗는 세계 최고의 造船術과 航海術을 보유하고 있었다. 1421 년은 新羅가 東中國海를 건너 韓半島를 침공한 지도 千年이 넘었을 때다.

그러나 시베리아를 상실한 高麗 때 이르러 아메리카 탐험을 나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정말 高麗는 “黑水·毛人 등의 나라와 犬牙相制 모양으로 되어 있”(高麗圖經)었을까. 사할린 너머의 땅을 차지하지 못했을까. 高麗의 영토가 추코트반도(Chukot Pen)에 이르러야 영토 끝에 서서 베링해를 바라보며 그 너머의 대륙에 관심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中國은 高句麗도 高麗라 부르기도 했다면서 高麗圖經 속에 高句麗에 대한 기술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선 高麗圖經은 宋人이 아니라, 高麗人이 쓴 책이다. 날조 하면서도 高句麗와 高麗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그래서 高麗圖經 1권에서 “高麗의 선조국 高句麗를 漢나라의 현토군으로 예속시켰다.”라고 날조 漢四郡을 더욱 발전시켰다.

乙酉 2 년(B.C. 1236) 남국(藍國)의 임금 금달(今達)이 청구의 임금, 구려(句麗)의 임금과 주개(周愷)에서 회합하고 몽고리(蒙古里)의 병력을 합쳐 가는 곳마다 은(殷)나라의 성책을 부수고 깊숙이 오지로 들어가 회대의 땅을 평정 하였다(乙酉二年藍國君今達與靑邱君句麗君會于周愷合蒙古里之兵所到破殷城柵深入奧地定淮岱之地 檀君世紀)

부소(夫蘇)와 부우(夫虞) 및 작은 아들인 부여(夫餘)는 모두 나라의 서쪽 땅에 봉하니, 구려(句麗)와 진번(眞番) 및 부여 등의 여러 나라가 바로 그것이다(夫蘇夫虞及少子夫餘皆封于國西之地句麗眞番夫餘諸國是也) 부여후(夫餘侯)가 설유(稧兪) 때문에 어려움을 치르자 웅가(熊加)와 구려후(句麗侯) 및 진번후(眞番侯) 등이 도와서 이를 평정하였다(夫餘侯有稧兪之難熊加與句麗眞番侯助平之)

구려후(句麗侯)인 우타(于佗)가 들어와서 용가(龍加)가 되었다(句麗侯于佗入爲龍加)(이상은 揆園史話 檀君紀)

句麗와 구분하기 위해 高자를 붙였던 것이다. 高麗라고 부르는 것은 결국 ‘麗’라는 소리니까, 中土의 소국이 高麗라고 부를 수는 없다. 高句麗를 高麗라 부른 것은 百濟다. 더 심하면 여적(麗賊)이라 불렀던 것이다.

국명이 비슷해서 中奴가 착각해? 중국에는 아예 똑같은 이름을 가진 나라 천지다. 燕만해도, 北燕, 後燕, 前燕, 南燕에 西燕이 있고, 여기에 원연(原燕)이 붙는다. 原燕은 春秋戰國 時代의 燕이다. 燕뿐이 아니다. 누군가 이름 짓는 노력을 무척 아끼느라 魏, 齊, 周, 晉 등 모두 방위와 前, 後를 붙였다. 後漢도 셋이나 된다.

王莽의 新나라 이후에 세운 後漢 말고도 304~ 329 년까지 존속한 後漢과 947~ 950 년까지 존속한 後漢도 있다. 中奴도 창피한지 劉邦의 漢나라를 前漢, 後漢에서 이제는 西漢, 東漢이라 고쳐 부른다. 그래도 역사책은 前漢書, 後漢書다. 南漢, 北漢 까지 있다.

春秋戰國 時代는 나라가 백 개나 난립했던 터라 엄청 골치가 아팠던지 모조리 외자 국명을 붙였다. 하지만 정복민들이 中土의 나라, 그것도 春秋戰國 시대의 小國들의 이름을 따르길 원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전혀 없다. 春秋戰國 시대의 小國처럼 고작 中土 한 줌을 차지하고 싶지는 않았을 테니까, 극구 피해갔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北燕, 後燕, 西燕, 前燕, 南燕, 北魏, 東魏, 西魏...... 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 거란, 濊貊, 蒙古만 해도, 遼汗, 金汗, 蒙汗이라 했다. 단, 淸은 가짜 문명대국 中奴가 되고자 기를 쓴 나라다. 3 백년 사이에 金汗에서 淸이 되길 원했던 것이다.

番韓 만을 朝鮮으로 알고 있다고? “韓國의 馬韓 땅이 적당할 것 같아 馬韓의 동쪽을 나누어 같이 살았으며 말은 秦나라와 비슷하여 그런 이유로 나라 이름을 秦韓 이라고 하였다(適韓國而馬韓割東界地以與之 相呼爲徒 有似秦語 故或名之爲秦韓 後漢書)." “新羅國은 본래 弁韓의 후예다(新羅國本弁韓之苗裔也 舊唐書)." 비록 番韓을 弁韓이라 썼지만, 그것은 제대로 부르기 싫어서 한 소리고 辰韓, 番韓, 馬韓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後漢書와 三國志에서는 “馬韓 사람들은 잠상을 알며 솜과 베를 만든다(馬韓人知田蠶作撓布).”고 했다. 新羅는 3 차 辰韓의 후예이다.

포정박(鮑廷博, 1728~1814)은 高麗圖經을 날조 하면서 이런 말은 남겨두었다.

북송(北宋)의 사신들이 고려에 입성하여 조서를 받을 때는 용호군(龍虎軍: 친위병) 수만 명이 갑옷을 입고 길 양쪽으로 행진한다.

北宋(?)의 사신을 영접한 것이 아니고, 宋나라 사신이 高麗에 왔을 때, 길 양옆으로 병사들이 끝없이 행군하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미쳤다고 동아시아라는 광대한 영토를 가진 高麗가 손바닥만한 宋의 使臣을 수만 명을 동원해 사열케 할 것인가. 詔書를 받는 주체도 北宋의 사신이다. 사열도 아니고, 길 양쪽으로 행군한다고 했다.

설령 北宋(?) 사신이 조서를 받는 장소에 高麗 皇帝의 대규모 친위부대가 도열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高麗 황제의 권위를 과시하고 미개 宋人을 위압하기 위해서지, 宋을 대우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런데 鮑廷博은 宋나라 사신을 대우해 주느라 사열 이라도 해준 것으로 착각하고 남겨 놓았던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高麗 수도에서 수만 명이 한꺼번에 행군을 하더라는 것이다. 한 번에 수만 명이나 행군할 정도면, 高麗 황제의 친위병이 수십 만 명은 족히 됐다는 것이다. 百濟와 高句麗는 국가의 명운을 걸고 싸우느라 백만대군을 육성 했지만, 高麗에게는 대적하는 나라가 없었다. 그러나 高麗의 영토는 티벳고원 북부의 中土만 제외하고, 동아시아 전체로 광대했다. 거대한 영토를 수비하는 병력이 없으면 小國조차 침범하기 마련이다. 또한 인구도 三國時代보다 훨씬 증가했을 테니까, 2 백만 이라고 해봐야 총인구 대비 1 % 에 해당한다. 결국 高麗는 백만 대군 내지 2 백만 대군을 실제로 보유했다.

後百濟 이후로 적다운 적이 없었던 高麗는 대군을 해산하지 않고 주변 속국들을 위압하는 수단으로 적극 활용했다. 이를 테면 고작 거란을 침공 하면서 80 만 대군이나 동원하고, 수도방위군을 수십 만이나 두고 高麗 수도를 찾는 속국 사신이나 세계에서 몰려드는 상인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하는 것 등이다. 高句麗나 百濟는 中土의 날만 새면 사라지고 등장하는 나라들과 中國倭를 가리켜 漢委奴國이라 부른 오만과 자만심의 나라지만, 高麗는 그런 면에 있어서 한술 더 뜬 나라였던 것이다.

高麗圖經에 있는 高麗의 영토에 대한 또 다른 기술을 보자.

오직 신라와 백제가 스스로 그 국경을 견고히 하지 못하여 고려 사람들에게 합병되니, 지금의 나주도(羅州道)와 광주도(廣州道)가 이것이다. 그 나라는 경사(京師 : 송나라 수도 개봉)의 동북쪽에 있는데, 연산도(燕山島)로부터 육로로 가다가 요수(遼水)를 건너 동쪽으로 그 나라 국경에 이르기까지, 무릇 3790 리(1516 km)이다.

현 사학계는 廣州道가 “경기 광주의 덕풍역을 중심으로 한 역도(驛道)”라고 한다. 그러면 전라남도 羅州에 新羅가 있었단 말인가. 百濟와 新羅가 도시국가란 말인가.

高麗圖經 역시 날조의 음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燕山道로부터 육로로 가다가 遼水를 건너 동쪽으로 그 나라 국경에 이르기까지”라는 대목만 보아도 확실하다. “高麗史의 光宗 10 년조에 ‘鴨綠江 밖의 女眞을 白頭山 밖으로 몰아내어 살게 하였다(高麗史光宗十年逐鴨綠江外女眞 於白頭山外居之 揆園史話)." 遼西는 光宗 10 년(958) 이전부터 우리나라 땅이다. 光宗 10 년조, 압록강 밖의 女眞을 백두산 밖으로 몰아내어 살게 하였다는 기록은 遼西에 살게 내버려둔 女眞族을 柴達木盆地로 옮기고, 遼西에는 高麗人들만 살게 했다는 뜻이다. 遼西도 高麗 영토라서 太祖 王建이 西京(현 重京)을 중시하라고 했다. 燕山道조차 高麗의 영토였던 것이다. 燕山島는 섬이 아니고, 행정구역명이다. 道를 음이 같은 島로 바꿔치기 했을 뿐이다. 百濟城에서 白帝城으로, 黃河를 潢水로 바꾸었듯이.

高麗의 수도 開京은 宋 수도 開封의 동북쪽에 있다고 했다. “燕山島로부터 육로로 가다가 遼水를 건넌다”고 했으므로 燕山道 이전에 수로(水路 강물)를 건넜다는 뜻이다.

라사(拉薩)에서 長安은 북동쪽에 있으면서 3790 리(1516 km)쯤 떨어져 있다. 開封이 怒江 이북에 있었다면, 開京에서 동쪽에 위치한다. 라사가 宋의 수도 開封 이었다(물론 唐의 長安이기도 했다). 開封에 있다가, 중토 서쪽에서 金汗이 영토를 확장하자, 宋은 수도까지 빼앗기고, 영토가 더욱 축소 되었다. 遼西는 高麗 영토니까, 宋은 티벳고원 북부 동쪽에 간신히 붙어 있었던 것이다.

원래부터 宋은 티벳고원 북부 동쪽에 있었고, 더욱 축소되어 티벳고원 북부 대부분을 金汗이 차지했다. 北宋도 없었고, 南宋도 없었다.

高麗의 행정구역도 알 수 있는데, 新羅가 있던 揚子江 하류에 羅州道, 百濟가 있던 揚子江 중류 이남에 廣州道가 있었다.

1388 년(江陵帝 14) 5 월, 明의 전진기지로 변한 遼東征伐에 나섰다던 李成桂가 威化島에서 회군했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현 鴨綠江 하류에 있는 섬이 위화도라고 우긴다. 그러나 위화도는 절대 섬이 아니다. 威化道를 威化島로 고친 것이다.

출정하는 군대가 뭐 하러 섬에 들어간단 말인가. 李成桂에게 대규모 육군을 섬으로 이동시킬 수단이 있었단 말인가. 헤엄쳐서 갔는가. 回軍을 결심 했으면, 진격로상에 그냥 주저 앉으면 된다. 실제로 그렇게 했다. 威化道는 嘉陵江 근처에 있던 행정구역 이었던 것이다. 李成桂는 鴨綠江(嘉陵江)을 건너 泰川(富江)에서 회군했다. 威化道는 富江까지 포함하는 鴨綠江 이서의 행정구역이다.

江華道 역시 행정구역명이다. 도자만 道에서 島로 고쳐 韓半島의 섬이라 우긴 것이다. 韓半島의 섬 江華島는 도저히 39 년간이나 외부와 고립한 채 항쟁을 할 수 있을 만한 크기가 아니다. 우선 수만의 장병이 주둔하자면, 그만한 주둔지가 있어야 하고 군량미(軍糧米)를 거둘 농경지가 있어야 한다. 군대가 사용할 무기와 훈련장…. 더구나 江華島에는 정부와 군대만이 아니라 開京 住民들까지 이주했다고 날조했다.

그래서 해결책으로 高麗의 백성들이 江華島에 이중으로 세금을 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당시 세금이란 쌀 등의 현물일 텐데, 江華島에 주둔한 수만의 장병을 먹이고 무기를 만들 금속을 배로 운반 하자면, 이 또한 장난이 아니다. 군수품도 수송할 수 있는데, 高麗를 정복하려는 蒙古軍이 과연 40 년간 진입하지 못할 것인가. 날조사에는 蒙古도 해전까지 수행했다.

차라대(車羅大)가 일찍이 수군 70 척에 깃발을 줄지어 세우고 압해도(押海島)를 치려고 윤춘(尹椿)과 한 관인을 시켜 배를 타고 독전케 했다 …. “우리 배가 대포를 맞으면 반드시 가루가 될 것이니, 당할 수 없다”하고, 다시 배를 옮겨 치게 했으나 압해인(押海人)들이 곳곳에 대포를 배치했기 때문에 몽고인들이 드디어 수공의 장비를 모두 파(破)하고 말았다(高麗史節要)

蒙古人은 안전한 곳에 있고, 高麗人 보고 독전케 했다는 것에 주목하자. 蒙古의 실상이다. 押海島는 섬이 아니다. 道를 島로 고치면 행정구역을 간단히 섬으로 날조할 수가 있다. “押海人들이 곳곳에 대포를 배치했다.”고 했다. 高麗의 군대가 아니라, 押海島의 주민이라는 것이다. 이 당시 高麗軍은 사병화되어 권력투쟁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蒙汗 으로서는 거저 얻은 高麗 땅에 東寧府, 雙城總管府 등을 설치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蒙汗干涉期에 江華島에는 開京에도 뒤지지 않은 만큼 번듯한 관료들의 저택이 즐비했다? 그러면서 韓半島의 江華島에는 東軒과 이방청(吏方廳) 건물만 남아 있다고 한다. 지상건물은 사라져도 皇宮터, 관료들의 집터는 남아 있어야 한다. 하물며 皇龍寺도, 九層塔도, 안압지(雁鴨池)도, 佛國寺도 매몰된 땅에서 유적을 찾아 복원 했다면서 어째서 江華島만 텅 비어 있단 말인가.

高麗史節要에는 이 당시(高宗 44 년 9 월), 江華 등에서 수확한 농산물에 대한 기록이 있다.

강화의 공공전답에서 쌀 2,000 섬, 조 3,000 섬을 수확했다. 똑같이 최의(崔竩)의 집에서 수확했다(江華田二千結屬共粟三千結屬崔竩家 高麗史節要)

공공전답에서 5 천섬, 최의(崔竩) 집에서 5 천 섬 해서 합계 1 만 섬을 수확했다. 4,000 만평의 농지가 있어야만 1 만 섬을 수확할 수 있다고 한다(☞ 강화도와 팔만대장경 참조). 그 외 군소 농장도 다수 있었을 것이다.

섬에 황실 농장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蒙古가 海戰에 약하다고 江華島로 천도 했다고 한다. 江華島가 섬이 아니므로 高麗는 천도하지 않았다. 高麗가 江華島로 천도 했다면 그 틈에 蒙汗이 開京과 黃河 이남을 차지해 버렸다. 武臣政權의 사병 三別草가 江華島로 이동한 기사를 遷都 했다고 날조한 것이다.

2) 압록강 밖의 여진을 몰아낸 건 광종,
강동 6주 를 설치한 건 성종?

궁예(弓裔)가 한강 이북의 땅을 점령하여 차지하고는 잡초만 무성해진 평양 땅을 한탄하며 고구려를 위하여 원수를 갚겠다고 천명하니, 패서의 모든 고을이 그 기세에 힘입고 모여들어 복종하기에, 나라를 세우고 연호를 정함에 그 위세가 모든 고을을 제압하였다(弓裔襲據漢北之地 則恨平壤之茂草 聲言爲高句麗報讎 而浿西諸鎭 望風歸服 立國建元 威壓列州 揆園史話)

거란은 925 년 12 월 말에 大震國을 침공해 926 년에 멸망 시켰고, 後高句麗는 901 년에 건국해서 918 년에 멸망했다. 저 대목은 韓半島를 염두에 두고 쓴 날조기사다. 漢水 이북 땅까지 차지 했다면, 平壤은 물론이고 大震國 영토의 중요지역을 다 탈환한 셈이니까, 高句麗를 위하여 원수를 갚겠다고 천명할 필요가 없다.

弓裔는 살아 생전, 잡초만 무성해진 平壤 땅을 한탄할 수 없었다. 平壤도, 漢水 이북도 아직은 大震國 영토였다. 弓裔는 平壤도, 漢水 이북의 땅도 차지하지 못했다. 高句麗를 위하여 원수를 갚겠다고 천명한 것은 王建 이었다.

弓裔는 臨津江 일대를 공취하여 차차 독자적 기반을 닦아 898 년에는 松岳郡(開城)에 웅거하여 자립의 기초를 세웠다. Asia 1808 에서 開城은 오늘날의 合肥이고, 臨津江은 淮水이다. 지도가 조잡 하니까, 信陽이 開城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504 년 文咨好太烈帝는 百濟의 遼西와 黃山江 이남 땅을 획득하고, 新羅도 수도를 옮기면서 黃山江 이남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淮水 유역의 東夫餘와 그 아래의 伽倻를 멸망 시켰다. 新羅가 漢水 이북으로 진출할 때 까지 淮水 유역은 高句麗와 百濟의 땅이었다. 淮水 유역도 6 세기 이후 三國의 격전장 이었던 것이다.

견훤(甄萱)은 新羅의 서남해 방면에서 전공을 세우고 裨將이 되었다가, 新羅가 혼란한 틈을 타 武珍州(光州?)에 이어 完山州(全州?)까지 점령, 892 년 後百濟를 건국했다. 892 년 이니까, 大震國은 영토를 온전히 보전하고 있었다. 日本이 베낀 628 년에서 709 년 까지의 新羅 일식은 중국 남부 내지 남중국 해상이 최적 일식관측지로 나온다. 新羅 말의 수도가 桂林(鷄林) 이니까, 귀주고원(貴州高源)이나 운귀고원(雲貴高原)도 新羅 영토이다. 新羅의 西南海는 蘭滄江, 욱강(郁江 : 위장강), 홍수하(紅水河 : 홍수이강)가 모여 있는 중국 서남부다.

後百濟는 高麗를 능가하는 나라였고, 父子간의 갈등으로 멸망했다. 만일 完山州가 곤명(昆明 : 쿤밍)이라면, 일찌감치 鷄林(桂林)을 차지하고 新羅를 멸망 시켜야 하는데, 新羅는 後百濟보다 1 년 앞선 935 년에 멸망했다. 그러므로 完山州는 桂林 서쪽에 있었다. 新羅가 현 武漢 일대에서 건국한 小國 이었을 때, 百濟는 중국 남해안을 다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倭가 百濟에 속했다. 그래서 甄萱은 後百濟를 건국 하면서 百濟 義慈王의 숙원을 풀어준다고 선언했던 것이다(甄萱叛據完山 則憤百濟之衰亡 以雪義慈宿憤爲言 揆園史話).

文王이 750 년대 전반경에 수도를 동모산(東牟山)에서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옮겼다가 말년에 수도를 일시적으로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로 천도한 적도 있으나, 성왕 대에 다시 이곳으로 옮겨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東牟山은 振國烈皇帝 때의 수도다. 太子 祚榮은 제위에 오른 후 홀한성(忽汗城)을 쌓아 도읍을 옮겼다(太子祚榮…卽帝位築忽汗城遷都 太白逸史) 太白逸史에도 新唐書에 大仲象이 동쪽으로 가 遼水를 건너 太白山의 동북을 확보했다(新唐書…乞乞仲象者…東走渡遼水保太白山東北)고 했다. 遼西의 東牟山에 있던 振國烈皇帝 大仲象이 붕어한 후 祚榮은 遼東을 확보해 長安城(忽汗城)으로 천도했다.

大震國의 上京이 唐의 수도 長安城의 축소판이라 할 정도로 모방하여 정비한 도시였다는 날조기사는 적어도 한 가지 사실만은 알려 주는데, 大震國의 忽汗城(長安城)을 上京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忽汗城은 平壤城이다.

西京이 鴨綠府라 했다(西京鴨綠府本槀離古國 太白逸史). 唐의 사신이 金沙江에서 揚子江으로 들어와 西京(현 重慶)에 이르러 大震國에 조공을 바쳤다고 전술했다. 그 물길을 鴨綠朝貢道라 했다.

“海州에 南海郡 節度使를 두었는데, 이곳은 본래 沃沮國의 땅이었다. 高句麗는 沙卑城을 두었는데, 일찍이 唐나라 장수 李世勣이 공략한 곳이다. 渤海는 南京 南海府라 불렀다(海州南海軍節度本沃沮國地高麗爲沙卑城唐李世徠嘗攻焉渤海號南京南海府 遼史地理志)”는 遼汗史 地理志 기사는 大震國 역사책에 있던 글이다. 大震國 역사책을 분해해 唐뿐만 아니라 遼汗에도 할당했던 것이다.

이세적(李世勣)은 新羅 장수이다. 海州에 南海軍 節度使를 둔 나라는 大震國이다. 그러나 高句麗가 沙卑城을 둔 곳이 大震國의 南京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大震國의 南京은 浿水 유역에서 武漢(新羅 金城)에 못 미치는 곳에 있었던 것이다. 양반(襄礬 : 샹판)이나 십언(十堰 : 스옌) 중 하나이다. 大震國의 東京은 당연히 洛陽이다. 中京은 成都라고 전술했다.

遼汗의 東京 요양부(遼陽府)가 高句麗의 마지막 平壤城? 遼汗은 東京조차 방치해두나. 거란은 大震國의 忽汗城을 불태워 7 주간이나 불탔다고 했다. 平壤과 주변 마을을 비워서 高句麗가 부활하지 못하도록 방치 했다고. 그런데 太白逸史에 보면, 遼汗의 太祖가 “忽汗城을 天福城이라 개칭하였다(改忽汗城爲天福).”고 했다. 東丹國을 세우고 제 아들을 王으로 삼아 불태운 곳에 들어가 살라고 한 셈이다. 결국 忽汗城은 불타지 않았던 것이다.

唐이 高句麗, 百濟 역사서를 분서 했다고 날조한 것처럼, 거란이 설령 忽汗城을 불태웠다고 해도 史書는 한 곳에 모아두는 것이 아니다. 여러 부를 만들어서 전국 각지에 보관한다. 또 史庫의 책이 다 불탔다고 해도 백성들에게 배포한 역사책은 남아 있다. 大震國 역사를 唐의 역사로 줘버렸으니 이에 대한 변명도 필요했던 것이다.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 872?~926)가 東丹國을 세우고 장자 倍를 왕으로 삼아 忽汗城을 天福城이라 개칭했다는 太白逸史의 기사는 大震國이 동북아의 나라였을 때나 가능한 얘기다. 耶律阿保機는 동아시아의 天子 노릇을 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인가. 천복성(天福城). 耶律阿保機는 제 아들 에게는 하늘에서 복을 내려달라 하고, 자신은 地福으로 만족했던가. 耶律倍가 아니라 耶律阿保機가 忽汗城에 들어가 살았다. 자신의 아들 耶律倍에게는 大震國의 東京 현 洛陽을 주었던 것이다. 大震國의 東京은 그대로 遼汗의 東京이 되었던 것이다. 忽汗城도 그대로 上京이라 했을 것이다. “12 류의 면류관을 쓰고 용의 형상을 그린(準用天子冠服被十二旒冕皆畵龍象)” 옷을 입은 것은 耶律倍가 아니라 耶律阿保機였다. 그것이 新羅 天子의 복식이었다.

大震國 유민들은 하나같이 忽汗城에서 멀지 않은 곳에다 나라를 세웠다. 忽汗城을 차지한 거란을 수시로 공격했을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거란은 大震國을 멸망 시켰지만, 大震國 유민들의 공격으로 결국 忽汗城 조차 지킬 수가 없었다.

“平壤 땅은 황폐해 진지가 자못 오래 되었으니, 예전의 기초는 비록 남아 있다고 하지만 가시덤불이 무성히 자라고 오랑캐들이 수렵하여 노닐며 주변의 고을을 약탈하였다는 것이 高麗 太祖 초년에 기록되어 있다(平壤之地 荒廢頗久 舊基雖存而荊棘滋茂 蕃人游獵 侵掠邊邑者 太祖初年所記也 揆園史話 檀君紀)."

太祖 초년은 918 년이고, 大震國이 멸망한 해는 926 년이다. 太祖 初年에 황폐해진 平壤 땅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大震國 유민의 공격을 받은 거란이 忽汗城을 포기하자, 濊貊族이 부서진 忽汗城에 들어와 살았던 것이다.

大震國이 멸망할 당시(926)는 後三國이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新羅는 명맥만 남아 있다고 해도 後百濟는 高麗의 강력한 적이었다. 935 년에 新羅 敬順王이 귀순하고, 이듬해 後百濟의 神劍을 격파 함으로써 高麗는 간신히 後三國을 통일했다. 다시 말해 936 년 이후에야 高麗는 거란으로 넘어간 大震國 영토 탈환에 나설 수 있었다. 平壤城을 탈환한 것은 大震國 멸망 후 10 년 뒤다.

平壤 주변을 약탈한 오랑캐는 숙여진이다. 柴達木盆地에 있다가 大震國이 멸망하자, 西鴨綠江 이동까지 들어왔다가 高麗 太祖, 光宗 때 거듭 쫓겨났다.

윤관(尹瓘 : ?~1111)이 격파한 女眞族은 생여진이고, 東北9城은 黑龍江 상류에 세웠다. 九城을 지키기 어렵다 하여 女眞에게 돌려 주었다고? 9성은 지키기 어렵고 그 옆의 천문관측지는 지키기 쉬웠던가. 9성을 돌려주면, 濊貊族은 또 다시 高麗 땅을 침범할 것이고, 결국 일식관측까지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日本은 黑龍江 中流의 일식기록을 동북9성을 완성한 1108 년 으로부터 76 년 후까지 베꼈다. 高麗는 高麗 말까지 내내 黑龍江 중류에서 천문관측했던 것이다.

이 당시 세운 비가 있는 곳이 한단고기에는 선춘령(先春嶺)이라 나와 있고, 高麗史에는 공험진(公嶮鎭)이라 나와 있다. 世宗實錄地理志에는 公嶮鎭 동북으로 700 리에 先春縣이 있다고 했다. 이도(李祹 : 李氏朝鮮의 世宗이라 불리는 濊貊族) 역시 우리나라 역사날조에 관여한 인물이다. 高麗史를 날조 편찬하고 高麗의 화약무기를 자신이 왕위에 있을 때, 개량 했다고 날조했다. 그 외에도 많은 날조를 했다. 그러나 李祹 당시는 아직 淸에게 李氏朝鮮 땅을 빼앗기기 전이므로 先春嶺碑의 위치는 제대로 썼을 것이다. 그래서 淸碑를 세운 뒤 高麗史를 고칠 때는 축소된 강역 이하로 맞추느라 先春嶺 보다 아래 있는 公嶮鎭으로 낙착된 것이다. 公嶮鎭도 또 다시 끌어 당겼겠지만.

先春嶺碑는 黑龍江 상류에 있었다. 先春嶺碑도 黑龍江 상류에서 옮겨졌다. 1900 년대 초 日本이 先春嶺碑를 발견하고 ‘통감부 간도 임시 파출소 기요(統監府間島臨時派出所紀要 1909)’에 기록을 남겼다.

중국 연길 국자가 서쪽 1 리 반 지점에 있는 포이하통하 강물에서 커다란 석비를 발견했다. 비문의 대부분은 알 수 없고, 남은 약 20 자의 글자 중 다행히 戊子年이라는 기록을 알 수 있다. … 무자년은 고려 예종 3 년으로 윤관이 비를 세운 해와 일치한다.

先春嶺碑는 강물에서 꺼내져 보관해 왔는데, 2 차 대전 종전 후 중국이 또다시 비를 숨겼다. 파괴 했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境界碑는 날조 역사를 實史로 환원 시키는 강력한 증거이다. 그래서 李成桂가 高麗 영토를 朱元璋 등에게 잘라준 후 날조 역사에 맞게 새로 새겼다. 李氏朝鮮의 영토가 축소될 때마다 옮겨 졌는지 다시 팠는지는 모르겠다. 淸과 日本에 의해 마지막으로 李氏朝鮮의 영토가 축소 되었을 때는 지명을 어디로 옮겨야 할지도 난감하고, 무슨 장식품 처럼 東鴨綠 강변에 죽 늘어놓을 수도 없으니까, 강물 속에 전부 빠뜨린 것이다.

四郡 六鎭이 설치되고 鴨綠江과 豆滿江의 국경선이 확정 되었다는 것조차 거짓이다. 4郡 6鎭은 鴨綠江에 설치된 것이 아니라, 黑水에 설치했다. 그러나 4郡 6鎭으로 黑水가 국경선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다. 黑水는 高麗 이후 우리나라의 국경선 이었다.

生女眞은 李成桂가 權謀術數로 高麗를 빼앗을 때 어수선한 틈을 타서 黑水 이남으로 남하했다. 그래서 김종서(金宗瑞 : 1390~ 1453)가 생여진을 밀어 올리고 4郡 6鎭을 설치했다. 그것을 李氏朝鮮이 동북아까지 다 상실하자, 女眞族이 韓半島 안으로 들어와 살았다고 날조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高句麗를 선조로 한다. 때문에 高麗라고 이름하고 平壤에 도읍했다(我國卽高句麗之舊也故號高麗都平壤 太白逸史)." 거란의 1 차 침략에서 서희(徐熙 : 942~998)가 했다는 말이다. “高麗가 平壤城에서 다스렸는데 바로 王險城이다(括地志云高驪都平壤城本漢樂浪郡王險城 史記)." 바로 長安城이다. 高麗의 開京. 蒙古 까지도 수도를 현 北京에 정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나라 제1의 도읍지다.

25 史는 급하게 뜯어 고쳤으나, 括地志(보나마나 우리나라 책이다)까지 고칠 여력은 없어, 모두 수거해서 분서한 것을 淸 때 손성연(孫星衍 : 1753~1818)이 여러 책에 인용된 글을 모아 만들었다. 史上初有의 焚書는 秦王 呂政이 한 것이 아니고, 朱元璋이 했다.

거란(契丹)이 大震國을 멸망 시켰으니까, 잠깐 이나마 시베리아를 포함한 동아시아 태반을 차지했을 것 같지만, 아니다. 大震國 유민들이 西鴨綠江과 浿帶 사이에 모두 나라를 세웠다. 거란은 大震國의 요충지 대부분은 차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거란의 1 차 침입 당시 소손녕(蕭遜寧)이 徐熙와 강화 하면서 高麗王의 入朝와 거란 年號의 사용을 조건으로 鴨綠江 동쪽 女眞의 거주지역 280 리를 高麗가 점유 한다는 和約을 맺고 군대를 철수 했으며, 이에 따라 高麗는 이듬해 994 년 江東의 여진부락을 소탕하고, 六州를 설치 했다고? 訓要十條 五條가 “西京을 중시하라(西京水德調順爲我國地之根本大業萬代之地宜當四仲巡駐留過百日以致安寧)”다.

遼東은 물론이고, 遼西조차 太祖 王建이 탈환했던 것이다. 西京이 吉地라서 중시하라 한 것은 李氏朝鮮의 날조고, 中奴가 매번 遼西, 遼東을 거쳐 우리나라를 쳐들어 왔으니까, 西京을 중시하여 방비를 잘 해두라고 당부한 것이다. 遼西를 회복 했으니까, 西京을 중시하라 했다. 西京이 국경 이라면, 西京을 중시하기 위해서라도 遼西를 탈환 하라고 유언해야 한다.

江東六州는 太祖 王建이 설치했던 것이다. 平壤城을 탈환한 王建은 황폐해진 平壤城 주위에서 수렵하고 노닐며 주변의 고을을 약탈하는 오랑캐(平壤之地 荒廢頗久 舊基雖存而荊棘滋茂 蕃人游獵 侵掠邊邑者 揆園史話 檀君紀) 숙여진을 내쫓기 위해 嘉陵江 이동에다 江東6州를 설치했다.

揆園史話에는 “高麗史의 光宗 10 년조(958)에 鴨綠江 밖의 女眞을 白頭山 밖으로 몰아내어 살게 하였다(高麗史光宗十年逐鴨綠江外女眞 於白頭山外居之)”고 했다. 白頭山은 白山에서 바뀐 이름이다. 光宗은 白山 너머 柴達木盆地로 濊貊族을 내쫓은 것이다. 그래서 高麗의 서쪽에 숙여진이 있다고 한 것이다. 남의 나라 영토로 내몰 수는 없는 일. 숙여진이 내쫓긴 柴達木盆地 역시 高麗 영토다.

西鴨綠江도 白頭山(白山)에서 발원하고, 東鴨綠江도 현 白頭山에서 發源한다. 鴨綠江 밖의 女眞이라 하나, 實史에서는 嘉陵江 이서에 살았고, 날조사에서 滿州에 살았다. 그러나 날조사에서 鴨綠江 밖의 女眞은 이미 白頭山 밖에 있으므로 다시 白頭山 밖으로 몰아낼 수가 없다. 嘉陵江 이서의 女眞을 柴達木盆地로 내쫓았다는 의미다.

遼西도 高麗 영토인 상황에서 成宗 12 년(993)에 거란 으로부터 西鴨綠江 이동을 얻어 江東六州를 설치했단 말인가.

날조 역사에서는 994 년에 鴨綠江 이동을 확보 했다는데, 실제 역사에서는 936 년 직후에 太祖 王建이 鴨綠江 이서까지 탈환했다. 高麗史를 고치면서 光宗 때 女眞을 白頭山 밖으로 몰아내어 살게 하였다는 기록은 삭제 했으나 訓要十條는 남겨두었다. 西京도 東鴨綠江 이남으로 지명을 옮겼기 때문이다.

李氏朝鮮은 건국 초 60 년 동안 高麗史를 무려 6 번이나 날조했다. 揆園史話는 숙종 1 년(1675)에 썼고, 高麗史는 문종 1 년(1451)에 날조가 끝났다고 했다. 실제로는 李氏朝鮮의 영토가 축소될 때마다 역사책도 계속해서 축소 날조했다. 그러면서도 江東六州를 江南六州로 고치지 못한 것은 역사책을 매번 통째로 꼼꼼히 읽고 고친 것이 아니라 생각나는 대목만 고쳤기 때문이다.

“너희 나라는 新羅의 땅에서 일어났다. 高句麗 땅은 우리가 갖고 있는 바라. 그런데 그대들이 이를 침략하더니 우리와 땅을 맞대고 있으면서도 바다를 넘어 宋나라를 섬기고 있다. 때문에 오늘의 전란이 있게 된 것이다. 만약 땅을 쪼개어 이를 바치고 조공을 올린다면 일은 없을 것이다(汝國興新羅地高句麗之地我所有也而汝侵蝕之又與我連壤而越海事宋故有今日之師若割地以獻而修朝聘可無事矣 太白逸史)”? 여기서 진실은 高麗가 거란과 땅을 맞대고 있었다, 高麗가 高句麗 영토를 가진 거란을 침공 했다는 대목이다. 거란이 高麗를 침략한 것이 아니다.

後三國을 통일한 직후에 平壤城도, 遼西도 탈환했다. 동북아도 되찾아 거란에 조공하던 生女眞이 高麗로 조공 대상국을 바꾸었다. 쉽게 되찾은 것을 보면 거란의 전력은 별 것이 아니었다. 고작 티벳고원 북부의 한쪽에서 일어난 나라다. 그런 거란에게 멸망당한 것을 보면 大震國은 말기에 국세가 엄청나게 축소되었다.

그런데 이미 平壤城, 遼東, 遼西를 비롯해 大震國의 요충지를 전부 빼앗긴 거란이 쳐들어오고, 高麗王의 入朝와 거란 연호의 사용을 요구할 수 있는가. 거란의 남은 땅이래야 中土에 시베리아를 포함한 長城 이북이 전부다. 高麗가 柴達木盆地 위쪽으로 長城을 연장한 것은 이 당시 거란이 오르도스 이북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땅은 거대 하지만 인구는 희박하다.

蕭遜寧의 80 만 대군? 거란의 성인 남자를 다 끌고 왔나. 침략자(?)가 도리어 땅을 선사하고 간다는 말도 이상하기 짝이 없다. 王도 아닌, 일개 군사령군이 자국 영토를 주고 말고 할 수 있는가. 高麗가 80 만 대군으로 거란에 침입한 것을 반대로 날조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高句麗를 선조로 한다. 때문에 高麗라고 이름하고 平壤에 도읍했다(我國卽高句麗之舊也故號高麗都平壤 太白逸史)."는 徐熙가 거란을 침공 하면서 한 말이다. 高句麗의 계승국 高麗에 복종하라고.

高麗가 遼汗으로 쳐들어가서 大震國 땅의 반환과 거란왕의 高麗 入朝, 高麗 年號 사용 등을 요구한 것이다. 그러니까 거란의 침입을 막기 위해 顯宗 때 제작 했다는 초조고려대장경(初雕高麗大藏經)은 다른 목적으로 제작한 것이다.

거란이 入朝 등 講和條件을 이행하지 않고, 계속 국경을 침범하자, 高麗는 1010 년(顯宗 1)에 2 차로, 1019 년에 3 차로 거란으로 쳐들어가 격파했던 것이다. 양규(楊規 : ?~1011)와 강한찬(姜邯贊 : 948~1031 강감찬은 일본식 발음이다)은 高麗 영토가 아니라 거란 땅(大震國 古土)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강한찬(姜邯贊)은 거란에게서 長城 이북 땅을 되찾은 사령관이다.

高麗가 11 세기 초에 高句麗長城을 연장 했다는 점에서 이 당시에도 거란은 고비사막 이북에 있었다. 그러나 長城을 쌓은 직후 거란을 中土로 내쫓았다. 그래서 高麗圖經을 쓸 12 세기 초에는 高麗가 시베리아와 접했다. “고려는 북쪽으로 거란의 옛 땅에 접한다(高麗…北接契丹舊地 高麗圖經)." 날조사에서 거란이 마지막으로 高麗를 침입한 해가 1019 년 이라는 점에서 이 때 高麗에게 패한 후 거란 땅이 中土 내로 축소되었을 것이다.

長城 축조 연대가 뒤로 밀렸을 가능성이 크다. 實史 에서는 高麗가 공세를 펼쳤지만, 날조사에서는 방어전에 주력했다. 침공을 받은 경우는 마지막 침입이 있은 후 長城을 축소해도 되지만, 실제 長城 축조 목적은 柴達木盆地를 탈환한 후 거란의 침입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柴達木盆地를 되찾은 직후에서 거란 땅이 中土 내로 축소되기 전에 長城 축조를 끝내야 한다. 高麗의 3 차 침공이 있기 전에.

(고려의) 서북은 거란과 상접한 옛날 대요(大遼)와의 경계로 후에 이곳으로 침략해 와 내원성(來遠城)을 쌓았는데 압록강의 험하고 견고한, 막힌 곳을 의지해 쌓았다(其西北與契丹相接昔以大遼爲界後爲所侵迫乃築來遠城以爲阻然亦恃押綠以爲險也 高麗圖經)

여기서 서북은 柴達木盆地이다. 아직은 거란이 고비사막 이북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원성(來遠城)은 鴨綠江 어디에 쌓았는가 하는 문제와 축성 주체가 누군가 하는 문제가 있다. 험하고 견고한, 막힌 곳이라 함은 계곡을 의미한다. 西鴨綠江 발원지 근처다. 柴達木盆地 바로 아래이다. 거란이 1 차 침입 후 女眞族을 경략했다면 柴達木盆地가 거란으로 넘어갔다는 뜻이고, 西鴨綠江 상류에 來遠城을 쌓아야 하는 급박한 처지에 몰린 것은 거란이 아니라, 高麗다. 開京에서 柴達木盆地까지는 불과 수백 km. 거란이 성을 쌓도록 방치할 수 없다.

그런데 高句麗 가요라는 來遠城歌에서는 高句麗 때 투항하는 오랑캐들을 정착시킨 城이라고 나온다. 高句麗 영토 내에서 高句麗 영토 내로 투항할 수는 없다. 오랑캐 투항자들은 柴達木盆地에 정착시켰다. 來遠城歌 역시 왜곡 되었지만, 高句麗에 있어 來遠城은 꼭 필요했다. 來遠城의 역할은 柴達木盆地에 몰아넣은 오랑캐가 남하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데 있었다. 來遠城은 거란도, 高麗도 아닌, 高句麗가 쌓았던 것이다.

"내원새(來遠塞)는 金나라가 설치했는데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무산현(武山縣) 서남 30 리이다(來遠塞金置在今甘肅武山縣西南三十里 중국고금지명사전)." "武山縣은 隋와 唐이 농서현(籠西縣)으로 했던 땅. 宋나라가 영원새(寧遠塞)로 설치.金나라 폐지. 元나라가 다시 설치.중화민국에서 현으로 고쳤다. 등예(鄧乂)가 강유(姜維)에 항거한 곳이라서 이름이 되었다. 甘肅省 위천도(渭川道)에 속한다(武山縣隋唐籠西縣地. 宋置寧遠塞.升爲縣.金廢.元復置.民國改爲武山縣縣有武城山.爲鄧乂距姜維處故名.屬甘肅渭川道 중국고금지명사전)".

後渤海國(後大震國)은 忽汗城을 거란에게 빼앗긴 후의 大震國을 말하니까, 遺民이 세운 나라가 아니다. 大震國 유민들이 세운 나라는 날조사나마 太白逸史에 나오는데, 올야국(兀惹國)은 없다. 兀惹國은 大震國 유민이 아니라, 大震國의 속민 濊貊族이 大震國 멸망을 기화로 세운 나라였던 것이다. 결국 정안국(定安國 : 926~981 烈萬華가 건국), 흥요국(興遼國 : 1029~1030 大延琳이 건국), 대원국(大元國 : 1116 太白逸史에는 大渤海國으로 나온다. 高永昌이 건국)만 大震國의 유민들이 세운 나라이다.

“宋史에 가로대, 定安國은 본래 馬韓의 종자들이다. 遼나라에 망하니 그 족장(酋帥)이 남은 무리를 규합하여 그 서쪽 변두리 땅을 확보하여 나라를 세우고 개원하여 자칭 定安國이라 했다(宋史曰定安國本馬韓之種爲遼所敗其酋帥糾合餘衆保其西鄙建國改元自號定安國 太白逸史)." 馬韓의 種子? 馬韓은 韓半島 남부의 한 구석에 처박아 두고서 韓半島 이북에서 건국한 大震國의 유민이 馬韓 사람? 大震國은 미개 華夏族을 다스리던 夏, 殷, 周의 上國 馬韓도 아니고, 동아시아를 다스리던 辰韓의 계승국이다. 족장이야 中土에 나라랍시고 세운 종자들을 부르는 말이고. 定安國은 鴨綠江 유역에 세워진 나라이다. 그렇다면 동북아 대부분을 차지 했다고 날조된 大震國의 남쪽 땅을 확보한 셈이 된다는 점에서도 원래 定安國에 관한 기사가 아니었다.

高麗實錄에 쓰여진 날조 이전의 원문은 이랬다.

요한국(遼汗國)은 본래 거란(契丹)의 종자들인데 금한국(金汗國)에 망하니 그 족장[야율대석(耶律大石)을 말함]은 남은 무리를 규합하여 그 서쪽 변두리 땅을 확보하여 나라를 세우고 개원하여 스스로 서요국(西遼國)이라 했다.

“25 史의 權位를 이길 수 있는 學者나 學說은 存在할 수도 없고 存在 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어째서 모르는가?”라고 신봉하는 이 땅의 사학자들에 있어 大震國은 유목국가다. 高麗도 유목국가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光宗이 “흙 침상에서 자며 토굴을 파서 아궁이를 만들어 그 위에 눕고, 신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던” 後周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에 따라 과거제를 실시했다는 날조기사도 그대로 받아들인다.

成都에 王建의 능이 있다고, 王建은 前蜀을 세워 新羅를 멸망시키고, 高麗라 국명을 바꿔 동아시아를 지배했다, “우리나라 역사는 韓國史가 아니라 中國史이다”라고 우기는 사람까지 있다. 그러나 中國文獻에 前蜀의 王建이 高麗를 세웠다는 기록은 없다. 역사기록 하면서 그런 중요 사항은 절대 누락 시키지 않는다. 그런 기록이 없는 것은 高麗 王建의 족보를 前蜀의 王建에게 할당했기 때문이다. 前蜀의 王建이 高麗를 세웠다면 지금 중국은 韓半島까지 중국 땅이라고 우기고 있을 것이다.

王建의 능이 成都에 있는 것은 高麗가 동아시아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高麗의 수도가 중국 대륙에 있었기 때문이다.5)

“열만화(烈萬華)는 입공하는 女眞에게 부탁하여 表文을 올리고 공물을 바쳤다. 太宗 때 그 왕 오현명(烏玄明)은 다시 女眞에게 부탁하여 表文을 올리고 공물을 바쳤다(烈萬華因入貢女眞附表貢獻太宗時其王烏玄明復因女眞上表 太白逸史)."? “혈거생활을 하고, 변소를 주거의 한가운데 두어 오줌으로 세수를 하고, 짐승의 지방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으며 산 종족(常爲穴居冬以豕膏塗身厚數分 以禦風寒 作於中廁之而居 三國志 魏書)”에게 영토와 역사를 구걸했던 종자는 朱元璋 밖에 없었다. 미쳤다고 大震國의 유민이 미개 華夏의 種子 宋에 表文을 보내고 공물을 주나. 安定國(定安國)은 高麗에 귀속 하겠다는 表文을 보냈던 것이다. 날조사에서는 973 년에 烏玄明이 宋나라에 表文을 보냈다고 하나, 이 당시의 宋王은 太宗이 아니라, ‘太祖’였다.

定安國은 西鴨綠江 중류가 아니라, 상류에 세운 나라다. 嘉陵江 하류에는 興遼國이 있었기 때문이다. 興遼. 遼滿의 들녘에 세운 나라라서 興遼라 한 것이다.

興遼國이 1029 년에 건국되어 1년 만에 거란군에 평정 되었다? 993 년 徐熙에게, 1010 년 楊規에게, 1019 년 姜邯贊에게 연속해서 깨진 거란이 무슨 수로 대군을 동원할 수 있는가. 高麗는 12 년 전에 이미 高句麗長城까지 연장해 거란의 柴達木盆地로의 침입을 차단한 뒤 공세로 나아가 거란을 티벳고원 북부의 한쪽을 차지한 나라로 축소시켰다.

1116 년, 東京城을 탈취한 高永昌이 大元國을 세우자 망하기 직전의 거란이 東京 회복전을 폈다고? 거란의 東京이 高句麗의 平壤城이자, 大震國의 忽汗城 이라며? 2 백년 가까이나 지나 무슨 東京 탈취? 더구나 忽汗城은 高麗 太祖가 936 년에 탈환했다. 大元國이 遼東 50 여 州를 거느렸다? 동아시아 절반을 가진 大震國이 60 州를 거느렸다. 10 州만 遼東 이외의 지역에 있었던가. 새로 일어난 미개 濊貊族의 나라 金汗에 패해서 살해되기까지? 金汗은 高麗의 침공으로 명맥만 남은 거란을 혼자 공격할 능력도 없어서 宋하고 같이 협격한 小國이다. 그래도 거란이 쇠한 때가 숙여진에게는 나라라는 것을 세울 절호의 기회였다. 노예종족 숙여진이 제 마음대로 柴達木盆地를 떠날 수 있나. 高麗에 中土로 들어가겠다고 고하니까, 앓던 이 빠지듯 좋아했을 것이다.

어떻게 나라가 멸망하고 104 년 뒤에, 191 년 뒤에 재건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희한한 역사가 韓國史 외에서 일어난 적이 있는가. 이스라엘은 유대인들 스스로 세운 나라가 아니고, 잉글랜드와 메국이 세워준 나라다. 물론 高句麗 멸망 93 년 만에 平盧淄靑, 96 년 만에 齊나라(唐나라 내에서 건국했다)로 재건됐다. 하지만 平盧淄靑, 齊나라는 앞서 건국한 大震國이 있었기에 건국할 수 있었다.

大震國은 高句麗가 멸망한 그 해 건국해서 259 년간 존속한 동아시아의 天子國이고, 平盧淄靑은 58 년간, 齊나라는 55 년간 존속했다. 平盧淄靑, 齊나라의 건국도 뒤로 한참 밀렸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大震國 유민이 세운 나라들은 모두 高麗에 귀속되는 바람에 단명한 小國이다. 定安國, 興遼國, 大元國은 모두 大震國 멸망 직후에 건국된 나라들이다. 後三國을 통일한 王建이 忽汗城을 회복하고, 江東六州를 설치하기 직전 까지는 高麗에 투항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大震國 유민이 세운 나라들이 뒤늦게 등장 해야만 했던 것은 華夏의 種子가 세운 미개 宋이 960 년에 세운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단공(端拱 988-989)으로부터 순화(淳化 990-994) 사이에 다시 女眞을 통해 表를 올리더니 그 뒤에는 소식이 없다(端拱淳化間復因女眞奉表其後不至 大震國本紀)”고 날조할 수 있을 게 아닌가.

고려는 遼의 연호를 쓰다가 다시 北宋의 연호를 쓰는 등 주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이리 저리 옮겨 다니는 등 주체성이 없으나 오직 중국에게는 지극히 공손하였다?

오직 ‘中國’에게는 지극히 공손하였다? 遼汗도 중국이고, 金汗도 중국, 티벳고원 북부를 정복한 나라는 모조리 중국의 왕조라 우기더니, 오직 ‘中國’에게는 지극히 공손 하였다? 오직 ‘宋나라’에게는 지극히 공손 하였다고 날조해야 할 것을 머리가 나빠 실수한 것이다.

高麗圖經의 저 날조기사는 中國의 실상 이었다. “高麗 成宗 연간에 遼汗國이 宋나라와 함께 朝貢을 하였다.” 宋(北宋은 없다)은 高麗 건국 당시부터 高麗의 속국으로 高麗의 年號를 사용했다. 그후 거란에게 정복당한 후 오락가락 거란의 연호까지 사용한 것이다.

‘공손’이야 宋이 지조없이 高麗에 이어 거란에게 취한 자세다. 티벳고원 북부의 동쪽 절반을 차지한 宋이 동아시아를 다 차지한 高麗에게 얼마나 공손했을 지는 상상이 갈 것이다. 당시의 中國은 高麗의 다른 이름이다.

3) 동녕부는 1258 년,
쌍성총관부는 1270 년에 설치됐다

蒙汗軍이 東女眞을 경유하여 長城 이남에 침입, 화주(和州)에 이르렀을 때 조휘(趙暉)·탁청(卓靑) 등이 東北面兵馬使 신집평(愼執平)을 죽이고, 鐵嶺 이북의 땅을 蒙古에 내놓자, 蒙汗이 이 지역을 관리하기 위해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 했다고? 蒙汗軍은 오지도 않았다. 저 날조기사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高麗의 東北面에 있던 雙城摠管府가 百濟長城이 있는 지역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蒙汗의 수도 大都는 현 北京이다. 李氏朝鮮의 땅을 다 빼앗은 中奴는 蒙汗 이후 대대로 北京에 수도를 정했다고 우긴다. 中國이 蒙汗 이전부터 동북아를 거의 다 차지하고 있었다고 날조한 속셈으로. 蒙汗과 明, 淸이 北京에 수도를 정한 것은 맞는데, 明의 北京은 揚子江 이남에 있었다. 淸도 난하(灤河)까지 빼앗기 전에는 현 北京으로 수도를 옮길 수 없었다.

鐵嶺 이북 땅이 아니라, 鐵嶺 以西 땅이다. 長城 지역에서 가로로 뻗은 산맥이라고 해봐야 음산산맥(陰山山脈) 정도이다. 그러나 산맥 이북 땅을 내놓았다고 했다. 陰山山脈 위쪽은 北京이 포함 되지도 않을 뿐더러 사막과 蒙古高原만 펼쳐져 있다. 西洋까지 정복한 蒙汗이 고작 고원지대나 사막지대에 수도를 정하지는 않았다. 현 北京이 포함되는 漢水(黃河) 하류 이북에 雙城摠管府가 있었다. 鐵嶺은 남북으로 뻗은 山西省의 五臺山脈이다.

중국 대륙에 살았던 것은 東女眞이 아니고 西女眞이다. 西女眞은 1115 년 中土로 들어가 金汗國을 세웠다가 蒙汗에 亡한 후 中土에 눌러 살았다. 蒙汗이 柴達木盆地를 차지했을 때 다시 그 땅으로 되돌아왔다. 蒙汗이 東寧府, 雙城摠管府를 설치하고 동족 西女眞과 거란에게 그 수비를 맡겼기 때문이다.

인당(印璫) 최영(崔瑩) 등 여러 장수들을 보내사 압록강 이서의 8참(八站)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印璫崔瑩等諸將攻鴨綠江以西八站破之 太白逸史)

鴨綠江 以西의 八站을 공격하여 격파 하였다. 이 말은 遼西를 탈환했다는 뜻이다. 遼東을 되찾았다는 기록은 없다. 본래부터 遼東(西鴨綠江 以東)은 高麗 영토였기 때문이다.

몽고간섭기의 동아시아 : 쌍성총관부, 동녕부, 8참, 거란 수비지역 모두 사한국이 아니라 몽한 땅이다. 몽고고원에는 오고타이한국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소종(昭宗)이 몽고고원으로 도주해 몽한의 명맥을 이었다는 사실에서 몽고고원은 몽한의 직할지로 추정된다. 어쨌든 쌍성총관부와 동녕부에 의해 고려는 장성 이남과 동북아로 완전히 분단된 것이다. 몽한은 원으로 날조된 나라의 원래 국명이다.

太祖 王建도 西鴨綠江(遼水) 위의 西京을 중시하라 유시 했다는 점에서 高麗 초부터 遼西는 高麗 領土였다. 부강(富江)을 태천(泰川)이라 부르고, 威化島가 西鴨綠江 以西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遼西는 高麗 末에도 여전히 高麗 영토였다. 遼西는 開京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에 東寧府의 공략에 앞서 탈환해야 하는 군사전략적 지역이다. 공민제(恭愍帝 : 1330~1374)는 정동행성(征東行省)을 격파한 후 遼西(西鴨綠江 以西)부터 탈환했다.

八站이 遼西에 있었으니 高麗를 침입 했다는 紅巾賊은 八站부터 격파해야 한다. 燕과 漢, 隋, 唐(中土에 세워진 나라 가운데 저 나라들 밖에 우리나라를 침입하지 않았다)은 언제나 遼西, 遼東을 거쳐 우리나라를 침범했다. 紅巾賊 역시 1359 년 부터 수차례에 걸쳐 高麗에 침범 했다는데, 매번 궤멸 당했다. 1362 년 紅巾賊이 高麗軍에 전멸하고 나서도 八站은 온전했다. 紅巾賊은 高麗를 침입하지 않은 것이다.

紅巾賊 때문에 八站을 삭제한 것은 아니다. 날조사에서 宋은 揚子江 이남에 있다가 망했으니까, 날조 東寧府를 상상 속에서 공격할 때도 揚子江을 넘어갔기 때문이다. Asia 1808 (“Asia” from The General Gazetteer; or Compendious Geographical Dictionary by R. Brookes. Eighth Edition. Dublin, 1808.)

Asia 1808 (“Asia” from The General Gazetteer; or Compendious Geographical Dictionary by R. Brookes. Eighth Edition. Dublin, 1808.)

다. 그러나 李氏朝鮮이 韓半島로 축소된 후로는 수도를 국경선에다 그릴 수는 없기 때문에 西京도 鴨綠江 이남으로 밀어내야 했다.꼀ללӻĬ刭ҚלӻĬ刭Қ

東寧府가 西京에 설치 되었다가, 高麗의 요구로 遼東으로 옮겨간 이후로 西鴨綠江이 高麗에 귀속되어 있었다고? 西鴨綠江 이서에 八站이 있었다. 東寧府는 西鴨綠江에 있을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 東寧府가 西鴨綠江이나 遼東에 있으면, 柴達木盆地가 비게 돼 蒙汗은 高麗의 漢水 이북 진출을 저지할 수 없다.

어째서 東寧府가 西京에 있다가, 遼東으로 옮겨 갔다고 날조 했을까. 우선 李氏朝鮮 初의 날조 西京 위치부터 찾아보자. 西京은 高麗의 3 京의 하나로 西鴨綠江 유역에 있었다. 그러니까 李氏朝鮮 初의 西鴨綠江인 桑乾河 인근의 현 北京을 西京 이라고 날조했을 가능성이 있다. 西京을 東鴨綠江 유역에 있었다고 날조했을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百濟 侯王의 王城이 있는 현 平壤을 西京으로 날조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李氏朝鮮이 韓半島로 축소된 후로는 수도를 국경선에다 그릴 수는 없기 때문에 西京도 鴨綠江 이남으로 밀어내야 했다.

자비령 서압록강은 백수강 + 가릉강 중, 하류입니다

Asia from Brookes R.을 보면, 東鴨綠江 주변에는 東寧府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 韓半島 이북에 커다랗게 낯선 나라를 그려두었기 때문이다. Asia from Brookes R.에서 雙城摠管府와 동녕부의 크기로 보아 韓半島 안에 동녕부를 설치 했다가는 韓半島를 다 잡아 먹는다. 李氏朝鮮 초에는 東寧府가 그냥 遼東에 있다고 날조했던 것이다. 東寧府가 西京에 있다가 遼東으로 옮겨갔다는 날조는 李氏朝鮮이 韓半島로 축소된 이후에나 가능하다. 우리나라 강역이 축소되자 雙城摠管府, 東寧府의 크기도 따라서 줄어들고, 韓半島 이북에 낯선 나라를 그려둘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천수기원 439 년(1356) ……. 상께서는 처음 최영(崔瑩) 등과 의논하시사 西北地方 회복의 계획을 정하시고(天授紀元四百三十九年......上始終瑩等議遂定西北恢收之計 太白逸史)

西北지방이 어디일까. “1269 년 西北面兵馬使의 기관(記官) 최탄(崔坦) 등이 亂을 일으켜 西京을 비롯한 북계(北界)의 54 성(城)과 자비령(慈悲嶺) 이북 서해도(西海道)의 6 城을 들어 蒙汗에 투항하자, 이듬해 쿠빌라이(忽必烈)가 東寧府를 설치하고 慈悲嶺 이북을 蒙古 땅으로 떼어갔다”는 實史 에서는 성립할 수 없다.

西鴨綠江(嘉陵江)의 西京은 開京(長安) 이남에 위치한다. 그러니까 서북지방이 아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동북아로 축소하자 西京이 高麗의 서북쪽에 오게 된 것이다. 太白逸史에서 “압록강(鴨綠江) 以西의 8참(八站)을 공격해 격파했다(攻鴨綠江以西八站破之)”고 했다. 西京 이서 즉 遼西에는 八站을 설치하고, 東寧府는 처음부터 서북지방에 설치했던 것이다.

東寧府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단서가 西海道다. 高麗의 서쪽에는 바다가 없다. 西海는 江이었던 것이다. 高麗의 西北에 있으면서 西海道라 불릴 수 있는 곳은 타림강(代江) 유역 뿐이다. 타림분지(塔里木盆地)에도 6 城이나 있었던 것이다. 慈悲嶺이 있을 수 있는 곳은 타림분지(塔里木盆地)와 柴達木盆地의 경계다. 盆地가 둘로 나눠져 있는 것으로 보아 경계지역은 땅이 솟아 있거나 채달목분지(柴達木盆地)가 타림분지 보다 고지대라서 그 경계에 붙인 이름이다. 역사날조 과정에서 방위는 안바꿨다. 타림분지를 西海道라 불렀으니 망정이지, 西海道가 山東半島쯤 됐으면, 우리나라 역사를 축소 하면서 韓半島 동해변을 서해도라 불렀을 것이다.

또 다른 단서는 이듬해 쿠빌라이(世祖)가 東寧府를 설치하고 慈悲嶺 이북을 蒙汗 땅으로 떼어 갔다는 것이다. 쿠빌라이는 慈悲嶺 이북만 가져가지 않았다. 北界의 54 城은 포기했단 말인가. 慈悲嶺 이북에는 西海道 6 城만 있다면서? 東寧府 북방 한계선이 慈悲嶺이다.

雙城摠管府와 東寧府, 漢水가 아니라, 長城을 경계로 그 이북 땅을 떼어갔다. 漢水가 高麗軍의 진출을 막을 수 있는가. 三國도 늘상 漢水를 도강하며 싸웠다. 漢水는 장애물이 될 수 없으니까, 百濟長城을 쌓고, 高句麗長城을 쌓은 것도 모자라 高麗까지 長城을 쌓았던 것이다.

柴達木盆地는 漢水(黃河) 상류에 있으니까, 더욱 더 漢水는 장애물 구실을 못한다. 티벳고원 북부는 蒙汗의 정복지다. 遼西에는 8 站을 설치 했으니까, 柴達木盆地로의 진입만 막으면, 高麗軍의 長城 이북 진출을 저지할 수 있다.

東寧府는 원래부터 柴達木盆地에 설치 되었던 것이다.6) 그래서 쿠빌라이는 8 站, 東寧府, 長城, 雙城摠管府라는 일련의 장애물에 의해 高麗의 長城 이북 진출을 저지하고 그 이북 땅을 차지할 수 있었다.

蒙古高原에는 오고타이汗國(1218∼1310)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소종(昭宗)이 蒙古高原으로 도주해 蒙汗의 명맥을 이었다는 사실에서 蒙古高原은 蒙汗의 직할지로 추정된다. 어쨌든 雙城摠管府와 東寧府에 의해 高麗는 長城 이남과 동북아로 완전히 분단된 것이다.

長城 이북만 차지한 蒙汗이 40 년간 줄기차게 침입해 高麗를 집어 삼키려던 나라란 말인가. 하물며 長城 이북조차, 高麗의 반란자들이 가져간 땅이 있었기에 차지할 수 있었다.

이렇게 차지한 땅은 대부분 사막과 고원지대였지만, 반환하지 않았던 것은 蒙汗에게는 지금껏 정복한 서아시아나 유럽보다 더 가치 있는 땅이었기 때문이다. 朝鮮의 계승국 高麗가 옆에 있었다. 蒙汗에게는 한문화(漢文化)의 온갖 문물을 향유할 기회의 땅이었다.

高麗는 무력에 있어서 강력한 나라였다. 그런 高麗가 어째서 蒙汗에게 땅을 빼앗겼는가. 蒙古가 蒙古高原에서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日本의 710 년에서 792 년의 일식관측지가 蒙古高原 이북이다. 蒙古高原은 大震國 영토였던 것이다. 蒙古가 蒙古高原에 있었다면, 漢水(黃河) 이북부터 정복해야 한다. 이 경우 高麗는 당장 탈환에 나서 蒙古高原까지 정벌했을 테니까, 蒙古에게는 세계 대제국으로 성장할 기회 따윈 없다. 蒙汗은 중앙아시아를 통일하고, 티벳고원 북부 및 서방 순으로 정복했던 것이다.

징기스칸(成吉思汗)은 중앙아시아도 다 정복하지 못했다. 오고타이가 정복한 것은 長安이 아니고, 티벳고원 북부다. 몽케(憲宗 : 1251∼59 재위)는 티벳고원을 정복하지 않았다. 쿠빌라이는 高麗를 정복하지 못했다. 강인한 騎馬兵士 蒙古人은 창작되었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의 군대를 가진 우리나라가 어째서 단 한 번도 동아시아(시베리아 남부)에서 벗어날 생각을 안했던가. 어째서 三國은 그토록 서로를 정복하려 했던가. 바로 한대륙을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한대륙은 배달 개천 당시부터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우리민족에게는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땅이었다.

蒙汗은 高麗를 정복하지 못했다. 武臣政權의 몰락으로 처벌을 우려한 관련자들이 땅을 가지고 蒙汗으로 넘어가자, 東寧府와 雙城摠管府를 차례로 설치, 高麗軍의 長城 이북 진출이 차단되는 것을 기화로 高句麗長城 이북을 가져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정복활동 하고는 거리가 먼 얘기다.

蒙汗은 1234 년에 金汗과 宋을 정복해서 티벳고원 북부를 차지했다. 漢水 하류 이북의 雙城總管府는 티벳고원 북부에서 뚝 떨어져 있다. 漢水 하류 이북에 雙城摠管府를 설치했다면 高麗 영토에 의해 고립되어 高麗가 간단히 되찾을 수 있다. 柴達木盆地의 東寧府가 雙城摠管府보다 먼저 설치된 것이다.

蒙古가 원래부터 蒙古高原에 있었다고 하고, 징기스칸이 韓半島만 제외하고, 중앙아시아에서 동북아까지 정복했다고 날조하다 보니까, 雙城總管府를 먼저 설치해도 상관 없었다. 그러나 蒙汗이 중앙아시아에서 일어나고, 1234 년에 金汗과 宋을 정복해서 티벳고원 북부를 차지한 데 지나지 않으니까, 雙城摠管府는 東寧府와 8 站 보다 먼저 설치될 수가 없다. 다루가치(達魯花赤) 역시 1231 년이 아니고, 8 站 및 雙城摠管府가 설치된 후에 두었다. 다루가치의 역할이 쿠빌라이가 高麗 皇帝를 蒙汗의 附馬로 삼기 위한 압박용이라는 점에서 長城 이북을 가져간 1270 년 이후에 설치되었다.

다루가치가 高麗人들을 수탈해서 高麗 皇帝를 압박하기 위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西京과 西北面에 두었다는 것도 거짓이다. 西北面은 이미 東寧府가 설치되어 中土에서 이주한 濊貊族이 살고 있었다. 濊貊族을 아무리 괴롭혀 봐야 高麗 皇帝가 동요할 턱이 없다. 蒙汗은 무력으로 高麗 영토를 정복한 것이 아니니까, 물론 西京에도 다루가치를 둘 수 없었다.

▲  몽고간섭기의 동아시아

東寧府와 8 站, 雙城摠管府의 설치는 高麗의 武臣政權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武臣政變은 1170 년에 발생했다. 징기스칸이 일어나기 전이다. 蒙古가 金汗과 宋을 멸망시킨 1234 년에는 이른바 崔氏 政權 때였다.

1258 년 최의(崔竩 : 1257~1258 집권)가 김준(金俊 : ?~1268)에게 살해되자, 60 년을 이어온 崔氏政權이 붕괴됐다. 최씨 집안의 몰락을 의미했다. 최탄(崔坦)은 西北面兵馬使의 기관(記官)이 아니라 西北面兵馬使였을 것이다. 崔坦은 高麗의 西北面 柴達木盆地와 타림분지(塔里木盆地)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蒙汗이 없었다면 崔坦은 中土로 도망치지 않았고, 결국 高麗에 진압될 수밖에 없다. 中土는 진짜 미개 땅이었다. 蒙汗이 그나마 세계제국을 세웠으므로 崔坦이 蒙汗으로 도주한 것이다. 武臣政權은 金俊으로 이어졌지만, 권력투쟁에 휩싸인 탓에 柴達木盆地와 타림분지(塔里木盆地)를 탈환하지는 못했다.

1268 년 金俊이 임연(林衍 : ?~1270)에게 살해되자, 이번에는 金俊의 휘하에 있던 인물이 西鴨綠江 이서를 가지고 蒙汗으로 달아났다. 高麗는 원종(元宗 : 1219~1274)과 林衍의 갈등으로 西鴨綠江 以西에 蒙汗이 八站을 설치하는 것을 저지하지 못했다. 林衍이 元宗을 폐위하고 元宗의 아우 안경왕(安慶王)을 옹립 했지만 元宗이 5 개월 만에 復位하자, 이번에는 林衍에게 붙었던 조휘(趙暉) 등이 漢水 하류 이북 땅(五臺山脈 以西)을 가지고 蒙汗으로 도주했다.

1270 년 雙城摠管府를 설치해 앞서 설치한 8 站 및 東寧府와 高句麗長城에 의해 高麗의 長城 이북 진출이 저지되자, 쿠빌라이가 高句麗長城 이북 땅마저 가져갔다. 하지만 林衍이 처형 당하자, 삼별초(三別抄)를 이끈 임유무(林惟茂 : ?~1270, 林衍의 子)는 江華島를 거점으로 元宗과 대립에 들어갔고, 1273 년 까지 內亂이 계속되자, 長城 이북 땅을 되찾을 기회도 놓치고 말았다. 상실한 땅을 돌려받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보다 심각한 문제가 우선적일 수밖에 없었다. 高麗의 변두리를 가져간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위험하였기 때문이다.

三別抄는 武臣政權의 私兵으로 시작해서 私兵으로 끝난 집단이다. 三別抄가 애국자 집단 이었으면, 매국노가 갖고 튄 高麗 땅을 당장 되찾았다.

쌍성총관부는 철령 이북이 아니라 철령 이서, 백제장성 이남에 설치됐다. 이성계가 살았던 곳은 쌍성총관부가 아니라, 고구려가 여진족을 이주시킨 후 대대로 살았던 채달목분지(동녕부)다. 채달목분지에도 고려장성이 지나가고 있다. 이성계는 동녕부의 고려장성 지역에서 살며 삐뚤어진 야망을 키웠던 것이다.

중국왜가 일본으로 이주한 이후 대마도는 탐라로 불리웠다.

蒙汗은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를 두지 않았다. 1273 년, 耽羅에 들어간 三別抄의 잔여세력을 진압한 것은 蒙汗이 아니라, 元宗이다. 총관부를 둘 수도 없는 것이 耽羅는 오늘날의 대만(臺滿)으로 蒙汗 땅에서 너무 멀고 高麗 영토와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蒙汗이 과연 그 작은 땅을 지배하길 원했단 말인가. 太白逸史에도 耽羅摠管府를 두었다거나 격파 했다는 기사가 없다. 太白逸史 이후에 창작된 것이다. 

蒙汗이 高麗와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내세운 조건이 高麗 皇帝의 親朝라고? 언제 전쟁을 했어야 講和를 맺던지 하지.

강화의 공공전답에서 쌀 2,000 섬, 조 3,000 섬을 수확했다. 똑같이 최의(崔竩)의 집에서 수확했다. 하음(河陰), 진강(鎭江), 해령(海寧)의 전답에서 수확물을 제후, 제왕, 재상, 추밀원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차별있게 나눠줬다(江華田二千結屬共粟三千結屬崔竩家又以河陰鎭江海寧之田分給諸王宰樞以下有差 高麗史節要)

蒙古와 전쟁이 한참이라고 날조한 高宗 44 년에 高麗는 한가하게 중국 대륙 동부 혹은 남부7)에서 수확한 곡식으로 제후, 제왕 등에게 녹봉을 나눠주고 있었다. 對蒙抗爭 장소라는 江華 에서는 농산물을 수확하고 있었다. 혹자는 1 만 섬을 수확 하려면 4 천만 평이 있어야 한다는데, 韓半島 江華島에 그런 농지가 있는가. 江華島 자체가 4 천만 평이 안된다. 게다가 遷都까지 하고 開京의 주민까지 데려갔고, 對蒙抗爭하는 군대까지 江華島에 있었다고 날조했다. 그러므로 高麗史節要 元宗 10 년조의 蒙古가 高麗에게 귀주로 천도하라고 한 것도 날조기사다. 蒙汗은 長安城에 도읍하고 싶다고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고종 24 년 가을 8 월 戊子 前王이 돌아가셨다.낙진궁(樂眞宮)의 법천정사(法天精舍)에 빈소를 마련하고, 겨울 10 월에 석릉(碩陵)에 장사 지냈다. 시호는 성효(誠孝), 묘호는 정종(貞宗), 후에 고쳐 희종(熙宗)이라 하고, 능을 강화 외성에 쌓았다(秋八月戊子 前王薨于法天精舍多殯于樂眞宮冬十月丁酉葬碩陵諡曰 誠孝廟號貞宗後改熙宗 築江華外城 高麗史節要)

高宗 30 년 8 월 太祖,世祖의 능을 江華 개골동(蓋骨洞)으로 이장했다(八月移葬世祖太祖于江華蓋骨洞 高麗史節要)

위의 기록은 세조, 태조의 능을 강화 개골동으로 이장하고, 21 대 정종(후에 개칭, 희종)의 묘는 江華 外城에 쌓았다는 기록이다. 우리는 江華島에 가서 王陵이나 王陵의 흔적을 본 일이 있는가? 그리고 전혀 날조인 江華 遷都에 따른 宮城이, 또는 궁궐터라도 있는가? 하물며 開城에 있는 고려의 궁궐터며 선죽교조차도 쫒겨온 선조들이 대륙고려를 흠모하여 모조품을 만들어 놓은 것인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半島=植民史觀이 만들어 지는 증거품=유물이 되었으니, 慶州나 金海의 모든 유물이 사람 홀리는 지랄맞을 實證史觀=증거주의의 물증이 되어버린 데에는 함정이 있으니, 대륙을 탈출하면서 가져온 선조 유물을 모조능에 파묻는 데는 기꺼이 이구동성 이지만 이 모조 능을 누구의 능으로 지정 하느냐는 데에는 아무도 결정 못 짓고 비석없는 능을 만들어 놓은 것을 왜 생각 못하는가?! 이는 선조들의 돌대가리 후손들에 대한 질책이요, 거창하게 정각과 비문까지 세운 金首露王陵도 대륙에서 이장해 온 것이라는 金海 金氏 宗中의 결정은 참으로 용기를 낸 쾌거이다

이씨조선 말의 강화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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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와 蒙汗 사이에 전쟁 같은 것은 없었다. 반란자들이 자신이 지배하던 땅을 갖고 蒙汗으로 내뺀 것이 전부다. 생각지도 않게 高麗 영토에 東寧府, 雙城摠管府 등을 설치하고 長城 이북을 차지하게 된 蒙汗은 엉뚱한 욕심이 생겼다. 고려 정복은 어림없는 일이고 高麗 皇帝를 사위로 삼는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면 덩달아 세계 최고의 온갖 문물까지 향수하게 된다. 그토록 염원하던 朝鮮의 계승국은 못돼도 朝鮮의 계승국을 附馬國으로 삼는 것은 가능했다.

물론 高麗 皇帝가 자진해서 유목민족 蒙汗의 사위가 되려고 할 리가 없으니까, 西鴨綠江 이서와 長城 이북에 다루가치(達魯花赤)를 두어 혹독하게 수탈했다. 그러면서 高麗 皇帝에게 蒙汗의 사위가 되면 다루가치를 철수 시키겠다고 제안했다. 원래 高麗 영토이고, 高麗人들이니까 두고 볼 수 없어서 경효제(景孝帝)가 쿠빌라이의 사위가 되었던 것이다.

高麗 皇帝가 國體를 보존하기 위해 蒙汗 皇帝의 사위가 되었다고? 웃끼는 말이다. 누가 못난 인물을 사위로 삼기 원하는가. 高麗 皇帝가 蒙汗의 사위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한 마디로 잘났기 때문이다. 蒙汗이 어디서 高麗 皇帝 보다 잘난 사위를 얻을 수 있단 말인가. 국가간의 혼인은 政略婚姻이고, 서로의 이익을 위해 하는 것이다. 南宋(?)이 중국 남부를 차지하고 있었다면 쿠빌라이의 사위가 되는 것은 宋의 공종(恭宗)이다.

宋은 蒙汗이 金汗을 멸망 시키는 과정에서 같이 멸망시킨 나라이다. 宋은 金汗과 같은 1234 년에 망했다. 그런데 날조사에서는 宋이 1279 년에 멸망 했다고 날조했다. 절대 순수창작은 없다는 점에서 1279 년은 景孝帝(날조사의 忠烈王)가 쿠빌라이의 사위가 된 해로 추정된다. 1279 년은 景孝帝가 44 세가 된 해라 皇后가 있었을 것이다.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본명은 忽都魯揭里迷失)는 두 번째 부인이다.

따라서 麗蒙聯合軍의 日本 원정은 1279 년 이후에 이루어졌다. 1 차 원정을 6 년이나 앞당긴 것은 宋을 참가시키기 위해서다. 1234 년에 사라진 宋은 1279 년에 망한 것으로 날조 되었다.

“천수기원 439 년은 景孝王 5 년(1356)이다(天授紀元四百三十九年景孝王五年 太白逸史)."는 오기다. 공민제(恭愍帝)는 景孝王이 아니다. 역시 太白逸史를 보면 “후암(厚庵) 이존비(李尊庇)는 高麗 景孝王 때의 인물(厚庵李尊庇高麗景孝王時人也)”이라고 했다. 李尊庇는 1287 년에 사망했다. 忠烈王 13 년이다. 忠烈王이 景孝帝다. 李陌이 李氏朝鮮이 날조한 忠烈王과 景孝帝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절충해서 景孝王이라 쓴 것이다. 太白逸史 전반이 그런 식이다.

高麗가 蒙汗의 간섭하에 있어서, 王號까지 ‘忠’자를 썼다면 어째서 元宗은 ‘忠’자를 사용하지 않았나. 蒙汗과 화의를 결정한 高宗부터 ‘忠’자를 붙여야 하는 것 아닌가. 李氏朝鮮이 역사날조한 것이다.

高麗 皇帝는 蒙汗의 附馬였을 때도 皇帝였다. 蒙汗式 官制로 개편도 안했다. 실상 蒙汗式 官制는 李成桂와 子春이 하고 있었다. 高麗로 귀화하기 전에는 蒙汗人이었기 때문이다. 李成桂와 子春은 변발을 한 상태에서 高麗에 내조했던 것이다.

李氏朝鮮은 恭愍王이 영토를 회복하고 관제까지 高麗式으로 환원 했다고 날조 하면서도 忠烈(1274∼1308 재위), 忠宣(1298, 1308∼1313 재위), 忠肅(1313∼1330, 1332∼1339 재위), 忠惠(1330∼1332, 1339∼1344 재위), 충목(忠穆 : 1344∼1348 재위), 충정(忠定 : 1349∼1351 재위)이라는 왕호는 환원하지 않았다고 表裏不同한 태도를 취했다.

李氏朝鮮은 高麗 皇帝의 帝號 마저도 高麗史에 기록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景孝帝를 제외한 나머지 皇帝들의 제호는, 中奴와 倭奴로 부터 高麗實錄을 반환받지 못하면, 영영 알 길이 없다. 우왕(禑王 : 1375∼1388 재위)을 江陵王 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恭愍帝도 다른 제호를 썼다. 威化島 回軍으로 江陵王을 폐위 하면서 李成桂가 高麗의 실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恭愍帝는 정상적인 제호를 지었다. 江陵帝도 14 년을 皇帝로 살았다.

李氏朝鮮은 우리나라의 建元稱帝 사실을 은폐 하려고 했다. 그래서 高麗史를 축소하면서 “王紀는 世家라 하여 명분을 바르게 하고, 분수를 넘는 칭호도 그대로 써서 사실을 보존했다”고 떠벌이며 帝號를 깎아내린 것은 물론이고, 그나마 王號 조차도 제대로 기록하지 않고 忠烈, 忠宣이라 한 것이다. 그래놓고 濊貊族의 나라 李氏朝鮮은 太祖니, 太宗, 世宗 이라는 “분수에 넘치는 칭호”를 사용했다. 李氏朝鮮이 “분수를 넘는 칭호” 운운하며 삭제해 버렸더라면, 우리는 세계 超强大國 高麗 皇帝의 廟號마저 하나도 모를 뻔 했다. 하기야 三國의 황제 제호도 하나같이 엉터리니까. 李氏朝鮮이 韓國史 말살에 얼마나 혈안 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李氏朝鮮은 高麗의 王紀를 世家라 한 것이 아니고, 世紀를 世家로 축소했다. 동아시아를 지배한 高麗皇帝의 연대기는 세가(世家)가 아니라 세기(世紀)다. 檀君世紀, 番韓世家에서 알 수 있듯이, 世家는 여러 대에 걸쳐서 나라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집안을, 世紀는 時代를 말한다. 高麗에는 世家가 넘쳐났다. 高麗는 권문세족(世家)의 나라 였으니까.

忠宣帝(?), 忠肅帝, 忠穆帝 에게는 蒙汗이 祖父의 나라요, 叔父의 나라, 妻의 나라다. 忠惠帝, 忠定帝, 恭愍帝의 母親이 高麗人이라 하나, 蒙汗人을 母로 둔 忠宣帝(?), 忠肅帝의 후손이다. 蒙汗人의 피를 이어받은 것이다. 볼모? 祖父가 孫子를 보고 싶다고 하고, 叔父가 조카를 보고 싶다고 하는데, 어떻게 안 보낼 수 있는가.

蒙汗은 高麗의 덕을 보려고 高麗 皇帝를 사위로 삼은 것이다. 당연히 公主를 시집 보내면서 친정에 이롭게 하라고 지시했다. 蒙汗 여자가 高麗 皇帝의 모친이었다. 蒙汗은 蒙古 출신 太后를 통해 高麗를 지배했다.

정동행성(征東行省)은 蒙汗 公主의 자문기관 이었다. 蒙汗 皇帝와 高麗로 시집온 蒙汗 출신 皇后를 연결하는 매개체였다. 征東行省은 元宗 때가 아니라, 景孝帝 때 설치했다.

일방적으로 설치할 수 없으니까, 궁리해낸 것이 日本遠征을 위한 준비기구다. 蒙汗은 水戰에 약하니까, 연합 하자고 했다. 高麗 皇帝는 蒙汗의 附馬이니까,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日本征服이 蒙汗에 무슨 이익이 있는가. 日本征服은 高麗를 지배할 수단을 만들어내기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韓半島가 아닌, 臺灣을 麗蒙 聯合軍의 출발지점으로 삼았다. 耽羅(臺灣)에서 출발 하자고 주장한 것은 蒙汗이다. 그래야만 開京에 征東行省을 설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韓半島에서 출발하면 韓半島 諸王의 王城에다 征東行省을 두어야 한다. 日本을 정복 한다고 해도 물에 약한 蒙汗이 섬나라를 어떻게 지배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현 北京에서 어떻게 원격조종을 할 수 있단 말인가. 高麗 皇帝가 征東行省의 丞相? 승상은 中奴 땅에 있던 官職名이다. 蒙汗은 중국의 왕조가 아니다.

海風을 만나 蒙汗의 전함이 다 침몰한 곳은 東支那海다. 韓半島 남해안을 놔두고 臺灣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처음부터 蒙汗이 日本 따윈 정복할 생각조차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육상이동도 그렇지만, 해상이동은 거리가 멀수록 불리하다. 우선 식량과 연료를 더 실어야 하고, 그로인해 무기와 병사를 실을 공간이 적어진다. 2 차 대전 당시 연합군은 고작 잉글리쉬 해협을 건너는데도 수 년이나 준비했다.

蒙汗의 日本遠征이 高麗를 지배할 수단을 開京에 두기 위한 술수니까, 日本遠征에 宋이 참가 했다는 것은 날조다. 宋이 10 만 명을 출전 시켰다? 宋은 진짜 小國이었다. 원래 중토 동부에 있었는데, 金汗에게 밀려서 開封까지 내주고, 더욱 동쪽으로 밀려나 나라 자체가 사라지기 직전에 오고타이에게 정복되었다. 金汗이 정복되던 1234 년에 같이 정복된 宋이 어떻게 50 년 가까이 지나서 군대를 파견할 수 있는가.

南宋(그냥 宋이다)이 蒙古와 연합하여 金汗을 멸망 시켰다는 것도 헛소리다. 蒙古가 망하기 일보직전의 宋과 연합할 정도면 대제국을 건설하지 못했다. 宋은 開封(라사)도 金汗에 빼앗기고, 티벳고원 북부의 동쪽의 북쪽만을 차지하고 있다가 金汗을 공격하던 蒙古의 말발굽에 그대로 짓밟혔다.

티벳고원 북부를 뺀 동아시아가 高麗 영토이다. 대제국 高麗가 2 만 5 천의 병력을 투입 했는데, 宋이 10 만을 출병시킬 수 있는가. 宋의 군대를 전부 긁어모아도 10 만이 안된다. 티벳고원 북부의 宋이 전함이나 만들 수 있었겠는가. 몽고습래회사(蒙古襲來繪詞)에도 宋나라 병사는 없다. 高麗軍이 주축 이었다. 宋軍 10 만은 高麗軍이었던 것이다. 결국 高麗는 日本遠征에 12 만 5 천 명을 투입했다.

景孝帝가 쿠빌라이의 딸과 혼인을 했으니, 忠肅帝(?) 이후로는 蒙汗의 皇族과 血族이 된다. 그래도 蒙汗의 皇族과 혼인을 계속했다는 것은 蒙汗의 공주인 모친의 개입 없이는 불가능하다. 자식을 蒙汗 여자와 혼인 시키려고 적극 나섰던 것이다. 高麗 皇帝와 혼인한 蒙汗 여자들은 高麗를 蒙汗을 위한 봉쯤으로 생각했다. 高麗가 蒙汗에 계속 봉사 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대대로 高麗 皇帝를 蒙汗 여자와 혼인시켰던 것이다. 高麗 皇帝는 蒙汗人 모친에 蒙汗人 아내에 둘러싸여 살았다.

高麗는 儒敎의 나라였다. 우리나라 역사를 전부 中國이 가져갔다. 儒敎는 우리나라에서 생겨나고 발전했던 것이다. 儒敎는 家父長 制度를 중시하는 엄격한 父系社會 에서만 발전할 수 있다. 그런데 中土는 宋 때 까지도 자식의 父를 확정할 수 없는 난잡한 母系社會였고, 아직도 母系社會가 남아 있는 중국에서 儒敎가 만들어지고 발전할 수 있는가. 우리나라 역사를 훔친 明은 그저 儒敎의 나라라고 흉내나 낸 것이다. 그 덕분에 유구한 전통의 母系社會 풍습이 그나마 줄어든 것이다.

紅巾賊도 상상 속에서 高麗 영토를 휘젓고 다녔다. 倭寇도 韓半島만 노략질했다. 蒙汗 으로부터 高麗 영토를 탈환 했다고 하지만, 순제(順帝 : 1320~1370)도 도망치다 죽을 만큼 전쟁다운 전쟁은 없었다. 그런데도 高麗 末에 대규모 전쟁으로 남성의 수가 크게 줄어서 一夫多妻制가 성행 했다는 말인가. 景孝帝 이후 高麗 皇帝들이 蒙汗의 一夫多妻制를 수용한 것은 景孝帝가 齊國大長公主와 혼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미 景孝帝는 皇后가 있었기 때문에 蒙汗 여자를 들이자 皇后가 둘이 되었다. 이후 蒙汗과 蒙汗 皇后를 견제하는 세력을 만들려고 하다 보니까 一夫多妻制를 수용한 셈이 되었다. 濊貊族 李成桂는 多妻를 거느렸지만, 高麗가 一夫多妻의 국가라는 증거는 없다. 이씨조선 사회도 일부다첩제(一夫多妾制)를 일부가 수용했을 뿐이다.

李氏朝鮮은 건국 당시부터 외척(外戚)의 발호를 경계했다. 대대로 우리나라 속민으로 산 濊貊族에게 무슨 권력이 있어 外戚의 발호(跋扈)를 걱정 했을까. 高麗가 外戚이 극성을 부린 나라라는 의미다. 附馬國과 장인의 나라. 이것은 서양에서는 무시할 수 있는 관계지만, 儒敎가 지배하는 우리나라 에서는 諸侯國과 上國처럼 변질되고 만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대대로 나라 안에서 皇帝의 배우자를 찾았다. 百濟 皇帝가 新羅 여인을 몇 번인가 皇妃로 맞았다고 하는데, 날조일 가능성이 높다.

15 년(493) 봄 3 월 동성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요청하니, 신라왕이 이찬(伊飡) 비지(比智)의 딸을 시집보냈다(十五年 春三月 王遣使新羅請婚 羅王以伊飡比智女 歸之 三國史記)

몽고간섭기의 동아시아

東城帝는 479 년에 즉위했다. 百濟가 高句麗에 패했다고는 하나, 아직도 동아시아 제1의 광대한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 百濟 皇帝가 小國 新羅에서 妃를 구할 수 있는가. 百濟 皇帝가 新羅 皇帝에게 신하의 딸을 줄 수는 있어도 그 반대는 될 수 없다.

쌍성총관부, 동녕부, 8참(첩), 거란 수비지역 모두 사한국이 아니라 몽한 땅이다. 몽고고원에는 오고타이한국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소종이 몽고고원으로 도주해 몽한의 명맥을 이었다는 사실에서 몽고고원은 몽한의 직할지로 추정된다. 어쨌든 쌍성총관부와 동녕부에 의해 고려는 장성 이남과 동북아로 완전히 분단된 것이다. 몽한은 元으로 날조된 나라의 원래 국명이다.

高麗는 景孝帝가 쿠빌라이의 딸과 혼인한 이후 蒙汗의 간섭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蒙汗이 高麗를 정복해서가 아니라, 대대로 딸을 시집보냈기 때문이다. 그러니 蒙汗에 빌붙어 사는 무리가 안 나올 수가 없다.

쿠빌라이의 연호가 중통(中統) 이라고? 中土 統一 이라고 해봤자, 티벳고원 북부를 정복하는 것뿐으로 1234 년에 벌써 했다. 동유럽까지 정복한 蒙汗이 고작 중국 통일을 자랑스러워 했을까. 그래서 中奴가 中土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中土를 봉쇄 했을까. 漢水(黃河) 하류 이북을 차지하자 마자 현 北京으로 遷都한 蒙汗이다. 蒙汗은 중국이 아니라 朝鮮의 계승국이라 했다. 한통(汗統,漢統)을 내세웠다면 몰라도 중통(中統)이라는 연호는 절대 사용하지 않았다8).

長城 이북이 이탈 했으나, 高麗는 여전히 거대한 영토를 보유했다. 蒙汗은 서양과 서아시아의 평야지대를 다 버리고, 현 北京에 도읍해 고원지대(티벳고원과 몽고고원)와 사막 지대를 다스리며, 사위의 나라, 손자의 나라에 의지해 산 나라였다.

高麗가 상실한 땅을 회복하기 위해 蒙汗을 공격한 것 말고 蒙汗은 高麗와 전쟁다운 전쟁을 벌인 적이 없다. 초강대국 高麗에 경도되어 高麗 皇帝를 사위로 삼았던 것이다.몽고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자라서 환향녀(還鄕女)가 되었고 이것이 발전해서 화냥년이 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언제까지 남들이 만들어 놓은 말에 의지해서 이 민족의 과거를 나약하고 희망없는 민족으로 만드는데 동참 하여야 하는가!!

중국은 어떤가. 蒙汗은 단숨에 宋을 멸망 시켰다. 그것도 金汗을 멸망시키는 기회에. 중국은 5300 년 내내 우리나라 속국 이었다. 蒙汗이 그런 중국을 대우해줄 리가 없다. 蒙汗의 지배하에서 중국은 국체조차 보존하지 못했다. 중토를 봉쇄해 버렸으니까, 蒙汗조차 포기한 땅이었던 것이다.

4) 쌍성총관부는 1356 년이 아니라, 1368 년에 격파했다

鴨綠江을 건너 威化島에 주둔했을 때 이유 없는 도망병이 길에 연이을 정도로 생겨났다? 西鴨綠江(遼水) 너머에 있던 高麗의 행정구역이 威化道였다. 威化島는 섬이 아니다. 遼西도 高麗 땅이라는 증거다. 遼水를 건넜는데도, 明은 가로막지 않았다. 明이 遼西에 없었기 때문이다. 遼東은 커녕 遼西조차 전진기지화 하지 못했다. 太白逸史도 恭愍帝가 여러 장수들을 보내 鴨綠江 이서의 八站을 공격하여 격파했다(諸將攻鴨綠江以西八站破之)고 했다.

鴨綠江을 건너 泰川(富江)이 비로 인해 강물이 불고 유속이 빨라 도강하다 빠져 죽는 자가 수 백 명이 발생 했다면서 이 당시 李成桂가 그 유명한 四不可論을 썼다고 날조했다. 李成桂는 “우리나라가 삼한을 통일한 이후 성실 근면하게 대국을 섬겼고, 홍무 2 년(1369) 明나라에 복종했던 정성도 그러했다(我國家統三以來事大以勤玄陵於洪武二年服事)”로 시작하는 上疏文은 쓰지도 않았다. 배달 이래로 우리나라를 성실 근면하게 섬긴 것이 中奴다. 그러니 저런 헛소리를 늘어 놓으면 즉결 처분감이 아닌가.

고작 西鴨綠江 너머 泰川(富江)도 비로 인해 강물이 불고 물 흐름이 빨라 도강하다 빠져죽는 자가 수백 명이 발생해 진군하지 못했다면서 東鴨綠江 하류의 섬으로 갔다가는 수만 명이 빠져 죽었겠다. 三國時代에는 현 黃河가 우리나라 최대의 격전장 중 하나였다. 富江 정도는 실개천이나 마찬가지다. 富江도 못 건너는데, 中奴가 쳐들어올 때마다 어떻게 물리쳤단 말인가.

조휘(趙暉)·탁청(卓靑) 등이 鐵嶺 이서 땅을 가지고 티벳고원 북부에 있던 蒙汗에 투항하자, 蒙汗은 이 지역을 관할하기 위해 雙城摠管府를 두었다. 티벳고원 북부가 蒙汗의 東方限界線 이었기 때문에 雙城摠管府는 1258 년이 아니라 1270 년에 설치 했다고 전술했다. 黃河 하류 이북에 雙城摠管府를 설치 하면서, 東寧府와 연결해 長城 이북 땅을 가져간 것이다. 蒙古軍은 침입 하지도 않았다.

鐵嶺 이북 땅이 蒙汗의 雙城摠管府와 東寧府에 속해 있으므로 당연히 蒙汗을 몰아낸 明의 소유여야 한다고 했다고? 淸이 揚子江 이북에 버티고 있는데, 黃海와 渤海灣을 배타고 가서 지배할 것인가.

東寧府는 柴達木盆地에 있었지만, 날조사 에서는 雙城摠管府의 동쪽인 桑乾河 이동에 있었다. 그래서 종이 위에서 鐵嶺 이서 땅을 달라면서 雙城摠管府와 東寧府를 다 달라고 한 것이다.

천수기원 439 년(1357)...... 上께서는 처음 최영(崔瑩) 등과 의논 하시사 서북지방 회복의 계획을 정하시고 먼저 정동행성(征東行省)을 혁파하였다. 이어서 인당(印璫) 최영(崔瑩) 등 여러 장수들을 보내사 압록강 이서의 8 참(八站)을 공격하여 격파 하였다. 또 유인우(柳仁雨) 공천보(貢天甫) 김원봉(金元鳳) 등을 보내어 쌍성(雙城) 등의 땅을 수복 하도록 하였다(天授紀元四百三十九年......上始從瑩等議逐定西北恢收之計先罷征東行省繼遣印璫崔瑩等諸將攻鴨綠江以西八站破之又遣柳仁雨貢天甫金元鳳等收復雙城等地 太白逸史)

雙城摠管府를 탈환한 것은 高麗이다.

이상한 것은 東寧府 수복만 빠져 있는 점이다. 東寧府(西北地方) 탈환을 목표로 그 전단계로 征東行省을 혁파 했는데, 이유도 없이 직전에 東寧府 수복만 포기하고 훗날로 미룬다. 東寧府 역시 이 당시 탈환했다. 이 기사는 恭愍帝 5 년(1356)의 기사가 아니다.

雙城摠管府는 1356 년에 격파하고, 東寧府는 1370 년에 와서야 격파했다? 무려 14 년이나 시차가 발생한다. 雙城摠管府를 격파할 전력이 있었으면 東寧府도 격파할 수 있다. 雙城摠管府는 蒙汗의 皇城까지 옆에 있는 黃河 하류 이북 이지만, 東寧府는 고작 柴達木盆地에 불과하다. 1356 년이 아니라 1368 년에 雙城摠管府를 격파한 高麗軍에 놀라 蒙汗의 順帝가 도망갔던 것이다.

1 차 날조사에는 遼水가 桑乾河였다. 遼西 즉 桑乾河 이서에는 雙城摠管府가 있고, 遼東에는 東寧府가 있었다고 날조했다. 蒙汗 수도 현 北京(大都)은 桑乾河 東岸에 있다.

李成桂는 현 北京의 順帝를 朱元璋이 내쫓을 시간을 벌어 주고자 12 년 앞서서 雙城摠管府를 격파 했다고 날조했다. 그 덕에 朱元璋은 종이 위에서나마 1368 년에 蒙汗의 수도 근처에도 가지 않고도 심약(?)한 蒙汗의 順帝를 내쫓을 수 있었다.

그러나 實史에서는 桑乾河 이동도 雙城摠管府였다. 大都는 雙城摠管府 안에 있었다. 雙城摠管府는 黃河 하류 이북에서 百濟長城 이남 까지다. 桑乾河를 기준으로 百濟長城 이남 일부는 蒙汗 땅, 일부는 高麗 땅으로 하지 않았다. 長城은 장식물이 아니라고 했다. 雙城摠管府는 百濟長城 이라는 장애물에 의해 서쪽과 북쪽으로 부터 高麗의 침공에서 보호받고 있었다.

발해만 일부까지 잠식한 雙城摠管府가 明의 날조사 에서는 桑乾河 이서로 축소된다. 그래야 蒙汗의 수도가 무사할 수 있으니까. 雙城摠管府를 격파 하면서 고작 강 하나를 사이에 둔 蒙汗의 수도를 공격하지 않은 이유로 東寧府에 의해 방어되고 있다고 날조한 것이다. 雙城摠管府를 탈환한 高麗가 順帝가 있는 날조 東寧府 까지 탈환하면 안되니까, 紅巾賊의 침입을 받고, 그 결과 恭愍帝는 종이 위에서 몽진까지 떠나야 했다.

順帝를 내쫓는 것이 목표 이어야 할 紅巾賊이 우리나라를 침입하는 것으로 목표가 바뀐 것이다. 順帝가 雙城摠管府를 격파하는 高麗軍에 놀라 도망갔던 얘기는 紅巾賊에게 그대로 써먹었다.

淸은 지명을 확대 시키고, 李氏朝鮮은 지명을 축소 시켰다. 李氏朝鮮은 상실한 땅을 三國과 高麗의 무능으로 덮어씌운 것이다. 그래서 李氏朝鮮이 영토를 상실할 때마다 우리나라의 강역은 자꾸만 축소되어 갔다. 李氏朝鮮이 韓半島로 줄어들자, 韓半島에 東寧府, 雙城摠管府, 耽羅摠管府까지 두었다던 蒙汗이 정작 동북아 까지 부풀려진 中土는 방치한 셈이 되었다.

高麗가 1368 년에 雙城摠管府를 격파 하면서 順帝를 쫓아냈다. 恭愍帝는 “이와 같은 국제 정세의 변화를 간파해서 먼저 蒙汗의 年號 사용을 정지하고 蒙汗의 영향을 받아 제정한 관직명을 개정”한 것이 아니다. 대대로 蒙汗 여자가 太后로 있으면서 高麗를 흔들 때도 高麗의 年號와 官制를 사용했다.

소종(昭宗) 역시 朱元璋의 군대에 쫓겨 도망친 것이 아니고, 高麗軍에 쫓겨났다. 昭宗이 蒙古高原으로 달아났다는 것은 高麗가 長城 이북 땅까지 모조리 되찾았다는 증거다. 恭愍帝 때는 “高麗의 가장 암울한 시기”가 아니고, 高麗가 天子國 으로서의 위상을 되찾은 시기다.

蒙古는 蒙汗과 사한국(四汗國)으로 분할되고 서로 다투었으니까, 昭宗은 중앙아시아로 갈 수가 없었다. 蒙古高原은 원래 高麗 땅이니까, 高麗軍이 추격해올 염려가 있었다. 그래서 昭宗은 서신을 보내 蒙古高原에 있어도 되겠냐고 허락을 구했고, 恭愍帝는 좋다고 했다. 昭宗이 恭愍帝에게 혈족이자 인척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雙城摠管府 격파를 12 년씩이나 앞당겨야 했을까. 1 년이나 2 년 쯤 앞당겨도 되는데? 1368 년에 격파한 雙城摠管府를 12 년이나 앞당겨 격파 했다고 날조한 것은 李成桂의 父 子春이 雙城摠管府 격파에 절대적인 공헌을 했다고 날조하기 위해서였다. 李子春이 高麗로 귀화하기 전에 雙城摠管府를 격파해야 李子春의 협력이 절대적이라고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高麗는 東寧府도 탈환했다. 1369 년 12 월에 恭愍帝는 병력을 보내 東寧府를 격파하고 항복을 받았다. 세상의 어떤 나라가 기껏 되찾은 땅을 “추위와 기근으로 더 오래 머무르지 못해 부근 주민들에게 귀순할 것을 권고하고 회군”한단 말인가.

시베리아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단 말인가. 독일군은 미쳤다고 1, 2 차 대전 때, 러시아, 소련을 침공했단 말인가. 노르웨이, 핀란드도 세계 대전의 전화를 피해가지 못했다. 러시아-핀란드 전쟁(1939∼40)에서 소련은 수십만의 사망자를 냈는데, 대부분이 동사자 이거나 눈과 빙판 위에서의 이동이 서툴러서 핀란드인에게 살해 당했다. 그래도 소련은 끝내 그 추운 핀란드 영토를 할양 받았다.

東寧府가 있던 땅도 慈烏支 한웅 이래로 우리나라 영토다. 추우면 얼마나 춥고, 기근에 시달리면 얼마나 시달린단 말인가. 自國 땅의 기후도 모를 수 있는가. 高麗軍의 출전시기는 12 월 겨울 이므로 만반의 준비를 했다. 더구나 李成桂는 1369 년 12 월에 출정해 해를 넘겨 1370 년 11 월에야 東寧府를 격파했다. 1 년이 걸렸다. 다시 말해 高麗軍은 東寧府의 혹한을 견뎌내고 승리했던 것이다.

李成桂는 추위와 기근 운운할 수도 없는 것이 바로 濊貊族이다. 東寧府가 있던 柴達木盆地는 濊貊族이 천 년 가까이 살아온 땅이다. 李成桂 역시 高麗에 歸化하기 전까지 살던 땅이다. 李成桂는 雙城摠管府가 아니라 東寧府에서 살았다. 더구나 李成桂와 朱元璋이 합의한 날조 東寧府는 桑乾河 以西에 있었다. 桑乾河 이서의 현 北京은 1 월 평균기온이 ―5 ℃에 불과하다. 柴達木盆地는 이보다 훨씬 추워서 연평균기온이 -5~8 °C, 1 월에는 -18.2~ -7°C이다.

東寧府 격파에 병력을 1 만 5000 밖에 투입하지 않았다는 것도 거짓이다. 고작 7500 명을 지휘하는 장수를 원수로 삼았다는 소리다. 高麗는 언제나 대군으로 전투개시 전 부터 적을 압도하는 나라였다. 그래서 徐熙가 거란을 침공할 때도 80 만 대군이나 이끌고 갔다. 고작 1 만 5 천으로 공략할 수 있는 곳을 高麗가 백 년 넘게 방치했단 말인가. 高麗가 언제나 대병력을 동원하는 관례 때문에 遼東征伐을 하러 갔다던 李成桂가 회군하여 대병력을 배경으로 江陵帝를 폐위 시켰던 것이다.

(1370) 윤 3 월 己未 北元 요양성(遼陽省)의 평장사(平章事) 유익(劉益)과 왕우승(王右丞) 등은 요양(遼陽)이 본래 고려의 땅이라는 뜻에서 우리나라에 투항 하려고 사람을 보내어 이를 청해왔다. 이때에 조정의 의견은 통일되지 못하였고 국사는 다난했다. 그렇지만 임금은 정몽주(鄭夢周)를 명나라에 파견하여 촉(蜀)을 평정함을 축하 하도록 하였다. 김의(金義)는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을 죽여 버렸지만 조야가 모두 시끄러워, 이 일을 말하려는 자는 거의 없었다. 이 때문에 이 사실을 회답 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유익(劉益) 등은 마침내 금주(金州), 복주(復州), 개평(蓋平), 해성(海城), 요양(遼陽) 등지를 가지고 명나라에 가서 붙게 되었다(閏三月己未北元遼陽省平章事劉益王右丞等以遼陽本高麗地欲歸附我國遣人來請時廷議不一國事多難然上遣鄭夢周如明賀平蜀金義殺明使蔡斌朝野騷然其欲言事者幾希以故未卽回答劉益等遂以金州復州蓋平海城遼陽等地歸附于明 太白逸史)

바로 東寧府에 대한 날조기사다. 거짓이라는 것은 海城에서 드러난다. 海城은 薩水(丹江) 이북에 있었다. 高句麗 때만 해도 長安城에 이은 또 다른 平壤城이다. 遼西 조차 8 站을 공격하여 우선적으로 수복 했는데, 海城은 長安城 바로 지척이므로 太祖 王建 때 부터 高麗의 영토였다.

요양이라는 지명 역시 원래는 산서성의 요라는 곳에 있다가 다시 난하의 동쪽으로 옮겨와서 지금은 현 요녕성의 요하 동쪽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실증 한단고기)

遼陽은 中奴가 티벳고원 북부에 있었을 때 山西地方 즉 岷江 너머에 있었던 것이다. 남후(藍侯)가 백성들을 海垈의 땅으로 옮겨가게 하고(揆園史話), 大震國 武皇帝가 원 黃河[오주목(烏珠牧)의 동쪽 10 리에서 황수(潢水)를 굽어본다(契丹定界烏珠牧東十里臨潢水)]에서 거란과 경계를 정했다(太白逸史)는 사실에서 우리나라 영토가 대부분의 기간 동안 金沙江 이서 내지는 金沙江 이동까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柴達木盆地 이서에 있던 遼陽은 高麗의 영토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東寧府는 黃河 이동까지 포함하는 기관이었다.

그러나 “요양이 본래 高麗의 땅이라는 뜻에서 우리나라에 투항하려고(遼陽本高麗地欲歸附我國)” 한 것이 아니라, 1370 년 11 월 遼陽城이 함락되자,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당시는 恭愍帝 20 년(1370)으로, 이미 雙城摠管府를 탈환하고 蒙汗의 順帝도 도주하다 죽고 長城 이북도 수복했다. 昭宗이 蒙古高原으로 쫓겨나 蒙汗의 명맥을 잇고 있는 상황에서 실질적으로 蒙汗은 東寧府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했다. 高麗軍의 공격을 받자, 東寧府 平章事 劉益과 王右丞은 별 수 없이 高麗에 항복했던 것이다.

高麗에 귀속된 東寧府를 明에 주자니, 高麗를 한없이 작은 나라로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이때에 조정의 의견은 통일되지 못하였고 국사는 다난했다. 그렇지만 임금은 정몽주를 明나라에 파견하여 蜀을 평정함을 축하하도록 하였다. 김의(金義)는 明나라 사신 채빈(蔡斌)을 죽여 버렸지만 조야가 모두 조용할 뿐, 이 일을 말하려는 자 거의 없었다(時廷議不一國事多難然上遣鄭夢周如明賀平蜀金義殺明使蔡斌朝野騷然其欲言事者幾希).”고 한 것이다.

蒙汗은 高麗가 내쫓고, 중국 대륙은 明이 차지한다? 이런 등식은 성립할 수 없다. 종이 위에서 나마 紅巾賊이 順帝를 내쫓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날조 遼東은 물론이고, 이서도 李氏朝鮮 땅이니까, 해결책으로 明은 종이 위에서나마 東寧府를 격파하고 아무 이유 없이 철령위(鐵嶺衛) 설치를 포기했다. 그래야 李成桂와 李氏朝鮮이 고마운 “明을 성실 근면하게 섬“길 명분도 생기지 않겠는가.

그래도 李成桂가 장수가 되어 공략한 지역 이므로 李氏朝鮮은 李成桂의 무공을 자랑 하기로 했다. 그 결과, 東寧府를 평정하기는 했으나 “추위와 기근으로 더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부근 주민들에게 高麗에 귀순할 것을 권고하고 回軍 하였다”로 당치도 않는 이유로 낙착된 것이다.

高麗가 東寧府와 雙城摠管府를 다 격파 했으니까, 明은 東寧府와 雙城摠管府에 대한 권리가 없다. 東寧府와 雙城摠管府 땅은 원래부터 高麗 영토였다. 高麗가 東寧府와 雙城摠管府를 격파 했다는 것은 高句麗長城 이북도 회복했다는 말이다. 高麗의 長城 이북 진출을 방해할 장애물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天山北路에 오고타이汗國에 이어, 차가타이汗國이 있었다고 하지만, 高麗가 長城 이북을 회복 하면서 여기만 몽고 땅으로 남겨 두지는 않았다. 天山 방면의 동부 한가(汗家)와 서부 투르키스탄(Turkistan)의 서부 汗家로 분열? 沃沮의 예로 보듯이 역사날조를 위해 필요하면 얼마든지, 동, 서, 남, 북으로 쪼개서 날조하는 것이 中奴의 수법이다. 北燕, 後燕, 西燕, 前燕, 南燕...... 필요 하다면 얼마든지 동, 서, 남, 북, 전, 후를 만드는 것이 中奴의 수법이다.

포은 정몽주 초상

紅巾賊은 蒙汗의 順帝를 내쫓으려면, 長城 이북으로 가야 한다. 타림분지(塔里木盆地)를 수비하는 거란이나 柴達木盆地를 수비하는 濊貊族을 우선 격파해야 하는 것이다. 현 北京 까지는 먼 거리니까, 타림분지 보다는 柴達木盆地를 격파하는 작전을 누구라도 선호할 것이다. 紅巾賊은 1351 년 부터 일어났다고 했는데, 東寧府는 그 후로 20 년간이나 온전했다. 長城 이북을 따라 현 北京까지 침입해야 하는데, 엉뚱하게 長城 이남의 高麗 영토를 침입한 것이다. 西鴨綠江 이서로 침입해야 하지만, 8 站 조차 무사했다. 그런데도 蒙汗의 順帝는 제풀에 겁먹고 도망쳐 다니다 죽었다고 우긴다. 紅巾賊은 蒙汗으로 간 적이 없다. 그러나 날조사 에서는 宋이 揚子江 이남에서 망했고, 黃河 이남도 蒙汗 땅이었다.

홍건적(紅巾賊). 붉은 수건을 맨 도둑이라는 뜻이다. 農民叛亂 이라고 우기는데, 농민보고 도둑이라 할까. 그리고 中土는 자연상태에서 농사가 불가능한 연강수량 450mm 의 건조기후대라서 농민이 별로 없다. 유목민이나 있을까. 紅巾賊이 농민이든, 유목민이든, 도둑이든 중요한 것은 아니다.

대체 누구의 전력이 우세할 것인가. 정규군인 高麗軍인가, 지리멸렬한 도적 떼 紅巾賊인가? 高麗軍의 전력이 막강해서 蒙汗을 소멸 시키고 高麗의 영토를 회복한 것이 아닌가. 티벳고원 북부에서 高麗를 침입 하려면, 遼西의 8 站 부터 격파해야 하는데, 8 站은 恭愍帝가 1368 년에 이르러 격파했다. 紅巾賊은 高麗 조차 침입하지 못한 것이다. 恭愍帝는 종이 위에서 몽진을 떠났던 것이다.

그러면 紅巾賊은 어디서 무엇을 했던가. 티벳고원 북부를 휘젓고 다녔다. 티벳고원에는 明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元나라는 매우 쇠폐하여 吳王 장사성(張士誠)은 강소(江蘇)에서 기병하였고, 여러 가지 일로 소란하였다(元室極爲衰弊吳王張士誠起於江蘇事多騷亂矣).” 恭愍帝가 “정몽주(鄭夢周 1337~1392))를 明나라에 파견하여 촉(蜀)을 평정함을 축하하도록 하였다(上遣鄭夢周如明賀平蜀 太白逸史)."는 날조기사도 中土에 雨後竹筍으로 나라가 들어섰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蒙汗이 高麗軍에 쫓겨나자, 티벳고원 북부 에서는 中奴가 일어나 너도 나도 나라를 세우려고 혈안이었던 것이다.

高麗가 蒙汗을 내쫓고 국토를 회복한 여파가 中土의 혼란상으로 나타났다. 朱元璋이 일어나 일시에 中土를 통일한 것이 아니다. 紅巾賊은 도적 떼다. 도적은 사회가 혼란할 때 출현한다. 蒙汗이 빠져나간 땅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도적 떼를 앞세워 中土를 분할한 것이다. 그 좁은 땅에 너도 나도 왕이라고 일어나 다투는 와중에 高麗 침입은 꿈도 못 꾼다. 蒙汗도 高麗가 무신들의 권력투쟁에 정신없는 틈을 타서 高麗 영토에 자국의 군정기관을 설치했다. 朱元璋과 張士誠(1321~1367) 등이 中土를 차지하기 위해 정신없이 싸울 당시 국토를 회복한 高麗軍은 최강의 군대로 거듭나고 있었다.

朱元璋이 黃河 이남으로 中土의 지명을 밀어 냈으니까, 紅巾賊은 黃河 이남에서 활약한 것이 되었다. 淸이 遼水를 난하(灤河), 현 遼水로 밀어 내면서 黃河 이남의 지명까지 함께 밀어내자, 紅巾賊도 덩달아 한반도 근처까지 침입한 셈이 되었다. 紅巾賊이 종이 위에서 韓半島 까지 유린한 것은 雙城摠管府를 격파한 高麗가 막대한 타격을 입고, 恭愍帝가 몽진도 떠나야 蒙汗을 내쫓지 못하기 때문이다.

紅巾賊은 1368 년 이전에는 존재 하지도 않았다. 紅巾賊은 高麗軍이 雙城摠管府를 격파하자 蒙汗이 蒙古高原으로 쫓겨난 것을 기화로 티벳고원 북부를 차지하기 위해 일어난 도적 떼에 지나지 않았다. 中族들에 대한 억압 및 차별 정책에 분연히 봉기한 것이 아니라 땅 욕심에 中奴끼리 싸워댄 것이다. 中奴들은 蒙古의 억압 및 차별 정책을 무던히도 참고 견뎌내고, 蒙古의 멸시도 담담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티벳고원 북부에서 서로 싸운 무리 중 하나를 紅巾賊으로, 상대방을 高麗軍으로 설정했다. 紅巾賊이 朱元璋처럼 끝까지 살아 남았는지도 의문이다. 티벳고원이 평정될 때 까지 한 쪽은 紅巾賊, 다른 쪽은 高麗軍으로 날조하면 그만이다. 지명을 확대된 공간으로 밀어내면, 지리멸렬한 도적 떼조차 대단한 활약을 했다고 날조할 수 있는 것이다.

紅巾賊은 티벳고원을 휘젓고 다녔지만, 날조사에서 보듯이 매번 궤멸됐다. 이는 紅巾賊이 朱元璋이 이끄는 도적 떼가 아니거나, 朱元璋이 수세에 몰렸지만, 李成桂가 漢水 이남을 준다고 하자, 단번에 전세가 역전됐다는 뜻이다. 티벳고원 북부에서 빠져나올 기회를 5300 년 만에 차지했다. 黃河 이남을 약속받자, 朱元璋 아래로 모여든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明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남쪽에서 倭寇가 침범할 염려가 있다? 高麗가 明을 공격하지 않으면, 倭寇가 침입하지 않는가. 또 倭寇가 침범한다 한들, 高麗에 장수가 李成桂 뿐인가. 東寧府를 공격한 병력이 고작 1 만 5 천명 이라면서? 동아시아가 아니라, 韓半島만 차지했다고 해도 그보다는 훨씬 많은 병력을 투입해야 한다.

高麗를 침범한 倭는 게릴라전술을 사용했기 때문에 高麗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倭가 중국 남부나 海上에 있었다면 高麗가 당장 정복했다. 宋의 것이라고 날조한 유물이 對馬島에서 발견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高麗 시대에 倭寇는 중국 대륙을 침범하지 못했다. 고작 韓半島에서 노략질한 것이다.

李成桂는 倭寇를 격퇴해 국민적 영웅(?)이 됐다고 했지만, 李氏朝鮮을 건국하고 나서도 倭寇는 극성이었다. 李氏朝鮮 때에는 明으로 변한 중국 대륙까지 침범했다. 이도(李祹 : 李氏朝鮮의 世宗이라 불리는 濊貊族)가 倭寇들에게 조공무역을 허락하고 나서야 겨우 없어졌는데, 이후로는 倭寇 침범이 아니라 크고 작은 倭亂이 李氏朝鮮 땅에서 일어났다.

근자에 중국(中國)이 왜(倭)를 정벌한다고 말하니 만약 우리 국경 까지도 전함을 나누어 정박 시킨다면 그들을 지대(支待)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허실을 엿볼까 두렵습니다. 倭는 온 나라가 도적질을 함이 아닙니다. 그 반민(叛民)이 대마도(對馬島)와 일기도(一岐島))에 웅거하여 이 섬들이 우리 동쪽해안에 가까움으로 무시로 침구하여 오는 것입니다. 만약 그 죄를 성언(聲言)하고 크게 군사를 일으켜 먼저 이 섬들을 쳐서 그 소굴(巢穴)을 전복하고, 또 일본에 글을 보내어 도망한 적을 쇄환(刷還)시켜 귀순케 한다면 倭의 근심을 길이 떨쳐 버리고 중국(中國)의 군사가 이로 인하여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수군은 모두 수전을 잘하여 辛巳年(경효제 7 년 : 날조사의 충렬왕) 동정할 때 몽한병(蒙漢兵)이 주집(舟楫 : 배를 다루는데)에 익숙치 못함과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만약 때를 순응하고 바람을 기다려 움직인다면 성공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다만 배는 오래되면 썩고 군사는 늙으면 피로하는 것이며 또 지금 수군이 요역(傜役)에 피곤하여 날로 도망하고 흩어지기를 생각하오니 마땅히 이 기회를 타서 묘책을 결단하여 소탕함이 늦지 아니합니다(近中國聲言征倭. 若並我境分泊戰艦則非惟支待爲艱亦恐覘我虛實 倭非擧國爲盜其叛民據對馬一歧諸島近我東鄙入寇無時 若聲罪大擧先攻諸島覆其巢穴又移書日本盡刷漏賊使之歸順則倭患可以永除中國之兵亦無因而至矣 今之水軍皆善水戰非辛巳東征蒙漢兵不習舟楫之比 若順時候風而動則易以成功 但船久則朽師老則疲 且今船卒困於傜賦日思逃散宜乘此機決策蕩平不可遲疑 高麗史 列傳 鄭地傳)

高麗 시대에 중국은 倭를 정벌할 수도 없는 것이 고작 티벳고원 북부의 나라이고, 그 당시까지도 揚子江을 오가는 배를 만든 것이 전부이다. 티벳고원 북부에 있던 明의 군사라고 해봐야 고작 紅巾賊이다. 東寧府도 종이 위에서만 공략하고, 高麗 역시 종이 위에서만 침입한 도적들이었다.

高麗 시대에 中國을 中國이라 불렀던가. 이 당시는 華夏族을 漢族으로 둔갑 시키기 전이고, 異民族의 나라를 中國의 왕조로 둔갑시키기 전이다.

高麗는 이미 1019 년에 전함을 이끌고 가서 화포를 앞세워 日本을 정복한 나라다. 쇼유키(小右記)에는 통상을 요구했다고 했지만, 통상 요구야, 19 세기 메국(米國)과 잉글랜드 등이 한 것이고, 속국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이미 375 년에 黃海를 건너 韓半島 상륙작전을 실시한 우리나라다. 高麗 말은 우리나라가 水戰이 아니라 海戰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지도 천 년이나 된 시점이다.

高麗軍은 海戰에 능숙해서 1 차 麗蒙遠征 때에도 日本軍과의 전투를 도맡았다. 몽고습래회사(蒙古襲來繪詞) 에서도 蒙汗軍은 언제나 高麗軍 뒤에 숨어 있다. 高麗軍에 쫓긴 日本軍은 규슈(九州) 다자이후(大宰府 : 奈良)로 후퇴해서 농성전을 펼치며 高麗軍이 물려가기만을 기다렸다.

高麗의 항해술과 조선술이 막강함은 元史에도 나온다.

元나라의 전선들은 모두 돌풍에 부서졌으나, 高麗의 전함은 대부분 무사했다.

2차 원정 당시의 기술이다. 침몰한 것은 蒙汗의 배였던 것이다.

몽고습래회사(蒙古襲來繪詞) 중에서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 당시) 고려는 대선 300 척을 포함, 900 척의 배를 불과 4 개월 만에 만들어낼 수 있는 고도의 조선술이 있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축적된 기술이 아니었다(역사스페셜 6권)

高麗의 항해술과 조선술은 新羅 에게서 물려 받았다. 新羅는 375년 당시 중국 동부에서 黃海를 건너 百濟 땅 韓半島를 침공, 성공적으로 교두보를 마련하고, 끝내 百濟를 韓半島 에서마저 구축해 日本에 웅거하게 만든 海上帝國이다.

막강 전함 거북선(龜船)은 李氏朝鮮이 아니라, 高麗가 개발했다. 李氏朝鮮實錄의 太宗 13 년(1413) 2월 6일에 “王이 臨津江 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과 倭船으로 꾸민 배가 해전 연습을 하는 모양을 보았다(甲寅…….上過臨津渡觀龜船倭船相戰之狀).”라 했고, 2년 후에는 좌대언(左代言) 탁신(卓愼)이 “거북선의 전법은 많은 적과 충돌하더라도 적이 해칠 수 없으니 결승의 양책이라 할 수 있으며, 거듭 견고하고 정교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의 도구로 갖추어야 한다(左代言卓愼上兵備事宜…….其六龜船之法衝突衆敵而敵不能害可謂決勝之良策更令堅巧造作以備戰勝之具愼時知兵曹 上覽之下兵曹).”고 상소했다. 李氏朝鮮 왕조 어디에도 거북선을 개발 했다는 내용이 없다. 거북선은 李氏朝鮮이 만든 전함이 아니었던 것이다.

麗蒙聯合軍의 日本遠征 후 高麗가 해상활동을 금지 당했다면, 조선술과 항해술도 퇴보하고 만다. 90 년이나 배를 만들지 못했다면, 거북선 같은 우수한 전함도 잊혀질 수밖에 없다. 蒙汗은 운좋게 高麗 땅을 차지했을 뿐, 高麗의 上國이 아니다. 해상활동을 하라 말라 할 수가 없다. 高麗는 雙城摠管府와 東寧府, 長城에 의해 중국 대륙과 동북아가 분단 되었기 때문에 海上을 통해 韓半島를 왕래했던 나라다.

日本 원정 당시 高麗軍과 蒙汗軍(蒙漢軍)은 각자의 배를 만들었다. 그래서 元史에 “元나라의 戰船들은 모두 突風에 부서졌으나, 高麗의 전함은 대부분 무사했다.”고 한 것이다. 몽고습래회사(蒙古襲來繪詞)에 나온다고 해서 무조건하고 高麗의 배가 아니다. 무엇보다 蒙古襲來繪詞는 복제본이다. 壬辰倭亂까지 일으킨 倭奴가 거북선을 모를 리 없다. 온갖 것을 다 날조한 倭奴가 蒙古襲來繪詞는 그대로 두었다고 보는가.

李氏朝鮮은 어떻게 저 기사를 창작했을까. 우리나라 역사는 중국이 가졌다. 티벳고원 북부에 있는 中奴의 역사를 高麗史로 둔갑 시키면 高麗는 中奴의 나라로 변하고 만다. 中國史를 덧입히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래도 뼈대는 있어야 한다. 李氏朝鮮史를 高麗史로 둔갑시킨 것이다. 李氏朝鮮은 對馬島를 정벌했다. 그때의 상황을 나누어 高麗史에 실었던 것이다. 李氏朝鮮史는 지지리도 못난 역사니까, 연대와 등장인물만 바꿔 그대로 베끼면, 高麗도 지지리 못난 나라가 되는 것이다.

이때 전라도와 경상도는 왜구(倭寇)의 소굴이 되었으며, 동북면은 철령위 문제로 근심스러웠으며, 경기 교주 양광도는 성을 수리하느라 곤경을 겪고 있었고, 서해 평양은 사신을 영접하느라 지쳤는데, 거기다가 징병을 하니 팔도가 소란하고 농사를 짓지 못해 모든 백성이 그것을 원망하였다(是時 全羅慶尙二道爲倭寇巢穴 東西北面方憂割地 京畿交州楊廣三道 困於修城 西海平壤道二道 迎候西獵 加以徵兵 八道騷然 民失農業中外之怨甚 高麗史 列傳 137 辛禑)

慶尙道와 全羅道가 韓半島에 있었거나, 중국 대륙에 있던 행정명을 역사날조 차원에서 韓半島로 옮겼을 것이다. 慶尙道와 全羅道가 倭寇의 소굴이 되었다는 것 역시 李氏朝鮮 초의 상황으로 추정된다. 즉 李氏朝鮮의 역사를 高麗의 역사로 각색한 것이다.

黃河 하류 이북 東北面은 雙城摠管府가 있었던 자리이고 鐵嶺衛도 있었다. 그러나 遼東은 嘉陵江 이동이다. 언제나 高麗의 영토였다. 平壤은 長安이자 開京이다. 西海는 타림분지다. 타림분지에서 사신을 맞았다고? 中奴조차 金沙江을 따라 내려왔다. 고작 八道? 西海 平壤, 八道를 보더라도 高麗의 영토를 韓半島로 축소했음을 알 수 있다.

李成桂는 韓半島로 遷都하고, 영토가 줄어든 변명이 필요했다. 遼東征伐이라 했지만, 실은 티벳고원 북부를 정벌하러 출전한 것이다.

紅巾賊의 수 차에 걸친 침입으로 高麗도 막대한 타격을 입어 국운의 쇠퇴를 가져 왔다고? 종이 위에서 침입한 것도 국운의 쇠퇴를 가져오나? 國運이 흥했기 때문에 高麗는 雙城摠管府, 東寧府도, 八站도 철폐하고, 明을 정벌하러 티벳고원 북부로 출전했던 것이다.

그러나 紅巾賊의 침입으로 “高麗도 막대한 타격을 입어 國運의 쇠퇴를 가져”와야 李成桂의 高麗 皇位 찬탈이 정당화된다. 그냥 놔두어도 망할 왕조라서 李成桂가 구국의 신념으로 高麗 왕위를 찬탈 했다고 해야 李氏朝鮮 건국이 정당화되는 것이다. 마치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한 자들이 입에 침바르며 하는 소리와 별반 차이가 없다.

李成桂는 배달사와 朝鮮史를 말살하고, 동아시아의 天子國 高麗를 한낱 미개 中奴의 제후국으로 전락시킬 정도로 우리나라 역사를 철저히 말살했다. 그런 李成桂이니 만큼 자신의 행적은 과대포장하는 것이 당연했다. 李成桂가 온갖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면, 高麗가 어떻게 동아시아를 지배한 대제국이 될 수 있었단 말인가. 李成桂의 전공을 늘리기 위해 종이 위에서나마 항해 능력도 없는 倭寇가 중국 대륙까지 침범해야 했고, 紅巾賊이 극성을 부려야 했던 것이다.

▲ 최영장군 사당(崔瑩將軍 祠堂) 통영시 사량면 금평리 150 에 소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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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러웠던 것은 사실 倭寇가 침입해서가 아니라, 李成桂가 韓半島로 천도하고, 高麗의 지배층이 줄줄이 韓半島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李成桂가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이 아니라 권모술수로 출세했다는 사실은 東寧府 공략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성계는 1369 년 12 월에 출정해 1370 년 11 월에야 東寧府를 격파했다고 했다. 1 년이나 걸린 것이다. 柴達木盆地는 李成桂의 고향이고, 누구보다 지리를 잘 아는데도, 제 동족조차 휘어잡지 못해 1 년이나 악전고투한 것이다. 그것도 蒙汗 황제가 이미 몽고고원으로 내쫓긴 상황에서. 李成桂가 얼마나 무능한지 알 수 있다. 고작 柴達木盆地를 정복하는데 1 년 가까이 미적거리면, 누구라도 司令官 교체를 생각할 것이다.

李成桂를 東北面元帥, 지용수(池龍壽)를 西北面元帥로 삼아 東寧府를 치게 했다? 東寧府가 西北面에 있는데, 무슨 東北面元帥? 1370 년 11 월에 池龍壽와 합세해 遼陽城을 함락시켰다는 말은 결국 李成桂는 遼陽城 함락에 실패하고 사령관이 교체돼 池龍壽가 東寧府를 탈환했다는 뜻이다. 池龍壽가 새로운 西北面元帥가 되자 東寧府를 함락 시켰다고 날조한 李成桂는 東北面元帥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東寧府를 공략하는 군대의 사령관에게 西北面元帥의 직함을 준 것은 雙城摠管府를 격파하는 군대와 동시에 출전했기 때문이다. 雙城摠管府 정벌군 사령관은 東北面元帥, 東寧府 정벌군 사령관은 西北面元帥라 한 것이다. 다시 말해 李成桂는 1369 년 12 월도 아니고, 雙城摠管府를 격파한 1368 년에 東寧府로 출전했다. 2 년이 지나도록 東寧府를 격파하지 못하자 池龍壽가 파견된 것이다.

遼東征伐로 날조된 明 정벌 당시 八道都統使 崔瑩(1316~1388)을 平壤에서 督戰케 하고 조민수(曺敏修, ?~1390)를 左軍都統使, 李成桂를 右軍都統使로 삼아 정벌군을 이끌고 출정하게 하였다? 우선 高麗의 행정구역은 八道 이상이다. 무엇보다 總司令官 崔瑩이 平壤城에 남아서 遼東征伐을 지휘 한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韓半島 平壤은 더욱 더 말이 안된다. 오늘날처럼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이상, 총사령관은 戰場에 있어야 한다. 崔瑩은 정벌군과 함께 출전한 것이다. “鴨綠江을 건너 威化島에 주둔했을 때 이유 없는 도망병이 길에 연이을 정도로 생겨났다(庚辰左右軍渡鴨綠江屯威化島亡卒絡繹於道禑令所在斬之不能止 高麗史 辛禑列傳)”? 威化島에서 李成桂가 叛亂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威化島에서 李成桂가 주저앉아 진군을 방해한 것이다. 이미 사전계략에 의해 曺敏修는 李成桂에게 넘어갔고, 李成桂는 威化島에서 崔瑩의 지휘권을 빼앗은 것이다.

티벳고원 북부를 제외한 동아시아를 전부 차지한 高麗는 막강한 국력을 바탕으로 주변국들을 위압하는 경향이 있었다. 거란을 정벌할 때도 徐熙는 80 만 대군을 이끌었다. 明 정벌군은 최소 수십 만 이었다. 崔瑩을 무력화시킨 李成桂는 곧바로 대군을 되돌려 高麗의 황성으로 쳐들어간 것이다.

李成桂는 江陵帝(날조사의 禑王)를 신돈(辛旽 ?~1371)의 자식이라 소문내고, 자신은 우리나라 사람으로 변신했다. 江陵帝를 辛旽의 자식으로 매도 하고도 江陵帝의 아들을 황제로 옹립했다. 일단 皇統을 이어받지 못했다고 소문내면, 더 이상 권력을 장악할 수 없다. 유전자 검사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의심 때문에 아무도 복종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창왕(昌王 1380~1389)은 9 살에 황위에 올랐다. 아무리 대제국이라 하나, 9 살 짜리가 권력을 장악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듬해 폐위되고 살해 당했다. 공양왕(恭讓王 1345~1394)은 20 대 神宗의 7 대손으로 황실의 먼 방계혈족이다. 당연히 모든 것이 李成桂의 독단으로 이루어졌다. 이 당시 李成桂가 실질적인 高麗의 황권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1270 년 雙城摠管府를 설치한 이후에야 蒙古는 간신히 수도를 현 北京에 정할 수 있었다. 蒙古는 서양도 정복하고, 서아시아도 정복했다. 그러나 중국 대륙에서는 黃河 이북만 차지하고 현 北京(大都)에 수도를 정했다. 長安은 여전히 高麗의 수도였고, 高麗는 黃河 이남과 동북아의 주인이었다. 朝鮮의 계승국으로 자처 하면서도 蒙古는 長安조차 차지하지 못했다. 서양과 서아시아를 다 놔두고 현 北京에 안주했다. 그리고 高麗 皇帝를 사위로 삼는 것을 가문의 영광, 아니 나라의 영광으로 알았던 것이다.

蒙汗이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 Istanbul)을 놔두고 사막에 둘러싸여 살았던 것은 현 北京에 있어야 세계 최고의 문명국 高麗의 온갖 문물을 향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蒙古人에 버금가는 준지배자로서의 특권을 주었고, 문무 각 방면에서 重用”한 것은 高麗人이지, 色目人이 아니다. 色目人이 문명인이라서 蒙汗을 이끈 주역이라면, 몽한이 유럽에 있어야지, 중국 대륙에 있었겠는가. 유럽이 문명화된 땅이라면, 몽고는 동유럽에서 정복을 멈추고, 高麗 땅에 주저앉지 않았다.

유럽이 문명화된 땅이라면, 蒙汗의 附馬가 되는 것은 高麗 皇帝가 아니라 호엔슈타우펜(Hohenstaufen) 왕조의 프리드리히 2 세(Friedrich II Stupor Mundi 1215~1250)였다. 이 당시는 합스부르크( Habsburger)家도 소영주에 지나지 않았고, 호엔쫄레른(Hohenzollern)도, 로마노프(Romanov)도 등장하기 전이었다. 플랜태저넷(Plantagenets)도 소영주로 잉글랜드 자체가 유럽에서도 2 류국에 지나지 않았다. 그에 반해 高麗의 시조 王建의 족보조차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 나오는 王建은 前蜀이 아니라 高麗의 王建이다. 우리나라 족보책까지 하나 남김없이 華夏族의 것으로 바꿔치기 했던 것이다.

이 당시 서유럽은 미개지 가운데 하나였다. 아라비아인들 조차 중국 대륙에 왔다가 韓文明에 감탄해 그냥 눌러 살았다. 유럽이 문명화된 땅이 아니라는 증거는 로켓 발명만 봐도 극명해진다. 최초의 로켓 走火는 高麗 初에 발명했고, 13 세기 초에는 이미 中奴(宋이 아니고 金汗)에서 蒙古로 그 기술이 전수됐다. 印度마저 1750 년대 말, 淸이 개량 없이 그대로 사용한 高麗 초기 로켓(? 혹은 高麗의 走火에서 中奴가 모방한 또 다른 로켓)인 火箭을 모방했다. 서양은 19 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잉글랜드의 콩그리브(William Congreve 1670~1729)가 인도에 전수된 高麗의 로켓을 모방해서 처음으로 로켓을 만들었다, 高麗가 로켓을 만든 지 무려 9 백년이나 지나서.


夫餘는 夫餘 스스로의 길을 잃었으니 그 뒤에는 漢族이 夫餘에 쳐들어와서 점령해 버렸고, 高麗는 高麗대로 길을 잃었으니 그 뒤에는 蒙古가 高麗에 쳐들어와서 차지해 버렸다? 만약 그때에 이보다 먼저 夫餘에 夫餘다움이 고스란히 있었다면 漢人은 자기 나라로 돌아갔을 것이고, 高麗에 高麗다움이 있었다면 蒙古사람들은 蒙古로 돌아갔을 것이다?(嗚呼痛矣夫餘無夫餘之道然後漢人入夫餘也高麗無高麗之道然後蒙古入高麗也若其時之制先而夫餘有夫餘之道則漢人歸其漢也高麗有高麗之道則蒙古歸其蒙古也 檀君世紀 序)

夫餘는 漢寇를 물리쳤고. 高麗도 雙城摠管府와 東寧府 외엔 빼앗긴 것이 없고 그마저 다 수복했다. 夫餘는 夫餘다움이 있었고, 高麗도 高麗다움이 있었다. 濊貊族의 나라 李氏朝鮮은 朝鮮다움이 당연히 없었기에 國號만 베끼고, 우리나라 속국에게 스스로 속국 노릇을 했던 것이다.

5) 入火石打. 1019 년, 고려 전함은 돌에 화약을 넣어 일본을 공략했다

입화석타(入火石打).

일본의 고기록 쇼유키(小右記)에는 1019 년에 高麗 전함이 돌에 화약을 넣어서 적선을 쳐부쉈다는 기록이 있다. 高麗가 전함을 동원, 日本을 정복했을 당시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日本이 통상을 거부해서 무력시위 했다고? 米日和親條約에서 착안한 날조다.

歷史歪曲을 학문으로 까지 발전시켜 國學이니 미토학(水戶學)이니 부르는 일본이지만, 왜곡이 체계적이지 못하다는 단점이 있다. 아무 거나 닥치는 대로 왜곡하다 보니, 놓치고 만 대목이다.

日本이 우리나라를 위해 역사를 날조할 리는 전무하므로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기록이다. 우리나라 역사서를 한 번에 수십만 권이나 분서했던 일본이다. 이미 축소되고 축소된 우리나라 역사를 말살하는 것이 일본의 최대 핵심 국책사업이었다. 더욱이 倭奴는 생전 보지도 못한 새 무기에 대해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런 창의적인 종족이 못된다. 壬辰倭亂 때(1592~1598)에도 서양인 에게서 구입한 대포를 배의 들보에 매어 사용한 종족 이니까.

小右記의 기록에 나오는 高麗의 무기는 무엇인가. 완구(碗口)로 추정된다.

10 세기 宋이 흑색화약을 개발 했다고? 세계 최초로 화약을 개발 했다는 宋이 전쟁만 하면 매번 졌다. 遼汗 한테도, 西夏 한테도, 金汗 한테도, 蒙古 한테도 모두 다 싸움만 하면 졌다.

글안에 항복한 포로 수 만명 중에 기술자가 10 명 중 1 명 꼴로 있어, 왕부(王府)에 머물게 하였다. 공예품은 천박하고 위조품이 많다(高麗圖經)

거란이 高麗를 침입한 것이 아니고, 高麗가 거란을 침입했다. “高句麗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그대들이 이를 침략 하더니(高句麗之地我所有也而汝侵蝕之 太白逸史)" 에서도 진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 차 침공(993)은 徐熙가, 2 차 침공(1010)은 楊規가, 3 차 침공(1018)은 姜邯贊이 지휘, 세 번 다 거란을 대파했다.

“글안에 항복한 포로 수만 명“은 漢나라 이후 蒙古의 위협에 노출된, 漢族 국가라 날조한 중국의 실상이었다. 中國은 창작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나라 역사는 中國史로, 中國史는 우리나라 역사로 둔갑 시켰다.

중국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高麗(918∼1392)가 존속하는 동안, 수많은 나라들이 저 땅에서 명멸했기 때문이다. 高麗 시대에만 後梁(907~923)·後唐(923∼936)·後晉(936∼946)·後漢(947∼950)·後周(951∼960)에다(이상 五大), 吳(902∼937)·南唐(937∼975)·吳越(907~978)·민(閩 909~945)·형남(荊南 907~963)·楚(907~951)·南漢(909~971)·前蜀(907~ 925)·後蜀(934~965)·北漢(951~965) (이상 十國), 燕 ·岐(907∼924) ·주행봉(周行逢:建州), 宋(960~1127), 遼汗(916~ 1125), 西夏(1032~1227), 金汗(1115∼1234), 蒙汗(1271∼1368), 明(1368∼1644)이 있었다.

宋만이 아니다. 중국은 유사 이래로 전쟁만 했다 하면 다졌다. 대외전쟁에서 이긴 적이라곤 노관(盧綰)과 배천(裵川)이 잠시잠깐 馬韓 지역을 침략했을 때 뿐. 유철(劉徹 : 漢武王)도 朝鮮, 漢 전쟁에서 패하고 돌아가, 군사령관 양복(楊僕), 순체(荀彘), 使臣 위산(衛山), 공손수(公孫遂) 등을 다 찢어발겨 죽였다(棄市). 中土 내의 전쟁에서도 이민족에게 늘상 패했다. 春秋戰國時代에는 언제나 자신들끼리 싸우고 있었기에 승자가 나왔던 것이다. 이런 나라가 중국 대륙 같은 거대한 땅을 수천 년이나 유지할 수 있는가.

인구의 다수가 한족(漢族?) 이었던 朱元璋의 나라도 베트남 북부의 교지국(交趾國) 조차 가까스로 물리쳤다. 淸한테 망한 나라가 明이다. 한민족도 朱元璋을 따라서 中寇가 되었기 때문이다. 2 차 대전 때는 日本의 증강된 연대가 중국의 55 사단을 분단하자, 그대로 사방으로 흩어져 55 사단 자체가 순식간에 해체 되어버린 그런 나라다. 포위작전시 마다 의도적으로 퇴각로를 남겨줘 매번 日本軍을 도주하게 한 그런 나라다.

高麗는 어떤 나라인가. 고려가 벌인 전쟁은 이씨조선이 다 삭제하거나 고려가 졌다고 날조했다. 그러나 高麗 太祖는 大震國의 平壤城 부터 되찾았다.

평양 땅은 황폐해진지가 자못 오래 되었으니, 예전의 기초는 비록 남아 있다고 하지만 가시덤불이 무성히 자라고 오랑캐들이 수렵하여 노닐며 주변의 고을을 약탈하였다는 것이 고려 태조 초년에 기록되어 있다(平壤之地 荒廢頗久 舊基雖存而荊棘滋茂 蕃人游獵 侵掠邊邑者 太祖初年所記也 揆園史話)

太祖 初年(918)은 날조라고 했다. 大震國이 멸망한 것은 926 년. 太祖는 後三國 전쟁을 끝낸 936 년 이후에 平壤城을 탈환했다. 大震國 유민들이 東丹國이 아니라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차지한 平壤城을 공격해 거란을 몰아내자, 柴達木盆地에서 기어나온 濊貊族이 황폐해진 平壤城을 제집삼아 노닌 것이다.

蒙古襲來繪詞 중에서

西京을 중시하라. 미개 中奴가 쳐들어오는 길목 이니까. 太祖 王建이 후손들에게 남긴 遺示이다. 이미 太祖 당대에 西鴨綠江 이서를 회복하고, 光宗 10 년(958)에는 그 西鴨綠江 이서에 살던 濊貊族을 柴達木盆地로 내쫓아 버렸다. 그런데 成宗 12 년(993)에 거란 으로부터 西鴨綠江 이동을 얻어 江東六州를 설치할 수 있는가.

동북아도 탈환했다.

여진의 강역은 서쪽으로 우리나라와 경계를 접해 있기 때문에 일찌기 거란과 우리나라를 섬겨 몇 번 와서 조회했다. .……. 흑수(黑水), 즉 흑룡강의 옛 습속에는 방이 없고 땅을 파서 나무를 걸치고 흙을 덮어 그 속에서 살며 수초를 찾아다녔으므로 언제나 정처없이 옮겨 살았다(高麗史, http://bluecabin.com.ne.kr/data_store/kmnala_maitaja.htm 참조)

生女眞은 大震國에 조공하고 있었다. 生女眞은 黑龍江 상류에 있었다. 거란과 高麗를 동시에 섬긴 것이 아니라, 거란과 영토를 접했을 때는 거란을, 高麗와 영토를 접했을 때는 高麗를 섬겼다. 大震國이 거란한테 멸망하고 나서 大震國의 영토는 거란이 차지했으나, 高麗가 大震國의 영토 탈환에 나서 동북아를 수복했다는 뜻이다.

“北宋 成宗 연간에 金나라가 高麗와 함께 조공을 하였다.” 애써 날조 했지만, 宋나라에 成宗은 없다. 高麗 成宗 때 徐熙가 거란을 침공하자, 高句麗의 계승국이라 우기던 거란이 조공을 시작한 것이다. 宋은 건국 당시부터 高麗에 조공하고 있었다. 高麗가 거란을 3 차례나 침공하여 국가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기 때문에 宋이 金汗과 함께 거란을 협격하여 멸망시킬 수 있었다.

黑色火藥을 세계 최초로 발명한 나라는 宋이 아니라, 高麗였던 것이다. 역사를 바꾸는 과정에서 宋에 배당된 것이다. 宋은 미개국이었다. 약소국이기도 했다. 宋이 매번 이민족에게 정복 당하니까, 문명대국 중국이 매번 이민족에게 정복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변명해야 했다. 高麗 毅宗(1127~1173) 때 武臣政變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착안해 宋은 文治主義를 내걸었기 때문에 국력이 허약해져 이민족에게 늘상 정복됐다고 날조한 것이다.

국방이 튼튼해야 찬란한 문화도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중국이 문화대국 이라는 것은 다 헛소리다. 이민족의 지배를 받으면서는 절대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울 수 없다. 약탈 당하기 바쁜데, 문화에 집중할 여력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明조차 문화대국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우리나라가 5300 년 동안 이룬 문명 속에 있었기 때문에 문화대국이라는 착각을 줄 수 있었다. 그나마 明의 문화를 이끈 것은 중국 대륙에 남아 있던 한민족 이었다.

세계 최초로 로켓을 개발한 나라 역시 宋이 아니라, 高麗다.

火砲는 중국의 것을 그대로 본떠 만들고 화약은 제조법을 몰라 전적으로 중국 으로부터 수입에 의존 했다고? 참으로 편리한 말이다. 宋은 자국만이 보유한 화약으로 중국 대륙 정복에나 나서지 않고 수출에 열을 올렸나. 오늘날도 최첨단 기술은 수출하지 않는다. 하물며 군사무기의 경우에는 더욱 保安에 열을 올린다. 宋은 자국 영토조차 방어하지 못해 거란, 西夏, 濊貊, 蒙古한테 돌아가면서 다 깨지고, 결국 망한 나라다.

蒙古가 서양을 정복할 때 사용한 무기가 火藥과 走火(蒙古가 수중에 넣은 것은 走火 자체는 아니고, 金汗이 모방한 飛火槍이다)이다. 宋이 蒙古에게 세계정복을 하라고 火藥을 무제한으로 공급해 주었던가. 달랑 천막 하나 가진 蒙古조차 走火(飛火槍)를 만드는데, 高麗는 1377 년에야 走火를 만들었다고? 蒙古가 鐵砲(手留彈)까지 만들었던가?

몽고습래회사에는 마치 포탄이 폭발하는 듯한 장면이 있다. 당시 전투 상황을 가록한 일본 사료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철포를 발사하여 그 화염 때문에 앞을 분간하지 못했고 폭발음이 커서 혼비백산, 눈이 어지럽고 귀가 울려 망연자실, 동과 서를 분간하지 못했다.”(역사스페설 6권)

첨단무기를 개발한 나라는 그에 걸맞는 군사력을 보유한다. 火藥까지 발명 하고도 허구한 날 패하면, 어느 나라가, 누가 火藥을 발명하고 신기술을 개발할 것인가.

우리나라가 동아시아 대부분을 차지 했으니까, 中土를 정복한 유목민들도 하나같이 소국이었다. 거대중국을 날조해 놓았을 때나 거대 유목민이 등장하는 것이다.

거란이 80 만 대군을 이끌고 高麗에 침입 했다고? 거란인을 다 끌고 왔던가. 蒙汗이 濊貊族에게는 柴達木盆地 방어를 맡기고, 거란에게 타림분지(塔里木盆地) 방어를 맡겼다는 사실만 봐도 993 년, 소손녕(蕭遜寧)은 80 만 대군을 끌고 올 수가 없었다.

오늘날의 中奴 인구에서 가짜 한족 아닌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은 고작 8% 이다. 중국 인구가 13 억 이라고 주장하니까, 가짜 한족을 뺀 55 종족이 1 억 4 백명이라는 소리다. 蒙古가 소수종족 이라서 濊貊族한테는 柴達木盆地를, 거란한테는 타림분지 수비를 맡겼다. 濊貊族 역시 소수종족이라 黃河 이남으로 가서 淸을 세울 때 거란을 데려갔다. 蒙古와 濊貊族의 동족인 거란 역시 소수종족 이었던 것이다.

거란의 일족인 蒙古의 2002 년 현재 인구가 245 만 7000 명인데, 993 년에 거란이 80 만 대군을 동원할 수 있는가. 遼汗은 宋과의 무역이 아니라 高麗와의 무역에 의해 경제 ·문화상 많은 발전을 보게 되었다. 宋에는 遼汗을 발전시켜 줄만한 경제나 문화가 존재하지 않았다. 宋 조차 唐이 新羅와 高句麗의 문물을 그대로 베낀 것을 계승한 나라다. 蕭遜寧은 80 만 대군을 이끌고 高麗를 침입하는 것은 축소된 韓國史 속에서나 성립할 수 있는 얘기다.

金汗이 高麗에 침입하고, 皇帝國 이라고 했다? 濊貊族은 우리나라가 柴達木盆地로 몰아넣은 속민이다. 中土로 들어가고 싶다고 허락을 구하고 金汗을 세웠으니까 나라를 세운 사실을 고하러 高麗에 來朝할 수는 있어도 감히 高麗를 침입하고 皇帝國 운운할 수는 없다. 金汗을 세우자마자 高麗에 조공부터 했을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濊貊族은 皇帝國 高麗가 부러워 宋한테 皇帝國 행세를 했던 것이다.

金汗과 兄弟의 盟約을 맺은 것은 高麗가 아니라 宋이다. 동아시아의 대제국 高麗가 제 속민을 형제로 삼아준단 말인가. 1120 년 宋은 金汗과 형제의 맹약을 맺고 遼汗을 협격해서 멸망 시켰다. 遼汗이 사라지자 金汗은 돌변해서 이듬해 宋을 공격, 叔姪의 和約이 아니라, 君臣의 和約을 맺었던 것이다. 宋이 조약을 안지키자 金汗이 宋을 재차 공격, 開封을 함락 시키고 휘왕(徽王 1082~ 1135), 흠왕(欽王 1100~1161)을 잡아갔다. 伯父, 조카란다. 어느 세상에 伯父의 나라가 있고, 조카의 나라가 있는가. 차라리 父子의 和約을 맺었다고 하지.

宋과 金汗의 역사를 高麗에 배당하자, 金汗이 高麗에 침입하고 兄弟라 부르다가, 君臣의 和約을 맺고 皇帝로 군림했던 것이다. “穴居生活을 하고, 변소를 주거의 한가운데 두어 오줌으로 세수를 하고, 짐승의 지방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으며 살았던(常爲穴居冬以豕膏塗身厚數分 以禦風寒 作於中廁之而居 三國志 魏書)” 濊貊族이 무력을 앞세워 三國史記를 뜯어고칠 수 있는가. 저 추잡한 李成桂는 미개 濊貊族이 종이 위에서나마 한민족 위에 군림 했다고 날조한 것이다.

세계 최고의 문명을 가진 나라. 그것이 우리나라다. 그런데 오늘날의 날조사를 보면 동아시아 최고의 미개국으로 둔갑해 있다. 어이없게도 中奴를 비롯해서 동아시아의 모든 유목민이 우리나라 보다 우수한 민족으로 둔갑해 있다. 우리나라는 5300 년간 군림을 숙명으로 알고 살아온 민족이다. 그것은 인구가 많아서도 아니고, 우리나라가 과학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왕조 가운데 으뜸가는 과학의 나라가 바로 高麗다.

염초제조법(焰硝製造法)을 중국인 그것도 100 % 유목민족 蒙汗人 이원(李元)이 가르쳐줘서 최무선(崔茂宣, ?~1395)이 화약을 만들었다고? 焰硝는 배달 14 세 慈烏支 한웅 때 벌써 만들었다. 高麗人 염초제조자 에게서 宋이 제조비법을 배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놓고 高麗圖經에다 高麗의 “화살은 버드나무를 사용하지만, 위력은 없다. 방패도 어린이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 정도로 조잡하다.”고 날조했다. 宋의 얘기였다. 우리나라는 神市氏가 개천하면서 부터 온갖 신무기를 개발해 사용했다. 무장에서 앞선 나라였기 때문에 동아시아의 天子國이 될 수 있었다. 천보노(千步弩)는 중국의 노를 개량한 것이 아니다. 慈烏支 한웅 때 부터 태노(太弩)를 만들었다. 弩는 순수한 우리나라 무기다.

“高麗는 匈奴·戎처럼 전쟁하기를 좋아하지 않아 匈奴가 여러 차례 침략을 하여 곤경을 당하면서도 대항할 능력이 없었다. 무기가 어설프고 간단하다.”(高麗圖經)?

우리나라는 高麗 시대까지 5300 년 동안 단 한 번도 전쟁에서 진 적이 없다. 匈奴도 우리나라에 밀려나서 中土로 들어가고, 중앙아시아로 이주했다. 우리나라에 져서 근거지를 옮겨야만 했던 匈奴가 中土를 지배하고, 유럽을 정복한 것이다.

蒙汗은 高麗를 침공하지도 않았다. 叛亂者가 처벌이 두려워 蒙汗으로 땅을 갖고 달아났을 뿐이다. 반면 宋은 언제나 匈奴(거란, 濊貊)에게 격파 당했다. 金汗한테 수도가 함락된 것도, 上王(徽王)과 王(欽王)이 끌려간 것도 다 宋이다. 그때 開封까지 빼앗겼는데, 怒江 이북으로 갔으면서 南宋 이라고 우긴다. 그뿐이 아니다. 蒙古의 침입 앞에 멸망당한 것도 宋이었다.

慈烏支 한웅이 中土를 정복한 이래로 오늘날 까지 中國史는 언제나 이민족에게 정복당한 역사다. 少昊, 楡罔, 神農, 伏羲라고 中土를 정복하지 않고 지배할 수 있었겠는가. “匈奴가 여러 차례 침략을 하여 곤경을 당하면서도 대항할 능력이 없었”던 것은 漢나라 이후 中土 위에 세워진 나라들의 실상이다.

화약에 대하여

1377 년 崔茂宣이 화약을 만들었다. 崔茂宣이 走火도 만들고 火砲도 만들었다. 정확한 목표물을 파괴하는 능력이 부족한 것을 이방원(李芳遠 1367~1422 李氏朝鮮의 太宗이라 불리는 濊貊族)이 화약감조청(火藥監造廳)을 설치하여 성능이 개선되고, 화통군(火筒軍) 1 만 명을 육성했다. 李祹(李氏朝鮮의 世宗이라 불리는 濊貊族) 27 년(1445)에 이르러 모든 구식 화약 무기를 개량해 신식 무기로 새로 재무장할 수 있게 되었다. 69 년 만에 화약 개발에서 세계 최고의 우수한 화약무기까지 개발해낸 것이다. 여기까지가 날조사다.

진짜 역사를 살펴보자. 1019 년에 高麗는 전함을 동원, 일본을 정복했다. 10 세기에 高麗가 화약을 개발한 것을 宋이 개발했다고 역사를 빼앗겼다. 宋은 960 년에 세운 나라인 반면, 高麗는 918 년에 건국 했으므로 宋 이전에 화약을 개발했을 가능성이 높다. 960 년 이후에 火藥을 개발하고 1019 년에 전함을 동원, 日本을 정복 하려면 상당히 촉박하다. 中奴는 우리나라 역사를 배당 하면서 꼭 연대를 맞추지는 않았다. 7 세기 초에 축조한 高句麗長城도, 6 세기에 만든 여산릉(驪山陵 : 高句麗의 異稱이 高勾驪임을 상기하자)도 기원전 3 세기에 秦始王이 만들었다고 했다.

李氏朝鮮은 발명이 아니고 개량 했다고 날조한 반면, 高麗는 세계 최초로 만들어야 했다. 그렇다고 해도 화약 발명 으로부터 5 백 년에 가까운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더구나 李氏朝鮮은 우리나라 피지배종족인 濊貊族의 나라고, 高麗는 한민족의 나라다. 高麗가 멸망하기 이전에 신기전(神機箭)과 火車, 총통(銃筒)을 다 개발했던 것이다.

탐욕스러운 李成桂는 어째서 자신이 왕위에 있을 때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李氏朝鮮 건국 당시 만들었다고 하면, 高麗 시대에 축적된 기술로 만들었다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遼東마저 明에 빼앗겼다고 날조당한 高麗가 무력에 있어서 강력할 수 있는가. 더구나 李成桂는 가만 두면 망할 高麗王朝를 폐하고 새 왕조를 세운 것만으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만, 李成桂의 후손들은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내야 잘난 왕으로 역사에 남는다. 제 후손들이 화약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李成桂는 高麗가 1389 년 화통도감(火筒都監)을 혁파했다고 말도 안되는 날조까지 했다. 1389 년은 李成桂가 실권을 장악하고 恭讓王을 옹립한 해다. 결국 李成桂가 火筒都監을 없앴던 것이다.

李氏朝鮮이 정말 神機箭, 火車, 거북선을 개발한 나라라면, 개발한 무기를 계속 개량해야 했다. 神機箭, 火車를 발명한 나라니까, 이들 무기 성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화력도 증대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그 어느 때보다 국방의 중요성이 강조된 壬辰倭亂 이후 李氏朝鮮은 이상하게도 국방을 등한시하고 무기개발을 소홀히 한다. 李氏朝鮮 후기에는 서양의 침략에 맥없이 무너진다.

西洋을 정복한 蒙古의 무기는 高麗가 발명한 火藥과 走火다. 蒙古에 의해 서양에 우리나라의 화약무기가 전파됐고, 서양은 뒤늦게 모방하고 개량에 나섰다.9) 이상하게도 西洋이 개량한 무기가 神機箭과 火車를 개발한 李氏朝鮮을 압도한다. 神機箭과 火車는 高麗가 개발한 무기였기 때문이다. 李氏朝鮮이 개량 없이 그냥 사용하다 보니까, 4 백년 후 무기 성능에서 서양에 뒤지고 만 것이다.

李氏朝鮮의 발명품은 모조리 건국 초에 몰려 있다. 실로 기이한 현상이 아닌가. 高麗의 발명품을 혈안이 되어 베끼다 보니까, 李氏朝鮮 초에 다 몰린 것이다. 먼저 선점하는 자가 임자였던 것이다.

李氏朝鮮은 우리나라 역사를 중국 에게만 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로챈 나라였던 것이다. 李氏朝鮮의 과학발명품 대부분은 高麗 時代 발명했다. 외국 사신들 앞에서 神機箭을 일제히 발사하며 국력을 과시한 나라는 高麗였다.

하문하옵신 조총과 화포, 화약 만드는 법은 전번에 조정에서 내린 공문에 따라 벌써 각 진에 가르치는 중이옵니다. 바라옵건데 총과 화약을 대량으로 만들어 기어코 적병을 전멸하기를 밤낮으로 축원하옵니다.

사야가(沙也可) 김충선(金忠善 1571~ 1642)의 모하당(慕夏堂) 文集에 나오는 글이다. 화약을 만든 나라는 高麗다. 李氏朝鮮은 高麗史를 가로채서 火藥監造廳을 설치하고, 火筒軍 1만 명을 육성하고, 모든 구식 화약무기를 개량해 신식 무기로 재무장하며, 火車와 神機箭까지 개발했다고 날조했다. 더구나 이 당시 日本은 火砲를 만들 줄 몰랐다. 그래서 壬辰倭亂 때에도 서양에서 구입한 대포를 배의 들보에 매어 사용한 나라다. 그런데 어떻게 倭人 沙也可가 火砲, 火藥 만드는 법을 가르친단 말인가.

저 글은 沙也可가 李舜臣 장군에게 보낸 글이라 한다. 그렇다면 거북선에서 鳥銃을 사용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거북선은 거북의 등처럼 배를 완전히 감싸 내부가 노출되지 않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더구나 거북선에는 함포가 설치되어 있었다. 포탄이 바닥나면, 적선에 충돌하는 전법을 사용했는데, 倭船은 우리나라 함선에 비해 훨씬 약한 탓에 그대로 부서졌다.

화약과 온갖 화약 무기를 발명한 高麗는 총은 만들지 않았다. 총 없이도 충분히 주변국들 위에 군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크고 대단한 것을 지향하는 우리나라의 전통에 따라 火砲와 神機箭 같이 눈이 휘둥그레질 것만 개발했던 것이다. 그래서 高麗를 베끼는 재주밖에 없던 李氏朝鮮도 총을 만들 수 없었다. 壬辰倭亂 당시 항왜자(降倭者)들이 만든 것은 鳥銃 뿐이었다.

鳥銃도 지상전에서는 효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金忠善의 후손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당시 李氏朝鮮의 유행에 따라 家門 美化 作業에 나선 것이다. 慕夏堂. 중국을 그리워한다는 號까지 지은 沙也可가 어째서 壬辰倭亂을 도우러왔다는 明에 투항하지 않았던가. 慕夏堂 역시 沙也可의 후손이 지은 號일 가능성이 높다.

화약과 화포의 발명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기에 中國, 李氏朝鮮, 沙也可 세 번에 걸쳐 발명했다고 날조당한 것이다.

高麗의 온갖 발명품을 李成桂는 누락 시켰다. 오히려 高麗가 1389 년 火筒都監을 없앴다고 날조했다. 1019 년에 高麗가 전함을 동원해 日本을 정복했던 기록조차 누락 시켰다. 神機箭, 거북선(龜船)을 만든 나라가 그깟 紅巾賊, 倭寇의 침입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어 국운이 쇠퇴하고 망할 왕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明에 주지도 않는다.

李成桂는 역사도, 영토도 주었지만, 정작 高麗가 만든 발명품과 과학기술자는 주지 않았다. 그래서 宋은 북송칙판대장경(北宋勅板大藏經)을 만들었지만 멸실했고, 明은 大統曆을 만들었다고 했지만 授時曆을 이름만 바꾼 것이다. 결국 종이 위에서 火藥을 발명한 나라의 계승국 明은 그 옛날 宋이 高麗에서 훔친 화약 무기를 그대로 사용해야 했다. 그래서 世宗 19 년 평안도 절제사(平安道節制使)로 있던 이천(李蕆 1376~1451)은 종이 위에서 중국식 완구를 보고 개량해 李氏朝鮮식 총통완구(銃筒碗口)를 만들었다.

더 나아가 세종 27 년에는 종이 위에서 중국식 화약 무기들의 개량사업까지 벌여 수많은 신식 화약무기들을 개발했다. 이향(李珦 : 李氏朝鮮의 文宗이라 부르는 濊貊族)은 더했다. 종이 위에서 高麗의 火車까지 직접 개발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측우기(測雨器)에 대한 아이디어까지 제공했다. 李珦은 高麗史까지 날조한 濊貊族이다.

훈민정음 창제

그렇다면 한글은 정말 李氏朝鮮이 만든 것인가. 世宗이 한글 창제에 밤낮으로 고생한 나머지 안질이 나서 치료하기 위해 요양을 해야 했는데, ‘訓民正音'의 연구는 요양하러 간 행재소(行在所)에서 까지 골몰 했다고 했다.

그토록 힘들게 만들었는데, 이상하게도 한글의 제작과정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별로 없다. 訓民正音 解例本에 닿소리(자음)는 소리를 낼 때 발음기관의 생긴 모양을 본뜨고, 홀소리(모음)는 하늘(·)과 땅(ㅡ)과 사람(ㅣ)을 본떴다고 했다.

최만리(崔萬理) 등의 訓民正音 반대 상소문에서 “설혹 말하기를 비록 옛 글자 전자(篆字)를 모방 하였다 할지라도 소리로써 글자를 합하는 것이 모두 옛 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때가 없다(則字形雖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 實無所據)”라고 해서 옛날 글자를 보고 만들었음이 드러났다. 그런데 崔萬理는 集賢殿 학자로 副提學이다. 그 외 訓民正音 창제과정에 참여 했다는 집현전 학자 이름만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訓民正音 解例本이나 世宗實錄에는 集賢殿 학자가 아니라 世宗이 직접 만들었다고 했다. 정말 李氏朝鮮이 만들었다면, 한글 창제 과정을 상세하게 남겨 놓았을 것이다.

李成桂가 韓半島로 내빼고 나서 朱元璋이 빼앗은 高麗의 항해서적이 漢字가 아니라고 했다.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8 대 후손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은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에서 훈민정음 이전에 우리나라에는 옛날부터 민간에서 사용하는 글자가 있었는데 그 수가 다 갖추어지지 못하고 그 모양에 일정한 규범이 없어 한 국가의 말을 적어 내기에는 모자란다고 적었다. 또한 고려와 탐라에서도 한자가 아닌 어떤 고유글자가 쓰였다는 기록이 있다.

청비록10)에는 10 세기 후반에서 11 세기 초에 장유(張維 1587~1638)가 중국의 강남에 갔을 때 고려에서 떠내려간 ‘슬(瑟)’이란 악기의 밑바닥에 쓰인 글을 중국 사람들이 읽지 못하자 그가 한문으로 옮겨 주었다는 기록이 있음을 보아 고려에 일정한 고유글자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카톨릭대학교의 이승재 교수는 고려시대 불경 등에 사용됐던 각필과 훈민정음의 자형이 일치되는 예가 무려 17 개나 되며(고조선에 신지글자 있었다, 이종호, 국정브리핑)

中國의 江南은 티벳고원 북부의 怒江 상류 이남이다.

崔萬理의 上訴文에 특히 중요한 대목이 있다. “설사 언문이 전 왕조 때부터 있었다고 하더라도(借使諺文 自前朝有之) ” 前王朝는 물론 高麗다. 향찰(鄕札)은 三國 末에서 高麗 初까지 사용했으므로 高麗의 航海書籍은 鄕札로 적은 것이 아니다. 한글로 적혀 있었던 것이다.

어째서 “신지(神誌)글자는 朝鮮時代의 정책과도 배리되어 世祖, 睿宗, 成宗 시대에 전국적으로 禁止圖書로 정하고 국가적으로 회수 조치”했겠는가. 한글을 李氏朝鮮의 발명품으로 날조하기 위해서다. “李氏朝鮮의 政策”이라 함은 中奴에게 주지 않은 우리나라의 발명품을 모조리 李氏朝鮮의 발명품으로 둔갑 시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서 한자와 서로 통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펴지 못하는 이가 많다. 내가 이것을 매우 딱하게 여기어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어 내노니, 사람마다 쉽게 익히어 나날의 소용에 편리 하도록 함에 있나니라(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 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 訓民正音序文)

우리나라가 漢字를 만들고, 2300 년이나 문제없이 사용해 왔다. 제 뜻을 잘 펼쳤기에 온갖 역사책에 문학서적, 과학서적 등 온갖 책을 다 저술했다. 漢字에 따라 말마저 바꾼 中奴는 역사책 조차 쓴 적이 없었다. 한민족을 수렁 같은 어리석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李成桂와 濊貊族이다.

이도(李祹: 李氏朝鮮의 世宗이라 불리는 濊貊族) 역시 高麗史 날조에 관여했던 濊貊族이다. “恭愍王 이후의 사실을 바로잡고, 특히 太祖에 관한 내용을 충실히 하”도록 즉 恭愍帝 이후 李氏朝鮮에 유리하도록 날조하고 李成桂에 대한 내용을 한없이 부풀리도록 李祹가 직접 지시했던 것이다.

李祹는 가짜 檀君陵까지 만든 자다. “우리 世宗께서는 檀君廟를 平壤에 설치 하였는데, 世祖 원년에 위패를 고쳐 朝鮮始祖檀君之廟라 하였다(我世宗設檀君廟於平壤 世祖元年改位版曰朝鮮始祖檀君之廟 揆園史話)." 濊貊族의 무덤은 陵이고 檀君의 무덤은 묘냐? 神人王儉은 濊貊族의 나라 李氏朝鮮의

 정화 함대의 중심선박인 보선 상상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인터넷판에 실린 것이다.

시조가 아니다.

李祹가 위대한 왕으로 추앙받을 수 있었던 것은 위대한 나라 高麗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世界史에도 드문 위대한 통치자”는 高麗 皇帝였던 것이다.

李氏朝鮮은 高麗의 온갖 것을 다 베낀 나라다.

국내의 각종 소송 문건 및 서류는 보관하지 않으나 북송 황제의 조서나 어명, 사신들의 글은 왕부 서고에 보물처럼 간직하여 상국의 검열에 대비한다(고려도경)

高麗時代에 訴訟文件을 소중히 보관 했음은 李氏朝鮮이 高麗의 慣習法을 成文法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高麗가 소송문건도 안 남겼는데, 어떻게 李氏朝鮮이 高麗의 관습법을 알 것인가.

李氏朝鮮이 刑法 으로서 刑典에 모순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적용했다는 大明律의 실체는 바로 高麗의 法律이다. 明이 高麗의 법률을 그대로 베껴 大明律이라 한 것이다. 明이 高麗에게서 가로챈 것은 실로 엄청나다. 曆法(大統曆), 地圖(大明混一圖)까지 베꼈을 정도다. 뿐만 아니라 鳳皇이 우리나라를 상징하고 龍은 중국을 상징한다고 李成桂와 朱元璋이 하나씩 나눠가졌다.

우리나라 역사를 훔치는데 이골이 난 明이다. 明 역시 이전 왕조에만 高麗史를 배당한 것이 아니라, 明의 것으로도 가로챘다. 남을 위해 高麗의 역사를 베껴준 明이 자신을 위해 高麗史를 챙겼을 것은 지극히 당연하지 않은가. 그래서 明의 정화함대(鄭和艦隊)가 1421 년 아메리카를 발견 했다고 날조할 수 있었다. 아메리카를 발견한 鄭和艦隊는 高麗의 艦隊다. 高麗는 세계 최고의 造船術과 航海術을 보유하고 있었다. 李舜臣이 壬辰倭亂 때(1592~1598) 倭船에 맞서 사용한 거북선이 高麗의 戰艦이다. 콜럼버스와 마젤란은 高麗가 만든 지도를 가지고 대항해에 나섰던 것이다.11)

高麗가 얼마나 찬란한 나라였는가 하면, 高麗史는 중국의 五大十國, 宋, 遼汗, 西夏, 金汗, 蒙汗, 明의 역사로 분배됐는데, 특히 宋에 집중되어 宋學이라는 학문까지 만들어냈다. 그 뿐만이 아니라 高麗史를 일부 챙긴 濊貊族의 나라 李氏朝鮮을 과학의 나라로 끌어올려 韓國史에서 가장 잘난 나라로 만들어 주었다. 저들 나라에 세계 최고,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를 한아름씩 안겨준 나라다. 淸조차 高麗의 도자기와 칠공예 기술을 계승해 서양에 수출까지 했을 정도다.

蒙汗도 억압하고 멸시한 宋의 역사책을 써주고, 明도 자신들을 억압, 멸시했다는 蒙汗의 역사책까지 써줬는데, 역사날조에 지대하게 공헌한 淸의 正史書를 아직까지도 써주지 않고 있다. 金汗史, 遼汗史, 蒙汗史는 高麗의 역사를 해체 한다는 목적이라도 있지만, 미개한 淸의 역사는 뭐하러 수고스럽게 쓸 것인가. 李氏朝鮮이 高麗처럼 가로챌 역사가 많은 나라 였다면, 淸이 망하자마자 日本하고 거래 해서라도 李氏朝鮮의 역사를 빼돌렸다. 李氏朝鮮에는 자랑할 만한 역사가 단 하나도 없다.

어째서 高麗는 과학문명이 찬란히 꽃피고 李氏朝鮮은 高麗의 발명품을 모조리 빼앗아야만 했는가. 高麗는 5 천년 한문화를 계승한 동아시아의 지배자로서 창의적 역량이 한껏 발휘될 수 있는 열린사회였고, 李氏朝鮮은 우리나라 피지배종족이 지배층으로 있어 창의적 역량을 발휘할 수 없었던 한없이 쪼그라든 폐쇄사회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과학기술을 숭상한 나라이고, 李氏朝鮮은 과학기술을 천시한 나라였다. 그래서 高麗는 첨단과학무기로 동아시아를 제패해 찬란한 문명을 만들어냈고, 李氏朝鮮은 韓半島로 쪼그라들었다가 끝내 나라가 망한 것이다.

高麗는 古代社會와 李氏朝鮮을 잇는 징검다리가 아니다. 新羅 영토에서 건국한 高麗는 화약무기를 발명해 三國의 영토를 되찾은 대제국이다. 화약을 발명하고 거북선을 개발한 高麗는 강력한 무력을 앞세워 주변 나라들을 모조리 정복했다. 高句麗의 계승국 高麗는 高句麗를 능가하는 나라였다. 高麗 시대에 5300 년의 우리나라 문화는 그 절정에 달해 있었다.

李成桂와 그 후손들은 그런 高麗史를 해체해 中國史로 꾸미고 李氏朝鮮史로 둔갑시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