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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차이점은 여러 가지로 지적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이 어떤 종교에 몸담고 있든, 신앙에 관심이 있든 없든, 우리 모두는 사실 상제님이란 말보다는 창조주라는 말에 더 친숙해져 있다.
그러면 창조주란 뭐냐? 기독교에서는 “태초에 창조주 하나님이 이 우주를 만들었다.”고 한다. 하늘도 땅도 저 바다도, 모든 생물, 그리고 인간도 만들었다는 거다. 『구약성서』 「창세기」 제1장에 그 드라마가 자세히 나와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1:1∼28) |
그런데 중요한 것은, 동양문화에서는 이와 같은 창조를 묵시적으로 부정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동양문화의 우주론이 서양 기독교 문화의 본 무대였던 중동의 사막문화와는 전혀 다른 자연환경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즉 동양문화는 지난 수천년 동안 농경생활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왔다. 따라서 자연의 순환변화에 대한 인식을 구체적으로 할 수 없었던 사막문화와는 달리, 동양에서는 자연의 사시(四時)변화를 통해, 자연의 순환성을 인식했던 것이다.
중동의 환경 동양의 환경
서양 기독교의 창조주와, 동방문화의 상제관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같은 삶의 배경과, 자연에 대한 인식, 세계관의 차이를 먼저 명확하게 아는 게 가장 중요하다. 이것이 이 문제의 근본을 들여다보고, 동서문화의 신관의 의문을 푸는 핵심 열쇠이다.
간단하게 그 핵심 내용을 요약해 보면, 상제문화에서는 이 우주를 ‘본래부터 있는 것’으로 본다. 유교의 가르침, 불교의 깨달음, 도교의 모든 현자들의 가르침이 그렇다. 노자 『도덕경』이나 불경을 보면, 이 우주를 기독교식의 어떤 신이 지어냈다는 말이 한 마디도 없다. 유가의 사서오경에도 그렇다. 『주역』이나 『시경』, 『서경』, 『논어』, 『맹자』 어디를 보아도, 이 하늘은 본래 있는 하늘이지, 하늘 위에 어떤 절대신이 있어서 이 우주를 만들었다고 한 내용이 없다. 또한 우주 변화의 가장 본질적인 법칙성에 대해서는, 하도 낙서의 상수원리로 말하고 있다.
본래부터 있는 이 우주의 창조성과 존재법칙을 철학적으로 우주원리, 또는 리(理), 도(道) 등 여러 가지 용어를 써서 표현한다. 우주는 그 스스로의 변화원리, 곧 자존(自存)법칙, 자생(自生)원리, 자화원리(自化原理)에 의해 변화해 간다. 우주가 변화해 가는 길, 그것을 한 글자로 ‘도道’라고 한다. 길 도란 뜻이다.
길, 그 변화의 길 위에서 우주의 삼라만상이 출몰한다. 창세 이래 모든 인간이 그 도를 추구해 왔다. 도의 보편적인 궁극의 법칙! 그것은 우리 몸 속에,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천지 만물 속에 그대로 내재돼 있다. 이 도가 둘이 아니며 하늘 너머에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주 창조 이전에, 저 하늘 위에, 우주의 자연법칙 위에 어떤 절대신이 있다’는 기독교의 이원론적 창조관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동양인들은 예로부터 사시로 변화하는 삶의 환경 속에서, ‘자연은 지극한 자존법칙에 의해 끊임없이 순환하며 변화한다. 하늘 속에 내재돼 있는 원리에 의해, 인간과 만물이 태어나 살다가 다시 그 길로 돌아간다’는 것을 가장 자연스럽고 이상적인 삶의 길로서 몸으로 체득했던 것이다. 그러면 상제님은 기독교의 창조주 하느님과 무엇이 다른가?
상제님(우리 인간과 만물도)은 본래부터 있는 우주의 근본 법칙, 천지의 자존 원리와 더불어 존재하며, 그 속에 내재된 우주의 창조 목적이 달성될 수 있도록 우주의 이법을 주재하시는 주재자 하나님, 곧 우주 질서인 리를 맡아 다스려 우주의 이상을 완성하시는 통치자 하나님이다.
기독교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은 우주의 리(理)까지도 만든 분이라고 하는 데 반하여, 동양의 상제는 창조주가 아닌 통치자로서 조화주 의미가 더 강하다. 따라서 창조주는 태초의 시원성에, 조화주 상제는 우주의 통치와 그 역사성에 더 의미를 두는 셈이다.
이것이 증산도에서 일관되게 전하는, 상제관 메시지의 제 1 조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의 성구를 읽어보면, 상제님에 대해 좀더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나는 생장염장(生長斂藏) 사의(四義)를 쓰나니 이것이 곧 무위이화(無爲以化)니라. 하늘이 이치(理致)를 벗어나면 아무 것도 있을 수 없느니라. (道典 2:49:1)
한 성도가 여쭈기를 “해가 상제님의 명을 받고 멈췄다가 또 명을 기다려서 가니 어찌 된 영문입니까?” 하니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를 보고 너희들의 신심(信心)을 돈독(敦篤)히 하라. 해와 달이 나의 명에 의하여 운행하느니라.” 하시니라.
한 성도가 다시 여쭈기를 “해와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은 자연의 이치가 아닙니까?” 하니 말씀하시기를 “이치가 곧 하늘이요 하늘이 곧 이치니, 그러므로 나는 사(私)를 쓰지 못하노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나는 천지일월이니라.” 하시니라. (道典 4:60:10∼14) 한 성도가 다시 여쭈기를 “상제님의 수한은 얼마나 되시옵니까?” 하거늘 “나는 천지와 더불어 동행하노라.” 하시니라. (道典 9: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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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은 순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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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활발한 우주 탐사를 하는 우주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사고방식의 원시성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시간은 태초로부터 영원히 흘러간다는『직선적 시간관,세계관』의 관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여전히 많습니다.
대우주는 회전하며 끊임없는 변화운동을 하고 있고, 우주의 시간은 직선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순환(circulation)함으로써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순환하는 예는 우리 주변에서 수없이 찾아볼 수 있고, 또 경험할 수 있습니다. 몸속의 피의 순환, 호흡의 순환, 밤낮의 순환, 사계절의 순환등 그 주기성이 짧고 긴 차이는 있을지언정 만물은 순환속에서 변화하고 또 존재합니다. 즉 만물과 생명 심지어 문명의 역사까지도 모두 일정한 주기성을 가지고 있고, 그 순환하는 환경의 영향속에서 변화의 영속성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극즉반의 원리
무한분열/무한성장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다.
극한에 다다르면, 우주만유는 다시 반대 방향의 변화운동을 시작한다. 즉, 분열의 최극단의 이르면 통일의 새기운이 움트고, 반대로 통일/수렴의 정점에서는 다시 분열기운이 싹튼다.
분열/생장과 수렴/통일은 스스로 그러할 수밖에 없는 대자연의 순리(順理)이자 이법이다. 대자연 생명의 연결고리는 끊임없는 순환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