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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을 노닐고 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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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현 남쪽부터는 산세가 내달려서 바다로 들어간다. 5리를 가서 서편을 바라보았다. 올망졸망 솟은 산이 나타나 백여 리에 푸른 빛을 풀어놓고 바다를 가로로 끊어놓았다. 바로 사량도(蛇梁島)였다. 산길을 가노라니 사람들이 제일 높은 봉우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옥녀봉(玉女峰)이라고 불렀다.
여기부터 삼십 리나 뻗은 길 양편은 모두 키 큰 소나무로 덮여 있다. 가지는 꿈틀대는 이무기처럼 가로 눕고 하늘을 덮어서 구름과 해를 가렸다. 그 사이로 바다가 조각조각 어리비쳤다. 이따금 바라볼 때마다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은 마치 배가 가는 듯했다.
또 몇 리를 가다보니 산에 기댄 채 바다를 바라보고 세운 작은 성이 나타났다. 성 위에는 층루(層樓)를 세웠는데 통제사(統制使) 원문(轅門)이라고 불렀다.
또 5리를 가자 산세가 갑자기 꺾여 서편으로 내달리다가 좌우로 불쑥 솟아올랐다. 특히 북쪽 산이 높게 솟았다. 산의 배와 등은 바닷물을 받아들이는데 묏부리를 잘라서 빙 둘러 성을 쌓았다. 세병관(洗兵館)은 성의 중앙에 자리 잡았다. 남쪽으로 뭉게구름이 이어진 듯 수많은 산봉우리는 파도를 토했다가 다시 받아들이고, 물이 모여 넓은 호수를 이룬 바다를 세병관은 내려다보았다. 동편과 서편의 초루는 햇볕 속에 안파루(晏波樓)와 청남루(淸南樓) 두 누각과 더불어 아스라이 솟아 있었다. 앞에는 전함 여덟 척의 돛과 돛대가 빽빽하게 벌여 있었다. | |
◀◁ 통영 세병관
거센 파도와 큰 산, 화려한 들보와 아로새긴 돛대들이 모두 다 세병관의 주렴 사이로 들어왔다. 이 세병관은 그 크기가 상대할 짝이 없다. 연달아 선 기둥 수십 개에 채색한 다락으로 곁을 채워 깊숙하고 장엄하며 드높고 둔중하였다. 그 내부는 사람 천 명이 들어갈 만했다. 바다를 수비할 재력을 여기에 다 쏟았는데 누구의 손에 창건되었는지를 알 수 없다.
북쪽 초루에 올라가 멀리 한산도를 바라보았다. 서쪽 성으로 나가서 이충무공 전공비(戰功碑)를 읽고서 안파루 아래에 이르러 여덟 척의 전함을 구경하였다. 전함은 모두 산처럼 크고 장대하였다. 한 척은 여러 층의 다락과 겹겹의 난간을 만들어 그 크기가 거의 세병관에 맞먹을 만했다. 배가 바다로 들어가면 물 위에 뜬 나무 인형 같으니 바람과 물의 힘이란 참으로 위대하다.
그러나 배를 운행하고 부리는 것은 사람의 힘에 달렸고, 그 배를 이용하여 적을 제압하고 승부를 결판내는 것은 또 지략과 힘에 달렸다. 장수가 된 책임은 그보다 훨씬 위대하다고 하겠다.
수백 년 이래로 나라는 태평스럽고 변방에는 일이 없다. 그래서 드높은 세병관과 큰 전함을 곧잘 유람하는 자가 머물러 노니는 장소로 삼아서 청아한 음악에 긴 소매로 날마다 즐긴다. 수군 병사들은 한 해 내내 편안하게 쉬면서 대나무를 엮고 어망을 만드는 부업을 제 직업처럼 여긴다. 아무리 훌륭한 장수가 나타난다고 해도 지략과 용맹함을 발휘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배의 키에 있는 난간에 앉아서 뜸을 걷어올리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가을 햇볕은 맑게 빛나고 바다의 파도는 잔잔하여 굽이굽이 이어진 섬의 산이 시름을 자아낸다. 그 때 문득 공손대랑(公孫大娘)이 검무(劍舞)를 추고, 백아(伯牙)가 수선조(水仙操)를 연주하는 것을 보고 싶어져 초연히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조차도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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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상(李麟祥), 〈유통영기(游統營記)〉, 《능호집(凌壺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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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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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상(李麟祥)은 18세기의 대표적인 화가이자 서예가, 그리고 시인이다. 일반 그림이나 서예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독특한 풍치의 예술을 보여주었다. 다른 예술만큼이나 그의 산문도 독특한 풍치를 지녔다.
이 글은 그가 삼도수군통제사가 관할하는 경상도 통영(統營)을 여행하고 쓴 유기(游記)이다. 통영은 군사요충지인데다 서울로부터 멀다. 게다가 조선 후기 들어 상공업이 발달한 신흥도시의 분위기를 띠기에 유람의 적격지라고 하기에는 힘들고, 더욱이 유기를 남길 만한 운치를 지닌 명승지라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인상은 이곳을 방문하고 유기까지 남겼다. 수백 년 전 통영의 멋을 그답게 고담한 필치로 묘사했다.
글은 통제사영(統制使營)의 중심부인 세병관을 찾아가는 고성부터 시작했다. 거기서 통영으로 들어가는 숲과 바닷길의 묘사가 아주 정취가 있다. 그가 세병관을 만나고, 거기서 건물과 풍경과 배를 묘사하는 대목이 이 글의 중심이다. 너무 메마르다고 할 정도로 간결하고 건조하게 썼다. 그러나 지금도 가서 확인할 수 있는 국보 305호인 세병관의 웅장한 건축의 아름다움과 풍경을 오히려 잘 살려냈다. 그러면서도 풍경의 묘사 안에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는 식자의 우환의식을 언뜻 비쳤다. 평화시대이기에 조선 수군의 심장부에서 긴장감을 찾기보다는 고즈넉한 아름다움과 웅위한 자연미를 찾은 막연한 불안감을 표현했다.
가을날 햇볕 아래 빛나는 통영 앞바다를 내려다보며 초연히 시름에 젖는다는 끝대목은 여운을 길게 남긴다. 절제된 글의 아름다움은 이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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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 안대회 -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저서 조선의 프로페셔널 선비답게 산다는 것 18세기 한국 한시사 연구 산수간에 집을 짓고 등 다수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