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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생명존중 사상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9. 2. 18. 15:34

고전칼럼 011                 (2009. 02.18. 수)

정조의 생명존중 사상

형벌이란 교화를 돕는 도구이다. 대개 한갓 법만으로는 정치를 할 수 없다. 반드시 떳떳한 도리로써 정치를 보필한다. 그런 까닭에 법률은 비록 비슷한 사례를 모방하지만 판결은 법률과 교화를 씨줄과 날줄로 한다. 인정으로 행위를 참작하여 권도(權道)를 쓸지라도 원칙에 합치하여야 하고, 낮추고 높이는 것과 감경하고 가중하는 것이 조금도 어긋남이 없는 뒤에라야 바른 법률가의 지침이 될 수 있다. (《심리록(審理錄)》, 〈서례(敍例)〉, “刑者 弼敎之具也 蓋徒法不可爲政 必彛以輔其治 故律雖依倣於類例 判則經緯於法敎 情以參跡 權而合經 低昻輕重 分毫無差然後 方爲律家指南.”)

대개 살인사건에 대한 판결은 인정(人情)과 법률 두 글자를 벗어나지 못하는 법이다. 정상을 너무 많이 참작하게 되면 장차 목숨으로 목숨을 갚는 ‘상명(償命)’의 죄율이 없어질 것이고, 법률의 집행이 준엄하기만 할 뿐이면 이 또한 형벌을 신중히 하는 의리가 아니다. (권14, 1784년 평양 ‘박조그만이[朴足古亡伊]’ 사건_1)에 대한 판부, “大抵殺獄決折 不出於情法二字 而原情太過 則將無償死之律 持法徒峻 則亦非恤刑之義是如乎)

위 글은 심리록의 서례와 박조그만이[朴足古亡伊] 사건에 대한 임금의 판단인 판부(判付)에서 뽑았다.

정조는 《대전통편》을 편찬하고, 일반형사법인 《대명률》과 우리나라의 법률을 종합한 《전률통보》를 편찬하였다. 또한 살인사건이 발생했을 때, 자연사인지 아니면 범죄에 의한 살인인지를 판별하는 법의학서인 《무원록(無寃錄)》을 한글로 풀이한 《증수무원록언해(增修無寃錄諺解)》_2)를 발간하였다. 뿐만 아니라 형을 집행하는 관리들의 자행을 막기 위해 형구의 규격과 집행방법 등을 규정한 《흠휼전칙(欽恤典則)》을 반포하였다. 이러한 정책의 밑바탕에는 인명을 중시하고 백성을 아끼는 흠휼과 애민정신이 있었다.

심리록은 이름 그대로 사건을 심리한 기록이다. 심리록은 정조가 대리청정할 때인 1776년부터 승하하기 전해인 1799년까지 살인사건에 대해 직접 심리하고 판단을 내린 사례집이다. 심리록의 첫 부분에는 편찬경위를 알려주는 ‘서례’와 형사사건을 처리하는 절차에 대해 설명을 하였다. 심리록에는 1,095건의 사례와 이에 대한 정조의 판단이 수록되어 있다. 개별사건에 대해 정조가 일일이 판결을 한 것은 정조의 애민정신을 잘 드러낸다.

◁◀ 심리록


법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약속이고, 약속을 어긴 자에게 불이익을 주어야 한다. 그 불이익이 형벌이다. 또 법은 약속이기 때문에 사후적으로 어긴 자를 처벌하기보다는 사전에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엄격한 법만 강조하거나, 아니면 약속을 어긴 자를 달래기만 해서는 사회를 유지할 수 없다. 그래서 위정자는 백성들을 교화하기도 하고 법을 사용하여 처벌하기도 했다.

법을 어기는 것, 즉 사회구성원과의 약속을 어기는 것 가운데 제일 큰 것은 살인이고, 형벌 가운데 제일 무거운 것은 사형이다. 우리의 팔조법금이나 성경에서 보듯이 살인은 유사 이래 있어 왔고, 이에 대해 목숨으로 그 죄를 대신하는 사형이 존재해 왔다. 국가적 형벌이 확립된 이후에도 ‘살인자사(殺人者死)’라는 관념은 강하게 유지되었다. 이 관념은 ‘동해보복(同害報復)’의 원칙에서 나온 소박한 정의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법과 원칙만 따르면 억울한 경우가 발생하기 마련이며, 이 역시 정당하지는 않다. 그래서 살인을 저지르게 된 경위, 즉 사정을 살펴 사형을 감경하기도 하였다. 서례에서는 법률과 인정을 모두 고려하여 원칙과 사정에 합당한 형벌을 시행하도록 언명하였다. 그리고 실제의 사례에서도 지나친 정상의 참작은 정의를 해치게 되고, 또 한편으로는 법률만을 강조하여 사람의 생명과 직접 관련되는 형벌을 삼가는 정신을 어기게 될 것을 우려하였다. 법과 정(情), 이 양자는 항상 충돌하기 마련이다. 살인자를 사형에 처하면 정의는 살지 모르지만, 생명존중의 사상은 죽게 된다. 반대로 살인자를 살려두면 박애정신은 꽃필지 모르지만, 정의, 특히 복수는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사정은 현대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다만 살인자에 대해 획일적인 사형이 아닌 다른 형벌이 있다는 점만 다르다. 하지만 우리의 뇌리에는 여전히 “사람을 죽인 자는 자기의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는 ‘상명(償命)’의 관념이 여전히 남아 있는 듯하다. 근래 연쇄살인사건, ‘묻지마 살인사건’ 등으로 사회가 시끄럽다. 그리고 10여 년 동안 미루어놓았던 사형을 집행하자는 논의조차 들려온다.

우리나라는 1997년 12월 이후 사형이 한 번도 집행되지 않았다. 그래서 국제사면위원회는 우리나라를 ‘사실상 사형이 폐지된 국가’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지난 정권하에서는 사형제도를 폐지하려는 입법운동까지 있었다. 이 역시 우리 인권의식의 성장이며, 나아가 역사의 발전이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자 바람이 거꾸로 불고 있다. 사형제도 폐지에 반대하는 정도를 넘어 당장 사형집행을 주장하고 있다.

사형제도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사형의 범죄억제력을 근거로 내세운다. 그러나 사형을 포함한 엄형이 오히려 범죄를 더 잔인하게 하는 역기능이 있다. 사형은 가장 잔인한 형벌이며 동시에 직접적이고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복수에 지나지 않는다. 누가 산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가?

정조는 살인사건에 대해 가급적이면 사형을 선고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법보다는 인정을 앞세웠다. 조금이라도 용서할 수 있는 빌미가 있으면 이를 내세워 관리들에게 다시 생각하게 하여 결국 산목숨을 앗아가지 않았다. 전통시대 살인자에 대한 사형은 소박한 정의, 복수심의 발로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의 형벌은 복수만이 전부가 아니다. 시대적 상황이 바뀐 지금, 정조의 생명존중의 사상은 아직도 뜻하는 바가 크다.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려고 하는가?

1) 박조그만이가, 전덕일(全德一)이 잠을 깨웠다는 이유로 목침으로 쳐서 3일 만에 죽게 한 사건.(자세한 내용은 번역원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_바로가기)

2) 무원록(無寃錄)은 중국 송대의 세원록(洗寃錄)과 평원록(平寃錄), 결안정식(結案程式)을 원의 왕여(王與)가 종합·편찬한 것으로, 1440년(세종 22)에 주석을 붙여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을 간행하였다. 1748년(영조 24)에 신주무원록을 증보하여 증수무원록(增修無錄)을 간행하였다.


글쓴이 / 정긍식
*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 주요저서
  근대법사고, 박영사, 2002
  조선시대생활사 2·3(공저), 역사비평사, 2000
  16세기 사송법서 집성(공저), 한국법제연구원, 1999  
* 주요논문
  1517년 安東府 決訟立案 분석
  大典會通의 編纂과 그 意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