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옛글 모음

건망증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9. 2. 20. 13:25

고전의 향기049        (2009. 02. 16. 월)

건망증

내 누님의 아들은 김이홍(金履弘)이다. 이홍 조카는 건망증이 아주 심해서 물건을 보고나선 열에 아홉을 잊어버리고, 일을 하곤 나면 열에 열을 잊어버린다. 아침에 한 일은 저녁이면 벌써 몽롱해지고, 어제 행한 일을 오늘이면 기억하지 못한다.

이홍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제 건망증은 아무래도 병인가 봐요! 저로 하여금 작게는 일을 하지도 못하게 하고 크게는 남을 부리지도 못하게 하며, 말을 실수하게 만들기도 하고 수 빠진 행동을 하게도 만드는데 모두가 건망증이 빌미가 되더군요. 제 건망증을 고칠 사람이 있다고 하면 제가 천금인들 아끼겠습니까? 저는 천리 길도 멀다 하지 않을 겁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이렇게 위로했다.
“너는 잊는 것이 네게 병이 되고, 잊지 않는 것이 네게 도움을 주는 것만 볼 뿐, 잊지 않는 것이 네게 걱정을 끼치고, 잊는 것이 네게 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보지 못하는구나. 나는 네가 건망증을 굳이 고치지 않기를 바란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잊어서 드디어 크게 잊는 지경에 이르기를 바란다. 정녕 네가 천금을 걸고서 천하의 건망증 치료사를 찾아 치료하고자 한다면, 나는 왼손으로는 네 팔꿈치를 잡아당기고 오른손으로는 네 팔뚝을 붙잡아 치료를 막겠다.”

이홍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라며 물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네 건망증을 병이라고 생각하느냐? 잘 잊는 것은 병이 아니다. 너는 잊지 않기를 바라느냐? 잊지 않는 것이 병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잊지 않는 것이 병이 되고, 잘 잊는 것이 도리어 병이 아니라는 말은 무슨 근거로 할까? 잊어도 좋을 것을 잊지 못하는 데서 연유한다. 잊어도 좋을 것을 잊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잊는 것이 병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잊는 사람에게는 잊는 것이 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말이 옳을까?

천하의 걱정거리는 어디에서 나오겠느냐? 잊어도 좋을 것은 잊지 못하고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잊는 데서 나온다. 눈은 아름다운 이성을 잊지 못하고, 귀는 멋진 음악을 잊지 못하며, 입은 맛난 음식을 잊지 못하고, 사는 곳은 크고 화려한 집을 잊지 못한다. 천한 존재인데도 큰 세력을 얻으려는 생각을 잊지 못하고, 집안이 가난하건만 많은 재물을 잊지 못하며, 고귀한데도 교만한 짓을 잊지 못하고, 부유한데도 인색한 짓을 잊지 못한다. 의롭지 않은 물건을 취하려는 마음을 잊지 못하고, 실상과 어긋난 이름을 얻으려는 마음을 잊지 못한다.


◁◀ 그림으로 쓴 글자_효제충신

그래서 잊어서는 안 될 것을 잊는 자가 되면, 어버이에게는 효심을 잊어버리고, 임금에게는 충성심을 잊어버리며, 부모를 잃고서는 슬픔을 잊어버리고, 제사를 지내면서 정성스런 마음을 잊어버린다. 물건을 주고받을 때 의로움을 잊고, 나아가고 물러날 때 예의를 잊으며, 낮은 지위에 있으면서 제 분수를 잊고, 이해의 갈림길에서 지켜야 할 도리를 잊는다.

먼 것을 보고나면 가까운 것을 잊고, 새것을 보고나면 옛것을 잊는다. 입에서 말이 나올 때 가릴 줄을 잊고, 몸에서 행동이 나올 때 본받을 것을 잊는다. 내적인 것을 잊기 때문에 외적인 것을 잊을 수 없게 되고, 외적인 것을 잊을 수 없기 때문에 내적인 것을 더더욱 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이 잊지 못해 벌을 내리기도 하고, 남들이 잊지 못해 질시의 눈길을 보내며, 귀신이 잊지 못해 재앙을 내린다. 그러므로 잊어도 좋을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서로 바꿀 능력이 있다.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서로 바꾸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잊어도 좋을 것은 잊고 자신의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잊지 않는다.

이홍 너는 성품이 강직하고 마음이 맑으며, 뜻이 단정하고 행실이 방정하다. 잊어서는 안 될 일을 너는 잠을 자든 깨어있든 잊지 않는다. 잊어도 좋은 것이라면 네가 잊기를 바랄 뿐, 네가 잊지 않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나는 너를 병들게 한다고 네가 말한 건망증이 깊지 않을까를 염려하고, 네게 복을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내가 말한 건망증이 풍성하지 못할까를 염려한다. 천금의 보물을 싸들고 천리 먼 곳을 찾아다니며 건망증을 치료할 필요가 굳이 있겠느냐? 이홍아! 차라리 잊어버려라!”

- 유한준(兪漢雋), 〈망해(忘解)〉, 《자저(自著)》

※ 이 글의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에 수록된 한국문집총간 249집 《자저(自著)》27권 잡저(雜著)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원문 바로가기]

해설


유한준(兪漢雋, 1732~1811)은 자가 여성(汝成), 호가 저암(著庵) 또는 창애(蒼厓)이다. 1770년 39세 때 쓴 글로서 조카인 김이홍에게 준 글이다. 여기서 망(忘)은 잊는다는 뜻으로 곧 건망증을 의미한다. 김이홍이 외숙에게 건망증이 너무 심해 병적일 정도라고 호소하며 고치려고 들었다. 그러자 유한준이 좋은 의사를 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네게 건망증은 병이 아니라 복이라고 엉뚱한 말을 건넨다. 상식적 판단을 뒤집어 의외의 기발한 생각을 표현하여 반어(反語)와 역설(逆說)의 수사법을 구사했다. 그러면서도 이치에 들어맞는다. 이 글의 묘미는 여기에 있다.

잊음에 대해 유한준은 잊어도 좋은 것과 잊어서는 안 되는 것 두 가지 틀로 생각을 전개한다. 그리고 다시 속된 사람과 조카의 두 부류 인간으로 구분한다. 유한준은 이른바 속된 사람들의 뛰어난 기억력을 조카의 건망증과 대비한다. 속된 세상 사람은 잊어도 좋을 것을 잘 기억하고,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오히려 잘 잊는다. 조카는 그와 반대이다. 이 두 부류 인간을 단순하게 말하면 군자와 소인이다. 결국 사람은 인생에서 잊어도 좋을 것은 서둘러 잊고 잊어서는 안 될 것은 끝까지 지켜 잊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주제로 귀결된다.

그렇게 보면, 유한준은 건망증이란 단순한 병을 인생보편의 주제로 확대하여 이해했다. 조카는 작은 질문을 던졌는데 유한준은 큰 문제로 살려서 말해준 셈이다.

   필자 : 안대회
  -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저서  
      조선의 프로페셔널
      선비답게 산다는 것
      18세기 한국 한시사 연구
      산수간에 집을 짓고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