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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의 풍파(風波) 속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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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젠가 동해바다를 여행한 적이 있다. 높은 언덕에 올라 해가 떠오르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날 마침 거센 바람이 바다를 뒤흔들어 수천 리를 자리처럼 말아 올렸다. 바람이 바닷물을 쳐서 하늘에 닿을 듯 솟구치는 파도에 마주서기조차 두려웠다. 나는 입을 떡 벌리고 놀라 이렇게 말했다.
“풍파가 이렇게까지 거셀 줄은 몰랐다. 바닷가를 내려다보니 온갖 것들이 벌벌 떨고 있다. 정박해 있는 배들은 왜 아니 부서지겠는가? 서있는 나무들은 왜 아니 꺾이겠는가? 서 있는 바위들은 왜 아니 거꾸러지겠는가? 물속에 오르내리는 물고기들은 왜 아니 휩쓸려가겠는가? 깊은 물속에 잠겨있는 이무기와 용, 물고기와 거북이는 왜 아니 물을 벗어나 육지로 떨어지겠는가?”
이윽고 바람과 파도가 점차 잠잠해지고 물은 점차 고요해졌다. 그제야 천천히 살펴보았다. 정박해 있는 배들은 부서진 것이 없고, 서있는 나무들은 꺾인 것이 없고, 서있는 바위들은 거꾸러진 것이 없고, 물속에 오르내리는 물고기들은 휩쓸려간 것이 없고, 깊은 물속에 잠겨있는 이무기와 용, 물고기와 거북이는 물을 벗어나 육지에 떨어진 것이 없었다. 모든 사물들이 아무 사고도 없이 평안하여 풍파가 전혀 치지 않았던 것처럼 보였다.
나는 흔연히 기뻐 말했다.
“특이하구나! 풍파가 저처럼 성이 났는데 온갖 사물이 이처럼 잃은 것이 없다니! 정말 위대하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저번에는 입을 떡 벌리고 놀랐다가 지금은 흔연히 기뻐한다. 기쁨과 놀람은 서로 같은 감정이 아니다. 그렇건만 하루 사이에 번갈아가면서 나타났다. 외부로부터 온 현상이 내 마음을 여닫는 것을 보면, 나란 사람의 그릇은 작기도 하구나! 마음을 제 스스로 잘 지키지 못하고 사물에 따라 변하는데, 대인이라면 분명히 그렇지 않으리라.
아아! 풍파가 거세게 몰아쳤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사물이 이처럼 잃은 것이 없다니 세상 풍파와는 정말 다르구나! 세상 풍파는 환해(宦海, 벼슬의 바다)에서 일어난다. 저 환해는 실제 바다는 아니므로 풍파도 진짜가 아니다. 풍파가 일지 않기 망정이지 일어난다면 곳곳의 벼슬자리는 난리 나고 요동친다. 그럴 때 부서지고 꺾이고 거꾸러지고 휩쓸리고 물에서 벗어나 육지로 떨어지는 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너무도 심하지 않은가? 이런 일은 실제 풍파는 일으키지 못하는 반면, 가짜 풍파는 잘 일으킨다. 대체 어떻게 가짜가 진짜보다 더하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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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유도 중 일부분_심사정_개인소장
그러자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아! 진짜가 가짜보다 못한 것이 정말 세상만사에 공통된 걱정거리입니다. 유독 이 풍파만 그럴까요? 당신은 인간세계에서 목도한 적이 없나요? 아무개는 어진 분이다. 아무개는 지혜로운 분이다. 아무개는 재주가 있는 분이다. 아무개는 능력이 많은 분이다. 아무개는 수행을 잘한 분이다. 그렇게들 말하지요. 그런데 이렇게 현명하다고 한 분이 정말 진짜로 현명한 분일까요? 지혜롭다고 한 분이 진짜로 지혜로운 분일까요? 재주가 있다고 한 분이 진짜로 재주가 있는 분일까요? 능력이 많다고 한 분이 진짜로 능력이 많을까요? 수행을 잘했다고 한 분이 진짜로 수행을 잘했나요? 현명하고 지혜롭고 재주 있고 능력 많고 수행 잘하는 것은 가짜로 하기가 불가능합니다. 그렇지만 가짜가 거의 열에 여덟아홉인 반면 진짜는 열에 두셋도 되지 않고, 가짜는 번쩍번쩍 빛나는 경우가 많은 반면 진짜는 비실비실 숨어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아! 입을 다물어야지요. 누가 가짜가 진짜가 아니란 것을 알까요?”
그 말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그렇지 않아요. 가짜가 진짜가 되지 못하는 것은 음이 양이 되지 못하고 검은 것이 흰 것이 되지 못하는 처지와 같지요. 하지만 무슨 도움이 될까요? 일반 사람은 속일지언정 군자는 속이지 못하지요. 그러나 가짜가 세상에 자신을 잘 드러내는 점만은 진짜가 그보다 못합니다. 사람만 그럴까요? 아닙니다. 온갖 사물이 그렇지 않은 경우가 없답니다.
따라서 음란한 음악은 연주해도 고상한 음악은 물리치고, 노둔한 말은 타도 천리마는 양보하며, 닭과 돼지는 키워도 기린과 봉황은 숨기고, 제비와 참새는 가까이해도 기러기와 고니는 멀리 보냅니다. 쑥은 드러나도 지초와 난초는 숨고, 도리(桃李)꽃은 일찍 펴도 연꽃은 늦게 피며, 물고기 눈깔은 빛나도 야광주는 흐릿하며, 돌은 팔려도 화씨(和氏)의 구슬은 숨으며, 가라지는 쑥쑥 자라도 좋은 곡식은 줄어들며, 납으로 만든 칼은 물건을 베어도 막야(莫邪) 명검은 칼집에 들어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진짜와 가짜를 분간해야 하는 것들이니, 이런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있을까요?”
나는 사물을 통해서 사람을 알았고, 또 사람을 통해서 사물을 알았다. 근본을 가지고 추리를 해서 말단의 일을 생각해보고 그 사연을 글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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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숙영(任叔英),〈동해풍파설(東海風波說)〉, 《소암집(疏菴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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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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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숙영(任叔英, 1576~1623)이 쓴 글이다. 그는 광해군 시절의 저명한 시인으로 호는 소암(疎菴) 또는 동해산인(東海散人)이다. 동해바다에 일어나는 풍파를 보고 사유를 전개한 글이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 높은 파도가 치는 동해바다의 웅장한 자연현상을 보고 그는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를 짚어낸다. 모든 것을 부수고 없앨 것같은 풍파(風波)의 위세에 먼저 놀란다. 그러나 그런 거센 풍파도 바닷가의 배와 나무, 바위와 물고기, 온갖 바다생물을 해치지 못한다. 두려움에 떨던 그는 마음이 놓여 기뻐한다. 자연세계에서는 풍파에도 온갖 사물이 제 자리를 잃지 않는다는 안도감과 그로 연유한 기쁨이다.
그러나 자신이 머물다 온 인간세상의 관직 사회인 환해(宦海)는 딴판이다. 동해(東海)와 바다라는 이름을 공유하지만, 풍파가 치면 난리가 나고 요동쳐서 온갖 인간들이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자연세계의 풍파와 인간세계의 풍파는 이름은 같지만 다르다. 그런데 실상을 보면, 환해는 가짜 바다다. 자연세계의 진짜 바다는 풍파가 쳐도 모든 존재를 살려두지만, 인간세계의 가짜 바다는 풍파가 치면 모든 것을 뒤흔든다.
여기에 이르러 사유는 이제 진짜와 가짜라는 것으로 발전한다. 즉, 객(客)의 입을 통해 풍파만이 가짜가 진짜보다 위세가 센 것이 아니라 인간 세상 모든 것이 가짜가 진짜보다 힘을 발휘한다고 주장한다. 글쓴이는 그의 주장이 틀리다고 거부한다. 일반인은 속지만 군자는 속지 않는다는 점에서다. 그러나 완전히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자신을 잘 드러내는 능력에서 가짜가 진짜보다 뛰어나다는 점 때문이다. 세상에 진짜가 없지 않지만 자신을 포장하여 드러내는 능력의 부족 때문에 가짜에게 밀린다.
그렇게 보면, 이 글은 자신의 능력을 잘 포장하는 사람들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상처받은 사람이 동해 바다에 와서 거센 파도를 보고 마음을 달랜 위안의 작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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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 안대회 -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저서 조선의 프로페셔널 선비답게 산다는 것 18세기 한국 한시사 연구 산수간에 집을 짓고 등 다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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