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컬럼 고전칼럼 - 열 다섯 번째 이야기
가정(稼亭) 이곡(李穀)의 ‘빌려 타는 말’
“나는 집이 가난해서 말이 없기 때문에 간혹 남의 말을 빌려서 타곤 한다.
그런데 노둔하고 야윈 말을 얻었을 경우에는 일이 아무리 급해도
감히 채찍을 대지 못한 채 금방이라도 쓰러지고 넘어질 것처럼 전전긍긍하기 일쑤요,
개천이나 도랑이라도 만나면 또 말에서 내리곤 한다.
그래서 후회하는 일이 거의 없다. 반면에 발굽이 높고 귀가 쫑긋하며
잘 달리는 준마를 얻었을 경우에는 의기양양하여 방자하게 채찍을 갈기기도 하고
고삐를 놓기도 하면서 언덕과 골짜기를 모두 평지로 간주한 채 매우 유쾌하게
질주하곤 한다. 그러나 간혹 위험하게 말에서 떨어지는 환란을 면하지 못한다.
아,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어쩌면 이렇게까지 달라지고 뒤바뀔 수가 있단 말인가.
남의 물건을 빌려서 잠깐 동안 쓸 때에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진짜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경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렇긴 하지만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남에게 빌리지 않은 것이
또 뭐가 있다고 하겠는가. 임금은 백성으로부터 힘을 빌려서 존귀하고
부유하게 되는 것이요, 신하는 임금으로부터 권세를 빌려서 총애를 받고
귀한 신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식은 어버이에게서, 지어미는 지아비에게서,
비복(婢僕)은 주인에게서 각각 빌리는 것이 또한 심하고도 많은데,
대부분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기기만 할 뿐
끝내 돌이켜 보려고 하지 않는다. 이 어찌 미혹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다가 혹 잠깐 사이에 그동안 빌렸던 것을 돌려주는 일이 생기게 되면,
만방(萬邦)의 임금도 독부(獨夫)가 되고 백승(百乘)의 대부(大夫)도
고신(孤臣)이 되는 법인데, 더군다나 미천한 자의 경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오래도록 차용하고서 반환하지 않았으니,
그들이 자기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는가.(久假而不歸烏知其非有也)”라고 하였다. 내가 이 말을 접하고서 느껴지는 바가 있기에,
차마설을 지어서 그 뜻을 부연해 보았다.“
( 국역《가정집(稼亭集)》1, 민족문화추진회)
▶ 말 탄 사람 토기_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위의 글은 가정(稼亭) 이곡(李穀, 1293~1351)의 ‘차마설(借馬說)’이다.
가정 이곡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버지로 일반인에게는 덜 알려져 있지만,
고려 후기 성리학 수용기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학자이다.
이곡은 고려 충렬왕 말기에 태어나 충선왕ㆍ충숙왕ㆍ충혜왕ㆍ충목왕ㆍ충정왕까지
14세기 전반 원(元) 간섭기 “충(忠)” 자를 앞에 놓는 왕들이 재위한 전 시대를 살았다.
이 시기 고려의 정치는 원의 간섭과 원에 붙은 권세가들의 책동으로 인한 국왕 부자간의 갈등이 왕의 중조(重祚)1)라는 불행한 사태를 초래하였고,
원의 경제적 수탈, 인적 물적 요구 등으로 재정이 궁핍해지고
사회적 모순도 심화되던 어려운 시기였다.
이곡은 당시 한산군리(韓山郡吏)의 아들로 태어나 열심히 학문을 쌓아
20세에 거자과(擧子科)2)에 합격하고 더욱 연마하여 3년후 등제(登第)하여
관인(官人)으로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근면과 재능으로 비록 과거에는 합격되었지만,
지금의 안동에서 복주사록참군(福州司錄參軍)이라는 지방의 관리로
10년간을 보내야 했다. 가문 배경이 없는 그는 원나라 과거[制科]에
도전하므로써 도약을 시도하였다.
원나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려에서 정동성 향시(征東省鄕試)를 치러야
하는데, 이 시험에서 3명을 뽑아 이들에게 원나라 과거에 응시하는 자격을 주었다.
원나라 과거제에서는 지역의 예비시험이라 할 수 있는 향시를 거쳐 회시(會試),
전시(殿試)의 단계를 밟아야 하는데, 향시에서의 합격자 정원은 원이 지배하는
전 지역에서 300명이었고, 그 중 고려에 배당된 인원이 3명인 것이다.
그런데 이곡은 정동성 향시에 제 1 명으로 합격하고 이어 원에 가서
회시에 합격했을 뿐 아니라 마지막 시험인 전시에서 독권관(讀卷官)3)의
칭찬을 받아 제2갑으로 뽑혀 진사 출신(進士出身)을 수여받고,
승사랑(承事郞) 한림국사원 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에 제수되었다.
이 직책은 문한(文翰)을 장악하는 중앙의 요직에 해당되는 것이다.
원래 정동성 향시의 합격이라는 것이 이미 큰 영예였다.
고려에서는 3명의 향시 합격자를 원에 보내면 그 중에 겨우 1명이 합격할 정도였고,
그 합격자는 원의 관직을 받게 되므로 고려의 관직보다 몇 단계 높은 지위가 되고,
관직보다도 학자로서는 최고의 영광인 것이다. 고려인으로서 원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을 보면, 1318년부터 1357년까지 40년간 15명이었다. 이곡의 아들 이색도
원 제과에 합격되어 부자가 급제자가 되었으니 가문의 명예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후 이곡은 원의 대도(大都, 원의 수도)에서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시문을 남겼고 학문과 문장 또한 뛰어나 크게 이름을 떨쳤다. 고려와 원나라
양국을 오가며, 고려의 어려운 상황을 원에 알려 원의 수탈을 완화시키는 데
전념을 다 하였다.
가정 이곡이 남긴 《가정집(稼亭集)》의 글은 문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대다수의 많은 기문들이 고려 역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사료(史料)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
원래 한미한 출신인 이곡은 집이 가난해서 외출할 때는 말을 빌려서 사용했다는
고백으로 보아 상당히 오랫동안 가계(家計)가 넉넉하지 못했던 것 같다.
어쩌면 지금으로 보면 자가용이 없어 렌트카를 이용한 셈일게다.
말을 빌려 타고 다니면서 그가 느낀 것은 바로 인간의 삶에 대한 자세인 것이다.
이곡은 “임금은 백성으로부터” “신하는 임금으로부터” 권세를 빌려서,
그리고 “자식은 어버이에게서” “지어미는 지아비에게서” “비복(婢僕)은 주인에게서”
각각 빌리는 것이 많다고 하였다. 즉 나의 지금의 존재는 타인의 존재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다. 학생이 없다면 선생이 존재할 수 없고 사원이 없다면
사장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국민이 없다면 대통령이나 국정을 담당하는 사람이 필요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갖는 권력 또는 역할은 자신을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있게 한 존재를 위하여 써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사람들은 권세가 원래부터 자기의 것인 양 생각하고, 이를 한번 잡으면 돌려줄
생각을 하지 않고, 오래 소유하면서 자신의 욕망대로 함부로 사용하니 정치와
사회에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남에게 빌리지 않은 것이 또 뭐가 있다고 하겠는가.
[然人之所有 孰爲不借者]” 이 구절은 오늘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절실하게 와 닿는
구절이다. 어쩌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빌린 것”이라는 인식은 바로 민주주의가
성립되는 기본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수가 많아지면서 사람들이 모두 다 정치에
참여할 수 없게 되자 대표자를 뽑아서 그에게 권력을 주었다.
그 대표자가 군주이지만, 사실 그 권력은 백성의 것인 것이다.
이곡보다 훨씬 먼저 맹자(孟子)가 “오래도록 차용하고서 반환하지 않았으니,
그들이 자기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久假而不歸 烏知其非有也]” 라고 한 말은 바로 민본사상의 기초가 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천명사상으로 발전한다. 한 군주가 오랜 세월 정치를 해 나갈 때,
백성의 뜻을 거스르는 정치를 하면, 백성은 군주를 바꾸는 혁명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혁명사상은 바로 맹자에게서 나온 것이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뀌는 역성혁명의 명분이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
유럽에서 군주제는 시민혁명이후 민주주의로 발전하였다. 국민이 주권을
그들의 대리자에게 주어서 정치를 잘 하도록 맡긴 것이다.
작금의 여러 사태를 보면서 위정자들, 정치가들이 가슴에 한번 새겨 보았으면
하는 말이다.
결국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내가 영원히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진실을 깨닫는 것.
이것은 곧 ‘마음을 비우는 삶’의 시작일 것이다. 우리 주변에 마음을 비우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저절로 살만한 세상이 오지 않겠는가?
1) 한 왕이 두 번 왕위에 오르는 것을 말하는데, 충렬왕은 충선왕에게 전위했다가,
다시 왕위를 차지했고, 충숙왕도 충혜왕에게 전위하였다가 다시 왕위에 올랐다.
2) 고려시대 과거제도에서 최종고시인 예부시(禮部試)를 보조하는
전단계의 시험을 국자감시(國子監試)라 하는데, 거자과(擧子科)는 국자감시와 같은 성격의 시험이다. ) 과거시험을 담당한 고시관. 독권관은 왕이 최종고시를 주관하는 전시(殿試)에서 응시자가 제출한 답안지를 읽고 그 내용이 잘 되었는가를 왕 앞에서 설명하는
직책을 맡았다. 글쓴이 / 고혜령 한국고전번역원 이사, 한국디지털대학교 외래교수,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장(전)
* 주요저서
고려후기 사대부와 성리학 수용, 일조각(2001)
* 주요공저
목은 이색의 생애와 사상, 일조각(1996)
민란의 시대, 가람기획(2000)
조선의 청백리, 가람기획(2003) 등 ㆍ본 메일링서비스는 본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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