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향기 고전의 향기 - 영종도 풍경 2009. 06. 22. (월) \
종도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은 대부분 인천국제공항에 그친다.
영종도는 본래 자연도(紫烟島)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섬이다.
그러기에 배를 띄워 그곳에서 노닌 이가 많았다.
18세기의 문인 김종수(金鍾秀)도 그러하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잠시 짬을 내어 김종수의 글을 떠올리면 250년 전 영종도의 풍광을 즐길 수 있으리라.
병자년(1756) 5월 임오일, 이윤지(李胤之, 李胤永)와 함께 바다로 갔다.
그의 아우 건지(健之, 李運永)와 종제 구지(懼之, 李喜永)도 같이 갔다.
양화나루를 건너 웅월촌(熊月村)에서 점심을 지어 먹고 성령(星嶺)에 오르니
서쪽으로 바다가 바라보였다. 저녁에 인천에서 묵었다.
계미일 한낮에, 관아를 경유하여 서쪽으로 10리 가서 바다에 도착하니
배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밀물이 완전히 들어오지 않아 한동안 바위 근처에서 서성였다. 바위에는 굴 껍질이 많이 붙어 있는데 벌집처럼 오목한 구멍이 있었다.
해안 북쪽에는 옛 제물포 진영이 있는데 부서진 기와와 무너진 성가퀴에 초목이
무성하였다. 동남쪽 먼 곳을 바라보니 섬들이 바다에 점점이 떠 있는데
석양이 띠처럼 두르고 있었다.
밀물이 들어와 바위가 반쯤 잠기자 사공이 배에 오르라고 하였다.
이때 하늘에 미풍조차 없고 바다에 물결 한 점 일지 않으니 하늘과 바다가
모두 하얗게 빛나 마치 거울 속에 있는 것 같았다. 배를 타고 10여 리를 가서
자연도(紫烟島)에 정박하였다. 백운산(白雲山)이 그 북쪽에 있고 월미도(月尾島)가
포구 뒤쪽에 보이는데 남쪽으로 지나가면 닭과 개 소리가 거의 들릴 정도다.
땅이 비옥하여 백성이 많으며, 산천이 탁 트여 집을 짓고 살 만하다.
국가에서 이곳에 영종진(永宗鎭)을 두어 강화도로 들어가는 길목을 지키게 하였다.
문 위에 다락이 있어 바다를 마주하는데 태평루(太平樓)라 한다.
태평루에 오르니 어둠이 아스라하게 다가왔다. 가랑비가 파도에 떨어져 소리를 내었다.
밤이 되자 마을 집에서 묵고 용류도(龍流島)로 가는 길을 물어 서남쪽으로
20리 가서 삼목포(杉木浦)에 다다랐다. 포구 안팎에 조수가 밀려들었다.
밀물이 들어오면 물이 차서 바다가 되지만 썰물이 나가면 소를 타고서야
겨우 포구로 들어갈 수 있다. 개펄이 깊어 한 자가 넘고 길이가 10리나 되는데,
섬사람들은 구십구포(九十九浦)라고 부른다. 소를 타고 가면 열 걸음에 아홉 번은
넘어지고 조금만 지체하면 밀물이 다시 들어오니,
차라리 수로로 가는 것이 더 빠르다고 하는 것이다.
갑신일 아침, 태평루 아래에서 배를 타고 이른 조수를 따라 서쪽으로 갔다.
해무가 자욱하여 해 뜨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배가 큰 바다로 들어서자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나와 윤지는 일어나 뱃전에 섰다. 긴 바람이 소매를 스치고 푸른 물결이
허공에 치솟았다. 눈을 들어 보니 아득하여 경쇠를 치던 은자 양(襄)의 유풍이
그리워졌다.1) 한참 있노라니 나도 모르게 가슴 속에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돌아보니 마니산을 비롯한 여러 산이 반쯤 물 위에 솟아 있었다.
붓끝이 뾰족하게 드러난 듯, 손가락을 나란히 세운 듯하였다. 또 큰 눈이 가득 쌓인
세상에 새벽별 몇 점이 사라지지 않고 반짝거리는 모습 같았다.
윤지가 내게 부채를 달라더니 신기루와 낙조를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날이 흐려 신기루와 낙조 두 가지를 보지 못하였으니 붓으로 보충해야겠네.”
배로 3, 40리쯤 가서 팔산도(八山島)를 지나 남쪽으로 가자,
갑자기 안개가 옅게 피어오르더니 그 사이로 햇살이 새어나왔다.
마치 연꽃 두어 송이가 점차 구름을 헤치며 나타나는 듯하였다.
물어보니 용류도(龍流島)라 하였다. 절벽에 푸른 빛과 붉은 빛이 서려 영롱하게 반짝이고, 한 줄기 백사장이 그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파도 한가운데 꽂아놓은 양 날카롭고 가파른 것은 여기암(女妓巖)인데,
무위도(無爲島, 무의도) 등 여러 섬과 어우러져 현란하였다.
비뚤비뚤 울퉁불퉁 멀고 가까움에 따라 형세가 다르게 보였다.
마치 무희의 옷자락이 허공에 펼쳐지며 꺾어졌다 펴졌다 굽었다 감싸는 모습 같았다.
윤지가 말하였다. “뭍으로부터 들어오는 사람은 이처럼 기이한 광경을 보지 못하겠지. 그 안에 들어가면 멀리서 보는 것에 비해 어떨지 모르겠네.” 한참 서로를 돌아보며
기이하다고 떠들고 있는데 어느덧 썰물이 빠져나가서 결국 배를 세우고 밀물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마침 멀리 배가 보였다. 허공에 떠 있는 모습이 마치 머리카락 한 가닥이 물결 가운데
떠 있는 것 같더니 금방 또 휙 날아가 버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갑자기 미친 듯한 바람이 일어나고 사방이 안개로 자욱해졌다.
잠깐 사이에 용류도도 다시 보이지 않았다. 뱃사람 말로는 역풍이라 조수를
가르고 나아갈 수 없으니 그저 자연도로 돌아가 정박하는 길밖에 없다고 하였다.
내가 말했다. “형산(衡山)에 구름이 걷힌 일은 사람의 힘으로 조물주의 조화를 빼앗은 것이지.”2) 그러자 윤지가 눈썹을 찡그리고는 “그저 우연일걸세.” 하였다.
마침내 돛을 올리고 배를 돌렸다. 바람은 더욱 거세지고 안개는 더욱 자욱해졌다.
옷과 갓은 기름이라도 덮어쓴 것처럼 축축하였다. 돛 너머로는 한 걸음 밖도 보이지 않고 그저 배가 나는 듯이 가고 있다는 것만 느껴졌다. 몽롱하고 아득하여 마치 꿈속에서
사방에 거머쥘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구덩이에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사공도 앉아서 손을 모아 기도하면서 그저 배가 가는 대로 맡겨둘 뿐이었다.
하늘은 이미 암흑처럼 어두워졌다. 결국 바다 한가운데 닻을 내렸다.
밤기운이 서늘하고 마음이 서글퍼 편치 못하였다. 윤지가 이름난 향 몇 개를 꺼내서
불을 붙여 비릿한 냄새를 없앴다. 한밤에 우레가 치고 갑자기 비가 내렸다.
천둥소리가 하늘을 뒤흔드니 파도가 그 때문에 물러나 피하는 듯하였다.
번갯불이 물결을 환하게 비추어 물속의 고래와 이무기를 찾아낼 수 있을 정도였다.
정신이 혼미해져서 눈을 감고 한참 있었다.
아마도 천지개벽 이전 혼돈의 모습이 이러하였으리라.
갑자기 허공에서 은은하게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지나가던 배가 비 때문에 묶여 있거나 섬 마을이 근처에 있는 것 같았다.
뱃사공이 사람이 있는지, 여기가 어딘지 큰 소리로 물어보았다.
이렇게 서너 번이나 소리쳤지만 적막할 뿐 대꾸하는 이가 없었다.
어떤 이는 물귀신이라 하고 어떤 이는 날아가던 새소리라 하고 어떤 이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귀를 기울이고 있었기에 소리가 난 것처럼 느껴진 것이라 하였다.
마침내 서로를 보며 한바탕 웃었다.
오경 무렵이 되자 바람이 더욱 거세지며 밀물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바람 소리가 더욱 사나워져 마치 만 마리의 말이 치달리는 듯, 창칼이 서로 부딪치는
듯하였다. 배는 크지만 아무 힘이 없어 키질이나 절구질을 하는 것처럼 흔들리니
소라껍질이나 다름이 없었다. 윤지가 보따리에서 거울을 꺼내 비추어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이제 빠져죽을 법도 못 찾겠군.” 내가 이렇게 말했다.
“죽는 일은 본디 운명에 달려 있다네. 이 배가 곧바로 중국의 소주(蘇州)와 항주(杭州)로 가서 천하의 장관을 다 보게 된다면 그다지 나쁠 것도 없지.”
마침내 등불을 켜고 시를 지으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한 편씩 지을 때마다 나와
윤지가 뱃전을 두드리면서 길게 읊조리니, 그 소리가 바다 물결에 가득하였다.
하백(河伯)이 이 소리를 듣는다면 어찌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지 않겠는가?
“어리석은 자들이로구나. 이처럼 죽음을 겁내지 않다니.”
여명에 갑자기 한 조각 푸른 섬이 보이더니 점차 또렷이 시야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바로 월미도의 행궁이었다. 다시 돛을 걸고 곧바로 십 수 리를 내려가 다시 제물포
진영 앞쪽에 배를 대었다. 포구의 마을에서 아침을 먹고 인천으로 들어왔다.
병술일에 기탄(岐灘)을 경유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이번 여행에서 율시 18수를 지었다.
1) 《논어》「미자(微子)」에 “소사인 양(陽)과 경쇠를 치던 양(襄)은 바다로 들어갔다.[少師陽擊磬襄入於海]”라 하였는데 곧 은자를 가리킨다. 격경(擊磬)은 경쇠를 치는
약관이다.
2) 한유(韓愈)가 형산(衡山)에 올랐을 때 구름이 끼어서 조망할 수 없자
정성껏 묵도(默禱) 하여 구름이 활짝 걷혔다.
〈형악묘를 알현하려 마침내 형악사에 묵으면서 문루에 적다(謁衡嶽廟遂宿嶽寺題門樓)〉라는 시에 보인다.
▶ 영종진_규장각 고지도 - 김종수,〈바다 여행(浮海記)〉《몽오집(夢梧集)》
※ 이 글의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에 수록된 한국문집총간 245집《
몽오집(夢梧集)》권4, 기(記),〈부해기(浮海記)〉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원문 바로가기] [해설] 김종수(1728-1799)는 본관이 청풍(淸風),
자는 정부(定夫)이며, 몽촌토성 인근에 살아 호를 몽오(夢梧)라 하였다.
이인상(李麟祥), 이윤영(李胤英) 등 운치 있는 벗들과 함께 산수자연에 노닐며
아름다운 글을 지었다. 그 덕택에 우리 땅의 아름다움이 후세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김종수는 1756년 5월 이윤영 등과 함께 배를 타고 인천 앞바다의 영종도 일대를
여행하였다. 영종도의 옛이름은 자연도다. 자연도는 고려와 송나라를 오가는
뱃길이었다.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도 그 이름이 보인다.
목장으로 주로 이용되었고 고려 때에는 가끔 유배객들이 들른 적도 있다.
효종 4년(1653) 남양도호부에 딸려 있던 영종포만호(永宗浦萬戶)를
이 지역으로 옮기면서 자연도는 영종도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영종도 초입에는 객관이 있고, 그 곁에 태평루(太平樓)가 있어 김종수는 이곳에서
조망을 즐긴 후 용류도(龍流島)로 갔다. 영종도 서쪽에 있는 용류도는 본디 썰물 때면
영종도와 분리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용류도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영종도와
한 섬이나 마찬가지다. 용류도 물가에는 여기암(女妓巖)이라는 바위가 있다.
고려의 사신이 중국에 들어갈 때 이곳에서 기생과 이별하게 되자,
차마 마음을 가누지 못한 기생이 바위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사랑 이야기가 전해진다.
김종수는 공항 입구 쪽에 삼목도의 나루를 구경하였다. 삼목나루는 영종도와 개펄로
연결되어 있지만, 소를 타고 가자면 열 걸음에 아홉 번 넘어져 구십구포라 불리기도
하였다. 지금은 모두 단단한 땅으로 메워졌다.
김종수 일행은 영종도 서쪽 큰 바다로 나갔다. 그러다 바람과 안개로 밤새 표류하다가 겨우 월미도를 거쳐 인천으로 돌아왔다. 김종수는 산수유람에 벽(癖)이 있었기에,
비바람이 몰아치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배를 띄워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려 하였다.
심지어 배가 표류하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중국 강남으로 표류하여 천하의 장관을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였다. 물의 신 하백이 죽음도 불사하는 그의 여행벽을
비웃겠지만. 글쓴이 / 이종묵
*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 저서(역서)
- 해동강서시파연구, 태학사, 1995.
- 한국 한시의 전통과 문예미, 태학사, 2002.
- 누워서 노니는 산수, 태학사, 2002.
- 浮休子談論, 홍익출판사, 2002.
- 조선의 문화공간(1-4), 휴머니스트, 2006.
- 우리 한시를 읽는다, 돌베개,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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