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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1168~1241) 선생이 어느 날 밖에서 돌아와 보니, 아들이 집안에 흙을 파고 무덤 모양의 집을 만들어 놓았더랍니다. 만든 이유를 묻자, “훈훈하여 겨울에 화초나 과일을 저장하기에 좋고, 또 길쌈하는 부인네들의 손이 얼어터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하였다는군요. 아들의 참신하고도 실용적인 발상을 칭찬할 수도 있으련만, 이규보 선생은 오히려 버럭 화를 내면서 그 흙집을 당장 뜯어내라고 야단을 칩니다.
“길쌈이란 것도 제 시기가 있는 법인데, 하필 겨울에 해야 한단 말이냐. 또한 봄에 피었다가 겨울에 시드는 것은 초목의 정상적인 본성인데, 만일 이와 반대가 된다면 이것은 철을 어긴 물건이다. 철을 어긴 물건을 길러서 제때가 아닐 때의 구경거리로 삼는 것은 하늘의 권한[天權]을 빼앗는 것이다.”
에어컨과 히터로 더위와 추위를 잊고, 영농 기술의 개발로 사시사철 싱싱한(?) 과일이며 채소를 먹을 수 있게 된 요즘 사람들의 관점에서 볼 때, 이규보 선생의 이 말씀은 얼핏 케케묵은 옛날식의 낡은 사고라고 치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요즘같이 ‘지구온난화’니 ‘환경의 역습’이니 해서 기상이변의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시대에, 선생의 이른바 ‘하늘의 권한’이란 말 속에는 뭔가 깊은 뜻이 들어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더우면 땀 흘리고 추우면 벌벌 떨면서 살던 시절, 사계절의 변화를 몸으로 느끼고, 철따라 나오는 과일과 채소를 보며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던 옛날 사람들의 삶이 어쩌면 자연의 이치에 맞게 사는 방법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사람들 중에 철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도 혹시 제 철이 아닌 음식을 먹고 더위와 추위를 모르면서 살기 때문은 아닐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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